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이 때, 수보리는 이 경전의 설함을 듣고, 이치를 깊게 깨달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깊고 심오한 경전은 제가 옛날부터 얻은 혜안으로도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冶父]好笑 當面諱了
좋으면 웃어야 하는데 얼굴표정을 숨겼도다.
〈보충설명〉 금강경의 깊은 뜻을 이해했으면 기뻐서 웃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얼굴을 마주보며 수보리 존자는 웃음 대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야보 스님은 얼굴표정을 숨겼다는 格外句를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이 진행되는 동안 수보리는 금강경의 깊은 이치에 감화되어 마음속으로 법희선열에 흠뻑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감회가 벅차올라 수보리는 웃음을 넘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自少來來慣遠方 幾回衡岳渡瀟湘 一朝踏着家鄕路 始覺途中日月長
어릴 적부터 내내 객지 생활에 익숙하니, 얼마나 많이 형산(衡山)·악산(岳山)을 돌아다니고 소상강을 건넜던가. 어느 날 아침에 진리의 고향에 발을 내딛고서야, 비로소 긴 세월동안 길에서 시간만 허비했음을 깨달았도다.
〈보충설명〉 우리의 내면에 행복의 보배가 있지만 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밖에서만 행복을 찾다가 금강경 진리를 듣고서야 그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 說名實相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하면 곧 진리의 실상을 내며, 이 사람이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고 하는 것도 곧 참된 의미의 실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 다만 실상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보충설명〉 수보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부처님의 뜻을 잘 알기 때문에 부처님과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일체의 모든 자취를 털어버리기 때문에, 실상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진리에 합당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상이라는 표현도 다만 여래께서 세속적으로 이름만 붙였을 뿐이라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冶父]山河大地 甚處 得來
산하대지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보충설명〉 실상이 아니라고(非相) 하니까 또 거기에 머물러 집착할까봐 야보 스님은 우리에게 일깨움을 남겨줍니다. 즉, “초월적인 진리 일변도의 말씀 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눈앞에 벌어진 삼라만상은 다 무엇이며 어느 곳에서 생긴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져서 우리로 하여금 實相에도 걸리지 않고 非相에도 걸리지 않는 묘유(妙有)의 살림살이를 챙기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遠觀山有色 近聽水無聲 春去花猶在 人來鳥不驚 頭頭皆顯露 物物體元平 如何言不會 祗爲太分明
멀리서 보면 산에 색깔이 있는데, 가까이 들으려니 물소리가 없도다. 봄은 갔어도 꽃은 남아 있건만, 사람이 접근해도 새가 놀라지 않도다. 하나하나 모두가 실상을 드러내고, 물물의 본체는 원래가 평등한데, 어찌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로다.
〈보충설명1〉 산과 폭포가 그려져 있는 동양화를 끌어내어, 있는 가운데 없기도 하고 또 없는 가운데에 있기도 한, 實相과 非相의 이치를 잘 관찰하도록 제시해주는 야보 스님의 禪詩입니다. 화폭의 山水는 實相의 그림자이지만 그 가운데에서 實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산수화를 그려놓고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화폭 안의 폭포에서 물소리도 들리고 새소리도 들리는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폭포에서 물소리가 나지 않고 새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정관념이 사라져서 평등한 진리의 안목으로는 산수화에서 실상의 사계절을 음미해 볼 수 있습니다. 봄은 이미 사라졌지만 봄꽃이 멀리 내뿜는 향기도 음미할 수 있고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폭포의 飛沫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보충설명2〉 절대평등의 입장에서 나투어진 두두물물은,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비분별, 능소, 고정관념 등이 떨어져 나간 텅 빈 진리가 분명히 나와 함께 있지만, 너무나 가까워서, 내가 나의 눈을 볼 수 없듯이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경전을 듣고, 믿어 알고 받들어 지송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겠으나~”
[冶父]若不得後語 前話也難圓
만일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앞의 말이 원만하기 어려웠을 것이로다.
〈보충설명〉 수보리가 후세사람들을 위한 뒷말을 잇지 않았다면, 수보리 자신의 수승한 경지만을 언급한 것으로 끝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원만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야보 스님의 이 말씀은 오히려 후세의 범부를 위해 뒷말을 이어 준 수보리가 더 돋보입니다.
難難難 如平地上靑天 易易易 似和衣一覺睡 行船盡在把梢人 誰道波濤從地起
어렵고도 어렵고 또 어렵기는 평평한 땅이 푸른 하늘 위에 있는 것 같고, 쉽고도 쉽고 또 쉽기는 옷 입은 채로 한 번 잠에서 깨는 것 같다. 배의 움직임은 삿대 쥔 사람에게 달려 있는데, 어느 누가 땅에서 파도가 인다고 말하겠는가?
〈보충설명1〉 우리의 마음은 무수한 세월동안 때가 많이 끼어서 금강경을 신해수지 한다지만 진리가 멀고 어려운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본래로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이어서 금강경 가르침에 충실하다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세생생 業으로 무장된 夢識에 의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옷을 이미 입고 있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無相, 無住의 바라밀행으로 꿈을 깨어야 합니다.
〈보충설명2〉 탁한 물이 가라앉으면 물이 맑아져서 밑바닥을 환하게 볼 수 있듯이 금강경 가르침이 훈습되어 업식(業識)이 가라앉으면 진리를 환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물결처럼 일어나는 우리의 업식은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물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친 물결의 업해(業海)를 헤치고 고요한 진리의 바다로 나아가려면 삿대를 바르게 운행하는 훌륭한 뱃사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만약 앞으로 올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있어서 이 경전을 듣고 믿어 알고 수지하면, 이 사람은 곧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입니다.”
[冶父]行住坐臥 着衣喫飯 更有甚事
행주좌와, 옷 입고 밥 먹는 것에 다시 더 무슨 일이 있으리오.
〈보충설명〉 ‘희유(希有)’라는 말이 어느 특별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 배어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일체의 것에 통하는 한 모습이기 때문에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 자체에 희유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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