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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소상팔경도 화첩 중 어촌낙조. 겸재 정선(1676~1759) 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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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貧似范丹 氣如項羽
가난하기는 범단과 같으나 그 기운은 항우 같도다.
〈보충설명1〉 무아(無我)라 하여 지식과 명예 등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면 가난해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 기운은 항우보다도 훨씬 더 뛰어납니다.
〈보충설명2〉 범단은 후한 때의 청빈한 고사(高師).
上無片瓦 下無卓錐 日往月來 不知是誰 噫
머리 위로는 기와 조각 하나도 올릴 공간이 없고, 발 밑으로는 송곳 꽂을 공간조차 없도다. 날이 가고 달이 가도록 알 수 없어라. 이런 살림살이 그 누가 알 것인가? 이잇-!
〈보충설명〉 ‘희(噫)’는 있는 바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면 머리 위로나 발 아래로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는데 ‘괜한 얘기 했구만’ 하면서 탄식하는 소리입니다.
杜詩 맛보기
秋興 八首中 第一首 - 杜甫
玉露凋傷楓樹林
巫山巫峽氣蕭森
옥 같은 이슬에 단풍 숲은 시들고,
무산 무협에 어린 기운 쓸쓸하네.
江間波浪兼天湧
塞上風雲接地陰
강 사이 물결은 하늘까지 오르고,
변방의 풍운은 땅에 내려 그늘 짓네.
叢菊兩開他日淚
孤舟一繫故園心
떨기 국화가 타향살이 눈물 속에 두 번이나 피었고,
외로운 배 한척은 고향 갈 마음으로 매었네.
寒衣處處催刀尺
白帝城高急暮砧
겨울옷은 여기저기 가위와 자로 손질하기 바쁘고,
백제성 높은 곳에 저무는 다듬이소리 분주하네.
〈보충설명〉 늦가을의 쓸쓸함은 나그네로 하여금 향수를 짙게 불러일으킵니다. 두보 자신도 두 차례의 가을을 맞았지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마음만 고향을 향해 묶어두고 있습니다.
전쟁에 끌려간 낭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꿰매고 다듬이로 손질하며 겨울옷을 준비하는 아낙의 손길이 바쁜데, 찬바람 속에서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마음은 얼마나 더 처절하겠습니까?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어떤 까닭에서인가? ‘여래’라는 것은 곧 모든 법을 집행하는 진리의 뜻이기 때문이니라.”
〈보충설명〉 무아(無我)란 뜻은 텅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아란 곧 여래, 진여, 진리의 뜻을 담고 있으며 삼라만상의 모습과 움직임을 집행하는 생명의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를 설하면서도, 어리석은 중생이 무아를 왜곡하여 단멸상(斷滅相)을 일으킬까봐, 삼라만상의 운행과 지탱에 근본이 되는 것이 무아임을 다시 이 대목에서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六祖]言諸法如義者 諸法 卽是色聲香味觸法 於此六塵中 善能分別 而本體湛然 不染不着 曾無變異 如空不動 圓通瑩徹 歷劫常存 是名諸法如義 菩薩瓔珞經 云毁譽不動 是如來行 入佛境界經 云諸欲不染故 敬禮無所觀
‘제법여의’라고 설하신 까닭은, 모든 법이 곧 모습·소리·향기·맛·감촉·법이기 때문이다. 이 육진(六塵)을 잘 분별하면 본체의 본모습이 청정하고, 물들거나 집착도 없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 속성은 마치 허공의 부동함과 같고, 원만통철하고 영롱하여 억겁을 지나도 항상 존재하므로 ‘제법여의’라 이름 붙인 것이다. 보살영락경에는 ‘칭찬과 헐뜯음에 전혀 동요가 없는 것이 여래행이다’ 라고 했으며, 입불경계경에는 ‘모든 욕망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따로 볼 바가 없는 분(부처님)께 예배를 올린다’ 고 하였다.
[冶父] 쫜 住住 動着則三十棒
멈추고 멈추어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서른 방망이를 맞으리라.
〈보충설명1〉 야보스님은 구경무아의 상태를 일원상으로 표시해서 우리에게 그 뜻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일원상(一圓相)은 가장 원만하고 청정하여 아무 것도 붙지 않는 원통무애의 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제법여의’란 말을 듣고 ‘진리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내면 그 또한 생각에 걸려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쉬고 쉬며, 멈추고 멈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른 방망이를 맞더라도 진리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보충설명2〉 동착즉삼십봉(動着則三十棒)에서의 착(着)은 동(動)을 강조하는 것이며 ‘행여--’의 뜻입니다.
上是天兮下是地 男是男兮女是女 牧童撞着牧牛兒 大家齊唱 是何曲調 萬年歡
위는 하늘이요 아래는 땅이며,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도다. 소치는 목동과 소를 방목하는 목우아가 서로 만나서 둘이 함께 ‘라라라---’ 노래하니, 이 무슨 곡조인가? 만년가로다.
〈보충설명1〉 야보스님이 앞에서 ‘움직이면 서른 방망이를 친다’ 고 한 것은 진리 그 당처의 입장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입장에서 보면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이 있습니다.
이렇게 현실에 나타난 여러 가지 모습들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본래 텅텅 빈 한 모습의 진리를 놓치지 않으면서 진리답게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며 굴러가는 현실의 이치도 시로써 언급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사선 경계의 도리입니다.
〈보충설명2〉 목동은 소의 고삐를 잡고서 소를 기르는 것, 목우는 소를 방목해서 기르는 것입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