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밀린다판하(Milindapanha)

Ⅰ. 미린다팡하 해제 - 4. 인도사상(史上)의 밀린다왕 5. 왕자론과 현자론

通達無我法者 2008. 10. 20. 11:21

 

 

      Ⅰ. 미린다팡하 해제
      
           4. 인도사상(史上)의 밀린다왕
      
        인도에 그리이스인이 침입한 시초는 알렉산드로 대왕의 인도 침략(서기전 327 년)이다. 그 뒤, 찬드라 굽타에 의해 마우리야 왕조가 건설되므로, 그리이스인의 세력이 일시 후퇴했다. 마우리야 왕조에는 아쇼카아 왕이 나와 전 인도를 거의 통일하게 되었다. 이 마우리야 왕조의 세력권(勢力圈)에 접하여 그리이스 인의 세력이 존속했을 것은 물론이다. 당시 인도보다 서방 여러 지역은 시리아 세레우코스 왕의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서기전 3 세기 반 경에 중요한 두 지방, 즉 박트리아와 파르티아가 세레우코스제국(帝國)에서 이탈하여 거의 같은 때 독립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 중 밀린다 왕에 있어 중요한 것은 파르티아 국보다 그리이스계(系) 박트리아(중국에서는 大夏라 부름)였다. 밀린다 왕은 이 박트리아 계통의 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린다 왕 이 서북 인도를 지배한 것은, 서기전 50 년 경이므로, 그리이스 세력이 인도에 들어가, 특히 그리이스 문화가 인도에 정착한 중간 시기에 해당된 셈이다. 이 밀린다왕문경은 밀린다 왕과 학승 나아가세나의 대론이지만, 적어도 현행 파알리어 본으로 보면, 그 전부가 다 두 사람의 문답이라 할 수는 없다. 이는 불교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트렝크너가 교정(校訂) 출판한 트렝크너 본에 의하면, 서장(序章) 부분을 제외한 89 페이지 까지가 고층(古層)이고, 나머지 부분은 뒷날 증광(增廣)부가된 것이라고 한다. 이 번역에서 제 2 편 제 1 장 제2 까지가 고층 부분이다. 밀린다 왕은 인도에 알려진 그리이스 왕 40 여명 중, 인도 문헌에 이름이 전해 온 유일한 그리이스계 왕이다. 그것은 현재 비문과 밀린다 왕 시대에 사용된 화폐, 또는 밀린다 왕과 나아가세나 장로의 대론서 등이 현존해 있으므로, 밀린다 왕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말해도 확실하며 그 업적도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메난드로스왕의 왕조는, 다른 그리이스계 나라들처럼 대개 그리이스인이 고관이고 관료였다. 그리고 크샤트리야나 바라문이자 자산자(資産者) 계급 사람들은 그 하위에 있었다. 밀린다왕문경 에 나와 있는 네 대신의 이름도 그리이스 이름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아무튼 그리이스왕을 보좌하는 대신,각료(閣僚)들은 그리이스인이었으며, 그리이스의 문화,관습,신앙 같은 것이 그리이스계 나라안에서 통용되었을 것도 당연하다.
      5. 왕자론과 현자론
        밀린다 왕은 나아가세나 장로와 대론함에 있어, 현자론에 근거하는 입장을 취했다. 거기에는 불교가 그리이스인에게도 개방된 종교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도는 계급 제도를 묵수(墨守)하는 나라이므로, 외국인은 모두 오랑캐(夷狄)로 취급되고, 아우트 캐스트에 속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현대까지도 그렇다. 따라서 외국인인 그리이스인은 종교나 종교관이 다르다 해서, 인도인으로부터 하천(下賤)계급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오랑캐로 취급받는 그리이스인이 인도의 사회 문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바라문교 이외의 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에 불교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종교로 등장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불교는 교조(敎祖) 고타마 붓다 이래 계급 제도를 배제할 것을 말했다. 사성계급(四姓階級)을 타파하고, 모든 사람이 혈통이나 출신에 의해 존비(尊卑)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이 평등하며, 각자의 행위가 기준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이 그리이스인에게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환영 받았으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이스뿐 아니라 그 뒤 인도에 침입한 여러 민족은 대개 불교를 보호하고 또는 불교 신자가 된 예가 많다. 밀린다 왕과 나아가세나 장로의 대론 근거를 고찰함에 있어,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종류를 고려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메난드로스 왕은 제왕의 덕과 위엄을 가지고 통치에 임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스스로 정의를 수호하는 왕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푸르타르크가 쓴 그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정의의 통치자였고,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대단히 두터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유골을 여러 곳에서 나누어가고, 또 그를 기념하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 밀린다 왕이 제왕의 위엄을 가지고 통치에 임했다 함은, 밀린다왕문경 첫 편에 그것을 입증하는 문답이 있다(대화를 성립시키는 기반). "대왕이여, 만일 그러나 현자의 논으로 대론한다면,나는 그대와 대론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왕자의 논으로 대론한다면 나는 그대와 대론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있다. 결국, 정치적 압력이나 제왕의 위엄을 가지고 문답한다면, 자기는 대론에 응하지 않겠다고, 나아가세나 장로는 거절한다. 여기서 장로는 언론 자유와, 진리 탐구의 기치를 들어 양자가 대등하게 대론하는 현자의 논을 제시하고, 이 현자의 논에 대론의 기반이 있다고 못박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