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밀린다판하(Milindapanha)

Ⅰ. 미린다팡하 해제 - 7. 문헌 번역 연구등 8. 본서의 구성

通達無我法者 2008. 10. 20. 11:25

 

 

      Ⅰ. 미린다팡하 해제
      
           7. 문헌 번역 연구등..
      
        앞에 상세하게 해설했지만, 여기서 다시 그 요점과 동시에 한 두 가지 자료를 추가해 말하고자 한다. 출판본으로는, 첫째 트렝크너의 비판적 교정 출판본(로마자로 바꿔 써 출판했다)이 있다. 이것은 1880년에 출판되었으며 트렝크너가 얼마나 우수한 학자였는지 알 수 있다. 그 뒤 두 번 쯤 리프린트되었다. 다음, 샴판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샴본이 있다. 이것은 Milindapa이 시일론에서는 Milindapa 증광(增廣)되어 있고 어구의 착간(錯簡)이 보인다. 번역본으로는, 시일론의 신하리이스가 번역한 것이 있다. 이것은 히이나티 쿤불레에 의해 1877 년에 출판되었다. 또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읽혀 온 영역본으로, T.W.Rhys Davids 것이 두권 있다. 여기서는 이 영역본을 대본을 하였다. 그 밖에 완역된 것은 아니라도 니야아나티로카, 옷토 슈레다아 등의 독역(獨譯), 휘노의 불역(佛譯)등이 있고, 훌륭한 연구도 나와 있다. 그런데 리스 데이비스의 영역이 나온 뒤 그것을 능가 한다는 영역이 간행되었다. King Milinda's Questionns,2 Vols. tr. by Miss I.B.Horner, SBB. No. 22, 23, 1963∼64. 역자는 호너 여사(女史)로, 본문중 파알리어성전의 인용을 정사(精査)하고 있는 점에서는 리스 데이비스의 것보다 우수하다. 일본에서는 야마우에(山上曹源)역 국역 미란타왕문경(國譯彌蘭陀王問經)이 국역 대장경 (國譯大藏經) 속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리스 데이비스의 영역을 일본말로 옮겼기 때문에 원전의 번역은 아니다. 또, 가내모리(金森西俊)역 미란왕문경 (彌蘭王問經) 두 권이 남전대장경 (南傳大藏經)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종전 여러 번역과 달리 샴본을 대본(底本)으로 하여 역출(譯出)했고, 또 트렝크너본과도 비교하어, 주(註)에 다 그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역본의 상단(上段)에는 샴본의 페이지수를, 하단에는 트렝크너본의 페이지수를 표시하고 있으므로, 그 두 번역본을 대조해 보기에 편리하다. 또 동양문고(東洋文庫)판 밀린다와의 물음 이란 일본역이 있는데, 이것은 가내무라씨와는 반대로 트렝크너본을 대본으로 하고 샴본을 참고하는 방법을 썼다. 밀린다 팡하아 에는 주석서가 없다고 했는데, 최근에 발견되었다. 그것은 캄보디아에 전해 온 밀린다 티이카아 란 책이다. 자이니 교수가 1961 년에 출판했다. (Milinda-Tik PTS., 1961.) 트렝크너본 89 페이지까지 이 경전의 고층(古層)인데, 이 고층에 해당되는 부분이 한역(漢譯)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다. (서화 부분은 파알리어본과 한역이 다르다) 이것에 대한 일본역과 해설이 호시가다(干瀉龍群)씨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 논집부(論集部) 에 수록되어 있다. 나선비구경 까지 포함해서, 밀린다왕문경 에 대한 일본 학자의 연구로는, 나까무라(中村元), 와스지, 미쓰노(水野弘元)씨의 것이 있다.
      8. 본서의 구성
        트렝크너본에서 본서의 구성을 보기로 하자. 처음에, 서장(序章) 부분이 있다. (트렝크너본 1 페이지에서 25 페이지까지) 이 서장 부분은 두 사람의 전생이야기 곧 자아타카에 해당한다. 밀린다 왕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자아타카와 나아가세나 장로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자아타카를 서술했다. 파알리어본의 자아타카는 밀린다 왕이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텍스트 제명(題名)이 밀린다 팡하아 즉 밀린다 왕의 물음이라 되었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한역 나선비구경은 나아가세나(那先)의 전생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어느 것이든 그 뒤에 오는 고층 부분이 생긴 뒤 부가되었다. 다음, 본론에 들어간다. 나아가세나와 밀린다의 대론이 시작되는 셈이다. 25 페이지에서 64 페이지까지가 제 1 회의 대론 이고, 65 페이지에서 89 페이지까지가 제 2 회의 대론 이다. 이 제 1, 제 2 회 대론 부분이 고층이오, 또 나선비구경 과 대응하는 부분이다. 90 페이지에서 326 페이지까지가 난문 (難問) 부분이다. 난문이란 모순문(矛盾問)이라 해도 좋은 것으로, 이 번역에서 양도론법(兩刀論法)의 질문을 말한다. 329 페이지에서 362 페이지까지가 추리에 관한 물음 부분이오, 363 페이지에서 419 페이지까지가 비유에 관한 물음 이다. (이 번역에서는 아라한의 경지를 증득하려는 비구가 알아야 할 105 개 요목만을 드는데 그쳤다). 마지막으로 419 페이지에서 420 페이지까지 겨우 두 페이지가 맺는 말(結語)로, 밀린다 왕이 아라한의 경지를 증득했다고 끝맺었다. 제 1 회, 제 2 회의 대론은 고층에 속한 것으로, 우리들의 흥미를 돋군다. 그러나, 거기에 이어지는 난문, 즉 양도론법의 질문도 상좌부(上座部) 불교 교단을 감도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점에서, 귀중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양도론법의 질문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사항을 가져와 사실의 모순을 찌른 셈이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는데, 또 딴 곳에서는 그와 전혀 모순되는 것을 말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고 대든다. 이를테면, 부처님에게 드리는 공양(供養)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는 대론에 있어, 밀린다 왕은 물었다. 나아가세나존자여, 다른 학파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일 부처님이 공양을 받는다면 부처님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 고. 즉, 부처님이 살아 있다면 음식공양을 받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죽고 없다면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된다. 또, 만일 부처님이 공양을 받는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부처님이 죽은지 몇 백년이 지난 뒤의 것이므로, 부처님은 이미 죽고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 이어 질문을 한 이유가 들어 있다. 즉, 왜냐하면 부처님은 세상과 얽혀 있고 세상 속에 있으며, 세상에서 세상과 함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고 결과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또 한편 만일 부처님이 완전히 죽어 버렸다면 부처님은 세상과 얽혀 있지 않고 모든 존재로부터 이탈해 있으므로 그에 대한 공양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히 죽어버린 사람은 아무 것도 받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받지 않는 분(부처님)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효하고 결과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고. 이 양도론법의 질문에 대하여, 나아가세나 장로는 부처님이 입멸(入滅)한 뒤 불교도가 왜 부처님이 사리탑(舍利塔)을 쌓고 부처님을 공양 예배하는가 하는 의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즉, 모든 신(天)과 사람들은 완전히 죽어 이미 아무런 공양도 받지 않는 여래(如來)의 유골보(遺骨寶)에 의거하고, 또 지혜보(智慧寶)를 대상으로 하여 올바른 행위를 할 때, 세 가지 경계(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나며, 신으로 태어나며, 아라한으로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는 것 중의 한 가지 경계)를 얻습니다. 대왕이여, 이런 이유로도, 여래는 완전히 죽어 이미 공양을 받지 않지만, 부처님에 대하여 행하는 공양은 무효하지 않으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불교가 우상(偶像) 숭배가 아니라는 이유의 하나가 나아나세나 장로에 의해 분명하게 해답되고 있다. 장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세존께서 완전히 사멸(死滅)하시므로, 세 가지 경계를 얻는 가능성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생존의 고뇌에 싸인 사람들은 유골보와 교법(敎法)과 규율(規律)과 교계(敎戒)에 의지하여 세 가지 경계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양도론법의 질문이 성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한 밀린다 왕은 불교교리나 대장경(大藏經)에 정통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장경 속에서 서로 모순된 데를 끌어내 나아가세나 학승에게 날카로운 질문의 화살을 쏘아댄 셈이므로, 이 그리이스인 밀린다 왕은 상당한 학자가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이런 점으로 미루어, 난문 부분 이하는 후인들이 증광 부과해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성전의 원형이 성립된 것은 서기전 1 세기 내지 서기 후 1 세기이므로, 난문 속에 나오는 교단의 여러 사정이라던가 교리 해석등은 서기 전후의 것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 틀림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