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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40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0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내 것,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자아가 강하면

강한 만큼 괴롭습니다.

 

괴로울 때 괴로움을 없애려다 더 고통을 받는 자가 있고,

괴로워서 수행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힘이 강하면 괴로움을 없애려는 힘도 강합니다.

두 가지는 같은 힘입니다.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면 괴로움이 더 커집니다.

괴로움을 없애려고 해서는 결코 괴로움을 없앨 수 없습니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괴로움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고 알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괴롭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면 있던 괴로움은 사라지고 맙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우리는 부처님의 정법시대에 삽니다.

정법시대는 3가지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첫째,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빨리어 경전이 있는 시대입니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팔정도와 위빠사나 수행이 있는 시대입니다.

셋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을 성취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있는 시대입니다.

 

이와 같은 정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래에 올 부처를 기다리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과거에 혹세무민하는 시대에 너무나 참혹해서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미륵부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시대에 있는 부처도 섬기지 못하면서

미래에 올 부처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요원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미래에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자기 스스로가 바라밀 공덕을 쌓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에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도과를 성취하는 지혜의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는 청정과 함께 계발됩니다.

그래서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의 과정을 거쳐서 열반에 이릅니다.

이러한 과정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늦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가 거쳐 가야 하는 길입니다.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가 서로 맞물려 계발되는 과정을 차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때 청정은 첫째, 둘째로 하며, 지혜는 하나, 둘로 부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지계의 청정입니다.

둘째, 마음의 청정입니다.

하나,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셋째, 견해의 청정입니다.

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넷째,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입니다.

셋,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입니다.

넷, 생멸의 지혜입니다.

 

다섯째, 바른 길을 아는 청정입니다.

 

여섯째,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입니다.

다섯, 소멸의 지혜입니다.

여섯, 두려움에 대한 지혜입니다.

일곱, 고난의 지혜입니다.

여덟, 혐오감에 대한 지혜입니다.

아홉, 해탈을 원하는 지혜입니다.

열, 다시 살펴보는 지혜입니다.

열하나,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입니다.

열둘, 적응의 지혜입니다.

열셋, 성숙의 지혜입니다.

열넷, 도의 지혜입니다.

열다섯, 과의 지혜입니다.

 

일곱째, 지혜통찰의 청정입니다.

열여섯, 회광반조의 지혜입니다.

 

이상이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성자들이 가신 청정과 지혜의 단계입니다.

이때 어느 단계에서도 머물러서는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7가지 청정과 16단계의 지혜는 부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역대 모든 성자, 모든 아라한들이 가신 길을 부처님이 찾아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길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이 최고의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쳐야 되는 불가피한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부처님도 인간이십니다.

단지 최고의 법을 보아서 열반을 통해 해탈을 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우리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이 고귀한 가르침을 받아서 늘 함께해야 되겠습니다.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지혜에 빠지면 간교해집니다.

그래서 지혜가 난 다음에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아갈 수 있으며

간교해짐으로 인해 다시 무지에 빠지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렇게 많은 지혜의 과정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스스로 혼자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혼자서 이런 지혜의 단계를 아신 분이 부처님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외에는 이러한 길을 스스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 지혜의 단계를 거친다고 해서

이러한 제자들을 성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삼마삼붓다라고 불립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리석음이 있을 때는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어리석음이 없을 때는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지혜가 있을 때는 지혜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지혜가 있는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지혜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무지에 빠지거나 또는 간교해집니다.

 

이때 지혜가 계발된 상태이지만 아직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완전한 지혜가 나셨어도 항상 지혜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셔서

지혜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이상으로 선한 마음인 관용, 자애,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에는 관용, 자애, 지혜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한 마음인 관용, 자애, 지혜가 생기면 선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시, 지계, 수행이라는 3가지를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하다고 할 때는 막연하게 착한 것만을 말하지 않고

사실은 이런 행위가 뒤따라야 비로소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시, 지계, 수행이 따라야 합니다.

이때의 보시관용입니다.

선한 마음은 탐욕과 악한 의도가 없기 때문에 대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베푸는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자애가 지계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바로 수행입니다.

 

선한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3가지 실천 덕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보시(普施)를 해야 합니다.

 

보시는 남에게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베푸는 것이 아니고

그간에 내가 받은 많은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갚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베푼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받았으면 갚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단지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보시는 관용이 있는 마음에 의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관용과 보시는 같은 의미입니다.

 

보시는 바라밀 공덕의 첫째 항목입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제일 처음에 하는 덕목이 바로 보시입니다.

 

보시는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생각을 억제합니다.

그리고 오직 남을 위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서 두 가지의 기쁨을 줍니다.

 

보시를 하는 마음은 조건 없이 남을 도움으로써

스스로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누구나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남에게 헌신적인 보시를 함으로써 내면의 욕망이 제어됩니다.

그리고 보시를 하는 선한 마음이 도덕에 기초한 것이라서 고요함과 지혜가 옵니다.

이것은 한 가지의 행위로 두 가지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보시를 하는 마음은 보시를 받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병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고통 속에 빠진 사람이라는 등

누구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평등한 마음을 갖습니다.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보시는 받는 사람도

빚으로 생각하기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도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베풀어서 살도록 하고,

병들고 고통을 겪는 자를 정성스럽게 보살펴주고,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과 함께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청정하게 수행을 하는 자를 뒷바라지 하는 4가지 보시는

부처님께 직접 하는 보시나 다름이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보시를 할 때는 보시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먼저 보시를 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은 보시를 하기 전에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시를 하는 동안에도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시를 한 뒤에도 기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시작할 때도 좋아야 하고, 하는 중에도 좋아야 하고, 하고 나서도 좋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정한 보시를 해야 합니다.

 

다음에 보시를 받는 사람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보시를 받음으로 인해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보시를 받음으로 인해 성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보시를 받음으로 인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나 보시를 받는 사람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하면

그 보시의 공덕의 과보가 더욱 커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보시에는 4가지의 유형의 보시가 있습니다.

 

첫째, 보시를 베푸는 자의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 계행이 청정하지만 받는 사람이 계행의 청정이 없는 경우입니다.

 

둘째, 보시를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 계행이 청정하지 않지만 받는 사람이 계행이 청정한 보시입니다.

 

셋째, 보시를 베푸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나 청정하게 되지 않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모두 계행이 청정하지 않은 보시입니다.

 

넷째, 보시를 하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나 보시를 받는 사람이 모두 계행이 청정한 보시입니다.

 

이렇게 4가지 청정한 보시가 있는데 보시를 행하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가

모두 계행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보시의 과보가 달라집니다.

 

보시를 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고 보시물이 정당한 것일 때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고 그 보시물을 바르게 사용할 때

보시의 공덕이 더 커집니다.

 

일반적으로 보시를 행했으면 그것이 어떻게 쓰이건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선하게 쓰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지만

한번 보시를 했으면 그 쓰임새는 받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만약 좋은 곳에 쓰이면 더 좋겠지만 원하지 않는 곳에 쓰였어도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곳에 쓴 과보는 쓴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만약 보시를 하고 자기 뜻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반환을 요구하거나 화를 낸다면

이것은 자신의 공덕을 삭감하는 것이며

오히려 선한 보시로 인하여 불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보시를 했으면 그것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보시의 공덕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보시를 받는 상대에 따라서 공덕이 달라집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했다면 바람이 없는 만큼 그 공덕의 과보가 큽니다.

만약 바람이 있다면 있는 만큼 보시의 공덕이 반감됩니다.

이것은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것을 보시했을 때도

마음가짐에 따라서 과보는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보시는 단순한 보시에 그치지 않고

행하는 자와 받는 자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공덕의 과보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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