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3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0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불선업의 과보로 인해 현재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알아차린다고 해서

괴로움이 즉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선의 과보의 양만큼 그것에 필적할 만한 선과보가 필요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선과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선과보 중에서 통찰지혜의 과보는

모든 것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수행을 해서 만들어진 선과보의 통찰지혜가 생기면

불선업의 과보가 아무리 많아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지혜가 생기면 어떤 번뇌에도 걸리지 않아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그 지혜란,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이며

내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자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선심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나타나는 성냄의 힘은 매우 큽니다.

그러나 그 힘과 대적할 만한 더 큰 힘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고 숭고한 사랑이라서 자애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애가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어려움을 동정하는 연민의 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려는 숭고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동정심을 가진 마음은 꽃보다 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상대의 고통을 어루만져 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자애를 가질 때

남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애가 없으면 남의 고통에 연민의 정을 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남의 고통을 즐기거나 잘된 일이라고 환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의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남의 슬픔과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해 줄 때

그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기쁨입니다.

이때의 기쁨은 함께 기뻐하는 숭고한 마음입니다.

 

자애와 동정심이 생기면 다음에 남의 기쁨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의 기쁨을 함께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모두 경쟁적으로 살고 있으며, 누구나가 유신견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남의 성공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남의 기쁨에도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심을 제거해야 일어납니다.

 

이렇게 자애, 동정,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결합되면

다음에 더욱 숭고한 마음인 평정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평정을 평등이라고도 하는데 공평하게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 없이, 대상을 집착하거나 혐오하는 마음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지켜보는 균형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중도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자애로부터 시작된 마음이 사마타 수행에 의해서

사무량심이 완성되면 더 높은 선정을 체험합니다.

사무량심은 사마타 수행이라서 아직 통찰지혜가 나지 않은 단계입니다.

그래서 선정의 단계에 있는 숭고한 마음입니다.

 

자비희사의 4가지 무량한 마음이 완성되면

어떤 고난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평등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여덟 가지 세속적인 조건들 속에서도

평등심을 유지하여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익과 손실에서, 명예와 불명예에서, 칭찬과 비난에서, 고통과 행복에서

중도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계에서 앞으로 더 높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애경을 독송해보겠습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선행에 숙달된 사람으로서

평온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능력이 있고, 정직하고, 성품이 고결하고,

말씨가 상냥하고, 친절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만족할 줄 알아서 남에게 보시하기 쉽고, 분주하지 않으며,

간소하게 살고, 감각기관이 고요하고, 슬기롭고,

교만하지 않으며, 세속의 일에 탐욕이 없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책망 받을만한

아주 작은 잘못이라도 행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들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길거나 짧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미세하거나 거칠거나,

모두 예외 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이미 태어났거나 태어날 것이거나,

모두 예외 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누구이든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멸시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성냄이나 증오로써

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마치 어머니가 하나뿐인 외아들을 자신의 목숨처럼 보호하듯이

모든 존재들에게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걸림 없이, 증오나 적의가 없이,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위로, 아래로, 옆으로, 사방으로

가득 차도록 널리 닦아야 합니다.

 

서있을 때에도, 걸을 때에도,

앉아있을 때에도, 누워있을 때에도,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애를 닦아야 합니다.

 

그릇된 견해에 빠지지 않고,

계행을 지키고 통찰력을 갖추어,

감각적 욕망의 집착을 모두 버리니,

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상이 자애경이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와 같은 자애수행을 하면 어떤 공덕이 있는지 자애 공덕경을 독송해보겠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자애를 가까이 하고, 자애수행을 하며,

자애를 항상 지니고, 자애를 수레바퀴처럼 굴리며,

자애를 기본으로 삼아 몸에 익히며,

자애를 쌓아가고, 훌륭하게 성취하여,

자애수행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이에겐 어떤 공덕이 있는가요?

 

행복하게 잠들고 행복하게 일어나며,

잠잘 때 악몽을 꾸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다른 존재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또한 천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불과 독약, 재난의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쉽게 마음을 집중할 수 있으며,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고요합니다.

 

불안한 마음 없이 죽음을 맞으니,

비록 최상의 열반은 얻지 못해도

천상의 세계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성냄이 있을 때는 성냄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성냄이 없을 때는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자애가 있을 때는 자애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애가 있는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자애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성냄에 빠지거나 또는 이기심에 빠집니다.

 

이때의 자애는 지혜가 계발된 상태이지만

아직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애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면 자애로 인해 악한 의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셋째, 지혜(智慧)가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입니다.

 

불선심인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듯이

똑같이 선심인 지혜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혜는 ‘아는 마음’입니다.

아는 마음을 ‘앎’, 또는 ‘이해’라고도 합니다.

지혜의 반대는 무지입니다.

 

무지는 모르는 마음입니다.

지혜가 나면 어둠에서 밝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물의 자명한 이치를 깨닫습니다.

사물의 이치란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무지는 모르기 때문에 어둠이라서 대상의 성품을 모릅니다.

하지만 지혜는 환히 밝은 마음이라서 대상의 바른 성품을 봅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아

유신견이 사라지고 집착을 끊습니다.

그 결과로 해탈에 이릅니다.

그래서 지혜는 알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끊는 특성이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혜는 불교의 완성이자 구도자의 완성입니다.

수행의 모든 길은 지혜를 향해서 갑니다.

 

팔만 사천 법문도 모두 이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팔정도의 정견과 정사유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지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 집착이 끊어지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과정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원인을 만들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부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누구나 가기 어려운 길이라서 원하는 자만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선업의 공덕으로 지혜가 나야 합니다.

 

지혜가 나야 비로소 사는 것이 불만족이라는 것을 알아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지혜가 나서 수행을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나서 지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반드시 선업의 공덕으로 생깁니다.

지혜는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반드시 통찰지혜 수행인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얻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라고 하는데 시작은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청정한 계율이 지켜지면 다음 단계로 집중력이 생깁니다.

이때의 집중이 찰나집중입니다.

 

그런 뒤에 찰나집중의 힘으로 지혜를 얻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입니다.

이 계정혜를 팔정도(八正導), 또는 중도(中道)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어느 날 화들짝 전광석화처럼 한 번에 오지 않습니다.

무수한 시간을 거치고 오랜 노력에 의해서 차츰 단계적으로 계발됩니다.

물론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지혜는 사다함에서 아라한이 될 때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만

이것이 처음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 부처의 지혜를 얻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기수준의 지혜가 한순간에 일어나서 차츰 더욱 계발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혜는 일반적으로 3가지 과정을 거쳐서 성숙됩니다.

 

처음에는 듣거나 읽는 것으로 지혜의 초석을 다집니다.

첫 번째 지혜는 입으로 전해진 앎입니다.

이것을 문혜(聞慧)라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경전이 없었기 때문에 법문을 듣는 것으로 지혜에 입문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많이들은 사람을 유식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경전이 있어서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읽는 것을 통해서 불교에 입문을 합니다.

 

문혜는 처음에 지식을 얻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앎이라고 하거나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지혜는 생각으로 일어나는 앎입니다.

이것을 사혜(思慧)라고 합니다.

사혜는 생각하는 것, 사유하는 것으로 사변적인 것입니다.

 

이 수준에서는 아직 관념적인 것에 머뭅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 아는 단계가 아닌

오직 사유의 수준에서 대상을 봅니다.

 

두 번째 지혜의 단계가 서양의 사변적인 철학입니다.

서양의 철학은 사변적이고 관념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지혜가 없습니다.

물론 인도의 힌두교도 관념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열반을 성취하는 통찰지혜가 없습니다.

 

세 번째 지혜는 수행을 통해서 얻는 수승한 지혜입니다.

이것을 수혜(修慧)라고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여

최종적인 지혜인 삼법인(三法印)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혜를 통해서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고

다음에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고 다음에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뒤에

마지막에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수혜는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에 그 누구도 열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직 부처님이 출현하셨을 때만 열반에 이르는 문이 열립니다.

언젠가 알 수 없지만 말법시대가 오면 다시 열반에 이르는 문이 닫힙니다.

그리고 다음 부처님의 출현에 의해서만 다시 열반의 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법시대에 살고 있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것 중에서 부처님의 정법이 있는 시대에 태어나기가 어렵고,

정법을 만나기 어렵고, 정법수행을 하는 바른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