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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4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0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유구한 세월동안

단 한 가지의 진실이 있다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도 항상 하지 않고 변하며

인간의 생명도 항상 하지 않고 변합니다.

지구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며 인간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서 소멸합니다.

변한다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 밖에 없다면 무엇을 집착하겠습니까?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지혜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고통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원인이 되는 조건에 의해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변하는 과정에는 다른 어떤 힘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단지 자체의 원인과 결과로 진행될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보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에게 보시를 했는가에 따라서 공덕의 과보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성스러운 사람에게 보시를 했다면

성스럽지 못한 사람에게 한 보시의 공덕보다 훨씬 과보가 큽니다.

성스러운 사람은 그 보시물을 통해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덕이 증장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나쁜 사람에게 보시를 했다면

그가 그 보시로 인해 나쁜 짓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만큼의 공덕이 상쇄될 것입니다.

물론 나쁜 사람에게 한 보시도 그 공덕은 있습니다.

단지 그 공덕의 과보가 증장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시는 행한 대로 그 공덕이 따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짐승에게 보시를 하면 백배의 선과보를 받습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천배의 선과보를 받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십만 배의 선과보를 받습니다.

 

선정수행을 해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천억 배의 선과보를 받습니다.

 

수다원 도과를 성취한 수행자에게 보시를 하면 헤아릴 수 없는 큰 선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니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벽지불, 부처님께 보시를 하면

과연 얼마나 더 큰 선과보를 받겠습니까?

 

최고의 보시공덕은 아라한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을 응공(應供)이라고 합니다.

응공이란 말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해결했기 때문에 어떤 불선심도 없이

오직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마지막 남은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공덕으로 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시는 선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 중에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하는 보시는 가장 좋습니다.

수행자는 보시를 받아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보시의 공덕으로 그치지 않아 그 힘이 계속 증장됩니다.

 

예를 들어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렸을 때

수행자가 공양을 들면서 알아차리고 먹으면 수행의 공덕이 생깁니다.

그가 한 보시물로 상대가 수행을 해서 지혜가 생겼다면

당연히 그 공덕의 과보는 더 크게 돌아갑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 수자타가 올린 유미 죽을 드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이 유미 죽을 올린 수자타의 공덕은 그 무엇으로도 비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보시의 공덕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보시는 법보시와 재물보시가 있습니다.

이 중에 법보시의 가치가 더 뛰어납니다.

법보시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 아라한, 성자들의 훌륭한 말씀을 사람들이 듣고자 할 때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보시의 공덕입니다.

 

이러한 법보시를 함으로써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계행이 청정하지 못한 사람에게 계행이 청정하도록 하고,

인색한 사람에게는 베푸는 것의 공덕을 가르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바른 견해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되었거나 가장 훌륭한 바라밀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비구들이 탁발을 할 때 여러 가지의 보시물을 올리지만

그 중에 갈증을 해소하라고 물을 한잔씩 올리는 보시도 있습니다.

 

보시는 재물을 베푸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미소, 자애로운 눈길도 사실은 모두 보시에 속합니다.

 

수행자가 보시를 할 때는 먼저

‘지금 무슨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가?’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알아차려서 바라는 마음이 있다거나 과시를 하는 마음이 있다면

즉각 보시를 중단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보시의 공덕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선한 보시로 인해서 다른 나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금 무슨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가?” 하고 다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보시하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면

그 때는 아무 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순수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보시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보시에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보시에 개입을 해서 상대가 보시를 하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가까운 도반이 얼마를 보시하겠다고 말했을 때

무심히 왜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보시금액을 깍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보시공덕을 가로막는 것이라서 불선업이며

자기 자신이 인색하게 굴어서 불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예 남이 보시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질투심으로 인한 불선업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보시를 하는 문제로 상의했을 때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기쁜 마음으로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하라고 조언을 해주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남이 보시를 할 때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칭찬을 해주면

상대가 보시를 해서 받는 공덕을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가 있습니다.

보시는 재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는 것도 포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돈이 없어도 바라밀 공덕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남이 하는 보시에 동참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를 칭찬해 준다면

보시를 행한 자가 받는 바라밀 공덕의 과보를 똑같이 받습니다.

 

보시를 받을 때는 반드시 보시를 하는 사람의 입장을 배려해야 합니다.

계행이 청정하지 않은 보시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가령 자신이 싫어한다고 해서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이나 자기가 먹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싫다고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주는 자의 공덕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보시를 받은 뒤에 자기가 어떻게 사용하건

그것은 받은 이후에 자신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보시를 받지 않음으로써 남의 공덕을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입장만 내세운다면 이것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무심히 먹을 것을 주었을 때

‘나는 싫어‘라고 말하지 말고 그냥 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물어서 주는 것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비구들이 보시를 할 때는 반드시 각기 필요에 따른 의식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돈이나 먹는 것은 쟁반에 받쳐서 비구 앞에 놓고 비구가 손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손대지 않는 것이 비구의 계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용품일 경우에는 쟁반에 받쳐서 올리면 쟁반에 손을 대서 받는 의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이 보시의 공덕으로 도과를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축원을 해줍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축원을 합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주고받음이 분명하게 끝납니다.

그러면 보시를 행한 자나 보시를 받는 자가 서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에 보시를 한 것으로 인해서 생길 수 있는 잘못된 마음가짐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에서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서로 빚이 없습니다.

주는 자는 자신의 공덕을 쌓고, 받는 자는 받은 것을 잘 사용하여

보시를 한 자에게 더 큰 공덕이 돌아가도록 유익하게 사용합니다.

이것이 보시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를 했다고 해서

개인적인 특별한 친밀감을 나타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한 사람이 보시를 받은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에 보시를 했는데 상대가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불쾌해 하거나,

당연한 것처럼 받는다고 얹잖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보시를 했는데 다음에 만났을 때 말이 없거나 몰라준다고 섭섭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주고받음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받은 것을 지나치게 감사하게 여기면

다음에 다시 보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상대가 부담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주고받음에도 일정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만약 보시를 하고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 했다면 이는 오히려 불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보시는 선한 행위로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자신을 위한 가장 큰 복을 얻는 것이며 받는 사람에게도 복을 주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베풀 때의 마음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것이 주고받는 사람이 즉석에서 받는 공덕의 과보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해 가장 바람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베풀 때는 편견이 없이 베풀어야 하고, 좋고 나쁨을 가리지 말고 베풀어야 합니다.

이익을 바라고 베풀면 오히려 정신적, 물질적 손실이 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순수하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베푸는 마음이 선한 종자가 되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바라지 않을 때 더 큰 공덕의 선과보가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는 하는 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지지만

자기가 한 선과보와 선하지 못한 과보는 사라지지 않고 상속됩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그래서 선과보와 불선과보는 지금 이후에도 상속되고 죽은 뒤에도 상속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보시를 할 기회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시를 할 시간도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음에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베푸십시오.

 

순수한 마음으로 널리 베풀면 사람들의 칭찬이 따르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베푸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청정하여 하는 일이 잘 되고 행복하며

다음 생까지 이 행복이 상속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베풀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로 지계(持戒)가 있어야 합니다.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계율은 빨리어로 실라(siila)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본성, 습관, 도덕, 도덕적 의무, 도덕적 실천, 계(戒)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계율은 매우 자율적인 것이며 탄력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절대자로부터 계시된 것이 아니고,

인간이나 집단이나 간에 선한 삶의 목표를 위해서 합의에 의해 조성된 약속입니다. 계율은 선한 의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의 작용을 계율이라고 합니다.

 

또한 계율은 잘 막아서 보호하고, 범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계율은 무엇을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압적이기 보다는

나와 남의 행복을 지켜주는 울타리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의 의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율은 깨끗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율 안에 있을 때 상호신뢰하게 되고 그래서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지계는 선한 마음을 갖는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행위는 도덕적인 것이며 자애와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절제하는 것으로 정신적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을 훈련처럼 하지 않으면 계율주의자가 되어 오히려 계율에 함몰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피안으로 가는 수단으로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이 목적이 되면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배척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계율에 속박당합니다.

그러므로 계율은 훈련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계율은 강제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선택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가장 우선하는 근본입니다.

계율에 기초하지 않으면 고요함이 생기지 않아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수행의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