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생사는 무상한 것 43. 생사는 무상한 것 형경남(亨景南)이라는 자는 남창(南昌) 만씨(萬氏)집안 자손으로, 어려서 내복산(來福山) 단(端)스님에게 귀의하여 백장사(百丈寺) 여암 우(如菴愚)스님과 용상사(龍翔寺) 소(訴)스님의 회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선정원의 추천으로 향성사(香城寺)에서 개법(開法)하였다. 그 사찰은 ..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42. 대혜스님의 후예로 지조를 지키다 / 서소담(瑞少曇)스님 42. 대혜스님의 후예로 지조를 지키다 / 서소담(瑞少曇)스님 서소담(瑞少曇)은 민현(閩縣)의 사람이다. 강직과 절개로 자신을 지키며 명리를 하찮게 여겨 절의 살림을 모두 집사에게 맡겼다. 그가 거처하는 방은 언제나 조용했으며 혼자서 선송(禪誦)을 즐겼는데 그의 문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노..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41. 나호야록에 실린 염송에 붙이는 소견 41. 나호야록에 실린 염송에 붙이는 소견 “나호야록(羅湖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오거사(烏巨寺)의 설당(雪堂)스님이 정(淨)스님에게 서신을 보냈다. ”요사이 “선인전(禪人傳)”을 살펴보니 그대의 염송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 중에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무엇이 불전 안의 일입..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40. 흩어져 가는 선방 요사채 분위기 40. 흩어져 가는 선방 요사채 분위기 태정(泰定:1324~1327) 초에 선정원에서 가흥(嘉興) 본각사(本覺寺)의 영석 지(靈石芝)스님을 기용하여 정자사(淨慈寺)의 주지로 임명하였는데 스님은 당시 84세였으며 모든 이에게 고불(古佛)과 같은 추앙을 받았다. 나는 경산사에서 정자사까지 모셔다드리고 전례에 ..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39. 죽천(竹泉)스님의 대보름 상당법문 39. 죽천(竹泉)스님의 대보름 상당법문 영은사의 죽천(竹泉)스님은 인품이 꾸밈새가 없고 깨침이 온당했으며 법어가 정밀하였다. 정월 대보름에 상당법문을 하였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 눈발이 멈추면 맑은 봄을 보리로다 얼마나 많은 절에서 천 등에 불이 켜지나 하늘에는 둥실한 대보름달 고요한 밤 ..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38. 대원경으로 서로를 비춰보다 / 고정 조명(古鼎祖銘)스님과 구양규재(歐 38. 대원경으로 서로를 비춰보다 / 고정 조명(古鼎祖銘)스님과 구양규재(歐陽唯齋) 고정(古鼎祖銘)스님이 항주 중축사(中竺寺)의 주지로 있을 때였다. 구양규재(歐陽唯齋)는 복건성 안렴사(按廉使)로서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가는 길에 항주에 들러 고정스님을 찾아왔다. 정분어린 법담을 주고 받으..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37. 불법에 조예 깊은 사대부 / 왕문헌공(王文獻公) 37. 불법에 조예 깊은 사대부 / 왕문헌공(王文獻公) 전조(前朝:元) 천력(天曆) 원년(1328) 천하에서 글씨 잘 쓰는 승려와 유생을 불러들여 항주 정자사(淨慈寺)에 모두 모아놓고 금가루로 대장경을 쓰게 하였는데 왕문헌공(王文龜公)도 부름을 받고 참여하였다. 그는 반드시 대중 승려와 함께 식사를 하였..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36. 8식 가운데 남아있는 무명의 뿌리 36. 8식 가운데 남아있는 무명의 뿌리 강서의 절학 성(絶學誠)스님은 산사에 살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 회하의 일곱 제자는 참선을 함께 하기로 맹세를 하였다. 그 중에 가장 어리면서도 경지가 탁월한 사람이 있었다. 성스님이 그를 시험해 보기위하여 삼관(三關)화두를 들어보이자 그는 마치 북..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35. 전생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다 / 말산(末山)스님과 서응(瑞應)스님 35. 전생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다 / 말산(末山)스님과 서응(瑞應)스님 건령부(建寧府)에 한 승려가 있었는데 그의 법명은 말산(末山)이다. 후일 그의 일생을 점친 한 행의 시를 살펴보니 “한 그루의 나무를 잿마루 위에 옮겨심는다. [一木移來嶺上安]”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는 조물주가 그의 이름을 미..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
34. 썩지 않은 시체 34. 썩지 않은 시체 지순(至順) 경오(1330)년, 절서(浙西) 지방에 매년 흉년이 들어서 항주 고을에 굶어 죽은 자의 시체더미가 서로 뒤엉키자, 관리들은 마을의 우두머리에게 인부를 부려 육화탑(六和塔) 뒷산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매장하도록 하였다. 그 속에 한 노파의 시신이 있었는데 십여일이 .. 산암잡록(山艤雜錄) 2008.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