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한글본 은정희 역
Ⅰ. 종체(宗體)를 나타냄1) Ⅱ. 제명(題名)을 해석함 Ⅲ. 글의 뜻에 따라 나타냄 一. 귀경(歸敬)과 술의(述意) 온 시방(十方)에서 가장 수승한 업(業)과 변지(徧知)를 갖추시고, 색(色)이 걸림이 없이 자재(自在)하신 구세(救世)의 대비(大悲)하신 이와 및 저 신체상(身體相)의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바다와 한량없는 공덕을 갖춘 이의 여실한 수행 등에게 귀명(歸命)하옵나니,2)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을 제거하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위한 까닭이다.3) 二. 논(論)의 체(體)를 정립함 논하기를, 법이 대승의 신근(信根)을 잘 일으키므로, 이 때문에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4) 1. 인연분(因緣分) 설명함에 다섯 가지 구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5) 처음은 인연분을 설하다.6) 묻기를, “어떤 인연이 있어 이 논을 지었는가?” 대답하기를, “이 인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의 총상(總相)이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여의고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세속의 명리(名利)와 공경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의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틀리지 않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여 신심을 퇴전(退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는 선근이 미세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수행하여 익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섯째는 방편(方便)을 보여서 악업장(惡業障)을 없애서 그 마음을 잘 호위하고,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멀리 여의어 사악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는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수습함을 보이어 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기 위해서이다. 일곱째는 염불(念佛)에 전일(專一)하는 방편을 나타내어 부처님 앞에 왕생(往生)하여 반드시 절대로 신심을 퇴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논을 지은 것이다.”7) 묻기를, “경 가운데 이러한 법이 갖추어 있는데, 어찌하여 거듭 설명해야 하는가?” 답하기를, “경 가운데에도 이러한 법이 있긴 하나 중생의 근기와 행동이 같지 않으며, 받아서 이해하는 연(緣)도 다르다.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의 근기가 예리하고 설법하는 사람도 색(色)․심(心)의 업이 수승하여 원음(圓音)으로 한 번 연설하매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하므로 논을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래가 돌아가신 후에는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널리 듣고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이가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자심력(自心力)이 없어서 광론(廣論)에 의하여 이해하게 되는 사람도 있으며, 또한 어떤 중생은 다시 광론의 글이 많음을 번거롭게 여겨 마음으로 총지(總持)와 같이 글의 분량이 적으면서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런 것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한없는 뜻을 총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논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8) 2. 입의분(立義分) 이미 인연분(因緣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입의분(立義分)을 말할 것이다. 대승이란 총괄하여 설명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衆生心)을 말함이니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을 포괄하며,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의 진여상(眞如相)이 대승의 체를 보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의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이 대승 자체의 상(相)․용(用)을 잘 보이기 때문이다. 의(義)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체대(體大)니, 일체의 법은 진여로서 평등하여 증감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이 갖추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용대(用大)니,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인과(善因果)를 잘 내기 때문이다. 일체의 여러 부처가 본래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모두 이 법에 의거하여 여래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9) 3. 해석분(解釋分)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명하였으니 다음에는 해석분(解釋分)을 설명하겠다. 해석분에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현시정의(顯示正義)요, 둘째는 대치사집(對治邪執)이며, 셋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다.10) (1) 정의(正義)를 현시(顯示)함 ① 먼저 뜻을 풀이함 A.법장문(法章門)을 해석함 현시정의(顯示正義). 일심법(一心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니,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11) a.진여문(眞如門) 심진여(心眞如)란 바로 일법계(一法界)중의 대총상(大總相) 법문(法門)인 체(體)이니, 이른바 심성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으며 명자상(名字相)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 결국 평등하게 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일심(一心)일 뿐인 것이니, 그러므로 진여라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言說)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요, 다만 망념을 따른 것이어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12) 진여라 말한 것도 상(相)이 없으니 이는 언설(言說)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임을 이르는 것이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이기 때문이며, 또한 주장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13) 묻기를,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야 정관(正觀)에 들어가게 될 수 있는가?” 답하기를, “만약 일체의 법이 설명되기는 하나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되기는 하나 역시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안다면 이를 수순(隨順)이라고 하며, 만약 생각을 여읜다면 정관(正觀)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14) 다시 이 진여란 언설에 의하여 분별함에 있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필경에는 실체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 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具足)하고 있기 때문이다.15)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일체법의 차별되는 모양을 여읨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허망(虛妄)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自性)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유(有)․무(無)를 함께 갖춘 모양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같은 모양도 아니요 다른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요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고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일체의 중생이 망심(妄心)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16) 불공(不空)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空)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바로 이는 진심(眞心)이며, 이 진심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만족하기 때문에 불공(不空)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또한 취할만한 상(相)이 없으니, 망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함으로써만 상응하기 때문이다.17) b.생멸문(生滅門) 가.널리 풀이함 ㄱ)심생멸(心生滅)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하여 아라야식(阿藜耶識)이라고 하는 것이다.18) 이 식(識)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포괄하며, 일체법을 낼 수 있는 것이다.19)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20) * 각의(覺義) 각(覺)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니, 망념을 여읜 상(相)이란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본각의 뜻이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21) 또 심원(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심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닌 것이다.22) 이 뜻이 무엇인가? 범부 정도의 사람은 먼저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각(覺)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바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이상(異相)을 깨달아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이는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着相)을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주상(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이 없으니, 이는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한다. 보살지(菩薩地)가 다한 정도의 사람은 방편을 만족시켜서 일념(一念)이 상응하고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상(相)을 깨달아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으니, 이는 미세념(微細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볼 수 있다면 곧 불지(佛智)에 향함이 된다’고 말하였다.23)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 만한 초상(初相)이 없는 것이며, 그런데도 초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무념(無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염념이 상속하여 아직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망념이 없게 되면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니 무념(無念)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실로 시각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니, 왜냐하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각(覺)과 같기 때문이다.24) 또한 본각이 염(染)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의 상(相)을 내지만, 저 본각과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정상(智淨相)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이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화합식상(和合識相)을 깨뜨리고 상속심상(相續心相)을 없애어 법신을 현현(顯現)하여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모든 심식(心識)의 상이 다 무명이니, 무명의 상이 본각의 성질을 여의지 않아서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파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에 의하여 물결이 움직일 때, 물의 모양과 바람의 모양이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바람이 그쳐서 없어지면 움직이는 모양(곧 물결)은 곧 없어지나 물의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도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일 때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것이 곧 없어지나 지혜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란 것은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25) 다음에 각체상(覺體相 : 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이란 것은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으며, 이는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지라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니, 여실불공(如實不空)을 말한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되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아니하며,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아서 일심에 항상 머무르니, 이는 일체법이 곧 진실성이기 때문이며, 또 일체의 염법이 더럽힐 수 없으니 지체(智體)는 움직이지 아니하여 무루(無漏)를 구족하여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불공법이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서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법출리(法出離)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善根)을 닦도록 하여 (중생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기 때문이다.26) * 불각의(不覺義) 불각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념이 있게 된 것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치 방향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각(覺)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을 것이며,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의(名義)를 알아서 진각(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의 자상이라고 말할 만한 것도 없는 것이다.27) 다시 불각에 의하기 때문에 세 가지의 상이 생겨서 저 불각과 더불어 상응하여 여의지 않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업상이니, 불각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면 고통이 있게 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능견상(能見相)이니, 움직임에 의하기 때문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니, 움직이지 않는다면 볼 것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니, 능견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가 거짓되이 나타나는 것이니 견(見)을 여읜다면 경계가 없어질 것이다.28) 경계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의 상을 내는 것이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경계에 의하여 마음이 일어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음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에 의하기 때문에 그 고락을 내어서 각심(覺心)으로 망념을 일으켜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에 의하여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해서 고락에 주지(住持)하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잘못된 집착에 의하여 거짓된 명칭과 언설의 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名字)에 의하여 이름을 따라가면서 집착하여 여러 가지의 행동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아서 자재(自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29) 무명이 모든 염법을 내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왜냐하면 모든 염법은 다 불각상(不覺相)이기 때문이다.30) 다시 각과 불각이 두 가지의 상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동상(同相)이고, 둘째는 이상(異相)이다. 동상(同相)이라고 말한 것은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의 와기(瓦器)가 모두 똑같은 미진(微塵)의 성상(性相)인 것처럼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여러 가지 업환(業幻)도 다 똑같은 진여의 성상인 것이다. 이러므로 경 가운데 이 진여의 뜻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의 중생은 본래 열반․보리의 법에 상주하여 들어가 있는 것이니, 이는 닦을 수 있는 상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상이 아닌지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색상(色相)을 볼 만한 것이 없으되 색상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염법의 업환(業幻)에 따라 지은 것이지 지색불공(智色不空)의 성질은 아니니 지상(智相)은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상(異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의 와기(瓦器)가 각기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이 수염환(隨染幻)의 차별이며 성염환(性染幻)의 차별이기 때문이다.31) ㄴ)생멸인연(生滅因緣) 다음 생멸인연이라는 것은, 이른바 중생이 마음에 의하여 의와 의식이 전변하기 때문이다.32) 이 뜻이 무엇인가? 아라야식에 의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하니,33) 불각하여 일어나서 볼 수 있고 나타낼 수 있으며 경계를 취할 수 있어서, 망념을 일으켜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의(意)’라고 말하였다. 이 의는 다시 다섯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업식이라고 이름하니, 무명의 힘으로 불각하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니, 이를 말한 것이다. 둘째는 전식이라고 이름하니, 움직여진 마음에 의하여 능히 볼 수 있는 상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식이라고 이름하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를 나타냄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현식도 그러하여 그 오진(五塵)을 따라서 대상이 이르면 곧 나타내어서 앞뒤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임의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고 이름하니, 염법과 정법을 분별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속식이라고 이름하니, 망념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한량없는 기간의 선악의 업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또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게 하기 때문에 현재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고 미래의 일을 자신도 모르게 잘못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삼계(三界)는 거짓된 것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잘못 생각하여 생긴 것이어서 일체의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얻을 만한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망심에 의하여 머물러 있게 되니, 이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가운데의 형상과 같아서 얻을 만한 실체가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34) 다음에 의식이라고 말한 것은 곧 이 상속식이 모든 범부의 집착함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아와 아소를 계탁하여 여러 가지 망집(妄執)으로 일에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을 분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 :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이름하니, 이 식이 견애번뇌(見愛煩惱)의 증장되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다.35)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일어난 식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는 보살이 처음의 정신(正信)에서 발심하고 관찰함으로부터 저 법신(法身)을 증득한다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만이 끝까지 다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이 무명에 의하여 물들게 되어 그 염심이 있는 것이니, 비록 염심이 있으나 항상 변하지 아니하는지라 그러므로 이러한 뜻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36) 이른바 심성(心性)이 항상 망념이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라 이름하며,37) 하나의 법계(法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아니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하는 것이다.38) 염심이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二乘)의 해탈한 이와 신상응지(信相應地)의 사람에 의하여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에 의하여 방편(方便)을 수학(修學)하여 점점 버려서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서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셋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하여 점점 여의며 이에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넷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에 의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진지(菩薩盡地)에 의하여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서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39) 일법계(一法界)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치단함을 배우고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되어야 마침내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40) 상응의(相應義)라 한 것은 심(心)과 염법(染法)이 달라서 염정에 의하여 차별하매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음을 말하기 때문이며, 불상응의(不相應義)란 곧 심(心)과 불각이 항상 별다름이 없어서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41) 또 염심(染心)의 뜻이란 번뇌애(煩惱碍)라 이름하는 것이니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막기 때문이요, 무명의 뜻이란 지애(智碍)라 이름하는 것이니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막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염심에 의하여 볼 수 있으며 나타낼 수 있으며 잘못 경계를 집착하여 평등성을 어기기 때문이며, 일체법(一切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상이 없으나 무명불각이 망령되이 법과 어긋나기 때문에 세간의 모든 경계에 수순(隨順)하는 여러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42) ㄷ)생멸상(生滅相) 다시 생멸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추(麤)니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細)니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추 중의 추는 범부의 경계요, 추 중의 세와 세 중의 추는 보살의 경계요, 세 중의 세는 부처의 경계이다.43) 이 두 가지 생멸이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며 연(緣)에 의하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의 뜻이기 때문이고, 연에 의한다는 것은 잘못 경계를 짓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이 멸한다면 연이 멸하는 것이니, 인이 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멸하고 연이 멸하기 때문에 상응심(相應心)이 멸하는 것이다. 묻기를, “만약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만약 상속한다면 어떻게 마침내 멸해 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멸한다는 것은 오직 심상(心相)만 멸하는 것이요 심체(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람이 바닷물에 의해서 동상(動相 : 파도)을 만드는 것이니, 만약 바닷물이 없어지면 풍상(風相)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지마는 바닷물이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풍상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바람이 멸하기 때문에 동상(動相)이 따라서 멸하지만 바닷물이 멸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무명도 또한 그러하여 심체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니, 만약 심체가 멸하면 중생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지만 심체가 멸하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치(癡 : 무명)가 멸하기 때문에 심상이 따라서 멸하지만 심지(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44) 나.훈습론(熏習論) 다시 네 가지 법의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염법과 정법이 일어나 단절하지 않는 것이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정법(淨法)이니 진여라 이름하며, 둘째는 일체의 염인(染因)이니 무명이라 이름하며, 셋째는 망심(妄心)이니 업식이라 이름하며, 넷째는 망경계(妄境界)니 이른바 육진(六塵)이다.45) 훈습의 뜻이란 세간의 의복이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마는 만약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면 그 때문에 곧 향기가 있는 것과 같이, 이도 또한 이러하여 진여정법에는 실로 염(染)이 없지만 다만 무명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곧 염상(染相)이 있으며, 무명염법에는 실로 정업(淨業)이 없으나 다만 진여로 훈습하기 때문에 정용(淨用)이 있는 것이다.46) ㄱ)염법(染法) 훈습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을 일으켜 단절되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무명염법의 인(因)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며, 훈습하기 때문에 곧 망심이 있게 된다. 망심이 있어서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달(了達)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하여 망념이 일어나 망경계를 나타낸다. 망경계의 염법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곧 망심을 훈습하여 그로 하여금 염착(念着)케 하여 여러 가지 없을 지어서 일체의 신심(身心)등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 망경계 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념훈습(增長念熏習)이며 둘째는 증장취훈습(增長取熏習)이다.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熏習)이니, 아라한(阿羅漢)과 별지불(辟支佛)과 일체 보살의 생멸고(生滅苦)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이니, 범부의 업계고(業繫苦)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명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훈습이니, 업식을 성취할 수 있는 뜻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熏習)이니, 분별사식을 성취할 수 있는 뜻이기 때문이다.47) ㄴ)정법(淨法) 훈습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을 일으켜 단절시키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이니, 이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며 훈습하는 인연의 힘에 의하여 곧 망심(妄心)으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믿어서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일 뿐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이리하여 앞의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隨順行)을 일으켜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잘못 생각하지도 아니하며, 내지 오랫동안 훈습한 힘 때문에 무명이 곧 멸하게 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하기 때문에 심상(心相)이 다 없어지니, 이를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이룬다고 말한다.48)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인(二乘人)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함에 의하여 힘이 닿는 대로 점차로 무상도(無上道)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용맹(發心勇猛 : 마음을 발함이 용맹함)하여 속히 열반에 나아감을 말하기 때문이다.49) 진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며, 둘째는 용훈습(用熏習)이다. 자체상훈습이란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부사의업(不思議業)을 갖추며 경계성(境界性)을 짓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뜻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훈습의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묻기를, “만일 이러한 뜻과 같다면 모든 중생에게 모두 진여가 있어서 똑같이 훈습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믿음이 없기도 하여 한없는 전후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모두 동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아서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답하기를, “진여는 본래 하나이지만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차별되어 후박(厚薄)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애염번뇌(我見愛染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일체의 번뇌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어서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 것이며, 오직 여래만이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불법에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는 것이니, 인연이 구족하여야 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무 중의 화성(火性)이 불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못하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정인(正因)의 훈습하는 힘이 있으나 만약 모든 부처, 보살, 선지식(善知識)등을 만나 그들로 연(緣)을 삼지 못한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외연(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으로 인(因)의 정법(淨法)이 아직 훈습의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또한 구경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인연이 구족한 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보살 등의 자비와 원호(願護)함을 받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히며,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의 보여 주고 가르쳐 주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함을 만나 차츰 일을 이루어 나아가 열반의 도에 향할 수 있는 것이다.”50) 용훈습(用熏習)이란 곧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이니, 이러한 외연에 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대략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연(平等緣)이다. 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부처와 보살 등에 의하여 처음 발의(發意)하여 비로소 구도(求道)할 때로부터 부처가 되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서 혹은 부처를 보기도 하고 혹은 생략하기도 함에 있어, 어떤 경우는 권속(眷屬)․부모․제친(諸親)이 되며, 어떤 경우는 급사(給使)가 되며, 어떤 경우는 지우(知友)가 되며, 어떤 경우는 원가(怨家)가 되며, 어떤 경우는 사섭(四攝)을 일으키며, 내지 일체의 짓는 한량없는 행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니 이는 대비(大悲)로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혹은 보거나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빨리 도탈(度脫)을 얻기 때문이고,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도탈을 얻기 때문이다. 이 근원(近遠)의 두 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이다. ‘평등연(平等緣)’이란 일체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 중생을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동체지력(同體智力)으로써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응하여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중생이 삼매(三昧)에 의하여야 평등하게 모든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51) 이 체용(體用)의 훈습을 분별함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미상응(未相應)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의와 의식의 훈습으로 신력(信力)에 의하기 때문에 잘 수행을 하지만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이 체와 더불어 상응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며, 아직 자재업(自在業)의 수행이 용(用)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상응(已相應)이니, 법신보살이 무분별심을 얻어 모든 부처의 지용(智勇)과 더불어 상응하여 오직 법력에 의하여 저절로 수행하게 되어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함을 말하기 때문이다.52) 또한 염법(染法)은 무시의 때로부터 훈습하여 단절되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곧 단절함이 있으나, 정법훈습(淨法熏習)은 곧 단절함이 없어서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히 나타나 용(用)의 훈습을 일으키므로 단절함이 없는 것이다.53) B.의장문(義章門)을 해석함 a.체상(體相) 이대(二大) 또한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의 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諸佛)에게 증감됨이 없으며 앞에서 나는 것도 아니요, 뒤에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필경에 늘 변함이 없어서 본래부터 성품이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가득 채운 것이다.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法界)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이여,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常)․락(樂)․아(我)․정(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청량(淸涼)하고 불변(不變)하고 자재(自在)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불리(不離)․부단(不斷)․불이(不異)․부사의(不思議)한 불법(佛法)을 구족하고 내지 만족하여 부족한 바가 없는 뜻이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묻기를, “위에서 진여는 그 체가 평등하여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진여의 체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공덕(功德)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실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차별의 상이 없어서 똑같은 일미(一味)이며 오직 하나의 진여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무분별(無分別)로 분별상(分別相)을 여의니, 이러므로 둘이 없는 것이다. 또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상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뿐인지라 실로 망념이 없지만, 망심(妄心)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여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하는 것이니,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곧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견(見)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상이 있는 것이니, 심성(心性)이 견을 여의면 바로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게 되며 상(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이리하여 열뇌(熱惱)하며 쇠변(衰變)하면 자재하지 못하며 이에 항하의 모래들보다 많은 망염(妄染)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뜻에 대하기 때문에 심성이 움직임이 없으면 항하의 모래들보다 많은 모든 깨끗한 공덕상의 뜻을 가져 나타낸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어 다시 앞의 법의 생각할 만한 것을 본다면 모자라는 바가 있을 터이지만, 이러한 정법의 무량한 공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며,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한 것이니, 법신․여래장이라 하는 것이다.”54) b.용대(用大) 또한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인지(因地)에서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波羅密)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攝化)하며, 크나큰 서원(誓願)을 세워 일체의 중생계를 모두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겁(劫)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을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에 의해서인가? 일체 중생과 및 자기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인 줄 여실히 앎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방편지(大方便智)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멸하고 본래의 법신을 보아서 자연히 부사의업의 여러 가지 작용을 갖는 것이니, 곧 진여와 똑같이 모든 곳에 두루하게 되며 또한 그러면서도 얻을 만한 작용의 모양도 없다. 왜 그런가? 말하자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지상(智相)의 신(身)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로서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는 것이어서 시작(施作)을 떠난 것이나, 다만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용(用)이라 말하는 것이다.55) 이 용(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에 의한 것으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응신(應身)이라 이름하니, 이는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서 온 것이라 보고 색의 분제(色分齊)를 취하여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업식에 의한 것이니, 이는 모든 보살이 초발의(初發意)로부터 보살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본 것을 보신(報身)이라 함을 이르는 것이다. 그 몸에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도 무량한 여러 가지 장엄이 있어서 곳에 따라 나타냄이 곧 가이없고 궁진(窮盡)할 수 없어 분제상(分齊相)을 여의었지만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있어서 훼손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은 모두 모든 바라밀 등 무루의 행훈(行熏) 및 부사의훈(不思議熏)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니, 이러한 한량없는 낙상(樂相)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범부에게 보여지는 것은 그 추색(麤色)이니, 육도(六道)에 따라서 각각 보는 것이 같지 아니하여 여러 가지 이류(異類)이며, 낙상(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 말한다. 다음,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적은 부분으로나마 보신을 보아서 저 보신의 색상(色相)과 장엄(莊嚴) 등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 분제를 떠났으며 오직 마음에 의하여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은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스스로를 분별하고 있으니, 이는 아직 법신(法身)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심(淨心)을 얻으면 보는 바가 미묘하여 그 작용이 점점 수승하며 이리하여 보살지진(菩薩地盡)에 이르러 보신(報身)을 보는 일이 구경(究竟)하게 되거니와,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보는 상(見相)이 없어지는 것이니, 모든 부처의 법신은 피차의 색상(色相)을 서로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묻기를, “만약 모든 부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곧 이 법신은 색의 체(體)이기 때문에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色)과 심(心)은 둘이 아닌 것이니, 왜냐하면 색의 본성은 곧 지(智)인 까닭에 색의 체에 형체가 없는 것을 지신(智身)이라 하며, 지성(智性)은 곧 색(色)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타낸 색이 분제가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과 무량한 장엄을 나타냄에 각각 차별이 되지만 모두 분제가 없어서 서로 방해되지 아니한다. 이는 심식(心識)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56) ②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감 다음은 생멸문으로부터 곧 진여문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른바 오음(五陰)의 색(色)과 심(心)을 추구해 보건대, 육진경계(六塵境界)가 필경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으며, 또한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으니, 마치 사람이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지만 방향 자체는 실로 변화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念)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며,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念)이 없는 줄 알면 곧 수순(隨順)하게 되어 진여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57) (2) 사집(邪執)을 대치함 사집(邪執)을 대치한다는 것은 일체의 사집이 모두 아견(我見)에 의하는 것이니, 만약 나(我)를 여의면 곧 사집이 없는 것이다. 이 아견(我見)에 두 가지가 있다.58)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고,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59) ① 인아견(人我見) 인아견(人我見)이란 모든 범부에 의하여 말해지는 것으로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경(經)에서 ‘여래 법신이 필경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허공이 여래성(如來性)이라 여기는 것이니, 이를 어떻게 대치하는가? 허공상(虛空相)은 망법(妄法)인지라 체가 없어 여실하지 못한 것이나, 색에 대하기 때문에 이 볼만한 상이 있는 것이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색법(色法)이 본래 마음이요 실로 밖의 색이 없는 것이니, 만약 밖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상도 없음을 밝힌 것이다. 소위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에서 망령되이 일어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약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가 멸하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의 구경의 뜻을 말한 것이요, 허공상과 같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수다라(修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는 체(體)가 공(空)하며, 내지 열반․진여의 법도 필경에는 공한지라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여 일체의 상(相)을 여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로지 공(空)이라 여기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對治)하는가? 진여 법신은 자체(自體)가 공하지 아니하여 무량한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했기 때문임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은 증감이 없어서 체가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여래장은 색․심법의 자상(自相)과 차별이 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직 진여의 뜻에 의해 말하였기 때문이며, 생멸염(生滅染)의 뜻에 의하여 나타냄을 차별(差別)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모든 세간의 생사의 염법이 다 여래장에 의하여 있는지라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生死)등의 법을 갖추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본래부터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모든 정공덕(淨功德)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아니하여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이 오직 망령되이 있는 것이요, 그 자성(性)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의 체(體)에 망법(妄法)이 있다면 증회(證會)하여서 영원히 망법을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처음이 있다고 하고, 처음을 보기 때문에 또한 여래가 얻은 열반이 마침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고 하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전제(前際 : 시초)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상(相)도 시작함이 없으니 만약 삼계(三界)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남이 있다고 한다면 곧 이는 외도경(外道經)의 설이며, 또 여래장은 후제(後際 : 마지막)가 없으니 모든 부처가 얻은 열반이 그것과 상응하여 곧 후제가 없기 때문이다.60) ② 법아견(法我見) 법아견(法我見)이란 이승의 둔근(鈍根)에 의하기 때문에 여래가 다만 그들을 위하여 인무아(人舞我)만을 설하였으며, 이 설함이 구경(究竟)하지 않기 때문에 오음생멸(五陰生滅)의 법이 있음을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망령되이 열반을 취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음법(五陰法)은 그 자성이 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멸함도 없어서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61) 다음에 망집(妄執)을 끝까지 다 여읜다는 것은 염법과 정법이 모두 서로 의지하는 것이어서 말할 만한 자상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色)도 아니요 심(心)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어서 필경에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는데도 말함이 있는 것은 여래의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취지란 모두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니, 일체법을 생각하면 마음을 생멸케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62) (3) 도(道)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함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모든 여러 부처가 증득한 도에 모든 보살이 발심, 수행하여 나아가는 뜻을 말하기 때문이다.63) 대략 발심(發心)을 마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해행발심(解行發心)이요, 셋째는 증발심(證發心)이다.64) ①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어떤 행실을 닦아서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發心)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른바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 의하여 훈습의 힘과 선근(善根)의 힘이 있으므로 업의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고자 하며,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信心)을 수행한다. 이리하여 일만 겁(劫)을 지나서 신심이 성취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케 하니, 혹은 대비(大悲)에 의하여 스스로 발심케 하며, 혹은 정법(正法)이 없어지려 함에 의해서 호법(護法)의 인연으로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심이 성취되어 발심하게 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필경 퇴전하지 아니하니, 이를 여래종(如來種)중에 머물러 정인(正因)과 상응한다고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소(微少)하여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텁다면 비록 부처를 만나 공양하게 되더라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고,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根器)가 결정되지 아니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나며, 혹 여러 부처에게 공양함이 있더라도 아직 일만 겁(劫)을 지나지 아니하여 중도에 연(緣)을 만나 또한 발심함이 있다. 이른바 부처의 색상(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여러 스님에게 공양함에 의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 마음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발심들은 모두 결정되지 아니한 것이니, 나쁜 인연을 만나면 혹 퇴실(退失)하여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65) 다음에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떠한 마음을 밝히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니 일체의 모든 선행을 이루기 좋아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묻기를, “위에서 법계(法界)는 하나의 상(相)이며 불체(佛體)는 둘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가?” 답하기를, “비유컨대 큰 마니보(摩尼寶)가 그 체성(體性)은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를 가지고 있어 만약 사람이 마니보의 깨끗한 본성을 생각하면서도 방편(方便)으로써 갖가지로 갈고 다듬지 않으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그 체성이 텅 비고 깨끗하나 한량없는 번뇌의 더러운 때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眞如)를 생각하지만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훈습하여 닦지 않으면 또한 깨끗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한량이 없어 모든 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서 대치하는 것이니, 만약 사람이 모든 선법(善法)을 수행하면 절로 진여법에 귀순하기 때문이다. 대략 방편을 설명하자면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생김이 없음을 보고 망견(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하며, 모든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과(業果)를 잃지 아니함을 보고 대비를 일으켜 여러 복덕(福德)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하여 열반에 머물지 아니함을 말하니, 이는 법성의 주착(住着)함이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능지방편(能止方便)이다.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모든 악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모든 허물을 여의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을 일으켜 증장시키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삼보(三寶)에게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를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권청(勸請)하여 이와 같이 삼보를 애경(愛敬)하는 순후(淳厚)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되어 무상의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며, 또 불(佛)․법(法)․승(僧)의 힘으로 보호됨에 의하여 업장(業障)을 녹이고 선근이 퇴전하지 않음을 말하니, 이는 법성의 치장(癡障)을 여의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미래에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 제도하여 남음이 없게 하여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이루도록 발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단절됨이 없음을 수순하기 때문이며, 법성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에 두루하여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피차(彼此)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구경에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66) 보살이 이 마음을 내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법신을 보게 되며,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願力)에 따라서 여덟 가지로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나와서 모태(母胎)에 들어가고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와서 출가하여 성도(成道)하고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듦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가 과거 한량없는 때로부터 유루(有漏)의 업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나는 바에 따라서 미세한 고통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업의 계박이 아닌 것이니, 대원(大願)에 의하여 자재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다라 중에서 ‘혹 악취(惡趣)에 물러나 떨어짐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실제로 물러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만 초학보살(初學菩薩)로서 아직 정위(正位)에 들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하여 두려워하게 하여 저로 하여금 용맹케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이 한 번 발심한 후에는 겁약한 마음을 멀리 여의어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짐을 끝내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령 무량무변한 아승기겁(阿僧祇劫)에 어려운 행실을 부지런히 애써야만 열반을 얻는다는 것을 듣더라도 겁내어 좌절하지 않는 것이니, 일체법이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67) ② 해행발심(解行發心) 해행발심(解行發心)이란 더욱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처음 정신(正信)으로부터 제일 아승기겁이 다 차려고 할 때이므로 진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 닦는 것이 상을 여의기 때문이다. 법성(法性)의 체는 간탐(慳貪 : 인색하고 욕심이 많음)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을 수행하며, 법성은 물들어 더럽혀짐이 없어 오욕(五欲)의 허물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계(持戒)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고(苦)가 없어 성내고 괴로워함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인욕(忍辱)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신심(身心)의 상이 없어 게으름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정진(精進)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안정하여 있어 그 체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선정(禪定)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체가 맑아서 무명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반야(般若)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68) ③ 증발심(證發心) 증발심(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소위 진여니, 전식(轉識)에 의하여 경계라고 말하지만 이 증득은 경계가 없는 것이요 오직 진여지(眞如智) 뿐이므로 법신(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이 보살이 일념(一念)사이에 시방(十方)의 남김 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여 법륜(法輪)을 굴리기를 청하니, 그것은 오직 중생을 개도(開導)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지(地)를 초월하여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을 보이니 이는 겁약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내가 한량없는 아승기겁의 기간에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수한 방편의 불가사의함을 보이지만 실로 보살은 종성의 근(種姓根)이 같으며 발심이 곧 같고 증득한 것도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모든 보살이 모두 다 세 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 세계의 같지 않음과 보는 바와 듣는 바 근(根 : 능력)․욕(欲 : 희망)․성질이 다름에 따라서 행하는 것을 보이는 것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의 발심상(發心相)이란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69) 또 이 보살은 공덕이 다 이루어져서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니, 이는 일념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자연히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 시방(十方)에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70) 묻기를,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며 세계가 무변하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심행(心行)의 차별도 또한 무변하니, 이와 같은 경계를 한계지을 수 없어서 알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무명이 단절된다면 심상(心想)이 없어질 텐데 어떻게 잘 알기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하는가?” 답하기를,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一心)으로서 상념을 떠나 있는 것이나, 중생이 경계를 잘못 보기 때문에 마음에 한정됨이 있으며, 상념을 잘못 일으켜서 법성(法性)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망견, 망상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는 모든 법의 본성인 것이다. 그 자체(自體)가 모든 망법을 환하게 비추어 대지(大智)의 작용이 있어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의 응당 알아야 할 바를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의(法義)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또 묻기를, “만약 모든 부처에게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면 모든 중생이 혹은 그 부처의 몸을 보거나, 혹은 신비한 변화를 보거나, 혹은 그 말씀을 들어 이익되지 않음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세간에서 보지 못하는 이가 많은가?” 답하기를, “모든 부처와 여래의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며 작의(作意 : 의식적인 노력)가 없기 때문에 ‘자연(自然)’이라 한 것이니 다만 중생심에 의하여 나타낸 것이다. 중생심(衆生心)이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심에도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71) 4.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이미 해석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수행신심분을 말하겠다. 이 중에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에 의거하기 때문에 신심을 수행함을 말하는 것이다.72) 어떠한 신심들이며, 어떻게 수행하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신심에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소위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서 항상 부처를 가까이하고 공양하고 공경하여 선근(善根)을 일으켜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사문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리(自利)․이타(利他)할 것을 믿어서 항상 모든 보살들을 즐겨 친근히 하여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73) 수행에 오문(五門)이 있어, 이 믿음을 잘 성취하니,74)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시문(施門)이요, 둘째는 계문(戒門)이요, 셋째는 인문(忍門)이요, 넷째는 진문(進門)이요, 다섯째는 지관문(止觀門)이다.75) (1) 시문(施門)․계문(戒門)․인문(忍門)․진문(進門) 어떻게 시문(施門)을 수행하는가? 만약 일체의 와서 구하여 찾는 사람을 보거든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 닿는 대로 베풀어 줌으로써 스스로 간탐(慳貪)을 버리어 저로 하여금 환희케 하며, 만약 액난(厄難)․공포․위핍(危逼)을 받는 사람을 보거든 자기의 능력에 따라 무외(無畏)를 베풀어 주며, 만약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아는 대로 방편으로 설하되 명리(名利)나 공경을 탐내어 찾아서는 안 되고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여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계문(戒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살생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으며, 양설(兩舌)하지 않고, 악구(惡口)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기어(綺語)하지 않으며, 탐질(貪嫉), 기사(欺詐), 첨곡(諂曲), 진에(瞋恚), 사견(邪見) 등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만약 출가한 자라면 번뇌를 꺾어 굴복시키기 위한 까닭에 응당 시끄러운 것을 멀리 여의고 항상 고요한 데에 처하여 소욕(少欲)과 지족(知足)과 두타(頭陀) 등의 행을 수습하며 내지 작은 죄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 부끄러워하고 회개하여 여래가 만든 금계(禁戒)를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고 마땅히 다른 사람의 기혐(譏嫌)을 막아 그 비난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망령되이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문(忍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응당 타인의 괴롭힘을 참아서 마음에 보복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마땅히 이익과 손해, 비난과 명예, 칭찬과 기릉,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법을 참고 견디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문(進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한 일에 마음이 게으르거나 주저함이 없어서 마음먹은 것이 굳세고 강건하여 겁약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구원(久遠)한 때로부터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의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음을 생각하여야 하며, 이 때문에 응당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하여 빨리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사람이 신심(信心)을 수행하였으나,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기 때문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어지럽힘을 당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事務) 때문에 여러 가지로 끌리고 얽매이며, 혹은 병고(病苦)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기 때문에 응당 용맹히 정근(精勤)하여 아침 저녁의 육시(六時)에 모든 부처에게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勸請)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를 벗어나게 되어 선근이 증장하기 때문이다.76) (2) 지관문(止觀門)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하는가?지(止)라 하는 것은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사마타관(奢摩他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요,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함을 말하는 것이니 비발사나관(毗鉢舍那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가지 뜻으로 점점 수습하여 서로 여의지 아니하여 쌍으로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77) 만약 지(止)를 닦는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르게 하되, 기식(氣息)에 의하지 않으며, 형색(形色)에 의하지 않으며, 공(空)에 의하지 않으며 지(地)․수(水)․화(火)․풍(風)에 의하지 않으며, 내지 견문(見聞)․각지(覺知)에 의하지 않아야 한다. 일체의 모든 상념을 생각생각마다 다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도 없애야 한다. 일체법이 본래 상이 없기 때문에 생각생각이 나지 않으며 생각생각이 멸하지 않으며, 또한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생각하지 않은 후에 마음으로 마음을 제멸(除滅)하는 것이다. 마음이 만약 흩어져 나간다면 곧 거두어 와서 정념(正念)에 머물게 해야 할 것이니, 이 정념이란 오직 마음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곧 또한 이 마음도 자상(自相)이 없어서 생각생각마다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앉은 데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머무는 데에 행위하여 짓는 바가 있더라도 이 모든 때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관찰하여 오래 익혀 익숙하게 되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된다. 마음이 머물기 때문에 점점 맹리(猛利 : 매우 예리함)하여 진여삼매에 수순하여 들어가게 되어 번뇌를 깊이 조복(調伏)하고 신심(信心)이 증장하여 속히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이룬다. 오직 의혹하고 불신하고 비방하고 중죄업장(重罪業障)을 짓고 아만(我慢)과 해태(懈怠)한 사람은 제외하나니, 이러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78) 또한 이 삼매에 의하기 때문에 곧 법계가 일상(一相)인 것을 아는 것이니, 일체 모든 부처의 법신이 중생신(衆生身)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말하며, 이를 곧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이름한다. 진여가 이 삼매의 근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만일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무량한 삼매를 내는 것이다.79)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모든 마구니와 외도(外道)와 귀신들에 의하여 어지럽게 되니, 혹은 좌중(坐中)에서 어떤 형체를 나타내어 공포를 일으키게 하거나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낼 경우,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계가 곧 멸하여 끝내 뇌란(惱亂)되지 않을 것이다.80) 혹 천상(天像)과 보살상을 나타내거나 또한 여래상을 지어서 상호(相好)가 구족하며 혹은 다라니(陀羅尼)를 설하며 혹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설하며, 혹은 평등하고 공(空)하며 무상(無相)하고 무원(無願)하며 무원(無怨)․무친(無親)하고 무인(無因)․무과(無果)하여 필경 공적(空寂)함이 참된 열반이라고 설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숙명(宿命)의 과거의 일을 알게 하고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하고 타심지(他心智)를 얻게 하여 변재(辯才)가 막힘이 없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나 이익되는 일에 탐착(貪着)하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내고 자주 기뻐하게 하여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혹은 장애가 많거나 잠이 많고 병이 많아서 그 마음이 게을러지게 하며, 혹은 갑자기 정진을 하다가 뒤에 곧 그만두어 불신하는 마음을 내어 의심이 많고 염려가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행위를 버리고 다시 잡업(雜業)을 닦으며 혹은 세속의 일에 집착하여 갖가지로 끄달리게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모든 삼매를 얻게 하여 진여삼매에 든 것과 약간 비슷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외도가 얻은 것이지 참다운 삼매가 아닌 것이다. 혹 또한 사람들에게 혹은 하루, 혹은 이틀, 혹은 사흘 내지 이레를 정(定) 중에 머물게 하여 자연의 향미(香美)한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쾌적하여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게 하여 사람들이 그것에 애착하게 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먹는 것에 한계가 없게 하여 잠깐 많았다가 잠깐 적게 하며 안색을 변이하게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언제나 응당 지혜로써 관찰하여 이 마음을 사망(邪網 :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마땅히 부지런히 정념(正念)하여 취착하지 아니하면 이러한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읠 수 있을 것이다. 외도(外道)가 가지는 삼매는 모두가 견(見)․애(愛)․아만(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리와 공경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眞如三昧)란 보는 상(相)에 머물지 않고 얻은 상(相)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내지 정(定)에서 벗어난 때에도 게을리함이 없어서 가지고 있는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되니,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법을 익히지 아니하면 여래종성(如來種性)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간의 모든 선(禪)과 삼매를 닦으면 흔히 거기에 맛들여 아견(我見)에 의하여 삼계(三界)에 얽매여 외도와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니 만약 선지식의 보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견(見)을 일으키기 때문이다.81) 또한 정근(精勤)하여 전념으로 이 삼매를 수학(修學)하는 이는 현세(現世)에서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항상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호념(護念)함을 입을 것이요, 둘째는 모든 마구니와 악귀에 의하여 두려움을 받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아흔 다섯 가지 외도와 귀신에 의하여 혹란(惑亂)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깊고 미묘한 불법을 비방함에서 멀리 떠나 중죄(重罪)의 업장(業障)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일체의 의심과 모든 나쁜 사고(思考)를 없애는 것이요, 여섯째는 여래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증장되는 것이요, 일곱째는 근심과 후회를 멀리 여의어 생사 중에 용맹하여 겁내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교만을 버려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는 것이요, 아홉째는 비록 정(定)을 얻지 못하였으나 모든 때에 모든 경계처(境界處)에 대하여 번뇌를 줄여서 세간을 즐기지 않는 것이요, 열째는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外緣)의 모든 소리에 의하여 놀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82) 만약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을 즐기지 않고 대비를 멀리 여의게 되니, 이러므로 관(觀)을 닦는 것이다. 관(觀)을 닦아 익히는 이는 마땅히 모든 세간의 유위(有爲)의 법이 오래 머무름이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하여 없어지며, 모든 마음의 작용이 생각생각마다 생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고(苦)인 줄 알아야 하며,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하여 꿈과 같은 줄 알아야 하며,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하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세간의 모든 몸뚱이가 모두 다 깨끗하지 못하고 갖가지로 더러워서 하나도 즐거워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중생이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한 바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하여 이미 모든 신심(身心)의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마는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것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서원(大誓願)을 세워야 할 것이다. 즉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함으로써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케 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열반제일의의 낙(第一義樂)을 얻도록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願)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때, 모든 곳에 있는 여러 선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버리지 않고 수학하여 마음에 게을리함이 없으니, 오직 앉았을 때 지(止)에 전념하는 외에는 나머지 일체에서 다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83) 행하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일어나거나 어느 때든지 모두 지관을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니, 소위 비록 모든 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또한 곧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빠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하며, 비록 인연의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곧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지(止)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주착(住着)함을 대치하고 이승의 겁약(怯弱)한 소견을 버릴 수 있으며, 만일 관(觀)을 닦으면 이승(二乘)이 대비를 일으키지 아니하는 협렬심(狹劣心)의 허물을 대치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음을 멀리 여읜다. 이러한 뜻에 의하므로 이 지(止)․관(觀) 이문(二門)은 함께 같이 조성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만약 지․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보리에 들어갈 수 있는 방도가 없을 것이다.84) 다음에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약하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머무름에 스스로 항상 제불(諸佛)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가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신심은 성취하기가 어렵다’라고 하니, 뜻이 퇴전하려고 하는 이는 여래가 수승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섭호(攝護)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뜻을 오로지하여 부처를 생각한 인연으로 원(願)에 따라 타방불토(他方佛土)에 나게 되어 항상 부처를 친히 보아서 영원히 악도(惡道)를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수다라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생각하여 그가 닦은 선근으로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아가기를 원구(願求)하면 곧 왕생(往生)하게 되며 늘 부처를 친히 보기 때문에 끝내 퇴전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만약 저 부처의 진여법신을 관(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왕생하게 되어 정정(正定)에 머물기 때문이다.85) 5.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이미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의 제불(諸佛)의 비장(秘藏)을 내가 이미 모두 말하였으니,86)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 대하여 바른 믿음을 내어서 비방(誹謗)을 멀리 여의고 대승도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을 가지고 사량(思量)․수습(修習)하면 구경에 무상도(無上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나서 겁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부처의 종자를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에게 수기(授記)하는 바가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87)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중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번 식사하는 시간에 바로 이 법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보다 우월하여 그와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사람이 이 기신론을 받아 가져서 관찰하고 수행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한다면 그가 가지는 공덕이 한량없고 가이없어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니, 가령 시방의 일체의 모든 부처가 각기 무량한 아승기겁에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또한 다할 수가 없다. 어째서인가? 이는 법성의 공덕에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계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88) 어떤 중생이 이 기신론에 대하여 훼방(毁謗)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가 받는 죄의 과보는 무량겁을 지나도록 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우러러 믿어야 할 것이요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깊이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 해쳐서 일체의 삼보(三寶)의 종자를 단절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여래가 다 이 법에 의하여 열반을 얻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이로 인하여 수행하여 불지(佛智)에 들어가기 때문이다.89) 과거의 보살도 이미 이 법에 의하여 정신(淨信)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도 이제 이 법에 의하여 정신을 이루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에 의하여 정신을 이루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니,90) 이러므로 중생이 부지런히 수학(修學)해야 할 것이다.91) 三. 총결회향(總結廻向) 모든 부처의 매우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분(分)에 따라 요약하여 말하였으니, 법성과 같은 이 공덕을 회향하여 널리 일체의 중생계를 이롭게 하여지이다.92)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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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기신론이라고도 한다.
1책. 인도의 마명(馬鳴:100∼160?)이 저술하였다고 하나 그의 생존연대가 불확실하여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원전인 산스크리트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중국 양(梁)나라 때의 진제(眞諦)와 실차난타(實叉難陀)의 한역본이, 한국에는 실차난타의 한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구성은 ① 서분(序分), ② 정종분(正宗分), ③ 유통분(流通分)으로 되어 있다. 정종분은 다시 인연분 ·입의분(立義分) ·해석분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으로 나누어져 있다. 입의분과 해석분은 이론이고, 수행신심분과 해석분은 실천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다. 해석분은 현시정의(顯示正義) ·대치사집(對治邪執)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으로서, 이 가운데 현시정의가 이론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대의는 인간의 마음[衆生心]이란 공간적으로는 전세계를 인식의 내용으로 하고,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과거로부터의 역사를 포함하면서 무한한 미래를 개척하며, 망상(妄想)과 깨달음의 두 가지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 마음의 위대성을 대승(大乘)이라고 하는데, 이 마음을 수행함으로써 망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실천방법으로서 진여(眞如)와 불 ·법 ·승(佛法僧)을 믿는 4신(信)과,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지관(止觀)의 5행(行)을 들고 있다.
이 책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의 화엄종(華嚴宗) ·천태종(天台宗) ·선(禪) ·정토종(淨土宗) ·진언종(眞言宗) 등의 주요 종파에 영향을 끼쳐 불교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원효(元曉)가 주석한 《대승기신론소(疏)》가 유명하다.
인터넷 두산 대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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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시방(十方)의 최승(最勝)한 업으로 두루 아시며 색(色)이 무애자재(無碍自在)하신 세상을 구제하시는 대비자와 저 불신의 체와 상이신 법성진여(法性眞如)바다의 한량없는 공덕장 (功德藏)과 여실히 수행하는 자에게 귀명(歸命)하옵나니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과 사집을 버리고 대승의 바른 신심을 일으켜서 불종자(佛種子)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합니다.
논(論)에 이르기를 어떤 법이 능히 마하연의 신근을 일으킬새 그러므로 이 논을 설함이니라.
설에 다섯가지로 구분하였으니 무엇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 이요, 세째는 해석분(解釋分) 이요, 네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이요,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이다.
◈ 처음 인연분(因緣分)을 설하리라.
묻되 무슨 인연으로 이 論을 설하는고?
답하되 이 인연이 여덟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여덟가지라 하는고?
첫째는 인연총상(因緣總相)이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고를 여의고 구경락(究竟樂)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세간의 명리(名利)와 공경(恭敬)을 구하는 것이 아닌 연고요.
둘째는 여래(如來)의 근본(根本)의 뜻을 해석해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올바로 이해(理解)하여 오류가 없게 하고자 하기 위한 연고요.
세째는 선근(善根)이 성숙(成熟)한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마가연법(摩訶衍法)을 감임(堪任) 하여 믿음이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연고요.
네째는 선근(善根)이 미약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수습하게 하기 위한 연고요.
다섯째는 방편(方便)을 보여서 나쁜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잘 그 마음을 보호해서 어리석고 교만함을 멀리 여의고 사악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연고요.
여섯째는 지(止)와 관(觀) 닦는 법을 보여서 범부(凡夫)와 이승(성문, 연각)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기 위한 연고요.
일곱째는 전념(前念)의 방편(方便)을 보이어 불전에 태어나서 반드시 결정코 믿는 마음이 물러서지 않게 하기 위한 연고요.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서 수행하도록 권한 연고이니 이러한 인연이 있을 새 이런 까닭으로 이 논을 지었나니라.
묻되 수다라의 가운데 이 법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거듭 말하는고?
답하되 수다라의 가운데 비록 이 법이 있다 하더라도 중생의 근행(勤行)이 같지 아니 하며 받아 드려 이해(理解)하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니 이른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적에는 중생(衆生)들의 근기(根氣)가 영리하고 법문을 설하는 부처님도 색심업(色心業)이 수승하사 원음으로 한번 연설함에 이류異類(일체중생一切衆生)가 다같이 알아들음일세.
곧 論을 필요로 하지 않거니와 저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혹 어떤 중생이 능히 자력으로 널리 듣고 아는 사람도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또한 자력으로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자가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스스로 힘이 없어서 저 넓은 논을 인(因)하여 아는 사람도 있으며, 스스로 중생이 다시 광론의 글월이 많은 것을 번거롭게 여겨서 마음에 총지한 적은 글월이 많은 뜻을 섭취함을 즐겨해서 능히 아는 사람도 있나니라.
이와 같아서 이 론(論)은 여래의 넓고 크고 깊은 법의 갓이 없는 뜻을 다 거두어 드리고저함일새 응당 이 론(論)을 설함이니라.
◈ 이미 인연분을 설(說)했으니 다음에는 입의분(立義分)을 說하리라.
마가연(摩訶衍)이란 것은 총설하면 두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니라.
法이라 말한 것은 중생(衆生)의 마음을 이름이니 이 마음이 곧 일체(一切) 세간(世間)과 출세간의 法을 거두어 들였으니 이 마음을 의지해서 마가연(摩訶衍)의 뜻을 나타내 보였나니 어찌된 까닭인고?
이 마음의 眞如(離言)相(依言)이 곧 摩訶衍의 體를 보이는 까닭이며, 이 마음의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이 능히 마가연(摩訶衍)의 體, 相, 用을 보인 까닭이니라.
의(義)라고 말하는 것은 곧 세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체대니 이르되 일체법(一切法)이 진여평등(眞如平等)하여 더하고 덜하지 않는 까닭이요,
둘째는 상대(相大)니 이르되 여래장(如來藏)이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을 구족(具足)한 까닭이요,
세째는 용대(用大)니 능히 일체세간(一切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착한 인과(因果)를 生하는 까닭이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본래 탄 바인 연고며, 일체(一切) 보살(菩薩)이 다 이법을 타고 여래지(如來地)에 이른 연고니라.
◈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했으니 다음에는 해석분(解釋分)을 설하리라.
해석(解釋)하는데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정의(正義)를 나타내 보인 것이요,
둘째는 삿된 집착(執着)에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요,
세째는 도(道)에 발심취향(發心趣向)하는 상(相)을 분별(分別)한 것이니라.
정의(正義)를 보인다는 것은 일심(一心)의 법(法)을 의지(依支)하여 두가지 문이 있느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
이 두가지 문이 각각 一切의 법을 총섭(總攝)하니 이 뜻이 어떠한고?
이 두문이 서로 여의지 않는 까닭이니라.
심진여(心眞如)란 것은 곧 이 일법계(一法界)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이니 이른바 심성(心性)이 生도 아니요,
멸(滅)도 아님이니라.
일체(一切)의 모든 법(法)이 오직 망념(妄念)을 의지(依支)하여 차별(差別)이 있으니 만약 심념心念 (망념妄念)만 여의면 곧 일체경계(一切境界)의 상(相)이 없으리라.
이런 까닭으로 일체법(一切法)이 本來부터 言說의 相을 여의었으며 名字의 相을 여의었으며 심연(心緣)의 相을 여의어서 필경에 평등하여 변하고 달라짐이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니 오직 이 한 마음 인 까닭에 이름을 眞如라고 함이니라.
一切의 언설이 거짓 이름 뿐이요, 실다움이 없는 것이니 다만 망념(妄念)을 따랐을지언정 가히 얻을 수 없는 연고니라.
眞如라고 말하는 것도 또한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이르되 言說의 궁극으로 말을 因하여 말을 보낸 것이어니와, 이 眞如의 體는 가히 보낼 것이 없음이니 一切의 法이 다 참다운 까닭이며, 또한 가히 세울 것도 없음이니 一切의 法이다 한가지로 如如한 까닭이니라. 마땅히 알라. 一切法은 가히 말할 수도 없고 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까닭에 그 이름을 眞如라고 함이니라.
묻되 만약 이와 같은 뜻일진대 모든 衆生들이 어떻게 수순하여야 능히 얻어들어 갈 것인고?
답하되 만약 一切의 法을 비록 말할지라도 능히 말함과(能說) 가히 말할(所說)것이 없으며 비록 생각할지라도 또한 능히 생각함과 가히 생각할 것이 없는 줄 알면 이것이 이름이 수순이요. 만약 생각을 여의면 이름이 얻어 들어감이 됨이니라.
다시 眞如라는 것은 言說에 의지하여 분별(分別)한 것이 두가지 뜻이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여실(如實)히 공(空)한 것이니 능히 구경에 실다움을 나타내는 까닭이요,
둘째는 如實히 空하지 않은 것이니 자체(自體)에 샘이 없는 성공덕(性功德)을 구족(具足)한 까닭이니라. 말한바 空이란 것은 本來부터 一切의 염법이 상응하지 않는 까닭이니 이르되 일체의 차별상(差別相)을 여의었으며 허망(虛妄)한 심념(心念)이 없는 까닭이니라.
마땅히 알라 眞如의 자성(自性)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님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이 아님도 아니며, 있고 없는 두가지 모양도 아니며, 한 모양도 아니며, 다른 모양도 아니며, 한 모양 아님도 아니며, 다른 모양 아님도 아니며, 하나이니 다름이니 하는 두가지의 모양도 아님이니라 내지 통털어서 말할진대 一切衆生들이 망심이 있음으로써 생각 생각에 분별해서 다 서로 다 응하지 못함을 의지 했을 때 이런 까닭으로 말하여 空이라고 했거니와 만약 妄心을 여의면 실로 空이라 할 것도 없는 까닭이니라.
말한바 不空이란 것은 이미 법체가 공하여 망령됨이 없음을 나툰 연고로 곧 眞心이 항상하여 변하지 아니해서 正法이 만족함일새 곧 이름이 不空이니라. 또한 모양 있음을 가히 취할 것이 없음이니 생각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한 이라야 서로 응하는 까닭이니라.
심생멸(心生滅)이란 것은 여래장(如來藏)을 의지한 연고로 생멸심(生滅心)이 있으니 이른바 生도 아니요, 멸(滅)도 아닌 것이 생멸(生滅)하는 것과 더불어 화합(和合)하여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아니함이니 이름하여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함이니라.
이 아리야식(阿梨耶識)이 두가지 뜻이 있어서 능히 일체법(一切法)을 거두기도 하며 一切法을 내기도 하나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각의(覺義)요, 둘째는 불각의(不覺義)니라. 말한바 각의(覺義)란 것은 마음 자체가 생각을 여읜 것을 이름이니 생각을 여읜 相은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어서 法界가 한 모양이니라. 곧 이것이 如來의 平等한 法身이니 이 法身을 의지(依支)해서 설하여 본각(本覺)이라 함이니라. 무슨 까닭인고?
本覺의 뜻이란 것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始覺)이 곧 本覺과 같은 때문이니라. 始覺의 뜻은 本覺을 의지하는 까닭에 不覺이 있고, 不覺을 의지하는 까닭에 始覺이 있다고 설함이니라. 또 心源을 깨달은 연고로 이름이 구경각(究竟覺) 이요 심원(心源)을 깨닫지 못한 연고로 구경각(究竟覺)이 아님이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저 범부(凡夫)들이 전념(前念)에 악업(惡業)을 일으킴을 깨달아 알아서 짐짓 능히 후념(後念)을 그쳐서 그로 하여금 일어나지 못하게 하나니 다시 각(覺)이라 이름하나 곧 이것은 覺이 아닌 까닭이니라.
저 이승(二乘)의 관지(觀智)<事理를 觀하는 智慧>와 처음 뜻을 발한 보살(菩薩)들은 念의 이상을 깨달아 念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서분별집착의 상을 버린 까닭에 이름을 상사각(相似覺)이라 함이니라.
저 법신보살(法身菩薩)들은 심념(心念)에 주상(住相)을 깨달아 심념(心念)에 주상이 없으니 분별(分別)하는 서념상(序念相)을 여읜 까닭에 이름을 수분각(隨分覺)이라 함이니라.
저 보살(菩薩)이 십지(十地)에서 배움이 다하여 방편(方便)이 만족(滿足)하여 일념(一念)이 서로 응해서 깨달은 마음이 처음 일어남에 마음에 처음이라는 상이 없음이니 미세한 생각을 멀리 여읜 까닭에 심성(心性)을 얻어 보아 그 마음이 곧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을 이름을 구경각(究竟覺)이라 함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수다라(修多羅)에 설하시되 만약 어떤 중생(衆生)이 능히 무념(無念)을 관하는 자는 곧 불지(佛智)를 향함이 되는 연고라 하시니라.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처음이란 모양을 가히 알 수 없거늘 처음의 모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무념(無念)을 말하는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각(覺)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하나니 본래부터 생각, 생각이 상속(相續)하여 일찌기 생각을 여의지 못한 까닭에 비롯없는 무명(無明)이라 말함이니라. 만약 무념(無念)을 얻은 자는 곧 심상(心相)의 생(生)·주(住)·이(異)·멸(滅)을 알 것이니 무념(無念)과 같은 까닭이니라.
실로 시각(始覺)과 다름이 없으니 사상四相(生·住·異·滅)이 함께 있어서 다 자립함이 없음이니 본래 평등(平等)하여 동일한 각(覺)인 까닭이니라.
다시 본각(本覺)이 염(染)을 따라 분별(分別)해서 두가지 상(相)을 내니 저 본각(本覺)으로 더불어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 하나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一은 지정상(智淨相)이요, 이는 부사의(不思議)한 업상(業相)이니라. 지정상(智淨相)이란 것은 이르되 법력(法力)의 훈습(熏習)에 의하여 여실(如實)히 수행(修行)해서 방편(方便)이 만족(滿足)한 연고로 和合하는 식상(識相)을 파(破)하고 상속(相續)하는 심상(心相)을 멸(滅)하여 법신(法身)의 지혜(智慧)가 순정(淳淨)함을 나투는 까닭이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일체심식(一切心識)의 상(相)이 다 이 무명(無明)이니라.
무명(無明)의 상(相)은 각성(覺性)을 여의지 아니 하여 가히 무너지지도 아니하며, 가히 무너뜨리지 못할 것도 아님이니 마치 대해(大海)의 물이 바람을 인하여 파도가 움직이어서 수상(水相)과 풍상(風相)이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하나 물은 움직이는 성(性)이 아님이니, 만약 바람이 사라지면 움직이는 相은 곧 滅하나 젖는 성질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은 까닭이니라.
이와 같이 중생들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무명풍(無明風)을 인(因)하여 동(動)하여 마음과 무명(無明) 함께 형상이 없어서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하나 마음은 동성(動性) 아님이니 만약 무명이 멸하면 상속(相續) 곧 멸할지언정 지성은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니라.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란 지정상(智淨相)을 의지(依支)하여 능히 일체의 수승(殊勝)하고 현묘(玄妙)한 경계를 짓나니 이른바 한량없는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자연히 서로 응하여 가지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는 까닭이니라.
다시 각(覺)의 체(體)와 상(相)은 네가지 큰 뜻이 있으니 허공(虛空)으로 더불어 같으며 마치 조촐한 거울과도 같나니라. 어떠한 것이 넷인고?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일체심(一切心)의 경계상(境界相)을 멀리 여의어서 한 법도 가히 드러날 것이 없으니 각조(覺照)의 뜻이 아닌 까닭이니라.
둘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니 이르되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일체세간(一切世間)의 경계(境界)가 다 그 가운데 나타나서 나오지도 아니하고, 들어가지도 아니하며, 잃어버리지도 아니하고, 무너지지도 아니하여 항상 한 마음에 머물러 있음이니 일체의 법이 곧 진실한 성(性)인 까닭이며 또 일체의 염법이 물들이지 못할 바이니 지체(智體)가 움직이지 아니하여 무루(無漏)가 구족(具足)해서 중생(衆生)을 중생(衆生)하는 까닭이니라.
세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이르되 불공법(不空法)이 번뇌(煩惱)와 지(智)를 벗어나서 화합의 상(相)을 여의어서 순박하고 조촐하고 밝은 까닭이니라.
네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이르되 法에 벗어남을 의지하는 까닭으로 중생(衆生)의 마음을 두루 비춰 하여금 선근을 닦아서 생각을 따라 나타내 보이게 하는 까닭이니라.
말한바 불각의(不覺義)라는 것은 이르되 여실(如實)히 진여법(眞如法)이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한 연고로 불각(不覺)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염(분별념)이 있으나 염이 자상이 없어서 본각(本覺)을 여의지 아니 하나니 마치 미혹(迷惑)한 사람이 방위(方位)를 의지한 연고로 미혹(迷惑)했으니 만약 방위를 여의면 곧 미혹함이 없는 것과 같나니라.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覺을 의지한 연고로 미혹했으니 만약 覺性을 여의면 곧 不覺이 없으리라.不覺의 망상심이 있는 까닭으로 능히 名義만 알아서 진각이라 말하나니 만약 不覺의 마음만 여의면 곧 眞覺의 自相을 가히 說할 것이 없으리라.
다시 不覺을 의지한 연고로 세가지 상을 생하여 저 不覺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여의지 않나니 어떠한 것이 셋인고?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不覺을 의지한 연고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설하여 이름을 業이라 함이니 覺 하면 곧 움직이지 아니하나 움직이면 곧 苦가 있으니 果가 因을 여의지 아니한 연고로니라.
둘째는 능견상(能見相)이니 움직임을 의지한 연고로 능히 보나니 움직이지 아니하면 곧 봄이 없나니라.
세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니 능견(能見)을 의지하는 연고로 경계가 망녕되이 나타나나 견(見)을 여의면 곧 경계(境界)가 없나니라.
경계연(境界緣)이 있는 연고로 다시 여섯가지 상(相)이 생함이니 어떠한 것이 여섯인고?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경계(境界)를 의지해서 마음을 일으켜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는 연고니라.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智相)을 의지하는 연고로 그 고락(苦樂)을 깨닫는 마음을 내어서 생각을 일으켜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연고니라.
세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相續)을 의지하여 경계(境界)를 반연(攀緣)해 생각하여 고락(苦樂)에 머물러서 마음에 집착(執着)을 일으키는 연고니라.
네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망녕된 집상(執相)을 의지해서 거짓된 가명언상(假名言相)을 분별하는 연고니라.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名字)를 의지해서 이름을 따라 취착하여 가지가지 업을 짓는 연고니라.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을 의지하여 과보를 받아서 자재(自在)하지 못한 연고니라. 마땅히 알라 무명이 능히 일체의 염법을 생하나니 일체의 염법이 다 이 불각의 相인 연고니라.
다시 覺과 不覺이 두가지의 相이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동상(同相)이요, 둘째는 이상(異相)이라.
동상(同相)이란 것은 비유하면 가지가지 질그릇이 다 한가지 가는 티끌의 성(性)인 相과 같음이니 이와 같이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가지 가지 업환(業幻)이 다 한가지 진여(眞如)의 性인 相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수다라(修多羅) 가운데 이 뜻을 의지하여 설(說)하시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본래 항상 머물러서 열반(涅槃)에 들어감과 보제(菩提)의 법(法)이 가히 닦는 상이 아니며 가히 짓는 상도 아닌지라 필경(畢竟)에 얻을 것이 없다 하니라.
또한 색상(色相)을 가히 볼 수 없으나 色相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이 염(染)을 따르는 환(幻)의 지은 바요, 이 지색(智色) 불공(不空)의 性은 아님이니, 지상(智相)은 가히 볼 수 없는 까닭이니라.
이상(異相)이란 것은 가지가지 질그릇이 각각 같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와같이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이 수염환(隨染幻)의 차별(差別)이며 성염환(性染幻)의 차별(差別)인 연고니라.
다시 이 생멸인연(生滅因緣)이란 것은 이른바 衆生이 마음을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하는 연고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아리야식(阿梨耶識)을 의지하여 무명(無明)이 있음을 말했으니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능히 보고 능히 나투며 능히 경계(境界)를 취하여 생각을 일으켜 상속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의(意)라고 함이니라.
이 뜻에 다시 다섯가지 이름이 있으니 어떠한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이름을 업식(業識)이라 함이니, 이르되 무명의 힘으로 불각심(不覺心)이 움직이는 까닭이니라.
둘째는 이름을 전식(轉識)이라 함이니, 움직이는 마음에 의지(依支)하여 능견(能見)의 相이 되는 까닭이니라.
세째는 이름을 현식(現識)이라 함이니 이른바 능히 일체(一切)의 경계(境界)를 드러내나니 마치 명경(明鏡)이 색상(色像)을 나투는 것과 같아서 현식(現識)도 또한 그러하여 그 오진(五塵)을 따라서 상대되는 것이 이르면 곧 드러내서 앞과 뒤가 없으니 일체(一切)의 때에 따라 마음대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는 까닭이니라.
네째는 이름을 지식(智識)이라 함이니 이르되 염정(染淨)의 법(法)을 분별(分別)하는 까닭이니라.
다섯째는 이름을 상속식(相續識)이라 함이니 생각이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며, 과거무량(過去無量)한 세상의 善과惡의 業을 주지(住持)하여 하여금 잃지 않는 까닭이며, 다시 능히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의 고락등(苦樂等) 과보(果報)를 성숙(成熟)시켜서 서로 어기지 않게하는 까닭이니 능히 현재(現在)와 이미 겪은 일로 하여금 홀연(忽然)생각하게 하며 미래의 일을 불각(不覺)에 말령되이 생각하게 함이니라. 이런 연고로 삼계가 허위(虛僞)한지라 오직 마음의 지은 바이니 마음을 여의면 곧 육진(六塵)의 경계가 없으리라.
이 뜻이 어떠한고? 일체의 법이 다 마음을 쫓아 일어났으니 망념(妄念)이 생 한지라 일체의 분별이 곧 자심(自心)을 분별(分別)함이니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여 모양을 얻을 수 없으니 마땅히 알라 세간의 일체 경계(境界)가 다 중생(衆生)의 무명망심(無明妄心)을 의지(依支)하여 머물러 가짐을 얻나니라.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거울 가운데 형상과 같아서 體를 가히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마음이라 허망함이니 마음이 生하면 가지가지의 法이 生하고 마음이 滅하면 가지 가지의 法이 滅하는 연고니라. 다시 의식이라 말함은 곧 이 상속식(相續識)이니 모든 凡夫(범부)가 취착(取着)함이 더욱 깊음을 의지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를 계교(計較)하여 육진(六塵)을 分別할세 이름을 의식(意識)이라 함이요.
또한 이름을 분별식(分別識)이라 하며 또 다시 이름을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 설함이니 이 식(識)은 견애<見愛>(견혹<見惑>과 애혹<愛惑>)의 번뇌(煩惱)를 의지하여 증장(增長)하는 뜻인 연고니라.
무명훈습(無明熏習)을 의지하여 일어난바 식이라는 것은 凡夫의 능히 알바가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智慧)로 깨달을 바가 아니니 이르되 菩薩(菩薩)을 의지할진대 처음에 바로 믿음을 쫓아서 발심(發心)하여 관찰(觀察)해서 만약 법신(法身)을 증득(證得)했을지라도 소분(少分)만 얻어 알 것이며 이에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러르서도 능히 다 알지 못할 것이요 오직 부처님이라야 다 아나니라.
무슨 까닭인고? 이 마음이 본래부터 自性이 淸淨함이로대 無明이 있는지라 無明의 염(染)한 바가 되어 그 물들어진 마음이 있으니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마(본각의 마음)항상해서 변하지 아니함이니 이런 까닭으로 이 뜻은 오직 부처님이라야 능히 알 수 있나니라.
이른바 심성이 항상 무념인 연고로 이름을 불변이라 함이요 일법계를 통달 하지 못한 까닭으로 마음이 서로 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생각이 일어난 것을 이름을 무명이라 함이니라.
염심(染心)이란 것이 여섯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섯인고?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의 해탈과 신상응지(信相應地)를 의지해서 멀리 여의는 연고요.
둘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信相應地)를 의지해서 방편(方便)을 수학(修學)하여 점점(漸漸) 능히 상속식(相續識)버려서 정심지(淨心地)를 얻어 정심지(淨心地)에 여의는 연고요.
셋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地相應染)이니 구계지(具戒地)를 의지하여 점점(漸漸)여의어서 이에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 구경에 여의는 연고요.
넷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를 의지해서 능히 여의는 연고요.
다섯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를 의지해서 능히 여의는 연고요.
여섯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菩薩)의 진지(盡地)를 의지해서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서 능히 여의는 연고니라.
일법계(一法界)를 요달(了達)하지 못한다는 뜻은 信相應地(信相應地)로부터 관찰(觀察)하여 배워 끊으며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서 분을 따라 여의며 이에 여래지(如來地)에 이르러 능히 구경에 여의는 연고니라.
相應(상응)이라 말하는 뜻은 이르되 心과 念法(념법)이 다르니 染(염)과 淨(정)의 差別(차별)을 의지하여 知相(지상)과 緣相(연상)이 같은 연고며 不相應(불상응)이란 듯은 이르되 마음 그대로 不覺(불각)이라
항상 별다름이 없어서 知相(지상)과 緣相(연상)이 같지 아니한 연고니라.
또 染心(염심)의 뜻이란 것은 이름을 煩惱(번뇌)라 함이니 능히 眞如(진여)의 根本智(근본지)를 장애하는 연고니라.
無明(무명)의 뜻이란 것은 이름을 智라 함이니 능히 세간의 自然業智(자연업지)를 障碍(장애)하는 연고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染心(염심)을 依支(의지)하여 능히 보고 능히 나타나며 망녕되이 경계를 취하여 평등한 性을 어기는 까닭이며, 一切法(일체법)이 항상 고요해서 일어난 상이 없으나 無明不覺(무명불각)이 망녕되이 법으로 더불어 어기는 연고로 능히 세간의 一切境界(일체경계)를 隨順(수순)해서 가지 가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다시 生滅(생멸)의 相(상)을 分別(분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序(서)니 마음으로 더불어 相應(상응)하는 연고요,
둘째는 細(세)니 마음으로 더불어 相應(상응)하지 않는 연고니라.
또 序(서)의 가운데 序(서)는 凡夫(범부)의 境界(경계)요,
序(서)의 가운데 細(세)와 細(세)의 가운데 序(서)는 菩薩(보살)의 境界(경계)요,
細(세)의 가운데 細(세)는 부처님의 경계니라.
이 두가지 生滅(생멸)이 無明熏習(무명훈습)을 의지하여 있으니 이른바 因(인)을 의지하고 緣(연)을 의지함이니라.
因(인)을 의지한다는 것은 不覺(불각)의 듯인 연고요,
緣(연)을 의지한다고 한다는 것은 망녕되이 境界(경계)를 짓는다는 뜻인 연고니라.
만약 因(인)이 滅(멸)하면 緣(연)도 滅(멸)하나니 因(인)이 멸한 연고로 서로 응하지 않는 마음이 멸함이요,
緣(연)이 멸하는 연고로 서로 응하는 마음이 멸함이니라.
묻되 만약 마음이 滅(멸)한다면 어떻게 相續(상속)하며 만약 相續(상속)한다면 어떻게 究竟滅(구경멸)을 말하리요?
답하되 말한바 滅(멸)이란 것은 오직 心相(심상)이 멸할지언정 心體(심체)가 멸하는 것은 아님이니 마치 바람이 물을 의지하여 움직이는 相(상)이 있으니 만약 물이 멸할진대 風相(풍상)이 끊어져 의지할 바가 없을 것 이어니와 물이 멸하지 아니할 새 風相(풍상)이 상속하나니 오직 바람이 멸하는 연고로 움직이는 모양이 따라서 멸할지언정 이 물이 멸하는 것은 아님이니라.
無明(무명)도 또한 그러해서 心體(심상)를 依支(의지)하여 움직이나니 만약 心體(심체)가 멸할 진대 衆生(중생)이 斷絶(단절)해서 의지 할 바가 없을 것 이어니와 체가 멸하지 아니 할새 마음이 상속함을 얻나니 오직 어리석은 것만 멸하는 연고로 심상이 따라서 滅(멸)할지언정 心智(심지)는 멸하지 아니함이니라.
다시 네가지의 法(법)이 熏習(훈습)하는 뜻이 있는 연고로 染法(염법)과 淨法(정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나니 어떠한 것이 넷인고?
첫째는 淨法(정법)이니 이름이 眞如(진여)요,
둘째는 一切染因(일체염인)이니 이름이 無明(무명)이요,
셋째는 妄心(망심)이니 이름이 業識(업식)이요,
넷째는 妄境界(망경계)니 이른바 六塵(육진)이니라.
熏習한다는 뜻은 마치 世間(세간)의 衣服(의복)이 실은 香氣(향기)가 없으나 만약 사람이 香(향)으로써 熏習(훈습)한 연고로 곧 香氣(향기)가 있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眞如(진여)의 淨法(정법)은 實(실)로 물들임 없으나 다만 無明(무명)으로써 熏習(훈습)하는 연고로 곧 染相(심상)이 있음이요,
無明(무명)의 染法(심법)은 실로 淨業(정업)이 없으나 다만 眞如(진여)로써 훈습하는 연고로
곧 淨(정)의 作用(작용)이 있나니라.
어떻게 (훈습)熏習하여 (심법)染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는고?
이른바 眞如(진여)의 法(법)을 의지하는 연고로 無明(무명0이 있음이요,
無明染法(무명염법)의 因이 있는 연고로 곧 眞如를 熏習(훈습)함이요,
熏習(훈습)하는 연고로 곧 妄心(망심)이 있음이요
妄心(망심)이 있어서 곧 無明(무명)을 훈습하여 眞如(진여)의 法(법)을 了達(요달)하지 못하는 연고로 不覺(불각)의 念(염)이 일어나서 망녕된 경계를 나타냄이요,
망녕된 경계의 染法(염법)의 緣(연)이 있는 연고로 곧 망녕된 마음을 熏習(훈습)하여 그로 하여 금 念着(염착)하여 가지 가지의 業(업)을 지어서 一切(일체)의 몸과 마음 등 괴로움을 받게 하나니라.
이 망경계를 熏習(훈습)하는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增長念熏習(증장념훈습)이요, 둘째는 增長取熏習(증장취훈습)이니라.
妄心을 熏習(훈습)한다는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業識根本熏習(업식근본훈습)이니 능히 阿羅漢(아라한)과 酸支弗(산지불)과 一切菩薩(일체보살)로 생멸의 고를 받게 하는 연고요,
둘째는 增長分別事識熏習(증장분별사식훈습)이니 능히 凡夫(범부)로 業(업)에 얽메인 苦(고)를 받게하는 연고니라.
무명을 熏習(훈습)하는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根本熏習(근본훈습)이니 능히 業識(업식)을 성취하는 뜻인 연고요,
둘째는 所起見愛熏習(소기견애훈습)이니 능히 分別事識(분별사식)을 成就(성취)하는 뜻인 연고니라.
어떻게 熏習(훈습)하여 淨法(정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게 하는고?
이른바 진여의 법이 있는 연고로 능히 無明(무명)을 熏習(훈습)함이요,
熏習한 因緣의 힘인 연고로 곧 妄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즐거히 열반을 구하게 하나니 이 망령된 마음이 싫어하고 求하는 인연이 있는 연고로 곧 眞如를 熏習함이니라.
스스로 自己의 성품을 믿어서 마음이 망녕되이 動(동) 하는지라 앞의 경계가 없는 줄 알아서 멀리 여의는 법을 닦나니 여실히 앞의 境界(경계)가 없는 줄 아는 연고로 가지가지 방편으로 隨順行(수순행)을 일으켜서 취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내지 久遠(구원)의 熏習力(훈습력)인 연고로 無明이 멸하며 무명이 滅하는 연고로 마음이 일어남이 없음이요,
일어남이 없는 연고로 경계가 따라 멸함이요,
因緣이 함께 멸하는 연고로 心相(심상)이 다함일새.
이름을 涅槃(열반)을 얻어 自然業(자연업)을 이룸이라 함이니라.
妄心熏習(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分別事識熏習(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凡夫(범부)와 二乘(이승)들이 生死(생사)의 苦를 싫어함을 의지하여 힘의 능한 바를 따라서 漸次(점차)로 無上道(무상도)에 취향하는 연고요,
둘째는 意熏習(의훈습)이니 이르되 모든 보살이 發心勇猛(발심용맹)하야 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연고니라.
眞如熏習(진여훈습)의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自體相熏習(자체상훈습)이요,
둘째는 用熏習(용훈습)이니 自體相熏習(자체상훈습)이란 것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無漏(무루)의 法을 갖추어서 不思義業(불사의업)과 境界(경계)를 짓는 性을 갖추어 있나니 이 두가지 뜻이 항상 훈습함을 의지해서 힘이 있는 연고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즐거이 涅槃(열반)을 구하여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의 법이 있는 줄 믿어서 發心(발심)하여 修行(수행)하게 함이니라.
묻되 만약 이와 같은 뜻일진대 일체중생이 다 眞如가 있어서 平等(평등)하게 다 熏習(훈습)하거늘 어찌하여 信(신)이 있고 信(신)이 없으며, 한량없이 前後(전후)에 差別(차별)하는고,
다 응당 일시에 스스로 진여의 법이 있음을 알아서 부지런히 方便(방편)을 닦아서 평등히 열반에 들게 하리요?
답하되 眞如(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無量無邊(무량무변)의 無明(무명)이 있어서 본래부터 自性(자성)이 차별해서 厚薄(후박)이 같지 아니한 연고로 恒河沙等上(항하사등상)에 지나는 煩惱(번뇌)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我見愛染(아견애염)의 번뇌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이 일체의 煩惱(번뇌)가 無明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바라,
前後(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을 오직 如來(여래)만이 능히 아는 연고라.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이 因이 있고 緣이 있으니 因緣(인연)이 구족하여야 이에 판단함을 얻나니 마치 나무 가운데 火性(화성)이 이 불의 正因(정인)이나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方便(방편)을 가자하지 아니하면 능히 스스로 나무를 불 사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나니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비록 正因熏習(정인훈습)의 힘은 있어나 만약 모든 불보살과 善知識(선지식)등을 만나서 이로써 반연하지 아니하면 능히 스스로 번뇌를 끊어서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이 곧 옳은 곳이 없나니 만약 비록 外緣(외연)의 힘이 있으나 안으로 정법이 아직 熏習의 힘이 있지 아니한 자면 또한 능히 究竟(구경)에 生死(생사)의 고를 싫어하여 즐거이 열반을 구하지 못함이니라.
만약 인연이 具足(구족)한 者는 이른바 스스로 熏習(훈습)의 힘이 있고 또 모든 佛菩薩(불보살)들의 慈悲願護(자비원호)함이 되는 연고로 능히 고를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 열반이 있는 것을 믿어서 善根(선근)을 修習(수습)함이니 善根(선근)을 닦아서 成熟(성숙)한 연고로 곧 모든 佛菩薩(불보살)의 교를 보여 利喜(이희)케 함을 만나서 이에 능히 進趣(진취)하여 涅槃(열반)의 도에 向(향)하게 함이니라.
用熏習(용훈습)이란 것은 곧 이 衆生(중생)의 外緣(외연)의 힘이니 이와 같이 外緣(외연)이 限量(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간략히 두 가지로 설하리라.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差別緣(차별연)이요,
둘째는 平等緣(평등연)이니 差別緣(차별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모든 佛菩薩 등을 의지하여 처음에 뜻을 발하여 비로서 도를 구할 때로부터 이에 佛에 이르기까지 저 가운데
만약 보거나 생각하면 혹은 眷屬(권속)과 父母(부모)와 모든 親戚(친척)도 되며, 혹은 給使(급사)도 되며 혹은 知友(지우)도 되며, 혹은 寃家(원가)도 되며, 혹은 四攝法(사섭법)을 일으켜서 이에 일체의 짓는 바 무량한 行緣에 이르기까지 大悲熏習의 힘을 일으켜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善根(선근)을 增長(증장)하여 저 보고 들음에 이익을 얻게 하는 연고니라.
이 緣(연)이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두 가지 인고?
첫째는 近緣(근연)이니 속히 제도를 얻게 하는 연고요.
둘째는 遠緣(원연)이니 久遠劫(구원겁)에 제도를 얻게 하는 연고니라.
이 近(근)과 遠(원)의 二緣(이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增長行緣(증장행연)이요,
둘째는 受道緣(수도연)이니라.
平等緣(평등연)이란 것은 일체의 모든 佛菩薩이 다 일체의 중생을 도탈하기를 원하사 自然 熏習(자연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 해서 同體(동체)의 智力(지력)을 쓰는 연고로 보고 들음을 따라 응해서 作業(작업)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중생이 三昧(삼매)를 의지하여야 이에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親見(친견)함을 얻는 연고니라.
이 體用(체용)의 熏習(훈습)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未相應(미상응)이니 이르되 凡夫二乘(범부이승)과 처음 뜻을 발한 보살들이 意(의)와 意識(의식)으로 熏習(훈습)해서 信力(신력)을 의지한 연고로 능히 修行(수행)하나 분별이 없는 마음이 體(체)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지 못한 연고며, 自在業(자재업)으로 수행하여 用(용)으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지 못한 연고요,
둘째는 己相應(기상응)이니 이르되 法身菩薩(법신보살)이 분별 없는 마음이 모든 부처님의 智用(지용)으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음이니 오직 法力(법력)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여 眞如(진여)를 熏習(훈습)해서 무명을 滅(멸)하는 연고니라.
다시 染法(염법)이 비롯함이 없음으로부터 오므로 熏習(훈습)하여 끊어지지 않다가 이에 부처를 얻은 뒤에야 곧 끊어짐이 있음이요,
淨法熏習(정법훈습)은 끊어짐이 없어서 미래를 다함이니 이 뜻이 어떠한고?
眞如法(진여법)이 항상 熏習(훈습)하는 연고로 망녕된 마음은 곧 滅(멸)하고 法身(법신)이 나타나 用熏習(용훈습)을 일으킴일세 그러므로 끊어짐이 없나니라.
다시 眞如自體相(진여자체상)이란 것은 일체의 凡夫, 聲聞, 緣覺, 菩薩(범부, 성문, 연각, 보살) 모든 부처님이 더하고 덜함이 없어서 前際(전제)에 生(생)한 것도 아니며 後際(후제)에 滅(멸)하는 것도 아님이니 畢竟(필경)에 항상 해서 본래로부터 옴으로 自性(자성)에 일체의 功德(공덕)이 滿足(만족)하니 이른바 自體(자체)에 大智慧光明(대지혜광명)의 뜻이 있는 연고며, 法界(법계)에 두루 비추는 뜻인 연고며, 진실로 아는 뜻인 연고며,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의 뜻인 연고며, 常樂我正(상락아정- 열반의 네가지 덕〔四德], 즉 열반은 영원하며〔常〕, 안락에 가득차고〔樂〕, 절대이며〔我〕, 청정하다〔淨〕는 것)의 뜻인 연고며, 淸凉(청량)하고 不變(불변)하는 自在(자재)의 뜻인 연고니, 이와 같이 恒河沙(항하사)에 지나는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不思義佛法(불사의불법)을 具足(구족)하여 이에 만족함에 이르러 조금도 모자라는 바의 뜻이 없는 연고로 이름을 如來藏(여래장)이라 하며 또한 이름을 如來法身(여래법신)이라 함이니라.
묻되 위에서 설하되 眞如(진여)는 그 體(체)가 평등하여 일체의 相(상)을 여의었다고 하고 어찌하여 다시 體(체)에 이와 같은 가지가지의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고?
답하되 비록 진실로 이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差別(분별)의 상이 없어서 一味(일미)가 等同(등동)하여 오직 하나인 진여 뿐이니 이 뜻이 어떠한고?
分別이 없으며 分別의 상을 여의었나니 이런 연고로 둘이 없나니라.
다시 무슨 뜻으로 차별을 설하는고?
業識(업식)의 生滅相(생멸상)을 의지하여 보임이니라.
이것을 어떻게 보였는고?
일체의 법이 본래 오직 마음 뿐이라
실로 념이 없으나 망심이 있어서 불각의 념을 일으켜서 모든 境界(경계)를 봄일세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이라 함이니 心性(심성)이 일어나지 아니 하면 곧 이것이 大智慧光明(대지혜광명)의 뜻인 연고니 만약 마음이 見(견)을 일으키면 곧 不見(불견)의 相(상)이 있거니와 心性(심성)이 見(견)을 여의면 곧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인 연고니라.
만약 마음이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自性(자성)이 없어서 常(상)도 아니요, 樂(락)도 아니며, 我(아)도 아니요, 淨(정)도 아님이니 熱惱(열뇌)하고 衰變(쇠변)하면 곧 자재하지 못하며, 내지 恒河沙(항하사)에 지나는 等(등) 망념의 뜻을 갖추어 있으니 이 뜻을 對(대)한 연고로 心性(심성)이 움직임이 없으면 곧 恒河沙에 지나는 등 모든 淨功德相(정공덕상)의 뜻을 示現(시현)함이 있나니라.
만약 마음이 일어남이 있어서 다시 前法(전법)을 가히 생각할 것을 보는 자는 곧 모자라는 바가 있거니와 이와 같이 淨法(정법)의 무량한 공덕이 곧 이 일심이라 다시 생각할 바가 없음일세 이런 연고로 만족함이니 이름을 法身如來(법신여래)의 장이라 함이니라. 다시 진여의 用(용)이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 본래 因地(인지)에 있어서 큰 慈悲(자비)를 발하여 모든 波羅蜜(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攝化(섭화)하며, 큰 서원을 세워 다 평등히 중생계를 度脫(도탈)코저 하며, 또한 劫數(겁수)를 한정하지 아니해서 미래를 다하며, 일체중생을 취하지 아니함이니 이것이 무슨 뜻인고?
이르되 여실히 일체의 중생과 다만 自己(자기)의 몸이 如實平等(여실평등)하여 별 다름이 없는 줄 아는 연고니라. 이와 같은 큰 方便(방편)의 智慧(지혜)가 있어 無明(무명)을 除滅(제멸)하고 本法身(본법신)을 보아서 自然(자연)히 不思議(부사의)한 業의 가지가지의 用(용)이 있는지라 곧 진여로 더불어 평등해서 일체처에 두루하며, 또한 用相(용상)을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무슨 까닭인고?
이르되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이 法身智相(법신지상)의 몸이라 第一義諦(제일의체)에는 世俗境界(세속경계)가 없어서 施作(시작)을 여의었건만 다만 중생의 보고 듣는 것을 따라 利益(이익)을 얻게 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用(용)이라고 함이니라.
이 用(용)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分別事識(분별사식)을 의지한 凡夫(범부)와 二乘(이승)의 마음에 보는 바른 이름을 應身(응신)이라 함이니 轉識(전식)의 나타남인 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밖으로 좁혀 옴을 보아서 色(색)의 分齊(분제)(즉 色相(색상)의 限界(한계)를 취하나니 능히 다 알지 못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業識(업식)을 의지함이니 이르되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으로부터 이에 菩薩(보살)의 究竟地(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보는 바를 이름을 報身(보신)이라 함이니라.
몸에 한량 없는 빛깔이 있으며 빛깔에 한량 없는 모양이 있으며 모양에 한량없는 좋은 것이 있으니 머무르는 바의 依果(의과)(즉 依報器世界(의보기세계))에도 또한 한량없는 가지 가지의 莊嚴(장엄)이 있어서 곳을 따라 示現(시현)해서 곧 갓이 없으며, 가히 다할 수 없어서 分齊(분제)의 相(상)을 여의었으며, 그 應(응)할 바를 따라서 항상 능히 머물러 가져서 헐지도 아니하고 잃지도 아니함이니 이와 같은 공덕이 다 모든 波羅蜜等(바라밀등) 샘이 없는 行熏(행훈)과 및 不思議(부사의)한 熏習(훈습)을 因(인)하여 成就(성취)한바라 한량없는 樂相(樂相)이 具足(구족)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報身(보신)이라 함이니라. 또 凡夫의 보는 바는 이것은 그 序色(서색)이니 六道衆生(육도중생)이 各各(각각) 보는 것이 같지 아니 하여 가지가지의 다른 무리가 樂相(낙상)을 받지 못함을 따를새 설하여 應身(응신)이라 함이니라.
다시 처음에 뜻을 발한 보살들이 보는 바는 깊이 진여의 법을 믿는 연고로 少分(소분)을 보는지라 저 色相莊嚴等(색상장엄등)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서 分齊(분제)를 여의었나니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서 진여를 여의지 아니한 줄 아나니라.
그러나 이 보살이 오히려 스스로 분별하는 것은 아직 法身(법신)의 位(위)에 들지 못한 까닭이니 만약 淨心(정심)을 얻으면 보는 바가 微妙(미묘)하여 그 用(용)이 더욱 수승 할 것이요. 이에 菩薩地盡(보살지진)에 이르면 보는 것이 究竟(구경)일 것이며, 만약 업식을 여의면 곧 보는 相(상)이 없을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法身(법)은 彼此(피차)의 색상으로부터 서로 볼 수 없는 연고니라.
묻되 만약 모든 부처님의 法身(법신)이 色相(색상)을 여의었다면 어찌하여 능히 색상을 나투는고?
답하되 곧 이 법신이 이 色相(색상)의 體(체)인 연고로 능히 色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본래부터 옴으로 빛깔과 마음이 둘이 아닌 것이니 色性이 곧 智인 연고로 色의 體가 형상이 없으니 이름을 智身이라 설함이요,
智性이 곧 색인 연고로 이름을 法身이 一切處에 두루한 것이라 설함이니라.
나타난 바의 색이 分齊가 있지 아니한지라 마음을 따라서 능히 十方世界의 한량없는 菩薩과 한량 없는 報身과 한량 없는 莊嚴(장엄)을 示現(시현)하니 각각 差別(분별)해서 다 분제가 없으나 서로 妨害(방해)하지 않는지라 이것은 심식의 분별로 능히 알지 못할지니 진여의 자재한 用의 듯인 까닭이니라.
다시 生滅門(생멸문)으로 보아 곧 眞如門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五陰(오음)을 미루어 구하면 色과 마음이며 六塵(육진)의 경계는 畢竟(필경)에 念(염)이 없는 것이니 마음은 形相(형상)이 없는 지라 十方(십방)에 구할지라도 마침내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마치 사람이 迷(미)한 고로 東을 일러 西라 하나 方位는 실로 轉(전)하지 않는 것과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無明(무명)의 迷(미)인 연고로 마음을 일러 念(염)이라 하나 마음은 實(실)로 움직이지 않나니라. 만약 능히 觀察(관찰)해서 마음이 無念(무념)인줄 알면 곧 隨順(수순)하여 眞如門(진여문)에 들어감을 얻는 연고니라. 邪執(사집)을 對治(대치)한다는 것은 일체의 邪執(사집)이 다 我見(아견)을 의지했으니 만약 我를 여의면 곧 邪執(사집)이 없어짐이니라.
이 我見(아견)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人我見(인아견)이요, 둘째는 法我見(법아견)이니라.
人我見(인아견)이라 함은 모든 凡夫(범부)를 의지해서 다섯 가지가 있음을 설했으니 어떤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修多羅(수다라)에 설하사대 여래의 法身이 畢竟(필경)에 寂寞(적막)하여 마치 虛空(허공)과 같다고 함을 듣고 執着(집착)함을 破(파)하기 위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곧 이르되 허공이 如來(여래)의 性이라 하나니라.
어떻게 對治(대치)하는고? 허공의 상은 이것이 그 망녕된 법이라, 體(체)에는 실답지 못함이 없음을 밝혔으니 色(색)을 對(대)하는 고로 있는 지라 이것이 가히 볼 相(상)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生滅(생멸)케 하나니 일체의 法이 본래 이 마음이라 실로 外色이 없음이니 만약 색이 없으면 곧 虛空(허공)의 相이 없나니라.
이른바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이 망녕되이 일어난 연고로 있음이니 만약 마음이 망녕되이 움직임을 여의면 곧 일체의 경계가 滅(멸)할 것이요. 오직 하나인 眞心이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나니 이것은 이르되 如來의 넓고 큰 性智究竟(성지구경)의 뜻이라 허공의 相과는 같지 않는 연고니라.
둘째는 修多羅(수다나)에 설하사대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 체가 공하며 乃至(내지) 涅槃(열반) 眞如의 법이라도 도한 畢竟(필경)에 空(공)하여 본래 스스로 공한지라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 함을 듣고 執着(집착)함을 파하기 위한 것인 줄을 일지 못하는 연고로 곧 이르되 眞如涅槃(진여열반)의 性(성)도 오직 이 공한 것이라 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진여법신은 自體가 공하지 아니하여 한량없는 性功德(성공덕)이 구족한 것을 밝힌 연고니라.
세째는 修多羅(수다나)에 說하사대 여래의 藏(장)이 增減(증감)이 없어서 체에 일체공덕의 법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곧 이르되 여래의 藏(장)이 色心法(색심법)이 있어서 自相(자상)이 차별한다 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오직 眞如의 듯을 의지하여 설한 연공요, 生滅染(생멸염)의 듯을 인하여 示現(시현)으로 차별을 설한 연고니라.
넷째는 修多羅(수다나)에 설하사대 일체세간의 生死染法(생사염법) 이다
如來藏(여래장)을 의지하여 있는지라,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아니 했다.
함을 듣고 알지 못하는 연고로 이르되 如來藏(여래장)의 자체에 一切世間(일체세간)의 生死等法(생사등법)이 갖추어 있다 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如來藏이 본래부터 오직 恒河沙(항하사)에 지나는 等(등) 모든 性功德(성공덕)이 있어 여의지도 아니하고 끊어지지도 아니 해서 眞如의 뜻과 다르지 아니한 연고니라.
恒河沙(항하사)에 지나는 等(등) 煩惱(번뇌)의 染法(염법)은 오직 이 망으로 있는 지라 성품이 스스로 본래 없어서 비롯없는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일찍 如來藏(여래장)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지 못한 연고니 만약 如來藏(여래장)이 體(체)에 妄法(망법)이 있을 진대 하여금 證得理會(증득이회)함에 길이 망을 쉰다는 것이 옳은 곳이 없나니라.
다섯째는 修多羅(수다나)에 설하사대 如來藏(여래장)을 의지하는 연고로 생사가 있으며 如來藏을 의지하는 연고로 涅槃(열반)을 얻는다 함을 듣고 理解(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이르되 중생이 비롯함이 있다하며, 비롯함을 보는 까닭으로 다시 이르되 여래의 얻은 바 열반도 그 終盡(종진)이 있어 도리어 중생을 짓는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고?
여래의 장이 前際(전제)가 없는 연고로 無明(무명)의 相(상)도 또한 비롯함이 없으니 만약 三界(삼계)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일어남이 있다고 말하면 곧 이것은 外道經(외도경)의 설이니라.
또 如來藏(여래장)이 後際(후제)가 없으니 모든 부처님의 얻은 바 涅槃(열반)도 이로 더불어 서로 응해서 곧 後際(후제)가 없는 연고니라. 法我見(법아견)이라 함은 二乘(이승)의 鈍根(둔근)을 의지하는 연고로 如來가 다만 爲하여 人無我만 설했으나 설한 것이 究竟(구경)이 아닌지라 五陰生滅(오음생멸)의 법이 있는 것을 보아서 생사를 두려워하고 망령되이 열반을 취하나니 어떻게 對治(대치)할 것인고?
五陰(오음)의 법은 자성이 생하지 아니하여 곧 滅(멸)함이 없으니 본래 涅槃(열반)인 까닭이니라. 다시 究竟(구경)에 망령된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마땅히 알라 染法(염법)과 淨法(정법)이다. 相待(상대)하는지라, 자체의 상을 가히 말할 수 없음이니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色도 아니요, 心도 아니며, 智도 아니요, 識(식)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지라, 畢竟(필경)에 可히 相을 설할 수 없건만 言說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라 如來가 善巧(선교)한 방편으로 언설을 假藉(가자)해서 중생을 引導(인도)하시니 그 旨趣(지취)는 다 念(염)을 여의고 眞如(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니 일체의 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生滅케 해서 實智(실지)에 들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니라.
分別發趣道相(분별발취도상)이라 함은 이르되 일체 모든 부처님의 증득한 바 도에 일체의 菩薩(보살)이 발심수행하여 趣向(취향)하는 듯인 연고니라. 간략히 말하면 발심에 세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셋인고?
첫째는 믿음을 성취한 발심이요,
둘째는 알고 행하는 발심이요,
셋째는 증득한 발심이니라.
信成就發心(신성취발심)이라 함은 어떠한 사람을 의지하며 어떠한 행을 닦아야 信成就(신성취)함을 얻어 감히 능히 발심 할 것인고? 이른바 不定聚(부정취)의 중생이 善根(선근)을 熏習(훈습)한 힘이 있는 연고로 業果報(업과보)를 믿어 능히 十善(십선)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無上菩提(무상보제)를 구하고자하여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친히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을 닦아 행하되 일만겁을 지나서 신심을 성취하는 연고로 모든 불보살이 가르쳐서 하여금 발심케하며 혹은 大悲(대비)를 쓰는 연고로 능히 스스로 발심하며 혹은 정법이 멸하고자 함을 인해서 법을 保護(보호)하는 인연을 쓰는 연고로 능히 스스로 발심하나니 이와 같이 신심을 成就(성취)하여 발심함을 얻는 자는 正定聚(정정취)에 들어가서 필경에 물러가지 아니하나니 이름이 여래종 가운데에 머물러서 정인과 서로 應(응)함이니라.
만약 어떤 중생이 善根(선근)이 微少(미소)하여 久遠以來(구원이래)에 煩惱(번뇌)가 深厚(심후)함으로 비록 부처님을 만나 또한 공양을 올리나 그러나 人天種子(인천종자)만을 일으키며 혹은 이승의 종지만을 일으키나니 설사 大乘(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더라도 근기가 일정하지 아니한지라
혹은 前進(전진)하고 혹은 後退(후진)하며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이 있으되 一萬劫(일만겁)을 지나지 아니해서 도중에 불연을 만나 또한 발심함이 있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色相(색상)을 보고 그 마음을 발하며 혹은 여러 스님께 공양함을 인해서 그 마음을 발하며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을 인하여 발심하며 혹은 다른 이에게 배워서 발심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발심은 다 일정하지 아니 해서 만약 악인연을 만나면 혹은 문득 물러가서 이승의 자리에 떨어짐이니라.
다시 믿음을 성취하여 마음을 발한다는 것은 어떠한 마음을 發한다는 것인고?
간략히 세가지로 설함이니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올바른 眞如의 法을 생각하는 연고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즐거이 일체의 모든 善行(선행)을 모으는 연고요.
셋째는 대비심이니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빼어 주고자 하는 연고니라.
묻되 위에서 설하기를 법계가 一相(일상)이요, 佛體(불체)가 둘이 없다 하였거늘 무슨 까닭으로 오직 眞如(진여)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善行(선행)을 구하고 배움을 假藉(가자)하는고?
답하되 譬喩(비유)하면 큰 摩尼寶(마니보)가 體性(체성)이 밝고 조촐하나 鑛穢(광예)의 때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보배의 性을 생각하나 방편으로써 가지 가지로 갈고 다스리지 아니하면 마침내 淸淨(청정)함을 얻을 수 없는거와 같나니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體性(체성)이 空淨(공정)하나 한량없는 煩惱(번뇌)의 때에 물듦이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方便(방편)으로써 가지가지로 熏修(훈수)하지 않으면 또한 청정함을 얻지 못하나니 때가 限量(한량)이 없어서 일체의 법에 두루한 까닭으로 일체의 善行(선행)을 닦아서 대치함이니 만약 사람이 일체의 선법을 닦아 행하면 자연히 진여의 법에 歸順(귀순)하는 연고니라.
간략히 말하면 방편에 네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고?
첫째는 行根本方便(행근본방편)이니 이르되 일체의 법이 자성이 무생인 것을 觀(관)해서 妄見(망견)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 하며, 일체의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과를 잃지 않음을 관해서 대비를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攝化(섭화)해서 열반에 머물지 아니함이니 법성의 머무름이 없음을 隨順(수순)한 까닭이니라.
둘째는 능히 그치는 방편이니 이르되 부끄럽게 여기고 허물을 뉘우쳐 능히 일체의 악법을 그쳐서 하여금 더 자라지 않게 함이니 법성의 모든 허물 여읜 것을 隨順(수순)하는 까닭이니라.
셋째는 선근을 發起(발기)해서 增長(증장)한는 방편이니 이르되 부지런히 삼보에게 공양하고 예배하며, 讚歎(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 勸請(권청)하나니 三寶(삼보)를 愛敬(애경)하는 淳厚(순후)한 마음인 까닭으로 믿음이 增長(증장)하여 이에 능히 뜻으로 무상의 도를 구하며, 또 불법승의 힘에 慰護(위호)한 바를 인한 연고로 능히 業障(업장)을 消滅(소멸)하여 善根(선근)을 退(퇴)하지 아니함이니 法性(법성)의 痴障(치장)을 여읜 것을 隨順(수순)하는 까닭이니라.
넷째는 대승이 평등한 방편이니 이른바 원을 발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일체중생을 교화제도해서 하여금 남음이 없게 하며, 다 하여금 남음이 없는 열반에 구경케
함이니 法性(법성)이 끊임없음을 수순하는 까닭이요, 法性(법성)이 광대하여 일체에 두루해서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피차를 염하지 아니 해서 구경에 적멸한 까닭이니라.
보살이 이 마음을 발한 까닭으로 곧 少分(소분)으로 法身(법신)봄을 얻음이니 법신을 보는 연고로 그 願力(원력)을 따라서 능히 여덟가지를 나투어서 중생을 이익케 하나니 이른바 兜率天(두솔천)으로부터 퇴하여 태에 들어가 태에 머물다가 태에서 나와 출가하여 도를 이루어서 법륜을 굴리시고 열반에 드신 것이시니라. 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은 그 과거 무량한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有漏(유루)의 업을 능히 결단하지 못한지라 그 나는 바를 따라서 적은 괴로움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나 또한 업에 얽메이는 것이 아님이니 큰 원력의 자재로운 힘이 있는 까닭 이니라.
저 修多羅 가운데 혹은 惡趣(악취)에 떨어짐이 있다고 설한 것은 그 실로 퇴함이 아닌지라 다만 초학의 보살이 아직 正位(정위)에 들지 못하여 懈怠(해태)한 者(자)를 위해서 두려웁게 하여 저로 하여금 勇猛(용맹)케 하는 까닭이니라. 또 이 보살이 한번 발심한 뒤에는 怯弱(겁약)을 멀리 여의어 필경에 이승지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만약 無量無邊(무량무변)한 아승지겁에 어려운 행을 부지런히 하여 이에 열반을 얻는다
함을 들을지라도 또한 怯弱치 않나니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옴으로 스스로 열반인 줄 믿어 아는 까닭이니라.
알고 행하는 발심이라 함은 마땅히 알라 轉勝(전승)이니 이 보살이 처음 정신으로부터 오면서 第一阿僧祗劫(제일아승지겁)이 장차 만족코자 하는 연고로 진여의 法中(법중)에서 깊이 아는 것이 앞에 나타나 닦는 바가 相을 여읜 것이니 法性의 체에는 俟貪(사탐)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隨順(수순)하여 檀波羅蜜(단파라밀)을 수행하며, 法性(법성)에는 물듦이 없어서 五欲(오욕)의 허물 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尸波羅蜜(시파라밀)을 수행하며, 法性(법성)에는 괴로움이 없어서 瞋惱(진뇌)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提波羅蜜(제파라밀)을 수행하며, 法性(법성)에는 몸과 마음의 相이 없어서 懈怠(해태) 여읨을 아는 연고로 隨順(수순)하여 毘梨耶波羅蜜(비리야파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에는 恒常(항상) 定(정)하여 體(체)에 어지러움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禪波羅蜜(선파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에는 體(체)가 밝아서 無明(무명)을 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般若波羅蜜(반야파라밀)을 修行(수행)함이니라.
證發心(증발심)이라 함은 淨心地(정심지)로 보아 이에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도록 무슨 경계를 증득함인고? 이른바 진여인 것이니 轉識(전식)을 의지해서 설하여 경계라고 했으나 이를 증득한 이는 경계가 없음이요, 오직 진여지 뿐이니 이름을 法身(법신)이라 함이니라.
이 菩薩(보살)이 一念頃(일념경)에 능히 十方無餘(십방무여)세계에 이르러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法輪(법륜)을 전하시기를 청하나니 오직 중생을 개도하여 이익케 하기 위함이언정 문자를 의지하지 아니 했으며, 혹은 十地에 뛰어나 속히 正覺(정각) 이룸을 보인 것이니 怯弱(겁약)한 중생을 위한 연고요. 혹은 내가 무량한 阿僧祗劫(아승지겁)에 마땅히 불도를 이루리라 설하여 懈慢(해만)한 중생을 위한 연고니라. 능히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을 보인 것이 가히 思量(사량)하고 論議(논의)할 수 없으나 실로 보살은 種性(종성)과 근이 같으며, 발심이 같으며, 증득한 바가 또한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일체보살이 다 三阿僧祗劫(삼아승지겁)을 지나는 연고니라.
다만 중생의 세계가 같지 아니함과 보는 바와 듣는 바의 根과 欲(욕)과 性이 다름을 따랐을세 그러므로 행한 바가 또한 差別(차별)이 있음을 보였나니라.
또 이 보살의 발심한 상이 세가지 마음의 微細(미세)한 相(상)이 있으니 어떠한 것을 셋이 라 하는고? 첫째는 眞心(진심)이니 분별이 없는 까닭이요. 둘째는 方便心(방편심)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業識心(업식심)이니 미세하게 起滅(기멸)하는 까닭이니라. 또 이 보살이 功德(공덕)이 成滿(성만)하여 色究竟處(색구경처)에 일체세간의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나니 이르되 한 생각이 응한 지혜로써 무명이 문득 다한 것이 이름이 一切種智(일체종지)이니 자연히 不思議(부사의)한 업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하게 하나니라.
묻되 허공이 갓이 없는 연고로 세계가 갓이 없음이요. 세계가 갓이 없는 연고로 중생이 갓이 없음이요. 중생이 갓이 없는 연고로 心行(심행)의 차별도 또한 다시 갓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경계는 가히 分齊(분제)할 수 없는지라 알기가 어려우나 만약 무명을 끊으면 心想(심상)이 있을 수 없거니 어떻게 능히 알관대 이름을 일체의 種智(종지)라 하는고?
답하되 一切境界(일체경계)가 본래 한 마음인지라 想念(상념)을 여의었건마는 중생들이 망녕되이 경계를 보는 연고로 마음에 分齊(분제)가 있음이요 망녕되이 상념을 일으켜서 법성에 稱合(칭합)하지 못하는 연고로 능히 알지 못하거니와 모든 부처님은 見相(견상)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시니 마음이 진실한 까닭이며, 곧 이것이 모든 법의 자성이니라 自體가 일체의 妄法을 드러내 비추어 大智用이 있어서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이 응하여 아는 바를 따라서 다 능히 가지 가지의 법의를 열어 보이나니 이런 연고로 이름을 一切種智라 함이니라.
또 묻되 만약 모든 부처님이 자연의 업이 있어서 능히 일체처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케 할 진대 일체 중생이 혹 그 몸을 보거나 혹 神變(신변)을 보거나 혹 그 말씀을 들으면 이익을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어는 어찌하여 세간에는 능히 보지 못함이 많은고?
답하되 모든 부처님은 법신이 평등하사 일체처에 두루하사대 뜻을 지음이 없는 연고로 자연이라 말하나 다만 중생의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나니 중생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음이니 이와 같아서 중생도 마음에 만약 때가 있으면 法身이 나타나지 않는 연고니라.
◆ 이미 解釋分(해석분)을 설하고 다음에 수행신심분을 설하리라,
이 가운데 正定聚(정정취)에 들지 못한 중생을 의지하는 연고로 修行信心(수행신심)을 설함이니라.
어떤 것이 신심이며, 어떤 것이 수행인고?
간략히 說하면 信心에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고?
첫째는 근본을 믿음이니 이른바 즐거이 眞如의 法을 생각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부처님에게 무량한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親近(친근)해서 고양하고 恭敬(공경)하기를 생각하며, 선근을 일으켜서 一切智(일체지) 求(구)하기를 원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는 것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波羅蜜(파라밀) 수행하기를 생각하는 까닭이요, 넷째는 僧(승)이 能히 올바로 修行하여 自利利他함을 믿음이니 항상 즐거이 모든 菩薩衆(보살중)을 親近(친근)해서 如實(여실)한 行을 배우기를 求하는 까닭이니라.
修行에 다섯가지 門이 있어서 能히 이 信을 이룸이니 어떤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布施門(포시문)이요,
둘째는 持戒門(지계문)이요,
셋째는 忍辱門(인욕문)이요,
넷째는 精進門(정진문)이요,
다섯째는 止觀門(지관문)이니라, 어떻게 布施門(포시문)을 修行하는고?
만약 一切衆生(일체중생)이 와서 求하여 찾는 者를 보면 所有한 財物을 힘을 따라서 베풀어 주어 자기의 俟貪(사탐)을 버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며, 만약 厄難(액난)과 恐怖(공포)와 위험스러운 逼迫(핍박)을 보면 자기의 堪任(감임) 할바를 따라 無畏(무외)를 베풀어 주며, 만약 어떤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면 자기의 능히 아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설하되 응당 名利(명리)와 恭敬(공경)을 탐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리와 이타만을 생각하여 菩提(보제)에 回向(회향)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지계문을 수행하는고?
이른바 살생도 아니하고, 도둑질도 아니하고, 음행도 아니하며, 양설도 아니하고, 나쁜 말도 아니하고, 거짓말도 아니하고, 꾸미는 말도 아니하며, 貪心, 嫉妬, 詐欺, 阿諂, 瞋喪, 邪見(탐심, 질투, 사기, 아첨, 진상, 사견)을 멀리 여읨이니라 만약 출가한 자일진댄 번뇌를 折伏(절복)하기 위한 연고로 또한 응당 시끄러운 곳을 멀리 여의고 항상 고요한 데 머물러 慾心(욕심)이 없고 만족할 줄 아는 頭陀等(두타등)의 행을 修習(수습)하며, 내지 적은 허물이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서 부끄러워하여 뉘우쳐 고치고 如來께서 制定(제정)하신바 禁戒(금계)를 가벼히 여기지 아니하며, 마땅히 譏弄(기롱)과 嫌疑(혐의)를 막아 두호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망녕되이 죄과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인문을 修行하는고?
이른바 다른 사람이 괴롭게 함을 응당히 참아서 마음에 보 갚음을 품지 아니하며, 또한 마땅히 이롭게 하거나, 헤롭게 하거나, 훼방하거나, 기리거나, 칭찬하거나, 희롱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등 법을 참는 연고니라. 어떻게 進門(진문)을 수행하는고?
이른바 모든 착한 일에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해서 立志(입지)가 堅强(견강)하여 怯弱(겁약)함을 멀리 여의며 마땅히 과거 久遠(구원)으로 부터 이미 옴으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으로 큰 괴로움을 받아 이익이 없음을 생각할새 이런 연고로 응당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속히 여러가지 괴로움을 여읨이니라.
다시 어떤 사람이 비록 信心(신심)을 修行하나 先世(선세)로 부터 옴으로 허다한 무거운 죄악과 업장이 있는 까닭으로 邪魔(사마)와 모든 鬼神(귀신)의 惱亂(뇌란)한 바가 되며, 혹은 세간의 사무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게 되며, 혹은 病苦(병고)에 시달리는 바가 되어 이와 같은 등 많은 障碍(장애)가 있을새 이런 까닭으로 응당히 勇猛精勤(용맹정근)하되 밤낮으로 六時(육시)에 모든 부처님께 禮拜(예배)해서 誠心(성심)으로 懺悔(참회)하며, 勸請(권청)하고 따라 기뻐해서 菩提(보제)에 回向(회향)하되 항상 쉬지 아니해서 모든 障碍(장애)를 면하여 善根이 增長함을 얻는 연고니라.
어떻게 止觀門을 修行하는고?
말한바 止라 것은 이르되 一切의 境界相(경계상)을 그치는 것이니 奢摩他觀(사마타관)의 義를 隨順(수순)하는 연고요. 말한바 觀이라는 것은 이르되 因緣生滅相(인연생멸상)을 分別하는 것이니 毘鉢舍那觀(비발사나관)의 의를 수순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수순하는고? 이 두가지 뜻으로써 漸漸(점점) 수습하여 서로 버리지 아니 하면 止와 觀이 雙(쌍)으로 앞에 나타나는 연고니라.
만약 止를 닦는 자일진대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로 하고 氣息(기식)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形色(형색)에 의지하지 아니하며, 空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며, 地, 水, 火, 風에도 의지하지 아니 하며, 내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에 의지하지 아니해서 일체의 모든 생각을 念(염)을 따라 다 除(제)함이요, 또한 除(제)하였다는 생각까지도 보냄이니 일체의 법이 본래 생각이 없는지라 생각 생각이 생하지도 아니 하며 생각 생각이 멸하지도 않나니라. 또한 마음이 밖으로 경계 생각함을 따른 뒤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除(제)한다고 말지니 마음이 만약 산란하거든 곧 마땅히 거두어 들여 바른 생각에 머물지니라. 이 바른 생각이란 것은 마땅히 알라 오직 마음 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음이니 곧 다시 이 마음이 또한 자체의 모양이 없어서 생각 생각에 가히 얻지 못할지니라. 만약 앉고 일어남을 보아 가고, 오고, 나아가고. 그침과 시작하는 바가 있는 일체의 때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하고 관찰해서 오래 익혀 순숙하면 그 마음이 머물음을 얻으리니 마음이 머물은 까닭으로 점점 맹리하여 수순하여 진여삼매에 들어감을 얻어서 깊이 번뇌가 調伏되고 신심이 증장해서 속히 不退(불퇴)함을 이룸이니라.
오직 疑惑(의혹)과 불신과 誹謗(비방)과 중죄 업장과 我慢(아만)과 懈怠(해태)를 제함이니 이와 같은 등 사람은 능히 들어가지 못할 바니라.
다시 이 삼매를 의지하는 까닭으로 곧 법계가 일상인줄 앎이니 이르되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중생의 몸으로 더불어 平等하여 둘이 없음이니 곧 이름이 일행삼매니라.
마땅히 알라 진여는 이 삼매의 근본이니 만약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능히 무량한 삼매를 생하리니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곧 모든 마군과 외도와 귀신의 惑亂(혹란)하는 바가 되리니 혹 앉아 있는 가운데 形態(形態)를 나타내 두렵게 하거나 혹은 端正(단정)한 남녀들의 모양을 나타내거든 마땅히 오직 마음인줄 염하면 경계가 곧 멸해서 마침내 괴롭히지 못하리라.
혹은 天像(천상)과 보살승을 나투며, 또한 如來像(여래상)을 지어 상호가 구족하며, 혹은 다라니를 설하며, 혹은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설하며, 혹은 평등하고 공해서 모양도 없고, 願(원)도 없고, 怨(원)도 없고, 親(친)함도 없고, 因(인)도 없고, 果(과)도 없어서 畢竟(필경)에 空寂(공적)한 것이 이것이 참다운 열반이라 설하며,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宿命過去(숙명과거)의 일을 알게하며, 또한 미래의 일을 알게 해서 他心智(타심지)를 얻어 辯才(변재)가 거리낌이 없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世間名利(세간명리)의 일을 貪着(탐착)케 하며,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성을 내고 자주 기뻐해서 성품이 항상 되고 準(준)함이 없게 하며 혹은 慈愛(자애)가 많게 하며, 졸음도 많고 疾病(질병)도 많아서 그 마음을 懈怠(해태)하게 하며, 혹은 마침내 정진할 생각을 일으켰다가 뒤에 문득 休廢(휴폐)하고 믿지 않는 마음을 내어서 疑心(의심)이 많고 생각이 많게하며, 혹은 본래 수승한 행을 버리고 다시 잡된 업을 닦게하며, 혹은 世事(세사)에 집착해서 가지 가지로 얽메이게 하며, 또한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삼매를 얻어 少分이라도 서로 비슷하게 하나니 다 이것은 외도의 얻은 바라 참다운 三昧가 아니니라. 혹은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루나 혹 이틀, 혹 사흘로 이에 칠일에 이르고 定中(정중)에 머물러 자연히 향기롭고 아름다운 飮食(음식)을 얻어먹고 몸과 마음이 快適(쾌적)하고 기뻐서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케 하며,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에 分齊(분제)가 없어 졸지에 많이도 하고 적게도 하여 顔色(안색)이 달라지게 하나니 이 뜻을 쓰는 까닭으로 수행하는 자가 항상 응당 지혜로 관찰해서 이 마음으로 하여금 삿되나 그물에 떨어지게 하지 말고 마땅히 부지런히 생각을 바르게 하여 取(취)하지 아니하고 착하지 아니하면 곧 능히 이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의게 되리라.
응당히 알라. 외도의 있는바 三昧는 다 見愛(견애)와 我慢(아만)의 마음을 여의지 아니 했음이니 세간의 명리와 공경을 貪着(탐착)한 연고니라. 眞如三昧란 것은 見相에 머물지 아니하며, 得相에 머물지 아니하며, 내지 定에서 나옴에도 또한 懈弛(해이)하거나 태만함이 없어서 있는바 번뇌가 점점 微薄(미박)해 짐이니라.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의 법을 익히지 아니 하고 여래의 種性(종성)에 얻어들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나니라.
세간의 諸禪三昧(제선삼매)를 닦되 흔히 味着(미착)을 일으켜서 我見에 의지하여 三界에 繫屬(계속)되면 외도로 더불어 같음이니 만약 선지식의 두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소견을 일으키는 까닭이니라. 다시 精勤(정근)해서 專心(전심)으로 이 삼매를 修學하는 者는 현세에 마땅히 열가지 이익을 얻나니 어떠한 것이 열 가지가 되는고?
첫째는 항상 十方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護念(호념)하는 바가 될 것이요.
둘째는 모든 마군과 아귀에 능히 두려운 바가 되지 않을 것이요.
셋째는 구십오종의 外道와 귀신의 혹란하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요.
넷째는 심히 깊은 법을 誹謗(비방)함을 멀리 여의어서 重罪(중죄)와 업장이 점점 미박해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일체의 疑惑과 모든 나쁜 覺觀(각관)-(즉 分別心)을 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모든 여래의 경계에 믿음이 增長함을 얻는 것이요.
일곱째는 근심 걱정을 멀리 여의어서 생사 가운데에서도 용맹스러워서 겁내지 않을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柔和(유화)하여 驕慢(교만)함을 버려서 타인의 괴롭게 하는 바가 되지않을 것이요.
아홉째는 비록 定力은 얻지 못하였으나 일체의 때와 일체경계의 곳에서 곧 능히 번뇌를 減損(감손)하여 世間事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열째는 만약 三昧를 얻으면 外緣(외연)의 일체음성에 놀라 움직이는 바가 되지 않으리라.
다시 어떤 사람이 오직 止만 닦는 다면 마음이 가라앉게 될 것이며, 혹 懈怠(해태)함을 일으켜 모든 善을 즐기지 아니 하고 大悲를 멀리 여의나니 이런 까닭으로 관을 닦음이니라.
觀을 修習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세간의 有爲法이 오래 머무는 것이 없어서 須臾(수유)에 變壞(변괴)하며 일체의 心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나니 이런 까닭으로 苦인줄 관함이니 응당히 과거에 생각한바 모든 법이 恍惚(황홀)하여 꿈과 같은 줄 觀하며, 응당히 현재에 생각한바 모든 법이 마치 번갯불과 같은 줄 관하며, 응당히 미래의 생각하는 바의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홀연히 일어나는 줄 관하며, 응당히 세간의 일체 유신이 다 不淨하여 가지 가지로 더러운지라 하나도 가히 즐거움이 없는 줄 관 함이니라.
이와 같이 마땅히 생각하라. 일체의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옴으로 다 無明의 熏習한 바를 因한 연고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해서 이미 일체 身心에 큰 괴로움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逼迫(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괴로운 바도 또한 分齊(분제)가 없어서 버리기도 어렵고 여의기도 어려워서 깨달아 알지 못함이니 중생도 이와 같아서 심히 가히 불쌍함이 됨이니라.
이렇게 생각을 지어서 곧 응당히 용맹하게 큰 誓願(서원)을 세우되 원컨대 내 마음이 하여금 分別을 여읜 연고로 十方에 두루해서 일체의 모든 善功德(선공덕)을 수행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하며, 한량없는 方便으로써 일체의 苦惱衆生(고뇌중생)을 求拔(구발)해서 하여금 涅槃第一義(열반제일의)의 樂을 얻게 하리라.
이와 같은 원을 일으키는 연고로 일체 때와 일체 곳에 있는 바 衆善을 몸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修學함을 버리지 아니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나니 오직 앉아 있을 때 止에 專念함은 除(제)함이니라. 혹 나머지 일체에는 다 마땅히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觀察(관찰) 함이니라. 혹 가거나, 혹 머물거나, 혹 눕거나, 혹 일어남에 다 응당히 止와 觀을 함께 行함이니 이른바 비록 모든 法의 自性이 나는 것이 아닌 줄 생각하나 다시 곧 因緣이 화합한 善惡의 업과 苦樂等 果報가 잃어지지도 아니하고, 무너지지도 아니 하며, 비록 因緣善惡의 業報를 생각하나 또한 곧 性을 가히 얻지 못함을 생각함이니 저 止를 닦는 자는 범부가 세간에 住着(주착)함을 對治하며, 능히 二乘의 怯弱(겁약)한 견해를 버림이요, 저 관을 닦는 자는 이승의 大悲心을 일으키지 않고 좁고 비열한 마음의 허물을 대치함이요, 범부의 善根 닦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읨이니라. 이 뜻을 쓰는 까닭으로 이 止와 觀의 門이 한가지로 서로 도와 이루어서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 함이니 만약 止와 觀을 갖추지 못하면 곧 능히 보리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다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正信을 구하고저 하나 그 마음이 겁약한 이는 이 娑婆世界(사파세계)에 머물러서 스스로 능히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親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며,두려워하여 이르되 信心을 가히 성취하기 어렵다
해서 뜻으로 물러가고저 하는 자는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두어서 신심을 攝護(섭호)했음이니 이르되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念하는 因緣으로 원을 따라 他方의 佛土에 태어나서 항상 부처님을 친견해서 길이 악도를 여의나 니 저 修多羅에 설하사대 만약 사람이 오로지 西方極樂世界(서방극락세계)의 阿彌陀佛(아미타불)을 생각 해서 닦은바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기를 구원하면 곧 왕생함을 얻는다! 하시니라. 항상 부처님을 보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 만약 저 부처님 의 진여법신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태어남을 얻어서 正定에 머무는 연고니라.
◆ 이미 修行信心分을 설했을새 다음은 勸修利益分(권수이익분)을 설하리라.
이와 같이 摩訶衍(마가연)인 모든 부처님의 秘藏(秘藏)을 내가 이미 다 설하였으니,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심히 깊은 경계에 바른 마음을 내서 誹謗(비방)을 멀리 여의고 大乘의 도에 들어가고자 할진댄 마땅히 이 論을 가져서 思量하고 修習하면 구경에 능히 無上의 道에 이르리라.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들어 마치고 怯弱을 내지 아니 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결정코 佛種(불종)을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授記(수기)하는 바가 되리라.
假使(가사) 어떤 사람이 능히 三千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해서 그로 하여금 十善을 行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食頃(식경)이라도 바로 이 법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함이니 앞의 공덕보다 勝過(승과)해서 가히 比喩(비유)할 수 없나니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論을 受持(수지)해서 관찰하고 수행하되 만약 하루나 하룻밤을 하더라도 所有의 공덕이 無量無邊(무량무변)해서 가히 설하지 못할지니라. 假令(가령) 十方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각각 無量無邊한 阿僧祗劫(아승지겁)에 그 공덕을 讚歎(찬탄)하여도 또한 능히 다하지 못할지니 무슨 까닭인고? 이르되 法性의 공덕이 다함이 없는 연고로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邊際(변제)가 없나니라.
그 어떤 중생이 이 論 가운데에 毁謗(훼방)하여 믿지 아니하면 얻는 바 죄의 果報는 무량한 劫을 지나도록 큰 괴로움을 받으리니 이런 연고로 중생은 다만 응당히 우러러 믿을 지언정 응당히 毁謗(훼방)하지 말지니라.自害(자해)가 깊음으로써 또한 他人을 해롭게 해서 一切三寶의 種子를 끊음이니라. 일체여래가 다 이 법을 의지하사 열반을 얻은 연고며, 일체보살이 이것을 因하여 수행해서 佛智(불지)에 들어가는 연고니라. 마땅히 알라 과거의 보살이 이미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으며, 현재의 보살이 이제 이 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으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룰 것이니 이런 연고로 중생이 응당 부지런히 닦아 배울지니라.
모든 부처님의 심히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隨順(수순)하여 다 가져 설하였으니 이 공덕이 법성과 같음을 회향해서 널리 일체의 중생계를 이롭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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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습(熏習) : 불교에서 습관적 행동에 따른 잠재인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어떤 것에 계속하여 자극을 줄 때, 그것이 점차 그 영향을 받는 작용. 예를 들면 옷은 원래 향기가 없는 것이지만, 향료와 의복을 함께 두면 그 옷에도 향기가 배게 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의 성질이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을 가리켜 이르는 말이다.
◆무명(無明) : 불교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하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의 근본의(根本義)에 통달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
십이인연(十二因緣)의 하나이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무상(無常) ·무아(無我)함을 모르고 갈애(渴愛)를 일으켜 윤회(輪廻) ·상속(相續)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명은 가장 근본적인 번뇌(煩惱)이다. 불교는 인간의 윤회적 생존을 직시하여, 그 윤회적 생존을 초월함으로써 해탈을 얻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윤회의 원인이 되는 무명을 멸각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은 소멸될 수 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법(眞如法)이 본래 평등일미(平等一味) ·무차별(無差別)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상심(妄想心)이 생기며 그것이 업(業)이라 하였다. 이 망상심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며, 이 근본무명에서 파생된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존재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사상과 함께, 무명과 불성은 얼음과 물의 관계와 같이, 일체번뇌의 근본인 무명의 실체가 그대로 청정한 불성이라는 사상도 나타났다. 이는 인간실존의 절대긍정이라 할 수 있다.
◆ 진여(眞如) : 불교에서 '진리'에 해당하는 말. 원어는 tath嚆(그와 같이)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미 t嚆를 더한 단어로, 여실(如實)·여여(如如)라고도 번역한다. 생멸(生滅)에 대칭되는 말이면서도,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나타내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양식을 진리로 생각하고, 어떤 특수한 원리에 근거한 진리를 배척한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를 이언진여(離言眞如)·의언진여(依言眞如)로 구분한다. 본래 진여는 인간의 개념적 사유를 초월한 말이지만, 굳이 언어로 설명한다면 여실공(如實空)·여실불공(如實不空)이 된다. 즉 진여는 실재적·본질적인 것이 아닌 일체 사물의 속성을 떠난 것(여실공)이지만, 한편으로는 무한한 공덕을 내포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여실불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