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법어(滿空法語)

通達無我法者 2007. 2. 7. 13:46
만공법어(全文)

***만공월면 대선사 행장***
스님의 속명은 도암(道岩)이요, 휘(諱)는 월면(月面)이며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속성은 여산 송씨니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요 어머니는 김씨이다.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출생하셨다.
스님이 출생하기 전 김씨의 꿈에 신령한 용이 구슬을 토하매 광명이 황홀한지라, 그 광명을 받고 잉태한지 열 달만에 낳으니 즉 고종2년(1871) 신미(辛未) 3월 7일 이었다.
스님이 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속세의 세업을 이을 아이가 아니요 장차 불문에 들어가서 고승이 될 아이"라고 하였다.
스님이 열세살 되던 해 계미년 겨울에 전북 김제 금산사에 가서 연말을 보내면 장수하고 만사가 길하다는 말을 듣고 금산사로 가서 처음 부처님의 등상(等像)과 스님네를 보니 환희심이 샘물처럼 솟아오르니 그 뒤부터는 집에 돌아 와서도 출가하여 스님이 될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부모님은 아들을 놓아 줄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사촌형이 더욱 엄하게 감시를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몰래 나무꾼의 지게를 지고 야반도주하여 전주 봉서사로 가서 며칠동안 머무는 중 여러 스님들이 삭발하여 스님이 되라고 권하였으나 그 곳에 인연이 없었던지 마음이 들지 않아 이 절을 떠나 짚신을 벗어 작대기 끝에 매달아 둘러메고 맨발로 걸으니, 하늘에 닿을 듯한 푸른 태산 준령이 눈앞에 우뚝하고 흐르는 시냇물은 소리마다 속세의 잡념을 씻어 주는 듯 즐겁기만 하였으며, 숲 속에 핀 꽃송이들이 반겨 맞아 주고, 재재거리는 산새들 소리는 사람의 미(迷)한 길을 가리켜 주는 듯 하였다.
한 가닥의 오솔길을 따라 피곤한 것도 잊고 한 곳을 당도하니 이곳이 전주 송광사였다.
스님들이 보고, 「네가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니 여러 스님들이 인자하게 맞아 주며 말하였다.
「이곳은 훌륭한 스님이 없으니 쌍계사에 진암(眞岩) 노사(老師)를 찾아가라.」고 인도하기에 논산 쌍계사로 갔다.
마침 진암노사가 계룡산 동학사로 옮기셨으므로 다시 동학사로 가서 진암노사를 뵙고 거기서 안주하게 되었으니, 때는 스님 나이 열 네 살이 되던 갑신년이었다.
얼마 후 양식이 떨어졌다. 마침 젊은 스님이 동냥을 나가게 되매 아직 행자인 스님도 따라가게 되었다.
젊은 스님이 말하기를, 「중도 아닌 유발동자가 무슨 동냥을 하겠는가?」 하기에 스님이 말하기를, 「얻어먹는 사람이 승속(僧俗)이 따로 있습니까?」하였다.
젊은 스님이 말없이 동행하여 십여일 만에 엽전 여덟냥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매, 진암노사가 스님의 손을 잡고 탄식하여 이르되, 「내가 귀한 집 자제를 중도 만들기 전에 동냥부터 시키니 나같이 박복한 사람은 세상에서 둘도 없을 것이다.」하며 눈물을 흘리니 스님이 말하되, 「순(舜) 임금도 독 장사를 하였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갑신년 시월 초순 어느날, 한 객승이 왔기에 본 즉 육척이 넘는 체구에 위풍당당하고 안광이 대중을 놀라게 하였다. 이분이 천장사에서 온 경허(鏡虛) 화상이었다.
경허스님이 대중과 같이 살던 중 진암노사가 경허스님께 「이 아이가 비범한 기틀이 엿보이니 스님이 데려다가 잘 지도하여 장차 불교계에 동량이 되도록 하여 주시오.」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처음에 경허스님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다가 진암노사의 간곡한 말씀에 결국 따르기로 하였다.
경허스님이 한 젊은 스님을 시켜 스님을 충남 서산 천장사에 계신 태허(太虛) 스님에게 맡기도록 부탁하여 스님은 천장사로 가서 태허스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 해 12월에 태허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스님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니 법명이 월면(月面)이었다.
그 뒤 스물다섯살 계묘년 11월 1일에 17, 8세 되어 보이는 초립동 소년이 이곳 천장사에 찾아와 하룻밤을 동숙하는데 그 소년이 묻기를,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萬法歸一 一歸何處) 라는 것만 깨달으면 생사를 해탈하고 만사에 무불통지한다 하니 이것이 무슨 뜻이오.」하기에 스님을 대답을 못하였다.
그 뒤로 이 화두에 대하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어른 시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몰래 길을 떠나 온양 봉곡사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을미년(1895)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해 오던 의심은 조금도 흐리지 않고 하룻밤을 지나던 중 새벽 쇳송[鐘頌]을 할 때, 화엄경의 사구게 즉
만약 사람이 若人欲了知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할진댄 三世一切佛
응당 법계성을 관하라 應觀法界性
일체를 마음이 지었느니라 一切唯心造

를 외우다가 문득 법계성을 깨달아 화장세계(華藏世界)가 홀연히 열리니 기쁜 마음을 무엇에 비길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빈 산 이치 기운 고금 밖인데 空山理氣古今外
흰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고 가누나 白雲淸風自去來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고? 何事達摩越西天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오르네 鷄鳴丑時寅日出

그 뒤로는 누구를 만나든지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이르기를, 「나에게 희유한 일이 있으니 나와 함께 공부함이 어떠냐?」고 권하였다.
사람들은 스님의 경계를 알지 못하고 모두 이르기를, 「어째서 저녁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밤사이에 미쳤다.」고 비웃기만 하므로 스님은 이런 곳에 더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걸망을 짊어지고 지리산 청학동을 향하여 떠났다.
가는 도중 장성 지방에 이르러 한 노인에게 지리산 가는 길을 물으니 노인이 말하기를, 「장성에 기산림이라는 선생이 유학자들을 동원하여 사방에 진을 치고 지나가는 중들을 모조리 붙잡아다가 진중에서 밥짓는 일을 시키니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기에 본사(本寺)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중에 공주 마곡사에 들리니 옹사(翁師)되는 보경화상이 이르기를, 「내가 조그만 토굴을 하나 만들었으니 거기서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기에 그 토굴에 가 본즉 마음에 들므로 파전(坡田)을 일구어 연명하며 지냈다.
토굴서 3년이 되던 해 스님 나이 스물 여섯 살 때, 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스님이 왕림하매 화상을 뵙고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니 화상이 이르되, 「불 속에 연꽃이 피었구나 火中生蓮」하였다.
경허화상이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해야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네가 일찍 다비문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다비문에 '돌사람이 눈물 흘린다 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 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경허화상이 이르되,
「 '돌사람이 눈물흘린다'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하였다.
화상이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다시 조주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또 이르기를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무자화두를 열심히 의심하던 중 날이 갈수록 경허화상을 경모(傾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무술년(1898) 7월에 화상이 계신 서산 도비산 부석사로 갔다.
경허화상을 뵙고 날마다 법을 물어 현현(玄玄)한 묘리를 탁마(琢磨) 하였다.
그 때 경남 동래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화상께 청첩장이 왔으므로 스님이 화상을 모시고 갔는데 침운(枕雲) 스님도 동반하게 되었다.
계명암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화상을 이별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백천 삼매와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걸림없이 통달하여 생사의 큰 일을 마친 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서른 한 살, 신축년 7월 말경에 본사에 돌아와 머무르며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면서' 소요자재 하였다.
스님이 서른 네 살 때, 갑진년 7월 15일에 경허화상이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가는 길에 천장사를 들리게 되었다. 스님을 화상을 뵙고 몇 해 동안 공부를 짓고 보림(保任)한 것을 낱낱이 아뢰니 경허화상이 기꺼이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雲月溪山處處同
수산선자의 대 가풍이여  山禪子大家風
은근히 무문인을 부촉하노니 慇懃分付無紋印
한 조각 권세 기틀이 눈 속에 살았구나 一段機權活眼中

이어 만공(滿空)이라는 법호(法號)를 내리고 이르되,
「불조의 혜명을 자네에게 이어 가도록 부촉하노니 잊지 말라.」하고 주장자를 떨치고 길을 떠났다.
그 때부터 스님은 모든 산천을 돌아다니다가 을사년(1905) 봄에 덕숭산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금선대라 이름하고 보림(保任)을 하니 제방의 납자들이 구름 모이듯 와서 스님에게 설법하기를 청하거늘 사양하다 못해 법좌에 올라 법을 설하니 이것이 개당보설(開堂普說)이었다.
그 뒤로 스님의 문하에서 용상대덕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그 뒤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여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고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선원에 가서 삼하(三夏)를 지냈다.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안면면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한 칸 띠집을 지어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하고 홀로 둥근 달을 굴리시다가 어느날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걸 웃고 문득 입적하니 때는 병술년 시월 20일 이었다.
다비를 모시던 즉시 흰 연기 위에 홀연히 백학이 나타나타나 공중을 배회하고 오색 광명이 하늘에 닿았다.
이 광경을 본 대중은 환희심과 기이한 생각으로 다비를 다 마친 후 영골을 모아 석탑에 봉안하니 세수 75세요 법랍은 62이며 석존 후 76대 이다.
1968년 10월 15일 侍者 眞惺 焚香 謹書
※진성 스님은 현(現)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임.




<법어>

***사홍서원(四弘誓願)
주인공아! 정신 차려 살필지어다.
너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의 은혜를 아느냐.
모든 것을 보호하여 주시는 나라의 은혜를 아느냐.
모든 수용을 당하여 주시는 시주의 은혜를 아느냐.
서로 탁마(琢磨)하는 대중의 은혜를 아느냐.
네가 출가한 처음 뜻을 잊지 않느냐.
이 더러운 몸이 생각 생각에 썩어져 감을 아느냐.
사람의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는 줄을 아느냐.
승당을 여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느냐.
공연히 잡담하지 않느냐.
분주히 시비를 일으키지 않느냐.
화두가 자나깨나 항상 또렷하여[惺惺]하여 어둡지[昧] 않느냐.
듣고 보고 말하고 오고 갈 때에 한 조각[一片]을 이루지 않느냐.
금생에 결정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겠느냐.
수용(受用)이 좋으며 편안할 때에 지옥고를 생각하느냐.
이 몸으로 아주 생사를 면하겠느냐.
팔풍(八風) 경계를 당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않느냐.
슬프도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나 제도할 것인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께옵서 대자대비를 드리우사 증명하여 주시옵소서.
제자가 이에 모든 것이 허망함을 깨닫고, 참된 법을 구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발하나이다.

중생이 가이 없지만 맹세코 건지겠사오며,
번뇌가 다함이 없지만 맹세코 끊겠사오며,
법문이 한량이 없지만 맹세코 배우겠사오며,
불도가 위 없지만 맹세코 이루겠나이다.

자성중생(自性衆生)을 맹세코 건지겠사오며,
자성번뇌(自性煩惱)를 맹세코 끊겠사오며,
자성법문(自性法門)을 맹세코 배우겠사오며,
자성불도(自性佛道)를 맹세코 이루겠나이다.

팔풍(八風) 경계란
남이 나에게 이롭게 하는 때나,
나를 칭찬할 때나,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는 때나,
편안하고 즐거운 때나,
내외 형편이 쇠잔할 때나,
남이 나를 나무랄 때나,
남이 나를 제 맘대로 희롱할 때나,
고생스러울 때나,
이러한 여러 가지 경계에 좋거나 좋지 않거나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동(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라.



***청정수행록(淸淨修行錄)
사람에게 세가지 몸이 있으니,
첫째는 법신(法身)이요
둘째는 업신(業身)이요,
셋째는 육신(肉身)이로다.
법신은 곧 불신(佛身)이요, 업신은 곧 귀신(鬼神)이요, 육신은 곧 사람의 색신(色身)이로다.
색신 가운데 업신과 법신이 구족하여 서로 여의지 않건마는 중생의 업보가 무거워 다못 업신이 구원겁(久遠劫)을 드나들며 사생육도의 육신으로 인하여 모든 악업을 지을 때에, 부처님이 설하신 오계(五戒)를 믿지 아니하고 난행(亂行)을 하는 고로 혹 사람몸을 받아 나더라도, 혹 눈으로 보지 못하거나, 혹 귀로 듣지 못하거나, 코로 맡지 못하거나, 혀를 놀리지 못하거나, 목을 앓거나, 팔을 못 쓰거나, 가슴을 앓거나, 내종을 앓거나, 다리를 못 쓰거나, 전신에 만신창이 돋거나, 치질을 앓거나, 몸에서 추한 냄새가 나거나, 내외의 금슬이 없거나, 자식이 없거나, 자식을 많이 낳아 기르지 못하거나, 남녀 간 상부상처를 당하거나, 얼굴이 박색으로 타고나거나, 호랑이 액난을 당하거나, 독사나 지네에게 물려 죽거나,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서 죽거나, 도적놈에게 죽거나, 남의 모함을 받아 죽거나, 이와 같은 가지가지 액난을 당하는 것이 모두 부처님의 '오계'를 믿지 아니하고 불법을 비방한 과보건만, 일체 중생이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모든 업보를 날로 받으니 가히 슬프고 슬프도다.
오계라 하니 무엇 무엇이 오계런고?
살(殺)?도(盜)?음(淫)?망(妄)?주(酒) 이 다섯가지로다.
첫째는 살생을 말지니라.
살생을 많이 할진댄 자비종자(慈悲種子)가 끊어져 세세생생에 단명보(短命報)를 받으며, 내손에 죽은 모든 무리들이 세세생생에 나를 쫓아다니며 내 몸을 해롭게 할 제, 위와 같은 모든 액난을 당하게 되느니라.

둘째는 도적질을 말지니라.
만약 사람이 도적질을 할진댄 복덕종자(福德種子)가 끊어져 세세생생에 박복빈천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느니라.

셋째는 사음을 말지니라.
만약 사람이 사음을 행한 즉 세세생생에 식신(識身)이 청정치 못하고, 남녀간 씨앗을 많이 보아 마음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니라.

넷째는 거짓말을 말지니라.
만약 사람이 거짓말을 할진댄 진실종자(眞實種子)가 끊어져, 모든 사람이 나의 말을 믿지 아니하여 헛된 사람이 되매 매사에 이루어지는 일이 없게 되느니라.

다섯째는 술을 먹지 말지니라.
만약 사람이 술을 마시면 지혜종자(智慧種子)가 끊어져 성현의 어질고 착한 말씀을 즐겨 받아 듣지 아니하고, 외도 마구니의 삿된 말과 망령된 말과 탐·진·치와 간악질투와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익혀 저 삼악도에 떨어져 길이 나올 때가 없으리니 어찌 불쌍하지 아니하리오.

사람에게 법신, 업신, 육신 세가지 몸이 있다 하니 어떠한 것이 육신인고?
지·수·화·풍 사대(四大)로다.
지(地)는 곧 살이요, 수(水)는 눈물, 콧물, 대소변이요, 화(火)는 따뜻한 기운이요, 풍(風)은 콧김, 입김, 동정(動靜)이니 이 네 가지를 부모에게서 얻어 육신을 이루었다가 명이 다하여 임종을 당하매 지대(地大)는 땅으로 돌아가고, 수대(水大)는 물로 돌아가고, 화대(火大)는 불로 돌아가고, 풍대(風大)는 바람으로 돌아가, 사대가 흩어지니 허황하기 일장 춘몽이요, 장마에 두엄 버섯이니라.
어떠한 것이 업신인고?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이 여섯가지 식심(識心)이로다.
눈으로 일체 만물을 보아 탐하여 모든 업을 지으며, 귀로 일체 소리를 들어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코로 모든 냄새를 맡아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혀로 모든 음식을 맛보아 좋고 언짢은 소견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몸으로 춥고 더운 분별망상을 내어 모든 업을 지으며, 뜻으로 밉고 어여쁘고 좋고 나쁜 일체 망상을 내어 모든 업을 지어, 이 여섯 놈이 무량겁으로 드나들며 모든 업을 능히 짓기도 하며 모든 업을 능히 받기도 하나니, 이러므로 이름을 업신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법신인고?
일찍이 발심하여 선지식을 친견하여 다생죄업을 참회하고, 옛 성현의 친절언구 1700 화두 가운데 자기에게 합당한 화두를 분명히 결택하여 행(行)?주(住)?좌(坐)?와(臥)?어(語)?묵(默)?동(動)?정(靜) 중에 모든 망상이 고요한[寂寂] 가운데 화두가 또렷하여[惺惺], 들지 아니하여도 화두가 스스로 들리는 것이 샘물 흘러가듯 끊어짐이 없어, 화두가 한덩어리[打成一片]에 이르러 홀연히 망상 구름이 흩어지고 마음달[心月]이 홀로 드러나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어 그 밝은 빛이 하늘과 땅이 무너져도 이 광명은 길이 멸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이름하되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도라 하느니라.
이같은 이치를 통달한 사람을 선지식(善知識)이라 이름하며, 혹 도사, 보살, 부처라 이름하나니 천당(天堂)과 불찰(佛刹)에 임의자재하여 천상에 가서 나매 천인을 제도하고 인간에 나매 인간을 제도함에 이르므로 인천의 스승이 되며, 사생(四生)의 자비로운 부모가 되는 고로 이 사람의 이름이 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이로다.
※ 사생육도(四生六道)
四生 : 중생이 태어나는 방식에 따라 태로 나는 것은 태생, 알로 나는 것은 난생, 습기로 나는 것은 습생, 변화해 나는 것은 화생이라 함.
六道 : 여섯가지 중생 세계. 즉 天 人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
※팔사(八邪) : 법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법이 生?滅?去?來?一?異?斷?常이라고 고집하는 것.
※선지식(善知識) : 도와 덕이 높아 남을 지도할 만한 스승.



***무자화두(無字話頭) 드는 법
한 중이 조주스님에게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하니,
조주스님은「무(無)」라 하였으니, 조주스님은 무슨 까닭으로 「무」라 일렀는고?
이 한 생각을 짓되 고양이가 쥐 생각하듯, 닭이 알을 품듯, 앞생각과 뒷생각이 서로 끊어짐이 없이 샘물 흘러가듯 하여 가되, 아침 일찍 찬물에 얼굴을 씻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정히 앉아 화두를 들되,
개가 불성이 있단 말인가, 없단 말인가?
있고 없는 것이 다 공하여 참으로 없단 말인가?
이와 같은 요별망상은 옛사당의 향로와 같이 고요하게 하고 화두는 성성(惺惺)하게 하여, 밝은 달이 허공에 뚜렷하게 드러난 것 같이 하여, 망상은 적적(寂寂)하고 화두는 성성(惺惺)하여 마치 달과 달빛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 같이 화두를 지어가되, 저녁때에 잘 살펴보아 망상을 많이 피고 화두를 잘못 들었거든 자성을 불러 꾸짖되,
「주인공아, 내말을 들어라! 네가 비롯함이 없음으로부터 금생까지 이르러 공부를 등지고 날로 망상에 합하여 이 화택(火宅) 속에서 괴로움 받음을 면치 못하는 놈이 금생에도 이와 같이 혼침?산란과 해태?방일 속에 빠져 허송세월을 하게 되니, 만약 오늘밤이라도 눈빛이 땅에 떨어지면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아귀 될지, 말 뱃속으로 향할지 소 뱃속으로 향할지 모르거늘, 어찌 공부를 이와 같이 방향없이 짓는고!」
크게 꾸짖고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여 잠을 자되 부처님께서 삼경(三更) 외에는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세시간만 잠을 자고 일어나서 또 찬물에 얼굴을 씻고 고요한 마음으로 앉아 생각하되, '요행이 간밤을 살아 왔으니 오늘은 결정코 공부를 단판 내어 뒷근심이 없게 하리라' 하고, 그 전날보다 더 지극한 마음으로 날마다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 갈진댄 어찌 십년 이십년을 허송세월 하리오.
깨달음이란 어느 한정된 기간에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극한 마음에 따라서
고요한 밤 밝은 달을 보고 도를 깨닫기도 하고,
새벽 종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하며,
멀리 마을의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하고,
멀리 마을의 행상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하며,
이웃집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하고,
선지식의 설법을 듣고 언하(言下)에 도를 깨닫기도 하며,
좋은 인연을 따라 곳곳마다 도를 깨닫지 못할 곳이 없도다.
싱그러운 광명이 하늘도 덮고 땅도 덮고, 밤도 없고 낮도 없는 광명의 세계를 이룬다 하나, 이 월면(月面)이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터럭만치도 밝음이 없고, 터럭만치도 어두울 것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음에 지혜가 명철하여 일체법을 하나도 모를 것이 없이 다 안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지혜가 없어 가히 한 법도 앎이 없고, 한 법도 가히 모를 것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음에 살고 죽는 것이 없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혹 살기도 하고 혹 죽기도 하여, 죽고 삶이 없고 있음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아 다시 보림(保任)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아서 다시 물들임이 없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배고픔이 오면 밥 생각이 간절하고, 졸음이 오면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다시 물들음이 없고 있음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음에 다시 닦고 증득한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본래 잃어버린 것이 없으므로 다시 증득할 것이 없어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완연한 소식임을 뉘라서 고칠까.
만약 사람이 이 도리를 잘못 알면 지옥에 가기를 화살같이 할 것이요, 만약 이 도리를 명백하게 살펴 얻을진댄 모든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어 가지가지 불사(佛事)를 다스릴 제,
푸른 산 푸른 물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조각조각 흰구름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돌장승 피리 부는 소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무쇠계집 아기 낳은 곳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해골 속 푸른 눈알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고목나무 속, 용의 울음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오고 가는 것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술잔과 고깃점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앉고 눕는 것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고요하고 움직이는 것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밝은 머리가 오면 밝은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어두운 머리가 오면 어두운 머리를 향해 불사를 지으며,
푸른 머리가 오면 푸른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노란 머리가 오면 노란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붉은 머리가 오면 붉은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흰머리가 오면 흰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모진 머리가 오면 모진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둥근 머리가 오면 둥근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긴 머리가 오면 긴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짧은 머리가 오면 짧은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착한 머리가 오면 착한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악한 머리가 오면 악한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옳은 머리가 오면 옳은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그른 머리가 오면 그른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며,
삼라만상의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에 두두물물(頭頭物物)을 향하여 불사를 지으니,
이 무슨 물건인고?
밝고 밝은 일백 풀 머리에 明明百草頭
밝고 밝은 조사의 뜻이로다 明明祖師意

※ 이 「무자화두 드는 법」은 만공스님께서 덕숭산 '轉月舍'에서 직접 쓰신 글이다.



----법 훈(法 訓)----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 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망아는 진아의 소생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는 정심(正心)으로 처음도 끝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도 없지마는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개, 돼지 등과 같은 인간이라 아니 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욕과 음욕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인간이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을 모른다면 사생 육도에 윤회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않나니라.
동업(同業) 중생이 사는 이 사바세계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앞 길이 망망(茫茫)하게 되나니라.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생사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인생은 말꼬리에 매달려 울며 뒹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으로 윤회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의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을 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석가 세존께서 탄생 시에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각자가 부처가 될 성품은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일체가 다 <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 만한 정력이라도 이 <나>를 찾는 이외에는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해이니라.
누구든지 육신?업신?법신의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現像) 그대로가 곧 생사 없는 자리이니라.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이나 무정물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 풀의 정(精)이라도 전 우주의 무장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는 있으나 업식(業識)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내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나를 찾는 법(참선법)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바른 길을 가르쳐 주나니라.
수도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든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선방만이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지만, 선방에 상주하는 것이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에 간단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선은 절대로 혼자 하지 못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선지식을 만나 법문 한마디 얻어듣기란 천만 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법문 한마디를 옳게 알아듣는다면 참선할 것도 없이 곧 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법문 들을 때는 엷은 얼음 밟듯 정신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니라.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된 사람으로 불조의 혜명(慧命)을 상속받은 분이니라.
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나니라.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도 흘려 보내 버리고 하여, 신행이 없으면 법문을 다시 듣지 못하는 과보(果報)를 얻나니라.
선지식을 믿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나니라.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나니라.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전생에 놀고 지낸 탓이니, 그 빚을 어서 갚아야 수입이 있게 되나니라.
남음 없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니라.
신심(信心)?분심(憤心)?의심(疑心) 이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나니라.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정기(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자율적 성취가 있게 되나니라.
법문을 듣고도 신심이 동(動)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내세에는 다시 인간 몸을 받기가 어려우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명안종사(明眼宗師)의 인가(印可)도 없이 자칭 선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니라.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길이 멸한 곳[心行處滅]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공부는 발심(發心) 본위라 별로 제한 받을 것은 없으나, 20세에서 30세까지가 가장 적당한 나이니라.
참선법은 평범한 언구나 공부가 아니요, 상대(相對)가 끊어진 참구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에서 얻은 한 낱 이것만 같지 못하니라.
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性)의 감응으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라,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의 장애가 제일 힘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장 멀리해야 하느니라.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소아적(小我的) 나는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의 성취를 하기 전에는 썩은 그루터기같이 되어 추호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나의 존재를 없애야 하나니라.
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삼대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량(道場)·도사(道師)·도반(道伴)이니라.
도를 지키는 사람은 도절(道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도는 하나이다.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도의 절도를 지키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나니라.
짚신 한 켤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 만물을 모두 끌어안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도인의 가르침 없이 어찌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 정기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도반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 강한 것이니라.
참선을 하여 인생문제만 해결되면 다생억겁에 지은 갖은 악과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 때는 사생 육도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도를 닦는 중에는 사람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 지나니라.
참선법은 옛부터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수없는 도인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천칠백여개가 있는데, 내가 처음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란 화두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의심이 두 개로 갈라지므로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무엇인고?」이렇게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참선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 미련이 남아 있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랑거리인 학문이나, 기이한 재주 등 무엇이라도 남은 미련이 있다면 참선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이니, 아주 백지로 돌아가야 하나니라.
크게 나의 구속(拘束)에 단련을 치른다면 그 대가로 큰 나의 자유를 얻게 되나니라.
예전에는 선지식의 일언지하에 몰록 생사를 잊어버리는[頓忘生死] 이도 있고, 늦어야 3일, 7일에 견성(見性)한 이도 많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근기(根機)도 박약하지만 참선을 부업으로 해 가기 때문에 20년, 30년 동안 공부한 사람이 불법의 대의(大義)를 모르는 이가 거의 전부니라.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주지 못하나니라.
참선을 하려면 먼저 육국(六國)의 전란(戰亂)을 평정시켜 마음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니라.
※육국 : 眼 耳 鼻 舌 身 意의 여섯 감관기관
가장 자유롭고 제일 간편한 공부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염라국 사자(使者)의 눈도 피할 수 있나니라.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일어나고 사라짐이 곧 우주의 건립과 파괴요, 인생의 생사니라.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르쳤다 함은 물질 이전의 마음을 지적한 것이니라.
공부가 잘 된다고 느낄 때 공부와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라.
꿈속에서도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證驗)하여 선생을 삼을 것이니라.
꿈도 없고 생시도 없이 잠이 푹 들었을 때에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어디에 두는 지 알아야 하느니라.
꿈이라 하는 것은 업신(業身)의 동작인데, 깨어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 헤매다가 잘 때 업신이 제 몸을 나투어 가지고 육신이 하던 행동을 짓는 것이니라.
꿈과 생시가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해 나갈 수 있어야 하나니라.
산 몸이 불에 탈 때에도 정상적 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헤아려서 미치지 못한다면 사선(死線)을 넘을 때 자기 앞 길이 막막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하나니라.
공부인이 공부를 아니하는 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공부 아니하기가 하기보다 더욱 어려우니라.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도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부터 세워야 하나니라.
오전(悟前)이나 오후(悟後)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나니라.
참선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濕氣)를 녹이는 용광로니라.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비심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공부를 위하여서는 극악극독심(極惡極毒心)이 아니면 8만 4천 번뇌마(煩惱魔)를 쳐부수지 못하나니라.
사형이 집행될 시간 직전에도 오히려 여념(餘念)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진 중에는 털끝만한 어른거림이라도 섞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공부하는 데는 망상보다도 수마(睡魔)가 두려운 것이니, 수마를 먼저 조복(調伏) 시켜야 하나니라.
사람 몸을 얻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니 사람 몸을 가졌을 이 때를 놓치지 말고 공부에 힘쓰라.
사람 몸 한 번 놓치게 되면 또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라.
공부에 득력(得力)을 못하였을 때 눈빛이 안광낙지 하게 되면 업(業)만 남아 짐승도 미남, 미녀로 보여서 그 뱃속에 들기 쉬우니라.
※안광낙지(眼光落地) : 죽을 때를 말함.
참선하는 사람의 시간은 극히 귀중한 것이라,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변소에 앉아 있는 동안처럼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없나니, 그 때만이라도 일념에 든다면 견성(見性)할 수 있나니라.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시간 여유가 있거니 하고 항상 미루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자고 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 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 하지 내일을 어찌 믿으랴!' 하고 매일매일 스스로 격려해 가야 하나니라.
밤자리에 누울 때 하루 동안의 공부를 점검하여 망상과 졸음으로 정진시간보다 많이 하였거든 다시 큰 용기를 내어 정진하되, 매일매일 한결같이 할 것이니라.
공부하다가 졸리거나 망상이 나거든 생사대사(生死大事)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살펴본다면 정신이 저절로 새로워질 것이니라.
사선(死線)을 넘을 때 털끝만큼이라도 사심(私心)의 여유가 있다면 참선하는 기억조차 사라져 없어지느니라.
생사 윤회의 생활을 면하려고 출가한 중이니 만큼 참선법을 여의고 하는 일은 모두가 생사법(生死法)을 익히는 것이니라.
도라는 것이 따로 있는 줄 알고 구하는 마음으로 참선한다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라.
설사 도인이 온갖 신통변화를 부리고, 죽을 때에도 불가사의한 이적(異蹟)을 보일지라도 이는 상법(相法)이니, 이런 상법이란 하나도 가히 취할 바는 아니니라.
믿음은 부처를 찾아 오르는 발판이기 때문에 몰아적(沒我的) 믿음의 발판을 딛고 부처를 넘어 각자의 자기 정체(正體)를 찾아야 하나니라.
선을 닦는 사람은 선학자(禪學者)의 행위를 엄숙히 가져서, 입을 열지 않고서라도 남을 가르치게 되어야 하나니라.
공부의 과정에는 지무생사?계무생사?체무생사?용무생사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사무애하게 되는 대자유인이 되나니라.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없는 경지를 체달하는 것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없는 경지를 내마음대로 쓰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에 걸림이 없는 것
사무애(事無碍) : 사물에 걸림이 없는 것

공부할 때에 짐짓 알려는 생각을 말고, 정진력만 얻으면 공부는 저절로 성취되나니라.
공부가 완성되기 전에 미리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진을 게을리 하다가는 불법인연 마저 떨어지기 쉬우니라.
물체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정신은 한 모양도 없는 자리에서 일체 행동으로 능히 현실화 할 수 있나니라.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이라, 어디서 무슨 일이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의 사람이 되나니라.
정신이라는 전당(全當) 안에는 생사와 선악이라는 두 배우가 돌아가면서 삼라만상이란 배경 앞에서 희비극을 무한한 형태로 연출하고 있나니라.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없으면 빈 나라요, 아무리 빈약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나라는 비지 않은 나라이니라.
도인은 도인이라는 대명사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지 이전 소식을 증득하여, 도인이라는 우상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야 육도(六道)를 자기 마음대로 다니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현세 인생에 대하여
인간의 일생은 짧은 한 막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데, 이 연극의 한 장면이 종막이 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연출하던 그 의식은 그만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육체는 부글부글 썩어 버리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그 동안인들 일분의 자유가 있었던가? 밥을 먹다가라도 불의의 죽음이 닥치면 씹던 밥도 못 삼키고 죽어야 하고, 집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찬란하게 짓다가도 느닷없이 화재라도 만나면 방안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되지 않는가?
직접 내 자신의 일에도 이렇게 늘 자유를 잃어버리는데 인생의 집단인 사회와 국가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자유의 바탕을 얻어야 근본적 자유를 얻게 될 것이 아닌가. 자유가 어디에서 얻어지는 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쌀도 없이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는 이야기만으로 떠드는 셈이니라.
인생은 자기 업신(業身)의 반영인 이 몽환세계(夢幻世界)를 실상(實相)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으로 감응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니라.
인생이 산다는 것은 생의 연속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연속으로, 죽는 순간에도 죽기 전후 생활을 다 잊어버리고 입태?주태?출태의 고통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현실의 육식(六識)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 생활만 느끼고 사는데, 천당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짐승으로 떨어졌다가 하는 그러한 생이 금세 지나가고, 또 한 생이 금새 닥쳐오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의 영상이 연속해 교환 이동되어 빠른 찰라에 다른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입태(入胎) :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는 것
주태(住胎) : 어머니 뱃속에 머물러 있는 것
출태(出胎) :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것

인생은 과거를 부를 수도 없고, 미래를 보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가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어야 과거?현재?미래의 생활을 '일단화'한 생활을 할 수 있나니라.
※일단화(一單化) : 둘이 아닌 도리
인생은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요, 다만 현재에만 살고 있는데, 현재란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동하는 순간이니,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정한 삶을 어찌 실(實)답다 할 수 있으랴!
과거와 현재가 합치된 현실이 있나니 현재는 과거의 미래요, 미래의 과거로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 상상할 수 없는 최고 문화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벌어져 있고, 아래로 저열극악(低劣極惡)한 그 양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옥세계가 다 함께 몽환세계인 것이니, 과연 어떤 것이 실세계(實世界)인지? 그것을 알아 얻는 것이 곧 진아세계(眞我世界)를 체달(體達)하게 되는 것이니라.
나의 현재 생활이 일체 세계라, 현재 생활에서 자족(自足)을 못 얻으면 다시 얻을 도리가 없나니라.
인간들은 모두 자기에게 좋은 것이 와야 할 희망을 갖고 생을 이어 가지만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곧 언짢은 것을 얻는 원인인 줄을 알지 못하나니라.
인간 생활의 주체가 되는 생로병사와 희노애락까지도 다생으로 익혀 온 망령된 습관의 모임이요, 결과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생사를 벗어나게 되나니라.
이 우주에는 한없이 많은 서로 다른 종류의 중생이 꽉 차서 각각 자기 습성에 맞는 생활권을 건립하고 있지만, 우리 육식(六識)은 다생의 습기로 점점 고정화되어 우리 사바세계 인간으로서는 어느 한도를 넘어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나니, 천인이니 지옥이니 신(神)이니 귀(鬼)니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육식으로는 판단할 수도 없는 다른 종류에 속하는 중생의 이름이니라.
습관은 천성이라 천재니 소질이니 하는 것도 다생으로 많이 익혀서 고정화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물체는 결합, 해소(解消)의 이중 작용을 하기 때문에 영겁을 두고 우주는 건립되고 파괴되고, 인생은 생사를 반복하고 있나니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한 개체에 국한된 소아적(小我的)인 생활을 하는 사람, 짐승, 벌레 등으로 일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어 다만 업풍(業風)에 불려서 사생 육도에 헤매게 되는 것이요, 불(佛)이라는 것은 일체 우주를 자신화하여 일체 중생이 다 내 한 몸이요, '삼천대천세계'가 다 내 한집이라, 어느 집이나 어느 몸이나 취하고 버리는 것을 내 임의로 하나니라.
※삼천대천세계 : 수미산을 중심으로 해, 달, 사대주, 육욕천, 범천을 합하여 일세계라 하고 이런 세계가 천개 모인 것을 소천세계, 소천세계가 천개 모인 것을 중천세계, 중천세계가 천개 모인 것을 삼천대천세계라 한다.

불(佛)은 만유(萬有)를 자체화(自體化) 하였기 때문에 만유의 형상을 임의로 지으며, 만유의 도리를 자유로 쓰게 되나니라.
천당은 갈 곳이요, 지옥은 못 갈 곳이라면 우주가 내 한 몸이요, 천당과 지옥이 내 한 집인데 중생은 한 세계를 두 세계로 갈라놓고, 한 몸을 분신시켜 천당, 지옥으로 나누어 보내는데 이것은 중생의 업연(業緣)으로 됨이니라.
인격이 환경에 휘둘리는 사람은 영원한 평안을 얻을 길이 없나니라.
세상 사람들은 똥과 피의 주머니로 몸을 삼아,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만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길이 윤회의 고통을 면치 못하느니라.
우리가 느끼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식(六識)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때에 따라 흩어지나니,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흘러 다니는 육식으로 어찌 인생이 근본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세상사람들의 아무리 진보된 이론이나 심원한 학설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명상(名相)에 집착되었기 때문이다.
이론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깨우쳐 주는 이론이라면, 그 이론은 곧 도의 입문(入門)으로 인도하는 대도사(大導師)가 되는 것이니라.
형이상학이나 유심론(唯心論)을 말하는 자 스스로 물질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모르나니라.
세상에는 바른 말 하는 사람도 없는 동시에 그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 것이니라.
신은 아무리 신통자재한 최고신으로 인류 화복(禍福)을 주재한다 하더라도 육체를 갖추지 못한 사(邪)이니라.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무지(無知)를 면치 못하고,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나니라.
현대 과학이 아무리 만능을 자랑하지만 자타(自他)를 위하여 옳게 쓰이지 않고 잘 못 쓰이는 이상, 그것은 인류에게 실리를 주는 것 보다 해독을 더 많이 주는 것이니, 다만 세계가 자타의 아상(我相)이 없는 생활로 물질과 정신의 합치된 참된 과학시대가 와야 전 인류는 합리적인 제도 하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니, 인간의 근본을 밝히는 정신 문명이 사람마다 마음속에 건설되어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되나니라.
물질 과학의 힘으로서는 자연의 일부는 정복할지언정 자연의 전체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요, 설사 다 정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생에 익혀 온 습성을 어느 정도까지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을 뿐 정말로 습성 자체는 정복하지 못한 것이니, 그 습성자체를 정복하고 그 근본에 체달한 후라야 비로소 자연과 습성을 모두 자가용으로 삼게 될 것이니라.
물질과 정신이 합치된 과학자는 영원히 만능을 발휘할 수 있나니라.
현대 사람은 자만심을 본위로 한 신경만 예민하여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법문을 들을 때에 신중히 생각하지도 않고, 부인할 아무 근거도 없이 무조건 반박해 버리는 것으로 쾌사(快事)를 삼는 일이 많으니, 그것은 암흑의 길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니라.
아집(我執)은 배타적 정신이라, '남이 곧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를 점점 더 축소시키는 무지니라.
중생들은 잘하고 착해야 될 줄을 알면서도, 잘하고 착하게 하는 사람 곧 나를 찾는 공부는 할 생각을 못하나니라.
중생들은 인간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색(思索)하는 데 있다고 하면서 사색하는 그 자체를 알아 볼 생각은 하지 못하나니라.
중생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모르면서 학자인양 종교가인양 하여 제법 인생 문제를 논하는 것은 생명을 잘라 놓고 생명을 살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나니라.
이론이 끊어지고, 학론(學論)이 다한 곳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는데, 내가 나를 찾기 전에는 인생문제의 해결은 결코 불가능하나니라.
인생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인연이나 희망이 아니요, 진아(眞我)를 체달하여 이사(理事)에 임의로 처리하게 되어야 하나니라.
중생들은 알 줄만 알고 모를 줄은 모르나니라.
알지 못함을 알면 철저히 아는 것이니, 정말 아는 법은 알지 못할 줄을 능히 알 때에 비로소 진아에 체달되나니라.
지구라는 한 모태에서 같이 출생한 동포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니, 어느 형을 찌르려고 칼을 갈며, 어느 아우를 죽이려고 총을 만드는지 비참한 일이니라.


***불법(佛法)
불법이라고 할 때, 벌써 불법은 아니니라.
일체의 것이 그대로 불법인지라 불법이라고 따로 내세울 때에 벌써 잃어버리는 말이니라.
물질은 쓰는 것이요 정신은 바탕인데, 물질과 정신의 '일단화'를 불법이라 하나니라.
※일단화(一單化) : 둘이 아닌 도리
불법은 어느 시대, 어떤 인간의 호흡에도 맞는 것이니라.
불법을 듣고 생명의 중심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이니라.
불(佛)이라는 것은 마음이요 법(法)이라는 것은 물질인데, 불법이라는 명상(名相)이 생기지 전에, 부처가 출현하기 전에, <나>는 이미 존재한 것이니라.
질그릇 같은 <나>를 버리면 칠보의 그릇인 '법신'을 얻나니라.
※법신(法身) : 진리의 몸. 진리를 인격화 한 것.
입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요, 손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하고 일하는 그 정체를 알아야 참된 말과 일을 하는 정작 인간이 되나니라.
불법은 육체나 영혼의 책임자이다. 책임자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그 얼마나 불안한가. 이것을 알면, 곧 불법에 돌아오게 될 것이니라.
세간법(世間法)과 불법이 둘이 아니요 부처와 중생이 하나니, 이 불이법(不二法)을 증득해야 참 인간이 되나니라.
불법을 알면 속인이라도 중이요, 중이라도 불법을 모르면 이는 곧 속인이니라.
여러가지의 자물쇠를 열려면 여러 가지 열쇠가 필요한 것같이 백천 삼매의 무량(無量)한 묘리(妙理)를 해득하려면 백천만의 지혜의 열쇠를 얻어야 하나니라.
불법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불법을 배척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배척하는 것이니, 이는 곧 자기가 부처이기 때문이니라.
소리소리가 다 법문이요, '두두물물'이 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건만, 불법 만나기는 백천만겁에 어렵다고 하니, 그 무슨 불가사의한 도리인지 좀 알아 볼 일이니라.
※두두물물(頭頭物物) : 삼라만상


***불교(佛敎)
불교라 주장할 때 벌써 불교 교리와는 어긋난 것이니, 불교교리는 아집(我執)을 떠난 교리이기 때문이니라.
불교의 종지(宗旨)가 악을 징계하고 선을 장려하는 종교가 아니니, 선악이 다 불법인 까닭에 천당?극락의 즐거움이나 반대로 지옥의 극고(極苦)한 세계가 다 나의 창조물인 까닭이다.
먼저 대가(代價) 없이는 얻어지지 않고, 노력 없이는 성공이 오지 않는 것이 우주의 원리이니라.
일체는 그대로 불(佛)이기 때문에 일정한 규칙이나 조직을 세워서 가르치지 않고, 근기에 맞게 단계적으로 가르칠 뿐이다.
불교의 '유심'이란 유물과 상대가 되는 유심이 아니요, 물심(物心)이 둘이 아닌 절대적인 유심임을 말하는 것이니라.
※유심(唯心) : 우주의 모든 존재는 마음의 표현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존재하는 것이 없고, 마음은 만물의 본체라는 화엄경의 중심사상.
허공[自性]은 마음을 낳고, 마음은 인격을 낳고, 인격을 행동을 낳나니라.
세상에는 '물심양면'이라면 우주의 총칭인 줄 알지만, 우주의 정체(正體)는 따로 있나니라.
불교에서는 신(神)을 초월하여 법신이 있고, 영혼 위에 진인(眞人)이 있음을 알아, 그것을 증득하는 것으로 구경을 삼는데, 육신과 신과 영혼의 근본이 법신이요, 그 근본을 잃어버린 육신과 신과 영혼이 서로 교환 이동하는 생활이 사바세계의 인간이니라.
불교는 전인류의 자아(自我)를 완성시키는 교육 기관이니, 여러 많은 종교가 다 진아완성(眞我完成)의 가교요 과정이니라.
불교 교리의 오의(奧義)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지만, 각자가 다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할 수 있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되 주고받을 수 없는 그 법을 전불(前佛), 후불(後佛)이 상속하여 가나니라.


***승니(僧尼)란 무엇인가?
중이라 함은 일체 명상법이 생기기 이전의 사람을 가리켜 중이라 하니, 만유(萬有)의 주인이요 천상 인간의 스승이 바로 중인 것이다.
수행인인 중은 부모 처자와 일체 소유를 다 버림은 물론 자신까지도 버려야 하나니라.
중은 운명의 지배도 아니 받고, 염라국에도 상관이 없어야 하며, 남이 주는 행(幸)?불행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나니라.
수도생활을 하는 것은 성품이 흰 연꽃 같이 되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니라.
짧은 인생을 위하여 하는 세속 학문도 반평생을 허비해야 하거든 하물며 미래세가 다함이 없는 앞길을 개척하려는 그 공부를 어찌 천년을 멀다 하며, 만년을 지루하다 할 것인가?
생사윤회에 소극적인 학교교육도 필요를 느끼거든, 하물며 생사윤회를 영원히 끊고 참된 인간을 완성시키는 참선교육은 참을 필요하다. 전 인류에게 시급히 알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니라.
세상사람은 유위(有爲)로 법을 삼지만 중은 무위(無爲)로 법을 삼나니라.
세상 사람은 무엇이든지 애착심을 가지고 일을 하지만, 중은 무엇이든지 애착심을 끊고 일을 하나니, 부처님이나 조사에게까지도 애착심을 가지지 말 것이니라.
세상에서는 혈통으로 대를 이어가지만 중은 자기를 깨달은 정신 곧 도(道)로 대를 이어 가는데, 세상에서도 조상의 제사를 끊게 되면 그에서 더 큰 죄가 없다는데, 불자(佛子)가 되어 중으로 부처님 법을 자기 대에 와서 끊는다면 그 죄를 어디에 비할 것인가.
예전에는 항간의 부녀자 중에도 불법을 아는 이가 있어 종종 중을 저울질하는 일이 있었건만 지금은 민중을 교화할 책임이 있는 중이 도리어 불법을 모르니, 어찌 암흑시대라 하지 않을 것이며, 시대가 이토록 캄캄한데 민중이 어찌 도탄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불교의 흥망이 곧 인류의 행(幸)?불행이니라.
언제나 불교의 행운과 함께 세상에 평화가 동행해 오게 되나니라.
공부하는 스님의 누더기는 임금의 용포(龍袍)로도 능히 미칠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임금의 용포 밑에서는 갖은 업을 짓게 되지만 중의 누더기 밑에서는 업이 녹아지고 지혜가 밝아지나니라.
중으로서 속인의 부귀를 부러워하거나 외로워하거나 설움과 한이 남았다면 게서 더 부끄러운 일이 없나니라.
이 우주 전체가 곧 나인 것을 깨달아 체달(體達)된 인간을 중이라 하나니라.
중은 자신의 노력으로 수입되는 물질이라도 사사로이 쓰지 못하나니 중의 것은 다 삼보(三寶)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으면서 중의 명목으로 시주물을 얻어 쓰는 것은 사기쳐 재물을 모으는 것이니라.
중노릇을 잘못하면 국가·속가·불가에 죄인을 면치 못하나니라.
자성이 더럽혀지기 전인 어렸을 때에 출가하여 평생을 걸림없이 중노릇을 잘하여 마치는 이는 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는 복이니라.
요사이는 시주의 밥만 허비하는 중이 많기 때문에 진실하게 공부하는 중의 생활을 보증해 주는 신도가 없게 되었으나, 도를 위하여 하는 노력은 곧 도가 되나니, 도를 위하여는 지악(至惡)의 경지에서도 용기있게 노력하여 정진해야 하나니라.
사상적 방향은 정진에서만 확정을 하게 되고, 사상적 방향을 정하게 되어야 인생의 바른 길을 걷게 되고, 인생의 바른 길을 걷게 되어야 인생의 영원겁(永遠劫)에 장래를 보증할 수 있나니라.
세속일은 잠시라도 쉼이 있지만, 중은 정진하는 일을 꿈에라도 방심할 수 없나니, 털끝만한 틈이 벌어져도 온갖 마장(魔障)이 다 생기나니라.
백천만인을 죽인 살인자라도 허심탄회하게 부처님께 귀의하여 정진하는 중만 되면 백천 만인의 원결을 푸는 동시에 백천 만겁에 지은 죄업이 몽땅 소멸되나니라.
중생이 보고 듣고 일하는 것이 모두 허무하게 되는 것은 망아(妄我)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중생은 시공간(時空間)에 의하여서만 생존하는 것으로 집착된 까닭에, 시공의 제재하(制裁下)에 육도윤회를 면치 못하나니라.


***대중처소에서 할 행리법(行履法)
중은 반드시 대중과 함께 생활해야 하며 대중을 중히 생각하여야 하나니라.
중은 당파를 짓지 않아야 하나니, 우리라는 구분이 있다면 벌써 중의 정신을 잃은 소리니라.
중은 물질본위로 사는 동물적 인간계를 떠나야 할 것이니, 너와 내가 하나인 정신세계의 집단 생활이 중의 생활이니라.
대중 시봉(侍奉)이 곧 부처님 시봉이니라.
속세의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함께 깨끗한 업을 닦는 도반(道伴)을 서로 존중히 여겨야 함을 알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어른에게는 공대할 줄 알아야 하나니라.
이미 스승과 상좌의 의(義)를 맺었거든, 스승은 상좌를 지도하고 상좌는 스승을 존경해야 하나니라.
중은 먼저 시비심(是非心)을 끊고 지내되, 남이 나를 시비할 때를 당하여 나의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반성하여 고치고, 만일 나의 허물이 없을 때는 나의 일이 아니니 상관치 말라. 이와 같이 대중에 처하면 불안한 시비가 없고, 항상 편안하리라.
중은 일이나 물건을 대할 때 나의 이해를 생각하지 말고, 일의 성취와 물건의 보존(保存)이 대중에게 공익으로 돌아가게 해야 하나니라.
동무의 허물을 볼 때에 나의 잘못으로 느끼면 그 허물을 다른 이에게 알릴 수 없나니라.
어려운 일은 내가 하고, 좋은 음식은 남을 줄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마음은 무한대한 것이니, 마음의 사자(使者)인 몸의 능력도 제한되지 않은 것이니라.
중은 공익심과 평등심으로 누구나 포용할 수 있어야 하나니라.
중은 곤충에게도 대자대비의 마음씀[用心]을 가져야 하나니라.
횡재를 기뻐하지 말라. 잃어버린 임자의 슬픔이 있나니라.
중은 먼저 인욕(忍辱)할 줄을 알아야 하나니라.
대중의 욕(辱)됨을 내가 혼자 받을 마음을 가지며, 대중을 위하여서는 신명을 아끼지 않게 되어야 하나니라.
대중에 처하여 각자가 자기의 임무만을 잘 충실히 지켜 가면 대중 질서에 조금도 어지러운 일이 없나니라.
공적(公的) 일을 당하여 괴로움을 면할 생각을 한다든가 자기 욕심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타락이니라.
누가 내게 역량에 못 미칠 노력을 요구하더라도 원망을 말 것이니, 못 미친다는 것은 나의 정신력이 못 미친 까닭이니라.


***경구(驚句)
숨 한 번 마시고 내쉬지 못하면 이 목숨은 끝나는 것이니, 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정진력을 못 얻으면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에 내 정신이 아득하여져서 사람의 길을 잃어버리게 되나니라.
죄의 원천은 노는 것이니라.
자기 면목을 찾는 정진은 아니하고 재물과 여색에 눈부터 뜨게 된다면,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제도할 수 없나니라.
조그마한 나라를 회복하려 해도 수많은 희생을 요(要)하는 것이니, 전 우주인 <나>를 도로 찾으려 할 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예산을 각오해야 하나니라.
누구나 물건을 잃어버린 줄을 알게 되지만, 내가 나를 잃어버린 것은 모르나니라.
미물(微物)을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후일에 나도 미물이 되나니라.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정말 내게 이익이 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정말 나에게 고리(高利)의 저금이 되나니라.
내 잘못을 남에게 미는 것은 가장 비열한 일이니라.
천 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실행함만 못하나니라.
방일(放逸)은 온갖 위험을 초래하나니라.
말하기 전에 실행부터 할 것이니라.
총과 칼이 사람을 찌르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업이 사람을 쏘고 찌르나니라.
지옥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탐 진 치가 가장 무서운 것이니라.
함[爲]이 없는 곳에 참 일이 이루어지고, 착함을 짓지 않는 곳에 정말 착함이 있나니라.
참된 말은 입 밖에 나가지 않나니라.
허공이 가장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하나니라.
네가 네 생각을 내어놓을 수 있겠느냐?
허공에 뼈가 있는 소식을 알겠느냐?
귀신 방귀에 털나는 소식을 알겠느냐?
등상불(等像佛)이 법문하는 소리를 듣겠느냐?
생각이 곧 현실이요, 존재니라.
생각이 있을 때는 삼라만상이 나타나고, 생각이 없어지면 그 바탕은 곧 무(無)로 돌아가나니라.
흙?나무?기와?돌이 곧 도니라.
백초(百草)가 곧 불모(佛母)니라. ※백초 : 번뇌망상
부처를 풀밭 속에서 구할지니라.
무심(無心)은 비로자나불의 스승이니라.
알려는 생각이 끊어질 때에 일체를 다 알게 되는 것은 무(無)에서 일체의 것이 다 발견되기 때문이니라.
허수아비가 사람에 지나는 영물(靈物)임을 알아야 하나니라.
얻는 것이 없으면 잃는 것도 없나니라.
쓸모있는 인물은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없나니라.


***최후설(最後說)
내가 이 산중에 와서 납자(衲子)를 가르치고 있는지 사십여년인데, 그간에 선지식을 찾아왔다 하고 나를 찾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찾아와서는 다만 내가 사는 집인 이 육체의 모양만 보고 갔을 뿐이요, 정말 나의 진면목(眞面目)은 보지 못하였으니, 나를 보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못 보는 것이 곧 자기를 못 본 것이다.
자기를 못 보므로 자기의 부모, 형제, 처자와 일체 사람을 다 보지 못하고 헛되게 돌아다니는 정신병자들일 뿐이니, 이 세계를 어찌 암흑세계라 아니할 것이냐?
도는 둘이 아니지만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니, 내 법문을 들은 나의 문인(門人)들은 도절(道節)을 지켜 내가 가르치던 모든 방식까지 잊지 말고 지켜 갈지니, 도절을 지켜 가는 것이 법은(法恩)을 갚는 것도 되고, 정신적, 시간적으로 공부의 손실이 없게 되나니라.
도량?도사?도반의 삼대 요건이 갖추어진 곳을 떠나지 말 것이니, 석가불 삼천운(三千運)에 덕숭산에서 삼성(三聖) 칠현(七賢)이 나고, 그 외에 수없는 도인이 출현할 것이니라.
나는 육체에 의존하지 아니한 영원한 존재임을 알라. 내 법문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내 면목(面目)을 볼 수 있어야 하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