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중진리 | ||||
용타 스님의 생활 속의 수행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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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한 제자 아이로부터 다소 충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 슈바이처가 말하기를, 불교는 이중진리(二重眞理)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극복하고 계십니까?” 식이었다. 슈바이처가 말하는 불교가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중진리’란, ‘중생을 제도한다.’라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제도할 중생이란 없다.’라는 식의 말씀, 혹은 ‘탐진치는 번뇌이다.’라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다.’라는 식의 말씀, 혹은 평생 팔만대장경을 설하신 부처님께서 열반 무렵에 ‘나는 한 마디도 설한 바 없다.’라고 하신 말씀, 혹은 ‘중생과 부처는 차별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 혹은 ‘성불하라.’ 하신 다음 ‘이대로 부처다.’라고 하신 말씀, 혹은 ‘육도윤회와 제법무아’ 등의 말씀에 있어서 앞뒤 문장이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질문한 그 학생의 슈바이처의 말씀 인용이 제대로의 것이라면 슈바이처는 불교 이해 수준이 낮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순 구조로 들리는 표현들은 불교를 다소 심도 있게 이해하려고 하는 분들에게는 불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적지 않은 과제로 고심하게 될 것이다. 불조의 말씀들 사이에 모순스럽게 들려지는 말씀들이 어떤 식으로든 통합되지 않는다면 불편할 것임은 당연하다. 단순한 불교인은 그러한 말씀들을 듣고 잊어버리고, 잊었다가 듣고 하면서 별로 심각성 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마음 편한 분에게는 이 글이 도리어 없는 혹을 붙여주는 격이 될지 모른다는 노파심도 있지만 이상과 같은 모순(?) 논리가 머리에 무게로 있는 분에게는 적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불교의 이중진리, 어떻게 회통될 수 있을 것인가 모순으로 들리는 불교의 이중진리의 표현들은 필자에게도 한동안 마음속에 부담스러운 짐으로 함께 했던 소중한 과제였다. ‘모든 것은 공(空)하다’, 혹은 ‘본래 청정이다’ 해놓고 다시, ‘제도한다’는 논리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부처다’라고 선언한 자리에 ‘부처가 된다’는 명제가 어떤 논리로 모순 없이 회통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고 사미가 선사에게 묻는다.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선사는 대답한다. 다시 사미는 “부처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바로 너다.”라고 선사는 대답한다. 사미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선사는 두 번 다 제대로 말한 것이다. 그 문답은 공안(公案) 속에 듬직한, 신비가 감도는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실은 베일에 싸인 화두(話頭)적 비경이 아니고, 이론이성(理論理性)의 범주 속에 드는 간단한 논리인 것이다. 중생인 사미가 고통 속에 있어서 당위론적인 측면에서 본 사미의 모습은 고통이 사라진 부처가 되어야 한다. 분명히 성불해야 할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고제(苦諦)이다. ‘어떻게 고통이 사라진 부처가 될 것인가’ 하는 답을 찾는 과정에 ‘사미가 이미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사미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것은 도제(道諦)다. 불교 속에 모순으로 들리는 거의 모든 이중진리는, 하나는 현실 차원의 고제 갈파요, 다른 하나는 그 고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 차원으로 내놓은 방편론인 도제 갈파다. 즉 한 상황에 공존하고 있는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두 차원이다. 윤회(輪廻)와 무아(無我) 역시 모순으로 들리는 이중진리이다.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한단 말이냐’ 식의 의문이 따른다. 그런데 윤회를 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실존적인 사실이요, 자아를 존재론적으로 정사유(正思惟)해 보면 무아라는 것이 철학적인 한 사실로 드러난다. 전자는 현실적인 고제(苦諦) 갈파요, 후자는 방편론인 도제(道諦) 갈파인 것이다. 즉 윤회를 하면서 고통 받던 자아가 무아라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깨달은 나머지 윤회의 고통에서 풀려난다. 여러 해 전 어느 불교학자가 “불교의 무아사상은 부정할 수 없을 터, 윤회론은 힌두이즘이 유입되어 불교인 것처럼 불교의 거리를 횡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여, “윤회하는 그 자가 무아요, 공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해 주었더니, 3일쯤 후에 다시 오시어 삼배를 하면서 “감사합니다. 스님의 간단한 한 말씀에 여러 해 동안 모순으로만 여겨지던 윤회사상과 무아사상이 회통되었습니다.”라고 한 일이 있다. 중생이 중생을 벗어나 부처가 되려면 중생과 부처에 차이가 있겠는가, 없겠는가?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차이가 있겠는가, 없겠는가? 물론 차이가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는 관점만을 고수하는 한 아들은 아이 정체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물을 바라봄에 어찌 한 관점만 있겠는가. 아들을 아이 정체성에서 벗어나 세상에 당당한 사나이로 살게 하려면 아들에게 세월이 지나면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당당한 어른이 되는 것이니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인식, 아버지가 남성이듯 아들도 남성이라는 인식을 시켜 아들로 하여금 사나이 정체성을 깨우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중생이 중생을 벗어나 부처가 되려면 부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부처와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해도 0.0001%가 다를 뿐, 99.9999%가 같다는 것, 나아가 알고 보면 진주가 흙탕물 속에 있다고 해도 진주 자체는 100% 순수한 진주이듯 불성이 탐진치라는 그늘에 가려있다고 해도 불성 자체는 부처의 불성이나 중생의 불성이나 100% 같다는 것, 더 나아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음을 깨달을 때 중생의 탈을 벗고 부처가 될 것 아닌가. 어떤 법리(法理)든지, 그것이 속제(俗諦)든 진제(眞諦)든, 모든 차원과 관점들에 걸림이 없을 때 효과적인 수행이 될 것임은 당연하다. 차원자재(次元自在)나 관점자재(觀點自在) 등의 안목이 열리면 경전의 말씀이나 세상의 많은 것들이 걸림 없이 수용될 것이라는 것을 귀띔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