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4장 유식사상 ] 2. 아뢰야식설 - (2) 능가경~(9) 선가의 설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01

 

제4장 유식사상 - 2. 아뢰야식설 - (2) 능가경



선지식과 불자 등의 권속에 의지하여 능히 심(心), 의(意), 의식(意識)의 자기 마음의 자체 경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니라.

依善知識佛子眷屬하여 而能得見心意意識 自心自體境界故니라. [入楞伽經;大正藏 16, p. 523中]


‘심의 의식(意識)의 자체 경계’는 자기 마음의 진여본성으로 심의식의 피상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의 지도에 의지하여 불성, 진여본성을 깨치면 심의식의 근본 자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환상같이 공허한 육신이 곧 법신이며, 번뇌에 덮인 심의식의 본성이 바로 진여자성이라는 말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비유하면 바닷물이 움직이면 여러 가지 물결이 일어나듯 아뢰야식도 그와 마찬가지로 갖가지 여러 식을 생하니 심, 의, 의식의 여러 가지 모습 때문에 설하느니라.

譬如海水動하면 種種波浪轉하듯 梨耶識亦爾하여 種種諸識生하니 心意及意識을 爲諸相故說하니라. [入楞伽經;大正藏 16, p. 523中]


아뢰야식은 바닷물과 같고 기타의 여러 식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물결과 같이 아뢰야식의 바다 위에서 7식, 6식의 모든 식이 그로부터 생하므로 심, 의, 식을 여러 가지 모습에 따라서 설한다는 것입니다.


심(心)은 교묘한 기술자와 같고 의(意)는 교활한 자와 같으며 의식(意識)과 전5식은 헛되고 망령되어 경계를 취하느니라.

心如巧伎兒하고 意如狡猾者하며 意識及五識은 虛妄取境界하니라. [入楞伽經;大正藏 16, p. 557上]


이것은 심의식의 작용[行相]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 그 중에서 교묘한 기술자와 같다는 것에는 악의가 별로 없으나 교활한 사람과 같다는 것에는 무지와 번뇌에 가득 찬 악의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의식 중에서 아뢰야는 그 행상이 미세하고 제7식은 아상(我相)이 깊다는 것을 비유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의식과 전5식은 허망하게 모든 경계를 취해서 망령되이 분별만 하여, 그 행상이 거칠게 겉으로 드러난 상태입니다.




제4장 유식사상 - 2. 야뢰야식설 - (3) 구사론



미혹하여 지은 업이 과(果)를 받을 때에는 변해서 능히 익으므로 이숙이라 하니라. 과가 그를 따라 생기므로 이숙생이라 하며, 그 얻는 과가 원인과는 다른 종류로 익게 되므로 이숙이라 하니라.

惑所造業이 至得果時에 變而能熟故로 名異熟이니라 果從彼生일새 名異熟生이요 彼所得果가 與因別類而是所熟故로 名異熟이니라. [俱舍論;大正藏 29, p. 9上]


이숙(異熟)이라는 것은 ‘변해서 익는다[變而熟]’라는 뜻입니다. 즉 원인은 선이나 악인데 과보는 선이나 악이 아닌 무기(無記)를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이나 악을 지었는데 그 과보는 부귀나 빈천으로 나타나 인과가 서로 달리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사론은 소승불교의 논서로서 대승불교 유식 계통의 논서는 아니지만, 이숙에 대한 설명을 유식학보다 먼저 하였으므로 그 사상의 근원을 보이기 위해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제4장 유식사상 - 2. 아뢰야식설 - (4) 유가사지론



이 중에서 여러 식을 모두 심(心)과 의(意)와 식(識)이라고 한다. 만약 가장 수승한 아뢰야식에 의하면 심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식이 능히 일체법의 종자를 모으기 때문이며 언제나 집수의 경계를 반연하고 알 수 없는 한 무리 기세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니라. 말나식을 의(意)라 하니 언제나 아(我), 아소(我所), 아만(我慢) 등을 집착하고, 사량을 성품으로 삼는다. 나머지 식을 식(識)이라고 하는데 경계에서 요별함을 특징으로 삼는다.이와 같이 세 가지가 있는데, 유심위(有心位) 중에서는 심, 의, 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으며 유전하느니라.

此中諸識을 皆名心意識이요 若就最勝阿賴耶識하면 名心이니 何以故오 由此識이 能集聚一切法種子故며 於一切時에 緣執受境하고 緣不可知一類器境하니라 末那를 名意니 於一切時에 執我我所及我慢等하여 思量爲性이요 餘識을 名識이니 謂於境界에 了別爲相이니 如是三種이라 有心爲中엔 心意意識이 於一體時에 俱有而轉하니라. [瑜伽論;大正藏 30, p. 651中]


아뢰야식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세하고 난해하여 보통의 심식으로는 도저히 사량할 수 없고 분별할 수 없으며 지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不可知]’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나식이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고 사량함은 잠재적으로 사량하는 것을 말하며, 만약 드러나게 사량한다면 제6식의 작용에 의한 것이지 말나식의 성질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뿌리깊은 번뇌인 아(我), 아소(我所)와 아만(我慢) 등을 집착하며 끊임없는 생각과 헤아림을 그 성품으로 삼는 것입니다. “유심위 가운데는 심, 의, 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으며 유전하느니라”는 말은, 마음의 경계를 열지 못한 우리가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아뢰야식이 근본이 되고 말나와 의식이 함께 뭉쳐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의식뿐이지만 그것을 내면적으로 운전하는 말나와 아뢰야도 언제든지 의식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이와 같지만 발심수행하여 제8지 보살의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면 의식이 완전히 떨어지고 말나도 거의 떨어져서 제8 아뢰야만 혼자 남게 됩니다.


제4장 유식사상 - 2. 아뢰야식설 - (5) 섭대승론



이 화합식이 일체 종자식이며 곧 아뢰야식이니라. 그러므로 이 화합식의 성취는 의식이 아니고 다만 이숙식이니 이것이 일체 종자식이니라.

若此和合識이 是一切種子識이며 卽是阿賴耶識이니라 …… 是故로 成就此和合識은 非是意識이요 但是異熟識이니 是一切種子識이니라. [攝大乘論;大正藏 31, p. 126上]


여기에서 말하는 ‘화합’이란 일체 종자의 화합을 의미합니다.


제4장 유식사상 - 2. 아뢰야식설 - (6) 성유식론



과(果)가 원인과 다른 까닭으로 이 가운데 또 설하되 아애집장(我愛執藏)이 잡염 종자를 가져 능히 과보 식[果識]으로 변하는 것을 이숙이라 한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니 이숙이며 일체 종자이니라.


果는 異因故로 此中에 且說호대 我愛執藏이 持雜染種하여 能變果識을 名爲異熟이라 …… 初는 阿賴耶識이니 異熟이며 一切種이니라. [成唯識論;大正藏 31, p. 7下]


‘아애집장(我愛執藏)’이란 무시 이래로 중생들이 어떤 불멸하는 실아(實我)가 있다고 애착하는 것이 마치 귀한 것을 넣어둔 창고를 견고히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잡염의 종자’란 여러 가지 선이나 악의 원인을 말하며, 이것이 선이나 악과는 다른 부귀 빈천 등의 과보로 나타나므로 이숙이라고 합니다.


혹은 이숙식이라 이름하니 능히 생사의 선한 업과 선하지 않은 업을 이끌어서 과보를 다르게 익히기 때문이니라.

或名異熟識이니 能引生死善不善業하여 異熟果故니라. [成唯識論;大正藏 31, p. 13下]


이것은 이숙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숙식은 어째서 행위의 원인[因]은 선이나 악인데 그 과보는 선이나 악이지 않고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인가, 즉 다르게 익는 것[異熟]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까닭은 과거, 현재, 미래에 삼계에서 항상 생사유전하는 과보의 주체가 만약 선하다면 항상 즐거움만을 초래하고 만약 악하다면 항상 괴로움만을 수반하여 영원토록 반복되어 마침내 수도하여 향상하고 증오(證悟)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숙식은 그 업의 원인은 선이나 악이지만 과보는 무기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숙식의 성질이 무기라는 것은 총체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며, 선업이나 악업에 따른 과보는 개별적으로 나타나므로 선인(善因)-선과(善果), 악인(惡因)-악과(惡果)라는 불법의 진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박가범이 곳곳의 경 가운데서 심(心), 의(意), 식(識) 세 가지 다른 뜻을 설명하셨다. 모아 일으키는 것을 심이라 하고 사량을 의라 하며 요별을 식이라 이름한다. 이 세 가지 다른 식의 이러한 세 가지 뜻은 비록 8식 전체에 통하나 수승함을 따라서 밝히면, 제8식을 심이라 하니 모든 법의 종자를 모아서 모든 법을 일으키는 까닭이요, 제7식을 의라 이름하니 장식(藏識) 등을 반연하여 항상 살피고 사량하여 자아[我] 등으로 삼는 까닭이요, 남은 여섯은 식이라 이름하니 여섯 가지 다른 경계에 거칠게 움직여 간격이 끊어져 분별하며 유전하기 때문이다. 능가경 게송 중에 말하였다. “장식은 심이라 이름하고, 사량성은 의라 이름하며 능히 모든 경계 상을 요별함은 식이라고 이름하느니라.”

薄伽梵이 處處經中에 說心意識의 三種別義하시니 集起를 名心이요 思量을 名意요 了別을 名識이니라 是三別識의 如是三義가 雖通八識이나 而隨勝顯하면 第八을 名心이니 集諸法種하여 起諸法故요 第七은 名意니 緣藏識等하여 恒審思量하여 爲我等故요 餘六은 名識이니 於六別境에 麤動間斷하여 了別轉故니라 如瑜伽中에 說호대 藏識은 說名心이요 思量性은 名意요 能了別諸境相은 是說名爲識이라 하니라. [成唯識論;大正藏 31, p. 24下]


박가범(薄伽梵)이란 범어 bhagavat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세존(世尊)을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 특기할 것은 제7식이 제8식인 ‘장식(藏識)을 반연하여 나[我]라고 삼는다’ 하고 있는데 이것은 호법(護法)논사의 주장입니다.




제4장 유식사상 - 2. 아뢰야식설 - (7) 유식술기



이숙식은 즉 제8식을 말함이니 이름에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다르게 변해서 익는 것[變異而熟]이니 원인이 변할 때에 과보가 바야흐로 성숙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다른 것에도 다 통하니 과보가 생길 때는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때를 달리해서 익는 것[異時而熟]이니 원인과 시기를 달리하여 과보가 바야흐로 성숙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종류를 달리해서 익는 것[異類而熟]이니 원인과 성질을 달리하여 과보가 원인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謂異熟識은 卽第八識이니 名有多義라 一은 變異而熟이니 要因變異之時에 果方熟故니라 此意通餘하니 種生果時에 皆變異故니라 二는 異時而熟이니 與因異時하여 果方熟故니라 三은 異類而熟이니 與因異性하여 果酬因故니라. [唯識述記;大正藏 43, p. 238下]


이숙식에는 세 종류가 있지만, 이 중에서 선악 업보의 과체로서의 제8식은 이류이숙뿐이고, 나머지는 생성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는 생사윤회의 주체로서의 이숙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4장 유식사상 - 2. 아뢰야식설 - (8) 대승기신론



또 생멸인연이라는 것은 이른바 중생이 심과 의와 의식에 의지하여 유전하는 것이니라.

復次生滅因緣者는 所謂衆生이 依心意意識轉故니라. [起信論;大正藏 32, p. 577中]


기신론은 원래 순수한 유식 논서는 아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유식학설을 받아들여서 제8식[心], 제7식[意], 제6식[意識]의 세 가지가 합하여 생멸인연(生滅因緣)이 된다고 하면서 그 근본은 역시 제8식에 있다고 합니다.



제4장 유식사상 - 2. 아뢰야식설 - (9) 선가의 설



항상함[恒]과 사량[審]은 식 가운데 네 가지의 분별이 있느니라. 제8식은 항상하면서 사량이 없으니 나[我]에 집착하지 않아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요, 제6식은 사량하면서 항상하지 않으니 나에 집착하여 끊어짐이 있기 때문이요, 전5식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으니 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요, 제7식은 항상하면서 또 사량하니 나를 집착하여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니라.

恒之與審이 識中에 有四句分別하니라 第八識은 恒而非審이니 不執我하여 無間斷故요 第六識은 審而非恒이니 以執我有間斷故요 前五는 非恒非審이니 不執我故요 第七識은 亦恒亦審이니 以執我無間斷故니라. [憨山性相通說, p. 26中]


항(恒)이란 식이 항상 상속하는 것을 말하고 심(審)은 사량분별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잠재적으로 사량분별하는 것과 드러나게 사량분별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8식 가운데 네 가지의 구별이 있습니다. 제8식은 항상하면서 사량이 없습니다[恒而非審]. 나를 집착하지 않으나 그 작용하는 활동이 상속하여 끊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몸을 바꾸어서 다른 생사를 받게 될 때까지도 간단이 없습니다. 동시에 사량분별을 하지 않는데 그것은 순전히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6식은 제8식과 반대로 언제나 사량분별을 하지만 항상 계속되지는 않습니다[審而非恒]. 붉은 것을 보면 붉은 데에 머무르고, 검은 것을 보면 검은 데 머무르며, 어떤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일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연속되는 정신활동은 제8식이며, 6식은 시시각각으로 경계를 따라 간단이 있어 사량분별을 근본으로 삼으며 상속을 하지 않습니다. 전5식은 곧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식을 말하는데, 이 전5식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습니다[非恒非審]. 예를 들면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이 눈의 수정체에 어떤 사물이 비치는 그 순간을 전5식의 작용이라 하고, 거기서 푸른 것이라든지 붉은 것이라든지 그 무엇을 인식하게 될 때는 전5식의 영역이 아니며 의식의 영역에 속합니다. 즉 전5식의 활동은 순전히 무의식적인 것으로 사량분별이 없습니다. 또 7식이나 6식같이 연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물이 눈에 비칠 때는 있고, 비치지 않을 때는 없어서 완전히 끊어져 버립니다. 제7식은 항상 상속하면서 또한 항상 사량하는데[亦恒亦審] 이것은 잠재적으로 제8식을 의지해서 항상 연속하며, 항상 연속한 가운데 잠재적으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 등을 사량하고 있습니다.


현수스님 같은 분은 ‘항상한다[亦恒]’ 하는 것은 제8식에다 붙여 버리고 ‘사량한다[亦審]’ 하는 것은 제6식에 갖다 붙이면 제7은 따로 세울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우리의 정신상태를 분석해 보면 제7식을 따로 두는 것이 논리상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이 심, 의, 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마음을 물리치고 단박에 생김이 없는 지견의 힘에 들어가도다.

損法財滅功德은 莫不由斯心識이라 是以로 禪門은 了却心하고 頓入無生知見力이니라. [證道歌]


불법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방해물은 심, 의, 의식입니다. 선문에서는 공부하여 자성을 깨치는 데 제일 방해되는 것이 제8 아뢰야이니 이 아뢰야부터 제거해야 된다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지극히 미세한 제8 아뢰야를 제8 마계(第八魔界)라 규정합니다. 누구든지 공부를 아무리 잘하여 완전히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었다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 마계에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전의 조사가 입을 모아 똑같이 말하는 소리입니다. 오매일여가 되고 완전한 무심경계에 들어갔다고 해도 선문에서는 이것을 제8 마계라 부르며 견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不疑言句 是爲大病]’이라 하여 근본적으로 배격했습니다. 그러한데, 제8식은 그만두고 제6의식의 사량분별 속에서 경계가 조금 바뀌고 어떠한 지견이 생겼다고 이것을 견성이라 알면 자기만 망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남에게 가르치게 되어 자타가 모두 망하게 됩니다. 옛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은 언제나 구경각을 견성이라 하고 육식은 물론 제8 아뢰야의 경계까지도 견성이 아니라 했는데, 의식분별이나 객진번뇌를 가지고 견성이라 주장하면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님 말씀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는 비법(非法)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