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6장 천태종사상] 1. 삼제원융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17

 

제6장 천태종사상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는 혜문선사(慧文禪師)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주로 선에 대한 관법을 익혔으며,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中論) 및 대지도론(大智度論)을 탐독하여 마침내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요결을 깨달았습니다. 제2조인 혜사(慧思:514~577)선사는 15세에 출가한 이래로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대승경전을 독송하고 사방을 유행하여 선관(禪觀)을 닦았으며, 혜문선사를 찾아가 일심삼관의 요결을 배워 익혀 법화삼매(法華三味)를 증득했습니다. 법화삼매의 본래 의미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등 철저한 공관(空觀)을 증득하는 것이었지만, 혜사선사가 증득한 법화삼매는 근기가 뛰어난 보살이 방편을 버리고 부처님의 공덕을 닦는 궁극적인 실천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법화경안락행의(法華經安樂行義) 등 여러 권의 저술이 있었고, 지의(智顗), 혜명(慧命) 등 여러 제자가 있었으나 그 법요(法要)를 전한 것은 천태 지의(天台智顗:538~597)입니다.


지의스님은 양(梁)나라 말기의 난세에 부모를 잃고 18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후 대현산(大賢山)에 올라가 법화경(法華經), 무량의경(無量義經), 보현관경(普賢觀經)을 독송하였습니다. 23세 때 대소산(大蘇山)에 가서 혜사선사 밑에서 수행하였는데, 혜사선사는 지의스님과 자신이 옛날 영축산에서 함께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 것을 들었던 지난날의 인연으로 이제 서로 다시 만났다고 말하며, 지의스님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간곡히 가르쳐, 드디어 지의스님은 법화삼매를 성취하였습니다. 그 후 지의스님은 대소산을 내려와 금릉의 와관사(瓦官寺)에서 차제선문(次第禪門), 법화문구(法華文句) 등을 개강하고, 38세에 천태산에 들어가 고행을 하였는데 천태대사(天台大師)라는 칭호는 지의스님이 천태산에서 10여 년 간을 머무른 데에 유래합니다. 진(陳)나라가 멸망하고 수(隋)나라가 들어서자 나중에 수 양제가 된 진왕 광(晋王廣)의 초빙에 의하여 그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의스님은 지자(智者)라는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나중에 고향인 형주(荊州)로 돌아가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고 거기에서 법화현의(法華玄義), 마하지관(摩訶止觀) 등을 강설하였습니다. 그 후 천태산에서 지내다 진왕 광의 초청에 의하여 다시 하산하다가 도중에서 병을 얻어 입적하였으며, 입적 후에 진왕의 원조를 얻어 천태산에 국청사(國淸寺)가 창건되어 이후 천태종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천태스님이 남긴 많은 저서 가운데, 천태교학의 지침서인 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을 천태3대부라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의 제자인 관정(灌頂)이 수치(修治)한 것입니다. 그 외에 관음현의(觀音玄義), 관음의소(觀音義疏), 금광명현의(金光明玄義), 금광명문구(金光明文句), 관경소(觀經疏)의 5소부(五小部)와 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 차제법문(次第法門), 사교의(四敎義) 등이 있습니다.


천태스님의 제자로는 30여 명이 있었으나 그 교학을 후세에 전한 것은 장안 관정(章安灌頂:561~632)이며, 이 계통의 문하에서 천태의 교학이 전승되다가 당나라 때 흥기한 법상종, 화엄종, 선종의 세력에 압도되어 종세가 약화되고 맙니다. 그 뒤에 당 말기에 활약한 형계 담연(荊溪湛然:711~782)에 의해 천태종이 일시 중흥하였으며, 송(宋)나라 때에는 화엄종의 영향을 받아 천태종 내에서 유심론(唯心論)에 대한 논쟁이 생겨 산가파(山家派)와 산외파(山外派)로 분류되어 산가파의 사명 지례(四明知禮:960~1028) 계통이 번창했습니다.


천태종은 일반적으로 화엄종과 함께 중국불교 교학의 최고 수준으로 불리는데, 그 교학은 교(敎)와 관(觀)의 두 부문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교(敎)는 교판(敎判)과 교리(敎理)로 구성되었습니다. 천태종의 교판(敎判)은 남북조시대에 도생(道生), 혜관(慧觀) 등 소위 남3북7(南三北七)의 열 명이 세운 교판을 연구하여 자기네의 교판을 수립하였는데, 그 교판은 오시팔교(五時八敎)입니다. 오시는 불교의 모든 경전을 부처님이 설한 다섯 시기의 순서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첫 번째가 화엄경을 설한 화엄시(華嚴時)이고, 그 다음은 차례대로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설한 아함시(阿含時) 또는 녹원시(鹿苑時), 그리고 유마경, 승만경 등 일반 대승경전을 설한 방등시(方等時), 다음은 여러 가지 반야경을 설한 반야시(般若時)이며, 맨 마지막이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입니다. 팔교는 화의사교(化儀四敎)와 화법사교(化法四敎)를 합한 것입니다. 화의사교는 설법의 방식에 따라서 모든 불교를 돈교(頓敎), 점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로 나눈 것입니다. 돈교는 청중의 근기를 구별하지 않고 바로 원교의 깊은 뜻을 일시에 널리 설한 법문이며, 점교(漸敎)는 근기를 감안하여 그것에 적합한 방편을 사용해서 점차 성숙시키는 법문입니다. 비밀교는 설명의 형식이 규칙적이지 않으면서도 여래가 몸, 입, 마음을 비밀히 구사하여 자재하게 중생을 제도하는 법문이며, 부정교는 법화경 이전의 설법에서 여래의 법문을 듣고 청중이 근기에 따라 각각 달리 이해하는 법문입니다. 화법사교는 설법의 내용에 따라서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로 구분한 것인데, 천태학에서 특히 중시하는 것이 이 화법사교입니다. 장교는 소승교로 소승의 경, 율, 논 삼장이 여기에 해당하며, 통교는 성문, 연각과 보살의 삼승에 공통하는 대승의 첫 단계로 주로 반야경전이 해당합니다. 별교는 오직 보살만이 상응하는 가르침으로 원교와는 달리 차례로 법을 닦으며, 원교는 모든 교설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으로 삼제원융의 실상을 설하는 법화원교의 법문을 말합니다. 이 오시팔교 가운데 화의사교와 화법사교의 팔교를 명확히 한 것은 천태스님의 제자인 관정이라고 합니다. 어찌 됐든 천태종에서는 오시팔교의 교판을 세워서 천태스님 이전의 교판에서는 다소 경시되었던 법화경을 가장 수승한 법문이라고 선언하여 법화경 중심의 사상을 주장한 것입니다.


천태종의 교리(敎理)는 전반적으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법실상이란 중론의 삼제게(三諦偈)에 있는 공(空), 가(仮), 중(中)의 삼제에 의하여 표명되는 것으로, 천태종에서는 이 삼제게를 보다 원융적으로 해석합니다. 즉 인연으로 생겨난 일체법이 그대로 공이고 가(仮)이고 중(中)이면서, 공 가운데에 가와 중이 있고 가 중에 중과 공이 있는 등 삼제가 즉공(卽空), 즉가(卽仮), 즉중(卽中)이 되어 원융삼제(圓融三諦)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융삼제는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그러하여 자연히 갖추어진 것이므로 일경삼제(一境三諦)라고도 합니다. 이 제법실상의 도리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천태교학으로 일념삼천(一念三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생각 속에 삼천 가지의 법이 구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삼천이란 대지도론과 화엄경에서 설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인,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십계(十界)와, 법화경에서 설하는 여시상(如是相), 여시성(如是性), 여시체(如是體), 여시력(如是力), 여시작(如是作), 여시인(如是因), 여시연(如是緣), 여시계(如是界), 여시보(如是報), 여시본말구경(如是本末究竟) 등의 십여시(十如是), 그리고 대지도론에서 논하는 오음세간(五陰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의 삼종세간(三種世間)을 곱한 것입니다. 즉 10계(十界)의 각각이 다시 10계를 구비하여 십계호구(十界互具)의 100계가 되고, 1계가 또한 각각 10여시를 구비하여 천(千)이 되며, 이들이 모두 삼종세간을 갖추므로 결국에는 삼천(三千)이 됩니다. 이러한 일념삼천설은 제법이 본래 즉공, 즉가, 즉중의 묘법이므로 만법이 모두 원융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태종에서는 담연(湛然:711~782)에 이르러서 화엄학의 성기설(性起說)에 영향받아, 하나의 색(色)이나 하나의 향(香)이 모두 본래 선악(善惡)의 삼천 가지 제법을 갖추었다는 성구설(性具說)을 주장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악설(性惡說)까지도 말하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불교 종파에서는 다만 성선(性善)을 설하지만 유독 천태학에서 성악(性惡)을 설한 것입니다. 그 뜻은 설사 지옥 중생일지라도 지옥의 성품은 물론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인,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덕성을 갖추고 있으며, 부처님이라 하여도 지옥, 아귀에서부터 보살, 부처까지의 성품을 지니어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고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비록 행위로서의 악은 단절했지만 성품으로서의 악성은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악설은 천태종 내부에서는 물론 화엄종에 의해서도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의 성악설이 의도하는 본뜻은, 수도하는 이로 하여금 일체의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원인이 각자가 구비한 덕성에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려는 현실주의적인 사고에 근거한 교설이라 하겠습니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진여법성(眞如法性)과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순간마다 그 마음속에 부처의 세계가 생기기도 하고 지옥의 세계가 전개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천태종의 교리와 병행하여 거론되는 실천적인 관법(觀法)으로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이 대표적입니다. 일심삼관이란 일심(一心)의 위에서 삼제가 원융함을 관하는 것이니, 곧 일상의 한 마음 가운데 삼천 가지의 제법을 구족하여 즉공, 즉가, 즉중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관법으로서 일심삼관을 관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상을 관하여 마음을 법계에 두고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음을 관하는 것이니 이러한 천태종의 관법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 합니다.


천태종에서는 실천적인 수행도를 지관(止觀)이라 부르는데, 이 지관법에는 점차지관(漸次止觀), 부정지관(不定止觀), 원돈지관(圓頓止觀)의 세 가지가 있으며, 이것은 혜사선사의 세 가지 지관을 전해 받은 천태스님이 완성한 것입니다. 점차지관은 여러 가지 선관을 처음에는 얕고 나중에는 깊이 닦는 것으로 삼승이 함께 닦는 관법이며, 부정지관은 관법을 행함이 앞뒤가 일정하지 않고 그 행상도 불규칙하니 점교, 돈교의 관법을 말한 것입니다. 원돈지관은 법화원교의 관법을 말하는데 이 원돈지관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사종삼매(四種三昧)와 십승관법(十乘觀法)이 있습니다. 사종삼매는 신행(身行)의 구별에 따라 선정의 종류를 상좌삼매(常坐三昧), 상행삼매(常行三昧),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의 네 가지로 나눈 것인데, 이 사종삼매는 반야경, 반주삼매경 등 법화경 이외의 여러 경전이 설하는 삼매의 법문을 포함합니다. 십승관법은 부사의한 일념삼천의 사상을 의미하는 부사의경(不思議境)을 관하는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을 비롯한 기자비심(起慈悲心), 교안지관(巧安止觀) 등의 열 가지 관법입니다. 이들 가운데 최초의 관부사의경 이외에는 모두가 여러 대소승의 경론에서 설한 것이므로 결코 천태지관만의 독특한 관법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십승관법 중에서 처음의 관부사의경이 일념삼천의 도리를 관하는 가장 중요한 관법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이 관법을 완성하기 위한 보조관법이라고 말해집니다. 사종삼매와 십승관법의 구별을 논하자면 사종삼매는 십승관법을 닦기 위한 방편이고 보조연이며, 십승관법은 바로 법화원교의 사상을 관하는 정식 수행입니다.




제6장 천태종사상 - 1. 삼제원융



천태종의 교리를 조직하는 근본적인 사상적 기반은 중도실상(中道實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도실상이란 곧 공(空), 가(仮), 중(中)의 삼제가 원융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 사상의 연원은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지은 중론(中論)의 삼제게(三諦偈)에 유래합니다. 만법은 여러 인연으로 인하여 발생하므로 공(空)이라 하는데, 연기하여 생한 제법(諸法)은 고정적인 유(有)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연기한 제법은 비록 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연기하여 존재하므로 결코 무(無)가 아닙니다. 이 뜻을 가(仮)로 표현합니다. 연기법은 이렇게 한편으로 공이고 한편으로 가이므로 유와 무를 떠나 중도를 이루는 중(中)이 됩니다.


천태종에서는 이 공, 가, 중의 삼제가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 원융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따라가고, 가라 하면 공과 중이 따라가서 언제든지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어서 삼제가 늘 상응하여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렇게 보아야만 연기를 바로 보고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지, 만약 그렇지 못하고 공은 공대로, 가는 가대로, 중은 중대로 되어 버리면 편견이 되어 올바른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삼제는 이름이 공이고 가이고 중일 뿐이지 실제로 이것을 공이라 하고 저것을 가라 하여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하면 곧 어긋납니다.이 삼제원융의 도리는 천태스님의 스승인 혜문(慧文)스님이 중론을 읽다가 그 깊은 뜻을 발견하여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 도리를 참으로 자재하게 활용한 분이 바로 천태 지자(天台智者)스님입니다.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남에 즉 공(空)이고 즉 가(仮)이고 즉 중(中)이라 함은 근(根)이나 진(塵)이 모두 법계며 모두 필경공(畢竟空)이며 모두 여래장(如來藏)이며 모두 중도이다. 어째서 공이라 하는가.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하니 인연으로 생한즉 주체가 없고 주체가 없은즉 공이니라. 어째서 가라 하는가. 주체가 없이 생하니 곧 이것이 가이니라. 어째서 중이라 하는가. 법성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모두가 다 중이니라. 마땅히 알아라. 한 생각이 즉공, 즉가, 즉중이며 모두 필경공이며 모두 여래장이며 모두 실상이니라. 셋이 아니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셋이 아니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면서 합하고 흩어지며,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으면서 동일하고 다르니라. 비유하면 밝은 거울과 같으니 밝음을 비유함이 즉 공이요, 거울에 나타난 상을 비유함이 즉 가요, 밝은 거울을 비유함이 즉 중이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면서 합하고 흩어짐이 완연하며, 하나, 둘, 셋이 아니면서 둘, 셋이 방해롭지 않느니라. 이 한 생각 마음은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어서 불가사의하니 단지 자기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부처와 중생도 역시 또한 이와 같으니라. 화엄에 말하기를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하니, 마땅히 알아라. 자기의 마음에 일체 불법을 구족하고 있느니라.

一念心起에 卽空卽仮卽中者는 若根若塵이 並是法界며 並是畢竟空이며 並是如來藏이며 並是中道니라. 云何卽空고 並從緣生緣生 卽無主요 無主卽空이니라. 云何卽仮오 無主而生하니 卽是仮니라. 云何卽中고 不出法性하니 並皆卽中이니라. 當知하라. 一念이 卽空卽仮卽中이며 並畢竟空이며 並如來藏이며 並實相이니라. 非三而三三而不三이요 非合非散而合而散이며 非非合非非散이요 不可一異而一而異니라. 譬如明鏡이니 明喩卽空이요 像喩卽仮요 鏡喩卽中이라. 不合不散하며 合散이 宛然하고 不一二三하며 二三無妨하니라. 此一念心은 不縱不橫하여 不可思議하니 非但己爾요 佛及衆生도 亦復如是니라. 華嚴에 云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 하니 當知하라 己心具一切佛法矣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p. 8下~9上]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남에 즉공, 즉가, 즉중이라 함’은 부사의 해탈경계에서 말하는 것이지 중생의 생멸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수행할 필요도 없고 성불할 필요도 없고 중도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반드시 깨달아야지 깨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육근(六根)이나 육진(六塵) 등의 모든 것이 눈감은 사람이 볼 때는 캄캄한 암흑뿐이지만 눈을 뜨고 보면 대광명입니다. 중도를 깨달아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체득한 사람에게는 전체가 다 법계며 필경공이며 여래장이며 중도제일의제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공(空)이라 하는가?” 일체만법이 인연으로부터 생하므로 주체가 없으며, 주체가 없으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없으므로 곧 무아(無我)로서 공이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가(仮)라 하는가?” 주체가 없이 생하므로 분명히 무아는 무아인데 연기하여 머무름이 있으므로 곧 가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중(中)이라 하는가?” 법성을 벗어나지 아니하므로 연기라 하든지 공이라 하든지 가라 하든지 이 전체가 다 법성의 표현이며 법성 이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밝은 거울에 비유하면, 밝음이 즉 공이니 환하게 밝기는 밝지만 밝은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공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밝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사람이나 사물이 분명히 거울에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라고 비유합니다. 그리고 거울 자체는 중이라 비유합니다. 그리하여 광명[明]이라 하든지 모양[像]이라 하든지 가라 하든지 중이라 하든지 이 전체가 밝은 거울 속에 있어 합할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습니다. 밝은 거울 가운데 광명이 있어 모양이 나타나므로 광명이 즉 모양이고 모양이 그대로 밝은 거울입니다. 밝은 거울과 모양과 광명이 서로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 없고, 하나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입니다.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에서 ‘합하지도 않는다’ 함은 광명과 모양과 밝은 거울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광명 이외에 모양이 따로 있고 모양 이외에 밝은 거울이 따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셋은 한 덩어리가 되어 그 한 덩어리 속에 셋이 있고 셋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또 합하고 흩어짐이 완연하며, 하나, 둘, 셋이 아니면서 둘, 셋이 방해롭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 한 생각 마음은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면서 불가사의하니 자기 마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부처와 중생이 또한’ 그와 같습니다. 이런 도리는 오직 바로 깨친 사람만이 알 수 있으며, 그 이외는 천 명의 석가, 만 명의 달마가 나와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명을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굳이 설명을 한다는 것은 눈먼 맹인에게 오색단청이나 광명을 이야기하는 격입니다. ꡔ화엄경ꡕ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이 차별이 없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자기 마음을 바로 깨달으면 일체 불법을 바로 아는 동시에 공, 가, 중의 삼제가 원융무애한 사실을 완연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늘 중도 이야기만 하므로 듣기가 다소 지루할지 모르지만 불교의 근본이 다 중도에 서 있느니만큼 혹 표현은 다르다 해도 중도를 제외하고는 불법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불교를 바로 보는 것이고, 중도를 바로 보지 못하면 절대로 불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계 인연으로부터 나니 체(體)는 다시 유(有)가 아니다. 유가 아니기 때문에 공(空)이요, 공이 아니기 때문에 유다. 공과 유를 얻지 못하되 공과 유를 쌍조하여 삼제가 완연하여 부처의 지견을 갖추느니라.

法界從緣生하니 體復非有라. 非有故空이요 非空故有라. 不得空有로대 雙照空有하여 三諦宛然하여 備佛知見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6上]


공과 유를 완전히 떠나 쌍차(雙遮)하면 거기에서 도리어 공과 유가 쌍조(雙照)되어 원융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삼제가 원융하여 하나가 곧 셋이고, 셋이 곧 하나가 되어 부처의 지견을 갖추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