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화두 공부법(13)

通達無我法者 2007. 5. 5. 16:44
小參 法文2(1)

1) 일체(一切)를 버려라

 

一念心淸淨하니         한 생각 마음이 깨끗하니,

處處에 蓮花開더라.    곳곳에 연꽃이 피더라.

一花一淨土요.           꽃 하나에 정토 하나씩이요.

一土一如來라.           극락세계 한 곳에 아미타불이 한 분씩 계시더라.

 

이 게송은 중국의 유마居士라고 불리는 방거사의 게송인데,

'마음이 淸淨하면 꽃이 핀다'이 말이 아니고,

마음이 깨끗하니, 본래 꽃이 피어 있는, 본래 극락세계, 본래 아미타불을  보게되더라 이 말이야.

 

온 시방세계가 淨土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안계신 곳이 없는데, 중생이 번뇌망상에(마음의 눈이)

가리워서 그것을 못 볼 뿐이다 그 말이여.

온 시방세계 어느 곳이든지 극락세계 아님이 없고, 아마타불이 안계신 곳이 없어.

항상 無盡法門을 하시고 大作佛事를 하고 계시거든.

그렇지만 중생을 그것을 못 본다 그  말이여.

그 못 보는 이유는 번뇌망상에 가리워서 못 볼 뿐이지, 본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淨土다...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 불교에서 많이 비유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란 거울과 같은데, 거울이 본래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거기에 때가 묻고 먼지가 꽉 끼면

아무 것도 안 비친다 이 말이여.

그렇지만 그 물건이란, 모든 삼라만상이란 엄연히 그대로 존재하고 안 있어?

거울에 비치지 않을 뿐이지, 그와 마찬가지야.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 정토인데,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은 거울에 때가 끼어서 못 보는 것과

같다 이 말이여.

 

그래 공부를 많이 해서 번뇌망상을 쉬어 버리면, 거울의 때가 다 없어져 버린단 말이여.

 

그러면 거울이 환하게 안 드러나겠어?

본 마음이 드러난다 이말이여.

본 마음이, 본 거울이 드러나면, 그 때가선 모든 것이 다 비치거든.

 

그와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공부를 부지런히 해 가지고 번뇌망상을 다 쉬어 버리면

자기 마음의 눈을 떠 버린다 이 말이여.

 

눈을 뜨면 온 시방세계가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고 아마타불 안 계신 곳이 없다 이 말이여.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목표며 근본 원리야.

 

요는 어떻게 해야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나, 극락세계를 볼 수가 있나 이것인데,

꼭 참으로 마음의 눈을 떠서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임을 보려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공부해야지 만약 조금이라도 구하는 생각이나 집착이 있으면

마음거울의 때가 닦이지 않고 지워지지 않고 마음의 눈을 뜰 수 없다 그 말이여.

 

그런데 금방 말한 게송의 임자가 방거산데, 방거사 자체부터가 그렇거든. 천하갑부야.

發心을 해서, 자기 재산을 전부 팔아서 좋은 금은 보화와 보석, 보물로 바꿨어.

 

바꾸니 큰 배로 두 배여. 그래서 배에 싣고서 동정湖 한 가운데 가서 한 배를 물에 집어 넣었단

말이여.

 

뱃사공들이 가만히 보니 저 사람이 미쳤거든.

그걸 팔아서 딴데 가서 돈으로 바꿔서 재산을 사려는 줄 알았는데, 물 한복판에 집어 넣거든.

 

그래서'아니, 그 아까운 보물을 물 속에 집어 넣을 필요가 뭐 있소? 남은 보물을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면 많은 사람들이 구제를 받을 텐데, 왜 그러시요?'(하고 물으니)

'허허, 내가 나쁘다고 내 버린 물건을 어떻게 남을 줄수가 있소?' (하는 거라)

 

안 그렇겠어? 자기가 나쁜, 못 쓰는 물건이라고 내버린 물건을 어찌 남을 줄 수가 있나 그 말이야.

이 물질이라는 것은 사람의 욕심의 근본이 되어서 자꾸 사람의 마음의 눈을 가리고,

 

결국 業을 두텁게 해서 참으로 진리를, 부처님을 못 보게 한다 이말이여.

그러니까 재물이 중생들에게 없으면 죽을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비상(독약)보다도 더 무서운 거라  이 말이여.

 

비상인 줄 알고서 내가 안 먹으려 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죽으라고 줄 수가 있냐 이말이야 !

 

그래 남은 배도 마저 집어 넣어 버렸어.

천하 갑부가 알거지가 되어 버렸어. 두 손 뿐이야.

 

기록에도 '다만 조각배 하나 타고 다닐만 했다'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버려 버렸어.

그런 큰 결심, 천하갑부라는 그런 큰 재산을 팔아서 아무 미련없이 완전히 내버릴 수 있는 그런 큰 결심이 있으면, 공부를 성취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어.

만약 그런 큰 결심이 없으면 아무리 공부한다 해도 딴 생각하는 사람이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야.

 

부처님은 왕궁도 내버렸는데 그까짓 재물 좀 버린 것쯤은 천하 쉬운 것 같지만,

그게 쉬운게 아니야.

 

그래 누구든지 참으로 大道를 성취해서 앉은 자리 선자리 이대로 극락세계, 이대로 해탈,

이대로 부처임을 보려면 먼저 모든 것- 마음 속에 있는 것이든 마음 밖에 있는 것이든-을

다 버려야 되.

 

그러면 벌거 벗은 몸뚱이 뿐 아니야?

이렇게 되야만 大道를 성취할 수 있거든.

그러면 방거사는 그 다음엔 어떻게 살았느냐.

저 산있는데 가서 토굴 하나 짓고서 마누라와 아들, 딸과 함께 산죽(山竹)으로 조리를 만들어서

어린 딸한테 시켜 팔아서 쌀로 바꿔서 그렇게 먹고 살았어.

누가 보면 미친 사람 아니야?

 

그 많던 재산 다 버리고 저- 산... 저- 얄굿은데 가서 산죽을 쪄서 조리를 만들어서 어린 딸한테

시켜서 팔게 해서 양식으로 바꾸어 먹으니 미친 사람 아니냐 이 말이야.

그렇게 철저한 생각이 아니면 어떻게 대도를 성취할 수 있겠어?

 

그럼 나중에 끝이 어떻게 됐냐 하면, 석두스님,마조스님을 찾아가서 대도를 완전히 성취했으니,

조사스님들과 똑 같은 이야.

나중에 갈때도 아주 자유자재하게 갔어.

그때 식구들은 (밖에) 다 나가고 딸만 있었는데,

방거사가"내가 해가 중천에 뜨는 12시쯤 되면 갈테니까 때가 되면 기별해라" 했더니

 

한참 있다가 "아버지 밖에 나와 보십시오, 이상한게 공중에 떠 있읍니다" "그래?" 하고 밖에 나와보니 아무것도 없거든. 다시 방에 들어와 보니 딸이 合掌하고 서서 가버렸어.

그대로 죽어 버렸단 말이여.

그러자 방거사가 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딸이 기봉(機鋒)이 참으로 빠르다" 칭찬해 줬거든.

 

그 뒤에 화장해 놓고 일주일 뒤에 영제를 지냈는데, 그 당시 刺史(주지사)가 그 소문을 듣고 오자 자사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법문을 해 주고는 가 버렸어.

 

그때 아들은 마침 밭을 매고 있었는데, 자사가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가 지금 막 돌아 가셨네"

하니, "아, 그래?" 하면서 밭을 메고 있던 호미를 탁 꽂으면서 벌떡 일어서 버리거든.

그런데 안 움직여. 가보니 또 가버렸어.

그런 대자유가 있었단 말이여.

 

그러니까 비록 재산은 전부 다 물에 집어 넣어 버리고 홀홀 단신, 알거지가 되어 조리를 만들어

쌀로 바꿔 먹기를 평생했으니, 물질적으로 보면 하나도 가진게 없는 거지지만,

道로 봐서는 천하에 이 보다 더 큰 부자는 없었다 이말이여.

그러니까 영가스님 말씀도 그 말씀 아니냐?

窮釋子口稱貧이나 寶是身貧道不貧이라,

모든 것을 다 버렸으니까 입으로는 가난하다 해도, 몸은 가난해도 도는 천하 부자다 이 말이야.

우리가 출가한 중이 되었던지, 發心한 보살이 되었다면, 몸은 가난해도 道는 부자가 되어야지.

道는 가난하고 몸은 부자가 되면, 이건 佛法하고 반대여.

그렇지만 요새보면 반대로 나가거든, 道는 가난하고 몸은 부자다 이거야.

 

이 공부를 성취하려면 첫째 해탈이 있나 없나 이게 문젠데.

해탈이 왜 없어 !

몇해 전에도 법관 세사람이 판사를 여남은 명 데리고 와서 물을 게 있다고 그래.

그래, 그래 뭐냐니까, 확실히 불교에 해탈이 있냐 이거라.

이 사람이 정신이 있나 없나?

 

해탈이 없을 것 같으면 불교가 2천년 3천년 이대로 내려 올 턱이 있냐고.

그래 설명을 좀 해 줬더니 잘 알겠다더구만.

아까 방거사 일화에서 처럼 분명히 자유자재한 대해탈경계가 있다 이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모든 것을 내버리고 공부를 해야 되지.

마음 속으로 든지, 마음 밖으로 든지 온갖 것을 다, 살림살이를 잔뜩 재워놓고 공부를 하면

 

자꾸 거울에 먼지가 더 앉는다 이 말이라.

때가 더 묻어서 더 깜깜해 버려.

깜깜해 갖고 꽃은 무슨 꽃이, 극락세계는 무슨 극락세계가, 아미타불은 무슨 아미타불이 비치냐 말야. 하나도 안 비친단 말이라.

참으로 한 생각 마음이 淸淨해서 온 處處에 연꽃이 피고, 온 處處가 극락세계고,

 

온 處處에 아마타불이 꽉-차 있는 것을 보려면 - 본래 꽉 차있어,

못 볼 뿐이지 - 마음을 닦아야 되는데, 마음을 닦으려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된다 이건데,

 

버리려면 방거사처럼 물질적인 것이든지 정신적인 것이든지 다 버려야지,

이건 쪼끔 놔두고 저건 쪼끔 놔두고 이런 식으로 해서는 미래겁이 다하도록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다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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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회는 글이 너무 기네요.

한 주제를 조금씩 나누어 연재하면 연결성이 없었서 무리하드라도 한회에 모두 게제하였읍니다.

성철스님 법문을 들으면 보통 평범한 사람은 아예 도닦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한

계율을 말씀하시네요.

그렇다고 너무 겁 먹지 마세요.

그렇게 도 닦는 방법도 있지만, 또 저렇게도 도 닦는 방법은 많죠.

가능하면 평범한 일상생활인으로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방법을 앞으로 여러가지 예문을 들어 가며

다른 글에서 보여 드릴 계획이 있읍니다.

계율은 처음부터 철저히 지키면 그거야 최상의 이상적인 구도 행각이지만,

아- 이세상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나요?

이세상에 육체하나로 태어 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억지로 힘들여서 또다시 해탈을 위해서 끙끙대며 이중삼중 고생을 할 필요가 있나요!

물론 최소한의 자기 절제는 해야 되겠지만-

차차 도를 닦아 가면서 점차적으로 계율도 자연스럽게 지켜져 나가는 길도 있지요.

문제는 깨쳐야 되겠다는 열망만 있으면, 계율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읍니다.

성철스님 말씀도 100% 타당한 말씀이지만, 억지로 버릴려고 하면, 그 의도적으로 버리는 행위자체도 결국 무엇인가를 얻고자하는 목적의식을 갖는 행위가 되므로 자연적인 행위가 될 수가 없죠.

자기재산이나 개념,신념 등을 버리는 행위도 자연스러운 행위에 반대되지 말고 저절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지요.

사실은 수행이라는 자체도 어느선, 즉 자기 개인에고성을 벗어나는 곳 까지만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그이상이 되면 의도적인 노력이나 버림은 오히려 수행에 나쁜 영향을 끼치죠.

 억지로 남의 흉내를 낸다든가, 특정한 목적을 위한 의도적인 행위는 오히려 해롭습니다.

위의 글에서 방거사의 경우는 그만큼 도가 무르익은 상태에서 도인의 자연스러운 행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방거사의 임종장면이나 그 식구들의 신화적인 에피소드들은 여러가지 변형이 많읍니다.

그래서 어느 이야기가 진실된 것이고, 어느 에피소드가 지어낸 것인지 조차 구분이 않되지만,

방거사와 그 가족들의 도인적인 에피소드를 보면 대단한 도인가족이었던 것 같읍니다.

긴글 참아가며 읽으시느라고 수고하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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