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22/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31. 14:52
시중  22


13-11 그대가 살아있는 문수다

道流 儞祇今聽法者 不是儞四大로대 能用儞四大하나니 若能如是見得하면 便乃去住自由니라 約山僧見處하면 勿嫌底法이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사대육신이 아니지만 그대들의 사대육신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가고 머무름에 자유자재가 될 것이다.

나의 견해에 의하면 아무것도 꺼려할 것이 없는 이치다.”


강의 ; 그대들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사대육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사대육신을 마음대로 능수능란하게 활용한다.

이 이치를 제대로 알면 생사에 자유롭고, 가고 옴에 자유롭다.

사대육신을 꺼려할 것이 아니다.

내 견해대로라면 허망한 사대육신이라 하더라도 하등 싫어할 것이 아니다.

사대육신에 구애받을 것이 아니고 그 사대육신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상(相)도 없고 조작도 없고 원하는 바도 없다.

무엇이든지 다 수용한다.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시고 밥을 만나면 밥을 먹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불교는 이래야 한다.

사대육신을 가지고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잘 아는 일이다.

그 자신을 두고 달리 밖을 향해 찾을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모든 문제해결의 답이다.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그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해인사 장경각에 걸어두었다.

“부처님이 원만하게 깨달으신 그 경지가 무엇인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실 바로 이것이다[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儞若愛聖하면 聖者聖之名이니라 有一般學人 向五臺山裏求文殊하나니 早錯了也 五臺山無文殊니라 儞欲識文殊麽 祇儞目前用處 始終不異하며 處處不疑 此箇是活文殊니라

“그대들이 성인을 좋아하지만 성인이란 성인이라는 이름일 뿐이다.

어떤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틀린 일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의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다.”


강의 ; 우선 이 말이 맞나? 틀렸나?

맞고 틀린 것은 차치하고 이러한 말씀은 자비심이 지극한데서 나온 것이다.

대개 일이란 간절한 마음에서 생긴다.

필자의 지나친 해설도 마찬가지다.

각설하고, 불교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성인을 좋아한다.

천불(千佛) 만불(萬佛)을 찾고 천보살 만보살을 부른다.

열광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천배 만배 절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있다. 아름답게도 보이지만 측은하게도 보인다.

성인이라고 해서 그토록 좋아하면 반대로 범부는 아주 싫어할 것이다.

선을 좋아하면 악을 싫어할 것이다.

증애심과 취사심이 그렇게 끓고 있으면 도와는 멀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가려내고 선택하지만 말라.

다만 증애심만 없애면 환하게 밝으리라.

성인이란 단지 성인이라는 이름뿐이다.

천보살 만보살, 천불 만불이 모두 이름뿐이다.

단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이 있다면 사람이 부처님이다.

앞에서 임제삼구의 설명에서도 있었다.

무착스님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자들이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간다.

몇 년에 걸쳐 일보 일배(一步一拜)의 고행을 하면서 찾아간다.

하지만 벌써 틀린 짓이다.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

청천 벽력같은 말씀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말씀이다.

가슴이 천 조각 만 조각나는 말씀이다.

기존의 일반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저 넓은 바다의 끝없는 파도처럼 출렁대는 그 마음들을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물과 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그대들은 정말 문수보살을 알고 싶은가?

그대들의 목전에서 지금 활용하고 있는 그것,

시간적으로 시종일관 다르지 않고 한결 같은 그것,

공간적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분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래서 너무도 구체적인 그것,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점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확실한 그 사람,

그대가 참으로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다.

그대가 참으로 성인이다.

그대가 참으로 부처님이다.

다시 한 번 말하면 일체처가 문수다.

삼계유심이고 만목청산(滿目靑山)이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스님만이 가르칠 수 있는 불교다.

임제스님은 수 천 년의 인류사에 떠오른 천개의 태양이다.

수 억만 가지의 방편을 다 걷어치우고 진실만 드러낸 말씀이다.

하늘땅만큼 많은 불교의 거품을 다 걷어내는 가르침이다.

온갖 이름과 모양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속박과 구속과 저주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시원스런 해방의 묘책을 확실하게 제시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록은 인간해방의 대 선언서(大宣言書)다.

그래서 일본의 어느 선사는 일본열도가 다 불에 타는 일이 있어도 이 임제록 한권만 남아 있으면 된다고 까지 하였던가.

오대산 무문수(五臺山無文殊).

여기서는 이 구절을 한번 더 생각하자.

조주스님이 행각할 때 어떤 작은 암자에서 며칠 묵었다.

떠나면서 원주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원주가 묻기를, “어디로 갑니까?”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게송이 하나 있으니 들어보시오.”

어느 청산인들 도량이 아니랴.

그런데 하필 오대산에 가서 참례하려하는가.

구름 속에 비록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라도

바른 안목으로 보면 좋은 것이 아니요.

[何處靑山不道場 何須策杖禮淸涼 雲中縱有金毛現 正眼觀時非吉祥]


儞一念心無差別光 處處總是眞普賢이요 儞一念心自能解縛하야 隨處解脫 此是觀音三昩法이니라 互爲主伴하야 出則一時出하나니 一卽三三卽一이라 如是解得하면 始好看敎니라

“그대들의 한 생각 차별 없는 빛이 어디에나 두루 비치는 것이 진짜 보현보살이고,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스스로 결박을 풀 줄 알아서 어딜 가나 해탈하는 그것이 바로 관음보살의 삼매법이다. 서로 주인도 되고 벗도 되어 나올 때는 한꺼번에 나오니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다.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비로소 경전에 설해져 있는 가르침을 잘 보는 것이다.”


강의 ; 문수보살만 그렇겠는가.

보현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다 그렇다.

우리들의 한 마음이 어느 곳에서든지 차별 없이 빛나고 있다.

그 활동이 눈부시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달이 지고 별이 뜨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일일이 다 살피고 감지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단풍 드는 것을 잘 느낀다.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차별 없이 작용한다.

이것이 보현보살이 아니고 또 다른 어떤 보현보살이 있겠는가.

한국의 불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관세음보살도 그렇다.

우리들의 한 마음이 스스로 능히 자신의 속박을 풀고 곳곳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속박도 벗어주는 그러한 자비행이 관세음보살의 자비삼매다.

관음삼매란 바로 그와 같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위한 뜨거운 사랑의 활동이다.

연민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한 마음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은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셋이다.

한 마음을 떠나서 무엇이 있겠는가.

불교의 경전을 이렇게 알아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임제스님은 지적하신다.

간경자(看經者) 혜안통투(慧眼通透) 라는 축원이 있다.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경전을 보는 지혜의 눈이 환하게 열리게 해 달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글자나 �아가고 글줄이나 헤아리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청매(靑梅)조사의 십종무익(十種無益)에도 심불반조 간경무익(心不返照看經無益)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경전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에 비춰보지 않으면 경전을 읽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경전은 마음이 마음에 의하여 마음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떠나서 해석하면 모두 틀려버린다.

반조란 사유한다는 뜻이다.

불교인은 명상하고 사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법화경에는 설법을 마치고 선정에 들어 사유하였다는 말이 있다.

경전이나 어록을 읽고 깊이 사유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선(禪)은 번역하면 사유수(思惟修)다.

옛날 약산(藥山)화상이 일생동안 열반경을 읽고 있었다. 학인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평소에 학인들이 경전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스님은 왜 보십니까?”

“나야 다만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르면 학인들도 봐도 되겠습니까?”

“안되지. 그대들은 경을 보기를 쇠가죽을 보듯이 하므로 꼭 뚫으려고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