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4/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9. 21. 15:16
 

 

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3강 중 [질문과 답변]

 

답변만 녹취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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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서두에 질문하신 내용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좀 있어요.

빨리 깨닫는 것과 수십 년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안거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

  저는 처음 선의 7대 요소, 내지 일곱 가지 정신을 소개를 하면서, “선은 삶”이라는 말을 했어요.

서장에도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병이라고 그랬어요.

물론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설명은 깨달음을 기다리고 깨달음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것은 잘못이라는 표현이 더 많습니다.

  설사 깨달았다 합시다. 그 다음엔 뭘 하시겠어요?

 

역시 禪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입니다.

그래서 “선은 삶”이예요. 어떻게 사느냐?

그야말로 孤高(고고)하게 살고, 幽玄(유현)하게 살고, 簡素(간소)하게 살고, 아주 淸淨(청정)하게 살고, 그렇다고 어디에 고정불변하게 매여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무쌍하게 살고, 그런 일곱 가지 요소에 적합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은 깨달았든지 깨닫지 못했든지 화두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가면,

깨달았든지 깨닫지 못했든지 그 사람은 정말 마음속에 다른 어떤 명예라든지 돈이라든지 일체 세속적인 가치관이 다 사라져버린 오직 화두 하나만 至高(지고)히 갖추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깨달았든지 깨닫지 못 했던 지간에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깨달아도 역시 그 삶이고, 깨닫지 못해도 역시 그 삶이예요.

그 삶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국민선사로 추앙 받던 모모스님 아시지요?

지금은 열반하신지 10여년이 넘었지요?

國民禪師(국민선사)입니다.

그 분이 깨달았든 깨달았지 못했든 그것으로 존경하고 추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고고한 삶.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고, 실지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누더기 한 벌.

검은 고무신 한 켤레.

 

그 분이 선의 정신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

그 삶이 우리한테 감동을 주잖아요.

그래서 그냥 물밀듯이 찾아가고 존경하고 우리가 지금도 잊지 못하고,

금세기 국민선사로서 지금도 존경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뭘 깨달아서 존경 받는 것도 아니고, 못 깨달아서 존경 받는 것도 아니고,

그 분의 삶이 그런 아주 소박하고 고고하고,

호랑이 말도 듣고 어린 아이들하고 친구이기도 하고요.

변화무쌍하고 위엄 있고요.

그러면서도 아주 탈속하고요.

그런 삶이 우리한테 감동을 주는 겁니다.

천번 만번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그런 삶이 우리한테 감동을 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의미 없어요. 그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아까도 대강 숫자를 언급 했습니다만, 프로가 2000명.

아마추어가 한 만 명쯤 됩니다.

참선에 종사하는 이들이요.

 

  여기 어느 선원, 저기 어디 선원하면 신도님들이 한 800명, 1000명이 결제하고서 지금 참선하고 있는데 아시지요?

이웃에... 그런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제가 줄잡아 만 명  이라고 하는데요. 신도님들 만 명이 더 넘습니다.

참선하는 신도님들이...

결제를 해서 최소한도 선방에서 참선하는 그 순간에는 설사, 속에서 무슨 망상을 피우고, 무슨 육도산맥을 그리고 있더라도, 최소한도 선방에 앉아있는 그 순간은 탈속하고 자연스럽고, 간결하고 소박하고 청정하지요.

그 순간 그 삶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깨닫고 못 깨닫고는 별 의미 없어요.

한 예를 들었던 그 스님.

소위 “국민선사”라는 말도 처음 듣지요?

그런 스님의 삶을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스님이 우리에게 왜 감동을 주었던가?

깨달아서 감동을 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못 깨달았다고 책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왈가왈부해서 상좌보고, 어떤 모임에서, 세미나에서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상좌가 “나는 직접 말할 수가 없고, 책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녹음을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하고 책 몇 페이지를 들고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깨달음은 그 스님에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직도 下手(하수)입니다.

高手(고수)가 아니라고요.

禪의 高手는 깨달음을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7대 정신에 입각해서 사느냐? 못 사느냐로 평가를 합니다.

도인과 도인 아닌 것을 八風(팔풍)으로 평가를 합니다.

바람이 여덟 가지가 있는 데요.

선풍기가 여덟 개 있어요.

선풍기 대고서 바람을 쏴~악 보내보세요.

이익이라는 선풍기입니다.

그 사람이 이익이라고 하는 바람결에 흔들리느냐 안 흔들리느냐를 보고 분별할 수가 있다고 해요. 

  손해라고 하는 선풍기가 또 있어요.

선풍기가 여덟 개니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 그 손해라고 하는 선풍기를 대고 바람을 쏘여보면 흔들리느냐 안 흔들리느냐를 보고 그냥 아는 겁니다.

깨달았느냐? 못 깨달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고결한 삶이 문제라고요.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가 좀 수정해야할 것 같아요.

 

  서장에서도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앞에 놓여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그랬듯이, 정말 禪은 남 다른 삶.

정말 남 다른 특별한 삶을 선적 삶이라고 하고, 禪人(선인)으로서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좀 관심 있고, 그것이 좀 향기롭고 취미가 있고

‘야~ 그것이 뭔가?’ 싶어서 이제 세상 경험 다 했어요.

다 하고 이 선의 정신에 입각한 삶이 좀 궁금해서 이렇게 모여서 800년 전 서장으로 한 번 더듬어 보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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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서 이상적인 삶이라고 정리 하는 것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찰에 들어 왔는데 아직도 세속적인 사고.

세속적인 가치에 연연한다면 이것이 쌈지물이고, 衆물이 안 들었고, 또 제대로 중노릇을 했으면 안 그랬을 텐데 제대로 중노릇 못하니까 외형적인 것.

“뭐는 하면 된다.” “뭐는 하면 안 된다.” 옛날에 밥을 얻어 왔는데, 절 까지오니까 벌써 시간이 지났어요.

그때는 해 그림자로 12시 시간을 쟀잖아요?

멀리서 밥을 얻어 왔는데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지났다고 못 먹는 겁니다.

一種食(일종식)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 그것을 먹어야 되느냐? 안 먹어야 되느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해 그림자가 지나간 것 까지는 봐 주자는 식으로 따지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대중부 상좌부가 나눠진 것이 아닙니까?

상좌부는 원리원칙대로 딱. 딱. 

손가락 한 마디가 아니라 반 마디만 지나가도 시간 지났으니까 못 먹는다는 식으로 따지는 겁니다.

절 집안에 그런 것이 얼마나 많다고요. 

 

  250계. 348계가 문제 아닙니다.

문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규율이 또 엄청 많습니다.

구두로 전해 내려오는 규칙이 무지무지하게 또 많거든요.

그런 것 까지 다 지켜야 된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것이 무슨 수행이나 되고, 그것이 무슨 도나 되는 냥,

그것을 못 지키면 사람 취급도 아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도 또 물이 잘못 들었지요.

중물이 잘못 든겁니다.

그것도 치우친 겁니다.

 

  이상적인 삶을 살자고 수행자의 삶을 또 하나 만들어 놨는데, 이것이 더 잘못된 겁니다.

더 치우친 겁니다.

그러니까 중물이 들었느냐? 말았느냐? 중물이 빠졌느냐? 말았느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우리 불자님들은 이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衆도 아니고 소[俗人]도 아니고, 중도 되고 소도 되고, 소라는 말은 牛가 아니고 속인이라는 말을 줄여서 “소”라고 그래요.

절물이 아주 들어서, 소위 우리 스님들이 하는 말로 “절 순이”이라고 합니다.

  절 순이가 되어서...

그것도 참 우리는 보기 곤란해요.

그것이 다 치우친 삶입니다.

때로는 불보살처럼 살 수도 있고, 때로는 속인처럼, 아주 혼탁한 속인이 되어서 살 수도 있고요.

어디에 걸리지 않아야지요.

치우치지 않고요.

어떤 것도 “지상의 가치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요.

그것이 중도적인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모든 삶은 중도적으로 살아야 바람직한 것이다.” 왜냐?

모든 존재는 하나의 존재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중도원리”라고 불교에서 명명을 했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 “안경”이라면 다 분해하면 안경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조립을 하면 안경이 된다고요.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것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사람도 똑 같아요.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저렇게 살 수도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경우 따라서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살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요.

어디에도 편협하지 말고요.

 

  우리가 중도를 이야기할 때 뗏목이 강을 따라서 내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배가 강을 따라서 내려갈 때 양쪽에 언덕이 있어요.

물길을 만들어 놓은 양쪽에 언덕이 있어요.

양쪽에 언덕이 있으므로 해서 배가 잘 내려갈 수 있어요.

선과 악이 있으므로 해서 균형이 잡히는 겁니다.

그런데 물은 양언덕이 있어서 물길이 생겼다고 해서,

어느 한쪽에 배가 닿아버리면 더 이상 진행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진행이 안 된다고요.

  두 언덕을 통해서 배가 잘 갈 수가 있어요.

두 언덕이 고맙기는 하지만 거기에 가서 닿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치우친다고 하는 겁니다.

衆物(중물)이 좋지만 중물이 들어서 안 빠지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배가 더 이상 진행이 안 된다고요.

그와 같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사는 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자기소견. 자기고집에 딱. 집착해서 요지부동으로 되면 소견머리가 빽빽 하다고 바늘구멍 같은 좁은 소견이라고 흔히 이야기 합니다.

 

모든 존재가 중도적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 원리에 맞게 사는 것이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布施(보시)를 하든, 持戒(지계)를 하든, 육바라밀을 닦든지 불사를 하든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든지, 전부 그렇게 이해하고 우리가 행동할 때, 정말 바람직하게 수행을 하는 길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 3강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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