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8/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0. 17. 20:38
 

 

서장 대 강좌 4- 4 강

 

  다음은 방편과 실법의 문제입니다. 불교에 방편이라는 말이 참 많지요.

한국불교 99%가 방편입니다. 방편불교입니다.

사실은 거의 거품불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하고도 서울장안 한복판. 바로 여기에서는 우리가 實法(실법)으로 우리가 論(논) 하지만, 잠깐만 벗어나면 큰 법당에서도 방편이 난무하는 겁니다.

방편과 실법의 문제입니다.

여기는 그런 방편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방편입니다. 우리가 실법이라고 생각 했는데 그것마저도 방편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p. 76  

 

  6. 증시랑에게 답함 (5)

 

  편지를 받아보니,‘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을 없애서 마음이 장벽과 같이 되어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이것은 달마스님 이야기입니다.

하는 이 말은 방편의 가르침입니다.‘방편의 가르침을 빌려서 도에 들어가는 것은 옳지만, 방편을 固守(고수)하여 버리지 아니하면 병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보내 온 말과 제 생각이 같아서 읽고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증시랑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소견대로 ‘나는 달마스님의 이런 말씀을 방편으로 생각합니다.’이런 편지를 보냈는데 대혜스님이 그것을 읽고는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도를 사모하기에, 도에 대해서 관심 있고 아주 열정적인 사람의 글을 읽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방편인데, 저는 제발 여기까지만이라도 갔어도 좋겠어요.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을 없애서 마음이 장벽과 같이 되어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까지가 방편이거든요.

이것이 도는 아니라고요. 도는 아니지만, 여기까지 되기도 참 어려운 것이지요.

  지금 여러 어리석은 무리들은 다만 방편을 고수하고 버리지 아니하며, 실법으로 사람에게 지시해 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실법과 방편을 제대로 알아야지요.

말하자면 방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요.

실법은 달 그 자체라는 말이지요.

뗏목은 강을 건너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뗏목은 방편입니다.

강을 건너가는 것이 실법입니다.

불교는 방편을 써야 된다.

이런 필요악인데 방편이라는 미명하에 방편이 너무 난무해서 별별 방편을 만들어서 많이 쓰니 이것이 참 기가 막힌 말입니다.

  기가 막힐 일이지요.

그런데 그 방편이 먹혀들어요.

먹혀드니까 장사를 하는 겁니다.

고객이 있으니까 장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쌍방에 다 책임이 있습니다.

고객이 없어 봐요.

방편이 장사가 되는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지적할 시간도 없고, 지적할 필요도 없고, 또 너무 지적하면 지탄받을 일이니까요.

 

  그래서 저는‘바름과 삿됨을 변별하는 논설[辨邪正說(변사정설)]’을 만들어 이를 구원했습니다.“변사정설”이라는 것을 지어서 사와 정을, 어떤 것이 방편이고, 어떤 것이 실법이고. 어떤 것이 삿된 것이고, 어떤 것이 정법이라는 것을 구원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근세에 魔軍(마군)은 강하고 법은 약하여 담담하고 맑은 곳에 들어가서 湛湛(담담)하고 맑은 곳에 합쳐지는 것으로 究竟(구경)을 삼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공부된 사람들의 병인데, 마음이 깨끗해져서 화두도 없고, 망상도 없으니까 기분은 아주 좋지요.

정신은 아주 가뿐하고 맑고, 그런데 ‘아, 이것이면 됐구나.

이런 안락처가 있구나.

이렇게 깨끗하고 편안한 곳이 있단 말인가?’하고‘아, 바로 성불자리가 이 자리구나.’하고 딱 주저앉는 겁니다.

그것을 구경이라고, 최후라고 삼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또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는 것으로 宗師(종사)를 삼는 사람이 삼대나 좁쌀같이 많습니다. 삼.

그것을 요즘은 대마초라고 걸리지만, 우리 어릴 때는 많이 심었거든요.

삼대가 빽빽하게 들어섰어요.

좁쌀도 얼마나 개수가 많습니까?

그렇게 많다는 겁니다.

 

  제가 근간에 일찍이 승려들과 이 두 가지를 거론했더니 정히 보내온 편지에 말한 것과 같아서 한 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반야 가운데 마음을 두었으되 생각 생각이 사이에 끊어졌다면,

능히 위로부터 모든 성인의 다른 방편을 밝게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이 간단없이 지속이 잘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방편과 실법을 가려낼 수 있었고, 邪法(사법)과 正法(정법)을 가려낼 수 있었다.

  당신은 이미 칼자루를 잡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공부가“어지간히 됐습니다.”이 말입니다.

상당히 불퇴전의 지위에 올랐다.

더 이상 잘못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칼자루를 잡았으니 상대를 베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이미 칼자루를 잡았는데 어찌 방편을 버리고 도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근심합니까?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하되 경전의 가르침과 고인의 어록과 여러 가지 다른 언구를 보고도 또 다만 이와 같이 공부하십시오.

방편으로 알고 공부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어록과 어떤 경전을 보더라도 전부 방편으로 알고 공부하라는 말입니다.

 

  수미산과 방하착,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 죽비 화두, 한 입에 서강수 물을 다 마신다는 화두,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와 같은 것에도 또한 방편으로 알고 공부하십시오.

다시 따로 다른 분별심을 내거나, 도리를 구하며, 기량을 내지 마십시오. 당신이 능히 급류(급류라는 일상생활입니다.)

속을 향하여 항상 이와 같이 스스로 잡아가고도 만약 道業(도업)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험이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아! 이거 아주 결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 수많은 화두들. 그 잘난 화두들. 그 훌륭한 어록과 경전이 전부 방편이다.

일체 법문이 방편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지금 화두가지고 우리가 논 한다면, 화두가 방편이다. 아니다.

아직 결론 내릴 수도 없지만, 결론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분명히 해놨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방편입니다. 方便(방편). 하는 소리입니다.

 

  “소옥아”“소옥아”부르는 것이 뭐라고요? 자기 나타내는 수단입니다.

手段(수단). 자기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라고요.

그것이 안록산이 보고 얼른 담 뛰어 넘어오라는 신호지요. 소옥이라는 시녀에게 뭐 볼 일이 있겠어요?

할 것 다 해놨는데요. 구름이 확 벗겨지지요?

확 벗겨집니다. 방편이라는 구름이 다 벗겨집니다.

 

  여기 재미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삼돌장이라고 해서 咄(돌) 돌 돌 꾸짖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서장에는 처음에 앞에 증시랑. 이 사람이 증개입니다. 이름이 開(개)거든요.

이름이 하필 개입니다. 그래서 “증개장”이런다고요.

돌이 세 번 나와서 “삼돌장”맹자에는 “곡석장”이라는 것이 있어요.

곡석장에 얽힌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거든요.

 

  옛날에 서당에 아주 둔한 학동이 있었어요.

도무지 과거에 급제할 것 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머리 총명한 친구들이 “야 이번 시험에는 곡석장에 시험문제가 나온단다.” 이렇게 일러 줬어요.

그 소문을 듣고는 곡석장만 계속 외운 겁니다.

맹자 앞부분에 있거든요.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데 아주 부들부들 떨면서 끌려가는 겁니다. 몰고 가는데 벌써 떨리는 겁니다.

  자기 죽일 것을 감지하고 떠는 것이지요.

떠는 것을 보고는 불쌍하니까 죽이지 말라는 이야기도 나와요.

어쨌거나 그랬는데요.

 

곡석장에 시험문제가 나온다니까 이 천진한 청년은 계속 곡석장만 외우니까 거짓말 헤준 친구들은 “아이고 저 맹꽁이 같은 것이 다른 것은 공부 아니 하고 곡석장만 읽어서 너는 떨어졌다.”이러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해의 과거 시험문제는 곡석장만 나와서 그 사람만 합격이 된 겁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실지로 서당에는 그런 이야기가 많이 돌아다닙니다.

역사가 오래된 데는요.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별별 그런 이야기가 많아요.

경전에 전해지지 않은 불교가 또 많습니다. 口傳(구전)으로 전해진 불교가 또 얼마나 많은지...

 

  p.79

 

  이것은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받아보니, 밤 꿈에 향을 사르고 저의 방에 들어와서 매우 고요했다고 하니, 꿈을 꿨는데 이 사람이 대혜스님 방에 들어간 것입니다.

간절히 꿈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참으로 방에 들어왔던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 놓고는 옛날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묻기를 “꿈속에서 육바라밀을 말하니 깨어 있을 때와 같은가? 다른가?”하니, 수보리가 말하기를 “이 뜻은 깊고 깊어서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미륵대사가 계시니 당신께서는 그분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돌! 했다고요. “틀렸어”이런 말이지요.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구 말인가 하니 대혜스님 말이지요.

   설두스님이 이르기를 “당시에 만약 놓아 보내지 않았다면 한 방망이 때려 주어야 했는데, 누가 미륵이라 이름하며,

어떻게 때려주는가 하면,미륵보살한테 가 봐라’했으니까요.

미륵은 도대체 누가 이름 지었고, 미륵은 누가 미륵인가?

그렇게 해서 미륵을 부정해버리면 거기에 사리불 하고 수보리까지도 싹 부정 당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문득 얼음이 녹고 기와장이 풀어지는 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또 돌! 에이 그런 설명도 틀렸다.

설두 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설두가 그렇게 해설을 했는데 대혜스님 보기에는 “설두도 틀렸다.”

 

  혹 어떤 사람이 “다만 증시제가 밤 꿈에 운문의 방에 들어갔다고 하니, 또 말씀하십시오.

깨어있을 때와 같습니까? 다릅니까?”묻는다면, 운문은 곧 그를 향하여 말하겠습니다.‘누가 방에 들어간 사람이며, 누가 방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며, 누가 꿈을 꾼 사람이며, 누가 꿈을 말한 사람이며, 누가 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누가 진실로 방에 들어간 사람입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에이 말 너무 많다 이거. 이것은 진짜 돌! 이네요.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아이고 대혜스님도 너무 그렇구만...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건 그렇고, 유명한 서산스님의 꿈 시가 있지요?

     主人夢說客(주인몽설객)하고,

     客夢說主人(객몽설주인). 객이 어느 여관에 들어가서 자고는 주인이 “아이, 나그네 나그네 내 꿈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꿈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나그네는 자기가 꿈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객몽설주인이라.

객은 꿈 이야기를 주인에게 한다.

     今說二夢客(금설이몽객)이

     亦是夢中人(역시몽중인)이라. 지금 꿈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이 내가 보기엔 다 꿈속의 사람이다.

 

  서산스님이 있었더라면 이까짓 것 한방에 쓸어버리는 것을...

그렇습니다. 대혜·사리불·증시랑·수보리·미륵·설두·서산스님이야기까지...

어제 있었던 일들. 아니, 이 시간 이전까지 있었던 일들. 아니, 지금. 이것이 도대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참말로 알지 못할 일이로다.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이요?

 

  p. 81  

             

 증시랑에게 답함 (6)

 

  증시랑에게 답을 제일 많이 했습니다.

편지가 많은데 그 중에 추린 것입니다.

대혜스님의 이 친필이 지금 일본 어느 대학교 도서관에 있습니다.

송나라 때니까 많이 남아 있을 수 있지요.

일본 사람들이 서장 책을 출판한데는 보면 친필을 어떻게 어떻게 입수해서 사진을 찍어서 올려놓은 책이 있습니다.

 

  간화선생활. 선불교의 생활. 그것은 그 자체로서 최상의 인생이다.

이것이 마지막 편지니까 아마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요.

  보내온 편지를 여러 번 자세히 읽고 鐵石(철석)과 같은 마음을 갖추고 결정적인 뜻을 세워 대강 대강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아주 철석같은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다만 이와 같이 점점 나아가 죽는 날에 이르면 또한 능히 염라대왕과 서로 겨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염라대왕 만날 일도 없지만, 설사 만난다 하더라도 진검승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최고의 눈을 열어서 금강왕 보검을 잡고 비로정상에 앉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정말 철석과 같은 마음을 갖추고 결정적인 뜻을 세워서 대충대충 하지 않고, 정말 진실하고 성실하게 이 일에 몰두하고 살아간다면 그걸로 됐다는 겁니다.

禪은 삶이라고 그랬지요? “선은 삶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대한민국 대표선사. 국민선사라고 전번에 언제 제가 이야기 했지요?

그 분은 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존경을 받느냐?

깨달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이 사람을 감동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날 대표선사. 국민선사로 추앙 받잖아요.

가신지가 벌써 여러 해 됐는데도... 아직도 그 선사 이전에 선사 없고, 그 선사 이후에 선사 없어요. 하하하하하 이전에야 있었지요. 표현을 하자면... 

 

  제가 일찍이 바깥 도우(道友)에게 말하기를 세속 도반들입니다.“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다만 빠른 효과만 구하고 그릇되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너무 빨리, 후닥닥 그냥 한 방에 해치우려고 성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쩌자는 겁니까?

그냥 사는 거라니까요. 도의 정신으로 살고, 선의 일곱 가지 정신하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간소하고, 소박하고, 아주 유현하고, 탈속하고, 첫 시간에 소개 해드린 내용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말하기를“일을 없애고 인연을 덜고 고요히 앉아서 참구하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몇 권의 경전이라도 보고 염불을 하며, 부처님 앞에 예배를 많이 하고 평생 지은 죄와 허물을 懺悔(참회)해서 염라대왕의 손 가운데 쇠몽둥이를 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선불교에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 뒤에 진국태북이라는 보살님이 한 분 나와요.

유일한 보살님이 한 분 나오는데, 그 분은 아주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루에 아미타불을 수 만 번하고, 책을 여러 권보고, 관세음보살도 여러 번 부르고, 여섯 번 예불하고, 그렇게 하면서 또 화두 들고, 그렇게 했는데 대혜스님이 지도해서 “그거 다 때려치우라. 치우고 화두만 해라.”그랬어요.

신앙심이 깊어서 대혜스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얼마 하니까 그거 다 놓아 버리니까 금방 깨닫게 된 이야기를 기대 하십시오.

저 뒤에 나옵니다.

  바쁜 사람은 진국태북이라고 찾아서 읽으십시오.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 공부하다보면 참 크게 대두 됩니다.

특히 세속에 있으면서 적당하게 액세서리로 불교 하는 사람들이야 별것 아니지만, 정말 투기하듯이 내 인생을 다 던져서 하는 사람들은 ‘야~. 이거 하다가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이판사판 아닌가?’

그래서 이런 문제를 묻고 선지식이 답하는 그런 내용이 있어요.

 

  중몽선사라고 고봉스님의 제자인데 “산방야화”라고 너무너무 멋있는 책 제목들이 있어요.

“竹窓隨筆(죽창수필)”얼마나 근사합니까?

산방의 이슥한 겨울밤에 도란도란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山房夜話(산방야화).

또 우리나라의 스님으로서는 책은 없어지고 제목만 전해지는 한암스님 一鉢緣(일발록).

당신이 평소에 살아가면서 좋은 내용들. 적고 싶은 내용들을 적었던 책인데요. 일발록 이라고 제목만 전해져요.

 

  산방야화에 보면 우리가 깨치지 못하고 죽으면 도대체 어떻게 됩니까?

그랬더니 여기에 대혜스님이 말씀하신 것하고 똑 같이 되어있어요.

[그거 염려하지 말라. 경 안 읽어도 좋고, 염불 안 해도 좋고, 예불 안 해도 좋은데, 이거하나 되던 안 되든 밀어붙이는 이 생각 하나만 들고나가라.

그러면 못 깨치고 죽었다손 치더라도 그 업이 어디 가겠는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일문천화 한다.

한 마디 듣고는 그냥 깨친다.

그 때는 참선 아니 해도 바로 깨칠 수 있는 인연이 된다. 그랬어요.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자기의 삶을 추슬러가는 지침 중에 아주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참선하는 데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참선도 물론 그렇지만, 그 외에 다른 삶도 정말 내가 다음 생에 스님노릇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흉내 내세요.

자꾸 스님 흉내 내세요.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라든지, 경 읽고 염불하는 것이라든지 일체를 자꾸 흉내 내세요.

그러면 바로 태어나자마자 그 인연이 제일 가까우니까요.

무거운 데로 떨어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빚잔치 할 때 제일 빚 많이 준 사람이 제일 권한이 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죽고 나서 다음 생에 내가 어느 인연으로 태어날 것인가?

인연이 가장 무거운 데로 태어나고, 가장 많이 인연 지어놓은 일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 누가 피아노 치는 것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나도 내생에는 아주 명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정말 그런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 계속하는 거예요.

지금 아니하고 될 일은 없어요.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고요.

죽는 순간까지 죽자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음 생에 바로 그 쪽으로... 한 예로 말입니다.

무슨 유명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을 권하는 것은 아니고요.

모든 일이 그렇게 돌아가게 돼있어요.

 

예를 들어서 ‘오늘 사장 강의가 감동적이다.’해서 집에 가서도 또 읽고, 그러다가 잠이 들어서 아침에 일어나 봐요.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는가?

  바로 이 서장 강의 들었던 것부터 떠오른다고요.

그리고 온갖 잡다한 것이 하나씩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똑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잠을 자고나서 다음 생을 맞이할 때도 역시 똑 같아요. 우리 오늘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것. 기쁜 일이 있었거나, 슬픈 일이 있었거나... 슬픈 일이 있어 봐요.

잠 속에서도 계속 슬픈 것이 침범 해있고 깨어나면...

예를 들어서 아니 할 말로 친구가 잘못 됐거나 가족이 잘못 됐거나하면 피곤해서 잠이야 오겠지요.

그렇지만 깨어나면 언제 내 온 몸과 내 온 의식 속에는 이미 그 슬픔이 꽉 절여져 있습니다.

화두도 그와 같고, 공부도 그와 같이 하면 다음 생은 그것이 땅 짚고 헤엄치기입니다.

너무 간단한 겁니다.

이것은 지극히 과학적인 것이고, 콩 심은데 콩 나는 도리지 별것입니까?

  다음은 神仙道(신선도)와 佛法(불법) 이야기인데요.

 

  p. 82

 

  지금 道家(도가)의 무리들이 망상하는 마음으로 해와 달의 精華(정화)를 상상하며, 노을을 삼키고 기운을 복용하더라도,

오히려 몸을 세상에 두어 추위와 더위의 핍박을 면하는데 신선도가 상당히 무르익으면, 장수하고 건강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마음과 이 생각을 돌려 오로지 반야 가운데 두는 것이겠습니까?

그 시시한 신선도도 하면 상당히 효과를 보는데, 이 마음과 이 몸을 반야 가운데 두고 열심히 정진 한다면 그거야 더 말할 나위 있느냐 이겁니다.

틀림없다 이겁니다.

절대 그 생각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 갖지 말라.

 

  信心(신심)! 이것이요.

참선 하는데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 많아요.

전제조건이 있어요.

전제조건 가운데 이런 것이 다 들어갑니다.

낱낱이 1. 2. 3. 4. 이렇게 해가면서 전제조건을 제가 나열할 것은 아니로되,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갑니다. 이 찰떡 같은 믿음!

 

  옛 성인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비유하자면 파리가 어느 곳에나 능히 앉을 수 있으나 오직 불꽃 위에는 앉을 수 없으니, 중생도 또한 이러해서 곳곳에 능히 攀緣(반연)하되 오직 반야 위에서는 반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생각마다 초심에서 물러나지 않고, 세간의 진로와 반연하는 자기의 心識(심식)을 잡아 반야 위에 돌려놓으면, 비록 금생에 철저하지 못하더라도 임종할 때에 결단코 악업에 끌려가거나 악도에 흘러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음 생에 태어날 때 나의 금생 원력을 따라서 반드시 반야 가운데 있어서 現成(현성)하여 受用(수용)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내용 그대로여기에 정리 되어있습니다.

중생계 안의 일은 배우지 않아도 시작 없는 옛날부터 習性(습성)이 익숙하며, 참 그렇지요.

안 배웠는데 어찌 그리 잘 아는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고 자기가 학원비 들여가면서 배우지 않았는데, 잘도 아네요.

 

길도 또한익숙하여 저절로 取(취)함에 좌우에서 그 근원을 만나니 모름지기 버려두십시오.

세상사 그거 안 배워도 잘 한다 이겁니다.

그런데 출세간에서 반야를 배우는 마음은 시작 없는 옛적부터 등지고 어긋났습니다.

언제 해 본적이 있어야지요.

금생에 어쩌다가 천만다행으로 부처님하고 인연이 되어서 이렇게나마 귀에라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잠깐 선지식이 말하는 것을 들어도 저절로 이해하지 못하니, 모름지기 결정적인 뜻을 세우며 그것과 더불어 주관을 세워 결단코 두 가지를 세우지 마십시오.

바로 이 반야공부 하는 것.

이곳(반야)에 만약 들어가기를 깊이 하면 저곳(세상사)에는 물리쳐 보내지 아니해도 모든 마군과 외도가 저절로 없어지고 굴복할 것입니다.

 

  불교공부 제대로 하면요.

다른 일 저절로 소원해져요.

저절로 소원해진다고요. 셋째 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모든 일은 여기에 딱 초점을 맞춰놓고, 한 달을 돌리면 일이 피해갑니다.

이 날은 일이 안 생겨요. 사실입니다.

이것이 소용돌이거든요.

소용돌이가 힘차게 돌아가면 다른 것 다 피하게 돼있습니다. 다른 일이 다른 날 온다고요. 그것 참 묘한 일이지요. 그것이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도리 아닙니까? 제가 그런 것 여러 번 경험 했다니까요.

  그전에 한참 힘 좋을 때, 매주 목요일에 강의를 했거든요.

목요일에는 왠지 일이 없는 겁니다.

연락도 안 오고요.

그래서 곤란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니까요.

마음에 딱 결정을 해버리니까 몇 년을 그렇게 됐습니다.

나오는 사람도 다 그런 생각을 해요. ‘야~ 이상하다’고‘ 이상하다’고...

목요일에는 도대체 아침부터 전화 한번 없다고요.

 

생소한 곳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곳은 생소하게 하는 것이 정히 이것입니다.

이것이 대혜스님이 자주 주장하는 것입니다.

生處(생처)는 放敎熟(방교숙)하고 熟處(숙처)는 放敎生(방교생).

원문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생소한 것. 덜 익은 것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은 생소하게 하는 것.

뭐가 덜 익고 뭐가 익숙한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겁니다.

 

날로 공부를 하는 곳에 칼자루를 잡아서 딱 주관을 가져서 확실하게 잡아라. 칼자루를 잡으라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내 마음을 딱 다잡아서 점점 힘 덜림을 아는 때가 문득 힘을 얻는 곳입니다. 해보면 힘이 덜 드는 겁니다.

그것이 得力(득력)입니다.

운전해보면 처음에는 얼마나 힘이 들어가고 옆에 것. 아무것도 안 보이지요.

 

그런데 한 달하고 두 달하고 나면,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 다 구경하고 간판 다 읽어가면서...

그것이 득력처가 생력처이고, 생력처가 득력처다.

힘 덜 드는 것이 힘얻는 곳이고, 힘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힘이 덜 든다.

  生力處(생력처) 得力處(득력처) 이것도 서장에 여러 번 나오고,

生處(생처) 熟處(숙처).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선  것. 선  것과 익숙한 것.

이 관계도 아주 여러 번 서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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