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지 않고 여의지 않는 영원한 진리
5. 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
1) 교학(敎字)에서 중도(中道)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그 교리 내용이 복잡다단합니다. 다른 종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간단하지만 불교의 소의경전은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방대한 전적이 있읍니다. 그 속에서 무슨 말씀을 주로 하셨는지 또 어떤 때는 이런 방편을 어떤 때는 저런 방편을 말씀하셔서 얼핏 보면 서로서로 모순도 있는 것 같고 갈피를 잡기 어렵읍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하신 말씀 전체를 체계화하고 가치적으로 배열하여 자기 종파(宗派)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는데 과학적으로 이것을 교판(敎判)이라고 합니다. 교판은 교상판석(敎相判釋)으로서 간단하게 판석이라고도 하며 판(判)은 부판(部判), 쪼개어 판단한다는 뜻이며 석(釋)은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불교의 이론체계를 교학적으로 정리하여 교판(敎判)을 가장 잘 세운 이가 바로 천태종의 지자대사와 화엄종의 현수대사 입니다.
지자대사는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을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분류하여 해석했읍니다.
오시란 부처님 일생 동안의 설법을 다섯 시기로 나눈 젓이니, 첫째는 화엄시(華嚴時)로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하시고 불교 최고의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는 21일간의 설법기간을 말합니다. 둘째는 녹야원시(麗野苑時)로서 21일간 화엄경을 설하시고 교진여 등 다섯 비구들을 위해 소승교를 설하셨읍니다.
이후 12년간 주로 소승교만을 설하셨으며 이 때의 설법을 결집한 것이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하여 이 시기를 아함시(阿含時)라고도 합니다. 세째는 방등시(方等時)로서 대소승의 법을 함께 설하여 영리한 근기(根機)나 둔한 근기나 간에 고르게 이익을 주는 시기를 말합니다. 유마경·사익경·능가경·능엄삼매경·금강명경·승만경 등을 설한 년간을 말합니다. 네째 반야시(般若時)란 방등시(方等時) 후 22년간 모든 반야경을 설법하신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는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서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법화경은 8년간의 설법이며 열반경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최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설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오시(五時)의 가르침을 합산해 보면 50년이 되는데 지자대사는 부처님께서 29세에 성도하시고 79세에 열반하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팔교란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의 방식을 달리하였으므로 그 교화 방법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합의사교(化儀四敎) 즉 돈교(頓敎), 절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이고, 부처님이 설한 설법의 내용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화법사교(化法四敎) 즉,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를 합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화법사교에 대해서 잠깐 설명할까 합니다. 장교란 경장·율장·논장의 삼장에 의해서 세운 교법으로서 소승자리교(小乘自利敎)을 말합니다. 즉, 아함경·5부율·바사론·구사론 등의 교학입니다. 통교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삼승에 공통하고 삼승이 함께 받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별교(別敎)란 이승과 함께 할 수 없는 보살승의 수행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별교는 격력(隔歷)의 입장에서 설명한 교리이며 원융무애(圓融無愛)의 입장에서 설명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원교와는 틀립니다. 원교란 격력이 아닌 사(事)와 이(理)가 원융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설명하므로 대승 가운데 최고로 깊은 가르침을 말합니다.
현수대사는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을 오교로 분류하여 해석했읍니다.
오교란 첫째 소승교 둘째 대승시교, 세째 대승종교, 네째 돈교(頓敎), 다섯째 원교(圓敎)입니다.
이들의 대강만을 간추려 설명해 보겠읍니다. 소승교란 아함경·바사론·구사론 등의 말씀으로서 우법소승이라고도 합니다. 우법이란 대승보다 못하다는 뜻이니 소승의 인아(人我)가 공함은 법아(法我)의 공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승시교란 대승초문의 가르침이기에 시교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또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가 있읍니다. 상시교는 혜심밀경·유가론·유식론 등의 사와 이가 격력하고 오생각별로써 일체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공시교는 반야경·중론·백론·십이문론 등의 일체의 모든 것은 공(空)이라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대승종교(大乘終敎)는 대승의 종극(終極)의 말씀으로써 근기가 원숙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열반경·능가경·승만경 등의 경과 기신론·보성론 등의 논등이 이것입니다.
돈교는 수행의 계단을 세우지 아니하고 「한 생각 나지 않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특별한 경론은 없으며 경론 가운데서 이와같이 설법하는 것은 모두 돈교라고 합니다. 현수대사의 시대에는 아직 선종이 성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교에 선종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원교는 원융원만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로서 완전한 교리를 말하니 화엄종 자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화엄종은 일승에는 동교일승과 별교일승이 있다고 주장하나, 원만한 가르침으로 말한다면 별교일승인 화엄종만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각 교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우선은 간략하게 천태종과 화엄종의 교판을 살펴 보았읍니다. 이들 교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의를 두지 않을 만큼 역사적으로 가장 잘된 교판으로 봅니다. 그 두 교판에서 불교의 최고 위치를 어디에다 두었느냐 하면 원교에 두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읍니다. 지자대사는 원교를 법화경과 화엄경이라 하고 현수대사는 법화경을 돈교에 화엄경만을 원교라고 주장하였는데, 어찌하였든간에 천태·화엄 양 종파에서 원교를 불교 최고의 원리로 삼은 것은 똑 같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원교의 근본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면 불교의 최고 원리가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원교란 이 중도를 나타내니 양변을 막느니라」(圓敎者는 此顯中道니 㵂於二邊)
지자대사의 말씀입니다.
불교의 최고 원리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은 양변을 다 막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자대사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것을 인용해 봅니다.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추느니라」(心旣明淨에 双於二邊하고 正入中道에 双照二諦니라)
양변을 서로 다 막는다(双於二邊)는 것은 상대모순(相對矛盾)을 다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 있으니,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입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는 우리가 이상으로 목표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고 그 상극 ·투쟁하는 양변의 세계에서 평화라는 것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양 세계가 서로 다 비치게(双照二諦) 되는 것입니다. 다 비친다는 것은 서로 통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음과 그릇됨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 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니라고 불교 근본에 가서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할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요사이 이것이 수학적·과학적으로도 4차원의 세계라는 개념에서 증명되어 있읍니다. 논리적으로 가장 정확한 것이 수학인데 거기에 4차원 세계의 공식이라는 것이 있읍니다. 본래 4차원 세계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것인데, 민코프스키라는 수학자가 「사차원 세계의 공식」을 완성하여 그 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놓고 첫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읍니다.
「앞으로 가까운 장래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온다」
삼차원이란, 업체 즉 공간을 말하며 시간은 일차원입니다. 그런데 차별 ·상대의 세계인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대립되어 통하지 않으나, 사차원의 세계가되면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되어 현상계의 차별·모순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이 불교의 중도의 진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은, 그 노선은 같다고 봅니다.
양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중도라고 하며 현대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사차원의 세계라고 합니다. 거기에서는 물이 물이 아니고 불이 불이 아니며, 물이 물이 아니고 불이 불이 아니기 때문에 물과 불이 서로 통하는 물이 곧 불이며 불이 곧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걸림이 없는 세계(無碍世界)라고 합니다.
그러면 화엄종에서는 중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 인용해 봅시다.
「구경에 실제인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어 주처라 한다」(窮坐實際中道床하니 舊來不動名爲佛이로다)
곧 중도를 바로 깨친 이것이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교는 중도와 같은 말이며,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는 것이므로 이것은 교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곧 비춰서 막고 곧 막아서 비치어 양변을 다 막고 양변을 다 비추어 둥글고 밝게 일관하면 화염종취에 계합하느니라」(卽照而㵂하고 卽㵂而照하여 双照双㵂하야 圓明一實하면 契斯宗趣니라)
청량(淸凉)스님이 현수대사의 탑현기(探玄記)에 있는 여러 이론을 종합해서 내련 화엄종취의 최후 결론 부분입니다. 양변을 버리면서 양변이 융합하고, 양변이 융합하면서 양변을 버리는 쌍차쌍조(双㵂双照)가 바로 화엄종취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천태종이나 화엄종이나 서로 다 막고 서로 다 비추는 쌍차쌍조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가 바로 불교 최고 원리라고 함에는 틀림없읍니다.
당의 현장법사가 인도에 유학가서 유식론을 배워 중국에 와서 법상종을 세웠는데 그 교판을 살펴볼까 합니다.
법상종은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을 삼시로 나누어서 낮은 가르침으로 부터 점차로 깊은 가르침으로 나아갔다고 봅니다.
제일시는 유교(有敎)를 설하신 때로서 아집은 부수었으나 법집은 부수지 못한 소승부파불교를 말합니다. 제이시는 공교(空敎)를 설하신 때로서 대승에 나아가고자 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법은 모두 공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신 반야부의 시기로 봅니다. 제삼시는 중도교를 설하신 때로서 유(有)와 공(空)을 비판하고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중도의 뜻을 분명히 하신 시기로서 해심밀경을 설하신 때로 봅니다.
이상으로 간단히 법상종의 교판을 살펴 보았읍니다만, 현장법사의 제자되는 규기법사가 말한 법상종의 근본종취를 인용해 봅니다.
「해심밀경은 일체를 설명하여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떠나 중도에 바로 자리하니, 이것이 제삼시의 중도의 가르침이니라」(解深密經은 슴說一切하야 離有無辺하고 正處中道하니 第三時中道之敎也니라)
여기서도 중도를 근본 종취로 한다고 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천태종이나 화엄종 만큼 완벽하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당나라 삼대종파에서 모두 한결같이 중도를 근본 표준으로 삼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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