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은 출·재가를 구별하지 않는다. 선禪 수행에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다. 이 점은 혜능 선사가 『육조단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재가도 할 수 있으니 수행하려고 꼭 절에 있을 필요는 없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는다면 서방정토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고, 재가에서도 만약 수행하면 동방예토의 사람이 선善을 닦는 것과 같다. 다만 스스로 원을 세워 집에서도 청정함을 닦는다면 그곳이 곧 서방정토이다.
善知識 若欲修行 在家亦得 不由在寺. 在寺不修 如西方心惡之人
在家若修行 如東方人修善. 但願自家修淸淨 卽是西方. - 『六祖壇經』
이렇듯 혜능 선사는 수행하는 데에 재가와 출가, 마을 집과 절의 구분이 없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든 진정으로 발심하여 간절하게 마음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사선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간화선에서도 재가와 출가의 구별이 없다. 이는 대혜 선사의 『서장』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대혜 선사와 편지를 주고받은 증시랑·강급사·부추밀·이참정 같은 대부분의 사람이 모두 재가자였다. 또한 태고 보우 선사의 『법어』를 봐도 선사가 법어를 베푼 대상이 공민왕·오수·장해원사·최진사·백충 거사 같은 재가자들이 많다.
대혜 선사와 보우 선사 당시 간화선을 수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대부나 거사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대 선사 스님들은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재가자들에게 아무런 차별없이 자상하게 지도하였다. 이러한 점은 간화선이 살림살이를 하며 살아가는 재가자들도 수행할 수 있는 보편적인 수행법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道는 일상 속에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수행 풍토로 보면 간화선을 출가수행자들만이 하는 특별한 수행법으로 여기거나 간화선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선원에 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출가하여 선지식을 모시고 오롯하게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출가자들이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 속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두 공부는 재가자라고 하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다.
선의 본질에서 보면 세상사 모두가 불법이 팔팔하게 드러나 있는 법의 현장이다. 그래서 일찍이 부대사傅大師는 『행로난行路難』에서 “불성의 온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全體現前)”고 했으며, 마조 스님은 “평상시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 했다. 장작 패고 나물 캐는 일상생활에 도가 있다는 말이다. 진리는 그저 평범하다. 그것은 밥 먹고 세수하고 일하는 데에 있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우리들의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어디에나 현전해 있다. 이 살아있는 삶의 현장을 떠나 따로 도가 없기에 일상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 선수행의 바른 길이다.
서산 선사의 다음 말씀은 이러한 수행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자네.
맑은 물 푸른 산을 내 멋대로 오가고
어촌과 주막거리도 내 집인양 편쿠나.
세월이 가나오나 내 알 바 아니건만
봄이 오니 옛처럼 풀잎 다시 푸르네.
飢來卽食 困來卽眠 緣水靑山 任意逍遙 漁村酒肆
自在安閑 年代甲子 總不知 春來依舊草自靑. - 『禪家龜鑑』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도 말한다.
현전하고 있는 큰 작용에는 특별한 법칙이 없다.
두두물물 모든 것이 진리가 드러난 모습이다.
大用現前不存軌則. 物物皆眞現. - 『雲門錄』
운문 선사는 ‘현실에 있는 현상세계 그대로가 공안’이라는 말이다. 일상과 진리의 세계는 둘이 아니다. 다만 착각에 빠져 둘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화두 공부는 바로 이 둘로 나누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 선사는 일상 속에서 어떤 일을 하던 끊임없이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화선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어떤 사람은 ‘간화선은 농경문화 속의 목가적인 옛 풍경 속에서나 가능한 수행법이 아니냐’고 묻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진리는 농경문화 속에만 있고 산업사회에는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간절히 수행해 나간다면 이 척박한 삶의 현장이 바로 극락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재가도 할 수 있으니 수행하려고 꼭 절에 있을 필요는 없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는다면 서방정토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고, 재가에서도 만약 수행하면 동방예토의 사람이 선善을 닦는 것과 같다. 다만 스스로 원을 세워 집에서도 청정함을 닦는다면 그곳이 곧 서방정토이다.
善知識 若欲修行 在家亦得 不由在寺. 在寺不修 如西方心惡之人
在家若修行 如東方人修善. 但願自家修淸淨 卽是西方. - 『六祖壇經』
이렇듯 혜능 선사는 수행하는 데에 재가와 출가, 마을 집과 절의 구분이 없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든 진정으로 발심하여 간절하게 마음을 닦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사선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간화선에서도 재가와 출가의 구별이 없다. 이는 대혜 선사의 『서장』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대혜 선사와 편지를 주고받은 증시랑·강급사·부추밀·이참정 같은 대부분의 사람이 모두 재가자였다. 또한 태고 보우 선사의 『법어』를 봐도 선사가 법어를 베푼 대상이 공민왕·오수·장해원사·최진사·백충 거사 같은 재가자들이 많다.
대혜 선사와 보우 선사 당시 간화선을 수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대부나 거사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대 선사 스님들은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재가자들에게 아무런 차별없이 자상하게 지도하였다. 이러한 점은 간화선이 살림살이를 하며 살아가는 재가자들도 수행할 수 있는 보편적인 수행법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道는 일상 속에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수행 풍토로 보면 간화선을 출가수행자들만이 하는 특별한 수행법으로 여기거나 간화선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선원에 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출가하여 선지식을 모시고 오롯하게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출가자들이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 속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두 공부는 재가자라고 하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다.
선의 본질에서 보면 세상사 모두가 불법이 팔팔하게 드러나 있는 법의 현장이다. 그래서 일찍이 부대사傅大師는 『행로난行路難』에서 “불성의 온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全體現前)”고 했으며, 마조 스님은 “평상시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 했다. 장작 패고 나물 캐는 일상생활에 도가 있다는 말이다. 진리는 그저 평범하다. 그것은 밥 먹고 세수하고 일하는 데에 있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우리들의 앞에도 옆에도 뒤에도 어디에나 현전해 있다. 이 살아있는 삶의 현장을 떠나 따로 도가 없기에 일상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 선수행의 바른 길이다.
서산 선사의 다음 말씀은 이러한 수행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자네.
맑은 물 푸른 산을 내 멋대로 오가고
어촌과 주막거리도 내 집인양 편쿠나.
세월이 가나오나 내 알 바 아니건만
봄이 오니 옛처럼 풀잎 다시 푸르네.
飢來卽食 困來卽眠 緣水靑山 任意逍遙 漁村酒肆
自在安閑 年代甲子 總不知 春來依舊草自靑. - 『禪家龜鑑』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도 말한다.
현전하고 있는 큰 작용에는 특별한 법칙이 없다.
두두물물 모든 것이 진리가 드러난 모습이다.
大用現前不存軌則. 物物皆眞現. - 『雲門錄』
운문 선사는 ‘현실에 있는 현상세계 그대로가 공안’이라는 말이다. 일상과 진리의 세계는 둘이 아니다. 다만 착각에 빠져 둘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화두 공부는 바로 이 둘로 나누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 선사는 일상 속에서 어떤 일을 하던 끊임없이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화선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어떤 사람은 ‘간화선은 농경문화 속의 목가적인 옛 풍경 속에서나 가능한 수행법이 아니냐’고 묻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진리는 농경문화 속에만 있고 산업사회에는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놓치지 않고 간절히 수행해 나간다면 이 척박한 삶의 현장이 바로 극락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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