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24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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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24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6. 분별현성품 ③
  
  과위(果位)에 머물면서 아직 수혹을 끊지 않은 자를 일컬어 예류과라 이름하며, 최대한 일곱 번의 생을 반복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수혹을 끊는 단계에 있는 여러 성자들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으로, 바야흐로 일래(一來)의 향(向)·과(果)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 3·4품의 수혹을 끊고
  세 번, 두 번 태어나는 자이면 가가(家家)이고
  5품까지를 끊으면 두 번째 향이며
  6품을 끊으면 일래과이다.
  斷欲三四品 三二生家家
  斷至五二向 斷六一來果
  
  논하여 말하겠다. 예류의 성자가 증진하여 수혹을 끊을 때, 만약 다음의 세 가지 인연을 갖출 경우 그 명칭은 가가(家家)로 바뀐다.
  첫째는 번뇌를 끊음[斷惑]에 의해서이니, 욕계 수혹 중의 3품(상하품)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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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중상품)을 끊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근(根)을 성취함[成根]에 의해서이니, 능히 그 같은 수혹을 대치하는 무루근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생을 받음[受生]에 의해서이니, 다시 욕계의 유정으로서 세 번과 두 번의 생을 받기 때문이다.1)
  그런데 본송 중에서 단지 첫째와 마지막 인연만을 설한 것은, 예류과 이후 증진하여 수혹을 끊었다고 설하였으므로 능히 그것을 대치하는 온갖 무루근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이 같은 뜻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 [세 가지 인연을] 모두 갖추어 설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더라도 '세 번, 두 번 태어난다'는 사실은 마땅히 다시 설하여야 하였으니, 증진함이 있으므로 앞으로 받을 생이 혹 어떤 경우에는 적으며, 혹 어떤 경우에는 없으며, 혹 어떤 경우에는 이를 초과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2)
  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가가(家家)에 5품의 번뇌를 끊은 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제5품의 수혹을 끊으면 필시 제6품의 번뇌도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간(一間)의 경우에서처럼 1품의 혹이 능히 과위의 획득을 장애하는 것은 아니니, [일래과는] 아직 계(界)를 초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
  
  
1) 욕계 9품의 수혹 중 앞의 6품을 끊은 자는 1생만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일래과라고 하는데, 이는 현재 생에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는 앞의 3품만이 끊어지고, 또 어느 때에는 4품만이 끊어진다. 따라서 전 자는 3생만을, 후자는 2생만을 남기고 있어, 극칠반생의 예류과와 1생의 일래과의 중간단계로서 3생 또는 2생 의 가가(kulamkula)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가'란 인·천의 집에서 집으로 옮겨 간다는 뜻이다.(후 술)
2) 즉 본송에서 두 번째 인연(무루근의 성취)을 설하지 않은 것은 수혹을 끊었다는 사실로써 이미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세 번째 인연(세 번, 두 번의 생을 받는 것) 역시 그것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설하 지 않았어야 한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설하게 된 것은, 이후 반드시 세 번이나 두 번의 생만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3·4품의 수혹을 끊고 나서 더욱 증진한 결과 일래과에 이를 수도 있고(적게 받음), 바 로 반열반하여 생을 받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불환의 성자가 되어 상류반(上流般, 상계로 전생하여 반열반, 세 번을 초과함)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 것이다.
3) 즉 5품(중중품)을 끊을 경우, 이 생에서 바로 6품을 끊고 일래과에 이르기 때문에(5·6품은 함께 1생을 초래함) 5품단(斷)의 '가가'는 인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욕계 제6품의 수혹은 5품단의 성자를 장애하여 일 래과를 획득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없는데, 그것은 일래과가 되더라도 어차피 욕계를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욕계 최후의 1혹(그것에 의해 한 번의 생을 남긴 성자를 '一間'이라 함)은 불환과의 획득을 장애 하는데, 불환과는 바로 욕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욕계 9품의 수혹을 두고서 설정된 일래와 불환의 향·과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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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모두 두 가지 종류의 가가가 있다. 첫째는 천가가(天家家)이니, 이를테면 욕계 천취에 세 번 태어나거나[三家] 두 번 태어나[二家] 원적(圓寂)을 증득하는 자로서, 혹 어떤 경우에는 한 곳의 하늘에서, 혹은 두 곳의 하늘에서, 혹은 세 곳의 하늘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둘째는 인가가(人家家)이니, 이를테면 인취에 세 번 태어나거나 두 번 태어나 원적을 증득하는 자로서, 혹 어떤 경우에는 한 주(洲)에서, 혹은 두 주에서, 혹은 세 주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즉 예류의 성자가 증진하여 욕계의 1품의 수혹 내지 5품의 수혹을 끊을 경우, 명칭이 바뀌어 일래과의 '향(向)'이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제6품의 수혹을 끊으면 일래과를 성취한다. 그 때 그는 천상에 갔다가 한 번만 인간으로 태어나 반열반하기 때문에 일래과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렇게 한 번의 왕래를 거친 이후에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래과를 혹 어떤 경우 '탐·진·치가 희박해진 자[薄貪瞋癡]'라고도 이름하는데, 오로지 하품의 탐·진·치만이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일래향과 일래과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음으로 마땅히 불환(不還)의 향·과에 대해 건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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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품 혹은 8품의 수혹을 끊고
  한 번 태어나는 자를 일간(一間)이라 이름하니
  이는 바로 세 번째 과위의 '향'이며
  9품을 끊은 자가 불환과이다.
  斷七或八品 一生名一間
  此卽第三向 斷九不還果
  
  논하여 말하겠다. 일래과의 성자가 증진하여 그 밖의 나머지 수혹을 끊을 때, 만약 다음의 세 가지 인연을 갖출 경우 그 명칭은 일간(一間)으로 바뀐다.4)
  즉 첫째는 번뇌를 끊음에 의해서이니, 욕계 수혹 중의 7품 혹은 8품을 끊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근(根)을 성취함에 의해서이니, 능히 그 같은 번뇌를 대치하는 무루근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생을 받음에 의해서이니, 다시 욕계의 유정으로서 나머지 한 번의 생만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송 중에서 단지 첫째와 마지막의 두 가지 인연만을 설하고 '근을 성취하는 것'에 대해 설하지 않은 까닭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어찌하여 1품의 수혹이 불환과를 획득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인가?
  그가 만약 [제9품의 번뇌를] 끊으면 바로 계(界, 즉 욕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세 때의 업은 지극한 장애가 된다"고 설하였지만,5) 번뇌도 역시 업과 동일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그가 만약 제9품의 번뇌를 끊으면] 그 같은 번뇌의 등류과와 이숙과를 향수하는 지(地, 즉 욕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간의 '간'이란 바로 간극(間隙, 즉 틈)을 말하는 것으로, 그러한
  
  
  
4) 일간(ekav cika)이란 일래과(6품斷)와 불환과(9품단)의 중간단계로서, 인취 또는 천취에서 한 번의 생 을 받고 다음 생에 반열반한다. 따라서 현생과 열반 사이에 1생의 간격이 있기 때문에 '일간'이라고 하는 것 이다.
5) 본론 권제18(p.819∼820) 참조. 즉 인선근위(忍善根位)를 획득할 때에는 악취를 초래하는 업이 지극한 장애가 되며, 불환과를 획득할 때에는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업이, 무학과(즉 아라한과)를 획득할 때에는 색 ·무색계에 계속되는 업이 지극한 장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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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계에서는 한번의 생이 남아 간극이 되기 때문에 원적(圓寂)을 증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단계에서는 나머지 1품의 욕계 수소단의 혹이 남아 간극이 되기 때문에 불환과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열반과] 한 번의 생의 간극이 있는 자를 설하여 '일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수혹의 7품과 8품을 끊은 자를 역시 또한 불환과향이라고도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6) 그러나 일찍이 [이생위에서] 3·4품과 7·8품의 수혹을 끊고 견제(見諦)에 든 자로서 그 후 과위를 획득하였을 때 승과도(勝果道)를 닦지 않은 자라면 가가(家家)나 일간(一間)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니, 아직 그 같은 수혹을 대치하는 무루근을 성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약 제9품의 혹을 끊었다면 불환과를 성취하니, 반드시 다시는 욕계로 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환과를 혹은 '5하분결이 끊어진 자[五下結斷]'라고도 이름하는데, 비록 일찍이 [이생위에서] 혹은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결을 끊었을지라도 이 때 끊어짐을 모두 모았기 때문이다.7)
  불환의 단계에 대해 온갖 계경에서는 여러 가지 갈래로 그것의 차별을 건립하고 있는데, 이제 다음으로 그것의 차별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환에는 중(中)·생(生)·유행(有行)·
  무행(無行)의 반열반이 있으며
  상류(上流)로서 잡수(雜修)의 행자는
  능히 색구경천으로 가서 반열반하는데,
  
  
  
6) 7·8품의 수혹을 끊었다는 점에서 불환향은 일간과 동일하지만, 일간을, 세 가지 인연을 갖춘 자라고 한다면 불환향은 다만 단혹에 근거한 명칭일 따름이다.
7) 이는 '5하분결을 영원히 끊은 자를 불환이라고 한다'는 경설에 대한 해석이다. 즉 이치상으로 볼 때 초 월증의 성자는 이생위에서 탐·진의 두 가지를, 뒤의 견도에서 유신견·계금취·의(疑)의 세 결을 끊으며, 차 제증의 성자는 견도에서 세 결을, 수도에서 탐·진의 두 결을 끊지만, 지금 불환과의 단계에서 이러한 다섯 결의 끊어짐이 모두 모아지기 때문에 이를 은밀히 '5하결단'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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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此中生有行 無行般涅槃
  上流若雜修 能往色究竟
  
  여기에는 전초(全超)·반초·변몰이 있으며
  그 밖의 행자는 능히 유정천으로 가 반열반한다.
  무색계로 가 반열반하는 불환에는 네 가지가 있고
  여기(현신)에 머물면서 반열반하는 경우도 있다.
  超半超遍歿 餘能往有頂
  行無色有四 住此般涅槃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불환의 성자를 모두 설하면 일곱 가지가 있지만, 바야흐로 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불환은 다섯 가지로 차별되니, 첫째는 중반열반(中般涅槃)이며, 둘째는 생반열반(生般涅槃)이며, 셋째는 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이며, 넷째는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이며, 다섯째는 상류반열반(上流般涅槃)이다. 즉 이러한 이(불환의 성자)가 중간(中間, 즉 색계 중유)에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중반열반'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밖의 차별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이가 색계에 태어나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가 유행(가행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반열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가 무행에 의해 반열반하기 때문에 '생반열반' 등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이가 상지(上地)로 유전(流轉)하여 반열반하기 때문에 '상류반열반'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다시 중반열반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색계로 가 중유(中有)의 상태에 머물면서 바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8)
  
  
8) 즉 어떤 보특가라가 일찍이 생결(生結)의 비택멸은 획득하였으나 기결(起結)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경우, 그는 욕계에서 그를 핍박하고 어지럽히는 인연을 만나 그것에 의해 핍박되고 어지럽혀지지만, 능히 스스로 그 밖의 다른 결을 끊는 수승한 가행을 부지런히 닦게 된다. 그러다 가행이 아직 원만하게 성취 되지 않았으나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인연을 만나 마침내 목숨을 버리게 되면, 기결의 힘으로 말미암아 색계의 중유를 받게 되는데, 많은 괴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앞에서 일으킨 도에 편승하여 더욱 힘써 나아감으로써 그 밖의 결을 끊고, 아라한을 성취하여 반열반하게 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31, 한글대장경201,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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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반열반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색계에 태어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하니, 부지런히 노력함[勤修]과 속진(速進)의 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설하고 있는 반열반이란 유여의(有餘依) 열반을 말한다.9)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생반열반도] 역시 또한 무여의(無餘依) 열반이다"고 하였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는 목숨을 버리는 데 자재(自在)함이 없기 때문이다.
  유행반열반이란 이를테면 색계에 태어나서 오랜 시간 가행을 멈추지 않고 많은 공용(功用, 즉 노력)에 의해 비로소 반열반하는 것을 말하니, 이것에는 오로지 부지런히 노력함만이 있을 뿐이고, 속진의 도는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행반열반이란 이를테면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가행을 게을리하고 많은 공용을 닦지 않고서 바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하니, 부지런히 노력함과 속진의 도를 결여하였기 때문이다.10)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두 가지 반열반의 차별은 유위와 무위를 연으
  
  
  
9) 생반열반이란 근수(勤修)와 속진도(速進道)를 갖춤에 따라 색계에 태어나서 오래지 않아 아라한을 성취 하고 명종하여 반열반(즉 유여의열반)하는 불환을 말한다. 즉 이 때는 자유자재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곧바로 반열반하는 무여의열반이 아니다.
10) 유행반이나 무행반열반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어떤 보특가라가 태어나 많은 시간을 거쳐 바야흐 로 무학위를 성취하였다고 할 경우, 그 중의 어떤 이는 용맹정진하여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이는 타고난 성품이 완만하여 게으름에도 그렇게 된 경우가 있으니, 이를 순서대로 유행과 무행이라고 이름한다. 즉 어떤 보특가라가 일찍이 욕계에서 쉬지 않고 가행함에 따라 삼마지의 힘으로 5하분결을 끊고 불환과를 성 취한 후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다시 앞에서 닦은 종류의 도를 더욱 열심히 닦아 아라한을 성취 하는 것을 유행반열반이라고 이름한다면, 무행반열반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다. 혹은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 을 거치고 나서 고행(苦行)에 의지(依止)하여 그 밖의 다른 결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유행반열반이라고 이름하 니, 그는 수습하여 공용(功用)의 도에 의해 반열반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즉 樂行에 의지 하여 해탈하는 것)을 무행반열반이라고 이름한다.(『현종론』, 앞의 책,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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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하는 성도에 의한 것으로, 그 순서대로 열반을 획득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11) 그러나 이러한 설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크나큰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경 중에서는 무행반열반을 먼저 설하고 그 뒤에 유행반열반을 설하고 있는데,12) 이와 같은 순서가 이치에 상응하니, 빠르게 나아가는 속진도(速進道)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따라 무행과 유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무행은] 공용(功用)에 의하지 않고 획득되는 것이고, [유행은] 공용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색계의 반열반 중] 생반열반은 가장 빠르게 나아가는 최상품의 도를 획득하였으며, 수면(隨眠)이 가장 저열하기 때문에 태어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반열반하게 되는 것이다.13)
  [상류반열반의] '상류'라고 하는 말은 바로 상행(上行) 즉 '위로 올라간다'는 뜻이니, '류(流)'와 '행(行)'은 그 뜻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욕계에서 몰하여 색계로 가 태어나지만 거기서는 능히 원적을 증득하지 못하며, 요컨대 보다 상지로 전생하여 비로소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상류반열반에는 두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원인과 결과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원인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이것의 원인이 되는 정려상에 잡
  
  
  
11) 유위법을 연으로 하는 무루법에 의해 반열반하는 것이 유행반, 무위법을 연으로 하는 무루법에 의해 반열반하는 것이 무행반이라는 뜻. 그러나 그럴 경우, 중반열반도 유위법과 무위법을 연으로 하여 무루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 역시 유행반·무행반이라고 해야 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12) 『잡아함경』 권제29 제821경(대정장2, p.211상). 여기서는 5하분결을 끊음으로써 중반열반을 획득하 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생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무행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유행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상류반열반을 획득하니, 이것을 증상의 혜학(慧學)이라 한다고 설하고 있다.
13) 보광(普光)과 법보(法寶)는 다 같이 이를 경부의 해석으로 판석하고 있다. 즉 유부에서는 빠르지는 않 지만 많은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유행반을 무행반보다 상위에 두고 있지만, 경량부에서는 빠르며 어떠한 인위 적인 노력 없이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열반도인 무행반을 보다 상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중현(衆 賢)은 경에 따라 무행반을 먼저 설하기도 하고 유행반을 먼저 설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성취하는 데 걸리는 시간상으로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무엇을 먼저 설하더라도 어긋남이 없지만, 유행반이 보다 존 중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그것을 먼저 설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현종론』 권제31, 앞의 책,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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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雜修)와 무잡수(無雜修)가 있기 때문이며, 결과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색구경천(色究竟天)과 유정천(有頂天)이 [반열반에 드는] 가장 높은 곳[極處]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정려에 잡수가 있는 자라면 능히 색구경천으로 가서 비로소 반열반하게 되는데,14) 여기에는 다시 세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상지로 유전하는데] 전초(全超)와 반초(半超)와 변몰(遍歿)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15)
  '전초'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욕계의 몸으로 있으면서 이미 4정려를 모두 잡수하고서 어떤 인연을 만나 위의 세 정려에서 물러났지만, 초정려에 대한 애미(愛味, 애착과 미착)를 인연으로 하여 목숨을 마치고서 범중천처(색계 제1천)로 올라가 태어난 이가 이전 세간에서 익힌 관습의 세력에 의해 다시 제4정려를 능히 잡수하고, 그곳으로부터 몰한 후 바로 색구경천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바로 최초의 처소(범중천)에서 몰하여 가장 마지막 천처에 태어나는 것으로, 중간의 모든 천처를 단박에 초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초'의 뜻이다.
  '반초'라고 하는 말은, 그곳(색계 제1천)으로부터 몰하여 점차로 [색구경천] 아래의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 중간천에 이르러 능히 1천처를 초월하여 색구경천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곧 [색계 16천] 전부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초'라고 일컬은 것이다.16) 아울러 [불환의] 성자는 필시 대범천처(大梵天處)에 태어나지 않으니, 편벽된 견해[僻見]의 처소이기 때문
  
  
14) 잡수란 두 찰나의 무루정려 중간에 유루정려를 닦는 것으로,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 설함. 곧 잡수의 정려는 능히 5정거천(淨居天, 즉 無繁·無熱·善現·善見·色究竟의 5천을 말함)의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에 색구경천에서 반열반하는 것이다.
15) '전초'란 색계 중의 어떤 한 천에서 몰하고 나서 바로 단박에 모든 처소를 초월하여 색구경천으로 가 는 것을 말하며, '반초'란 모든 처소를 단박에 바로 초월하지 않고 중간천 내지는 아래 정거천에 이르러 하나 의 처소를 초월하여 색구경천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변몰'은 색계에 대한 애미(愛味)가 많아 모 든 천에 한번씩 태어난 후 색구경천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후술)
16) 즉 범중천에서 몰하여 색구경천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14천이 있는데, 반초는 바로 1천(그럴 경우 색계 15생) 내지 13천(그럴 경우 색계 3생)을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곧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대범천을 하나 의 천처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16천이라 한 것이다.(次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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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며, 유일한 도사(導師)라고 하기 때문이다.17)
  '변몰'이라고 하는 말은, 그곳으로부터 몰하여 점차로 일체의 천처 모두에서 두루 생을 받고서 최후에 비로소 능히 색구경천에 태어나는 것을 뜻하니, 일체의 천처에서 사몰(死沒)하기 때문에 '변몰'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즉 이러한 세 종류가 두 가지 상류반(잡수행에 의해 색구경천으로 가 반열반하는 불환과 무잡수에 의해 유정천으로 가 반열반하는 불환) 가운데 잡수정려라는 원인에 의해 색구경천으로 가 반열반하는 자라고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려에 잡수가 없는 그 밖의 행자는 능히 유정천으로 가 비로소 반열반하게 된다. 즉 그는 일찍이 무잡수의 정려를 행하였을지라도 온갖 선정(4정려를 말함)에 대한 애미(愛味)가 인연이 되어 여기(욕계)서 몰한 후 색계의 온갖 천처에 두루 태어나게 되는데, 오로지 5정거천에만은 능히 갈 수 없다.18) 그렇지만 색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나서 3무색정에 순서대로 태어나고서 다시 유정천에 태어나 비로소 반열반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상류반 중에서 전자는 바로 관행(觀行)이고, 후자는 바로 지행(止行)이니, 그들에게는 낙혜(樂慧)와 낙정(樂定)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9)
  나아가 두 가지 상류반의 성자는 하지(색구경천이나 유정천 아래의 처소)에서도 반열반을 획득한다고 하여도 그러한 견해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이 색구경천이나 유정천에 간다고 말한 것은 가장 높은 처소에 의거하여 그렇게 설한 것으로, 이들은 그곳을 넘어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17) 가습미라 비바사사는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대범천을 제외한 색계 16천설을 주장하는 것이다.(본론 권제8 주4 참조) 즉 색계에 대범천이 존재한다면 불환의 성자는 이곳에서도 생을 받아야 하겠지만, 범중천의 주인인 대범천은 스스로를 일체 세간의 원인이라고 하는 계금취견을 일으키고, 또한 자신이 일체 세간의 유일 한 구제주라는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불환의 변몰성자는 그곳에 태어나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색계 의 별도의 처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18) 색계 5정거천은 바로 잡수정려에 의해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후술)
19) 두 가지 상류반 중에서 잡수에 의해 색구경천에서 반열반하는 자는 관행자로서 관(觀)이 뛰어나고, 무 잡수에 의해 유정천에서 반열반하는 자는 지행자로서 지(止)가 뛰어나니, 전자는 혜(慧)를 즐기는 자이고, 후 자는 정(定)을 즐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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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이니, 예류의 성자가 최대한 일곱 번 반복하여 태어난다[極七返生]고 하는 것과 같다.
  이상의 다섯 가지 불환을 일컬어 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자라고 한다.
  무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자의 차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욕계에 있으면서 색계의 탐을 떠나게 되면 이로부터 목숨을 마치고서 무색계에 태어나게 되는데, 이 같은 이는 오로지 네 가지 종류로 차별될 뿐이니, 생반열반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20)
  여기에 앞서 언급한 다섯 종류를 더하면 여섯 가지의 불환을 성취하게 된다.
  다시 색계에도 가지 않고 무색계에도 가지 않은 채 바로 여기(욕계)에 머물면서 능히 반열반하는 자가 있으니, 이를 현반열반(現般涅槃)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여기에 앞서 언급한 여섯 종류를 더하면 일곱 가지의 불환이 되는 것이다.
  
  색계로 가는 다섯 종류의 불환 중에는 또 다른 갈래가 있으니, 그것의 차별을 드러내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계로 가는 자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세 가지를 각기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업과 번뇌와 근기에 다름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와 아홉 가지의 차별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行色界有九 謂三各分三
  業惑根有殊 故成三九別
  
  논하여 말하겠다. 말하자면 색계로 가는 다섯 종류의 불환을 모두 세 가지
  
  
  
20) 무색계에는 중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색계의 반열반 중에 중반열반을 제외한 네 종 류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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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건립하여 그것을 각기 세 종류로 나누었기 때문에 아홉 종류의 불환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중반과 생반과 상류반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이다.21)
  이 세 가지 종류는 각기 어떻게 다시 세 가지로 나뉘는 것인가?
  바야흐로 중반열반은 [중유에서] 신속하게 반열반[速般]을 획득하고, 얼마 동안 머문 후 반열반[非速般]을 획득하고, 오랜 시간 지난 후 반열반[經久般]을 획득하는 세 가지 종류로 나뉘니, 세 가지 불꽃의 비유로써 나타낸 바와 같기 때문이다.22)
  생반열반 역시 세 가지 종류로 나뉘니, 태어나서 바로[生] 혹은 노력[有行] 등에 의해 반열반하기 때문이다.23) 이것은 모두 [색계에] 태어나고 나서 반열반을 획득하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를 모두 생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류반열반에 대해서도 역시 세 가지 종류로 나누니, [상지로 유전하는데] 전초(全超)와 반초(半超)와 변몰(遍沒)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불환의 세 가지 종류는 모두 다 신속하게[速], 신속하지 않게[非速], 오랜 시간을 지나[經久] 반열반을 획득하기 때문에 [그렇게 나누어진 것으로], 서로를 비교하여도 뒤섞이는 과실은 없다. 즉 이와 같은 세 종류와 아홉 가지 종류의 불환은 업과 번뇌와 근기의 차별로 말미암아 신속하게, 혹은 신속하지 않게, 혹은 오랜 시간을 지나 반열반을 획득하는 따위로 동일
  
  
  
21) 5종불환 가운데 유행반과 무행반은 생반열반에 포섭된다.
22) 본론 권제8(p.399)에서 이에 대한 비유가 논설되었다. 즉 "비유하자면 장작개비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잠시 일어났다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바로 가까이서 소멸하는 것처럼 첫 번째 선사(善士)도 역 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쇳덩어리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불꽃이 일어나 중간쯤 지속하다가 소멸 하는 것처럼 두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쇳덩어리의 커다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멀리 까지 이르도록 떨어지지 않고 있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세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참고로 『현종론』 권 제31(한글대장경201, p.354)에서는 중유로 처음 생겨나자마자[初起], 혹은 멀거나 가까운 당래에 태어날 처소 에 이르러 반열반을 획득하는 세 가지의 차별로 설하고 있다.
23) 여기서 '등'은 색계에 태어나 어떠한 가행 없이 반열반하는 무행반열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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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모두 세 가지 종류(중반·생반·상류반의 불환)로 성립하게 된 것은 순기업(順起業)과 순생업(順生業)과 순후업(順後業)을 조작하여 증장시킨 차별 때문이며,24) 그 순서대로 하·중·상품의 번뇌가 현행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아울러 상·중·하품의 근기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러한 세 가지 종류는 각기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역시 또한 업과 번뇌와 근기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각각에 세 가지 차별이 있는 것으로, 그래서 아홉 종류로 성립하게 된 것이다. 즉 첫 번째(중반)와 두 번째(생반)의 세 가지는 번뇌와 근기의 차별로 말미암아 각각 세 종류로 성립하게 된 것으로, 업의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상류반)의 세 가지는 역시 또한 순후수업에도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세 종류로 분류되어 성립하게 되었다.25) 그래서 [본송에서] 이와 같이 색계로 가는 불환은 '업과 번뇌와 근기에 다름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와 아홉 가지의 차별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만약 [불환의 차별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계경 중에서 오로지 "7선사취(善士趣)가 있다"고 설하고 계실 뿐인가?26)
  게송으로 말하겠다.
  
  7선사취를 건립하게 된 것은
  상류반의 차별이 없기 때문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며
  
  
  
24) 순기의 '기'는 중유의 다른 이름. 즉 순기업은 중반을, 순생업은 생반을, 순후업은 상류반을 인기한다 . 다음의 번뇌와 근기의 경우도 이에 준하여 해석할 것.
25) 즉 중반과 생반을 각기 시간적으로 나눈 세 종류는 하·중·상품의 번뇌와 상·중·하품의 근기의 차 별에 의한 것이고, 상류반을 전초·반초·변몰의 세 종류로 나눈 것은 번뇌와 근기, 그리고 순후수업의 차별 에 따른 것이다.
26) 『중아함경』 권제2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 p.427). 7선사취란 중반과 생반의 각기 세 종류 와 상류반의 불환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이미 욕계의 번뇌를 끊어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뿐더러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선사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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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더라도 되돌아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立七善士趣 由上流無別
  善惡行不行 有往無還故
  
  논하여 말하겠다. 중반과 생반에 각기 세 가지(즉 속반·비속반·경구반)가 있고, 상류반을 한 가지로 삼았으니, 경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7선사취를 건립한 것이다. 즉 상지(上地)로 유전(流轉)하는 법이기 때문에 '상류'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러한 뜻이 동일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한 가지로만 건립하게 되었다.27)
  어째서 오로지 이 같은 불환과에 근거하여서만 선사취를 건립하고, 그 밖의 다른 유학(有學)의 성자에 근거하여서는 건립하지 않은 것인가?
  여기서 '취'란 바로 '간다(행한다)'는 뜻으로, 그 밖의 다른 유학의 성자는 모두 선업을 행할지라도 [범부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즉 오로지 이러한 일곱 종류의 불환은 모두 선업을 행하고 악업을 행하지 않지만 그 밖의 다른 유학의 성자는 그렇지 않다.28) 또한 오로지 이러한 일곱 종류의 불환만이 상계로 왕생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만, 그 밖의 다른 성자는 그렇지 않다.
  
  
27) 중반과 생반은 각기 세 가지로 나누면서 어째서 상류반은 한 가지로 설정한 것인가 하면, 전초(全超) 든 반초(半超)든 변몰(徧歿)이든 상류반의 세 가지는 다 같이 상지로 유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즉 앞의 두 가지 불환도 역시 그 뜻이 동일하지만, 그것의 개별적인 상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도록 각기 세 가지로 나누었지만, 상류반의 세 가지는 그 상의 차별이 알기 쉬워 한 가지로 건립하였다. 또는 앞의 두 불환 의 차별은 그러한 바를 쉽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세 가지로 나누었지만, 상류반의 차별은 그 뜻이 복잡하 여 한꺼번에 나타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만 한 가지로 건립하였다. 이를테면 중반과 생반의 경우 장차 생겨 날 것[將生]과 이미 생겨난 것[已生]으로 존재하면서 근기와 번뇌의 품류가 다르기 때문에 세 종류로 나눈 것 이지만, 상류반의 경우에는 장차 생겨나는 것과 이미 생겨난 것 모두와 통한다. 그리고 장차 생겨나는 상류반 에는 다시 정려의 잡수와 무잡수에 따른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이미 생겨난 상류반이 둘로 나뉘는 것도 역 시 그러하다. 그래서 논의의 편의상 한 가지로만 설하게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현종론』, 앞의 책, p.355 참조)
28) 예류과나 일래과의 성자도 선업을 행하지만 불선심으로써 비범행 등을 지어 욕계에 태어난다는 점에서 범부와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불환의 성자는 선행을 행하면서 불선심으로써 행하는 비범행 등을 떠났고, 또 한 욕계를 초월하여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선사취'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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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오로지 이 같은 불환의 성자에 근거하여서만 선사취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무엇이 선사(善士)인가. 말하자면 유학의 정견(正見)을 성취한 자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였던 것인가?29)
  그 밖의 모든 유학도 만약 다른 갈래에 근거하는 경우 역시 선사의 성질을 갖는다고 설할 수 있으니, 모든 유학은 다섯 종류의 악에 대해 필경 부작율의(不作律儀)를 모두 획득하기 때문이며, 불선의 번뇌는 대다수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30) 그렇지만 여기서 선사취를 설정한 것은 그 같은 사실[異門]에 근거하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선만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며, 오로지 뛰어난 원인에 의탁하여 상계로 간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31)
  온갖 성자위에 있으면서 일찍이 생을 거친 자에게도 역시 이러한 따위의 차별의 상이 있는 것인가?32)
  그렇지 않다.
  
  
  
29) 『중아함경』 권제2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 p.427상), "比丘行當如是. 我者無我亦無我所, 當來無我亦無我所. 已有便斷 已斷得捨, 有樂不染 合會不著. 如是行者無上息迹 慧之所見. 然未得證." 즉 유학 의 정견이란 4제를 관하여 고(苦)·비아(非我) 등의 행상을 관한 자(즉 경문상에서 '비구의 행이 이와 같은 자')로서, 견도 고법지인 이후의 성자를 말한다. 따라서 7선사 이외 그 밖의 유학의 성자도 정견을 성취하였 기 때문에 선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난문.
30) 즉 모든 유학은 더 이상 살생·투도·사음·망어·음주를 짓지 않는 율의를 획득하였으며, 견소단의 불선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선사'라고 일컬을 수 있다.
31) 중반과 생반과 상류반의 불환 이외의 유학의 성자도 '선사'로 일컬어지지만 중반 등의 성자만이 탐· 진 등 욕계의 모든 번뇌를 끊어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뿐더러 상계로 나아가고[趣], 다시는 욕계에 돌아 오는 일이 없기 때문에 '선사취'이다. 즉 예류·일래의 성자는 욕계를 초월하지 않지만, 불환의 성자는 욕계 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32) 일찍이 생을 거친 성자, 즉 경생(經生)의 성자란 타계에 가지 않고 항상 어떤 일계에서 태어나고 죽은 자를 말하는데, 이러한 경생의 성자가 불환과를 획득할 경우에도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중반·생반·상류반 의 구별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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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생을 거친 성자는
  다른 계로 가 태어나지 않는데
  이러한 자와 상계에 왕생한 성자에게는
  연근(練根)과 물러남이 없다.
  經欲界生聖 不往餘界生
  此及往上生 無練根幷退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성자위에 있으면서 욕계의 생을 거친 자라면 필시 색계나 무색계에 가 태어나지 않으니, 그는 불환과를 증득하고서 결정코 현신에서 반열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색계에서 생을 거친 성자라면 무색계에 상생(上生)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색계로 가 궁극적으로 유정천으로 가는 자가 그러하다.33) 그런데 천제석(天帝釋)은 "일찍이 색구경(色究竟)이라고 이름하는 하늘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이후 물러나 떨어지게 되면 마땅히 그곳에 태어나리라"고 말하고 있지만,34) 이에 대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는 대법(對法)의 상을 알지 못하
  
  
33) 욕계에서만 생을 거친 자는 욕계의 열등함과 더러움만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상계도 역시 그럴 것이라 고 생각하여 상계로 가지 않고 반열반하지만, 색계의 경생의 성자는 색계의 선미(善美)함을 알았기 때문에 무 색계로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34) 『중아함경』 권제33 「석문경(釋問經)」(대정장1, p.638상), "나는 여기서 목숨을 마친 뒤 인간으로 태어나……지혜[智]를 배워 만약 지혜를 획득하면 바로 구경지(究竟智, 즉 아라한)를 획득하고 구경변(究竟邊 )을 획득하겠지만, 지혜를 배워 만약 지혜를 획득하고서 구경지를 획득하지 못하면 색구경천이라 이름하는 최 상의 묘천(妙天)에 태어나리니, 대선인(大仙人)이시여, 원컨대 응당 아나함(阿那含, 즉 불환)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대선인이시여, 나는 이제 결정코 수다원(須陀洹)을 획득하였습니다.(역자 抄譯)" 즉 천제석이 천 중에서 수다원을 획득하고서 인간으로 태어나 반열반한다고 말한 것은 성자로서 경생(經生)하는 자를 나타내 며, 죽어 색구경천에 태어난다고 말한 것은 상계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므로, 이 경문은 욕계의 경생의 성자로서 상계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경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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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그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도 역시 이를 가로막지 않으신 것이다."35) 즉 이같이 이미 욕계의 생을 거친 성자와, 이미 그곳(색계)으로부터 상계로 가서 태어난 모든 성자(색계의 경생성자)는 필시 근기를 단련[練根]하는 일도 없으며, 아울러 물러나는 일도 없다.
  어떠한 연유에서 욕계의 생을 거친 성자와 상계에 태어난 성자도 근기를 단련하거나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필시 그러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필시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인가?
  생을 거친 성자는 습근(習根)이 지극히 성숙하였기 때문이며, 아울러 수승한 소의지(所依止)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36)
  어떠한 연유에서 유학으로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자(즉 예류와 일래과)는 중유 중에서 반열반하는 일이 없는 것인가?
  그들은 성도가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으므로 능히 현재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며, 그들이 지닌 수면도 지극히 저열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욕계의 온갖 법은 지극히 초월하기 어렵기 때문이며,37) 그들은 아직도 달리 그 밖에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더욱 전진하여 마땅히 불선과 무기의 두 가지 번뇌를 끊어야 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더욱 전진하여 마땅히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사문과를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마땅히 3계의 법을 모두 초월해야 하기 때문으로,38) 중유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이와
  
  
35) 『대비바사론』 권제53(한글대장경120, p.73). 즉 '천제석이 욕계 경생의 성자는 상계에 태어나지 않 는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그같이 말한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그 같은 그릇된 앎이 도에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꾸짖어 제지하지 않으신 것이며, 또한 훗날 스스로 법성을 알게 될 때 부끄러워할까 염려하여 일부러 꾸짖지 않으신 것이다.'
36) 일찍이 생을 거치면서 무루근의 성도(聖道)를 수습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지극히 견고하며, 아울러 그 소의신도 역시 성자의 그것으로 지극히 수승하기 때문이다.
37) 여기서 욕계의 온갖 법이란 아직 욕계를 떠나지 못한 자에게 성취된 번뇌와 업과 이숙과를 말한다.
38) 즉 아직 욕계법(번뇌와 업과 그에 따른 이숙과)을 떠나지 못한 성자는 욕계의 불선의 번뇌와 상계 무 기의 번뇌를 끊지 않으면 안 되며, 불환과와 아라한과 혹은 여기에 일래과를 더한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사문 과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리하여 마침내 3계의 법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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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공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상류반열반은 정려의 잡수(雜修)를 원인으로 하여 능히 색구경천으로 가서 반열반하는 것이라고 논설하였다. 그럴 경우 먼저 마땅히 어떠한 정려를 잡수해야 하는 것이며, 어떠한 상태에 의해 잡수가 성취되었음을 아는 것인가? 또한 어떠한 인연을 위해 정려를 잡수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먼저 제4정려를 잡수해야 하니
  잡수의 성취는 1찰나에 의하며
  생을 받고 현법의 즐거움을 위해
  아울러 번뇌로 인한 물러남을 막기 위해서이다.
  先雜修第四 成由一念雜
  爲受生現樂 及遮煩惱退
  
  논하여 말하겠다. 4정려를 잡수하려고 하는 모든 이는 반드시 먼저 제4정려를 잡수해야 할 것이니, 그러한 등지가 가장 감당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며, 온갖 낙행(樂行) 중에서 그것이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39)
  이와 같은 온갖 정려를 잡수하는 자는 바로 아라한 혹은 불환이다.40)
  즉 그는 반드시 먼저 제4정려에 들어야 하는데, 그 때 다찰나[多念]의 무루가 상속현전하고, 이로부터 다찰나의 유루가 인기되어 낳아지며, 그 후 다시 다찰나의 무루가 현전한다. 이와 같이 반복하여 그 후 점차 찰나가 감소하여 마침내 최후로 두 찰나의 무루가 현전하고, 다음으로 두 찰나의 유루가
  
  
  
39) 낙행이란 지관(止觀)이 균등하게 일어나 심사(尋伺) 등의 동란이 없어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 을 말한다. 본론 권제25(p.1151)의 '낙통행'을 참조 바람.
40) 욕계를 떠나지 않은 성자는 근본정에 들 수 없으며, 이욕의 이생은 비록 근본정에 들 수 있을지라도 무루정을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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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되어 현전하며, 이와 무간에 다시 두 찰나의 무루를 낳게 되니, 이를 일컬어 '잡수정려의 가행이 성취되어 원만하게 된 것[成滿]'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이후는 오로지 1찰나의 무루로부터 1찰나의 유루가 인기되어 현전하며,41) 이와 무간에 다시 1찰나의 무루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이 유루가 중간의 찰나가 되고, 그 앞과 뒤 찰나에 무루가 섞여 있기 때문에 이를 '잡수정려의 근본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圓成]'이라고 이름하는데, 앞의 두 찰나는 무간도와 유사하고 세 번째 찰나는 해탈도와 유사하다.42)
  이와 같이 제4정려를 잡수하고 나서 이러한 세력에 편승하여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또한 능히 아래 세 정려를 잡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욕계 인취(人趣) 중의 3주(洲)에서 이와 같은 온갖 정려를 잡수하고 나서 그 후 만약 퇴실하여 색계 중에 태어날 경우 역시 앞에서와 같이 능히 정려를 잡수할 수 있다.
  나아가 정려를 잡수하는 것은 세 가지 종류의 인연 때문이니, 첫째는 [5정거천의] 생을 받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현법의 즐거움[現樂]을 위해서이며, 셋째는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를테면 불환 중의 모든 이근자(즉 見至)는 현법의 즐거움과 정거천에 태어나기 위해 [정려를 잡수하는 것이며], 모든 둔근자(즉 信解)는 또한 역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려를 잡수하는 것이니, 그는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이와 같은 잡수는 미상응(味相應)의 등지(等持)를 멀리하게 하기 때문이다.43) 그리고 온갖 아라한으로서 만약 이근자(즉 不時解脫)라면 현법의 즐거움을 위해, 만약 둔근자(즉 時解脫)라면 역시 또한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려를 잡수하는 것이다].44)
  
  
41) 이는 공력(功力)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任運] 이루어지는 잡수이다.
42) 즉 앞의 두 찰나에서 불염무치(不染無癡)의 정장(定障)을 멸하고, 제3찰나에서 그것의 불성취를 획득 하기 때문이다.
43) 미상응의 등지 즉 미정(味定, 정려에 대한 집착)은 어떤 과위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인연이 되기 때문 이다.
44) 불시해탈은 더 이상 물러남이 없이 어느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반열반에 들 수 있는 부동법(不動法)의 아라한을 말하며, 시해탈은 적당한 시기를 만나야 비로소 반열반에 들 수 있는 5종의 아라한을 말한다.(본론 권제25, p.11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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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정려를 잡수하는 것이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정거천으로 오로지 다섯 처소만이 있는 것인가?45)
  게송으로 말하겠다.
  
  5품을 잡수함으로 말미암아
  5정거천에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由雜修五品 生有五淨居
  
  논하여 말하겠다. 제4정려를 잡수하는 것에 다섯 가지 품류가 있기 때문에 정거천에도 오로지 다섯 처소만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다섯 가지 품류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정려의 잡수에] 하·중·상품과 상승(上勝)·상극품(上極品)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하품은 세 찰나의 마음이 현전하여 바로 그것의 성취가 원만하게 획득되는 것으로, 이를테면 첫 찰나에는 무루심을 일으키고, 다음 찰나에는 유루심을 일으키며, 다시 무루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 중품은 여섯 찰나의 마음이, 세 번째 상품은 아홉 찰나의 마음이, 네 번째 상승품은 열두 찰나의 마음이, 다섯 번째 상극품은 열다섯 찰나의 마음이 [현전하여 그것의 성취가 원만하게 획득된다].46) 이와 같이 정려를 잡수하는 것에 다섯 가지 품류가 있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5정거천을 초래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루의 세력은 유루를 훈수(熏修)하여 정거천을 초래하게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47)
  
  
45) 5정거천이란 색계 제4정려에 포섭되는 무번(無煩)·무열(無熱)·선현(善現)·선견(善見)·색구경천(色 究竟天)으로, 불환의 성자가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5나함천(那含天)'이라고도 한다.
46) 중품의 잡수는 앞(하품)의 세 찰나를 가행으로 삼아 여기에 세 찰나를 더한 것이며, 나아가 극상품은 앞의 열두 찰나의 마음을 가행으로 삼아 세 찰나의 잡수를 더한 것이다. 즉 하품인 세 찰나의 잡수에 의해 무 번천에, 중품인 여섯 찰나의 잡수에 의해 무열천에, 상품인 아홉 찰나의 잡수에 의해 선현천에, 상승품인 열 두 찰나의 잡수에 의해 선견천에, 상극품인 열다섯 찰나의 잡수에 의해 색구경천에 태어나 반열반하게 된다.
47) 무루법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5정거천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유루법을 도와 그것으로 하여금 초래 하게 한다는 뜻. 즉 무루법은 유(有)를 버리고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유루의 업력만이 그것(정거)의 이숙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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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신(信) 등의 5근(根)이 차례로 증상함으로 말미암아 5정거천을 초래하게 된다"고 하였다.48)
  경에서는 불환을 설하여 신증(身證)이라고 이름하기도 하였다.49) 어떤 뛰어난 공덕에 의해 '신증'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정(滅定)을 획득한 불환은
  이름을 바꾸어 '신증'이라고 한다.
  得滅定不還 轉名爲身證
  
  논하여 말하겠다. 멸진정(滅盡定)의 득(得)이 생겨난 것을 일컬어 '멸정을 획득하였다'고 한 것으로, 만약 불환의 성자로서 소의신 중에 멸진정의 득이 생겨난 자이면, 그 명칭을 바꾸어 신증(身證)이라고 한다. 즉 불환의 성자가 소의신에 의거하여 열반과 유사한 법(즉 멸진정)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신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어째서 그를 설하여 다만 신증(身證)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소의신에 의지하여 생겨났기 때문이다.50) 그러나 이치상으로 본다면 실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즉 "그는 멸진정으로부터 일어나 일찍이 획득하지 않은 유식신(有識身)의 적정(寂靜)을 획득하고서 '이 같은 멸진정이야말로 최고의 적정으로 열반과 지극히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소의신의 적정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신
  
  
48) 칭우에 의하면 이는 대덕 실리라다(室利羅多)의 설로서, 신(信)·근(勤)·염(念)·정(定)·혜(慧)의 5 무루근이 증상하여 정려를 잡수하면 무번천 내지 색구경천에 태어나게 된다는 뜻이다.
49) 『중아함경』 권제51 「아습패경(阿濕貝經)」(대정장1, p.751중하).
50) 신증(kayasaksin)이란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의 성자를 별도로 일컫는 명칭으로, 멸진정은 심식(心識) 이 멸한 상태이므로 심식이 존재하지 않는 소의신을 근거로 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심증'이라 하지 않고 '신 증'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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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이라 이름하게 된 것으로, [멸진정의] 득(得)과 [출정 후 멸진정을 연으로 하여 일어난] 지(智)가 현전함으로 말미암아 소의신의 적정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51)
  계경에서는 열여덟 가지의 유학이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거기서는 신증을 설하지 않은 것인가?52)
  [그것을 유학으로 설정할 만한] 근거[依因]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유학의] 근거인가?
  이를테면 온갖 무루의 3학(學)과 아울러 과(果)이니, 그 같은 차별에 근거하여 유학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53) 그러나 멸진정은 3학이 아니고 3학의 과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성립시키는 근거에 따라 유학의 차별로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불환의 대체적인 상(相)의 차별은 이상과 같다. 그러나 보다 자세하게 분석한다면 그 수는 수천 가지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바야흐로 중반(中般)과 같은 것은 근기[根]에 근거하여 건립할 경우 세 가지 종류가 되니, 하·중·상의 근기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지(地)에 근거
  
  
  
51) 즉 신증이란 불환의 성자가 멸진정에 머물 때의 명칭이 아니라 출정(出定)하여 심식이 존재하는 소의 신[有識身]에 일찍이 획득된 바가 없었던 적정을 증득하였을 때의 명칭이라는 뜻. 보광에 의하면 이는 논주 세친이 경부의 해석을 서술한 것으로, 멸진정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멸정 중 세심(細心)' 내지 색심호훈설(色 心互熏說)을 주장하는 경량부로서는 무식(無識)의 소의신에 근거한다는 유부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 에 이를 출정위(出定位)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52) 『중아함경』 권제30 「복전경(福田經)」(대정장1, p.616상) 참조. 복전에는 유학과 무학 두 가지가 있으며, 유학에는 예류향·예류과·일래향·일래과·불환향·불환과·아라한향·수신행·수법행·신해[信解脫 ]·견지[見到]·가가·일간[一種]·중반·생반·유행반·무행반·상류반의 열여덟 가지가 있고, 무학에는 퇴 법(退法)·사법(思法)·호법(護法)·안주법(安住法)·감달법(堪達法)·부동법(不動法)·불퇴법(不退法)·혜( 慧)해탈·구(俱)해탈의 아홉 가지가 있다.(이상 27현성) 그러나 이 「복전경」에서는 아라한향 대신 신증을 열거하고 있다.
53) 즉 유학은 무루의 3학(계·정·혜)과 택멸의 과보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신증불환의 경우 그가 획득 한 멸진정은 유루이기 때문에 무루의 3학이 아니며, 유위이기 때문에 이계과가 아니다. 그래서 유학의 범주에 서 제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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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건립할 경우, 네 가지 종류가 되니, 초정려로 가서 반열반하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종성(種姓)에 근거하여 건립할 경우 여섯 가지 종류가 되니, 퇴법(退法) 종성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54) 태어나는 처소에 근거하여 건립할 경우 열여섯 가지 종류가 되니, 범중천 등의 처소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地)와 이염(離染)에 근거하여 건립할 경우 서른여섯 가지가 되니, 색계 구박(具縛) 내지 제4정려의 8품의 염오를 떠났기 때문이다.55) 나아가 태어나는 처소와 종성과 이염과 근기에 근거하여 건립할 경우, 2천5백92가지가 된다.
  어떻게 그와 같이 되는 것인가?
  바야흐로 한 처소의 종성에 여섯 가지가 있으며, 각각의 종성을 이염의 갈래에 근거하여 차별하면 아홉 가지가 된다. 이를테면 어떠한 정려지(地)에서도 처음에 구박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8품을 떠나기 때문으로, 이와 같은 여섯 종성의 아홉 가지 차별에 따라 쉰네 가지가 된다. 그리고 열여섯 처소를 쉰네 가지에 곱하면 8백64가지가 되며, 근기를 여기에 곱하면 다시 이것의 세 배가 되기 때문에 모두 2천5백92가지가 되는 것이다. 곧 하지의 9품의 염오를 떠난 모든 이를 설하여 상지의 구박(具縛)이라 이름하는데, 각각의 지(地)의 이염의 수와 동등하게 되기 때문이다.56)
  이와 마찬가지로 나아가 상류반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다섯 종류의 불환의 수를 모두 합하여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1만 2천9백60가지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불환) 향(向)·과(果)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54) 여기서 6종성이란 5종불환이 반열반하게 될 때 획득하게 되는 아라한의 여섯종류. 즉 퇴법·사법·호 법·안주법·감달법·부동법의 종성을 말한다. 본론 권제25 초두 참조.
55) 4정려 각각의 이염에 각기 아홉 가지 종류(구박으로부터 8품의 끊어짐까지)가 있기 때문이다.
56) 이를테면 욕계 9품의 혹을 끊은 이를 색계 구박의 성자라고 하듯이, 색계 4선정 각각에는 하지의 9품 의 혹을 끊은 구박과 1품 내지 8품의 혹을 끊은 여덟 종류의 성자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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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네 번째(아라한) 향·과에 대해 건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계의 수혹 중에서
  초정려의 1품 내지
  유정지의 8품을 끊은 이를
  모두 아라한향이라고 한다.
  上界修惑中 斷初定一品
  至有頂八品 皆阿羅漢向
  
  그리고 제9품의 무간도를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 하는데
  번뇌 멸진의 득과 구유하는 진지(盡智)가
  무학의 응과(應果)를 성취한다.
  第九無間道 名金剛喩定
  盡得俱盡智 成無學應果
  
  논하여 말하겠다. 즉 불환의 성자가 승진하여 색계와 무색계의 수소단의 혹을 끊을 때, 먼저 초정려의 1품(상상품)의 혹을 끊고, 나아가 마지막으로 유정지(有頂地, 즉 비상비비상처)의 8품(하중품)의 혹을 끊을 경우,57) 그 명칭이 '아라한향'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설해진 아라한향 중에서 유정지의 혹을 끊는 제9품의 무간도(無間道)를 설하여 또한 역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일체의 수면을 능히 모두 깨트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정지 이하의 번뇌는] 앞에서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에 일체의 수면을 파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실제적으로는 능히 일체의 번뇌를 파괴하는 공능을 갖고 있으며, 능히 번뇌
  
  
  
57) 그러나 엄격히 말해 실제로는 유정지 제9품(하하품)의 혹을 끊는 무간도까지를 아라한향이라고 한다.(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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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끊는 무간도 중에서 이러한 선정과 상응하는 무간도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58)
  금강유정에도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유정지 제9품의 혹을 끊는 무간도는 모두 9지(地)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59)
  그래서 이 같은 선정에는 지(智)와 행상과 연(緣)의 차별이 있다고 설한 것이다. 가령 미지정에 포섭되는 것에는 쉰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고·집류지는 유정지의 고·집제를 소연으로 삼아 각기 네 가지 행상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여덟 가지가 있어야 하며, 멸·도법지도 각기 네 가지 행상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여덟 가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멸류지는 8지(4정려와 4무색정)의 멸제를 소연으로 삼아 각각에 각기 네 가지 행상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모두 서른두 가지가 있어야 하며, 도류지는 8지의 도제를 소연으로 삼아 모두 네 가지 행상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네 가지가 있어야 하니, 8지의 번뇌를 대치하는 유지품(類智品)의 도는 동류로서 서로의 원인이 되어 필시 그 모두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60)
  이처럼 미지정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 쉰두 가지가 있듯이, 정려중간과 4정려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공무변처에 포섭되는 것에는 스물여덟 가지가 있으며,61) 식무변처에 포섭
  
  
58) 유정지 이하의 번뇌는 앞에서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금강유정에 의해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사실상 일체의 번뇌를 끊는 공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의 선정과 상응하는 무간도는 일체의 무간 도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금강'에 비유한 것이다.
59) 유정지 제9품의 혹을 끊는 무간도, 즉 금강유정은 미지·중간·4정려·아래 3무색 등의 무루정에 의지 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법·유지(智), 고(苦)·공(空) 등의 행상, 연(緣)이 되는 4제 등의 차별에 따라 동일 지(地)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종류가 있을 수 있다.
60) 상 2계의 8지를 능히 대치하는 도류지는 서로 동류인이 되기 때문에 8지의 도제를 소연으로 삼을 때에 는, 그것을 별연(別緣)으로 삼지 않고 총연(總緣)으로 삼아 관찰한다. 그래서 그 때의 행상은 단지 도(道)· 여(如)·행(行)·출(出) 네 가지뿐인 것이다.
61)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쉰두 가지 중에서 멸·도법지와 아래 4정려의 멸제를 소연으로 하는 멸류지 등 6지(智) 각각의 네 가지 행상(즉 스물네 가지)을 제외한 것으로, 무색계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에는 필시 법지가 없을 것이고, 아울러 하지의 멸제를 소연으로 하는 유지품(즉 멸류지)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하지의 도제를 소연으로 하여 관찰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으니, 앞에서 이미 해석한 대 로 자지와 상·하지의 대치도를 모두 하나의 소연[總緣]으로 삼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32, 앞의 책,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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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는 것에는 스물네 가지가 있으며,62)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것에는 스무 가지가 있으니,63) 무색계에 근거하였기에 [멸·도의 두 가지] 법지와 아울러 하지(下地)의 멸제의 소연이 되는 멸류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지를 소연으로 하는 대치도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에 [제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은 지(智)와 행상과 연(緣)이 다르기 때문에 미지정에 포섭되는 것에 여든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도류지(道類智)는 8지(상 2계의 8지)의 도제를 소연으로 삼아 역시 각기 별도의 네 가지 행상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앞에서 언급한 것(쉰두 가지)에 스물여덟 가지를 더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미지정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 여든 가지의 종류가 있듯이, 정려중간과 4정려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공무변처에는 마흔 가지가 있고, 식무변처에는 서른두 가지가 있으며, 무소유처에 스물네 가지가 있다."
  다시 어떤 이는 금강유정은 지(智)와 행상과 연(緣)이 다르기 때문에 미지정에 포섭되는 것에 모두 백예순네 가지의 종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멸류지는 8지의 멸제를 각기 개별적으로 소연[別緣]으로 삼고 그 모두를 전체적으로 하나의 소연[總緣]으로도 삼아 각기 네 가지 행상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이에 따라 처음에 언급한 것(쉰두 가지)에 백열두 가지를 더해야 하는 것이다.64) 이처럼 미지정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 백예순네 가지의 종류가 있듯이, 정려중간과 4정려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62) 앞의 공무변처에 포섭되는 스물여덟 가지 금강유정 중에서 공무변처의 멸제를 소연으로 하는 멸류지의 네 행상을 제외한 스물네 가지.
63) 앞의 스물네 가지 중에서 식무변처의 멸제를 소연으로 하는 멸류지의 네 행상을 제외한 스무 가지.
64) 즉 도류지는 첫 번째 설과 마찬가지로 상 2계의 도제를 총연(總緣)으로 삼아 네 가지 행상만을 갖지만 , 멸류지의 경우 8지의 멸제를 총연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별연으로 삼기도 하여 그 계산이 지극히 복잡한데, 이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정설이다.(자세한 설명은 『대비바사론』 권제28, 한글대장경119, p.62-64에서 如 是說者의 설을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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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그리고 공무변처에는 쉰두 가지가 있고, 식무변처에는 서른여섯 가지가 있으며, 무소유처에 스물네 가지가 있다."
  나아가 만약 종성과 근기 등에 근거하여 분별할 경우 더욱 많은 종류를 성취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정은 이미 유정지의 제9품의 혹을 능히 끊었으므로, 이러한 '번뇌멸진[惑盡]'의 득(得)과 함께 작용하는 진지(盡智)를 능히 인기한다.65) 금강유정은 바로 단혹(斷惑) 중의 최후의 무간도이며, 이것에 의해 생겨난 진지는 바로 단혹 중의 최후의 해탈도이다. 즉 이러한 해탈도는 모든 누(漏, 즉 번뇌)가 다하는 멸진의 득과 최초로 구생(俱生)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66)
  그리고 이와 같은 진지가 이미 생겨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바로 무학(無學)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하니, 이미 무학의 응과법(應果法)을 획득하였기 때문으로,67) 또 다른 과위를 획득하기 위해 마땅히 닦아야 할 학(學)이 여기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학'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68)
  그리고 이들(무학)은 오로지 마땅히 다른 이를 위한 일[他事]만을 행하기 때문에, 염오를 갖는 모든 이(일체의 이생과 유학)로부터 마땅히 공양을 받을
  
  
  
65) '번뇌의 멸진[盡]'이란 택멸을 말하는 것으로, 번뇌를 소멸하고서 '생이 이미 다하였다'고 아는 것을 '진지'라고 한다. 본론 「지품(智品)」 권제26(p.1178) 참조.
66) 유정지 제9품의 해탈도는 모든 누(漏)의 단진(斷盡)의 득, 즉 3계 9지의 일체의 번뇌를 단진하여 획득 하는 택멸의 득과 구생하는 최초의 법이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한 것으로, 그 밖의 무생지(無生智)나 무학 의 정견과 같은 것은 비록 모든 누의 단진의 득과 구생할지라도 최초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진지라고는 말하 지 않는다.
67) 여기서 '응과'는 응공(應供)의 과(果), 즉 아라한과를 말한다. 아라한은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이[ 應供]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학(無學, asaiksa)'이다.
68) 이에 대해 진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자(예류향 내지 아라한향)는 또 다른 과위를 획득하기 위해 부지런히 학을 수습하기 때문에 유학(有學, saiksa)이라 한다. 즉 예류·일래·불환의 성자가 자신의 과위에 머물며, 물러나지도 않고 승과도로 나아가지도 않는 상태(본성, prakrti)에 머무르는 것은, 마치 길가던 행인 이 잠시 쉬는 것과 같아서 표면적으로는 평온할지라도 더욱 증진하려는 의업이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배우려는 의지[學意]가 충만되지 않아 학(계·정·혜학)의 '득'이 항상 소의신을 쫓아 일어나기 때문에 '유학'이라 이름한 것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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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하기 때문에,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아라한(阿羅漢, 즉 應供)'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앞에서 분별한 4향(向)과 3과(果)를 모두 유학(有學)이라 이름한다는 사실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앞의 일곱 성자는 유학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인가?
  누(漏)의 멸진을 획득하기 위해 항상 배우는 것[學]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우는 것에는 요컨대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증상(增上)의 계학(戒學)이며, 둘째는 증상의 심학(心學)이며, 셋째는 증상의 혜학(慧學)이니, 계·정·혜가 세 가지 자체의 본질이 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생(異生)도 마땅히 유학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아직 참다운 진리의 이치[諦理]를 지견(知見)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들이 [비록 지견하였을지라도] 그 후 올바로 배운 바에서 퇴실(退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선서(善逝)께서는 '학'이라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하여 설하셨으니, 이를테면 계경 중에서 부처님께서 담파(憺怕)에게 "마땅히 배워야 할 바를 배워라. 마땅히 배워야 할 바를 배우는 이, 나는 오로지 이러한 자만을 설하여 유학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69) 즉 올바로 배워야 할 바를 배워 퇴실함이 없는 이를 유학이라 이름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학'이라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하여 설하셨던 것이다.
  성자가 본성(本性)에 머물 경우, 그것을 어떻게 유학이라 이름하겠는가?70)
  배우려는 의지[學意]가 아직 충만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치 길가던 행인이 잠시 쉬는 것과 같다. 혹은 학법(學法)의 득이 항상 [소의신을] 쫓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69) 『잡아함경』 권제35 제976경(대정장2, p.252하), " 云何爲學?……佛告尸婆, 學其所學故名爲學."
70) 여기서 본성은 예류과 등이 그 같은 과위에 머물면서 물러나지도, 승과도(勝果道)로 승진하지도 않는 상태를 말한다. 본권 주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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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학법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유학의 성자가 획득한 무루의 유위법을 말한다.
  무학법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무학의 성자가 획득한 무루의 유위법을 말한다.
  어째서 열반을 일컬어 학법이라 하지 않는 것인가?
  무학과 이생도 역시 또한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열반은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무학법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유학과 이생도 역시 또한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71)
  이와 같이 유학과 무학의 성자는 모두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보특가라를 성취하는데, 향을 행하는 자[行向]와 과위에 머무는 자[住果]에 각기 네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류과를 증득하기 위한 향(즉 예류과향) 내지는 이미 증득한 아라한과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명칭상으로는 비록 여덟 가지가 있을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오로지 네 가지 과위에 머무는 자와 초과향(初果向, 즉 예류향)의 다섯 가지만이 있을 뿐이니, 뒤의 세 가지 과위의 향(向)은 앞의 과위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점진적으로 과위를 획득하는 자(즉 次第證)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며, 만약 배리욕(倍離欲)과 전리욕(全離欲)의 성자가 견도 중에 머물 때에는 '일래·불환과의 향'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는 앞의 과위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72)
  앞에서 설한 것처럼 수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유루와 무루의 차별
  
  
  
71) 모든 무위법은 비록 무루일지라도 유학법이나 무학법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유학과 무 학이 획득한 택멸열반의 무위법은 이생도 역시 유류의 세속도(즉 6行觀, 후술)로써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획득하는 일이 없는 비택멸과 허공의 무위법은 그들에게 계속(繫屬)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 서 오로지 무루의 유위법, 즉 성도(聖道)만이 유학과 무학의 법이다.
72) 유루의 세속도로써 욕계 6품 또는 9품의 수혹 등을 떠난 초월증자가 견도에 들 때는 예류과와 일래과 를 초월하기 때문에(본론 권제23 주86 참조) 그것의 향도는 앞의 과위에 포섭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과는 별도의 존재로서 일래향(배리)·불환향(전리)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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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있기 때문이다.73) 그렇다면 어떠한 도에 의해 어떠한 경지의 염오를 떠날 수 있는 것인가?74)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정지에서는 무루도에 의해
  그 밖의 지에서는 두 가지 도에 의해 이염한다.
  有頂由無漏 餘由二離染
  
  논하여 말하겠다. 유정지의 염오는 오로지 무루도에 의해서만 떠날 수 있으며, 유루도로써는 떠날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위로는 더 이상 세속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자지(自地)의 [세속도는] 능히 자지의 혹을 대치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지의 번뇌에 의해 수증되기 때문이다.75) 즉 만약 그 같은 번뇌가 이러한 지(地)에서 수증하는 때라면 이러한 지의 세속도는 필시 그 같은 번뇌를 능히 대치할 수 없으며, 만약 이러한 지의 세속도의 힘이 능히 그 같은 번뇌를 대치하는 때라면 그 같은 번뇌는 이러한 지에서 필시 수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지의 세속도는 자지의 혹을 대치하지 못하는 것이다.76)
  
  
73) 즉 차제증자는 무루도로써 수혹을 끊지만, 초월증자는 유루도로써 끊는다.
74) 이하 다섯 단락의 본송은 방론(傍論)으로, 무학론과 관련하여 그 대치도의 제문제, 이를테면 유·무루 도와 이염(離染)·이계득(離繫得) 관계, 유·무루도와 이염의 소의지(地) 문제, 근분정과 이염의 관계, 유루 도의 소연과 행상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75) 무루도는 유루에 대해 세력이 강력하여 자지나 상지 등의 혹을 능히 모두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루 세속도의 경우 오로지 상지 근분정(近分定) 중의 그것만이 바로 아래 지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데, 유정지는 더 이상 상지도 상지의 근분정도 갖지 않기 때문에 유정지의 번뇌는 유루 세속도에 의해 끊어지 는 일이 없다. 또한 자지의 유루도는 반대로 번뇌가 수증하는 자량이 되는 경우가 있어 자지의 혹을 능히 대 치할 수 없기 때문에 유정지의 번뇌는 오로지 무루도에 의해서만 이계되는 것이다. 여기서 유루의 세속도란 예의 6행관(行觀)으로서, 상지는 정(靜)·묘(妙)·리(離)이고, 하지는 추(酥)·고(苦)·장(障)이라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후술)
76) 이는 자지의 세속도가 자지의 번뇌를 대치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힌 것으로, 즉 어떤 지의 유루 세속도 가 능히 그 지의 번뇌를 대치하는 경우라면, 그 같은 번뇌는 유루도에 따라 수증할 리가 없다. 다시 말해 세 속도에 따라 번뇌가 수증하는 것은 대치도의 힘이 강성하지 않기 때문으로, 그래서 자지의 번뇌를 능히 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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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의 8지의 염오를 떠나는 것은 두 가지 도 모두에 의해서이니, 세간도[世道, 즉 유루도]와 출세간도[出世道, 즉 무루도]로써 다 같이 능히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77)
  이미 두 가지 도에 의해 8지의 염오를 떠나게 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거기에는 각기 몇 가지 종류의 이계득(離繫得)이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성자는 두 가지 도로써 8지의 수혹을 떠나
  각기 두 가지의 이계득을 인기한다.
  聖二離八修 各二離繫得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유학의 성자는 유루도로써 아래 8지의 수소단의 혹을 떠날 때 각기 두 가지(유루와 무루)의 이계득을 능히 함께 인기하여 낳으며, 무루도로써 그것을 떠날 때에도 역시 그러하니, 두 종류의 도는 작용하는 바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무루도로써 그 같은 아래 8지의 수소단의 염오를 떠날 때 유루의 이계득도 역시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무루의 이계득을 버릴 때에도 번뇌가 성취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유학의 성자가 무루도로써 그 같은 염오를 떠날 때, 만약 동일한 대치인 유루의 이계득을 인기하여 낳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도로써 8지의 염오를 모두 떠나고서 그 후 정려에 의해 전근(轉根)을 획득할 때 일찍이 획득한 온갖 둔근의 성도를 단박에 버리고 오로지 정려의 이근 과보[利果]로서의 성도를 획득할 뿐 상지(아래 3무색정)의 혹의 이계는 마땅히
  
  
  
77) 즉 아래 8지의 번뇌는 상지 근분정의 세속도와, 자지와 하지의 무루도에 의해 끊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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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성취되지 않았어야 하며, 그럴 경우 도리어 마땅히 그 같은 번뇌를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78)
  그러나 이 같은 논증은 옳지 않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한 성자에게 설혹 유루단의 득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역시 상지의 번뇌를 성취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부분적으로 유정지를 떠나 전근(轉根)을 획득할 때와 아울러 이생이 상지에 태어나 혹을 성취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부분적으로 유정지의 염오를 떠나고서 그 후 정려에 의해 전근을 획득할 때 무루단의 득은 이미 단박에 버려져 그러한 지(地)의 이계에는 유루의 득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지의 혹을 역시 또한 성취하지 않듯이, 또한 이생이 두 가지 선정 등을 낳을 때 비록 욕계 등의 번뇌단의 득을 버렸을지라도 욕계 등의 번뇌를 성취하지 않는 것처럼, 이 경우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논증으로서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79)
  그러나 '성자는 두 가지 도로써 8지의 수혹을 떠날 때 각기 두 가지의 이계득을 능히 인기하여 낳게 된다'고 이미 논설하였으므로 이 같은 뜻에 준하여 볼 때, 이생은 유루도로써 오로지 유루단의 득만을 능히 인기하며, 그와 아울
  
  
  
78) 즉 유학의 성자가 무루도로써 하(下) 8지의 번뇌를 떠날 때, 색계의 4근본정에 의해 둔근의 불환으로 부터 이근의 불환에 이르게 되면 앞서 성취한 둔근의 무루도는 모두 버리고 오로지 이근의 무루도만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에 아래 3무색정에 존재하는 번뇌의 이계득은 획득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없기 때 문에 무루의 이계득을 획득할 때 유루의 이계득도 함께 획득된다고 말한 것이다. 참고로 무루도는 퇴실(退失) ·득과(得果)·전근(轉根) 시에 버려지고, 유루도는 퇴실·명종·월계지(越界地)·단선근 시에 버려진다.
79) 즉 유정지의 염오를 떠나고서 그 후 4정려에 의해 전근(轉根)을 획득하여 일찍이 획득한 둔근의 무루 도를 버릴 때에도 역시 유루의 이계득은 존재하지 않지만 유정지의 유루의 혹은 성취되는 일이 없으며, 또한 이생이 미지정에 의해 욕계의 혹을 끊고 이계득을 일으켜 택멸을 획득하고, 다시 승진하여 초정려의 혹을 끊 고 명종한 후 제2정려 등에 태어날 때 욕계 등의 이계득을 버렸을지라도 욕계 등의 번뇌를 성취하지 않듯이, 유루의 이계득을 획득하지 않을지라도 아래 3무색정의 번뇌를 성취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앞의 유여사의 주장 은 올바른 논증이 아니다는 뜻. 유부의 정설은 이러하다. "유루·무루의 두 가지 도는 8지의 혹에 대해 작용 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가 현기하여도 유루와 무루의 두 가지 이계득을 인기하는 것으로, 그것이 각 각의 번뇌단을 성취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현종론』 권제32,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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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 모든 성자는 무루도로써 견소단의 혹과 유정지의 수혹을 떠나므로 오로지 능히 무루단의 득만을 인기하여 낳을 뿐이다.80)
  어떠한 지(地)의 도에 의해 어떠한 지의 염오를 떠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루로서 미지정의 도는
  모든 지의 염오를 능히 떠나고
  그 밖의 8지의 도는 자지·상지의 염오를 떠나며
  유루도는 바로 아래 지의 염오를 떠난다.
  無漏未至道 能離一切地
  餘八離自上 有漏離次下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무루도로서 만약 미지정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능히 욕계 내지 유정지의 염오를 떠날 수 있으며, 정려중간과 4정려와 3무색정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각기 자지와 상지의 염오를 능히 떠날 수 있지만, 하지의 염오는 떠날 수 없으니,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81)
  일체의 유루도는 모두 오로지 바로 아래 지의 염오만을 능히 떠날 수 있으며, 자지 등의 염오는 떠날 수 없으니, 자지의 번뇌에 의해 수증된 것이기 때문이며,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며,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82)
  
  
80) 이는 논주 세친의 보충설명으로, 성자는 하 8지의 수혹에 대해서는 이생처럼 유루도와 무루도에 의해 끊기 때문에 두 가지 이계득을 획득하지만, 견혹과 유정지의 수혹의 경우는 오로지 무루도에 의해서만 그것의 이계를 획득한다는 뜻.
81) 이미 하지의 염오를 떠나고 나서 무루의 근본정 등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직 하지의 염 오를 떠나지 않았을 때에는 상지의 무루도가 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무루도는 4정려와 미지정과 정 려중간과 3무색정의 9지(地) 모두에 의지하여 일어날 수 있다.
82) 유루도는 자지의 번뇌에 의해 수증된 것이기 때문에(주76 참조),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에 자지와 상지의 번뇌를 끊지 못하는 것이며, 바로 아래 지를 제외한 그 밖의 하지의 번뇌를 끊지 못하는 것은 이미 그 것을 떠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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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근분정(近分定)에 근거하여 일어난 도는 하지의 염오를 떠날 수 있다. 그렇다면 무간도가 모두 근분정에 포섭되듯이, 온갖 해탈도도 역시 근분정에 포섭되는 것인가?83)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분정에 의해 하지의 염오를 떠날 때
  처음 세 가지의 뒤(제9품)의 해탈도는
  근본 혹은 근분에 포섭되고
  상지의 그것은 오로지 근본에 포섭된다.
  近分離下染 初三後解脫
  根本或近分 上地唯根本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도의 소의가 되는 근분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4정려와 4무색정의 아래 단계[下邊]가 바로 그것이다.84) 또한 이것에 의해 떠나게 되는 염오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와 여덟 선정의 그것이다.
  여기서 처음 세 가지 근분정은 아래 세 지의 염오를 떠난 것으로,85) 제9 해탈도가 현재전할 때에는 근본정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근분정에 들어가기도 한다.
  
  
83) 근분정에 의해 염오를 떠날 때, 각 지의 제9품의 해탈도도 역시 근분정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근본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물음. 초정려의 근분인 무루의 미지정은 욕계 내지 유정지의 혹을 끊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유루의 근분정과 이염(離染)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84) 근분이란 4정려·4무색정(이를 '근본정'이라 함)의 예비적 단계로서, 근본정에 접근한 단계이기 때문 에 '근분(近分)'이다. 그래서 여덟 가지가 있는 것으로(초정려의 근분은 미지정), 이것은 무간·해탈·유루· 무루의 모든 도의 근거가 된다.(본론 「정품」 권제28, p.1307에서 상론됨)
85) 즉 미지정에 의해 욕계의 염오를 떠나며, 제2정려의 근분에 의해 초정려의 염오를, 제3정려의 근분에 의해 제2정려의 염오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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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다섯 근분정(제4정려 이상)은 각기 하지의 염오를 떠난 것으로, 제9 해탈도가 현재전할 때는 반드시 근본정에 들고 근분정에는 들지 않으니, 근분과 근본은 다 같이 사근(捨根)이기 때문이다. 즉 아래 세 정려의 근분과 근본은 수근(受根)이 다르기 때문에 능히 들어갈 수 없는 자도 있으며(하근기의 경우), 다른 수근으로 전입(轉入)하는 데 어려움이 적은 자도 있기 때문에 [근분정에 들기도 하고 근본정에 들기도 하지만], 하지의 염오를 떠날 때에는 반드시 상지를 흔락(欣樂)하기 때문에 만약 '수'에 차이가 없을 경우에는 반드시 근본정에 드는 것이다.86)
  온갖 출세간도(즉 무루도)로서의 무간·해탈도의 경우, 앞(권제23)에서 이미 4제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16행상에 대해 논설하였으므로 이러한 뜻에 준하여 [그 소연과 행상에 대한 논의는]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세간도는 무엇을 소연으로 하여 어떠한 행상을 짓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간도로서의 무간·해탈도는
  차례대로 하지·상지를 소연으로 삼아
  추(酥)·고(苦)·장(障)의 행상과
  정(靜)·묘(妙)·리(離)의 세 행상을 짓는다.
  世無間解脫 如次緣下上
  作麤苦障行 及靜妙離三
  
  논하여 말하겠다. 세속의 무간도와 해탈도는 차례대로 하지와 상지를 능히 소연으로 삼아 그것이 추(酥)·고(苦)·장(障)이며, 정(靜)·묘(妙)·리(離)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세속의] 모든 무간도는 자지와 바로 아
  
  
  
86) 아래 세 정려의 경우, 근분정은 모두 사수이지만, 근본정의 초·제2 정려는 희수, 제3정려는 낙수로서 , '수'를 달리하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지의 혹을 떠날 때는 반드시 상지를 욕구하기 때문에 , '수'가 다르지만 않다면 반드시 근본정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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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 지의 온갖 유루법을 소연으로 삼아 그것을 '추' '고' 등의 세 가지 행상 중의 한 가지 행상으로 관찰하는 것이며, [세속의] 모든 해탈도는 그 바로 위의 지의 온갖 유루법을 소연으로 삼아 그것을 '정' '묘' 등의 세 가지 행상 중의 한 가지 행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즉 [하지의 유루법은 상지처럼] 적정(寂靜)하지 않기 때문에 '추'라고 일컬은 것으로, 보다 많은 노력에 의해 비로소 능히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묘(美妙)하지 않기 때문에 '고'라고 일컬은 것으로, 보다 많은 [번뇌의] 거칠고 무거움이 능히 어기고 해꼬지하기 때문이다. 출리(出離)하지 않기 때문에 '장'이라 일컬은 것으로, 이 같은 하지의 유루법은 능히 자지를 벗어나는 것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니, 감옥의 두터운 벽이 능히 그곳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장애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정'과 '묘'와 '리'의 세 가지 행상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와 반대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 방론(傍論)을 마치고 이제 마땅히 본의(本義)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지(盡智)와 무간에 어떠한 지(智)가 생겨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동의 아라한은 진지를 일으킨 후
  반드시 무생지(無生智)를 일으키고,
  그 밖의 아라한은 진지, 혹은 정견을 일으키는데,
  이것(정견)은 응과(應果)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不動盡智後 必起無生智
  餘盡或正見 此應果皆有
  
  논하여 말하겠다. 먼저 부동종성(不動種姓)의 모든 아라한은 진지와 무간에 무생지(無生智)를 일으키는 것으로,87) 다시금 진지와 무학의 정견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87) 부동종성은 아라한의 6종성 중의 하나로,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종성을 말한다.(본론 권제25, p.1125 참조). 진지와 무생지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6(p.1178)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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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법을 제외한 그 밖의 아라한에게는 진지와 무간에 진지가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무학의 정견을 인기하여 낳기도 하지만 무생지는 결코 낳지 않으니, 그 후에 물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88)
  앞서 언급한 부동종성의 경우에는 무학의 정견을 낳는 일이 없는 것인가?
  정견을 낳는 일이 있지만 그럼에도 설하지 않은 것은 일체의 응과(應果)가 다 같이 그것을 갖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부동법은 무생지를 낳은 후 무생지를 일으키거나 혹은 무학의 정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앞에서 네 가지 과위에 대해 논설하였는데, 이것은 누구의 과보인가?
  이러한 네 가지는 바로 사문의 과보[沙門果]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사문의 본성[沙門性, sramanya]이라 하는가? 이러한 과보의 본질[體]은 무엇이며, 과위의 차별에는 모두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청정도가 사문의 본성이고
  유위와 무위가 사문의 과보이니
  여기[果]에는 여든아홉 가지의
  해탈도와 택멸이 있다.
  淨道沙門性 有爲無爲果
  此有八十九 解脫道及滅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무루도가 바로 사문의 본성이다. 즉 이러한 도를지
  
  
  
88) 즉 퇴법(退法) 등 적당한 시기를 만나야 비로소 반열반에 들 수 있는 시(時)해탈의 아라한은 극과(極 果)에 이르면 물러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금강유정이 바로 소멸하는 상태 중에서도 무생지를 획득하지 못하며 , 오로지 진지 혹은 무학의 정견만을 획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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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는 자를 일컬어 '사문'이라 하니, 부지런히 힘써 번뇌를 종식시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여러 가지의 악과 불선법을 능히 종식시키고 제거하였기 때문에……(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사문이라 이름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89) 그리고 이생도 다름이 없지만 구경(究竟)의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진실의 사문이 아니다.90)
  유위와 무위가 바로 사문의 과보이다.91)
  그리고 계경에서는 이러한 과보의 차별에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있지만92)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사문의 과위에 여든아홉 가지가 있으니, 모두 해탈도와 택멸을 본성으로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견소단의 혹을 영원히 끊기 위해 여덟 가지의 무간도와 여덟 가지의 해탈도가 있으며, 아울러 수소단의 혹을 영원히 끊기 위해 여든한 가지의 무간도와 여든한 가지의 해탈도가 있는 것이다. 즉 모든 무간도는 사문의 본성일 뿐이지만 모든 해탈도는 역시 또한 유위의 사문과이기도 하니,93) 이는 바로 그것(사문의 본성인 무간도)의 등류과(等流果)이고 사용과(士用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각각의 택멸은 오로지 무위의 사문과일 뿐이니, 이는 바로 그것(사문성)의 이계과(離繫果)이고 사용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문의 과보를 모두 합하면 여든아홉 가지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그 모두를 갖추어 설하지 않은
  
  
  
89) 『중아함경』 권제48 「마읍경(馬邑經)」 제1(대정장1, p.725하), "무엇을 사문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악과 불선의 법과 온갖 누(漏)의 더러움과, 미래 존재의 근본과 번뇌의 뜨겁고 괴로운 과보와 생로병사 의 원인이 되는 것을 종식시키는 이러한 이를 사문이라고 한다."
90) 즉 이생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여러 가지의 악과 불선법을 능히 종식시키고 제거하려는 것은 다름이 없 지만, 무상정(無想定)을 진실의 열반이라 생각하여(이를 異趣涅槃이라 한다) 진실의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는 다는 뜻.
91) 여기서 유위란 유위의 무루 5온(즉 8聖道)을 말하며, 무위란 택멸을 말한다.
92) 『잡아함경』 권제29 제797경(대정장2, p.205중). 여기서는 사문법으로서 8성도(즉 正道)와 사문과로 서 수다원 등의 4과를 설하고 있다.
93) 해탈도는 사문의 본성[沙門性]이면서 역시 또한 사문의 과보[沙門果]이다. 그러나 무간도는 번뇌를 끊 고 해탈도를 인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청정의 무루도로서의 원인, 즉 사문성일 뿐 사문의 과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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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인가?
  비록 사문과에 많은 종류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설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근거에 의해 4과만을 설정한 것이니
  일찍이 획득된 도를 버리고, 수승한 도를 획득하며
  끊어짐[斷]을 하나로 모으고, 여덟 지(智)를 획득하며
  단박에 16행상을 닦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五因立四果 捨曾得勝道
  集斷得八智 頓修十六行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끊어짐의 도[斷道, 즉 택멸의 도]의 단계에서 다섯 가지의 근거를 모두 갖추었을 경우, 부처님께서는 경에서 그것을 '사문과'로 건립하셨다.
  여기서 다섯 가지 근거란, 첫째 일찍이 획득한 도를 버리는 것이니, 이를테면 [사문과의 단계에서는] 일찍이 획득한 과(果)와 향(向)의 도를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는 수승한 도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사문과의 단계에서는] 과에 포섭되는 수승한 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끊어짐(즉 택멸)을 모두 하나로 모으는 것이니, 이를테면 [사문과의 단계에서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과를 획득함으로써 모든 끊어짐(즉 일찍이 획득한 택멸)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여덟 가지 지(智)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사문과의 단계에서는] 네 가지 법지와 네 가지 유지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16행상을 능히 단박에 닦는 것이니, 이를테면 [사문과의 단계에서는] 능히 무상 등을 단박에 닦기 때문이다.
  즉 네 가지 과위에서는 이 같은 다섯 가지의 근거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그 밖의 과위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설하지 않으신 것이다.
  
  
  
[1117 / 1397] 쪽
  만약 청정도(즉 무루도)만을 사문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유루도의 세력에 의해 획득된 두 가지 과(초월증자로서 일래과와 불환과)가 어떻게 사문과에 포섭된다고 하겠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끊어짐은
  성도에 의해 획득된 것과 섞여 있기 때문에
  무루의 득이 이(世俗斷)를 임지하기 때문에
  역시 '사문과'라고 이름할 수 있다.
  世道所得斷 聖所得雜故
  無漏得持故 亦名沙門果
  
  논하여 말하겠다. 세속도로써 두 가지 사문과를 획득할 때, 이러한 과는 오로지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만을 단과(斷果)의 본질로 삼은 것이 아니며, 아울러 견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도 거기에 상잡(相雜)되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과를 성취하는 것이니, 동일한 과도(果道)의 득에 의해 획득된 것이기 때문이다.94)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계경에서는 말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일래과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3결을 끊고 탐·진·치가 희박해진 자이다. 무엇을 일컬어 불환과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5하분결을 끊은 자이다"고 하였던 것이다.95)
  또한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은 무루단의 득에 의해 임지(任持)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의 힘에 의해 임지됨으로 말미암아 물러나서도 목숨을 마치
  
  
  
94) 초월증자가 세속도로써 일래·불환과를 획득하였다고 할 때, 이러한 과는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 뿐만 아니라 견도 16심에 의해 획득된 택멸을 그 본질로 삼는다. 즉 세속도와 무루의 성도가 공동으로 하나의 사문과를 성취한 것이다.
95) 『잡아함경』 권제29 제797경(대정장2, p.205하). 여기서 견소단인 3결(신견·계금취·疑)을 끊고 수 소단의 제6품을 끊은 이를 '탐·진·치가 희박해진 자'(일래과의 다른 이름, 본권 첫머리를 참조할 것)라고 하고, 견소단의 3결과 수소단의 탐·진을 끊은 자를 불환과라고 한 것은 바로 무루단(견도)과 유루단(수도)이 상잡하여 일래과와 불환과를 성취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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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않기 때문에 역시 또한 사문과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96)
  이 같은 '사문의 본성' 즉 사문성(沙門性)에 다른 명칭이 있는 것인가?
  역시 또한 다른 명칭이 있다.
  어떠한 명칭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사문의 본성을
  역시 바라문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범륜(梵輪)이라고도 이름하니
  진실의 범(梵)이 굴린 것이기 때문이다.
  所說沙門性 亦名婆羅門
  亦名爲梵輪 眞梵所轉故
  
  이 중에서도 오로지 견도만을
  설하여 법륜(法輪)이라고 이름하니
  신속함 등이 바퀴와 유사하며
  혹은 바퀴살 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於中唯見道 說名爲法輪
  由速等似輪 或具輻等故
  
  논하여 말하겠다. 즉 앞에서 설한 참된 사문의 본성을 경에서는 또한 역시 바라문성(婆羅門性, brahmanya)이라는 이름으로 설하고 있으니,97) 능히 온
  
  
96) 사문과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대로 목숨을 마치지 않고, 반드시 다시 획득한 후 비로소 목 숨을 마치게 된다.(『대비바사론』 권제61, 한글대장경120, p.256) 즉 죽은 자의 물건에 왕의 도장이 찍히면 더 이상 그것을 수집한 사람의 물건이라고 이름하지 않듯이 비록 유루단일지라도 무루단의 득이라는 도장이 찍힌 것이기 때문에 역시 '사문과'라고 이름할 수 있다.(『현종론』 권제32, 앞의 책, p.383)
97) 주89)의 「마읍경(馬邑經)」, "무엇을 범지(梵志)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악과 불선의 법과 온갖 누(漏)의 더러움과, 미래 존재의 근본과 번뇌의 뜨겁고 괴로운 과보와 생로병사의 원인이 되는 것에서 멀리 떠난 이러한 이를 범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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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 번뇌를 견제(遣除)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라문성을 역시 또한 범륜(梵輪)이라고도 이름하니, 이는 바로 진실된 범왕의 힘에 의해 구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부처님은 무상(無上)의 범덕(梵德)과 상응하는 분(즉 무상의 보리도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만을 유독 '범'이라고 이름해야 하는 것으로, 계경에서도 "부처를 설하여 역시 또한 '범'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또한 '적정(寂靜)'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또한 '청량(淸凉)'이라고도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98)
  그리고 이러한 범륜 중에서 오로지 견도에 의거하여 세존께서는 어떤 곳에서 그것을 설하여 법륜(法輪)이라고 이름하셨는데,99) 마치 세간의 바퀴가 신속함 등의 특징을 갖듯이 견도도 그와 유사하기 때문에 법륜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견도가 어떻게 그것과 서로 유사하다는 것인가?
  신속하게 작용[速行]하는 것 따위가 그 같은 세간의 바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견제(見諦)의 도는 [전륜성왕의 바퀴처럼] 신속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며, 버리고 취함이 있기 때문이며, 아직 항복시키지 않은 것을 능히 항복시키기 때문이며, 이미 항복한 것을 진압하기 때문이며, 위아래로 회전하기 때문으로, 이러한 다섯 가지 특징을 갖춘 것이 세간의 바퀴와 유사한 것이다.100)
  이에 대해 존자 묘음(妙音)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세간의 바퀴가
  
  
  
98) 즉 말없이 고요[寂默]하고 텅 비어 숙연한 이를 '범'이라고 이름하는데, 부처님은 바로 이러한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범'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으며, 이미 스스로 깨닫고서 다른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것(사문성)을 굴려 그들에게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범륜'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현종론』 권제32, 앞의 책, p.385)
99) 『잡아함경』 권제15 제379경(대정장2, p.104상). 일명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여기서 부처님께 서는 교진여 등에게 4성제의 법륜을 세 번 굴리셨다.
100) '빠르게 작용한다'고 함은 15찰나에 4제를 현관하는 것을 말하며, '버리고 취한다'고 함은 4제·8부소단이나 무간도와 해탈도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을, '아직 항복하지 않은 것을 항복시킨다'고 함은 무간도로써 번뇌를 끊는 것을, '이미 항복한 것을 진압한다'고 함이란 해탈도로써 번뇌를 끊는 것을, '위아래로 굴러가는 것'이란 욕계의 고제와 상 2계의 고제, 욕계의 집제 등의 관지(觀智)를 교대로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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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큇살 등의 상을 갖는 것처럼 8지(支)의 성도도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바퀴[輪]'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를테면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근(正勤)·정념(正念)은 세간의 바퀴의 바퀴살과 유사하고,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은 바퀴통과 유사하며, 정정(正定)은 바퀴테와 유사하다. 그래서 법륜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오로지 견도만이 법륜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안 것인가?
  교진나(憍陳那, Kaundinya) 등에게 견도가 생겨났을 때 '이미 올바른 법륜을 굴렸다'고 설하여 말하였기 때문이다.101)
  [거기서] 무엇을 일컬어 3전(轉) 12행상(行相)이라고 한 것인가?
  '이것은 고성제이다', '이것은 고성제임을 마땅히 두루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고성제임을 이미 두루 알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일컬어 3전이라고 한다. 또한 이와 같은 것을 하나하나 굴릴 때마다 각기 별도의 안(眼, caksus)·지(智, jnana)·명(明, vidya)·각(覺, buddhi)을 낳게 되니, 이것을 설하여 12행상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3전 12행상은 각각의 제(諦)마다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그 수가 동일하기 때문에 다만 3전 12행상이라고 설하였을 뿐이니, 마치 2법(法)·7처선(處善) 등으로 설하는 것과 같다.102)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3전은 순서대로 견도와 수도와 무학도의 세 가지를 나타내는 것이니,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설하는 바는 이와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3전 12행상은 오로지 견도만이 아니거늘 어떻게 오로지 견도에 대해서만 법륜이라는 명칭으로 설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마땅히 이러한 3전 12행상과 관계된 [일체의] 법문을 일컬어 법륜이라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가히 정리(正理)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101) 주99)의 『잡아함경』 참조.
102) 즉 6근과 6경이 합해져 12처가 되지만 각기 여섯 가지의 근과 경이 상대하는 법이기 때문에 '2법'이 라고도 한다. 또한 7처선이란 5온 각각을 고·집·멸·도·애미(愛味)·과환(過患)·출리(出離)로 관하는 것 이기 때문에 35처선이 되지만, 7이라는 수가 동일하기 때문에 다만 '7처선'이라고 한다. 이처럼 3전 12행상도 각각의 제에 적용할 경우 12전 48행상이 되지만, 그 수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컫는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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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것이다. 즉 어찌하여 3전인가 하면 세 번을 돌아가며 굴렸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12행상인가? 세 번 돌아가며 4성제를 거쳤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바로 고(苦)이다', '이것은 바로 집(集)이다', '이것은 바로 멸(滅)이다', '이것은 바로 도(道)이다', '이것은 마땅히 두루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영원히 끊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작증(作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두루 수습(修習)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두루 알았다', '이것은 이미 영원히 끊었다', '이것은 이미 작증하였다', '이것은 이미 수습하였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굴렸다'고 일컬은 것인가?
  이(3전 12행상)에 따른 법문이 다른 상속신(즉 교진나)으로 옮겨가 그 뜻을 이해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며, 혹은 온갖 성도가 모두 법륜으로서 교화될 유정의 몸 속으로 굴렀기 때문이며, 다른 상속신에게 견도가 생겨났을 때 이미 첫 번째 굴림이 끝났기 때문에 '[법륜을] 이미 굴렸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103)
  어떤 사문의 과보는 어떠한 계(界)에 의지하여 획득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는 욕계에, 뒤의 것은 3계에 의지하는데
  상계에는 견도가 없고, 청문(聽聞)이 없으며
  하지를 연으로 하는 일이 없고, 싫어함[厭]이 없기 때문에
  
  
103) 보광에 따르면 이상은 경부(經部)의 힐난과 해명이다. 즉 3전 12행상을 모두 설함에 따라 그것과 관 계된 일체의 법문이 다른 상속신(즉 교진여 등)에 전이하여 그 뜻을 이해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교법의 굴림' 을 줄여 '굴렸다[轉]'고 한 것이다. 혹은 견·수·무학의 성도가 모두 법륜으로, 교화될 유정의 상속신에 전 생(轉生)하였기 때문에 '성도인 법륜이 굴러가 생겨났다'를 줄여 '굴렀다'고 한 것이다. 나아가 일체의 성도 가 법륜인데, 어찌하여 계경에서는 오로지 교진여 등에게 견도가 생겨났을 때만을 '법륜이 굴렀다[轉法輪]'고 하였는가 하면, 그것은 견도가 다른 상속신으로의 전생의 시작이며, 법륜의 최초이기 때문에 다른 두 가지 도 에 근거하지 않고 '처음[初]'의 도에 따라 그 명칭을 설정한 것일 뿐이다.(『구사론기』 권제24, 대정장41, p.371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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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울러 경증에 의해 [불환은 상계에서 획득되지 않는다].
  三依欲後三 由上無見道
  無聞無緣下 無厭及經故
  
  논하여 말하겠다. 앞의 세 가지 과(果)는 다만 욕계의 소의신에 의지하여 획득되며, 뒤의 아라한과는 3계의 소의신에 의지하여 획득된다.
  앞의 두 가지 과는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상계에 의지하여 획득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치상으로도 역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과(불환과)는 어째서 상계에 의지하여 획득되지 않는 것인가?104)
  이증과 교증에 의거하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이증이란 어떠한 것인가?
  상계의 소의신에 의지할 경우, 거기에는 견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 하더라도 견도를 떠나서는 초월하여 불환과를 증득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상계에는 필시 견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바야흐로 무색계에서는 올바로 듣는 일[正聞]이 없기 때문이다.105) 또한 그러한 계 중에서는 하지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106) 그리고 색계의 이생은 뛰어난 선정의 즐거움에 집착하고 또한 고수(苦受)가 존재하지 않아 싫어함[厭]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싫어함을 갖지 않고서는 능히 견도를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107)
  
104) 이는, 차제증자가 처음으로 욕계의 혹을 떠나 불환과를 획득하면 그것은 욕계의 몸에 의지한 것이지 만, 초월증자는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혹을 단진하였기 때문에 색계의 몸으로도 불환과를 획득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105) 즉 무색계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 등의 가르침을 청문(聽聞)할 수 없으며, 이러한 가르침을 듣지 않고서는 결정코 견도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106) 즉 견도는 먼저 욕계의 고제를 소연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하지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 에 무색계의 소의신은 견도의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107) 이를테면 욕계 중에서는 온갖 고수(苦受)가 있어 조그마한 즐거움이라도 낳기 위해서는 그것을 싫어 하고 배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색계에서는 뛰어난 선정의 즐거움에 탐착하며, 장수하고, 병이 없으며 , 탐욕이 없고, 그것을 배반하여 떠나려고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능히 견도에 들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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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증은 다시 어떠한가?
  계경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말하기를, "다섯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어 이곳(욕계)에서 통달하고 저곳(색계)에서 구경에 이르는 자이니, 이른바 중반 내지 상류반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통달'이란 말은 오로지 견도를 일컫는 말이니, 바로 원적(圓寂)을 증득하는 최초의 가행이기 때문이다.108) 즉 이 같은 경문으로 볼 때 상계에는 결정코 견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08) '통달'이란 4제에 통달하는 것으로서, 5종의 불환은 바로 욕계에서 그것을 통달하고, 색계에 이르러 구경의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곧 계경에서 색계에서 통달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는 견도가 존 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