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종경록 제11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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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1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제도할 대상인 근기도 한량없고 제도하는 주체인 법도 그지없어서 5행(行)의 문을 세워 어질고 어리석음의 길을 널리 열고 8교(敎)의 그물을 펴서 인간과 천상의 고기를 두루 건지거늘 어찌하여 마음으로써 종(宗)을 나타내며 온갖 것을 능히 다스린다 하는가?
  [답] 방편에는 많은 문이 있어서 8교의 그물을 멀리 치고 근원 성품에 돌아감에는 둘이 없어서 한 마음의 종(宗)을 우뚝 세운다. 이 때문에 병행(病行)으로 성문(聲聞)을 화성(化城)에서 쉬게 하고 아행(兒行)으로 범부를 하늘 세계에 유치한다.
  겸하여 짝으로 거느리면서 머리 숙여 서로 다른 근기들을 위할 뿐이나 열어 보여 깨쳐 들면 일승의 도를 증득할 뿐이다. 마치 천 가지 처방이 모두 하나의 병을 다스리는 것처럼 만 가지 이치로 하나의 마음을 다 같이 나타내어 소견에 집착하고 문자에 따르면서 참된 법의 맛을 잃지 않게 함이니, 바라는 바는 마음을 연구하고 진리를 궁구하여 정각(正覺)의 근원을 얻는 것이다.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는 “한 마음의 5행은 바로 세 가지 진리의 삼매이다. 성행(聖行)은 곧 진제삼매(眞諦三昧)요, 범행(梵行)과 영아행(嬰兒行)과 병행(病行)은 곧 속제삼매(俗諦三昧)며, 천행(天行)은 곧 중도왕삼매(中道王三昧)이다”라고 했다.
  또 원교(圓敎)의 세 가지 삼매는 원만하므로 스물다섯 가지 유(有)를 깨뜨리고, 공(空)에 즉하기 때문에 스물다섯 가지 나쁜 업의 견사(見思)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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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뜨리며, 가(假)에 즉하기 때문에 스물다섯 가지 무지(無知)를 깨뜨리고, 곧 중(中)에 즉하기 때문에 스물다섯 가지 무명(無明)을 깨뜨린다. 곧 하나이면서 셋이요 곧 셋이면서 하나이다. 하나가 공하면 온갖 것이 공하고 하나가 가면 온갖 것이 가며 하나가 중이면 온갖 것이 중이기 때문에 여래행(如來行)이라 한다.
  또 여래의 방[如來室]은 법계의 인자한 선근의 힘[慈善根力]을 은연중에 훈습한 움직이지 않는 진제(眞諦)이므로 빛을 감추고 티끌과 때[塵垢]에 섞여서 병행의 자비로 그를 따르되 갖가지의 몸을 보여 마치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하고 갖가지의 법을 말하여 마치 미치광이처럼 어리석은 이처럼 한다.
  선행을 낼 근기가 있으면 영아행의 자비로 그를 따르되 너울너울 춤을 추듯 나무 소가 잎을 흩날리듯 하며, 공에 들 근기가 있으면 선행의 자비로 그를 따르되 모양이 흉측한 똥 그릇을 가진 듯 한다. 가(假)에 들 근기가 있으면 범행의 자비로 그를 따르되 인자하고 착한 뿌리와 힘으로 사자 평상에 쭈그리고 앉고 보배 책상에서 발을 받치며 장사꾼이 다른 나라를 두루 드나들면서 어디서나 돈을 버는 이러한 일들을 보이며, 중(中)에 들 근기가 있으면 천행의 자비로 그를 따르되 마치 준마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곧장 길을 가며 멈춤이 없는 것같이 한다.
  그러므로 앞도 없고 뒤도 없으며 함께하지도 않고 따로따로하지도 않으며, 분별하는 법이 없고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고요히 사라진 모양임을 설명한다.
  원교(圓敎)로 뭇 근기에 맞춤은 마치 아수라의 거문고와 같으며, 만약 점교(漸敎)의 근기면 이끌어서 원교에 들게 함은 마치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만약 돈교(頓敎)의 근기면 이끌어서 원교에 들게 함은 마치 지금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니, 원교에 들어가 똑같이 증득하면 다시는 차별이 없다.
  별교(別敎)와 원교에 처음 드는 문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자하고 착한 뿌리와 힘으로 점교와 돈교의 사람에게 이러함을 보게 한다.
  이 한 마음의 법문을 말하되 가로로도 통하고 세로로도 통하여 항하 모래알같이 많은 이치를 다 포섭했기 때문에 총지(總持)라 하나니, 만법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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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宗)이 되며 나아가 위없음이라 일컫는다.
  만약 일과 행만을 논한다면 부처의 본종(本宗)을 잃는다. 마치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에서 “왕자가 범의 먹이가 되고 시비왕(尸毘王)이 비둘기를 대신하여 살을 준 것은 모두 부모가 끼쳐 준 몸을 버린 것이요, 자기 몸은 버린 것이 아니다. 자기 몸이란 법 성품의 진실한 모양이 그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석론(釋論)』에서 말하였다.
  “지계(持戒)는 가죽이 되고 선정은 피가 되며 지혜는 뼈가 되고 미묘하고도 착한 마음은 곧 골수가 된다. 남을 위하여 계율을 말하여 죄를 능히 막고, 복을 모양이 없이 가장 으뜸가게 닦아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지닌 것도 아니고 범한 것도 아닌 이는, 바로 자기의 가죽을 베푼 것이다.
  모든 선정과 신통 변화를 말하면서 멸진정(滅盡定)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위의를 나타낸 이는 바로 자기의 피를 베푼 것이며, 법을 해설하여 모두가 일체지(一切智)의 자리에 이르게 하면 바로 자기의 뼈를 베푼 것이요, 보시와 인욕 등은 바로 살일 것이며, 심히 깊은 법의 모양과 모든 부처의 수행하는 곳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갈 곳조차 소멸된 미묘한 중도를 말한 이는 바로 자기의 골수를 베푼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굶주린 중생들을 배부르게 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음식이겠는가? 그 밖의 음식이란, 바로 인간ㆍ천상과 2승의 지계의 가죽과 선정의 피와 지혜의 뼈며 참된 진리의 골수일 뿐이니라.”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기를 “그 밖의 깊은 법 중에서 보여 주고 가르쳐 주고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이치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법문을 말할 수 있는 이는 바로 부처의 참 마음을 통했으므로 자기의 골수를 베푼 것이리라.
  또 이 한 마음의 종(宗)이란 만약 온전히 분간된 문[全揀門]이라면 마음은 온갖 것이 신성하여 독립한 것이 아니며, 만약 온전히 거둔 문[全收門]이라면 온갖 것이 곧 마음이요 미묘한 체성이 두루한 것이니, 만약 거둔 것도 아니고 분간한 것도 아니라면 막고 비춤[遮照]이 둘 다 없어지고 경계와 지혜가 함께 공(空)하며 이름과 뜻이 쌍으로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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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기 어려운 묘한 재주로서 기왓장과 조약돌을 다루어서 황금을 만들고 지음 없는 신통으로 강물을 휘저어 타락을 만들며 변화가 자재하고 숨거나 나타남이 때를 따르며 마르기도 하고 펴기도 하며 같게 할 수도 있고 다르게도 할 수 있으리니, 실로 능히 다스림의 묘함이거늘 무슨 병인들 고치지 않겠으며 교묘히 건너는 문이거늘 어느 근기인들 이르지 않겠는가?
  마음의 때를 씻어 없애고 의심 뿌리를 뽑아내면, 말마다 모두 본심에 계합되고 낱낱 모두가 참 성품에 함입되며 법과 법이 금강의 구절이요 티끌과 티끌에 비밀문을 갖추리라.
  『입법계체성경(入法界體性經)』에서 문수가 “모든 법의 성품은 무너지지 않나니, 그러므로 금강의 구절이라 한다”고 한 것과 같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약 부처님 법에 있어서/그 마음의 평등함을 깨달으면/둘이라는 생각이 앞에 나타나지 않아/당장에 난사위(難思位)를 밟게 되리라.”
  『승천왕반야경(勝天王般若經)』에서 말하였다.
  “보살마하살은 온갖 경계에서 한 법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나니 수행이 이러한 지바라밀(智波羅蜜)은 2승과 외도로서는 가릴 수 없다. 지혜로써 관찰하므로 처음 발심으로부터 열반에 들기까지 모두 다 분명히 알아서 하나의 법으로써 온갖 경계를 알며, 온갖 경계가 바로 하나의 경계이다. 왜냐 하면 여여(如如)하여 하나이기 때문이요, 내가 능히 닦는다는 것과 닦을 바의 법을 보지 않는데 둘이 없고 따로도 없어서 제 성품이 떠났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통달한 지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사사익경(思益經)』에서 말하였다.
  “망명(網明)이 범천(梵天)에게 말하였다.
  ‘이 5백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대는 그들을 위하여 방편을 지어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이 법의 문에 들어가 믿고 이해함을 얻어서 모든 삿된 소견을 여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범천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가령 떠나가게 하여 항하 모래알같이 많은 겁이 된다 하여도 이러한 법의 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허공을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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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허공을 버리고서 도망한다 하여도 그 닿아 있는 곳이 허공을 여의지 않은 것처럼, 이 비구들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멀리 떠나간다 하더라도 공(空)의 모양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양 없는 모양을 벗어나지 못하며 지음 없는 모양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한 사람이 허공을 찾느라고 이리저리 달려 다니면서 는 허공을 얻고 싶다. 나는 허공을 얻고 싶다>라고 말하면서도, 이 사람은 허공이라는 이름만을 말할 뿐 허공을 얻지 못했고 허공 안을 다니면서도 허공을 보지 못한 것처럼, 이 비구들 역시 그와 같아서 반을 얻고 싶다>고 하고 열반 안을 다니면서도 열반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열반이란 이름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허공이 이름뿐이요 취하거나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열반도 그와 같아서 이름만이 있을 뿐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도 온갖 믿지 않은 중생이나 삿된 소견을 지닌 외도가 한갓 싫증내어 여의려 하고 잘못 스스로가 허망하게 마지막을 구하는 것은, 한 마음 자리 안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밀엄경(密嚴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치 밥의 한 알이 퍼지면/그 밖의 밥알도 알 수 있는 것처럼/모든 법 또한 그러하여서/하나를 알면 저것까지 알게 된다.
  마치 타락을 뚫어서 맛을 볼 때/손가락 끝으로 맛을 보는 것처럼/그와 같아서 모든 법 성품도/하나로써 자세히 살펴야 한다.”
  또 『능가경(楞伽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치 거울 속에 나타나는 형상이/보이기는 하면서도 있는 것이 아닌데/허망한 생각인 거울 속에서/어리석은 범부가 둘이 있다 봄과 같네.”
  『법집경(法集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해회(海會)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열반을 보기 원하면 고요히 사라진 마음을 허망하게 분별하는 줄로 보아야 하리니, 이와 같은 곳에서 열반을 얻어야 바로 훌륭하고 묘한 법의 쌓임[勝妙法集]이라 할 것입니다.’”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의 「관심품(觀心品)」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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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문수사리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아서 묘덕(妙德) 등의 5백 장자들에게 는 너희들을 위하여 심지(心地)의 미묘한 법문을 펴 연설하리라>고 하신 것을, 저는 이제 여래에게 여쭙겠습니다. 무엇을 심(心)이라 하며, 무엇을 지(地)라 합니까?’
  박가범(薄伽梵)께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요, 때[垢] 없는 대성이신 문수사리 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선남자여, 이 법은 시방 여래의 가장 훌륭한 비밀한 심지 법문이라 하며, 이 법은 온갖 범부가 여래 지위에 드는 단박에 깨치는 법문이라 하며, 이 법은 온갖 보살이 큰 보리에 나아가는 진실하고도 바른길이라 하며, 이 법은 세 세상의 모든 부처님이 스스로 법의 즐거움을 받는 미묘한 궁전이라 하며, 이 법은 온갖 이롭게 할 유정들을 위한 그지없는 보배 광이라 하느니라.
  이 법은 모든 보살들을 이끌어서 색구경(色究竟)의 자재한 지혜 처소에 이르게 하며, 이 법은 보리수에 후신의 보살들을 이끌어 나아갈 진실한 길잡이니라.
  이 법은 세간과 출세간의 재산이 마치 마니보처럼 중생의 원을 만족하게 비 내릴 수 있으며, 이 법은 시방과 3세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내는 근원이며, 이 법은 온갖 중생들의 모든 악업의 과보를 소멸시키며, 이 법은 온갖 중생들이 원하고 구하는 바 도장[印]을 주며, 이 법은 일체 중생들의 생사의 험난함을 제도하며, 이 법은 모든 중생들의 고통 바다의 파랑을 쉬게 하느니라.
  이 법은 괴로움 받는 중생의 위난을 능히 구제하며 이 법은 온갖 중생들의 죽고 늙고 병드는 바다를 능히 마르게 하며, 이 법은 모든 부처가 될 인연의 종자를 잘 출생시키며, 이 법은 나고 죽는 오랜 세월 동안의 큰 지혜의 횃불이 되어 주며, 이 법은 네 가지 마군의 병사들을 깨뜨리는 갑옷이 되느니라.
  이 법은 바로 용맹스런 군사가 싸워서 이기게 된 기(旗)이며, 이 법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법의 바퀴이며, 이 법은 바로 가장 훌륭한 법의 당기이며, 이 법은 바로 치는 큰 법북이며, 이 법은 바로 부는 큰 법소이며, 이 법은 바로 큰 사자왕이며, 이 법은 바로 큰 사자의 외침이며, 이 법은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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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의 큰 대성왕이 바른 법으로 잘 다스리면서 순종하는 왕에게는 큰 안락을 얻게 하고 어기는 왕에게는 죽음을 당하게 함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세 세계 안에서 마음이 주인이니, 마음을 잘 살피는 이는 마지막에 해탈하고 잘 살피지 못한 이는 마지막에 침몰하느니라.
  중생의 마음은 마치 큰 대지(大地)의 5곡과 5과(果)가 대지로부터 나는 것처럼, 이와 같아서 마음의 법도 세간ㆍ출세간과 선악의 다섯 갈래며 유학ㆍ무학ㆍ독각ㆍ보살 및 여래를 내는 것이니, 이런 인연으로 3계는 마음일 뿐이며 마음[心]을 땅[地]이라 하느니라.
  온갖 범부들이 착한 벗을 친근하여 심지의 법을 듣고서 이치대로 관찰하고 설명대로 수행하며 자신도 이롭게 하고 남을 가르치면서 찬탄하며 위로한다면,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두 가지 장애[二障]를 능히 끊고 뭇 행이 속히 원만하여 빠르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그 때 대성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아서 마음만의 법을 가져 세 세계의 주인이라 하여 마음의 법은 원래 티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거늘, 어찌하여 마음의 법이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물드는 것입니까? 3세의 법에서 어느 것을 마음이라 합니까? 과거의 마음은 이미 소멸하였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이르지 못했으며, 현재의 마음도 머무르지 않아서 모든 법의 안 성품에서도 얻을 수 없고 모든 법의 바깥 모양에서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법의 중간에서도 도무지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 법은 본래 형상이 없고 마음 법은 본래 머무는 곳이 없어서 모든 여래조차도 오히려 마음을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 마음 법을 볼 수 있겠나이까. 온갖 모든 법은 망상으로부터 나며, 이런 인연 때문에 지금 세존께서도 대중들을 위하여 세 세계는 마음일 뿐이라고 말씀하시옵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가엾이 여기셔서 사실대로 설명해 주소서.’
  그 때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물은 것과 같아서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은 본래 성품이 공(空)하고 고요하나니, 나는 여러 가지 비유로 그의 이치를 밝히리라. 선남자여, 마음은 마치 환술의 법과 같나니 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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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갖가지의 생각을 내며 고락을 받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물 흐름과 같나니 생각생각에 생멸하면서 전세ㆍ후세에 잠시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큰 바람과 같나니 한 찰나 동안에도 방소를 두루 돌아다니기 때문이니라.
  마음은 마치 등불의 불꽃과 같나니 여러 개가 어울려서 나게 되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번개 빛과 같나니 잠깐 동안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나니 객진번뇌(客塵煩惱)에 가리어지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원숭이와 같나니 5욕(欲)의 나무에 노닐면서 잠시도 멈추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나니 세간의 갖가지 물질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심부름꾼과 같나니 모든 번뇌에게 부림을 당하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혼자 가는 것과 같나니 둘째가 없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국왕과 같나니 갖가지 일을 일으킴에 자재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이 말한 바의 심ㆍ심소법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고 중간도 없으며, 모든 법 중에서 찾아도 얻을 수 없고 과거ㆍ미래ㆍ현재에서도 얻을 수 없으며, 세 세상을 초월하여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마음에 품은 염착은 허망한 인연으로부터 나타나고 인연은 제 성품이 없으며, 심성은 본래 공(空)하여 이러한 공의 성품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도 않느니라.
  본래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곳도 없으며 멀리 여의지도 않고 멀리 여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이와 같은 마음들은 무위(無爲)와도 다르지 않고 무위의 체성은 마음 등과도 다르지 않나니, 마음 법의 체성은 본래 말할 수가 없고 마음 법이 아니라는 것도 말할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만약 무위가 바로 마음이라면 곧 단견(斷見)이라 하고 만약 마음 법을 여의면 바로 상견(常見)이라 하나니, 두 모양을 영원히 여의고 두 치우침에 집착하지 않고 깨친 이라야 참 진리를 보았다고 하느니라.
  참 진리를 깨친 이를 성현이라 하며, 온갖 성현은 성품은 본래 공하고 고요하므로 무위 법 안에서 계율을 지니거나 범함이 없고 작고 큼도 없으며,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법이 없고 고통도 없고 안락도 없으며,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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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의 제 성품은 때[垢]가 없어서 상ㆍ중ㆍ하의 차별된 모양도 없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이 무위법의 성품은 평등하기 때문이며 마치 뭇 강물의 흐름이 바다 속에 들면 모두 동일한 맛이 되고 따로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때 없는 성품은 바로 견줄 데 없으며 나를 멀리 여의고 내 것을 여의었으며, 이 때 없는 성품은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며, 이 때 없는 성품은 바로 첫째가는 이치로서 그지없이 사라진 모양이고 체성이 본래 생기지 않았으며, 이 때 없는 성품은 항상 머물러서 변하지 않은 가장 훌륭한 열반으로서 나요 즐겁고 깨끗하기 때문이며, 이 때 없는 성품은 온갖 것을 멀리 여의고 평등한 체성이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약 어떤 선남자거나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자 하면, 일심으로 이와 같은 심지의 관법(觀法)을 닦아 익혀야 하느니라.’”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물었다.
  “‘반야바라밀이 바로 보살의 첫째가는 도[第一道]요, 한 모양은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 갖가지로 말하는 도이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였다.
  ‘이 도는 모두가 하나의 도안에 듭니다. 이른바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처음 배울 적에는 갖가지 구별이 있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동일하여져서 차별이 없습니다. 마치 겁(劫)이 다하여 불이 탈 적에 온갖 있는 것은 모두가 허공과 같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 큰 수행을 어기고 진보의 자리를 끊으며 이 방편을 여의게 된다면, 성불할 기약조차 없다. 그리고 처음 도를 얻고부터 마지막의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중에서 능히 교화하는 이와 교화할 바의 스승과 제자며 처음과 나중ㆍ근본과 끝이 때를 같이 하고 기응(機應)이 한 즈음이어서 모두가 다 같이 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태교(台敎)에서 말하였다.
  “심왕(心王)은 곧 여래요 심수(心數)는 바로 제자인데, 중생은 찰나마다 계속하면서 밤낮 언제나 한량없는 백천의 중생을 낼 뿐이다. 심왕의 열 가지 수[十數]가 삿되면 법이 삿되어서 악마의 권속이 되고 심왕의 열 가지 수가 바르면 온갖 법이 바르게 된다. 지금의 도를 배우고 수행하는 사람은 이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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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잘 터득해야 한다.
  만약 지혜를 닦는다면 속에서 지혜만을 일으켜 자주자주 생각하고 분별하여야 하며, 이로 인하여 반쯤의 지혜와 만족한 지혜를 내어 자신도 행하고 남도 교화하면 곧 사리불(舍利佛)이 쌍수(雙樹)를 장엄한 것과 같으리라.
  이와 같이 하나하나를 심수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에서 보면 10대 제자를 교화한 낱낱의 행이 마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약 심성을 자세히 살피면 바로 이것이 불성을 보고 큰 열반에 머무는 것이요, 곧 여래와 같아져서 사라(娑羅) 쌍수를 완전히 장엄한 것이다. 만약 관행(觀行)하는 마음이 밝아지면 심왕을 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법왕이며, 심수는 곧 큰 제자이다.”
  쌍수를 장엄한다는 뜻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과 같다.
  [문] 천태종(天台宗)에서 관심(觀心)의 말이 치밀한데 소(疏)에서 어찌 마음을 다하겠는가?
  [답] 『환원집(還原集)』에서 이르기를 “『���법화경(法華經)』에서 ‘어느 경을 받아 지녀 행하며, 어느 부처님의 길을 찬탄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고 했다.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색의 경론[色經論]은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경론(經論)이다”고 했다. 만약 스스로 뜻과 말을 따른다면 역시 안(眼)의 경론은 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ㆍ탐(貪)ㆍ진(瞋)ㆍ치(癡)의 경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경에서 말하기를 “눈이 남이 없고[無生] 제 성품이 없는 줄 알면, 공(空)하여 고요히 사라져서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감관은 이 경과 같아져서 경은 이 법일 뿐이요, 눈이 공한 법임을 알면 곧 눈의 경론일 뿐이며, 공한 법이 바로 이것일 뿐이다.
  경론의 모든 계(界)도 역시 그러하므로 도리는 반드시 진실 되게 비추어야 하며 헛된 말로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데서 받아 지니는 음(陰)ㆍ계(界)ㆍ입(入)은 어느 경을 행하게 되는가? 색 위에서 지혜를 내면 바로 이는 색경을 받아 행하며, 내지 온갖 곳에 따라 깨치면 바로 이는 온갖 처소의 경[一切處經]을 받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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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다.
  이 법[乘]은 3계 안에서 나오고 살바야(薩婆若) 안까지 이르러서 머물러 동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그의 뜻이 된다.
  만약 믿음이 견고하고 생각이 깊으면 『법주경(法住經)』에서 말한 바와 같다. 법주와 같다는 것은, 마치 저 여섯 감관의 성품이 공한 법(法)인데도 임시로 머무른다[住]고 말함과 같다는 것이다.
  ‘어느 부처님의 길을 찬탄하리까’ 함은, 『영락경(瓔珞經)』에서 말하기를 “진실한 지혜 성품이 법신(法身)이 된다”고 했으므로, 만약 진실한 성품을 보게 되면 바로 이것이 법신불을 찬탄하는 것이요, 몸에 진실한 성품이 있음을 듣고 곧 음ㆍ계ㆍ입에서 공삼매(空三昧)와 6도(道)와 7각(覺)과 3현(賢)과 10지(地)와 묘각(妙覺) 등을 얻어서 앞의 공을 갚으면 바로 이것이 보신불(報身佛)을 찬탄하는 것이며, 앞의 모든 법을 얻고서 중생들에게 응하는 몸이면 바로 이것이 응신불(應身佛)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몸 안에서 한 생각으로 세 부처를 보는 것이지만, 중생들은 자세히 살피지 않으므로 비록 가까이 있다 해도 보지 못한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나옴[出]이 없는 나옴을 바로 부처의 나옴이라 하고, 선(禪)이 없는 선을 바로 바른 선이라 하며, 벗음[脫]이 없는 벗음을 바로 바른 벗음이라 한다.”
  『마역경(摩逆經)』에서 말하였다.
  “악마가 문수에게 속박을 풀어 주기를 청하자 문수가 말하였다.
  ‘너를 속박한 사람이 없건마는 그대 스스로의 생각으로 속박되었느니라.’
  악마가 이내 말하였다.
  ‘나는 마침내 영원히 해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에서 말하기를 “본래 속박이 없거니 그 누구에게 풀어 주기 바라겠느냐? 만약 법계로 하여금 얽매임이 있게 하면 나는 이내 풀어 주리니, 이것은 진실도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아니한다”라고 했으니, 마음이 행하는 가운데서 구해야 한다.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이 경을 말하지 말라. 삿된 소견을 내어 약이 도리어 병이 될까 두렵다.
  여읠 줄 알면 법이라 하고, 법을 깨달으면 부처라 한다. 여읠 줄 안다 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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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 성품을 여의는 것이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 역시 스스로 여의는 것이다.
  한 성품이 공(空)한 법에서부터 거짓으로 삼보(三寶)라는 이름이 나온다. 황벽(黃蘗) 화상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한 법에 집착했다 여기면, 도장[印]은 벌써 이루어졌다. 도장이 존재[有]에 집착하면 사생(四生)이라는 글이 나오게 되고, 도장이 공에 집착하면 곧 공 경계의 생각이 없는 글이 나타난다. 현재는 결정코 온갖 물건에도 도장이 찍히지 않은 줄 알 뿐이니, 이 도장은 허공과도 동일하지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허공은 공하지 아니하고 본래의 도장은 있지 아니하다. 시방 허공의 세계서 모든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함은 마치 번개가 한 번 번쩍한 것같이 보며, 온갖 꿈틀거리는 것은 마치 메아리가 한 번 울리는 것같이 보라. 천경(千經) 만론(萬論)이 너의 한 마음을 해설할 뿐이요, 온갖 법은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여 바로 그것이 큰 열반의 결과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도의 결과가 만족해지면 보리의 뚜렷한 꽃이 피고 세계가 생기게 되나니,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보리의 결과가 원만해지면 제 마음의 꽃망울이 생기고 세계의 인연이 일어나면 식(識)의 물결이 시작된다.
  옛날 해동(海東)의 원효(元曉) 법사와 의상(義相) 법사 두 분이 같이 당(唐)나라로 스승을 찾아오다가 밤이 되었는데 묵을 데가 없자 무덤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원효 법사는 목이 마르므로 물이 먹고 싶던 차에 마침 자리 곁에서 하나의 괸 물을 발견하였으므로 손으로 떠 마셨더니 아주 맛이 좋았다. 다음 날 보았더니 이것은 원래 시체에 괸 물이었다. 당장 그 때에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토해 버리다가 환히 크게 깨치고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3계가 마음일 뿐이요, 만법이 식일 뿐이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맛좋고 메스꺼움은 나에게 있고 실로 물에 있지 않음을 알겠구나”라고 하고, 마침내 옛날 살던 동산으로 돌아와서 성인의 가르침을 널리 홍포하였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것을 통달하지 않으면 단박에 놀아나는 마음이 쉬지 아니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책 상자를 걸머지고 배낭을 끌면서 3승(乘)의 학당을 널리 돌아다니고, 마음껏 스승을 찾고 벗을 찾으면서 법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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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방을 두루 참예하라. 만약 배움을 끊고 정신에 깃들려면 마지막에는 종경(宗鏡)으로 돌아와야 하리라.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보살로서 믿고 순종할 하나의 진실이냐 하면 보살은 일체 중생들이 모두가 하나의 도에 돌아간다 함을 분명히 아는 것이니, 하나의 도란 대승을 말하느니라.’”
  해석하여 보자.
  대승의 대(大)라 함은 곧 중생의 심성은 능히 포함하고 능히 두루한지라, 작기로 치면 속이 없어서 하나의 티끌조차 들일 수가 없지만 크기로 치면 바깥이 없어서 하나의 법도 포함하지 않음이 없다.
  승(乘)이라 함은 운반하고 싣는다는 뜻이어서 수행하는 사람을 곧장 살바야(薩婆若)의 바다에 닿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이 바다는 멀지 아니하고 마음 보배는 언제나 나타나 있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조벽(趙璧)이 귀중한 것 아니고 수주(隋珠)가 진귀한 것이 못된다. 선우(善友)는 한낱 몸을 창파(滄波)에다 띄웠고 변화(卞和)는 헛된 이름을 형수(荊岫)에다 전했다.
  만약 종경(宗鏡)에 들면 정신조차 까딱 않고 찰나 동안에 그 보배가 저절로 나타날 것이거늘, 어찌하여 법계를 두루 참예하고 총림(叢林)을 널리 돌아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직접 깨치는 때에, 실로 남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리라.
  한산자(寒山子) 시에 말하였다.
  “왕년에 일찍이 바다 속에 들어가/마니보를 찾기 위해 간절히 구하면서/용궁의 깊디깊은 비밀 광에 곧장 닿아/금문의 사슬 끊자 귀신들은 조심했네.
  용왕은 수호하며 몸속에 감추고서/서릿발의 보배 칼로 못 찾게 하므로/장삿꾼은 물러나와 [문]안으로 들어서자/명주(明珠)는 원래 나의 마음 끝에 있었네.”
  두순(杜順) 화상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그네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면서/산을 돌며 비탈에서 절을 하는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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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보살이 바로 이 분이거늘/어디서 아미타불 찾고 있을까?”
  석공(石鞏) 화상이 농주음(弄珠吟)에서 말하였다.
  “여의주(如意珠)인 큰 뚜렷한 거울에/그 속의 사람을 성품이라 부르는데/몸을 백억으로 쪼개도 나의 구슬의 몫은/본래부터 깨끗하고 지금도 깨끗하네.
  날로 쓰는 진주가 바로 부처이거늘/어찌하여 물건 따라 왔다갔다 수고할까?/숨고 나타남에 지금 두 모양 없으니/마주 대해 진주 보아 알 수 있겠느냐?”
  [문] 온갖 만법이 모두 유식(唯識)의 성품인데, 어찌하여 허망이 있고 진실이 있으며 물질을 세우고 공(空)을 세우면서 진속(眞俗)의 두 진리의 문과 성상(性相)이 쌍으로 통하는 도를 말하는가?
  [답] 삼라만상이 유심(唯心)의 영상으로 나타나되 모두가 근본 바탕이고, 차별된 자취로 나누되 모두 다 유식의 미묘한 성품이다.
  유식의 성품은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허망인 곧 변계소집(遍計所執)이요, 둘째는 진실이니 곧 원성실(圓成實)이다. 앞의 유식의 성품에서는 버릴 바[所遺]의 청정함이요, 뒤의 유식의 성품에서는 증득할 바[所證]의 청정함이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속이니 곧 의타기(依他起)요, 둘째는 으뜸가는 이치[勝義]이니 곧 원성실이다. 앞에서는 끊을 바[所斷]의 청정함이요, 뒤에서는 얻을 바[所得]의 청정함이다.
  또 상(相)은 곧 의타기이니 유위의 문을 갖추고, 성(性)은 곧 원성실이니 무루의 도에 통한다.
  또 물질은 곧 의타기의 모양이요 공(空)은 곧 원성실의 성품이니, 이것이야말로 허망ㆍ진실과 진제ㆍ속제와 성ㆍ상과 존재ㆍ공이어서 근원을 통하고 궁구하면 모두가 유식의 성품이다.
  자은(慈恩)이 말하기를 “식(識)의 성품과 식의 모양은 모두가 마음을 떠나지 않으며 심소와 심왕은 식을 주인으로 삼나니, 마음에 돌아가 모양이 없어지면 통틀어 유식이라 말한다”고 했다. 유(唯)는 경계가 있다 함을 막음이니 있다 함에 집착하면 그 참된 것을 잃고, 식(識)은 마음이 공하다 함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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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림이니 공에 침체하면 그 진실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불심(佛心)은 바다와 같아서 하나의 흐름도 들이지 않음이 없고, 불심은 거울과 같아서 하나의 형상도 내지 않음이 없으며, 불심은 구슬과 같아서 하나의 보배도 비내리지 않음이 없고, 불심은 땅과 같아서 하나의 종자도 이루지 아니함이 없다.
  만 가지 형상은 법신에서 나타나고 모든 이치는 반야에서 나나니, 하나의 문장과 하나의 글자며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티끌이 모두가 둘이 없는 법문에 들며 모두 다 부사의의 해탈에 머무른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큰 바다에 머무르면 뭇 흐름을 하나로 묶고, 한 맛에 머무르면 여러 가지 맛을 한데 모은다.”
  『무행경(無行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보리가 아니요/부처는 부처가 아니다./만약 이 한 모양을 알면/바로 세간의 길잡이 되리라.”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 한 끝의 모양 없음의 근원을 알면 밝은이가 되고 길잡이가 되고 스승이 되고 장인(匠人)이 되어서 널리 어리석은 중생을 구할 수 있으리니, 변화의 성[化城]에서 쉬지 않고 곧장 보배가 있는 곳에 가 닿으리라.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언제나 즐거이 적멸(寂滅)을 살피라./하나의 모양이며 둘이 없나니/그 마음은 더하거나 줄어지지 아니하고/한량없는 신통력을 나타내느니라”고 했다.
  또 『화엄경』 「출현품(出現品)」에서 말하였다.
  “‘불자야, 비유하면 큰 경책이 있는데 그 분량은 삼천대천세계만 하며 거기에 삼천대천세계의 일을 모두 다 쓰고 베끼는데 이러한 큰 경책들이 다시 삼천대천세계만큼 많은 것을 모조리 한 개의 티끌 속에다 넣어두며, 이 하나의 작은 티끌 속의 것처럼 온갖 작은 티끌 속에도 모두 그러하니라.
  그때 어느 한 지혜가 밝고 통달한 사람이 깨끗한 천안(天眼)을 두루 성취하였는데, 이 경책이 작은 티끌 속에 있는지라 중생들에게 조금도 이익이 없음을 보고서 생각하기를 가 정진의 힘으로써 저 작은 티끌을 깨뜨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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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책을 꺼내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해야겠다>고 한 뒤에, 이내 방편을 일으켜 저 작은 티끌을 부수고 이 큰 경책을 꺼내서 모든 중생을 널리 이익 되게 하였으며, 한 티끌의 것에서처럼 온갖 작은 티끌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였느니라.
  불자야,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한량없고 걸림 없이 일체 중생을 널리 이익 되게 할 수 있고 두루 갖추어서 중생들의 몸속에 있건마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망상에 집착하여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해서 이익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때 여래는 장애가 없는 깨끗한 지혜 눈으로 법계의 온갖 중생들을 널리 살펴보면서 말씀하셨다.
  ‘기특하고 기특하도다. 이 중생들이여, 여래의 지혜를 골고루 지니면서도 어리석고 미혹하여 모르고 못 보는구나. 내가 거룩한 도로써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망상의 집착을 여의어 스스로 몸속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님과도 다름이 없음을 볼 수 있게 하리라.’
  그리고는 이내 그 중생들에게 거룩한 도를 닦아 익히어 망상을 여의게 하고 망상을 여읜 뒤에는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를 증득하여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셨다.”
  해석하여 보자.
  대천의 경책이라 함은 곧 여래의 지혜요, 한 작은 티끌 속에 있다 함은 바로 모조리 일체 중생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며, 온갖 작은 티끌의 모두가 역시 그러하다 함은 바로 일체 법계의 중생들은 모두가 부처의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정의 티끌로 스스로 동떨어져서 안으로 비추지 못하고 공연히 금 창고에 매장해 놓고 억울하게 영대(靈臺)를 가리는 것이, 마치 다투다가 이마의 구슬을 빠뜨리고 취하여 옷 속의 보배를 모르는 것과 같다. 가리켜 주지 않으면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티끌을 부수어 책을 꺼내면, 항하 모래 만큼 많은 부처의 법이 하나의 마음속에서 환하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물이 아직 바다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짜지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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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나무가 아직 불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타지 아니하며, 경계가 아직 마음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평등하지 아니하다.
  종경(宗鏡)으로 거두기만 하면 만법이 모두 동일한 비춤이어서 시비(是非)가 함께 없어지고 역순(逆順)이 같은 데로 돌아가서, 한 마음도 부처 마음이 아님이 없고 한 일도 부처 일이 아님이 없으며 찰나 동안도 여래가 보리를 얻는 때가 아님이 없고 겨자씨만큼도 보살이 신명(身命)을 버릴 데가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선덕이 이르기를 “마음은 경계 밖이 아니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고, 경계는 마음 밖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고 했으니, 곧 마음이 경계이기 때문에 심히 깊고, 곧 경계가 마음이기 때문에 들어가기 어렵다.
  조(肇)법사가 이르기를 “현상[事]에 즉(卽)하면 다르지 아니함이 없고 공(空)에 즉하면 동일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위에 극진하고 아래를 다하나니, 다 같이 하나의 관(觀)으로써 평등해야 한다”고 했다.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마치 땅은 아무런 차별이 없어 풀과 나무가 여러 가지 있되, 여러 가지이면서 여러 가지가 없고 여러 가지가 없으면서도 여러 가지인 것과 같다. 또 마음에서 보며 법을 논하고 법에서 보며 마음을 논하는 것과 같이, 마음은 모두 수(數)가 있고 법은 모든 수가 없으며 마음은 법을 여의지 않고 법은 마음을 여의지 않으며 수가 없으면서 수요, 수이면서 수가 없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다시 진여(眞如)를 언설에 의하여 분별하면, 두 가지 이치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냐 하면,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마침내 진실을 나타내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제 체성이 있어서 무루(無漏) 성품의 공덕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공(空)이라 함은 본래부터 온갖 물들음의 법과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온갖 법의 차별된 모양을 여의고 허망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제 성품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님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 것이 아님도 아니며, 모양이 있거나 없거나가 다 같이 아니며 동일한 모양이 아님도 아니고 다른 모양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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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아니며 동일하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모양이 다 같이 아닌 줄 알 것이니, 통틀어 말하면 일체 중생이 망심으로 생각생각마다 분별하여 모두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고 한다. 만약 망심을 여의면 실로 공이라 할 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불공(不空)이라 함은 법의 체성은 공하여 망(妄)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곧 이 진심(眞心)은 항상 변하지 않고 깨끗한 법이 가득 찼으므로 불공이라 한다. 또한 취할 만한 모양도 없으니 생각을 여읜 경계는 증득해야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진여란 고석(古釋)에 이르기를 “허망한 보냄을 진(眞)이라 하고, 진리를 나타냄을 여(如)라 한다”고 했다.
  관(觀) 화상은 이 뜻을 떨어버리면서 말하기를 “법마다 진 아님이 없는데 어찌 보낼 만한 허망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진은 진이 아니다. 법마다 여가 아님이 없는데 어찌 나타낼 만한 진리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는 여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보낼 것도 없고 세울 것도 없는 비안립(非安立)의 진여이니, 이 해석은 아주 묘하다.
  그러므로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르기를 “진실로 취하거나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런 까닭에 같지 않다고 하였으니, 세우면 곧 취함이요 보내면 곧 버림이다. 이제 보낼 것도 없고 세울 것도 없으면 도는 저절로 깊이 알게 되거늘, 어찌 진과 망이 생각에 걸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백론(百論)』 서(序)에서 말하기를 “시들하여 의거할 데 없으면서도 현상은 진을 잃지 아니하고, 쓸쓸하여 붙일 데 없으면서도 진리는 절로 깊이 알게 된다.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도가 여기에서 나타나리라”고 했으니, 무심히 도에 계합하고 본체[理]와 현상[事]이 함께 통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또 진여의 제 모양은 생각을 여읜 경계뿐이면 있다ㆍ없다는 것으로써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르기를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님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 것이 아님도 아니며, 있거나 없거나 한 모양이 다 아니다”라고 하였다.
  왜냐 하면 만약 두 가지가 있다면 다 그것이라 말할 수 있거니와 이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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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이 곧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있는 것 밖에 없는 것이 있는 것과는 함께 할 수 없고, 이제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 밖에 있는 것이 없는 것과는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면 서로 어기어서 성립되지 아니하고, 함께 하지도 않고 성립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만약 결정코 있거나 없거나 함이 있다면 있고 없다는 것의 구비(俱非)의 글귀가 있음을 막으리니, 이제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거늘 어찌 없는 것이 아님이 있겠으며, 이제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거늘 어찌 있는 것이 아님이 있겠는가?
  때문에 쌍비(雙非)역시 고요하리니, 그러므로 사구(四句)가 없어진다고 하면 없어질 만한 글귀조차 없으며, 이 글귀가 없다 함을 분명히 알면 곧 진도 없어지리라.
  [문] 한 마음이 평등하여 본체[理]도 끊어지고 두루 원만하거늘, 어떻게 가르침의 안에서 또 모든 법의 다름을 말하는가?
  [답] 망정을 따라 다름을 말하므로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동일하며, 집착에 상대하여 동일함을 말하므로 비록 동일하다 하더라도 다르다. 동일함을 가지고 다름을 깨뜨리며, 다름을 가지고 동일함을 깨뜨리며, 비록 동일하고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다를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마치 “아들의 창을 잡고 아들의 방패를 찌른다”고 한 것과 같고, 또한 “도둑의 말을 타고 도둑을 쫓고 소리로 써 소리를 멈추게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아침에는 네 개요, 저녁에는 세 개씩[朝四暮三]이라 하여 원숭이들을 기쁘게 하고 수고롭게 바르고 물로 씻고 하면서 젖먹이를 알맞게 기른다”고 하나니, 모두가 이는 고개 숙여 근기의 알맞음[機宜]을 따르는 좋은 권도방편이다.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마음[神明]을 괴롭혀 하나로 만들면서도 그의 동일함을 모르는 것을 아침에 세 개[朝三]라고 말한다. 무엇을 아침에 세 개라고 하는가. 원숭이 부리는 사람이 여러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므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겠노라’ 하였더니 원숭이들이 기뻐했다. 이름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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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에 이지러짐이 없는데도 기뻐함과 성냄으로 효용을 삼나니 역시 그것을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주(注)에 이르기를 “네 개와 세 개씩으로 원숭이들은 망령되이 기뻐하거나 성을 내고 그름과 옳은 것으로 세간 사람들은 다투어 사랑하거나 미워하지마는 성인은 도리어 옳고 그름으로써 세간 사람의 옳고 그름을 멈추게 하고 원숭이 부리는 이는 또 네 개와 세 개를 가지고 원숭이들의 세 개와 네 개를 쉬게 했다. 달인(達人)이라면 동일한 것에서 어찌 마음을 그런 데에 괴롭히겠는가”라고 했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마치 다음과 같다. 여인이 한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젖먹이가 병을 앓자 이 여인은 조심하면서 좋은 의사를 찾았다. 좋은 의사가 와서 연유와 우유와 빙사탕의 세 가지로 약을 지어 주며 먹게 하면서 여인에게 말하였다.
  ‘아이가 약을 먹은 뒤에는 젖을 주지 말고 약이 다 소화된 뒤에야 주어야 합니다.’
  이 때 여인은 이내 쓴 것을 그 젖에다 바르고는 그 아이에게 말하였다.
  ‘나의 젖에는 독이 발라져 있으니 다시는 대지도 말라.’
  때문에 그 아이는 배가 고파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는 싶었으나 독한 냄새를 맡고 멀리 도망가 버렸다. 그 약이 다 소화된 뒤에야 어머니는 젖을 씻어버리고 아이를 부르며 먹이려 하였으나, 이 때 어린아이는 먹고 싶으면서도 먼저 독한 냄새를 맡았던 터라 오지 않으므로 어머니는 다시 말하였다.
  ‘네가 약을 먹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러 독을 바른 것이나 네가 약이 다 소화되었으므로 나는 벌써 다 씻어버렸다. 네가 와서 먹어 보아라.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그 아이는 맡아보고 나서야 점점 먹기 시작한 것과 같다.”
  경과 비유한 뜻을 배합하여 보자. 나 없음[無我] 등의 비유는 마치 독으로 바르는 것과 같고, 여래장을 말한 것은 아이를 불러서 먹게 하는 것과 같고, 때로는 나를 말하고 때로는 나 없음을 말한 것은 모두 근기에 맞추기 위해서이니, 마치 그 발랐던 것을 씻는 것과 같다.
  『의해(義海)』에서 “대경의 현상 모양은 다르되 그 자체는 법일 뿐이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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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다름이 없다”고 한 것과 같다.
  단지 법의 체성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다름에 즉하는 이치가 비로소 이루어짐은 체성을 잃지 않기 때문이요, 단지 대경의 현상은 차별된다는 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다르지 않음에 즉하는 이치가 비로소 이루어짐은 인연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이치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기이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다름이 없는 법에서 모든 법의 다름을 말할 수 있음은, 마치 삼라만상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스스로가 달라질 수는 없고 허망함이 비록 동일하기는 하나 스스로가 같아질 수는 없는 것과 같나이다”라고 했다.
  체성이 없기 때문에 법과 법이 언제나 생기고 작용이 없기 때문에 티끌과 티끌이 항상 고요한 것이니, 모두가 이는 세간에서 분별하는 중생들의 망정이다. 평등한 법안에서 스스로 차별을 내고 둘이 없는 모양의 곳을 향해 억지로 많은 가닥을 냄은, 마치 그림 그리는 이가 아득하게 높고 낮은 모양으로 되게 하는 것과 같고 또는 금공이 크고 작은 그릇 모양으로 두드려 내는 것과 같다. 만법의 체성은 언제나 비었는데, 자기의 마음에서 변할 뿐이다.
  『대장엄론(大莊嚴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비유하면 그림을 잘 그리는 이가/편편하기에 오목하고 뾰족하게 하는 것처럼/허망하게 분별함도 그와 같아서/없는 데서 능소(能所)를 나타내누나”라고 했다.
  마치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이가 편편한 벽에다가 오목하게 들어가고 뾰족하게 솟은 형상으로 잘 그려 놓아서 실은 높고 낮음이 없는데도 높낮이로 보이는 것처럼, 참이 아닌 데서 분별함도 그와 같아서 평등한 법계에서는 두 모양의 것이 없는데도 언제나 능소의 두 모양이 있는 것으로 보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어찌 쓸데없는 데서 두려워하겠는가? 제 마음이 변한 까닭이니, 마치 그림이 오목하고 볼록함은 제 손으로 말미암아 그려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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