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중아함경(中阿含經)

중아함경 제 49 권

通達無我法者 2008. 1. 2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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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아함경 제 49 권

 

 

  동진 계빈삼장 구담 승가제바 한역
  
15. 쌍품 제 1
  [이 쌍품에는 총 다섯 개의 경이 수록되어 있다. 이 후송(後誦)은 3품 반으로 되어 있으며, 총 36개의 소경이 수록되어 있다.]
  
  설지경(說智經)과 아이나경(阿夷那經)과
  구루(拘樓)에게 밝힌 성도경(聖道經)과
  동원(東園)에서 논한 소공경(小空經)과
  그리고 마지막엔 대공경(大空經)이다.
  187) 설지경(說智經) 제 1 [제 5 일송 후송(後誦)]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비구가 너희들에게 와서 그가 이미 얻은 지혜를 말하면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고 말하거든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는 마땅히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라. '그렇다'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현자여, 세존께서는 색성음(色盛陰 : 色取蘊) 각성음(覺盛陰 : 受取蘊) 상성음(想盛陰 : 想取蘊) 행성음(行盛陰 : 行取蘊) 식성음(識盛陰 : 識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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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蘊), 이 5성음(盛陰)에 대해 말씀하셨다. 현자여, 이 5성음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그것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물었을 때 만일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응당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색성음은 과(果)가 아니요, 공허한 것이며, 욕심 낼 것이 아니요,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의지할 것도 아니요, 변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줄을 알기 때문에 만일 색성음에 대해서 욕망이 있고 물듦이 있으며, 집착함이 있고 묶임과 묶임의 번뇌가 있으면, 그것을 없애고 욕심 내지 않으며 마음을 멸하고 쉬고 그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각 상 행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다. 또 식성음은 과(果)가 아니요, 공허한 것이며, 욕심 낼 것이 아니요,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의지할 것도 아니요, 변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줄을 알기 때문에 만일 식성음에 대해서 욕망이 있고 물듦이 있으며, 집착이 있고 묶임과 묶임의 번뇌가 있으면, 그것을 없애고 욕심 내지 않으며 마음을 멸하고 쉬고 그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안다.
  여러분, 나는 이 5성음(盛陰)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마땅히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현자여, 세존께서는 4식(食)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중생들은 그것으로써 살고 몸을 기르게 된다. 어떤 것이 그 넷인가? 첫째는 거칠거나 섬세한 단식( 食)이요, 둘째는 갱락식(更樂食)이요, 셋째는 의념식(意念食)이요,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현자여, 이 네 가지 음식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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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나는 단식에 대해서 만족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며,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해탈을 얻고, 다 해탈하여 마음에 전도됨이 없다. 그리하여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와 같이 갱락식과 의념식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식식에 대해서도 만족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며,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해탈을 얻고, 모두 해탈하여 마음에 전도됨이 없다. 그리하여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여러분, 나는 이 4식에 대하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마땅히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해야 하느니라.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현자여, 세존께서는 4설(說)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견견설(見見說)이요, 둘째는 문문설(聞聞說)이요, 셋째는 식식설(識識說)이요, 넷째는 지지설(知知說)이다. 현자여, 이 4설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되는가?'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나는 견견설에 대해서 만족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며,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해탈을 얻고, 모두 해탈하여 마음에 전도됨이 없다. 그리하여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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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대로 안다. 이와 같이 문문설 식식설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지지설에 대해서도 만족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으며,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 해탈을 얻고, 모두 해탈하여 마음에 전도됨이 없다. 그리하여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여러분, 나는 이 4설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마땅히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현자여, 세존께서는 안처(眼處) 이처(耳處) 비처(鼻處) 설처(舌處) 신처(身處) 의처(意處) 등 이 안[內]의 6처(處)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현자여, 이 안의 6처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되는가?'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나는 눈[眼]과 눈의 식[眼識]과 눈의 식으로 아는 법을 함께 알아 두 법을 다 알아 마쳤다. 여러분, 만일 눈과 눈의 식과 눈의 식으로 아는 법의 즐거움을 다하고 나서, 그것을 없애고 욕심 내지 않으며 마음을 멸하고 쉬고 그치면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또 뜻[意]과 뜻의 식[意識]과 뜻의 식으로 아는 법을 함께 알아 두 법을 다 알아 마쳤다. 여러분, 만일 뜻과 뜻의 식과 뜻의 식으로 아는 법의 즐거움을 다하고 나서 그것을 없애고 욕심 내지 않으며 마음을 멸하고 쉬고 그치면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없어져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여러분, 나는 안의 6처를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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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마땅히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현자여, 세존께서는 땅 경계[地界] 물 경계[水界] 불 경계[火界] 바람 경계[風界] 허공 경계[空界] 식 경계[識界] 등의 6계(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현자여, 이 6계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되는가?'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나는 땅 경계를 내 소유라고 보지 않고, 나는 땅 경계의 소유도 아니며, 땅 경계는 신(神)도 아니다. 그런데 이른바 3수(受)는 땅 경계를 의지하여 머무르고 식의 사자(使者)는 이를 집착한다. 그것을 없애고 욕심 내지 않으며 마음을 멸하고 쉬고 그치면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물 경계 불 경계 바람 경계 허공 경계도 또한 그러하다. 식 경계는 내 소유가 아니요, 나도 식 경계의 소유가 아니며, 식 경계는 신(神)도 아니다. 그런데 3수는 식 경계를 의지하여 머무르고 식의 사자는 이를 집착한다. 그것을 없애고 욕심 내지 않으며 마음을 멸하고 쉬고 그치면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여러분, 나는 이 6계를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집착함이 없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이 해탈한 줄을 알게 된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마땅히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현자여, 어떻게 알고 보아야 이 안 몸[內身]이 함께 가지고 있는 식과 또 바깥의 모든 모양과 일체의 나와 내가 지은 것과 또 교만의 번뇌를 끊고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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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뿌리째 뽑아 다시는 나지 않게 하겠는가?'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나는 출가하여 도를 배우기 전에 이미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울고 괴로워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는 것을 싫어해서 이 큰 괴로움의 무더기를 끊고자 하였다. 여러분, 나는 그것을 싫어한 끝에 이렇게 관찰하였다.
  (집이란 지극히 비좁고 괴로운 곳이요, 집을 나가 도를 배우는 것은 시원하고 넓고 크다. 내가 지금 집에서 살면 쇠사슬에 묶여 한 평생 범행(梵行)을 깨끗이 닦을 수 없다. 나는 이제 적거나 많거나 상관없이 재물을 버리고, 또 적거나 많거나 상관없이 친척을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자.)
  여러분, 나는 그 뒤에 적거나 많거나 상관없이 재물을 버리고, 적거나 많거나 상관없이 친척을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닦았다.
  여러분, 나는 친척과 재물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운 뒤에는 비구가 갖추어야 할 요목을 배우고, 금계(禁戒)를 닦아 익히며 종해탈(從解脫)1)을 지켜 보호하였다. 또 위의와 예절을 잘 지키고, 털끝만한 죄를 보아도 언제나 두려워하였으며 학문의 요긴한 뜻을 받아 가졌었다.
  여러분, 나는 살생을 여의고 살생을 끊었다. 그래서 칼이나 막대기를 버렸고, 자신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도 부끄러워하였으며,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이익하게 하였으니, 나는 살생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또 나는 도둑질을 여의고 도둑질을 끊었다. 그래서 남이 준 뒤에야 받고, 주는 것 받기를 좋아하였으며, 언제나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기뻐하여 아낌이 없었고, 그리고 그 갚음을 바라지 않았으니, 나는 도둑질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범행이 아닌 것을 여의고 범행이 아닌 것을 끊었다. 그래서
  
1) 계율(戒律), 즉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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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행을 부지런히 닦고 묘한 행을 힘써 닦아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었고, 욕심을 여의고 사음을 끊었으니, 나는 범행이 아닌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거짓말을 여의고 거짓말을 끊었다. 그래서 진실한 말을 하여 진실을 즐거워하고 진실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았으며, 일체를 믿어 세상을 속이지 않았으니, 나는 거짓말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이간질하는 말을 여의고 이간질하는 말을 끊었다. 그래서 이간질하는 말로 사람들의 화합을 깨뜨리지 않았다. 여기서 들은 말을 저기에 옮겨 이것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고, 저기서 들은 말을 여기에 옮겨 저것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갈라서려는 자는 합치게 하고 합친 자에겐 서로 기뻐하게 하며, 당파를 만들지 않고 당파를 즐기지 않으며 당파를 칭찬하지 않았으니, 나는 이간질하는 말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추악한 말을 여의고 추악한 말을 끊었다. 만일 말하는 바 말씨가 추하고 거칠며 악한 음성이 귀에 거슬리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므로 남을 괴롭게 하고 안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끊었다. 만일 그 말이 맑고 온화하며 부드럽고 윤택해 귀에도 순하고 마음에도 들면, 기뻐할 만하고 사랑할 만하여 남을 안락하게 하고, 말과 음성이 함께 분명하여 남을 두렵게 하지 않고 남을 안정되게 한다. 나는 이런 말을 하나니, 나는 추한 말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꾸밈말을 여의고 꾸밈말을 끊었다. 때에 맞는 말 참말 법다운 말 이치에 맞는 말 고요한 말을 하여 다툼을 그치게 하는 것을 좋아하고, 때를 따라 적당함을 얻고, 잘 가르치고, 잘 꾸짖나니, 나는 꾸밈말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살림살이를 여의고 살림살이를 끊었다. 그래서 저울과 말[斗]과 섬을 버렸고, 또한 재물을 받지 않으며, 사람을 결박하지 않고, 말질을 속이려 하지 않으며, 조그마한 이익으로 남을 속이지 않나니, 나는 살림살이에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과부나 처녀 받는 것을 여의고, 과부나 처녀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과부나 처녀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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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종(奴) 받는 것을 여의고, 종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종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코끼리 말 소 염소 받는 것을 여의고, 코끼리 말 소 염소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코끼리 말 소 염소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닭이나 돼지 받는 것을 여의고, 닭이나 돼지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닭이나 돼지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농사나 상점 받는 것을 여의고, 농토나 점포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농토나 점포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생벼 보리 콩 받는 것을 여의고, 생벼 보리 콩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생벼 보리 콩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술을 여의고, 술을 끊었으니, 나는 술 마시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높고 넓고 큰 평상 쓰는 것을 여의고 높고 넓고 큰 평상 쓰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높고 넓고 큰 평상 쓰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분 쓰는 것을 여의고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분 쓰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화만 영락 바르는 향 연지분 쓰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노래 춤 풍류와 그것을 보고 듣는 것을 여의고 노래 춤 풍류와 그것을 보고 듣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노래 춤 풍류를 보고 듣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금[生色]2) 은[像]3) 등 보배를 받는 것을 여의고 금 은 등의 보배 받는 것을 끊었으니, 나는 금 은 등의 보배 받는 것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오후의 음식을 여의고 오후의 음식을 끊고, 하루에 한 끼 먹으며, 밤이나 공부 때에는 먹지 않나니, 나는 오후의 음식에 있어서 내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이미 이 거룩한 계의 몸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또 나는 만족할 줄을 안다. 옷은 다만 몸을 가리기 위해 가지고, 음식은 다만 몸을 기르기 위해 먹는다. 내가 가는 곳마다 옷과 발우가 나를 따르니 더 이상 돌아보거나 그리울 것이 없다. 마치 기러기가 두 날개로 공중을 나는 것과 같나니, 나도
  
2) 생색(生色)은 범어로 jata-rupa이고 금(金)의 이명이다.
3) 상(像)은 범어로 rupya이고 사색(似色)이라고도 하며 은(銀)의 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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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그와 같다. 여러분, 나는 이미 이 거룩한 계의 몸과 또 매우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성취하였으며, 다시 모든 감각기관[根]을 지켜 언제나 막기를 생각하고 밝게 통달하기를 생각하며, 그 생각하는 마음을 잘 지켜 보호하여 성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생각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혹 눈으로 빛깔을 보더라도 그 모양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그 빛깔을 음미하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분노하고 다투게 되기 때문에 눈을 지켜 단속하여 마음 속에 탐욕 근심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을 일으키지 않으며, 그리로 나아가기 위해 눈을 지켜 단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혹 뜻으로 법을 알더라도 그 모양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그 법을 음미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분노하고 다투게 되기 때문에 뜻을 지켜 단속하여 마음 속에 탐욕 근심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을 일으키지 않으며, 그리로 나아가기 위해 뜻을 지켜 단속하는 것이다.
  여러분, 나는 이 거룩한 계의 몸과 아주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성취하고, 모든 감각[根]을 깨끗이 단속하고 들고남을 바로 알아 잘 관찰하고 분별하며, 굽히고 펴기와 구부리고 우러르기와 몸가짐을 바로 알고, 승가리와 여러 가지 옷을 바르게 입고 발우를 바르게 가지며, 다니고 서기와 앉고 눕기와 잠자고 깨기와 말하고 잠잠하기를 바르게 알고 있다.
  여러분, 나는 이미 이 거룩한 계의 몸과 매우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성취하고 또한 거룩한 계로 모든 감관을 단속하고 들고남을 바르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일 없는 곳에서 혼자 살거나, 혹은 나무 밑이나 비고 편안하고 고요한 곳이나 산바위 돌집 한데[露地] 짚무더기로 가고, 혹은 숲 속이나 혹은 화장터로 갔다. 여러분, 나는 일 없는 곳에 있거나 혹은 나무 밑이나 비고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 가서는 니사단을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바른 몸과 바른 소원으로 생각이 다른 데로 향하지 않게 하였다. 탐욕을 끊어 없애고 마음에는 다툼이 없어 남의 재물이나 모든 생활 도구를 보아도 탐욕을 일으켜 내 소유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으니, 나는 탐욕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이와 같이 성냄 수면 들뜸 뉘우침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의심을 끊고 미혹을 없애 모든 착한 법에 대해서 망설임이 없나니, 나는 의혹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버렸다. 여러분, 나는 이미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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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럽히고 지혜를 약하게 하는 이 5개(蓋)를 끊고 욕심을 여의고 착하지 않은 악법을 여의며 나아가 제 4 선을 증득하고 성취하여 노닌다. 여러분, 나는 이미 이러한 청정하고 고요한 마음을 얻어 더러움이 없고, 번거로움이 없고, 부드럽고 연하며, 잘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얻고, 번뇌가 다한 신통의 지혜로 나아가 스스로 징험을 얻었다.
  여러분,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알고, 이 괴로움의 발생과 이 괴로움의 소멸과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알았다. 또 이 누(漏)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알고, 이 누의 발생과 이 누의 소멸과 이 누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알았다.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욕루(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한 뒤에는 곧 해탈한 줄을 알았다. 그리하여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았다.
  여러분,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안 몸에 있는 식과 바깥의 모든 모양과 일체의 나와 내가 지은 것과 또 교만을 끊고 뿌리째 뽑아 다시는 나지 않게 하였다.'
  번뇌가 다한 비구로서 범행을 알고 이미 법을 세운 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마땅히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그렇다고 인정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는 다시 그 비구에게 이렇게 말하라.
  '현자여, 현자가 처음에 말하였을 때 우리는 이미 옳다 하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현자에게서 높고 또 높으며 지혜로운 대답의 변재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자에게 묻고 또 물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설지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2,846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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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 아이나경(阿夷那經) 제 2 [제 5 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동원(東園) 녹자모(鹿子母) 강당4)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해질 무렵이 되어 고요한 자리에서 일어나 당(堂) 아래로 내려와 밖의 당 그늘을 거니시면서 여러 비구들을 위해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을 널리 설명하셨다. 그 때 이교도인 사문 만두(蠻頭)의 제자 아이나(阿夷那)5)는 멀리서 세존께서 고요한 자리에서 일어나 당에서 내려와 당 그림자로 인해 생긴 그늘 속을 거니시며 모든 비구들을 위해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을 널리 설명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이학(異學)인 만두의 제자 아이나는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문안드리고 부처님을 따라 거닐었다. 세존께서는 돌아보시고 물으셨다.
  "아이나여, 사문 만두는 참으로 5백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른 어떤 사문 범지가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았으면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음이 없고 남음이 없음을 안다'고 일컬으며,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일컫는가?"
  만두의 제자 아이나가 대답하였다.
  "구담이시여, 사문 만두는 참으로 5백 가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어떤 사문 범지가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았으면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음이 없고 남음이 없음을 안다'고 일컬으며,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일컫습니다."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
  
4) 동원 녹자모 강당은 사위성의 동쪽에 있다. 따라서 동원(東園)이라고도 한다. 사위성의 장자 미가라(Migara)는 본래 외 도를 신봉하였다. 그 후 딸인 비사가(毘舍佉)의 교화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이 때 "비사가가 비록 나의 딸이지만 실재 나 의 부모와 같다"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비사가를 '미가라의 어머니'로 불렀다. 미가라는 의역하면 녹(鹿)이다. 따라서 녹자모 강당은 곧 미가라의 딸인 비사가가 지어 부처님께 공양한 정사를 말한다.
5) 팔리어로 Ajit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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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나여, 그대는 왜 '사문 만두는 참으로 5백 가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만일 다른 어떤 사문 바라문이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았으면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음이 없고 남음이 없는 것을 안다)고 일컬으며,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일컫는다'고 말하는가?"
  "구담이시여, 사문 만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다니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혹은 잠자거나 깨어있거나 혹은 낮이나 밤이나 항상 걸림이 없이 알고 또 본다. 때로는 달리는 코끼리 방일하게 날뛰는 말 달리는 수레 반역한 군사 달리는 남자 달리는 여자를 만나고, 혹은 이런 길을 가다가 사나운 코끼리 사나운 말 사나운 소 사나운 개를 만나며, 혹은 독사 떼를 만나고, 던지는 흙덩이에 맞으며, 혹은 막대기로 맞으며, 개천에 떨어지거나 뒷간에 빠지며, 혹은 누운 소를 타거나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며, 혹은 가시밭 속에 들어가고, 혹은 촌이나 읍을 보고 그 이름과 길을 물으며, 혹은 남자나 여자를 보고 그 성과 이름을 묻고, 혹은 빈 집을 관찰한다. 이렇게 하고는 대중 속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들어온 뒤에 내게 이렇게 묻는다.
  (존자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나는 나쁜 세계로 가게 된다.)'
  구담이시어, 사문 만두(蠻頭)는 이러한 종류의 5백 가지 생각을 생각하고, 만일 다른 어떤 사문 범지가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았으면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음이 없고 남음이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며, 또 그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에 세존께서는 거닐기를 그만두시고 곧 거니시던 길 머리로 가시어 니사단(尼師檀)을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모든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비구들아, 내가 말한 지혜에 대한 일을 너희들은 받아 가졌느냐?"
  모든 비구들은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세존께서는 재삼 물으셨다.
  "내가 말한 지혜에 대한 일을 너희들은 받아 가졌느냐?"
  모든 비구들도 또한 재삼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그 때 어떤 비구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 한 자락을 벗어 메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아뢰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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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선서시여,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만일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은 위하여 지혜에 대한 일을 말씀하신다면 모든 비구들은 그것을 듣고 잘 받아 가질 것입니다."
  이에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자세히 분별하여 말하리라."
  비구들이 아뢰었다.
  "예, 분부대로 경청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개 두 가지 무리가 있다. 하나는 법다운 무리요, 다른 하나는 법답지 않은 무리이다. 어떤 것이 법답지 않은 무리인가? 어떤 사람이 법답지 않은 일을 행하고 법답지 않은 법을 말하면, 그 무리들도 또한 법답지 않은 일을 행하고 법답지 않은 법을 말한다. 그 법답지 않은 사람은 법답지 않은 무리들 앞에서 자기가 아는 것을 허망하게 말한다. 진실이 아닌 것을 나타내 보이고 분별하면서 그 행을 주장하고 널리 펴서 차례차례 법을 설명한다. 그러나 남의 잘못을 끊고자 하더라도 그것을 힐난하여 말하지 못하고, 이 바른 법과 율 중에서는 자기가 아는 것을 칭찬하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저 법답지 않은 사람은 법답지 않은 무리 앞에서 스스로 '나는 지혜가 있어 두루 안다'고 일컫는다. 이 중에서 만일 지혜에 대한 일을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을 법답지 않은 무리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법다운 무리인가? 혹 어떤 사람이 법다운 일을 행하고 법다운 법을 말하면, 그 무리도 또한 법다운 일을 행하고 법다운 법을 말한다. 그 법다운 사람은 법다운 무리 앞에서 자기가 아는 것을 진실되게 말한다. 진실을 나타내 보이고 분별하여 그 행을 주장하고 널리 펴 차례차례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남의 잘못을 끊고자 하면 힐난하여 곧 그것을 말할 수 있고, 이 바른 법 중에서 자기가 아는 것을 칭찬하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법다운 사람은 법다운 무리 앞에서 스스로 '나는 지혜가 있어 두루 안다'고 말한다. 이 중에서 만일 지혜에 대한 일을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을 법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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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리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법과 법 아님,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알아야 하고 법과 법 아님,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안 뒤에는 너희들은 마땅히 법다움과 이치다움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편안히 앉으셨다. 이에 모든 비구들은 곧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마땅히 아셔야 하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법(法)과 법 아님[非法], 이치[義]와 이치 아님[非義]을 알아야 하고 법과 법 아님,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안 뒤에는 마땅히 법다움과 이치다움을 배워야 하느니라.'
  이렇게 그 뜻을 간략히 말씀하시고는 자세하게 분별하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편안히 앉으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누가 자세하게 분별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로서 부처님의 뜻을 알고, 항상 부처님과 모든 지혜로운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존자 아난이라면 능히 아까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그 뜻을 자세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존자 아난에게 가서 이 뜻을 설명해 달라고 간청해 봅시다. 그리고 만일 존자 아난이 우리를 위해 분별해 주거든 우리는 마땅히 잘 받아 가집시다."
  이에 모든 비구들은 존자 아난에게 가서 서로 안부를 묻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아뢰었다.
  "존자 아난이여, 마땅 아셔야 합니다. 아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마땅히 법과 법 아님,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법과 법 아님,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안 뒤에는 마땅히 법다움과 이치다움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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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그 뜻을 간략히 말씀하시고는 더 이상 자세하게 분별해 주시지 않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편안히 앉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누가 자세하게 분별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존자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로서 부처님의 뜻을 알고 항상 부처님과 모든 지혜로운 범행자들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존자 아난이라면 능히 아까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그 뜻을 자세하게 분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아난이여, 저희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 뜻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존자 아난이 말하였다.
  "여러분, 내가 비유를 들어 말하리니 잘 들어보십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어 말하면 그 뜻을 빨리 이해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나무 심[實]6)을 얻기 위하여 도끼를 가지고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큰 나무가 뿌리 줄기 마디 가지 잎 꽃 나무 심으로 된 것을 보고 뿌리 줄기 마디 나무 심은 건드리지 않고 가지와 잎만 건드렸습니다. 여러분의 말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세존께서 현재 계시는데 그 분을 내버려두고 내게 와서 그 뜻을 묻다니요. 왜냐 하면 여러분, 세존께서는 눈이요 지혜며, 이치요 법이며, 법의 주인이요 법의 장수로서 진리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일체의 뜻은 오직 저 세존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세존께 나아가 '세존이시여, 이것은 무엇이며, 이것은 어떠한 뜻입니까?'하고 물어보십시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여 주시거든 여러분은 마땅히 잘 받아 가지십시오."
  모든 비구들이 아난에게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존자 아난이여, 세존께서는 눈이요 지혜이며, 이치요 법이며, 법의 주인이요 법의 장수로서 진리의 뜻을 말씀하시고, 일체 뜻은 오직 저
  
6) 팔리본에는 Sara로 되어 있다. 이는 수심(樹心) 혹은 목재로 쓸만한 부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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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존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존자 아난께서는 부처님의 시자로서 부처님의 뜻을 아시고, 항상 부처님과 모든 지혜로운 범행인들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존자 아난이시라면 아까 저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뜻을 자세하게 분별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존자 아난이여, 저희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그것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존자 아난이 모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모두 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 삿된 소견은 법이 아니요 바른 소견이라야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삿된 소견으로 말미암아 한량없이 악한 법을 내면 이것은 이치가 아니며, 만일 바른 소견으로 말미암아 한량없이 착한 법을 내면 이것은 바른 이치입니다. 여러분, 나아가 삿된 지혜는 법이 아니며, 바른 지혜가 법입니다. 만일 삿된 지혜로 말미암아 한량없이 악한 법을 내면 이것은 이치가 아니며, 만일 바른 지혜로 말미암아 한량없이 착한 법을 내면 이것은 바른 이치입니다.
  여러분, 이른바 세존께서는 '너희들은 마땅히 법과 법 아님,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법 아님, 이치와 이치 아님을 안 뒤에는 마땅히 법다움과 이치다움을 배워야 하느니라'라고 그 뜻을 간략히 말씀하시고는 자세하게 분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편안히 앉으셨습니다. 이렇게 세존께서 그 뜻을 간략히 말씀하시고 자세하게 분별하지 않으신 것을 나는 이런 글귀로써 자세하게 분별하였습니다. 여러분, 부처님께 나아가 이 일을 낱낱이 말씀드리십시오. 만일 세존께서 말씀하신 그 뜻과 같거든 여러분들은 곧 받아 가지십시오."
  이에 모든 비구들은 존자 아난의 말을 들어 잘 받아가져 외우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존자 아난을 세 번 돌고는 떠나갔다. 그들은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아까 간략히 이 뜻을 말씀하시고 자세하게 분별하지 않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편안히 앉으셨습니다. 그래서 존자 아난이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써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세존께서 들으시고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내 제자 중에는 안목도 있고 지혜도 있으며 법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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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치도 있구나. 왜냐 하면 스승이 제자를 위하여 그 뜻을 간략히 말하고 자세하게 분별해 주지 않자, 그 제자가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써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아난이 말한 바와 같이 너희들은 마땅히 그렇게 받아 가져야 한다. 왜냐 하면 설해진 대로 그 뜻을 관찰해 보면 분명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아이나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1,828자이다.]
  189) 성도경(聖道經) 제 3 [제 5 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루수(拘樓瘦)의 도읍인 검마슬담(劍磨瑟曇)이라는 곳을 유행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을 얻고 근심과 슬픔과 울음을 여의게 하며 걱정과 괴로움과 번민을 없애 곧 법다움을 얻게 하는 하나의 도(道)가 있다. 이른바 거룩한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인데, 그것을 익히고 그것을 도우며 또한 그것을 준비하는 것으로 또 7지(支)가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바른 선정에서는 익힘을 말하며 도움을 말하고 또한 갖춤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7지라 하는가? 바른 소견[正見] 바른 뜻[正志] 바른 말[正語] 바른 업[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방편[正方便] 바른 생각[正念]이다. 만일 이 7지의 익힘과 도움과 준비가 있어 잘 나아가 마음이 하나가 되면 이것을 거룩한 바른 선정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익힘과 도움과 준비가 있다. 왜냐 하면 바른 소견은 바른 뜻을 낳고 바른 뜻은 바른 말을 낳으며, 바른 말은 바른 업을 낳고 바른 업은 바른 생활을 낳으며, 바른 생활은 바른 방편을 낳고 바른 방편은 바른 생각을 낳으며 바른 생각은 바른 선정을 낳기 때문이다. 현성의 제자는 이렇게 마음에 바른 선정이 있어 갑자기 사음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앤다. 현성의 제자는 이렇게 바른 마음으로 해탈하여 갑자기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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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그 중에서 바른 소견이 제일 앞에 있다.
  만일 삿된 소견을 삿된 소견이라고 보면 이것은 바른 소견[正見]이요, 만일 바른 소견을 바른 소견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소견이다. 어떤 것을 삿된 소견이라 하는가? 이른바 보시도 없고, 재(齋)도 없고 또한 주설(呪說)도 없으며, 선악의 업도 없고 선악업의 과보도 없으며, 이 세계도 없고 저 세계도 없으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세상에는 좋은 곳에 이르르고, 잘 가고 잘 향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징험하고 성취하여 노니는 참 사람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삿된 소견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는가? 이른바 보시도 있고, 재도 있고 또한 주설도 있으며, 선악의 업도 있고 선악업의 과보도 있으며, 이 세계도 있고 저 세계도 있으며,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세상에는 좋은 곳에 이르르고, 잘 가고 잘 향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징험하고 성취하여 노니는 참 사람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한다. 이것이 '삿된 소견을 삿된 소견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소견이요, 바른 소견을 바른 소견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소견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안 뒤에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삿된 소견을 끊어 바른 소견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한다. 비구가 삿된 소견을 끊고 바른 소견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이 3지(支)는 바른 소견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른다.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느니라.
  만일 삿된 뜻을 삿된 뜻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뜻[正志]이라 할 것이요, 만일 바른 뜻을 바른 뜻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뜻이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삿된 뜻이라 하는가? 탐욕이 있는 생각 성냄이 있는 생각 해침이 있는 생각이니, 이것을 삿된 뜻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뜻이라 하는가? 탐욕이 없는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 이것을 바른 뜻이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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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이것이 '삿된 뜻을 삿된 뜻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뜻이라 할 것이요, 바른 뜻을 바른 뜻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뜻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안 뒤에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삿된 뜻을 끊어 바른 뜻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한다. 비구가 삿된 뜻을 끊고 바른 뜻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이 3지는 바른 뜻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른다.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다고 하느니라.
  만일 삿된 말을 삿된 말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말[正語]이요, 만일 바른 말을 바른 말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말이다. 어떤 것을 삿된 말이라 하는가? 거짓말 이간하는 말 추악한 말 꾸밈말이니, 이것을 삿된 말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말이라 하는가? 거짓말 이간하는 말 추악한 말 꾸밈말을 여읜 말이니 이것을 바른 말이라 한다. 이것이 '삿된 말을 삿된 말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말이요, 바른 말을 바른 말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안 뒤에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삿된 말을 끊어 바른 말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고 한다. 비구가 삿된 말을 끊고 바른 말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고 한다. 이 3지는 바른 말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른다.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느니라.
  만일 삿된 업을 삿된 업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업[正業]이요, 만일 바른 업을 바른 업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업이다. 어떤 것이 삿된 업인가? 살생 도둑질 사음이니 이것을 삿된 업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업이라 하는가? 살생 도둑질 사음을 여읜 업이니, 이것을 바른 업이라 한다. 이것이 '삿된 업을 삿된 업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업이요, 바른 업을 바른 업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업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안 뒤에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삿된 업을 끊어 바른 업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한다. 비구가 삿된 업을 끊고 바른 업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이 3지는 바른 업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른다.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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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삿된 생활을 삿된 생활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생활[正命]이요, 만일 바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생활이다. 어떤 것을 삿된 생활이라 하는가? 만일 구하는 것이 있어 뜻에 차지 않으면 여러 가지 축생의 주문을 외우는 등 삿된 방법으로 존속해 가는 것이다. 그는 법답지 않게 법이 아닌 것으로써 의복을 구하고, 법답지 않게 법이 아닌 것으로써 음식 평상 탕약과 모든 생활 도구를 구한다. 이것을 삿된 생활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바른 생활이라 하는가? 만일 구하지도 않고 구하는 것이 뜻에 차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축생의 주문을 외우는 등 삿된 방법으로 생활을 존속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는 법답게 의복을 구하고, 법답게 음식 평상 탕약과 여러 가지 생활 도구를 구한다. 이것을 바른 생활이라 한다. 이것이 '삿된 생활을 삿된 생활이라 보면 이것은 바른 생활이요, 바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 보면 이것도 또한 바른 생활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안 뒤에 곧 배우기를 구하고 삿된 생활을 끊고 바른 생활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한다. 비구가 삿된 생활을 끊고 바른 생활을 성취하려고 하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이 3지는 바른 생활을 따르고 바른 소견의 방편을 따른다. 그러므로 바른 소견이 가장 앞에 있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방편[正方便]이라 하는가? 비구는 이미 생긴 나쁜 법은 끊으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방편을 구하고 온 마음을 다해 정근한다.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쁜 법은 생기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방편을 구하고 온 마음을 다해 정근한다.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생기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방편을 구하고 온 마음을 다해 정근한다. 이미 생긴 착한 법은 그대로 머물게 하고, 잊지 않고 물러나지 않게 하며, 더 자라고 널리 퍼지게 하며, 닦아 익히고 원만히 갖춰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방편을 구하고 온 마음을 다해 정근한다.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생각[正念]이라 하는가? 비구는 안 몸[內身]을 몸으로 관찰하고 나아가 감각 마음 법에 이르기까지 법 그대로 관찰한다.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선정[正定]이라 하는가? 비구는 욕심을 여의고 착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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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악법을 여의며 나아가 제 4 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닌다. 이것을 바른 선정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해탈[正解脫]이라 하는가? 욕심내는 마음으로부터 해탈하고,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해탈한다. 이것을 바른 해탈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른 지혜[正智]라 하는가? 비구는 욕심내는 마음으로부터 해탈한 줄을 알고,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해탈한 줄을 안다. 이것을 바른 지혜라 하느니라.
  다시 이것을 학자(學者)7)가 성취하는 8지라 하고, 번뇌가 다한 아라하가 성취하는 10지8)라 한다.
  어떤 것을 학자가 성취하는 8지라 하는가? 유학(有學)의 바른 소견과 나아가 유학의 바른 선정이니, 이것을 학자가 성취하는 8지라 한다. 어떤 것을 번뇌가 다한 아라하가 성취하는 10지라 하는가? 무학(無學)의 바른 소견과 나아가 무학의 바른 지혜이니, 이것을 번뇌가 다한 아라하가 성취하는 10지라 한다. 왜냐 하면 바른 소견은 삿된 소견을 끊기 때문이다. 만일 삿된 소견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면 그는 그것도 또한 끊고, 만일 바른 소견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착한 법이 생기면 그는 곧 그것을 닦고 익혀 가득 차고 구족하게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바른 지혜는 삿된 지혜를 끊기 때문이다. 만일 삿된 지혜로 인하여 한량없는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면 그는 또한 그것을 끊고, 만일 바른 지혜로 인하여 한량없는 착한 법이 생기면 그는 곧 그것을 닦고 익혀 가득 차고 구족하게 한다.
  이것을 20선품(善品)과 20불선품(不善品)이라 한다. 곧 이 40대법품(大法品)을 설하여 범륜(梵輪)을 굴리면 어떤 사문 범지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그르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한 40대법품으로 범륜을 굴리면 어떤 사문 범지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따라서 만일 다음과 같은 사문 범지가 있다면 그들은 법다움에 있어서 열 가지 꾸지람[詰
  
7) 아라한 즉 무학(無學)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8) 8지(支) 즉 팔정도에 정지(正智) 정해탈(正解脫)을 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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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責]이 있게 된다. 어떤 것이 열 가지 꾸지람인가? 혹 어떤 이는 바른 소견을 헐뜯고 삿된 소견을 칭찬하거나, 혹은 삿된 소견을 가진 사문 범지를 공양하고 칭찬한다. 내가 말한 40대법품으로 범륜을 굴리면 사문 범지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따라서 만일 그런 사문 범지가 있다면, 그는 법다움에 있어서 첫 번째의 꾸지람을 듣게 된다.
  더 나아가서, 어떤 이는 바른 지혜를 헐뜯고 삿된 지혜를 칭찬하거나, 혹은 삿된 지혜를 가진 사문 바라문을 공양하고 칭찬한다. 내가 말한 40대법품으로 범륜을 굴리면 어떤 사문 범지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따라서 만일 그런 사문 범지가 있다면, 그는 법다움에 있어서 열 번째의 꾸지람을 듣게 된다. 이처럼 내가 말한 40대법품으로 범륜을 굴리면 어떤 사문 범지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따라서 만일 위와 같은 사문 범지가 있다면 그들은 법다움에 있어서 열 가지 꾸지람을 듣게 되느니라. 또 혹 어떤 사문 범지는 쭈그리고 앉아 쭈그려 앉으라고 말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말하며, 원인이 없다고 말하고, 지음이 없다고 말하여, 이른바 이런 저런 지은 바 선악을 주장하고 서로를 단절하고 파괴한다. 그러나 내가 말한 40대법품으로 범륜을 굴리면 어떤 사문 범지 하늘 악마 범천 및 그 밖의 세상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그르다고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또한 꾸지람과 근심과 두려움이 있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성도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1,805자이다.]
  190) 소공경(小空經) 제 4 [제 5 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동원(東園) 녹자모(鹿子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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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당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아난이 해질 무렵이 되어 고요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언젠가 석도읍(釋都邑)이라고 하는 석가족의 성을 유행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 세존에게서 이러한 이치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난아, 나는 공(空)을 많이 수행한다.'
  세존께서 설하신 말씀을 제가 잘 이해하였고 잘 받아 가졌다고 하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그 때 내 말을 진실로 잘 알고 잘 받아 가졌다. 왜냐 하면 나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공을 많이 수행하였다. 아난아, 이 녹자모 강당은 텅 비어 코끼리 말 소 염소 재물 미곡 종들이 없다. 비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오직 비구들뿐이다. 아난아, 만일 이 가운데 그것이 없다면 그 때문에 나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마을에 대한 생각[村想]을 하지 말고, 사람에 대한 생각[人想]을 생각하지 말며, 오로지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無事想]9)만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마을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사람에 대한 생각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할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만은 비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혹 어떤 피로는 마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혹 어떤 피로는 사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피로가 있다면 오직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다.'
  만일 그것이 그 가운데 없다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9) 팔리본에는 한림상(閑林想, arannasanna)으로 되어 있다. 즉 한적한 숲 속에서의 생활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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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사람에 대한 생각도 하지 말고,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도 하지 말며, 오로지 땅에 대한 생각[地想]만을 자꾸 생각하라. 그 비구는 혹 그 땅에 높고 낮음이 있고 뱀떼가 있으며, 가시덤불이 있고, 모래가 있으며, 돌산이 험하고 깊은 물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 만일 그 땅이 편편하기 손바닥 같고 경관이 좋은 곳을 보거든 마땅히 그것을 자꾸 생각하라.
  아난아, 마치 소가죽을 백 개의 못으로 펴 바를 때에 팽팽하게 펴 바르면 주름살도 없고 오그라들지도 않는 것과 같다. 만일 그 땅에 높고 낮음이 있고 뱀 떼가 있으며, 가시덤불이 있고 모래가 있으며, 돌산이 험하고 깊은 물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은 생각하지 말라. 만일 그 땅이 편편하기 손바닥 같고, 경관이 좋은 곳을 보거든 마땅히 그것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사람에 대한 생각도 비우고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땅에 대한 생각만은 비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혹 어떤 피로는 사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혹 어떤 피로는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피로가 있다면 오직 땅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다.'
  만일 그것이 그 가운데 없다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을 생각하지 말고, 땅에 대한 생각도 생각하지 말며, 오로지 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無量空處想]만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도 비우고 땅에 대한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만은 비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혹 어떤 피로는 일이 없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혹 어떤 피로는 땅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피로가 있다면 오직 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다.'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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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땅에 대한 생각도 생각하지 말고, 한량이 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도 생각하지 말며, 오로지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無量識處想]만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땅에 대한 생각도 비우고, 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만은 비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혹 어떤 피로는 땅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혹 어떤 피로는 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피로가 있다면 오직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다.'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도 생각하지 말고,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도 생각하지 말며, 오로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곳에 대한 생각[無所有處想]만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이렇게 알아 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도 비우고,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곳에 대한 생각만은 비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혹 어떤 피로는 한량없는 허공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혹 어떤 피로는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피로가 있다면 오직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다.'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아난아, 비구가 만일 공을 많이 행하려고 한다면 그 비구는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곳에 대한 생각도 생각하지 말며, 오로지 무상심정(無想心定)만을 자꾸 생각하라.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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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알아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대한 생각도 비운다. 그러나, 오직 무상심정만은 비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혹 어떤 피로는 한량없는 식이 있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혹 어떤 피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피로가 있다면 오직 무상심정 때문에 있다.'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으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무상심정(無想心定)을 이미 행하였고, 이미 생각하였다. 이미 행하고 이미 생각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즐기지도 않고 그것을 구하지도 않으며, 거기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그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 탐욕의 번뇌[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생명의 번뇌[有漏]에서 마음이 해탈하며, 무명의 번뇌[無明漏]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한 뒤에는 곧 해탈한 줄을 알아,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그는 이렇게 알아 탐욕의 번뇌를 비우고 생명의 번뇌를 비우고 무명의 번뇌를 비운다. 그러나 오직 생명이 있는 자기 몸의 6처(處)만은 비우지 않는다.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혹 어떤 피로는 탐욕의 번뇌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혹 어떤 피로는 생명의 번뇌 때문에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없다. 피로가 있다면 오직 생명이 있는 내 몸의 6처 때문에 있다.'
  만일 그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공하다고 볼 것이다. 만일 거기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진실로 있다고 볼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함이 없는 마음으로 해탈하였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과거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도 모두 이 진실과 공을 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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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거꾸로 되지 않았으니 왜냐 하면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함이 없는 마음으로 해탈하였기 때문이다. 아난아, 미래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도 모두 이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을 것이니 왜냐 하면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함이 없는 마음으로 해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난아, 지금 현재의 나 여래 무소착 등정각도 또한 이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나니 왜냐 하면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함이 없는 마음으로 해탈하였기 때문이다.
  아난아, 너는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한다. 나도 또한 이 진실과 공을 행하여 거꾸로 되지 않나니 왜냐 하면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어지고, 함이 없는 마음으로 해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도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소공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1,423자이다.]
  191) 대공경(大空經) 제 5 [제 5 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석가족이 사는 가유라위(迦維羅衛)에 유행하실 적에 니구류(尼拘類) 동산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이 되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가유라위에 들어가 걸식하셨다. 걸식을 마치시고 오후가 되어 가라차마석정사(加羅差摩釋精舍)10)로 가셨다. 그 때 가라차마석정사에는 많은 평상자리를 펴고 많은 비구들이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가라차마석정사에서 나와 다시 가라석정사(加羅釋精舍)11)로 가셨다. 그 때 존자 아난은 많은 비구들과 함께 가라석정사에 있으면서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존
  
10) 팔리본에는 Kalakhemakassa Sakkassa vihara로 되어 있다. 즉 석가족 가라차마(加羅差摩 ; Kalakhemaka)가 건립한 정사 라는 뜻이다.
11) 팔리본에는 석가족 Ghataya의 정사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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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아난은 멀리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마중을 나가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받아 들고 돌아와 자리를 펴고, 물을 길어다 부처님 발을 씻어 드렸다. 부처님께서는 발을 씻으시고 가라석정사에서 존자 아난이 펴놓은 자리에 앉아 말씀하셨다.
  "아난아, 가라차마석정사에는 많은 평상자리를 펴고 많은 비구들이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존자 아난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가라차마석정사에는 많은 평상자리를 펴고 많은 비구들이 그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저희들이 지금 가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는 떠들기를 좋아하거나 떠들기를 즐겨하거나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거나 무리 짓기를 즐겨하거나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며, 무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거나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며 떠들기를 즐겨하고 떠드는 자리에 모이며,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즐겨하며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며, 무리를 떠나려 하지 않고 멀리 떠나 혼자 지내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이른바 생명의 즐거움 거룩한 즐거움 욕심이 없는 즐거움 떠난 즐거움 쉬는 즐거움 바르게 깨닫는 즐거움 먹음이 없는 즐거움 나고 죽지 않는 즐거움 등 이러한 즐거움을 쉽게 얻으려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떠들기를 즐겨하지 않고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으며, 무리 짓기를 좋아하지 않고 무리 짓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지 않고, 무리를 떠나기를 좋아하고 항상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한다고 하자. 그는 이른바 생명의 즐거움 거룩한 즐거움 욕심이 없는 즐거움 떠나는 즐거움 쉬는 즐거움 바르게 깨닫는 즐거움 먹음이 없는 즐거움 나고 죽지 않는 즐거움 등 이러한 즐거움을 쉽게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느니라.
  아난아, 비구는 떠들기를 좋아하거나 떠들기를 즐겨하거나 떠드는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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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이지 않아야 하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거나 무리 짓기를 즐겨하거나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지 않아야 하며, 무리를 떠나기를 좋아하고,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고 떠들기를 즐겨하며 떠드는 자리에 모이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 짓기를 즐겨하며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며, 무리를 떠나려 하지 않고 멀리 떠나 혼자 지내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잠깐 동안의 즐거운 마음의 해탈이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떠들기를 좋아하지 않고 떠들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떠드는 자리에 모이지 않고, 무리 짓기를 좋아하지 않고 무리 짓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무리 짓는 자리에 모이지 않으며, 무리 떠나기를 좋아하고 항상 멀리 떠난 곳에서 혼자 있기를 즐겨한다고 하자. 그는 잠깐 동안의 즐거운 마음의 해탈이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 하면 반드시 그리 될 수 있느니라.
  왜냐 하면 나는 나를 즐겁게 하는 어떠한 색(色)도 보지 못하였다. 그 색은 무너지고 변하여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슬픔 울음 근심 괴로움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는 이 곳이나 다른 곳에 머무르면서 바르게 깨닫고 모두 깨달았나니, 이른바 색에 대한 모든 생각을 넘어서서 바깥의 허공을 관찰하였다.
  아난아, 나는 그 곳에 머무른 뒤에 기쁨이 생겼다. 나는 이 기쁨을 모두 몸으로 깨닫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서 기쁨이 생기고 고요함이 생기고 즐거움이 생기고 선정[定]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이 선정을 전부 몸으로 깨닫고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가 되었다. 아난아, 혹 어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함께 나를 찾아 오면, 나는 곧 그들을 위하여 멀리 떠나 욕심이 없음을 즐기는 이런 마음을 쓰고, 다시 그들에게 이 법을 설명하여 그들에게 권하고 그들을 돕는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공(空)을 많이 행하려 한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마음을 꼭 붙잡아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하여야 한다. 그는 마음을 붙잡아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한 뒤에 반드시 마음의 공을 생각하여야 한다. 아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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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비구가 '나는 마음을 꼭 붙잡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정하게 하지 않고도 마음의 공을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그 비구는 스스로 크게 피로하기만 할 것이다.
  아난아,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꼭 붙잡고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하는가? 비구가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그 몸을 모두 담그고 적시면 두루 충만해져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아난아, 마치 사람이 목욕하는 그릇에 가루비누를 담고 거기에 물을 섞어 환을 만들고 그 몸을 담그고 적시면 두루 충만해져 안팎에 골고루 빠진 곳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비구도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에 그 몸을 모두 담그고 적시면 두루 충만해져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느니라.
  아난아, 비구는 이와 같이 마음을 꼭 붙잡아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한다. 그는 마음을 꼭 붙잡아 거기에 머물러 일정하게 한 뒤에는 마땅히 마음의 공(空)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마음의 공을 생각한 뒤에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마음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마음의 공을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마음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바깥의 공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바깥 공을 생각한 뒤에도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바깥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바깥의 공을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고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바깥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마음의 공과 바깥의 공을 함께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안팎의 공을 생각한 뒤에도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안팎의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안팎의 공을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안팎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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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비구는 마땅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생각한 뒤에도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움직이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비구는 이런 저런 마음을 정(定)으로 다루고 또 다루고, 익히고 또 익히며, 부드럽고 또 부드럽게 하여 좋고 유쾌하고 온화하게 하고 멀리 떠난 즐거움을 누리게 해야 한다. 만일 이런 저런 마음을 이런 저런 정으로 다루고 또 다루고, 익히고 또 익히며, 부드럽고 또 부드럽게 하여, 좋고 유쾌하고 온화하게 되고 멀리 떠난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면, 마땅히 마음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마음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마음의 공을 이해하게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 마음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마음의 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비구는 마땅히 바깥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바깥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바깥의 공을 이해하게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 바깥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바깥의 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비구는 마땅히 안팎의 공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안팎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안팎의 공을 이해하게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 안팎의 공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안팎의 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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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아, 마땅히 움직이지 않음을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그는 움직이지 않음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비구가 관찰할 때, 움직이지 않음을 성취하여 노닌 뒤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며 청정하게 머무르게 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곳에 머무르면서 만일 그 마음이 거닐고자 하면, 그 비구는 선실(禪室)에서 나와 바깥의 선실 그늘을 거닐며, 모든 근을 안에 머물게 하고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게 하며 뒤에도 앞의 생각을 계속해야 한다. 이와 같이 거닌 뒤 마음 속에 탐욕과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그 비구가 이 곳에 머물면서 만일 그 마음이 앉아서 선정에 들려고 하면, 그 비구는 거닐기를 그만두고 거니는 길 머리로 가서 니사단을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앉아서 선정에 든 뒤 탐욕과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곳에 머물면서 만일 그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자 하면, 그 비구는 만일 그것이 욕심 성냄 해침의 세 가지 착하지 않은 악한 생각이면 그 세 가지 착하지 않은 악한 생각을 생각하지 말고, 만일 그것이 욕심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해침이 없는 세가지 착한 생각이면 그 세 가지 착한 생각을 마땅히 생각하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뒤 마음 속에 탐욕과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한다.
  아난아, 그 비구가 이 곳에 머물면서 그 마음이 만일 무엇을 말하고자 하면, 그 비구는 만일 그 이야기가 거룩하지 않은 이야기로서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이른바 왕론(王論) 적론(賊論) 투쟁론(鬪爭論) 음식론(飮食論) 의복론(衣服論) 부인론(婦人論) 동녀론(童女論) 음녀론(淫女論) 세간론(世間論) 사도론(邪道論) 해중론(海中論)과 같은 여러 가지 축생론(畜生論)이면 논하지 말고, 만일 그 이야기가 거룩한 논으로서 이치와 서로 걸맞아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모든 음개(陰蓋)가 없는 이른바 시론(施論) 계론(戒論) 정론(定論) 혜론(慧論) 해탈론(解脫論) 해탈지견론(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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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脫知見論) 점손론(漸損論) 불회론(不會論) 소욕론(少欲論) 지족론(知足論) 무욕론(無欲論) 단론(斷論) 멸론(滅論) 연좌론(燕坐論) 연기론(緣起論)과 같은 사문의 이야기이면 논하여야 한다. 이렇게 논한 뒤 마음 속에 탐욕과 슬픔과 착하지 않은 악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또 아난아, 즐거워할 만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만하며 애욕과 서로 걸맞는 5욕(欲)의 공덕(功德)12)이 있다. 그것은 눈으로 빛깔을 지각하고 귀로 소리를 지각하며, 코로 냄새를 지각하고 혀로 맛을 지각하며, 몸으로 촉감을 지각하는 것이다. 만일 비구의 마음이 거기에 이르면 그는 '이 5욕의 공덕은 욕의 공덕에 따라 내 마음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하고 관찰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이 5욕의 공덕은 앞도 없고 뒤도 없이 그 욕의 공덕을 따라 마음에서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관찰할 때, 이 5욕의 공덕은 그 욕의 공덕을 따라 마음에서 활동하는 것임을 안다면, 그 비구는 이런 저런 욕의 공덕을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고 쇠해서 없어지는 것이라 관찰하며, 욕심낼 것이 없다고 관찰하고 끊어 없애야 할 것이라 관찰하며, 끊어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이라고 관찰할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이 5욕의 공덕에 욕심이 생기고 물듦이 있으면, 그는 곧 그것을 없애버릴 것이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이렇게 관찰할 때, 이 5욕의 공덕에 탐욕이 있고 물듦이 있는 줄 알아 그것을 이미 끊었다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다시 아난아, 5성음(盛陰)이 있으니 색성음(色盛陰)과 각(覺) 상(想) 행(行) 식(識)의 성음(盛陰)이다. 이른바 비구는 '이것은 색(色)이요, 이것은 색의 원인[色集]이요, 이것은 색의 멸[色滅]이다. 각 상 행도 또한 그러하며, 이것은 식(識)이요, 이것은 식의 원인[識集]이요, 이것은 식의 멸[識滅]이다'라고 이와 같이 흥하고 쇠함을 관찰한다. 만일 이 5성음에 아만(我慢)이 있으면 그는 곧 그것을 없앤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이와 같이 관찰할 때, 5음(陰)에 아만이 이미 없어진 줄을 알면 이것을 바른 앎이라 하느니라.
  
12) 오욕공덕(五欲功德)은 5욕을 구성하는 요소(要素), 혹은 5욕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요소 또는 원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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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아, 이 법은 한결같이 옳고 한결같이 즐거우며 한결같이 생각해야 할 것으로서, 번뇌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악마도 이르지 못하고 악도 이르지 못하며, 모든 착하지 않은 악법과 더러움과 미래 생명의 근본과 번거롭고 극심한 괴로움의 과보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원인이 되는 것도 또한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이 이른바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한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방일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은 깨달음을 얻었고, 방일하지 않은 근(根)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착한 법이 나고, 혹은 도품(道品)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하니, '나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하리라'고 그렇게 배워야 한다. 아난아, 믿음이 있는 제자가 무슨 까닭으로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느냐?"
  존자 아난이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나옵니다. 원하옵건대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이 그것을 들으면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라. 내가 너를 위해 자세히 분별해 말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아난아, 그 정경(正經)과 가영(歌詠)과 기설(記說) 때문에 믿음이 있는 제자가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다. 아난아, 그런 법은 다만 저들이 오랫동안 자주 듣고 천 번이나 외워 익히며 마음으로 관찰하고 밝은 지혜로 깊이 통달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그 논(論)이 이치와 상응하는 성인의 논으로서, 마음을 부드럽고 연하게 하며 모든 음개(陰蓋)를 없애는 이른바 시론 계론 정론 혜론 해탈론 해탈지견론 점손론 불회론 소욕론 지족론 무욕론 단론 멸론 연좌론 연기론이면 이것은 바로 사문들이 논해야 할 것이다. 이것 때문에 믿음이 있는 제자가 목숨이 다하도록 세존을 따라 행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이다.
  아난아, 다음과 같이 하면 번잡한 스승이 되고, 번잡한 제자가 되며, 번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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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범행이 된다. 아난아, 어떤 자를 번잡한 스승이라 하는가? 혹 어떤 스승은 세상에 나와 꾀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 꾀하고 생각하는 땅에 머물며,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이 잡되고,, 범인이지만 말재주는 있다. 그는 일 없는 곳[無事處 : 阿蘭若]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며,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다.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악을 멀리 여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서 즐겁게 산다. 그가 악을 멀리 여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하게 노닌 뒤에 제자를 데리고 돌아오면 범지 거사 마을의 백성들이 따른다. 그는 제자를 데리고 돌아와 범지 거사 마을의 백성들이 따른 뒤에는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자를 번잡한 스승이라 하는데, 이것은 착하지 않은 악법이요,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에 존재하는 근본이 되고, 번거롭고 뜨거운 괴로움의 과보가 되며, 생 노 병 사의 원인이 되는 재앙이니, 이런 자를 번잡한 스승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자를 번잡한 제자라고 하는가? 그 스승의 제자들은 멀리 떠나기를 배운다. 그들은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서 살며,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다.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 세상에서 즐겁게 산다. 그가 멀리 떠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하게 노닌 뒤에 제자를 데리고 돌아오면 바라문 거사 마을의 백성들이 따른다. 그는 제자를 데리고 돌아와 바라문 거사 마을의 백성들이 따른 뒤에는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자를 번잡한 제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착하지 않은 악법이 되고,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 생명의 근본이 되며, 번거롭고 뜨거운 괴로움의 과보가 되고, 생 노 병 사의 원인이 되는 재앙이니, 이런 자를 번잡한 제자라 하느니라.
  아난아, 어떤 것을 번잡한 범행이라 하는가? 만일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면 그는 무소착(無所著) 등정각(等正覺) 명행성위(明行成爲)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도법어(道法御) 천인사(天人師)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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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우(佛衆祐)라 불린다. 그는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다. 아난아, 여래는 무엇 때문에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나옵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설하여 주십시오. 들으면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내가 너를 위해 두루 분별해 말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아난아, 여래는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자 하고, 아직 거두지 못한 것을 거두고자 하며,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자 하기 때문에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 것이 아니다. 아난아, 여래는 다만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 것이다. 첫째는 현재 스스로 즐겁게 살고자 함이요, 둘째는 후세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다.
  혹 후세에 태어나는 어떤 사람은 여래를 본받아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을 것이다. 아난아, 여래는 이 때문에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 것이다.
  혹은 그는 그런 곳에 살면서 악을 멀리 여의기를 배우고 꾸준히 힘써 기운이 왕성한 마음을 얻어 현재에 즐겁게 산다. 그가 악을 멀리 여의기를 배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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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하게 노닌 뒤에 범행을 지니고 돌아오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13)들이 따른다. 그는 범행을 지니고 돌아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따르더라도 교만하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아난아, 만일 그가 움직이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여 징험을 얻었다. 나는 그에게는 장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4증상심(增上心)을 얻어 현재 즐겁게 산다면 그것은 본래 꾸준히 힘써 방일함이 없이 노닐었기 때문이요, 거기에 혹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은 제자가 많이 모였기 때문이다.
  또 아난아, 그 스승의 제자들도 일 없는 곳이나 숲이나 나무 밑에 살고, 혹은 고요하여 소리가 없고 멀리 떠나 악이 없으며 사람들이 없는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이치를 따라 편안히 앉는 것을 본받는다. 혹은 그런 곳에 살면서 멀리 떠나 정근(精勤)을 배우고 4증상심을 얻어 현재 즐겁게 산다. 그들이 멀리 떠나 꾸준히 힘써 안온하고 쾌락하게 노닌 뒤에는 범행을 지니고 돌아오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따른다. 그러나 그들은 범행을 지니고 돌아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따르면 곧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것을 번잡한 범행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착하지 않은 악법이고, 더러운 것으로서 미래 존재의 근본이 되며, 번거롭고 뜨거운 괴로움의 과보가 되고, 생 노 병 사의 원인이 되는 재앙이니, 이것을 번잡한 범행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번잡한 스승과 번잡한 제자보다도 이 번잡한 범행이 더 옳지 못하고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며, 사랑할 만한 것이 아니요, 가장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 못 된다.
  아난아, 그러므로 너희들은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아난아, 어떤 것이 제자가 스승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인가? 만일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고, 가엾이 여겨 불쌍하게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고 요익(饒益)을 구하며, 안온과 쾌락을 구하여 자비심을 낸다면, 이것은 요익을 위하고 쾌락을 위하며 요익의 즐거
  
13) 고려대장경에는 우바사(優婆私)로 되어 있고, 성본(聖本)에는 우바이(優婆夷)로 되어 있다. 이하 우바사를 우바이로 바 꾸어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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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만일 그 제자가 공경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과 그 다음 법으로 향해 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며 능히 선정[定]을 얻지 못하면, 이러한 제자는 스승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니라.
  아난아, 어떤 것이 제자가 스승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인가? 만일 스승이 제자를 위해 설법하고, 가엾이 여기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고 요익을 구하며, 안온과 쾌락을 구하여 자비심을 낸다면, 이것은 요익을 위하고 쾌락을 위하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제자가 공경하고 순종하여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이 법과 그 다음 법으로 향해 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며 능히 선정을 얻으면, 이러한 제자는 스승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너희들은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왜냐 하면 나는 도공(陶工)이 기와를 만들듯이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난아, 내가 말하는 것은 지극히 엄하고 급하며, 지극히 괴로운 것이다. 만일 진실히 가지는 자라면 반드시 거기에 머무르게 될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대공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3,678자이다. 『중아함경 』 제 49 권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모두 11,580자이고, 제5 후송의 「쌍품(雙品)」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모두 11,580자이다] 14)
  
14) 소경의 경문 글자 수를 합하면 11,579자인데 여기에서는 11,580자로 되어 있어 실제보다 1자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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