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요(禪要)

발문

通達無我法者 2008. 2. 18. 13:45

고봉화상선요발문

 

고령스님은 경을 열람하는 것은 낡은 종이를 뚫는 짓이라고 말하였고 (고령스님이 어려서 출가하여 스승의 곁을 떠나서 딴 에서 공부하여 깨달은 바가 있어서 은사스님 곁으로 돌아왔는데 스승이 목욕을 하는 데 등의 때를 밀어주기를 부탁하니 때를 밀면서 스승의 등을 손으로 두들기면서 말하기를 법당은 장엄하고 썩 좋기는 하지만 부처님이 신통스럽지 못하구나 말하자 스승이 이말을 듣고서는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제자를 뒤돌아보자 제자가 말하기를 부처님은 신통치가 않은데 방광은 제법하는구나 그렇게 말을 하였더니 스승이 제자를 대수롭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다음날 스승이 경을 보고 있는데 벌 한마리가 방에 들어왔다가 나갈려고 문창호지를 자꾸 두들기고 있었다.

그 옆에는 조그만 창문이 열려져 있는데도 열려져 있는 창문으로는 찾아서 나가지 못하고 닫혀져 있는 문창호지만 뚫고 나가려고 하니까 고령스님이 하는 말이 저 어리석은 것이 하루종일 묵은 종이만을 뚫으려 하고 있다.

그러한 따위로 해서는 백년을 뚫으려고 노력하여도 벗어날 기약이 있겠느냐 이렇게 말하였다.

이 말이 결국은 벌이 두들기는 창호지도 묵은 종이지만 그 스승이 보고 있는 경전도 묵은 종이에 글씨가 적혀 있는데 거기에서 어떠한 진리가 나타날 줄 것을 믿고서 경전만을 계속하여 들여다 본들 백년을 노력하여도 큰번뇌 미세한 번뇌 겹으로 미친듯이 일어나고 꺼지는 번뇌망상에서 벗어나서 나고 죽음이 본래 없는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였다.

결국은 스승이 제자에게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하고 물어서 제자에게서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승이 경전을 보는 것과 벌이 열려져 있는 문을 보고서 나가지 못하고 애써서 닫혀져 있는 창호지를 뚫고서 나갈려고 분주하게 아우성치는 것과 같다.)

륜편이라는 사람을 글 읽는 것을 술찌꺼기 맛보는 것이라고 말하니 (륜편이라는 사람은 수레바퀴를 깍는 기술자이니 일평생을 수레바퀴만을 깍아온 사람인데 그가 만든 수레바퀴는 좀처럼 고장이나 탈이 나지 않았다.

 

하루는 황제가 글을 읽는데 그앞에서 수레바퀴를 까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올라와서 황제께 물어 이르기를 황제께서 읽으시는 책에 무슨 말씀이 적혀 있습니까?

황제가 이르되 옛날 성현들의 말씀이니라 륜편이 묻기를 성현이 있습니까?

황제가 이르되 이미 돌아가셨나니라 륜편이 말하기를 그러면 황제께서 읽으시는 책은 옛성현의 술찌꺼기를 맛보는 것입니다.

황제가 이르기를 내가 글을 읽고 있는데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한 말을 하느냐 말이 있으면 옳거니와 말이 없으면 죽여 버리겠다.

륜편이 말하기를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제가 생각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수레바퀴 깍는 일을 아버지에게 배웠는데 아버지가 나에게 전하여 주지 못했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전하여 받지 못했고, 내가 나이가 팔십이 될 때까지 자식에게 수레바퀴 깍는 일을 가르켜 주려고 하여도 자식이 물려 받지 못하고, 내가 전하여 주지 못합니다.

무슨 이유로서 그러한가 하면 마음으로 이 정도의 실력이면 되었다고 한다면 손이 동시에 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빨리 한 즉 굳어져서 들어가지 않게되고 천천히 약하게되어 굳지 못하고 그것은 내마음으로 느껴서 내가 알게되고 할 때에 그것이 맞아 들어가는 것이고 주고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아버지에게도 배우지 못하고 살아있는 자식에게도 전하여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레바퀴 깍는 도리에서 우리가 체험한 기술을 전하여 주고 전하여 받는 것인데 옛날 성현들의 말씀은 성현들은 이미 죽어서 없어졌는데 성현들의 뼈는 이미 재가 되어 없어졌는데 말씀따위나 종이에 적어 놓은 것을 읽는다고 하여서 그것이 될 수가 없는 법이니

그것은 술찌꺼기를 맛보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제가 과연 그대의 말이 옳은 것이다 참으로 장한 일이다. 하고서는 받아 들였다).

두 사람이 말을 한 이유는 진실로 마음을 깨닫는 것은 가히 언어나 문자로써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라는 것은 방소가 없고 마음 바탕은 형상이 없으니 만일 언어나 문자가 아니라면 무엇으로써 의지하여 마음 근원을 밝힐 수가 있겠는가

이로써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비록 중생들의 근기를 따라서 교화하시고 이끌어 주시지만 간곡히 이루고 비밀하고 어느곳에도 치우치지 않은 법을 나타내 보이시나 능히 십이부경을 말씀하지 아니치 못하시며,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오셔서 비록 문자를 세우지 않으시나 주고 받는 시기에(때) 결국은 달마스님도 혜가스님에게 전할때에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만 혜가스님이 제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편하게 하여 주소서 말을 하니까 너의 마음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러면 너의 마음을 편하게하여 주겠노라 이렇게 말하자 제마음을 찾으려고 하여도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하기를 너의 마음은 이미 편하게 하여서 끝마쳤다.

이렇게 하여서 마음을 확연하게 깨달음을 인가하여 법을 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입으로 전하고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씀을 하셨으니,

또한 능히 말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개 도라는 것은 비록 언어나 문자에 있지는 않으나 실로 언어나 문자를 여의지 않는 것이고 특히 정미롭고 미묘한 취지(진리)가 말씀하신 도리의 격밖에 갖추어 있기 때문에 쉽게 엿볼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정밀한 진리란 말과 문자를 떠난 격외선에 있는데 세상의 참선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말에 끄달리고 집착을 해서 그 진리를 깨달아서 얻지를 못하고 다만,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을 보고 하늘에 있는 달을 보지 못한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서 언어와 문자가 장애가 된다고 하여서 고령스님이나 륜편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분노가 격발해서 낡은 종이를 뚫는다는 것과 술찌꺼기를 맛보고 있다는 것의 이러한 기록의 비웃음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언어나 문자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나 문자에 너무 끄달리어서 집착을 하기 때문에 마음 깨닫는 진리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와 문자는 바야흐로 마음을 깨달아 밝혀서 도의 법로를 나타내 보이는바니 애당초에 어찌 일찍기 도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었겠는가.

 

고봉화상의 설법이 구름같고 비 같거는 지공 홍군이 그 기특하고 비밀한 부분을 모아서 선요라고 이름을 짓고 영중사의 지현스님이 출판하고자 나무에 새기어서 그 전하는 일을 지역을 넓히어서 퍼지게 하니,

그물을 들어서 벼리를 얻는 일이며 참선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좋은 책이니 장차 참선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법어의 요긴한 뜻에 계합하여 마음 근원이 우주와 물이 아님을 확연하게 알게 하니 후세의 참선하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증독하려고 하는 마음이 가히 돈독하다.

참선하는 학자들이 고봉스님의 선요 가운데서 과연 능히 마음대로 맞게 구하여 배가 부를 때 음식을 마음껏 배가 부를 때 음식을 마음껏 배부르게 먹어서 전진해 나아가면 확연히 얼음이 풀리듯이 될 것이며,

반가운 듯이 근본이체에 순응하면 곧 공부해 나가는 순서 차제 진취, 전진해 나아가는 조략 지조방법을 고봉화상께서 이미 모든 것을 남김없이 잡아내어 보여주시니 고봉화상의 사상이 모두 이 글에 있건마는 특히 근심되는 것은 학자가 능히 맹렬히 의심을 붙잡아 화두 타파하지 못할까 근심하노라.

슬프다 의술이 뛰어난 편작의 약방문 가운데서 신령스러운 약이 갖추어져 있으니

혹은 신단이라고 이름지으며 혹은 무우선이라고 이름지은 약이 있으니

생을 돌이키고 죽음을 일으킴이 공이 눈깜짝하는 찰나에 있으니,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신을 집착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또 부지런히 의심을 계속하면 화두 타파하여 확철대오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이 선요 가운데에 있다.

 

고봉화상의 말씀이 어찌 너희들을 속이셨으리오.

참선하는 학자들은 행여라도 삼가 고령스님과 륜편의 말을 잘못 알아 듣고서 고봉화상의 순수한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조심한다면) 지공과 영중사의 지현스님의 공을 헛되이 베품이 아니되게 할 것이며,

또한 어록을 읽어보고서 마음을 깨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로지 앞서간 사람만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게 하리라 (고봉화상의 어록을 읽어보다가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고봉화상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고봉화상 이후에도 만일 어록을 읽어보아서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고봉화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또한 위대할 것이다.)

 

지원갑오 십월 십육일에 참선학자 청소 정명 주영원은 삼가 발하노라.

 

(*청소는 지역의 이름   정명은 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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