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1. 마음이 부처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6:15
내가 고질병을 치료하던 여가에 질문을 던지는 객승이 있어,
  그 질문에 응답한 것이 모여 한 책이 되었으니
  그 제목을 『산방야화(山房夜話)』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일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가져갈만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산방야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그때 그때 일어났던 느낌들을 말하다 보니 모두 20여 편의 책이 되었다.
  그래서 제목을 『동어서화(東語西話;이런 말 저런 말)』라고 했는데,
  책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는 조리있게 체계적으로 서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히 깨달으신 선배에게는 들려줄 것이 못 되고,
  후학들에게나 겨우 보여줄만 하다.」



1. 마음이 부처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얼굴이고,
아주 친한 듯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심성(心性)이다.
얼굴은 직접 볼 수 없다 해도 거울에 비추면 볼 수 있다.
그리고 심성은 그냥 알 수는 없지만, 투철하게 깨달으면 알 수 있다.
투철하게 깨닫지도 못하고 심성의 심오한 이치를 알려는 것은,
마치 거울을 버리고 자기의 얼굴을 보려는 것과 같다.

옛날에 대매산(大梅山)에 머물던 법상(法常;752∼839)스님이
마조(馬祖;709∼788)스님에게 묻기를,
"부처님이란 무엇입니까?" 하자,
"마음이 부처님이다[卽心是佛]" 고 대답했다.
그러자 법상스님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열 개의 태양이
일시에 비추듯 모든 미망과 번뇌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는 바로 대매산(大梅山)으로 가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곳에 자신을 한결같이 맡겨버렸다.
이것이야말로 투철하게 깨달은 좋은 본보기이다.

이로부터 `마음이 부처이다'고 한 말이 온 세상에 퍼졌으니,
이것은 현묘함을 참학하는 상근기 인재뿐만 아니라
일개 장사치·부엌데기·아녀자까지도
말할 때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마음이 무엇이냐?"고 다그쳐 질문하면
망연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이런 무리들은 그만 두고 말하지 않더라도,
더러는 평소에 참선공부 한다고 자처하는 수행자들이
그 심체(心體)를 노래하고 읊조려 지적하기를,
마치 얼굴이 거울 속에 선명하게 비추듯이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법상스님이 도달한 경지에는 좀처럼 미치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될까? 법상스님은 투철하게 깨달은 것이고,
그밖의 사람들은 다만 알음알이로 이해한[情解] 것이다.

그저 알음알이로 이해한 사람은 말은 오히려 교묘할지 몰라도,
그 종지(宗旨)에는 도리어 어두우며,
말이 기묘하면 기묘할수록 이치는 더더욱 혼미해진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얼굴을 비출 거울은 구할 수 있지만
심성을 밝히는 말씀에 관한 요점을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다만 불성〔性〕은 마음에 있는 것이니
깨달음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혹 이것을 믿지 않는 이라면 깨달음의 원인〔因地〕이 없으므로
스스로 깨달는 것〔果覺〕도 없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의 <믿음>은
누가 믿음을 내라고 꾸짖고 지도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며,
또 <믿음>을 내라고 권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직 믿음이 마음에서 우러나왔으니,
마치 굶주린 자가 음식 찾듯이 생각생각에 잠시도 쉬지 않고
알음알이와 사량분별을 싹 쓸어내어 철벽같은 믿음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눈 밝은 종사(宗師)의 기연(機緣)을 만나
깨달음의 문이 툭 터지면
마치 오랫 동안 잊었던 것을 홀연히 기억한 것과도 같았다.
이것이 바로 법상스님이 마조스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대답한 소식이니 어찌 우연히 그랬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투철하게 깨닫지도 못했으면서도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라는 말을 지껄이며,
알음알이의 허망한 분별로 이리저리 때도 없이 지껄인다.
이래서야 그저 말만 많아질 뿐
<마음>과 <부처>에 계합할 이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