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경어(參禪警語)

제 3장 -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납자에게 주는 글

通達無我法者 2008. 2. 29. 16:49
 

제 3장 -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납자에게 주는 글 

 

1. 지식으로 헤아리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 중에는 옛 큰스님들의 행적과 저서들을 뒤적이며 이론을 검토하여 지식을 구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언어로 된 불조의 가르침을 하나로 꿰뚫어서 도장을 하나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잣대로 삼는다.

 

그러다가 공안 하나라도 들게 되면 곧 알음알이로 따져 이해하려 하고 본래 참구해야 할 화두에는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남이 따져 물으면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니,

이는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혹 어떤 사람은 묻는 대로 바로 답해주거나 손가락을 곧추세우고 주먹을 쳐들거나 붓을 쥐고 일필휘지로 게송을 지어 납자들에게 보여주고 참구하도록 하면서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확실히 깨닫게 하는 방편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 알음알이가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순간에 잘못되었음을  알려 한다면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선지식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을 찾아야 되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생멸심만 켜져가서 오래되면 마가 달라붙어 거의 구제불능이 된다.

 

2. 고요한 경계만을 찾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어떤 이들은 바깥경계에 대해 싫증이 나서 떠날 마음이 생긴다.

그리하여 사람 없는 고요한 곳에 즐겨 머물면서 문득 힘을 얻었다고 느끼고는 그곳에 어떤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금이라도 시끄러운 경계를 만나게 되면 마음이 즐겁지 않게 되니, 이것은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오래 앉아있게 되면 고요한 경계에만 마음이 맞아 아득히 캄캄하여 아무런 지각도 상대도 없어진다.

 

비록 선정에 들었다 하더라도 마음이 응고되어 움직이지 않으니 소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조금만 경계인연을 만나면 곧 자유롭지 못하고,

聲色을 듣고 보게 되면 두렵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틈을 타서 마가 침입하고,

그 마력 때문에 모든 不善을 하게 되니 일생동안 수행한다 해도 아무 이익이 없게 된다.

 

이러한 병통은 모두 애초부터 잘못된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의정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여 선지식을 만나보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조용한 곳에서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설사 선지식을 만났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으니 천불이 출세해도 어찌할 수 없다.

 

3. 망념으로 망념을 다스리려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알음알이를 가지고 망심을 억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망심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맑고 고요하여 마음에 티끌 한 점 없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識心의 근원은 끝내 깨뜨리지 못하고서 맑고 고요하여 티끌 한 점 없는 그 경계를,

이치를 참구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다가 남에게 자기의 아픈 곳을 지적 당하면,

마치 물위에 뜬 호롱박을 자꾸만 눌러대는 꼴이 되니 이는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이러한 병통은 애초부터  화두를 참구할 적에 의정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심신을 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더라도 마치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과 같으며,

만일 알음알이를 끊어 단멸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단견외도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단멸 상태를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바깥 인연을 만났을 때  다시 식심을 끌어 일으켜 '맑고 티없는 경지' 정도로 聖스럽다는 생각을 내며 스스로 확철대오하는 방편을 얻었다고 여긴다.

 

이런 이를 풀어놓으면 미치광이가 되고 붙들어 두면 마가 되며,

세상에 나가 무지한 인간들을 속일 것이다. 그리하여 깊은 재앙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신심을 퇴보시키며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을 막게 되는 것이다.

 

4. 공(空)에 빠지는 장애

 

"참선하는 데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기 심신과 바깥 세계를 모두 공으로 돌리고, 텅 비어 아무 매일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경지에 다다라,

자기 심신이 있는 것도 세계가 있는 것도 보이지 않고,

안팎을 구분할 수 없이 모든 것이 공이 된다"라고 하는 이가 있다.

 

여기서 이런 경지가 바로 선이라 여기면서 '이렇게 공해질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앉아도 길을 가도 다 공이어서 오고감이 모두 공이다.

행주좌와 언제나 마치 허공 속에서 하는 듯하게 되니 이것은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집착하지 않는 경우는 완공에 빠져 캄캄 무지하게 되고, 집착하면 바로 마가 되어버리는데,

자기 스스로는 확철대오하는 방편을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그 공이 참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납자라면 의정을 일으키고 화두를 마치 하늘을 찌를 듯한 긴 칼인 양 생각하여 그 칼날에 부딪치는 사람은 목숨을 잃어버린다고 여겨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설사 공하여져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를 얻었다 해도 그것은 다만 '텅 비어 인식이 없는 상태'일 뿐 완전한 공부는 아니다.

 

5. 알음알이로 공안을 해석하는 장애

 

어떤 이들은 참선할 때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침내 알음알이로 헤아려 옛 스님들의 공안을 어지러이 천착해댄다.

그들은 공안에 대하여 전부를 들어주느니 부분만 들어주었느니 하며,

향상구니 향하구니 한다.

 

또는 이것은 주이며 저것은 객이고 어떤 것은 핵심적인 내용이며 어떤 것은 부수적인 이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알음알이로 따져 이해한 사람들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경지에 왔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비록 옛사람이 하셨던 꼭 그대로 도리를 설명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옛사람들의 한마디 말씀은 마치 솜뭉치 같아서 삼킬 수도 토할 수도 없으니,

어찌 공부하는 사람에게 많은 해석의 여지를 허락하여 알음알이를 이끌어내도록 하겠는가.

그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의정을 일으켜 온몸으로 부딪쳐 들어갈 수 있다면 해석의 여지와 알음알이는 그것들이 없어지기 전에라도 벌써 잠잠해질 것이다.

 

6. 4대(大) 육신에 주인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장애

 

참선하는 데 의정을 일으키지는 않고서 이 심신은 순전히 잠깐 동안의 인연이라고 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또 이렇게 생각한다. "그 가연인 심신 속에 오고가는 '한 물건'이 있어서 모양다리도 없는 것이 움직이기도 했다,

 

가만히 있기도 했다 하면서 6근을 통해서 빛을 놓고 땅을 흔든다.

그것이 흩어지면 온 세계에 다 퍼지고 거두어들이면 터럭만큼도 안된다"고.

 

그리하여 그 속에 도리가 있다고 착각하고는 의정을 일으켜 참구하려 하지 않고,

거기서 '나는 큰 일을 끝마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니 이는 생멸지심이지 선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생사심을 타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위와 같은 생각으로 다 되었다고 만족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알음알이에 희롱 당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눈감는 날이면 주인공이 되지못하고 알음알이가 끄는 대로 따라가서 지은 업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된다.

선업을 많이 쌓아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났다가 생주이멸로 자기 자신과 환경이 모두 시들어 가면 '불법 그것 영험 없더라' 한다.

 

이렇게  불법을 비방하였으므로 지옥이나 아귀에 떨어져 있다가 거기서 나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세월이 지난 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참선하는 데는 바른 선지식을 만나야 하며,

만일 스스로 공부를 이끌어나가는 경우라면 어디에고 집착해서는 안된다.

 

7. 일상의 작용에 진성이 있다고 보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은 일으키지 않고 견문각지와 일거수일투족을 가지고 그것을 자기의 신령스런 진성이라고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여기에서 헤아리고는 이것이 깨닫는 방편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사람을 만나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귀를 빳빳하게 세우며 손가락질하고 발로 차고 하면서 그것을 불법이라고 하나 이는 생멸심이지 선은 아니다.

옛날 어떤 스님은 이런 사람을 간질병이 발작한 환자와 같아서 선상에 앉아 귀신의 눈동자나 농락하는 꼴이라 하셨다.

 

이렇게 농락해가다가 4대로 된 육신에 흩어지는 날에 가서는 더이상 농락도 못하고 다시 한 가지의 악견이 생기니,

이것을 대단한 경지라고 여겨 대대로 전수케 하고 사람들의 공양을 받으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법을 물어오면 대뜸 일갈대성하거나 크게 한바탕 웃고 하니, 이런 사람은 자신이 이제껏 한 번도 참구하지 않아서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 비록 그가 착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마의 장난일 뿐 궁극적인 도는 아니다.

 

8. 유위공덕을 믿어 고행에 빠지는 장애

 

참선하는데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고서 有爲 공덕을 지어 해탈코자 하거나 혹은 고행을 하는 이가 있다.

그런 중에 겨울에 불도 피우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으며 누가 옷을 구걸하면 몽땅 벗어주고 자기는 얼어 죽어도 달갑게 여기는 일을 해탈이라 생각한다.

 

또는 밥을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는 굶어 죽어도 달갑게 여기는 것을 해탈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를 이루 다 말할 수는 없으나 총괄해 보면 모두 뽐내려는 속셈에서 나온 행위이니 무지한 이들을 속이는 짓이다.

 

저 무지한 사람들이 그를 생불이니 보살이니 하면서 신명을 다해 받들고 공양하나, 본인은 부처님 계율 중에 이런 것을 惡律儀法이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계율을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걸음마다 죄를 짓고 다니는 것이다.

또 어떤 무리들은 몸뚱이나 팔을 불로 태우며 예불참회하는 것을 공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세간법에 있어서라면 좋은 일이라 하겠으나 참구하는 본분에 있어서는 어디에  해당되는 일인가.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절대로 다른 일에서 찾지 말라!" 하셨는데, 예불도 딴 일이고 참회도 딴 일이라 한다면 갖가지 훌륭한 불사도 모두 딴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대들에게 이런 모든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한 곳에 마음을 쓰다 보면 이러한 모든 좋은 일이 의심을 일으키도록 돕고 선근을 늘린다.

그러다가 뒷날 도안이 홀연히 열리면 향 사루고 청소하는 일까지도 다 불사가 될 것이다.

 

9. 세속사를 무애행으로 착각하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문득 한가하게 처신하거나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춤과 노래가 나오고 스스로 즐거워한다.

혹은 물가나 숲속에서 시를 읊조리면서 담소하거나 저자거리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면서 자기 스스로를 공부 다 마친 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떤 선지식이 총림을 열고 법도를 세워 좌선이든 염불이든 혹은 어떤 수행이라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업신여기고 모독하려는 마음을 낸다.

 

자기는 도를 닦지 않으면서 남 닦는 일은 방해하고,

자기는 경을 봉독하거나 예불참회하지 않으면서 남이 하는 것을 방해한다.

또 자기는 참선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 참선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기는 총림을 열고 설법하지 못하면서 남이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는 도인 하나 세상에 나왔다 하면 어려운 질문을 몇 개 마련하여 대중이 다 모인 앞에서 하나하나 문답해가며 더러 일갈하기도 하고 손뼉 한 번 치기도 한다.

선지식이 이것을 귀신장난 같다고 보다가 간혹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그는 곧 사람들에게, "아무개 스님은 이런 소식도 알지 못하더라" 하니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이것은 다 생멸심이 다투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오래되면 마도에 끌려가 한없는 깊은 재앙을 만들며,

마가 내리는 복을 받아 모두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이런경우는 비록 처음 인연은 훌륭하다 하더라도 형편없는 결과를 초래하는것이니 슬픈 일이로다.

 

10. 대중생활을 피해 고요함에 빠지는 장애

 

참선하는 데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고서 대중과 함께 사는 것을 거동이 불편하고 구속이 심하여 매우 번거롭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사람 없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머물고자 하며 혹은 단칸 오두막을 찾아 고요하게 들어앉는다.

 

이들은 처음에는 주인공이 되어 눈을 딱 감고 마음을 굳게 먹으며 가부좌를 틀고 합장한 채 꼿꼿하게 공부해 간다.

그러다가 한 달 두 달, 혹은 1, 2년이 지나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무리들은 작심삼일이어서, 2, 3일 지나면 벌써 앉아 있지 못한다.

그리하여 책을 보거나 한가하게 놀기도 하며 노래나 시를 짓기도 한다.

그런 중에는 아예 문 잠그고 잠만 자는 이도 있으니,

이런 이들은 겉모양은 어엿한 출가자이나 내면은 속인이다.

 

또 어떤 형편없는 무리들은 염치도 모르고 인과를 믿지 않아서 몰래 탐욕을 행하며 사람을 만나면 함부로 입을 놀려 무지한 이들을 속인다.

그리고는 "나는 어떤 선지식을 만난 적이 있다"느니 "어느 큰스님의 법을 이었다"느니 하면서 무지한 이들이 이 말을 믿고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과 좋은 사이가 되어 혹은 도반이 되기도 하며,

혹은 불러들여 자기의 제자로 삼아 위에서 하는 일을 아랫사람이 본받게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그 잘못을 알지 못하고 반성하려 하지도 않으며,

또 바른 선지식을 만나 보려 하지도 않고 망령되게 저 혼자만 잘났다고 여겨 망언함을 보게 되니 이러한 무리들을 가엾은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대중생활을 싫어하고 자기 처소만을 찾는 이가 있으니,

어찌 한심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진정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망념이 싹트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참구하면서 피차간에 자극이 되어주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이다.

이렇게 하면 비록 도를 깨닫지는 못할지라도 결코 앞서 말한 경우와 같은 지경에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니,

납자들은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