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추회요(冥樞會要)

124. 일념에 중생의 마음을

通達無我法者 2008. 3. 5. 14:39
 

일념에 중생의 마음을

 

38-16-124 理事融通 非一非異 非有非無 不墮邊邪 方能悟入. 如理無分限 總曰無邊 事有分限 故名有邊. 若依理成事 理性全隱 則無邊卽邊 若會事歸理 事相全盡 則邊卽無邊. 今則不爾 不失理而事現云 無邊之邊 不壞事而理顯云 邊之無邊. 若定言一異 非一非異 非非一非非異等 盡同戱論 不契眞如. 故三無性論 云 復次無戱論故1) 名爲眞實 無戱論者 於相等 離一異虛妄故.



이()와 사()가 융통하여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니, 한 쪽에 치우치는 삿된 소견에 떨어지지 않아야 바야흐로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치는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총괄적으로 무변이라 하며, 현상은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유변이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이치에 의지하여 현상이 만들어지면 이치로서의 성품은 완전히 숨으므로 무변 자체가 유변이 되며, 만약 현상을 모아서 하나의 이치로 돌아간다면 현상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므로 유변 자체가 무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으니, 이치를 잃지 않고서도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무변 그대로의 유변이라 하고, 현상을 허물지 않고도 이치가 드러나는 것을 유변 그대로의 무변이라 한다. 만약 무언가 결정하여 같다거나 다른 것을 말하고, 비일비이(非一非異)나 비비일비비이(非非一非非異) 등을 말한다면 모두 희론과 같으니, 진여에 계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ꡔ삼무성론ꡕ에서는 “희론이 없기 때문에 진실이라 하니, 희론이 없다는 것은 어떤 모습에서 같다거나 다르다는 허망한 분별을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乃至 若眞如與相等異 卽有三過失. 一者 此眞如則非相等實體. 二者 修觀行則不依相等爲方便 得通達眞如. 三者 覺眞如已 則應未達相等諸法 不相關故也. 若眞如與相等是一 亦有三過. 一者 眞如旣無差別 相等亦應無差別. 二者 若見相等 卽見眞如. 三者 若見眞如 不能淸淨 如見相等 則無有聖人 無得解脫 無有涅槃. 世出世異.



만약 진여가 현상적 모습과 더불어 다르다고 한다면 곧 세 가지 과실이 있게 된다. 첫째는 진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 것의 실체가 아니라는 과실이다. 둘째는 관()을 수행하면서 어떤 모습을 의지하여 방편을 삼지 않고도 진여를 통달할 수 있다는 과실이다. 셋째는 이미 진여를 깨달아도 어떤 모습으로서 나타나는 모든 법을 아직 통달하지 않았다는 과실이니, 진여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서로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진여가 어떤 모습과 같다고 한다면 또한 세 가지 과실이 있게 된다. 첫째는 진여가 이미 차별이 없다면 진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때의 모습도 또한 응당 차별이 없어야 된다는 과실이다. 둘째는 만약 어떤 모습을 볼 때, 그것으로 곧 진여를 보았다는 과실이다. 셋째는 만약 진여를 보아도 청정할 수 없으리라는 과실이니, 이것은 마치 어떤 일반적인 모습을 볼 때에 따로 성인을 찾아 볼 수 없고, 해탈할 수 없으며, 열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세간과 출세간의 법은 다르기 때문이다.2)


是故 由離一異等 無戱論 故無變異. 無變異故 卽是眞實性也. 是知 非一非異 非有非空. 此宗鏡奧旨 自在圓融 謂欲一則一 欲異則異 欲存卽存 欲泯便泯. 異不礙一 泯不礙存 方爲自在 常一常異 常存常泯 名爲圓融. 又 如弄珠鈴之者 其珠不住空中 不落地上 不在手裏. 旣不在三處 亦不住一處. 不住空中 卽喩不住空觀 不落地上 卽喩不住假觀 不在手履 卽喩不住中觀. 旣不住三 亦不成一 則非一非三 而三而一 斯爲妙矣.



이 때문에 같다거나 다르다는 분별을 벗어나야 희론이 없고, 그러므로 변하고 달라짐이 없게 된다.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곧 진실한 성품이다. 그러므로 이()와 사()는 같거나 다른 것도 아니며, 있거나 없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종경의 오묘한 뜻은 자재하고 원융하여 같고자 하면 같고 다르고자 하면 다르며, 있고자 하면 있고 없고자 하면 없는 것을 말한다. 다르면서도 동일한 것을 장애하지 않고 없어지면서도 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 바야흐로 자재한 것이며, 항상 같으면서도 항상 다르고 항상 있으면서도 항상 사라지므로 원융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비유하면 마치 구슬 방울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으니, 구슬이 허공에 머무르지 않고 땅 위에도 떨어지지 않으며 손 안에도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이미 세 곳에 있지 않으면서도 또한 한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 여기에서 허공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공관(空觀)에 비유하고, 땅 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가관(假觀)에 비유하며, 손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중관(中觀)에 집착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세 곳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또한 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아, 곧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니면서 셋이고 하나이니, 이것이 묘한 도리이다.

若未偶斯旨 所有見聞 皆墮斷常 不成玄妙. 若入宗鏡 無往不眞 昔所不知 而今得知 昔所不見 如今得見 如大涅槃經 云 於一心中 則具足現五趣身. 所以者何 以得如來大涅槃經之勢力故. 是則 名爲昔所不得 而今得之 乃至 於一念中 遍知六趣衆生之心. 是名菩薩昔所不知 而今得知.



만일 이런 종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일체 보고 듣는 것이 모두 단견이나 상견에 떨어져 깊고 오묘한 도리를 이룰 수 없으나, 만약 종경에 들어간다면 어디에 가도 진실 아닌 것이 없다. 옛날에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 알 수 있고, 옛날에 보지 못했던 것을 지금 볼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마치 ꡔ대열반경ꡕ에서 “하나의 마음 가운데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아수라 및 일체 모든 중생을 다 갖추어 나타낸다”고 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ꡔ대열반경ꡕ에서 말하는 여래의 세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를 이름하여 옛날에 얻지 못한 것을 지금 얻었다고 하고, 한 생각 가운데에 두루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이것을 일러 보살이 옛날에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명추회요(冥樞會要)'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6. 사념처란 무엇인가  (0) 2008.03.05
125. 사념처에 의지하라  (0) 2008.03.05
123. 지혜의 차별에 수순  (0) 2008.03.05
122. 삼매에 머문다  (0) 2008.03.05
121. 열 가지 법을 동시에  (0) 2008.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