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증도가 - 2 - 성철스님 편역

通達無我法者 2008. 3. 10. 21:36

 

 

61.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하면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도다

      활달공발인과하야 망망탕탕초앙화로다
      豁達空撥因果       茫茫蕩蕩招殃禍

앞에서는 '모양도 업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다'고  쌍차(雙遮)를 말하여 청룡도를 가지고 싹둑 끊어 버리듯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면 흔히 공변(空邊)에 떨어져서 인과를 다 내버리는 것이 됩니다.

예전에 그런 일이 많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일체가 다 공함을 알게 되면 선과 악이 다 공해 버려서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곧 선이 됩니다. 그런 경계에  떨어지면 흔히 사람을 죽이든, 소를 잡아 먹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일체가 다 공한데 무슨 인과가 있겠느냐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되면 한 없는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그림자 따르듯이 선인(善因)에 선과(善果)로 인과는 역연한 것이어서, 무생(無生)을 철증(徹證)하기 이전에는 지은 업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62.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니
       물을 피하다가 도리어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기유착공병역연이니 환여피익이투화로다
      棄有著空病亦然       還如避溺而投火

있다[有]는 견해를 버리라고 하면 공(空)에 집착하는 수가  많은데 그러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앙화를 받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며 그 병은 있음에  집착하는 병과 똑같아서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피하다가 도리어 불에 타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물이란 있음[有]에 비유한 것이고 불이란 공에 비유한 것입니다. 공(空)도 병이고 있음[有]도 병이므로 공과 있음을 한꺼번에 버려야만 참다운 해탈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을 버리고 있음[有]을 집착하거나 있음[有]을 버리고 공(空)에 집착하거나 하면 병은 같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사윤회의 길은 마찬가지로서 해탈의 길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쳐서 불법을 성취하려면 공(空)과 있음[有]을 다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있음[有]과 공(空)을 완전히 버리기 전에는 중도와 실상을 모르는 것이고 공부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 생사윤회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63.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도다

      사망심취진리여 취사지심이 성교위로다
      捨妄心取眞理    取捨之心    成巧僞

있음[有]을 버리고 공(空)을 취하려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고 한다면 이것도  양변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공부를 성취하고 중도를 바로 알려면 버리고 취하는 취사심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는 것도 병이고 진리를 버리고 망상을 취하는 것도 모두가  병이므로 진리와 망상을 한꺼번에 다 버려야만 중도실상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지, 진리와 망상 어느 것에든지 집착한다면  전부가 다 병이므로 중도실상은 영원토록 모르는 것입니다. 양변을 다 버려서 쌍차(雙遮)가 되면 쌍조(雙照)가 안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면 영원토록 중도를 모르게 되니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불법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64.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학인이 불료용수행하니 진성인적장위자로다
      學人    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배우는 사람이 잘 모르고 수행한다'는 것은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는 것과 같이 공부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참된 중도정견이 아니고 바른 길이 아니므로 그렇게 공부하면 어떻게 되느냐? 도적놈을 인정하여 자기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리고 망상을 취하려 하든지 망(妄)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 하든지간에 양변에 집착하기만 하면 변견이 되어서 불법과는 정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바른 길로 가려면 진(眞),망(妄)을 다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쪽으로 집착만하면 도적놈을  자식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법을 절대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진(眞),망(妄)의 양변을 다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버리고 망을 취하거나 망을 버리고 진리를 취한다고 하는 그 취사심은 왜 생기는 것인가?

  65.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손법재멸공덕은 막불유사심의식이라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법의 재물을 손해내고 공덕을 없애는 병은 심,의,식에  있다'는 말입니다. 심(心)은 제팔 아뢰야식, 의(意)는  제칠 말라식, 식(識)은 제육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통팔식(通八識) 전체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법의 재물을 성취하고 공덕을  완성시키려면 근본 장애물인 심,의,식의 근본을 뽑아 버려야지 이것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으면 절대로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종에 있어서 공부라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볼 때도 분별의식인 제육 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중간의식인 제칠 말라식과 제팔 아뢰야식의 무기무심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두터운 관문이 격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망상을 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기무심인 제팔 아뢰야식까지 완전히 버려야만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고 자성을 바로 깨친 것이며, 중도를 성취한 것입니다.

자성을 깨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심,의,식의 구름이 진여본성을 덮어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이 심,의,식의 구름부터 걷어 버려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영원히 자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66. 그러므로 선문에선 마음을 물리치고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가도다

      시이로 선문엔 료각심하고 돈입무생지견력이로다
      是以    禪門    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마음[心]이란 제팔 아뢰야를 말한 것인데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어버리면 제칠 말라식과 제육 의식은 자연히 끊어져 버리는 것이므로 마치 나무 뿌리를 뽑아 버리면 가지나  잎은 저절로 말라 죽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종에 있어서는 근본무명인 제팔 아뢰야인 심(心), 이것을근본적으로 뿌리 뽑아야지 그것을 뿌리 뽑기 전에는 공부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깨쳤다고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제팔 아뢰야식을 멸각하여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니 제팔 아뢰야식을 뿌리 뽑기 전에는 절대로 깨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팔 아뢰야식의 근본무명을 끊어버리면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돈오(頓悟)며 증오(證悟)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 주장하는 '남이 없는 지견'이 '제팔 아뢰야 무기식을 다 부셔버리고 미세망상까지도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므로 아직 분별심, 생멸심이 그래도 남아있는 것을 깨친 것[悟]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선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별심은 말할 것도 없고 무분별심인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까지도 뿌리채 뽑아 버리면 '남이 없는 것[無生]'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즉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이며, '마치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담은 것과 같은 것'이며, 중도실상이며, 견성이며, 구경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부처님과 부처님, 조사와 조사가 전한 것이지 딴 것을 전한 것은 아닙니다.

  67.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대장부병혜검하니 반야봉혜금강염이로다
      大丈夫秉慧劍       般若鋒兮金剛焰

대장부가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을 완전히 타파하고 진여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면 그때가 바로 출격대장부,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인 것입니다.

우리가 출격대장부가 되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면 그 때는 대지혜의 검을 손에 잡게 된 때라는 것입니다. 즉 구경각을 성취해서 무생법인을 증한 이것이 일체종지를 성취하여 지혜의 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반야의 칼날이란 칼날같이 서슬이 시퍼렇게 무섭고, 금강의 불꽃이란 불꽃처럼 맹렬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가 어리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성을  완전히 깨쳐서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그 반야의 칼날이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살리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살리는 대자유로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금강의 불꽃이란 부술래야 부술 수  없어서 부처도 손 댈 수 없고 조사도 손댈 수 없으며, 그런 동시에 시방세계를 다 태우는 맹렬한 불꽃보다 더 무서워서 부처와 조사도 거기에 어리댈 수가 없는 것이니 자칫 잘못하다간 부처와 조사가 상신실명(喪身失命)하는 곳입니다. 그러한 반야의 칼날과 금강의 불꽃을 성취하는 것은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68.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일찌기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렸도다

      비단능최                   외도심이요 조증락각천마담이로다
      非但能[手+崔:꺽을 최]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반야의 칼날과 금강의 불꽃이 되어 외도의 마음만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요 일찌기 천상의 마구니를 낙담시켰다는 것입니다. 또 외도와 천상의 마구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조사도 여기서는 설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69. 법의 우뢰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도다

      진법뢰격법고여 포자운혜쇄감로로다
      震法雷擊法鼓    布慈雲兮灑甘露

'법의 우뢰가 진동한다'함은 하늘을 울리고 천지를 진동하는 사자후가 삼천대천세계를 뒤흔들고도 남는다는 것이며, '법의 북을 두두린다'는 것은 시방세계에 그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입니다. '법의 북'이란 보통의 북이 아니라 '도독고(塗毒鼓)'라 하여 북에다 독을 잔뜩 발라서 누구든지 그 소리를 들으면 죽지 않는중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다 죽는다는 것은 중생의 근본무명이 다 끊어져서 모두가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법의 우뢰가 진동하고 법의 북이 울리면 일체 중생이 다 죽으니 그 때 모두가 부처가 되어 근본무명이 끊어지며 대자대비의 구름이 시방세계를 덮고 감로수가 시방세계에 뿌려져서 일체 중생이 해탈케 된다는 것입니다.

  70.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함이 그지 없으니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도다.

      용상이 축답윤무변하니 삼승오성이 개성오로다
      龍象    蹴踏潤無邊       三乘五性     皆惺悟

용과 코끼리는 짐승 중에서는 가장 수승한 것인데 중생 가운데 삼현(三賢), 십성(十聖)등의 훌륭한 이를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용과 코끼리가 감로수를 마시고 도독고의 소리를 들어 중생의 무명이 다 끊어져서 도를 이루고 열반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용과 코끼리가 서로 차고 밟는다'는 것은 싸움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붐빈다는 뜻으로 서로서로 발길을 부비고 내왕하여 활동한다는 것이며, '윤택하기 그지 없다'는 것은  그 활동이 자유자재함을 말한 것입니다.

'삼승과 오성이 다 깨쳤다'는 것은 일체 중생이 성불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가 다 포함됩니다.

삼승(三乘)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말합니다. 오성(五性)이란 원각경에서는 첫째 범부성(凡夫性)으로서 한 털끝만치도 미혹을 끊지 못한 사람을 말하며, 둘째 이승성(二乘性)으로서 성문,연각의 이승을 말하며, 셋째 보살성(菩薩性)으로서 육도만행을 닦아서 성불한다는 사람을 말하며, 네째 부정성(不定性)으로서 범부라 할 수도 없고 이승이라할 수도 없고 보살이라 할 수도 없는 사람을 말하며, 다섯째  외도성(外道性)으로서 외도의 삿된 말을 믿고 아직 불교의 바른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각경]에서는 이 오성(五性)의 사람들이 어쨌든 모두 성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가스님 말씀은 결국 외도든가 부정이든가 마구니든가 할 것 없이 북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고 감로수를  한방울이라도 마시면 전체가 다 깨쳐 가지고 성도(成道)를 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곧 이 반야의 힘이 광대무변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71.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순수한 제호를 내다 나 항상 받는도다

      설산비니         갱무잡이라  순출제        호       아상납이로다
      雪山肥[月+ 貳:]更無雜       純出[酉+是][酉+胡]我常納

비니란 히말라야산에서 나는 풀이름인데 천상천하에 그렇게 곱고 부드럽고 맛이 있는 풀이 없다고 합니다. 백우(白牛)가 있어 이 비니초만 먹고 산다는데 백우는 우리의 자성을, 비니초란 진여대용을 비유한 것입니다.

설산의 비니초가 있는 곳에는 다른 풀이 하나도 없듯이 진여대용 가운데는 객진번뇌,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이 볼 때는 잡초와 가시덤불만이 가득한데 어째서 비니초만 예를 들어서 말하느냐 하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눈 감은 사람은 언제든지 캄캄하고 암흑뿐이라도 눈 뜬 사람이 볼 때는 모두가 밝고 밝은 광명뿐이기 때문입니다. 눈 감은 사람이 '어둡다'한다고 어두운 것이 있느냐 하면 어두운 것은 없으며, 어둡다고 하는 그 사람도 광명 속에 살면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둡다 어둡다'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방세계를 돌아봐도 비니초를 내놓고는 다른 풀이 없듯이 중생이 모두 진여의 대광명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호란 지금의 치즈같은 것인데 비니초만 먹고 사는 흰 소의 젖을 짜서 최고로 맛 좋은 치즈로 만든 것을 제호상미(上味)라 합니다. 이것도 진여자성을 비유한 것으로 백우가 비니초를 먹고 내놓은 것을 제호상미라고 하니 모든 것이 진여뿐이고 진여자성을 제하고는 다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시방세계를 둘러봐도 진여광명과 진여대용 뿐인데 그것을 이름하여 비니초 또는 제호상미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무상정각을 이룬 최상의 풀이요 최상의 불사약인 것입니다. 그러면 비니초를 먹고 사는 백우가 내놓은 제호상미를 먹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어찌 되냐?

  72.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일성이 원통일체성하고 일법이               변함일체법하니
      一性    圓通一切性       一法   [人人+扁:두루 변]含一切法 

[화엄경]에도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만 영가스님이 자신의 깨친 경계에서 보니 누구든지 자성을 완전히 깨칠 것 같으면  이처럼 융통자재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73.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일월이 보현일체수라 일체수월을 일월섭이로다
      一月    普現一切水    一切水月    一月攝

하늘에 있는 달은 하나 뿐인데 이것이 천강만수(千江萬水)에 비치어서 달이 천개 만개가 되고, 그 천강만수(千江萬水)에 있는 달은 모두 하늘에 있는 달 하나가 거두워 잡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주변함용관(周[人人+扁]含容觀)과 같습니다. 주변이란 전체를 비추는 것을 말하며 함용(含容)이란, 사사무애(事事無碍)하여 참으로 원융자재한 것을 말하니 이것을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라 합니다.

누구든지 자성의 마니주를 확실히 알아서 중도를 성취하면 원융자재한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과 조사가 이 부사의해탈경계인 중도정각을 성취한 것입니다.

  74.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제불법신이 입아성하고 아성이 환공여래합이라
       諸佛法身   入我性        我性    還共如來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내 자성 가운데로 들어온다 하니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있는 것으로 안다면 큰 잘못입니다. 말로 표현하자니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내 자성 이대로가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고, 모든 부처님의 법신 이대로가 내 자성이라는 말입니다. 자성이 즉 법신이고 법신이 즉 자성이라는 것입니다.

'내 자성이 여래와 합해 있다'하는 것은 서로서로 둘이 아니어서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로서, 부처 내놓고 중생이  따로 없고 중생 내놓고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천상에 있는 달 내놓고 물에 비친 달이 따로 없고 물에 비친 달 내놓고 천상에 있는 달이 따로 없듯이, 중생이 곧 부처고 부처가 곧  중생이며 법성(法性)이 즉 아성(我性)이고 아성이 즉 법성이라 서로 서로 원융자재해서 부사의해탈경계를 이루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75.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다

      일지에 구족일체지하니 비색비심비행업이로다
      一地    具足一切地        非色非心非行業

'하나가 곧 일체'라는 말을 한번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 지위에 모든 지위가 구족한다'하니 어떤 모양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양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여서 일체 명상이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명상이 다 떨어지면 그것 뿐이냐?

  76.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도다

      탄지원성팔만문하고 찰나에 멸각삼지겁이로다
      彈指圓成八萬門       刹那     滅却三祗劫

'손가락을 퉁긴다'는 것은 한가로운 모습으로 짧은 시간과 힘 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다'함은 쌍차(雙遮)한 데서 말한 것이고, 여기서 전부를 긍정한 쌍조(雙照)로써 대광명의 세계를 말한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여기에 원만구족하여 색도 있고 마음도 있고 중생도 있고 부처도 있고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어서, 산은 산 물은 물 그래도 완연하게 현저합니다. 현저하다고 하여 어떤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장애부사의법계(無障碍不思義法界)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삼아승지겁이 없어져 버려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아니하고 대대(待對)가 끊어져서 결국에 가서는 절대(絶對)라는 이름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로 하자니 어쩔 수 없이 이것을 부사의해탈경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77.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일체수구비수구여 여오영각하교섭가
       一切數句非數句    與吾靈覺何交涉

'수구비수구(數句非數句)'는 [능가경]에 나오는 말로써 여러가지 불교의 법수(法數)를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구비수구'란 차별 법상(法相)을 나열한 것으로 그것은 중생을 위해서 부처님이 방편으로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지 자성을 깨친 분상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수구비수구'만 관계 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자성을 깨쳐 놓고 보면 부처님이 설하시고 조사스님네가 설하신 팔만대장경과 천칠백 공안이 여기 와서는 모두 빙소와해(氷銷瓦解)로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부처와 조사도 여기 와서는 아무 교섭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활구(活句) 곧 산 법문을 바로 깨치고 보면 팔만대장경과 부처와 조사도 관계없고 공안도 관계없는 대열반의 활로를 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도 종기나 부스럼의 고름을 닦아낸 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성을 깨친 모습은 어떤 것인가?

  78.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여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불가훼불가찬이여 체약허공물애안이로다
      不可毁不可讚       體若虛空勿涯岸

깨달음의 세계는 부처와 조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니 오직 증득해야만 알지 증득하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며, 또한 물을 먹어 봐야만 물의 덥고 차가운 것을 알 수 있듯이 깨치지 못한 사람은 깨친 소식을 영원히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칭찬해야 되겠느냐, 욕을 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는 비방하여 반대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무슨 명상(名相)이 있어야만 욕을 하거나 칭찬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일체 명상이 다 떨어졌는데 어찌 거기 가서 칭찬할 수 있으며 욕을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세의 부처님들이 일시에 출현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찬탄한다 해도 이것을 털끝만큼도 찬탄할 수 없고 시방세계가 전체가 마구니 입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욕을 한다 하여도 털끝 만큼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명상이 다 떨어진 곳이 과연 어떤 것이냐 하면,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성은 마치 허공이라 어떤 명상도 없어서 무엇을 붙잡을 수도 없고, 보고 욕을 할 수도, 칭찬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허공이란 누구든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고, 기와 끝이 없어서 무한하다고 하나 무한하다는 그런 명상조차도 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면 이것을 소개하여 칭찬하려고 해도 칭찬할 수 없고 마구니가 아무리 이것을 욕하려고 해도 욕할 수 없으니, 그것은 실제로 허공과 같이 명상이 다 떨어지고 시간과 공간이 끊어져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진(眞)이라 하기도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기도 하고 불성(佛性)이라 하기도 하고 부처[佛]라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기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는 말들이라는 것입니다.

  79.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도다

      불리당처상담연하니 멱즉지군불가견이로다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우리가 일상 행(行),주(住),좌(坐),와(臥)에서 이 물건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고 언제든지 이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서도, 진리의 광명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지 항상 그 광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읍니다. 그래서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다'는 것입니다. 담연(湛然)이란 청정하여 때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진여자성이란 일체 중생인 유정(有情),무정(無情)이 다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항상 청정하여 때가 없습니다.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다' 함은, 찾으면 분명히 알지만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배 고프면 밥 달라하고 추우면 옷 달라고 하니 분명히 알지만 그 자체를 찾아보려고 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찾은 즉 그대를 안다'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한 것으로 진여 대용이 그대로 있으니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쌍차(雙遮)가 되어서 일체 명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에 볼래야 볼 수 없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이차(照 而遮)하고 차이조(遮而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모든 것이 다 청정무구(淸淨無垢)하여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그걸 찾아볼려고 해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해석하는데, 그렇게 되면 명상이 끊어진 것만 가지고 주장하게 되는 것으로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한 중도정견은 아닙니다.

혜가스님이 '밝고 밝게 항상 아니 말로써 미칠 수 없다[了了常 知나 言之不可及]'는 말씀과 같으니 거기에서 해가스님은 달마스님에게서 인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밝고 밝게 항상 안다'는 것은 곧 '찾은 즉 그대를 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로써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명상이 다 끊어져서 말할래야 말할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으며 들을래야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쌍차쌍조한 차조동시가 되어 전체가 다 드러나서 중도정견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찾으려해도 볼 수 없다'고 하면 이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라 변견적인 해석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80.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취부득사부득하니 불가득중에 지마득이로다
      取不得捨不得       不可得中     只   得

모든 명상이 다 떨어진 진여자성에서는 한 명상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명상이 다 떨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전체가 허공 속에 건립되어 있지만, 허공은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 뜻은 모든 명상이 본래 공한 것을 나타낸 것이니, 앞 귀절의 '당처를 여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기에서 그치고 만다면 일종의 단견에 떨어지게 되므로 중도정견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중도정견이 되느냐?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찾아보면 분명하게 역력히 항상 알 수 있지만 모든 명상이 다 떨어져서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래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불교의 근본인 중도정견이 확립되는 것이지 만약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다'는 여기에만 치우쳐 해석하게 되면 실지로 정견이 아니고 변견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하여야만 위 귀절의 바른 해석입니다.

  81.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도다

      묵시설설시묵이여 대시문개무옹색이로다
      默時說說時默       大施門開無壅塞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설(說)과 묵(默), 묵이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을 때로서 아주 적적(寂寂)한 것을 말하며, 설이란 이야기할 때로써 아주 시끄러운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묵이란 차(遮)를 말하고 설이란 조(照)를 말합니다. 거기에서는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묵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묵묵하다'는 것으로써, 묵이 곧 설이고 설이 곧 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쌍차(雙遮)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한다'는 것이 될 것 같으면 설과 묵이 원융하여 무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할 때가 가만히 있을 때이고 가만히 있을 때가 말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함이 있어서 말과 묵이 완전히 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움직임 가운데 머물음이 있고 머무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서 움직임이 머물음이고 머물음이 움직임이며 진(眞)이 곧 가(假)요 가(假)가 곧 진(眞)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양변이 원융무애하고 융통자재한 것을 표현하여 '묵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묵묵하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전체에 다 통하는 것입니다.

'크게 베푸는 문을 열어 옹색함이 없다'는 것은 일체가 서로 다 원융하게 통해서 무애자재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자재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와서는 묵과 설이 통하는 동시에 선과 악이 통하고 마구니와 부처가 통합니다. 생멸이 완전히 끊어진 부사의해탈경계에서 진여대용이 현전한 것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곧 사사무애(事事無碍)이며 이사무애(理事無碍)입니다.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 없다'한 이 자체를 분명히 알 것 같으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해서 하나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애자재한 쌍차쌍조한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되겠느냐?

  82.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유인이 문아해하종커던 보도마하반야력하라
      有人     問我解何宗       報道摩   般若力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종취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마하반야의 힘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어라'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는 대지혜이니 대지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말합니다. 일체종지는 구경각을 성취함을 말하며 반야(般若)란 중도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경법을 성취해서 일체에 조금도 걸림이 없고 구애됨이 없는 자재를 얻는 것은 곧 마하반야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83.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지 못하고
       역행,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한다

      혹시혹비인불식이요 역행순행천막측이로다
      或是或非人不識        逆行順行天莫測

'혹은 옳기도 하고 혹은 그르기도 함을 사람이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상(我相)도 인상(人相)도 다 떨어졌기 때문이니, '혹은 옳고 혹은 그르다'고 하여 무슨 옳고 그름[是非]을 말하는 줄 알아서는 큰 오해입니다. 여기서는 옳음과 그름이 끊어져서 쌍차한 곳에서 참으로 쌍조가 되어 옳음과 그름이 무애 자재하다는 것입니다. 옳다해도 좋고 그르다 해도 좋고 옳음이 곧 그름이요 그름이 곧 옮음으로써 무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 수 없는 가운데 혹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것입 니다.

'혹은 옳고 혹은 그르다'라는 것은 쌍조를 먼저 말해놓고 '사람이 알지 못하다'함은 쌍차를 말한 것으로써 조이차(照而遮)하여 원융무애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역(逆)과 순(順)이란 정반대인데 '역행을 하든지 순행을 하든지 하늘도 모른다'하는 것은 부처도 모르고 조사도 모르는 것인데 하늘인들 알 수 있으며 사람인들 알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역행을 하던지 순행을 하던지 혹을  옳다든지 그르다든지간에  이것은 단순히 옳음과 그름, 역과 순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완전히 여읜 중도정견으로 쌍조한데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마구니와 부처까지도 떨어져서 인간도 알 수 없고 하늘도 알 수 없어서 누가 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하는 것입니다. 일체 알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역행도 할 수 있고 순행도 할 수 있으며 옳음도 할 수 있고 그름도 할 수 있어서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영원토록 부사의해탈경계에서  열반로를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애자재하고 호호탕탕한 대해탈경계는 어떻게 해서 얻었느냐?

  84. 나는 일찌기 많은 겁 지나며 수행하였으니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함이 아니로다

      오조증경다겁수라 불시등한상광혹이로다
      吾早曾經多劫修    不是等閑相    惑

나는 저 과거 진묵겁전(塵墨劫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세월동안 정법을 믿고 무한한 노력을 해서 이 법을 성취한 것이니 아무 노력없이 아이들 장난하듯이 얻은 것은 아니고 말할 수 없는 노력을 했더라는 것입니다.

'예사롭게 서로 속여 미혹케함이 아니다'함은 이러한 부사의해 탈경계를 일시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세월동안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서 성취한 것이지 쉽게 얻은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한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는 말과는 반대가 된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으나, 저 과거를 통해 봐서는 그 사람이 무한한 노력을 한 것이지 금생에 조금 노력해서 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동안 무한한 노력을 하여 모든 인연이 성숙되어 어떤 기연(機緣)이 있어서 확철히 깨치게 되는 것이지 아무런  노력없이 쉽게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상대도를 깨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85.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도다

      건법당입종지여 명명불칙조계시로다
      建法幢立宗旨    明明佛勅曹溪是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세운다' 함은 무애자재한 대해탈 경계를 나 혼자만이 수용하고 여기서 머물고 말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묘한 법을 깨쳐서 내가 완전히 수용할 것 같으면 일체 중생에게 보시를 해야 하고 공양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이끌어 자성을 깨치게 해야 되는 것이지 자기 혼자만 해탈의 길로 나갈 것 같으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고 외도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펴기 위해서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세워서 일체 중생에게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법을 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의 법을 부촉하였느냐 하면 조계산의 육조 혜능대사에게 이 정법을 전하게 해서 일체 중생들이 이 정법을 배우도록 유촉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조대사가 그냥 난데없이 평지돌출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부촉한 법을 이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영가스님이 강력히 주장하는 것입니다.

  86. 첫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등불을 전하니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제일가섭이 수전등하니 이십팔대는 서천기로다
      第一迦葉    首傳燈        二十八代    西天記

첫째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등불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등불이란 밤길 갈 때 밝히는 불이 아니라 '마음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이란 번뇌망상에 덮혀서 마음 등불의 빛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캄캄하여 자기 눈으로도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 번뇌망상을 다 없애 버리고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뿌리 뽑아 버릴 것 같으면 자성의 등불이 켜져서 자성의 광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이것이 실지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以心傳心]'이며 '부처님 마음을 깨치는 종[悟佛心宗]'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의 등불을 부처님으로부터 누가 제일 먼저 받았느냐 하면, 가섭존자가 부처님 근본법을 바로 깨쳐서 마음의 등불을 전해 받았고, 그 이후로 서천(西天) 인도에서 이십팔대를 이어 전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등(傳燈), 등불을 전했다고 하고 그 전한 기록을 [전등록(傳燈錄)]이라 합니다.

  87.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보리달마가 첫 조사가 되었도다

      법동류입차토하여는 보리달마위초조로다
      法東流入此土           菩提達磨爲初祖

인도에서는 가섭존자가 처음 법을 받아 이십팔대를 내려왔는데 중국에 와서는 보리달마가 처음으로 이 법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보리달마가 자기의 인연이 중국에 있을 알게 되고 스승인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도 동토에 가서 대법을 전하라는 수기를 주었습니다. 그렇게해서 달마스님이 처음으로 중국에 와서 선(禪)의 정법을 전한 첫 조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88. 육대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뒷 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랴

      육대전의는 천하문이라 후인득도하궁수아
      六代傳衣    天下聞        後人得道何窮數

'육대동안 옷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갖고 온 가사를 말하는데, 그동안에는 세상사람들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것'만으로서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여 이십팔대로 전해 내려온 법의 표시인 가사(袈裟)를 중국에서 와서 육대동안을 전한 것을 천하가 다 안다는 것입니다.

육조스님 이후로는 모든 믿음이 다 갖추어진 만큼 옷을 전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그 뒤부터는 가사를 전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옷을 전해 받지 못한 뒷사람들은 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육조스님께서 이제 선(禪)에 대한 믿음이 천하에 바로 섰기 때문에 옷을 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옷을 전하지 않은 것이지, 도를 바로 깨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옷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흔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육조대사가 옷을 전하지 않은 것은 옷을 전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전하지 아니했다'고 크게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은 육조대사 이후로 무애자재한 대도를 성취한 대조사들이 많다는 것을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가스님이 '뒷 사람들도 도를 얻은 사람이 한량없이 많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등록]에 드러난 사람들도 많지만 그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알지 못하는 숨은 도인들이 더 많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등록]에 드러난 사람과 드러나지 않은 사람을 다 친다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전등록] 등에 바로 깨치지 못한 사람들도 기록된 경우가 있는데 혹 편집한 사람들의 잘못일 수 있기 때문에 [전등록] 등에만 표준삼을 수는 없지만,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내려 오면서 육조대사와 다름없는 대조사들이 무한으로 많이 있습니다.

육조스님이 옷을 전하지 아니했다고 해서 도를 깨친 사람이 없어서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시의 영가스님의 말씀에서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89.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진불립망본공이여 유무구견불공공이라
      眞不立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

진(眞)과 망(妄)은 상대법, 변견이기 때문에 둘 다 버려야 합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서 진(眞)도 서지 못하고 망(妄)도 본래 공해서 진(眞)과 망(妄)이 다 없어지니 공하고 공한 것도 아니다는 말입니다.

참됨과 망이 다 서지 못하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서 공한 것 뿐이라면 공하고 공한 것[空空]뿐으로서 공공적적(空空寂寂)한 것만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공공적적한 여기에 머물 것 같으면 단공(斷空)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나니 공하고 공함도 아니다'고 한 것이니, 이곳이 참으로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곳'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버린다'고 함은 쌍차를,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는 것은 쌍조를 표현한 것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하지 않고 공함이냐?

  90.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이십공문에 원불착하니 일성여래체자동이로다
      二十空門   元不著         一性如來體自同

이십 공문에 참으로 집착하지 아니하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이 한 성품 즉 자성(自性)을 깨쳐서 모두 성불하고 삼매를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자성 내놓고 여래가 따로 없고 중도가 따로 없으며 구경각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空),여래(如來),불(佛),조사(祖師),열반(涅槃) 등의 수천 수만 가지 이름으로 어떠한 표현을 하든지간에 그것은 '한 가지 성품'으로서 자성 하나로 모두가 일관되고 있어서 본체가 꼭 같다는 말입니다. 중생도 같고 외도도 같고 마구니도 같아서 '한가지 성 품'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이것을 바로 알아서 쓰느냐 못쓰느냐 하는 것일 뿐, 근본 자성 자체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로 개척해서 수용하는 사람은 부사의 해탈경계에서 무애자재하게 놀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매(昧)해서 잘 활용하지 못하면 중생이며 외도며 마구니인 것입니다.

  91.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심시근법시진이니 양종은 유여경상흔이라
      心是根法是塵        兩種    猶如鏡上痕

마음[心]과 법[法], 이것은 주관과 객관을 쉽게 표현해 말한 것입니다. 마음이니 법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변견이며 망이여서 중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양변을  버려야만 중도실상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며 자성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라 하든지 법이라 하든지 이 두 가지는 모두 다 거울 위의 흔적과 같고 먼지와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진여자성 광명은 누구에게든지 구족해 있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무한한 대광명을 발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 즉 마음과 법, 선과 악, 있음과 없음, 중생과 부처 등 변견인 망념의 티끌에 광명이 가려져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92. 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바로 참되도다 

      흔구진제광시현이오 심법쌍망성즉진이로다
      痕垢盡除光始現        心法雙亡性則眞

우리가 마음을 바로 깨쳐 참됨[진]을 알려면 양변을 여의어야 하는데 이것이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진다'고 합니다.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진다[心法雙亡]'하든지 '사람과 법이 없어진다[人法雙亡]'고 하든지 표현은 어떻게 해도 상관 없으며 이 '둘 다 없어진다'는 것은 쌍차를 말한 것입니다. 쌍차가 되면 자성중도(自性中道)를 확실히 알게 되는데 이것이 즉 참됨[眞]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변을 여윈 중도를 모르는 것은 양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양변에 머물러 있음이 거울에 낀 먼지나 흔적과 같으니 거울에 있는 먼지와 때를 닦아내면 거울에 광명이 드러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듯이 양변을  버리면 우리의 자성광명이 빛나고 빛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성을  필경 알 수 있는 것이고 중도를 깨치지 않을 수 없으며 쌍차가 된 곳에 쌍조가 되어 무애자재한 부사의해탈경계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93.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노니
       중생의 복 얇아 조복받기 어렵도다

      차말법오시세하노니 중생이 박복난조제로다
      嗟末法惡時世           衆生    薄福難調制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한다'고 하니 그러면 자성에도 말법이 있고 시세가 있느냐고 우리가 혹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자성의 본체에 있어서는 말법도 없고 시세도 없어 언제든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인데 어디에 말법이 붙을 수 있고 시세가 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한다'고 하느냐 하면, 중생들이 정법을 믿지 아니하고 자꾸만 배반하여 무한한 고를 받게 되니 영가스님이 그 중생들을 경책하기 위한 방편 가설로서  말씀하신 것이지 실설(實說)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자성은 언제든지 말법도 없고 시세도 없이 원융무애하고 원명자재해 있지만 중생들은 박복하여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자꾸 반대만 하면서 닦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94. 성인 가신 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이여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원해가 많도다

      거성원헤사견심이여 마강법약다원해로다
      去聖遠兮邪見深        魔强法弱多怨害

성인은 가신 지 오래고 삿된 견해가 깊어져서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원한과 해침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정법을 믿지 않고 반대하는 말법시대의 풍조를 단적으로 말씀해 놓은 것입니다.

  95. 여래의 돈교문 설함을 듣고서는
       부숴 없애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도다

      문설여래돈교문하고 한불멸제령와쇄로다
      聞說如來頓敎門       恨不滅除令瓦碎

'단독직입으로 일찰라간에 확철대오하여 자성을 바로 깨친다는 돈교문을 여래가 말씀하심을 듣고서 이를 긍정치 아니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탄하시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때는 고금과 같습니다. 지금 여기에도 '돈교문이 있다' '한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는 법문을 듣고는 '무슨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법의 진리를 모르고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은 자기만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이 바른 길로 가는 것을 방해하여 영원토록  중생에게 마장(魔障)을 일으키게 하는 실례가 고금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가스님도 노파심절로써 정법을 비방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정법을 방해하면 어찌되느냐?

  96.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지어다

      작재심앙재신하니 불수원소갱우인이어다
      作在心殃在身       不須怨訴更尤人

짓기는 마음으로 지으나 나중에 과보를 받을 때의 고초는 몸이 받는 것이므로 누구를 원망하고 허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니,  왜냐하면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기[自作自受]때문입니다.

이 무상대도인 정법을 반대하고 비방하게 되면 첫째는 자기가 이 대법을 성취하지 못하여 영원토록 중생으로서 생사고를 벗어날 수 없고 해탈하지 못하며, 둘째는 일체 중생의 바른 길을 막아서 그들을 악도에 떨어지게 하여 해탈의 길을 영원히 막아 버리게 되어 그 죄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마음으로 지었으나 그 과보는 몸으로 받게 되는 것이며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게 되느니 만큼 누구를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말아라  하는 말입니다.

  97.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욕득불초무간업거든 막방여래정법륜하라
      欲得不招無間業       莫謗如來正法輪

무간업(無間業)이란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죄의 업보를 말합니다. 무간지옥이라고 해서 죽어서 저 땅밑에 들어가야 그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지 못하면 현재 서로 보고 앉고 서고 가고 오고 하는 이 자리 전체가 부자유하며 모든 고가 연속되어 간단(間斷)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무간지옥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대법을 믿지 않고 자성을 깨치지 못한데서 이 무간업이 생기고 무간고(無間苦)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무간업의 무한한 고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여래의 정법을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바른 법륜, 일찰나에 성불한다는 이 대법을 비방하지 말고 이 법에 의지해서 공부하여 하루 빨리 견성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 법을 비방하고 욕하고 반대하게되면 자기도 공부를 하지 못해서 망하고, 남도 바른 공부를 못하도록 방해를 해서 바른 길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망하게 되니 모두가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무한한 고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해탈경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상대법을 바로 믿어서 이 길로 바로 닦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법을 비방하고 반대를 해서 무한한 고초를 받게 되는 무간지옥에 떨어져햐 되겠습니까? 그런데 정법을 비방하는 못된 무리들 이 어느 시대에나 없을 수 없으니 부처님 당시에도 조달(調達)이란 사람이 있어 불법을 방해하고 부처님을 해치는 나쁜 짓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이 생존해 계시던 영산회상에서도 그랬는데 후세에서야 말할 나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조달 이란 자를 아무리 '조달이 조달이'하여 아주 나쁜 놈 취급을 하고 있지만 그 조달이가 바로 알았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중생들이 정법을 배반하고 장애를 부리고  하는 것은 몰라서 그런 것이므로 죄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모르는 죄 뿐이지만 거기 따라가는 업은 또한 분명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무상정법을 만나거든,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운 줄 분명히 알아서 참으로 환희심을 내어서 공부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자성을 바로 깨쳐 일체  중생을 위해서 영원히 살아보겠다는 확고한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좋은 법문을 듣고 정법을 비방하는 사견(邪見),악견(惡 見)을 버리고 바로 믿어서 자성을 깨쳐서 영원토록 중생을 위해서 진정한 불사(佛事)를 우리가 다 함께 지어 봅시다.

  98. 전단향 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도다

      전단림무잡수하니 울밀심침사자주로다
      전檀林無雜樹        鬱密深沈獅子住

전단나무는 향나무 가운데서도 제일 좋은 향나무인데, 이 전단나무 숲 속에는 잡나무가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단나무 숲이란 앞에서 나온 '설산의 비니초'와 같은 말입니다.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서 일체의 망(妄)과 잡(雜)이 다 떨어진 곳입니다.  잡됨[雜]이 다 떨어진 곳입니다. 잡됨[雜]이 다 떨어졌다는 것은 진(眞)과 망(妄)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고, 진과 망이 다  떨어져야만 우리가 전단나무 숲에 들어갈 수 있지 진과 망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으면 양변에 머물은 것이며, 양변에 조금이라도  머물으면 전단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전단나무 숲이란 쌍차쌍조한 중도의 숲[中道林]이며 자성의 숲[自性林]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성을 깨쳐 중도를 완전히 증득하면 참으로 울창하고 깊은 경계를 알게 되는데, 울창하다는 것은 일체 만법이 남음없이 원만구족함을 말하며 깊고깊다는 것은 제팔 아뢰야식까지 뿌리가 뽑아져아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러기 전에는 중생으로서는 도저히 모르는 경계를 말합니다. 오직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알 수 있으니 만큼 이 전단림이란 그처럼 만법이 갖추어 있는 깊고 깊은 중도의 숲, 자성의 숲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전단림은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고 참으로 도리가 깊고 깊어서 중생이 구경각을 성취하기 전에는 잘 모르는 곳인데 거기에 사는 것은 사자라는 것입니다. 사자는 무엇이냐 하면, 참으로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이룬 천인사(天人師), 부처를 비유한 것입니다. 사자가 짐승 중에서 가장 으뜸되는 짐승인 것처럼 인간 중에서는 깨친 사람, 성불한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99.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니니
       길 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달아나도다.

      경정림한독자유하니 주수비금이 개원거로다
      境靜林閒獨自遊        走獸飛禽    皆遠去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쳐서 대적멸, 대적경 경계에 들어갈 것 같으면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혼자 걸어가서' 천상천하에 비교할래야 비교할 수 없고 가장 높고 큰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표현해서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니 홀로 노닌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 대열반경계를 증득하면 사자가 어슬렁거리기만 하여도 짐승이나 새들이 다 달아나 버리듯이, 저 원숭이 같은 망정, 저 새 같은 망정, 생멸하는 모든 망정이 다 떨어져서 멀리 가버린다는  말입니다.

  100. 사자 새끼를 사자 무리가 뒤따름이여
         세 살에 곧 크게 소리치는도다.

       사자아중수후여 삼세에 즉능대요후로다
       師子兒衆隨後    三歲    卽能大哮吼

사자의 뒤는 사자만 따라 다니고 다른 짐승은 절대로 못  따라 다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짐승은 겁이 나서 달아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짐승이란 망정, 망상을 말한 것입니다. 자성을 확철히 깨치면 사자 무리들이 뒤를 따르는데 참으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한 식구가 되어 같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뒤를 따른다'하니 무슨 졸개짓을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움직인다는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깨치면 작고 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살이란 어린 아이란 말이니 꼭 백살, 천살을 먹어야만 크게 소리지는 것이 아니라, 진여본성을 바로 깨쳐서 성불해 버리면 조그마한 어린 아이 같지만 깨친 그대로 사자여서 크게 소리를 칠 것 같으면 천지가 무너지고 사해(四海)가 뒤집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도 달아나고 조사도 달아나고, 죽이고 살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자재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101.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엶이로다

       약시야간이 축법왕이면 백년요괴허개구로다
       若是野干    逐法王        百年妖怪虛開口

법왕이란 사자를 말함이니 만약 여우란 놈이 법왕을 쫓아버리려고 한다면 이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우란 망정을 말함이고 법왕이란 진여자성을 말함인데 여우가 어찌 사자를  쫓아 버릴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면 일체의 진과 망이 끊어져서 끊어진 그것도 찾아볼 수 없는데 거기에 무슨 망정이 생길 수 있겠습니 까? 만약 망정이 자성을 이겨낸다고 하면 이것은 헛된 거짓말이고 백년 묵은 요괴가 아무리 입을 열어 지껄여 보아도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102. 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의심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지어다

       원돈교물인정이니 유의불결직수정이어다
       圓頓敎物人情       有疑不決直須爭

원(圓)이란 일체가 원만구족하다는 뜻으로서 공간적인 것을, 돈(頓)이란 눈 깜작할 사이를 말한 것으로 시간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만 갈 것 같으면 일체가 원만구족한 무상대법인 구경각을 눈 깜짝할 사이에 성취하게 되는데 그것을 원돈교라고 합니다. 여기서 원돈교는 교가에서 말하는 원돈교가가 아니고 '한 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一超直入如來地]'는 선가의 원돈교를 말합니다. 그러한 원도교에 있어서는 절대로 인 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투어라'하는 것은 원돈교의 무상정법을 믿지 아니하고 비방을 한다든지 의심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을 위해서 법문을 하고 설득해서 정법을 바로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다투라'고 한다고 하여 주먹다짐이나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중생의 업이 두터워서 정법을 만났다 하더라도 잘 이해하지 못하여 반대하고 비방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대로 두지 말고 싸움하듯이 달려들어 법문을 자꾸하고 가르치고 해서 그 사람을 회심케 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여 구경각을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103. 산승이 인아상을 들어냄이 아니요
        수행타가 단,상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불시산승이 영인아오 수행에 공락단상갱이로다
       不是山僧    逞人我     修行    恐落斷常坑

산승이 인상과 아상으로써 싸우라는 것도 아니며 때려 주면서 다투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비로써 이끌어 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수행할 때 자칫 잘못하여 단견이 아니며 상견, 상견이 아니면 단견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무상대법을 믿어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도 흔히 잘못해서 단견이나 상견에 떨어지는 예가 많이 있기 때문에 혹 그런 변견에 걸린 사람을 보거든 어떻게 해서든지 그 병을 고쳐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먹다짐이 아닌 법문을 잘해서 단견이나 상견에 떨어진 사람을 잘 이해시켜 그 병을 고쳐줘야만 법을 바로 깨친 사람의 임무를 다한 것이지, 만약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진 사람을 보고서도 못본 체하고 내버려 둔다면 참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道)하고는 정반대되는 사람이고 우리 불교의 자비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으로 말미암아 정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비방하는 사람이든지, 정법을 이해해서 공부한다하여도 잘못해서 단견이나 상견에 떨어진 사람이든지, 혹 그런 사람을 보거든 대자비를 베풀어서 싸움을 해서라도 그 사람의 견해를 바로 잡아서 정법을 믿고 구경을 성취하도록 노력을 기울여랴 한다는 말입니다.

  104.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옮음과 옳지 않음이여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으리로다

        비불비시불시여 차지호리실천리로다
        非不非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

그르다든가 그르지 않다든가, 옳다든가 옳지 않다든가 하는 이것을 바로 알 것 같으면 사실에 있어서 구경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경을 성취하려면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을 다 버려야 되는데, 그름과 그르지 않음, 옳음과 옳지 않음의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은 변견이지 중도는 아닌  것입니다.

'털끝만큼만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어버린다'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누구든지 그름과 그르지 않음을 버려야 되고 옳음과 옳지 않음도 버려야 되는데, 여기에 조금이라도 집착을 하면 근본 대법과는 천리만리로 어긋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을 쌍차하면 쌍조가 되어 그름이 그르지 않음이요 옳음이 옳지 않음이 되어서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 융통자재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 니다. 거기에 다만 조금이라도 이해를 잘못하여 양변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양변을 여읜데 머물러 있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쌍차해서 쌍조하고 쌍차해서 쌍차하여 차조동시(遮 照同時)가 되어야만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만 비로서 우리가 정법을 바로 안다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변견에 떨어져서 단견과 상견에 집착하게 되고 양변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털끝만큼만 어긋나도 천리나 멀어져버린다'는 이 말도 피상적인 뜻보다도 더 깊은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더 얘기하지 아니하고 덮어 두어야겠습니다. 내가 법문을 한다면서 뜻을 너무 설파(說破)해 버려서 큰 병입니다. 그런 줄만 알고 열심히 공부해서 그 뜻을 실지로 자신이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105. 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요
        그른 즉 선성이 산채로 지옥에 떨어짐이로다

       시즉용녀돈성불이오 비즉선성이 생함추로다
       是卽龍女頓成佛       非卽善星    生陷墜

옳음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팔세 용녀가 정법을 바로 믿어 단박에 성불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법화경(法華經)]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에 있는 말인데, 팔세의 용녀가 부처님 법문을 듣고 당장에 성불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축생이나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용녀를 선택한 것은 용녀란 뱀이며 뱀 중에서도 암뱀이니 그 암뱀과 같은 미천한 축생도 성불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부처님 말씀 가운데도 여자는, 첫째 범천왕 (梵天王)이 되지 못하고, 둘째 제석(帝釋)이 되지 못하고, 셋째 마왕(魔王)이 되지 못하고, 네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지 못하고, 다섯째 부처가 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어서 성불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법의 바른 말씀이 아닌 방편가설입니다. 영가스님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회상에서 축생인 용녀, 곧 암뱀이 부처님 법문을 듣고 성불한 것을 예로 들어 말씀한 것입니다. 곧  용녀 성불의 이 예는 일체중생은 누구든지간에 짐승이든지 사람이든지 숫컷이든지 암컷이든지 부처님 법을 바로만 믿고 수행할 것 같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말입니다.

그름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선성(善星) 비구같은 부처님 제자가 잘못된 길에 들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것을 말합니다. 즉 선성비구는 부처님께 시봉도 많이 하고 법문도 많이 듣고 해서 공부를 제법 많이 했지만 결국은 나쁜 친구를 만나 길을 잘못 걸어서 부처님을 비방하고 해롭게 하여 부처님 교단에 굉장한 장애를 끼쳤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반대한 과보로서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열반경]을 보면 신성비구를 부처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역사적으로 봐서는 신성비구를 부처님 아들로 보기에는 곤란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출가하시기 전에는 야수다라 부인뿐 아니라 제이부인 제삼부인이 있었다고 하니 딴 아들이 없다고는 볼 수 없는데 이 신성비구는 역사상으로 분명히 드러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른 경을 보아도 부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아주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부처님 당시에 신성이라는 비구가 있어서 처음에는 부처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길을 잘못 들어 부처님을 반대한 그 과보로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선성을 부처님 아들로 본다면 정법을 반대하면 부처님 아들이라 하여도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고 정법을 바로 믿을 것 같으면 암 뱀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하느냐 또는 지옥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법을 바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그 믿음에 있다는 것을  영가스님이 강력히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해석이고 여기에는 설파할 수 없는 더 깊은 뜻이 있으니 그런 줄만 알고 이 다음으로 미루어 둡시다.

  106.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서
         일찍 주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도다

        오조년래적학문하야 역증토소심경론이로다
        吾早年來積學問       亦曾討疏尋經論

영가스님이 자기의 쓸데없는 일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니, 내가 어릴 때 부터 학문을 쌓아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영가스님 같은 이는 나면서부터 총명이 뛰어나서 스승도 없이 스스로 알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뿐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보지 않은 것이 없고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박학다식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경론과 주소(註疏)를 연구해서 잘 알았다는 말입니다.

  107.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바다 속 모래를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로 피곤하였도다 

       분별명상을 부지휴하고 입해산사도자곤이로다
       分別名相    不知休        入海算沙徒自困

이름과 모양을 분별한들 무슨 소용 있으며 밥 이야기를 천날 만날 한들 배가 부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다 속에서 모래를 헤아리니 헛되이 스스로만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육조스님에게 가서 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한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들어가는 바른 길'을 알고 나서 천하의 대도인이 되었지만, 그전에는 자기도 학문승이 되어서 쓸데없이 이 책 보고 저  책 보고 했던 것을 돌이켜 보니 그것은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처럼 공연히 헛 일만 했더라는 지난 날의 감회를  말한 것입니다.

  108. 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 건가

       각피여래고가책하니 수타진보유하익고
       却被如來苦呵責        數他珍寶有何益

문자에 끄달려서는 안된다고 경에서 말씀하셨으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게 되면 부처님께서 고구정녕으로 꾸지람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은행에 취직해서 남의 돈을 세는 것과 같아서 하루 몇 억원을 헤아린들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 법을 다 외우고 전부 다 배웠다고 할지라도 나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오직 소용이 있는 것은 자성을 바로 깨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자에만 집착해서는 미래겁이 다하도록 저 바다 속에 들어가 모래알 수효를 헤아리는 것과 같아서  아무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지만 피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109. 예전엔 비칠거리며 헛된 수행을 하였음을 깨달으니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 노릇하였도다

       종래로 층등각허행하니 다년은 왕작풍진객이로다
       從來    층등覺虛行        多年    枉作風塵客

층등이란 걸음을 옳게 걷지 못하고 어린아이 걸음걸이 배우듯이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하는 것을 말하며, '각허행(覺 虛行)'이란 쓸데없는 헛된 일만 했음을 이제야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불법이란 자성을 깨쳐야지 자성을 깨치지 아니하고 공연히 언어문자에만 집착하여 경이나 보고 논소나 더듬고 해서는 '바다에 들어가 모래알 수를 헤아릴 뿐'이어서 불법과는 배치되고 마는 것이고, 결국은 헛 일이며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세월동안 그릇되이 풍진객 노릇만 하였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닦아 자성을 깨쳐야 될 것인데 공연히 말을 찾고 글귀를 따라다니면서 쓸데없이 문자에만 집착하여 자성을 깨치지 못하였으니 헛 일만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서산스님 같은 이도 '차라리 일생동안 바보처럼 지낼지언정 문자승은 되지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불교의 근본에  입각해서 자성을 깨치는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이니, 문자는 다만 자성을 깨치는 방향을 제시해 줄 뿐이니 거기에  집착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따라 가듯이 자성 깨치는 공부는 버리고 문자만 따라가면 불법을 배반하는 사람이고 헛 일만 하는 사람이니,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자성을 꼭 깨쳐 불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110.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여
         여래의 원돈제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종성사착지해여 부달여래원돈제로다
       種性邪錯知解    不達如來圓頓制

성품[性]이라 하면 정(正)과 사(邪)가 없지만 언어문자에 집착하는 것을 '성품에 삿됨을 심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근본은 양변을 여윈 중도를 정등각해서 진여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따라가든지 알음알이에 머물든지 하면 영원히 잘못 되어서 여래의 원돈의 제도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불법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라고 함은 자성을 깨치는 공부 이외에는 모두 삿되고 그릇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아서 마음을 깨쳐 자성을 밝히는 이것만이 바른 믿음이고 그 이외에는 모든 것이 다 삿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111. 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이승은 정진물도심이오 외도는 총명무지혜로다
       二乘    精進勿道心        外道    聰明無智慧

성문,연각같은 이승은 아무리 정진하여도 도심이 없다는 것은,  이승은 정진하다가 멸진정(滅盡定)을 얻어서 제팔 아뢰야 무기식에 들어가면 그것이 구경이고 열반인 줄 알아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마는 것을 말합니다.

'이승이 도심이 없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인 멸진정의 침공체적한 병이 커서 구경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도심'이란 구경진여(究境眞如)를, 진여본성을 깨친 것을 말한 것이지 침공체적한 중간의 멸진정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설사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에 들어갔다 하여도 그것은 망(妄)이지 진(眞)이 아니며 도가 아닙니다. 이승의 근본 병이 아뢰야를  집착하여 침공체적한데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실지로 도는 증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승이 보통 중생보다는 나아서 분단생사(分段生死)는 벗어나 번역생사(變易生死) 속에 있기는 하지만 실지 구경적인 자성은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도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도란 구경을 성취해서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고 진여자성을 밝혀야만 참다운 도이지 그렇지 않고는 실지의 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대승보살은 어떠냐 하면 십지보살도 자성을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도심(道心)이 없는 것은 꼭 같습니다. 

'외도는 총명하나 지혜는 없다'고 함은 이승은 그래도 불법을 믿어서 중간에 침공체적한 병이라도 있지만 외도는 그런 것도 모르고 총명한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정지(正智)라야 하는데 보통 보면 총명이 과인한 사람은 굉장한 지혜가 있는 것 같아도 삿된 지혜이기 때문에 중도의 정견이 될 수 없습니다. 변견을 집착하여 중도를 모를 것 같으면 전체가 삿된 지혜가 될 뿐이고 중도의 바른 지혜가 아닙니다. 여기서 '지혜가 없다'는 것은 중도를 바로  깨친 정지(正智),정견(正見)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승은 침공체적하여 중도를 성취하지 못했고 외도는 아무리 총명하여도 전체가 다 변견에 집착하여 중도를 모르기 때문에 도심(道心)이 없고 지혜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112. 우치하고도 겁이 많으니
         빈 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는도다 

       역우치역소해하니 공권지상에 생실해로다
       亦愚癡亦小駭        空拳指上    生實解

구경이 아닌 무기무심에 침공체적하는 이승이나, 중도를 알지 못하는 총명한 외도나,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문자승이나 할 것 없이 대도를 바로만 알 것 같으면 그런 병에 걸릴 수 없는데, 우치하고 좀스러워서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우치하고 좀스럽다는 것은 무명을 말합니다.

'빈 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낸다'는 것은 빈 주먹 속에는 아무 것도 없으므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실지로 무엇이 있는 것처럼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빈 주먹이란  외도의 총명한 것이든지 이승의 침공체적한 것이든지 문자에 집착하는 것이든지 간에 전체를 지적해서 비유한 말입니다. 곧 아무 것도 없는 이 빈 주먹을 참 공부로 알고 도인 줄 알아서 실다운 견해를 내니 참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문자도 버려야 되고 총명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집착하게 되면 결국 빈 주먹 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무엇이 있는 것처럼 실다운 견해를 내어서 일평생 을 헛 보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망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113. 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육근,육경,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하는도다 

       집지위월왕시공하고 근경진중에 허날괴로다
       執指爲月枉施功        根境塵中    虛捏怪

부처님께서 많은 법문을 하시는 가운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그 자체는 아니다. 내 법문에 의지해서 스스로 자성을 깨쳐아야지 나의 말에만 집착해서는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손가락이란 언어문자를 비유한 것이니 모든 언어문자는 자성을 깨치는 방편으로써 달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그것을 모르고 그 언어 문자가 근본 도인 줄, 법인 줄 알고 평생 내내 문자에만 집착하여 결국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 평생 헛일만 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성 깨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는 것은 육근,육경,육진이 우리의 자성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근,육경,육진 속에 쓸데없이 허둥댄다면 자성은 영원히 깨치지 못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근경진(根境塵)이란 단지 육근,육경,육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문자에 집착하여 쓸데없는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모든 것을 총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사 총명이 아난존자 이상으로 뛰어나서 부처님의 법상을 다 기억하고 있다 하여도 깨치지 못하면 결국 결집(結集)에서 아난존자가 가섭존자에게 쫓겨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니, 그것을 깊이 알아서 자성을 꼭 깨쳐야지 괜히 언어문자에만 헤매이게 되면 평생을 그릇쳐 영원토록 헛일만 하고 마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서 단단한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가스님이 언어문자를 집착하는 병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시므로 문자를 배격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줄런지 모르겠으나 그 병이 하도 크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약방문도 이렇게 많게 된  것입니다. 영가스님께서 대자비로써 중생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이런 법문을 하신 것이니 만큼 달게 듣고 언어문자에 집착하는 그 병을 꼭 고쳐야 할 것입니다.

  114. 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이니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도다

       불견일법이 즉여래니 방득명위관자재로다
       不見一法    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

육근,육경,육진을 떠나서 자성을 보게 되면 거기서는 '한 법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견일법(不見一法)'을 '한 법도 보지 아니한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볼 것이 있는데 안 보는 것이 되므로, '한 법도 볼 수 없다'고 해석해야 됩니다. '한 법도 볼 수 없다'고 하면 볼 사람도 없고 볼 물건도 없는, 상대가 완전히 끊어진 곳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법도 볼 수 없는 것이 여래다'고 하여 '볼 수 없다'는 것이 침공체적한 병을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져서 쌍차가 곧 쌍조인 구경적인 곳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 법도 볼 수 없는 이것이 여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여래의 경계에 가서는 '한 법도 볼 수 없는 이대로가 여래다'라고도 해석이 됩니다.

또 '한 법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쌍차로서 부정이고, '곧 여래다'라고 하는 것은 쌍조로서 긍정으로 많이 해석합니다. 철저하게 부정하면 또 철저한 긍정이 되기 때문에, 이 귀절을 바로 볼려면, '한 법도 볼 수 없는 이대로가 여래다'고 해석해야 됩니다. 구름이 걷히면 청천백일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듯이 여래를 쌍조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한 물건도 볼 수 없어서 일체가 탕진무애하면 참으로  청정무구함이 되어서 여기서 항사묘용이 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쌍조입니다. 쌍차 쌍조면 중도인데 그것을 관자재(觀自在), 보는 것이 자재하다는 뜻입니다. '관자재'라 하니 꼭 관세음보살만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하기 쉬우나, 누구든지 쌍차해서 쌍조하여 중도를 바로 깨치게 되면 원융무애하고 자유자재한 진여대용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관자재'입니다. 즉 보타낙가산에 있는 관세음보살만이 관자재가 아니라 자성을 바로 깨친 사람이 바로 관자재인 것이니 어느 특정인을 지칭해서 하는 말은 절대 로 아닙니다. 특정인으로 지칭한 것으로만 알면 그 사람은 부처님의 근본 뜻도 모르는 것이며 예전 조사스님들의 뜻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도를 바로 깨치게 되면 관자재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여 쓸데없이 헛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공연히 언어문자에 집착하여 여기에 법이 있는가 저기에  법이 있는가 하여 허둥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누누히 강조했왔습니다. 얼음 속에 무슨 불이 있으며 팔만대장경의 문자 속에 어떤 부처가 앉아 있습니까? 그러므로 손가락은 달이 아니므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하고 팔만대장경의 문자 속에는 부처가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자성을 깨쳐야 합니다.

  115. 마치면 업장이 본래 공함이요
         마치치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빚 갚으리로다

      요즉업장이 본래공이요 미료환수상숙채로다
      了卽業障    本來空        未了還須償宿債

우리가 공부를 다해 마치면 업장이 본래 공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린다'고 했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자성을 깨칠 것 같으면 깨침과 동시에 모든 업이 본래 공해서 모두가 다 무너져 버리고 업이 거기에 설 수 없어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부사의 해탈경계만이 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업이니 뭐니 하는 것은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면 자기가 전생에 지어놓은 업에 따라서 자기의 빚을 다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경각을 성취하여 진여본성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자유자재한 해탈경계 속에서 업이든 뭣이든 다 얼음덩이가 부숴져 녹아내리듯이 되어 버리는데 그러기 전에는 모든 지은 업을 다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금 문제가 붙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정해진 없은 면하기 어렵다[定業難免]'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말씀과 영가스님의 말씀과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조(二祖) 혜가(慧可)대사가 달마대사의 정법을 받아서 삼조 승찬 대사에게 전한 뒤에, "나는 업도(業都)로 가서 묵은 빚을 갚으리라."하고는 업도로 훌쩍 떠났습니다. 거기 가서 형편에 따라 설법을 하니, 한 마디를 법문함에 사부대중이 모두 귀의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중생을 교화하기 삼사년을 지내고는 드디어 자취를 감추고 겉모양을 바꾸어 술집도 드나들고 푸줏간에도 찾아가고 거리의 잡담도 익히고 품팔이도 하면서 처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호호탕탕하게 자재한 생활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히 생각하여 묻기를 "스님은 도인이신데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하니, 혜가스님이 "내 스스로 마음을 조복시키기 위함이요 다른 뜻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업도에서 가까운 안현(安縣)의 광구사(匡救寺)에 변화(辯和)법사라는 이가 있어서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혜가 스님이 그 절 삼문 밖에 와서 무상정법(無上正法)을 설하니, 대중이 [열반경]을 듣다가 혜가스님 법문하는 곳으로 가버리고 변화법사의 강석에는 사람이 없다시피 되었습니다. 자기는 죽자하고 애써서 [열반경]을 설해 왔는데 대중들이 이제 자기의 법문을 듣지 않고 혜가스님이 법문하는 곳으로 다 가버리니 속으로 어찌나 화가 났는지 분함을 참지 못하고 현령인 적중간(翟仲侃)에게 가서 무고를 했습니다.

"저 중은 미친 놈이고 삿된 견해를 가진 외도입니다. 앞으로 그냥 놓아두면 불법에만 해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도 큰 해를 끼칠 테니 저런 놈은 살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저 놈은 나의  강석(講席)도 무너뜨렸습니다"고하니, 이에 적중간은 사실을 자세히 살피지도 아니하고 거짓말에 속아서 혜가대사를 목을 베어 죽여버렸습니다. 그것이 서기 593년이고 혜가스님의 당시 세수는 107세라고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혜가스님은 비명에 죽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빚을 갚는다고 했으니 빚을 갚았다고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말해야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흔히 전생 빚이 있어서 빚을 갚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뜻이 정반대가 되어 버립니다. 누구든지 구경각을 성취해서 자유자재한 해탈경계에 들어갈 것 같으면 업장이 본래 공해서 업보를 받을래야 받을 수 없으며 거기서는 업장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만약 빚을 갚았다고 하면 혜가스님이 공부를 다 마쳐서 대법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빚을 갚지 않았다고 하면 분명히 맞아 죽었으니 그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혜가스님을 중생들이 볼 때는 분명히 맞아 죽었지만 혜가스님이 구경각을 성취해서 업장이 본래 공하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추호도 모순이 없습니다. 만약 모순이 있다고 본다면 원융무애한 중도정견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변견으로써 자기의 사량복탁(思量卜度)으로 오해하는 것이지 실지로 알고 보면 혜가스님에게는 부족함이나 흠이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장사잠(長沙岑)스님에게 호월공봉(皓月供奉)이라는 분이 물었습니다.

"이조 혜가스님이 빚을 갚았다 하니 혜가스님은 업장이 본래 공함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야말로 업장이 본래 공함을 모르는구료."
"어떤 것이 본래 공함입니까?"
"업장이 본래 공함이니라."
"어떤 것이 업장입니까?"
"본래 공함이 업장이니라."

이 문답은 완전히 모순입니다. 업장이 본래 공함이고 본래 공한 것이 업장이라는 것이니, 이 말은 변견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업장과 본래 공함이 융통자재한 곳에서 하는 말입니다. 중생이 볼 때는 업장과 본래 공함이 둘입니다. 그래서 '이조 혜가대사가 빚을 갚았다 하면 본래 공함이 아닌 것이고 본래 공했다면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니, 이렇게 보게 되면 업장도 모르고 본래 공함도 모르는 순전히 양변에 떨어진 견해입니다.

그런데 실지로 자기가 확철히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하게 되면 업장과 본래 공함이 완전히 부정되어서 업장도 놓아 버리고  본래 공함도 놓아 버려서 업장과 본래 공함이 유통자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는 업장이 본래 공함이고 본래 공함이 업장이어서 무애자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볼 때는 빚을 갚은 것 같아도 갚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본래 공함이라 하든지 업장이라 하든지 간에 거기에는 추호도 모순이 없습니다. 중생의 변견으로서는 거기에 분명히 모순이 있지만 이것은 중생의 업식망정으로 추측하는 착오된 견해이며 깨친 분상에서는 업장과 본래 공함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이 볼 때는 아무리 빚을 갚은 것 같고 정해진 업을 면하지 못하는 것 같아도 이것은 중생을 위한 방편일 뿐 실지로는 본래 공함 그대로이며 무아자재함 그대로라 중생이 업을 받는 것 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정해진 업을 그대로 갚아야 할 때는 업 그대로여서 실지로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빚을 갚는다해도 거기에는 대자유가 있고 갚지 않는다 해도 대자유가 있어서 자유자재한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선가에서는 '생사 없음을 쓴다[無用生死]'고 합니다. 아무리 생사를 받고 업을 그대로 받고 빚을 갚는다 하더라도 실지에 있어서는 하나도  업을 받을 것이 없고 빚을 갚을 것이 없으며 생사를 받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말로만 없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경각을 성취해서 색즉시공(色卽是 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실천된 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실천되면 혜가대사나 부처님이나 빚을 갚았으니 정해진 업을 면하지 못하느니 하는 것도 본래 공함과 절대로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장사스님이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거짓 있음이 원래로 있음이 아니요
   거짓 없어짐도 또한 없어짐이 아니니
   열반과 빚 갚음의 뜻이
   한 성품으로 다시 다름이 없도다.
   [假有元非有요 假滅亦非滅이니
    涅槃償債義가 一性更無殊로다]"

있다 있다 하지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는 이대로가 공이며, 없다 없다 하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있는 것이며, 있다 하여도 있는 것이 아니요 없다 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결국 있음과  없음을  떠나서 있음과 없음이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여기에 생사가 있을 수 있으며 업을 받고 받지 않음이 성립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반이란 모든 것이 다 끊어져서 둥글고 밝아 항상 고요하게  비치는 대자유 경계를 말한 것이며, 상채의(償債義)란 중생이 생사윤회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되면 둘이 모순되는 것 같은데 대자유한 경계에 있어서는 열반이라 해도 괜찮고 상채의라 해도 괜찮으며,  빚을 갚는다 해도 좋고 자유라 해도 좋은 것입니다.

'한 성품으로 다시 다름이 없다'는 것은 모든 내용이 똑 같아서 구별이 따로 있거나 서로가 모순 충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래야만 비로소 불법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애자재한 경계를 스스로가 잘  모르고서 일변에 집착하여 혜가스님이나 부처님을 비판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살일 뿐 아니라 여독은 다른 사람까지 다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116. 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으니
         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기봉왕선불능손이라 병우의왕쟁득차아
       飢逢王膳不能飡        病遇醫王爭得差

'굶는다[飢]'는 것은 중생이 참으로 진리의 배가 고파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고생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배가 고파 고생하고 있는 사람 앞에 무상대도를 일러주고 진여자성을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하게 되면 영원토록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묘법을 아무리 귀가 아프고 입이 닳도록 일러주어도 그것을 믿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말하자면 배 고파서 죽어가는 사람 앞에 만반진수의 임금님 수라상을 늘어놓고서 '드시오, 드시오'해도 먹지 않고 결국은 죽어 버리는 사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밥 숟가락으로 떠 먹기만 하면 사는 것을 떠 먹지 않고 죽고 마니 그러면 그 허물이 누구에게 있느냐 말입니다. 중생이 진리에 배가 고파서 영원토록 생사고를 면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무상대도를 만나 이 법을 믿고 공부를 해서 자성을 깨쳐 버리면 영원한 대자재해탈인이 될 것인 데, 이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마치 배고픈 사람이 임금님의 밥상을 앞에 두고도 먹지 않고 그냥 굶어 죽는 것과 꼭 같다는 것입니다.

또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천하에 둘도 없는 의왕을 만나서 그  사람 말만 들을 것 같으면 당장에 살고 약 한 첩 먹으면 살고 침 한 대 맞으면 살 수 있는 것을 그러한 의왕을 만나도 말을 듣지않고 죽어버린다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예전의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은 모두가 중생의 병을 쳐주는 천하의 대의왕들입니다. 중생을 위하는 참으로 좋은 약을 가지고 있어서 이 감로수를 마시기만 하면 모든 중생의 병이 다 나아서 참으로 대자유인이 된다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해도 중생은 귀를 콱 틀어막고 듣지 않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생은 병든 사람이고 배고픈 사람이니만큼  밥상을  갖다 놓고 밥을 먹으라 하면 얼른 먹고 살아야 하며, 또 의왕이 약을 먹으라 하고 침을 맞으라 하면 여기에 순종하여 얼른 병을 고쳐서 성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자꾸만 반대만 해서 영원히 중생을 면치 못하고 생사윤회 속에 헤매느냐는 말입니다.

  117.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의 힘이여
         불 속에 연꽃 피니 끝내 시들지 않는도다

      
       재욕행선지견력이여 화중생련종불괴로다
       在欲行禪知見力       火中生蓮終不壞

'욕망 가운데 있으면서 참선을 행하는 지견의 힘'이란 집에 있으면서 공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공부는 꼭 출가를 해야만 성취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무상대법에는 재가(在家)도 없는 것이고 출가(出家)도 없는 것이며 오로지 이 무상대법을 바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신심(信釗酷에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을 바로 믿고 신심있게 공부를 잘 해나가면 재가한 사람이라도 이 대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이 대법을 믿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머리를 천번 만번 깎아 승려가 된다고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공부를 성취하느냐 못하느냐는 이 법을 믿고 실행하느냐 않느냐에 있는 것 입니다.

누구든지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스님의 말씀을 잘 믿고 공부를 하면 성공할 수 있지만 믿지 않으면 아무리 출가가 아니라 출가보다 더 나은 것을 한다 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재가하여 공부하면 그래도 여러가지 방해되는 것이 많으므로 부처님이 방편으로 출가제도를 만드신 것인데, 근본은 재가나 출가에 있지 않고 바른 법을 믿느냐 안믿느냐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재가하여 참선을 닦은 사람의 지견의 힘은 마치 불 속에서 피는 연꽂이 시들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연꽃은 물에서 나는 것이므로 물 밖에 내놓으면 죽어버리고 말지만 불 속에서 연꽃이 필 것 같으면 이것은 영원토록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에 있으면서 참으로 발심하여 정법을 바로 믿어서 정법을 성취한 사람은 불 속에서 피는 연꽃과 같아서 영원토록 없어지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한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재가를 선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불법이란 재가나 출가의 구별이 없이 그  범위가 넓어서 이 정법을 바로 믿고 누구든지 노력하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 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믿으면 팔세 용녀도 성불하는 것이고 바로 믿지 않으면 부처님 아들이라도 산 채도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18. 용시비구는 중죄 짓도고 남이 없는 법을 깨달으니 
         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용시범중오무생하니 조시성불우금재로다
        勇施犯重悟無生       早是成佛于今在

과거 먼 옛날 중향세계(衆香世界)의 무구정광여래(無垢淨光如來)라는 부처님이 계시던 때에 용시(勇施)하는 비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매우 인물이 잘 났으므로 그를 사모한 젊은 여자가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유모가 그 사유를 알고 여자의 어머니와 함께 여러가지로 부당함을 설명했으나 병만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마침 용시비구가 탁발을 왔으므로 그 여자를 위해 설법을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용시비구가 그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니 여자의 병은 차츰차츰 나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는 용시비구는 그 여자와 가깝게 되어 음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용시비구는 유모와 공모하여 그 여자의 남편을 죽여버렸습니다. 수행하던 비구가 자칫 잘못하여  음행을 저지르고 살인까지 하고 보니 갑자기 죄책감에 사로잡혀 번민 속에 살다가 할 수 없이 비국다라보살(毗鞠多羅菩薩)에게 찾아가서 일심으로 참회를 구했습니다. 보살이 말하되 "걱정하지 말라. 내가 지금 너를 위해 두려움 없음을 베푸리라"하고는 법인삼매(法印三昧)에 들게 하고 한량없는 부처님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용시비구는 "모든 법은 거울에 비친 모양과 같고 물 속에 비친 달과 같거늘,  범부는 어리석게도 마음에 매혹되어 어리석음과 성냄과 사랑함을 분별한다"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비로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쳤다고 합니다. 이 고사(故事)는 [불설정업장경(佛說淨業障經)]에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 교단에 있어서는, 첫째 음행하지 말라, 둘째 도적질 하지 말라, 셋째 살생하지 말라, 네째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 네 가지를 사라라이(四波羅夷)라 하여 이 계(戒)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하면 승단에서 쫓겨나는 것으로서 사형선고나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것이고 영원토록 아비지옥에 떨어진다는 무거운 계목(戒 目)입니다. 용시비구는 그 사바라이 죄 가운데서도 음행과 살생이라는  두 가지 죄를 거듭 지었으니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우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거운 죄를 지은 용시비구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서  무생(無生)을 증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오래 전에 성불했는데,  그 이름을 보월여래(寶月如來)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든지 사람을 잡아 먹어가며 공부해도 되지 않겠는가"고 혹 이렇게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극악한 사람을 예로 드는 것은 우리 불법이란 광대무변해서 아무리 극중 죄인이라도 불법을 바로 믿고 그대로 공부를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대도라 하는 것이지, 죄를 크게 지은 놈은  영원히  죽어 버리라고 하면 이것은 참으로 무상(無上), 위없는  법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넓고도 큰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넓은 길이란 죽은 사람도 살리고 죽지 않은 사람도 살려서 누구든지 다 살릴 수 있는 능살능활(能殺能活)한 법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악한 일만 골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극악한 사람도 정법을 바로 믿고 공부하면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니 만큼 착한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119.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어리석은 완피달을 몹시 슬퍼하는도다

       사자후무외설이여 심차몽동완피달이로다
       獅子吼無畏說       深嗟  ?  ?頑皮 ?

사자는 깨친 사람이니 사자가 크게 소리친다는 것은 부처님이 두려움 없이 설법하신다는 말입니다. 몽동이란 멍텅구리라는 뜻이며, 완피달이란 가죽이 두꺼워서 송곳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한 것을 말하여 좋은 말이 절대로 귀에 들어가지 않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불법이란 융통자재하여서 광대무변한 이 법에 있어서는 누구든지 아무리  중죄를 지었다고 해도 부처님 앞에서 깊이 참회하고 정진하면 모두 성 불할 수 있는 묘결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큰  죄를 짓고도 성불할 수 있을까, 지옥 갈 것 아닌가?" 하고  자포하기를  해버리고 허송세월한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부처님 앞에서 깊이 참회하고 마음을 돌이켜서 정법으로 바로 들어오면 모두 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인데, '계(戒)에 장애된다', '행에 장애된다' 하여  비굴심을  가지고 스스로 정법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멍텅구리라 송곳으로 찌르고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두꺼운 쇠가죽같이 말이 들어가지 않으니 참으로 슬프다는 말입니다.

  120. 중죄를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뿐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하도다

       지지범중장보리요 불견여래개비결이로다
       只知犯重障菩提    不見如來開秘訣

사바라이 죄를 범하면 도에 장애가 되어서 불법을 성취하지 못한다고만 믿지 그것을 벗어나는 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용시비구에 해당되는 것만이 아니라 다음 귀절에 나오는 두 비구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비결(秘訣)이란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비결이 있다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는 사바라이 죄를 범하면 지옥에 떨어져서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불문(佛門)에 영원히 다시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부처님의 참된 말씀은 그렇게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융무애한 대자대비로써 극중죄인까지도 다 살릴 수 있는 비결을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결이란 다만 죄 지은 사람만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거 나 짓지 않거나 전체에 다 통하는 것입니다. 설사 불교를 아무리 억천 만겁토록 비방하고 믿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참으로 '한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가는 근본법'을 만나서 이 법을 믿고  공부할 것 같으면 억천만겁토록 밖으로만 돌면서 쓸데없는 짓하는 사람보다도 먼저, 당장에 한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그것이 일종의 비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결이란 성불을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근본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어도 진실되게 참회하고 다시 불법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지  죄를 아무리 지어도 괜찮으니 자꾸 죄를 지어가면서 공부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참괴심이 없고 불법을 반대하는 사람이 되는 만큼 이런 사람은 비결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떠한 것이 있어도 성불할 수 없습니다. 

  121. 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 저지르니
        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을 더하였고

       유이비구범음살하니 바리형광은 증죄결이라
       有二比丘犯淫殺        波離螢光    增罪結

두 비구가 음행계과 살생계를 범했다고 하는 말은 [유마경(維摩經)] [제자품(弟子品)]이 출처입니다. 두 비구가 심산궁곡에서 토굴을 짓고  공부를 하는데 어느 날 한 비구가 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고 한 비구가 공부를 하면서 졸다가 잠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때 한 젊은 여자가 나무를 하러 왔다가 잘 생긴 스님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쁜 생각이 나서 그 스님에게 달려들어 음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눈을 떠 보니 자기가 꼭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음행을 저질러 놓았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마침 자기 도반이 왔으므로 "네가 없는 사이에 잠이 들었는데 저 여자가 나에게 달려들어 본의 아니게 음행케 했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니, 도반이 그 말을 듣고는 노발대발하여 그 여자를 혼내 주려고 뒤쫓아 가니 여자도 저지른 일이 있는지라 두려워 도망가다가 벼랑에서잘못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 비구는 본의 아니게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고 한 비구는 고의로 한 것은 아니지만 살생을 하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과실치사인 셈입니다. 그래서 두 비구가 걱정을 하던  끝에 부처님 당시에 계율 제일로 일컬어지던 우바리(優波離)존자를 찾아가서, "저희들이 율행을 범하여 참으로 부끄러워 감히 부처님께 여쭙지 못하고 존자께 찾아왔으니 원컨대 저희들의 의회를 풀어서 저희들의 허물을 면케 해주소서." 하니, 우바리존자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위해 법답게 해설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음행을 하고 살인하여 바라이 죄를 범했으니 참회할 길이 없다. 가사 벗고 의발을 올려놓고 세속으로 나가라. 너희들은 이제 영원히 구할 수 없는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고 하면서 호령호령하였습니다. 실지 비구계율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바리존자는 계율대로 말한 것이지 자의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유마거사가 옆에 있다가 이 광경을 보니 기가 막 혔습니다. 부처님께서 분명히 비결을 열어서 극악 중생도 살려놓는 길을 열어 두셨는데 죽은 사람을 더죽으라고 욱박지르니 그러면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마거사가 우바리존자에게 말하되 "우바리여, 이 두 비구의 죄를 거듭 더하게 하지 마시오. 곧 바로 죄를 없애 주어 마음을 요란케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 죄의 성품은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밖에도 있지 아니하며 중간에도 있지 아니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음의 때가 있으므로 중생이 때가 있으며 마음이 깨끗하므로 중생이 깨끗하며, 마음이 또한 안에 있지 아니하고 밖에도 있지 아니하며 중간에도 있지 아니하니, 마음이 그러한 것과 같이 죄의 때도 그러합니다.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여 여여함을 벗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우바리여, 일체의 법은 생멸하여 머물지 아니하니 환영(幻影)과 같고 번개와 같고 일체의 법은 서로 기다리지 않으며 내지 한 생각도 머물지 아니하며, 모든 법은 모두 망견이며 꿈과 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 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모양과  같아서 망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을 계율을 받는다고 이름하고 이것을 아는 사람을 잘 이해한다[善解]고 하는 것입니다"고 하니, 이 두 비구가 의심을 풀고서 보리심을 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바리의 반딧불'이란, 우바리 존자가 부처님 법에 의거해서 두 비구의 죄를 다스리려 했으나 그것은 아무런 열기도 없는 작은 반딧불과 같아서 그들의 죄의 매듭을 풀어줄 만한 지혜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희려 그 죄의 매듭을 더 키워서 두 비구를 당혹케 했다는 것입니다.

설사 두 비구가 음행을 하고 살인을 해서 용시비구처럼 사바라이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여래의 비결, 말하자면 자성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그 때 가서는 삼아승지겁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비결을 알아서 얼른 성불할 도리를 찾아야지 두 비구가 불가피하게 죄지은 것처럼 "비결 이것만 믿으면 될 텐데 무슨 죄를 지은들 상관있나"하는 생각을 가지면 영원토록  깨치지 못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 참괴심이 없으면 자성을 밝힐 수 없고 업장이 얼음처럼 얼어 붙어서 절대로 녹아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구의 마음가짐은 참괴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참회하고 신심으로써 대법을 성취해야 되겠다는 것이지, 어떠한 행동일지라도  마구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추호라도 머리에 남아 있으면 유마거사가 아니라 부처님이 천백억화신을 나타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법하다 하여도 그 사람은 깨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지극한 참회를 해야만 아무리 중죄를 범했다 해도 자성을 깨칠 수 있는 것이지 참괴심도 없고 신심도 없을 것 같으면 무슨 수로 부처님의 비결을 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비결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느냐 하면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백정노릇을 했든지 무엇을 했든지 보지 아니하고 그 당시에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  법을 믿어서 철두철미한 신심을 낸 사람만이 이 무상법문을 들으면 반드시 깨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해탈경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경]에서도 백정이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확철히 깨치고서 '나도 부처님 가운데 하나다[我是千佛一數]'고  외쳤습니다. 그것도 철두철미한 참괴심을 근본으로 삼는 신심에서 성취한 것이지 아무런 짓을 해도 괜찮다는 용이한 마음에서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영원토록 아비지옥의 업만을 받아서 살아날 길이 없게 되고 맙니다.  이런 저런 것을 영가스님이 예를 들어 놓으신 것은, 극중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철저한 신심만 가지면 모두 다 대법을 성취할 수 있다는 좋은 예로서 말씀한 것이지 악을 장려하고 막행막식(莫行莫食)을 용납 하는 뜻으로 알아서는 지옥에 들어가기를 화살같이 할 것입니다.

  122. 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줌이여
        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임과 같도다

       유마대사돈제의여 환동혁일소상설이로다
        維摩大士頓除疑   還同赫日消霜雪

유마대사의 법문 한마디에 아무리 중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바로 참회를 해서 모든 의심을 끊고 번뇌와 업장이 다 무너져서 확철대오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과 같으냐 하면  번쩍번쩍 빛나는 해가 눈과 서리를 녹여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이 많이 오고 서리가 많이 온다 하여도 해가 떠오르면 당장 다 녹아 없어져 버려서 어디 가서 그 자취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리들의 죄업이 두텁고 업장이 깊다 하여도 참으로 우리들 자성 가운데서 빛나는 지혜의 해가 떠오를 것 같으면 모든 죄업과 업장이 전부 다 눈 녹듯이, 서리 녹듯이 다 녹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말하자면 곧 비결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참회하는 철저한 신심이 근본이 되어야 하느니 만큼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얼음이 더 얼고 서리와 눈이 더 쌓여서 이 사람은 영원토록 살아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123. 부사의한 해탈의 힘이여
        묘한 작용 항사같아 다함이 없도다

      부사의해탈력이여 묘용항사야무극이로다
       不思議解脫力       妙用恒沙也無極

극중죄를 지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사람도 참괴심을 가지고 철처한 신심을 내어 무상대법을 믿고 실천하면 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사람이되어 버리니 이것이 부사의한 해탈의 힘이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묘용(妙用)이라는 것은 자기에게도 이익이 있고 남에게도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자성 가운데는 모래알 수 같은 그러한 대묘용이 있어서 다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흔히  "중생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법문하면, "그러면 당신부터 무한한 능력을 보여봐라" 하는 식으로 대들면서 별별 구업들을 많이 짓는데, 그것은 자기의 마음 가운데 항사묘용이 있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생들 마음 가운데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무진보고(無盡寶庫)가 있어서 다함이 없는 보배곳집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 쓰임이 한량이 없습니다. 고불고조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의 자성을 개발하면 여기에 항사묘용이 갖추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은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이 있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기에게도 이익이 되고 일체 중생에게도 이익되도록 대작불사(大作佛事)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기능력을 부인하는 사람은 참으로 부사의해탈경계를 모르는 사람이고 부처님의 비결도 모르는 사람이니 이는 중생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은 몰라서 그런 것이니 허물할 수는 없으므로 자꾸 깨우쳐서 교화를 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사의한 해탈의 힘'에 의지해서 공부를 성취함으로써 잠자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만 가지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의 법문을 맞추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고 비웃고 비방하면 안됩니다. 내가 설사 모르고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모두 나보다 수승한 분들이니 그 분들의 말씀을 이해하고 내가 따라갈 생각을 해야지 내가 잘 모르고 이해가 안된다고 자꾸 반대만 하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참으로 생사에 자유한 해탈의 경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무간지옥만 깊어져서 영영 헤어나올 날이 없습니다. 영가스님의 말씀과 같이 '항사묘용이 끝이 없다'는 이 길이 분명히 있으니 이 길을 믿고 따라가서 공부를 성취하여 누구든지 항하사(恒河 沙)같은 묘용을 써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24.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만약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도다.

       사사공양을 감사로아 만량황금도 역소득이로다
       四事供養    敢辭勞    萬兩黃金     亦銷得

대도를 성취하여 항사묘용을 쓰는 사람은 어떠하나 하면 네가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四事)란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방사,의복,음식(향화),의약 등이 대표적입니다. 대도를 성취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집을 주어도 거기에 살 자격이 있고 아무리 좋은 옷을 주더라도 입을 자격이 있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나 향화를 올리더라도 먹거나 받을 자격이 있으며  아무리 좋은 약을 주더라도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대도를 성취한 사람은 만량의 황금을 소비해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무리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아무리 대접을 받는다 해도 조금도 과분함이 없을 만큼 도를 성취한 가치가 이렇게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도를 통했으니 집을 팔아 오너라, 논을 팔아 오너라"고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실지로 만량의 황금을 소비할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남의 바늘 한 끝도 받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영가스님 자신도 평생 내내 먹고 사는 것이 산으로 다니면서 산채를 뜯어 말리든지 절이든지 하여 그것만 먹으면서 밭에 심은 채소는 먹지 않을 만치 철저하게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높은 가치를 내가 가질수록 실제 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며 예전 스님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 산 꼭대기로 꼭대기로 수미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보니 자기는 어느덧 다른 사람들의 발밑에 서 있더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사람이 훌륭해지면 훌륭해질수록 하심(下心)을 더한다는 말입니다. 대법을 성취한 사람일수록 철두철미하게 검박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며 건방지게 신도들에게  뭐든지 가져오라는 식으로 마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가스님의 이런 말씀은 공부를 성취한 가치를 들어서 그렇게 하신 말씀이지 현실에서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닐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25.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숴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한마디에 요연히 백억법문을 뛰어넘도다

       분골쇄신미족수니 일구요연초백억이로다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이 무상대법을 성취해 놓고 보면 불조의 은혜는 뼈를 가루로 내고 몸을 산산이 부수더라도 다 갚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대혜스님의 얘기를 했지만, 대혜스님이 처음 공부하는 동안에 몽중일여(夢中一 如)가 된 것을 가지고 자기는 공부가 다 된 줄 알고 오매일여(寤寐一 如)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오매일여에 대한 부처님 말씀이 옳다면 내가 고쳐야 할 것이다."고 까지 반대하다가 마침내 자기가 실지로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니, "부처님 법이 아니면 어찌 이러한 대법을 성취할 수 있으랴. 부처님의 은혜는 뼈를 가루로 내고 몸을 부수더라도 다 갚을 수 없다"고 찬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등한히 생각지 말고 법을 위해 몸을 잊으면서 대법을 배워야 하고 설사 대법을 성취했다 하여도 뼈를 가루로 내고 몸을 부숴서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는 크나큰 신심을 가져야합니다. 이 말씀은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해당되고 공부를 성취한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법의 가치는 '한 마디 말씀이 백억법문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가스님이 자기의 법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이 너무도 알아 듣지 못하므로 이러한 가치가 있음을 소개해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인데 이런 말을 해주지 않으면 이 법이 금덩어리인 줄은 모르고 똥덩이 흙덩이인 줄만 알고 자꾸만 발로 차내버리기 때문 입니다. 

여래의 비결이란 극중 대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부사의 해탈의 힘'에 의지하면 한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들어가 구경각을 성취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려있다고 하셨으니 이 한마디 한마디 말씀을 우리는 금쪽같이 여기고 부지런히 공부해서 대도를 하루빨리 성취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자기만이 제도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헤매는 일체 중생을 우리가 모두 바른  길로 인도하여 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26. 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강 모래같이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하였도다

       법중왕최고승이여 하사여래동공증이로다
       法中王最高勝        河沙如來同共證

'법 가운데서 왕이요 또 가장 높다'고 한 것은 반야의 근본 대지혜의 한 마디가 백억법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를 칠보로 둘러서 그 값을 치룬다 하여도 다 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값할 수 없는 보배를 써도 다 쓸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나 혼자만 알고 나 혼자만 쓰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 항하수의 모래알 같은 수많은 부처님들도 모두 이 법에 의지하여 확철히 깨쳐서 성불했으니 미진수 여래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하리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대법을 성취하면 여래인 것이니 남자거나 여자거나 축생이거나 지옥중생이거나 병신이거나 백정이거나 가릴 것 없이 이 법을 바로 깨친 사람이면 모두가 관자재(觀自在)이며 여래(如來)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진수 여래가 모두 다 최상승법을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슨 특권이 있어서 여래가 된 것이 아니라, 중생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고 누구나 다 같이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분명히 믿고 우리가 노력하면 누구든지 석가도 될 수 있고  달마도 될 수 있음을 우리 다 함께 명심하고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127. 내 이제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도다

      아금해차여의주하니 신수지자개상응이로다
      我今解此如意珠        信受之者皆相應

내가 지금 무애자재한 이 여의주를 깨쳐 설명하고 있으니 믿고 받는 사람은 모두 상응하여 다 쓸 수 있다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보배 구슬을 잔뜩 가지고 "당신도 가지시오, 당신도 가지시오"하면서 나누어 주어도, 손만 내밀면 다 받을 수 있는 것을 죽자 하고  받지 않으니, 이런 딱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물건처럼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또 억지로라도 주겠지만 그 구슬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본래 있는 그것을 바로 쓰라고 가르쳐 주어도 "나에게 있긴 뭐가 있냐?"하면서 결코 쓰려고 하질 않는 것입니다.

한 가지 좋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해방 직후에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 법대로 한 번 살아보자"고 하여 청담(靑潭)스님, 자운(慈雲)스님 등등 스님들과 봉암사에 살았는데, 그 때 청담스님이 한 얘기입니다. 한번은 청담스님이 어느 다리를 지나가다 보니 눈 먼 거지가 앉아서 "한푼 적선하고 가시오"하고 목이 아프도록 애걸하고 있는 걸 보고 크게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은전  50 전짜리를 하나 손에 들고는, "여보 이 돈 한번 만져 보오. 은전 50전 짜리라. 당신이 며칠 구걸해도 못 버는 돈이니 당신이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만 부르면 이 돈을 주겠오. 그러니 '나무아미타불'  한 번만 불러 보시오"하니, 이 눈 먼 거지가 돈은 욕심이 나서 50전 짜리 은전을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하면서도 "나무아미타불"은 부르지 싫은지 입도 달싹거리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청담스님이 다시, "당신 나무아미타불  한 번만 부르면 이 돈 50전만 받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서 영원토록 행복한 생활을 할 것이니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소?  꼭 한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보시오" 해도 자꾸만 생각하고 또 생각하더니 "아이고! 이 50전 못 얻었으면 못 얻었지, 내가 어찌 그렇게  하겠오" 하면서 끝내 거절하고 결코 "나무아미타불"은 부르지 않더랍니다.

중생이란 본래 이렇습니다. 50전 돈은 욕심 나는데  극락세계 가는 것은 겁이 납니다. 얻어 먹는 거지가 그렇게 큰 돈이 생기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도 50전짜리 은전을 만져보니 돈은 욕심이 나면서도 '나무아미타불' 한번 부르기가 싫어서 눈만 깜짝깜짝하면서 "어찌할꼬 어찌할꼬" 망서리기만 하다가 기어이 '나무아미타불'은  한번도 부르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청담스님이 그 돈을 다시 넣고 돌아와 버렸다고 합니다. 그 돈은 주면 안 됩니다. 청담스님이 그때 그 얘기를 그 뒤에도 두고두고 여러 번 했습니다.

이렇게 금은보화를 손에 쥐어주어도 마다하니 어쩌자는 말입니까?  중생업이 그런 것입니다. 몰라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웃고 말 일이 아니라 이 얘기를 우리는 깊이깊이 한번 생각해봅시다.  

  128.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요요견무일물이여 역무인혜역무불이로다
       了了見無一物        亦無人兮亦無佛

밝고 밝게 보아도 한 물건도 볼 수 없습니다. '밝고  밝게 본다'는 것은 쌍조를 말하고,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은 쌍차를 말합니다. 보기는 분명히 환하게 보는데 한 물건도 없습니다. '알기는 분명히 알지만 말로서는 미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도 조사도 찾아볼 수 없고 부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쌍차만  말했습니 다. 아무도 찾아볼 수 없는 거기서는 중생이라 해도 괜찮고 부처라 해 도 괜찮아서 부처가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로서 원융자재합니다.

  129.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대천세계는 해중구요 일체성현은 여전불이로다
       大千世界   海中 ?      一切聖賢     如電拂

삼천대천세계가 이렇게 넓고 광대무변하지만 진여자성에서 볼 때는 큰 바다의 물거품과 같다는 비유입니다. 바다란 끝이 있지만 이 삼천대천세계는 끝이 없어 무한하고 또 무한하며, 그렇게 넓고 넓은 삼천대천세계이지만 진여자성에 비교할 것 같으면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자그마한 물거품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여자성을 깨칠 것 같으면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광대무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 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이라고 하여 말할래야 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법을 증해 놓고 보면 그 넓은 삼천대천 세계라도 깨친 자성바다에 비할 것 같으면 자그마한 물거품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일체 성현은 번개불 스쳐가는 것과 같은 눈 깜짝할 사이의 존재와  같다는 것인데, 앞 귀절에서는 공간적으로 말할 것이고 이 귀절에서는 시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과거에 공자니 노자니 맹자니 하는 온갖 성인들이 다 있었지만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 자성의 입장에서 볼 때 공간적인 삼천대천세계는 잠깐 일어났다 꺼져버리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요, 일체 성현도 시간적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번갯불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130 .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가사철륜을 정상선하나 정혜원명종불실이로다
        假使鐵輪    頂上旋        定慧圓明終不失

설사 쇠뭉치로 죽이려고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릴지라도 보통 사람들 같으면 혼비백산하여 정신이 없을 터이지만, 공부를 완전히 성취한 사람은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서 마침내 손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쌍차쌍조하여 중도를 정등각해 있기 때문에 둥글고 밝은 이것은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먼저도 승조법사에 대해서 말했지만 설사 목을 천동강 만동강 내서 겉으로는 승조법사를 죽인 것 같아도 그를 영원히 죽이지는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성의 선정과 지혜는 둥글고 밝아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변동이 없고 손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131.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을 부술 수 없도다

       일가냉월가열이언정 중마불능괴진설이로다
       日可冷月可熱           衆魔不能壞眞說

정법이란 미래겁이 다하도록 언제든지 불생불멸(不生不滅),부증불감(不增不減)이어서 부처님이 천만 분이 나신다 해도 이 법이 더한 것이 없고 중생이 억천만이 없어졌다해도 이 법이 조금도 덜한 것이 없어서 언제나 정혜가 둥글고 밝아서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르고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리 때려 부수려해도 부술 수 없어서 차라리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따뜻하게 할 수 있을지언정 이 정법은 절대로 부술 수 없으니, 우리는 안심하고 이 법을 믿고 공부해서 성불하여야 할 것입니다.

   132.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 당당히 길을 가거니
          버마재비 수레 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상가쟁영만진도어니 수견당랑이 능거철고
      象駕 ? ?漫進途        誰見螳螂    能拒轍

코끼리가 임금님이 타는 큰 수레를 끌고 탄탄대로를 기세 좋게 달리는데 누가 그것을 가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버마재비란 놈이 그것을 막는다는 것이니 될 법한 말입니까?

장자(莊子)에 나오는 고사입니다.

제(齊)나라 장공(莊公)이 큰 수레를  타고 가는데 마침 큰 길가에  있던 버마재비란 놈이 가만히 보니 저기서 큰 짐승이 태산같은 것을 타고 오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보니 거드름 피우고 위엄 차리고 오는 것을 보니 자기 딴에는 같잖은 생각이 들어서 '저 놈을 못가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조그마한 발로 버티면서 수레를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소용없이 저만 가루가 되어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 힘도 없는 물건이 무한한 힘이 있는 것을 막으려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말하여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에 비유하느냐 하면, 무상대법은 버마재비는 그만두고 석가,달마가 막으려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무상대법은 불생불멸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손을 댈래야 댈 수 없고 손을  대기만 하면 상신실명(喪身失命)하고 맙니다.

우리가 이 법을 바로 믿고 깨칠 것 같으면 참으로 '한마디 말씀에 요연히 백억법문을 뛰어나서 항사묘용이 다함이 없는 여의주를 얻게 된다'고 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설명해 주어도 아무도 믿으려하지 않으니만큼 봉사에게 단청 얘기하는 격입니다.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이 많으니 결국 눈 뜬 사람만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무상대법이란 버마재비가 큰 수레를 막는 것과 같이 석가,달마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중생이 이를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대법을 믿고 공부하면 모든 것이 원만구족함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영가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33.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나니

       대상은 불유어토경이요 대오는 불구어소절이니
       大象은 不遊於兎徑       大悟     不拘於小節

큰 코끼리가 어찌 작은 토끼나 다니는 좁은 길에서 놀 수 있겠습 니까? 대법을 성취하려고 정법을 바로 믿고 나가는 사람은 쓸데없는 토끼 길에 놀아서는 안됩니다. 도를 구하는 진정한 대장부가 있어서 지금 내가 법문하는 이 법상을 메치고 "이 늙은이야, 가서  낮잠이나 자라"하고 차버리고 나간다면 조금은 코끼리를 닮았다고 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정신을 바로 가진 사람이면 절대로 삿된 길로는 가지 않습니다.

토끼 길이란 삿된 길을 말합니다. 바로 눈 뜬 사람이면 길을 가다가 어찌 흙탕물 구덩이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자성을 깨치는 첩경이 화두참선하는 길이니 이 길이외에는 모두 토끼 길인 것입니다. 오늘 대중들이 이렇게 모여 앉아 이 법문을 듣는 것도 토끼 길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신심을 내어 자성을 바로 깨치는 코끼리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134. 대통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단해 주는도다 

       막장관견방창창하라 미료오금위군결이로다
       莫將管見謗蒼蒼       未了吾今爲君決

관견(管見)이란 가느다란 대통으로 하늘을 본다는 뜻으로 소견이 좁은 것을 말합니다. 광대무변한 대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모두를 관견이라 합니다. 흔히 중생이란 대통 속을 통해 하늘을 보듯이 이 광대무변한 무상대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깜량으로 자꾸 비방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잘 알지 못하는 너를 위하여 관운장이 청룡도를 들고 안량,문추의 목을 배듯이 한 칼로 딱 결단을 내려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법을 들었거든 대통으로 하늘을 보는 좁은 소견은 집어 던져버리고 광대무변한 저 하늘을 보아서 결정된 신심을 내어 참으로 정법을 믿어서 자성을 깨치게 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무진보장의 항사 묘용이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토록 일체 중생을 위해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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