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法語)

집착을 놓아라 / 광덕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4. 28. 10:46
 

 

 

집착을 놓아라 / 광덕스님



얼마 전에 어느 책에서 보니까 당뇨병(糖尿病) 증상을 나타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삼십 분에 한 번씩 소변을 봐야 하고 갈증(渴症)이 나서 물을 연달아 먹어야 하는 증세입니다.

여성이 이럴 경우에는 대개 아기를 못 갖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분들은 월경(月經)에 배란(排卵)이 없어 무배란성 월경이라는 증세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런 증세의 병명(病名)을 부모에게 말을 못했어요.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서 마침내 친정어머니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친정어머니는 이거 안되겠다 하시며 "세간 법에 없는 것은 부처님께 찾으면 된다." 고 하시고는 모녀가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기를 가져야겠다. 건강해야겠다.' 하는 이 생각은 신성(神聖)한 생각이고 부처님에 의해서 마땅히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결혼후 5년만에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이러한 병에는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낳을 수 없는 수가 있다. 가능한 중절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기도하는 분들인 까닭에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기를 갖게 된 것도 다 부처님의 은혜(恩惠)다. 부처님의 원력(願力), 부처님의 섭수 위신력으로써 가진 아기다. 부처님이 주신 아기니까 낳는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계속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참으로 건강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병원 임상회에 보고가 되고 의학회에 보고까지 되는 사례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世間)에서 보면 그저 우연이겠지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대개 논리적인 사고로 수긍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면 우연이라는 말들을씁니다. 그러나 우연이라도 좋습니다. 우리들의 한계적인 사유가 분명히 나올 수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 부처님법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와 합리를 초월한 것입니다. 깊은 신뢰를 가지고 부처님의 참빛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 어떤 분은 무모하게 미신적인 말을 한다고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도 무모하고 미신적인 것에 대한 가장 대적(對敵)해 왔던 사람인데 지금은 어찌 보면 무모(無謀)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

니다.


그런데 원래 생명의 본모습이 그런 것입니다. 세간적인 눈에서 벗어난 깊은 지혜에서 볼 때 존재의 참모습을 보고 존재의 참모습을 그려보면 우리의 삶은 편안합니다.


⊙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불법의 본성은 바로 불생불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형상에 매여 가지고는 모릅니다. 금강경 말씀에 부처님께서 "형상으로 부처를 보겠느냐" 했을 때 수보리 존자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형상으로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하신 것처럼 일체에 있어 형상에 매달려 있는 한 나는 것도 있고, 멸하는 것도 있습니다.

형상에 내가 이미 없는 윤리에서 모든 부처님이 일체 국토에 그냥 들어가 있고 모든 사람. 모든 가정. 우리가 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부처님이시어서 내 곁에 와서 광명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상에 매달리고 형상에 집착해 있는 한은 부처님을 보지 못합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형상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입니다. 이런 줄 알고 집착을 놓았을 때에 바로 허망한 형상 그 자체가 사실인 즉은 제불(諸佛)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들의 본심이 무엇이냐.'

그것은 논리적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들이 지금 맛보는 것이고, 있는 듯하지만 실로는 없는 것이고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해도 실체가 없습니다.


⊙ 법신을 보고자 하거든 형상을 여이라



언젠가 조용명 스님이 방한암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불광지(1980년 5월∼9월호)에 쓰신 적이 있습니다. '노사의 운수시절'이라는 난에 '우리 스님 한암스님' 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한암스님은 신도분들이 와서 불명을 청하고 법문을 청할 때는 불명을 써 주시고 계문을 써 주시는데 항상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


일체 법이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성을 알 것 같으면 일체처에서 부처님을 본다. 부처님의 원만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관념에서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미혹의 세계가 생기고 결백의 세계가 생기고 고난의 세계가 생기지만 공(空)입니다. 없습니다. 자성무성입니다. 집착을 다 놓아 버렸을 때 법칙을 봅니다. 청정 법칙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암스님이 신도분들에게 계명을 써 주시던 경우의 계문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일단은 법신이라는 것은 형상을 여의는 데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법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고 묻게 되면 법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은 법신도 하나의 상이 되기 때문에 법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법신은 따로 말을 하고 생각하고 논리적인 구조 가운데 지견을 따로 가지고 말을 한다면 역시 그것은 법신이 아니고 말에 불과 합니다.


그렇지만 일단 형상을 여읜 것이라고 하는 표현을 드릴 수밖에 없고 법신이라는 것을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기도에 대하여 말씀드린것처럼 불가사의 한 것을 쓰고 있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법신입니다. 내 주인은 법신입니다. 생각할 수 없는 법신입니다. 그래서 완전 구족한 법신 덩어리인 불가사의를 쓰고 있습니다.


⊙ 부처님의 공덕을 어떻게 내어 쓸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쓰는데 어떻게 쓰느냐. 내가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님의 공덕을, 부처님의 위신력을, 부처님의 청정성을, 부처님의 자비를 온전히 갖춘 말할 수 없는 무한대한 것을 고스란히 갖춘 이 법신, 이것을 내 생명 뿌리 가운데 몰래 감춰 가지고 있어 이것을 쓰는 것입니다.

마음을 일으키는데 착한 마음을 일으키면 이 몸뚱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형상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이 색신, 이 몸뚱이가 악한 것, 즉 거칠은 것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법신을 못봅니다. 마음 쓰는 것도 못 봅니다. 나라고 하는 껍데기만 보는 것입니다. 겉껍데기 이 색신, 이 형상, 내가 사는 이 세계, 나의 생활 주변이 거칠으냐 좋으냐 이것만 보고 앉았지 그것이 나타나기 전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것은 생각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 복을 탈 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엇길래 이렇게 박복할까.' 기껏해야 그 정도이지 참으로 누가 복을 주고 복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만약 조물주가 있어서 애를 먹인다면 조물주 규탄 대회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조물주가 자기 자신 가운데 들어 있을 방에는 스스로 자기가 조물주를 대접해 착한 조물주로, 어진 조물주로, 참으로 평화스러운 조물주로 되돌려서 나의 생명의 터전인 이 땅이, 이 생명 자체가 참으로 평화스럽고, 참으로 따뜻하고, 참으로 빛나게 자기를 다시 개조할 수 있는 조물주로 단련을 해야 합니다.


사실인즉 우리들은 진(眞)이라는 법신이 나의 본 생명입니다. 그 법신은 생각을 끊음으로써 그 힘을 발휘합니다. 법이 있는데 착한 마음을 일으키면 그 핵심이 몸뚱이와 이 상황 세계가 착하고 원만하고 조화를 이룰 환경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거칠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한 환경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법신도 멀어지고 마음도 멀어집니다. 이 몸뚱이가 떨어지는 이 세계만 보기 때문에 결국 끝을 모르는 것이며, 이래야 되는가 저래야 되는가 하고 망설이게 됩니다.


⊙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장님이 서로 지나가다가 싸움이 나서 서로 때리다가 때릴 사람은 못 때 리고 옆에 다른 사람을 때리기 때문에 왜 날 치느냐 하면서 또 서로 싸운 다고 합니다.


해방 직후에 남산 밑에 장님 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동네에서 어떤 사람이 차 사고가 났답니다. 장님 양반이 그를 응징하기 위해 때린다고 때린 것이 하필 다른 사람을 때리게 되어서 왜 치느냐 하며 서로 치고,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치고, 저 사람이 또 저 사람을 치고 옥신각신해서 서로 눈을 감은 분들이 작대기를 갖고 나와서 남산 입구 길에서 대 전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이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흡사합니다. 이 육체, 그것에만 매달려 가지고 서로 원인을 잘못보고 그야말로 이웃 사람을 치고 앞사람을 받고 야단을 해서 엉뚱 한데로 파벌을 일으켜서 원인모를 전쟁, 끝 모를 전쟁이 계속해서 끊일 사이 없이 벌어지는 것이며, 말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전쟁은 끊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인을 모르고 이렇게 미혹한 중생들이 움직이는 세계가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법신에 눈뜨지 못하고 겉 형상에 나타난 것에 집착해서 끝없는 맹인 증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제일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이러한 형상에 살고 물질에 살고 육체에 사는 것,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간에 살고 육체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세간에 살고, 육체로 사는 집착, 그것밖에 다시 없는 집착, 이것을 쉬면 육체에 머물러 살고, 이 세계에 머물러살면서도 욕진은 끊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