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法語)

선지식에게 듣는다 / 속리산 법주사 혜정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5. 9. 13:38
 

 

 

 

 

선지식에게 듣는다 / 속리산 법주사 혜정스님  

 

 

월간 법회와 설법은 수행과 교화의 本分事에 정진하시는 善知識의 修道와 傳法 이야기를 인터뷰하여 소개합니다.

이 선지식의 치열한 구도 교화기가 제방 스님들의 精進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박희승/조계종 포교원 연구차장  

 

 

 

 

6월초 이른 무더위가 와서 도시는 숨이 턱턱 막히는데 속리산 법주사의 숲길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울울창창 하였습니다.

비록 叢林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총림 못지않은 역할과 인재를 배출한 곳이 바로 법주사입니다.

특히 정화 이후 金烏(1896~1968)禪師가 주석한 이래 금오문도의 본찰이 되었고, 선사의 회상에는 月山, 梵行, 月南, 呑星, 二斗, 慧淨, 月珠, 月誕, 正一, 天龍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어느덧 금오선사의 제자 중에서 살아 계신 분보다 입적하신 분이 더 많다고 합니다.

생존하신 분 중에서 慧淨스님은 참으로 독특한 수행 이력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절집 사정을 잘 아는 분은 압니다.

선·교·율을 겸수하시고 법주사 주지를 거쳐 총무원장 소임을 보셨으니 사판의 최고 이력까지 하셨으며, 지금은 법주사 律主이자 조계종 원로의원, 법계위원, 계단위원에 추대되셨습니다.

특히 본사 주지와 총무원장을 지내시고도 해인사, 봉암사, 불국사 등 제방 선원에서 대중과 더불어 용맹정진, 운력, 발우공양, 포살을 여법하게 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는 날에도 여름 안거 결제 중이라 11시에 법주사 큰방에서 선원과 강원 대중과 법(발우)공양을 함께 하셨습니다.

세납 칠십이 넘는 원로께서 따로 암자에 주석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듯 대중과 함께 사시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흔한 일도 아닙니다.

師表란 일상생활 가운데 대중과 더불어 여법히 사는 그 모습 그대로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만 이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만이 보이는 법일 터이고.  

혜정스님 역시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하셨으나 한 문중인 포교원장 도영스님의 간곡한 청으로 친견이 성사되었습니다.

법주사 경내 금동미륵대불을 마주 보고 왼쪽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 있는데 그 사리탑을 외호하는 사리각에 스님은 30년이 넘게 주석하고 계십니다. 법주사에도 진신사리탑이 있었는가 의아했지만, 안내문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때 왕명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왔다고 하니 역사적 근거가 명확한 데에도 미륵대불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못한 듯합니다.

또한 사리각은 근대에 금오선사께서 입적하신 전각이니 더욱 유서 깊은 곳이라 여겨졌습니다.  

 

문) 먼저 어린시절에 서당 훈장이셨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책을 가까이 하시다가 출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시절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나요.

내 개인 이야기보다 조금이라도 공부에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어요.  

 

행자시절 참선 중에 경계를 체험하다  

문) 출가 전에 이미 마곡사 대원암에서 화두 참구를 하셨고 당시에 이미 어떤 경계를 체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인연을 좀 들려주십시오.  

 

우리 세대는 민족사의 수난을 그대로 겪고 자랐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었던 서러움과 6·25사변이라는 전쟁의 비극을 겪으며 인생에 대한 고뇌가 컸지요.

전쟁 중에 우연히 어떤 불교잡지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생은 어디를 쫓아 왔으며  

죽음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생은 곧 한 조각의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사라짐과 같느니라.”  

 

이 글귀가 가슴에 와 닿아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방학 때 존경하는 김구선생이 출가 수행하였다던 마곡사로 책을 짊어지고 공부하러 갔었습니다.

그렇게 간 곳이 마곡사 대원암이란 곳이었습니다.

당시 대원암은 참선하는 비구승들이 선방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정진하고 사는 모습에 감동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행자로 있으면서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한 곳은 어디인고(萬法歸一 一歸何處)?” 라는 화두를 타서 참구하였습니다.

입적하신 지선스님이란 분과 함께 정진하였는데 밤잠을 잊고 용맹정진을 하였어요.

“만법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화두 참구에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 새벽 도량석으로 이어지곤 했어요.

아마도 젊은 기운이 정진력을 북돋워졌던가 봐요.  

그러던 어느 날 철야 용맹정진을 하면서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데 홀연히 앞벽이 무너지고 둥근 빛이 눈 앞에 보이면서 육신이 공중에 붕 뜬 체험을 하였어요.

그 후에도 그런 경계가 몇 차례 더 나타났어요.

그래서 아, 정말 이 길이 우주의 실상을 깨닫는 길이구나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평온함과 환희심은 떠나지 않는데 그때 확실한 發心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당시 큰절인 마곡사는 대처승과 그 가족들이 살고 있었고, 대원암이라는 작은 암자는 참선을 하는 비구승들이 선방을 하고 있었어요.

서울에서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자 큰절 대처승들이 올라와 참선하는 비구승들을 내몰다시피 하였어요. 그래서 가까운 수덕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문) 당시 수덕사 공부 분위기를 좀 들려 주시죠.  

수덕사는 근세 선의 중흥조인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스님, 그리고 금오스님이 계셨던 곳이죠.

그래서 수덕사는 “禪을 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다”는 그런 인식이 배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행자도 참선을 하게 했습니다.

수덕사에서 선은 아주 필수적이었습니다.

禪刹의 이미지가 아주 강했지요.

경전을 연구하거나 현대 학문을 하는 것보다 오로지 선을 중시하는 가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禪農一致를 하였습니다.

논밭이 많았고 정진하고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당시에는 조실로 금봉스님이 계셨고, 벽초스님, 금오스님, 비구니로 김일엽스님 그런 분들이 계셨지요.  

처음 수덕사에 가보니 마곡사보다는 당우가 훨씬 작더라구요.

듣던 것과는 달랐어요.

저녁에 도착하여 어떤 허스름한 농군같은 분이 방사를 챙겨주길래 무심코 자고 다음날 여기에 벽초스님이라고 계시다던데 인사를 좀 드려야겠다고 말했더니 어제 뵙지 않았느냐고 하데요.

그제야 어제 농군 같은 분이 벽초스님이었구나 생각이 나더라구요.

벽초스님은 농사와 일이 본업이었다고 할 정도로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禪機가 남달라 가령 산 위로 무거운 돌을 저 나르다 잠깐 쉴 때 지나던 신도들이 “아휴, 스님들이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시니 힘드시겠다” 하였는데, 벽초스님께서

“아 당신들은 평생 더 무거운 것을 이고 다니지 않소?

그게 뭔지 알아요? 바로 허공이요.”

이렇게 말할 정도로 일상에서 선기가 그냥 풍겨졌어요.

수덕사의 실질적인 주인이었습니다.

그런 수덕사 산중 가풍 덕분에 저도 행자 생활을 한 2년 했는데 농사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화두를 챙겼어요.

지금 젊은 분들은 아마 잘 믿기지 않는 분도 있을거예요.

그러나 당시 수덕사에는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고 누구나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한 가지 기억이 나는 것은 종단의 율사로 널리 알려진 일타스님의 속가 아버님께서 출가하시어 法性이라는 법명을 받으시고 정진하고 계셨어요.

남들과 같이 예불하고 쟁기질하고 그러셨어요.

그분은 손재주도 좋으셨는데 어느 날 제게 나무로 깎은 죽비를 하나 만드시어 주셨어요.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저기 저 죽비입니다(스님 방 모서리 벽에 걸려 있음).  

 

은사 금오선사 이야기  

문) 은사이신 금오선사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금오스님은 첫인상이 달마도에서 본 그 달마스님과 같았습니다.

눈이 부리부리하시고 체격이 건장하셨죠.

힘이 장사였는데 수덕사 대중방에서 벽초스님과 씨름을 겨룰 정도로 쌍벽이었습니다.

저의 사형되시는 월남스님께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하라고 권유하여 인사를 드렸는데 뵙는 순간 “이 분이야말로 나를 이끌어 주실 스승”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금오스님께서는 “첫째도 참선, 둘째도 참선.” 오로지 참선을 강조하신 분입니다.

산내 대중이 한 자리에 모여 운력을 할 때 행자가 좌선하느라고 안나와도 예외를 인정해 주실 정도로 참선을 강조하신 분이죠.

항시 참선을 하시거나 도량을 아끼시고 대중을 위하셨어요.

가령 빨래를 늘어놓았는데 소낙비가 오면 스님은 대중 빨래를 먼저 걷으시고 나중에 당신 빨래를 걷으셨어요.

대중 위하는 마음이 늘 그러셨어요.

그러면서도 매사에 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철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은사스님의 은혜를 잘 몰랐어요.

입적하신지 30여년이나 되는데 이제야 그 은혜가 한이 없다는 생각이 자주 납니다.  

스님 수덕사에서 일을 그렇게 많이 하시면서도 화두를 늘 챙기셨던 것이죠?  

그럼요, 화두 공부는 坐禪보다 行禪이 더 힘이 있습니다.  

 

승단 정화와 20년의 소임 살이  

문) 수덕사 이후에 어디로 가셨습니까?  

제가 출가할 당시는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어 전국 사찰 중에 평온한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수덕사는 극히 예외였던 곳입니다.

금오스님께서 정화에 전면에 나서시어 저도 따라서 정화의 행동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하였을 때 교무국장 소임을 맡게 된 이후 근 20년 가까이 이런저런 소임을 보느라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정화운동을 한다 하면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쉽게 느껴집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태어나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었고, 곧이어 승단 정화를 하면서 사찰과 종단의 정법을 회복하고 수행 종풍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위 ‘淨化世代’는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우리 세대가 어떤 역사적 몫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제시대 대처제도가 확산된 상황을 타개하고 부처님의 정법과 한국불교의 전통을 복원하려면 누군가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화의 바탕 위에 지금 종단이 발전하고 있고, 전국의 총림과 선원에서 선풍이 활성화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 그렇습니다. 스님 세대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불교와 종단이 이렇듯 정통성을 가지고 한국불교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전통 수행법으로 계승하여 온 간화선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이죠.

스님께서 70년대 중반인가 법주사 주지를 하시면서 법주사를 일대 혁신하시고 마침내 총무원장 소임까지 맡게 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아이고 뭐 그런 이야기를…….

다 떠밀려 하게 되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다 후회되는 일이고 아쉬움만 남지요.

사찰이나 종단이 발전하려면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발전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재양성이 되어야 하지요.  

70년대 중반 주지 소임 맡았을 때 법주사 강원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지요.

강원에 동국대 교수를 비롯하여 이름 있는 분들을 외래 교수로 초빙하였고, 불교교리, 불교사,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영어, 심리학, 비교종교학 등 내외전을 망라한 교과과정을 도입하였어요.

그렇게 하면서 율반, 포교반, 외국어반, 편집반, 염불반, 미화반 등 6개 자율반을 편성해서 지원하기도 하고 하여 반향이 컸어요.

그래서 전국 어느 강원보다 학인들이 몰렸어요.

전국에서 강원 학인이 가장 많게 되었지요.

그때 참 신바람이 났었지요.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당시 종정 서옹스님이 보자 하신다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해서 가니 총무원장을 맡으라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하느냐고 못한다 하고는 당시 문중의 어른이셨던 월산스님께 말씀드리니 맡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거역할 수가 없어 도리 없이 맡게 되었지요.

이왕에 해야 한다면 좀 제대로 해보자고 인재양성에 원력을 세우고 승가교육개혁을 구상하였는데 당시에는 그 자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더라구요.

아주 힘들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하려면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끝이 없을 겁니다.

그 얘긴 이 정도로 하지요.  

 

소임 이후 다시 대중 선원으로 가다  

문) 원장 소임 내놓고는 어디로 가셨는지요 ?  

월산스님이 조실로 계신 불국사 선원으로 갔어요.

初心으로 돌아가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그렇게 보고 새 출발하는 심정으로 참회도 하고 정진도 하려고 선방으로 갔습니다.

불국사 선원에서 다섯 철을 나고 다시 해인사로 가서 두 철을 지내고 봉암사, 수덕사 선원 등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선방을 다니니 해인사에서 일타스님도 놀라시더라구 …

해인사에선 성철스님을 모시고 종정을 지내신 혜암스님과 함께 정진했습니다. 보름마다 포살법회를 하였는데 저와 일타스님이 번갈아가며 주관했지요.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 성철스님을 뵐 수 있었죠.

성철스님은 철저한 禪僧이셨습니다.

백장청규를 비롯한 선의 전통을 철저히 계승하고자 하셨지요.

禪과 敎를 兼修하셨고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일반에 알려진 “책을 보지 말라”는 것은 발심하여 선을 본격적으로 하시는 수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요.

평소에는 교학을 철저히 알아야 선을 잘 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성철스님은 본분사가 아닌 일, 즉 세속 일에는 일체 거리를 유지하셨지요.

한번은 설날인가 명절에 인사드리러 갔더니 웬 검은 양복 입은 이들이 서성대고 있어요.

누군가 했더니 청와대에서 심부름 왔는데 1980년대 군사정부에 참여해 달라고 했대요.

당시는 정권의 힘이 무소불위였잖아요.

그런데도 스님은 일체 참여하지 않았죠.

서울에 아예 가질 않으셨으니까.

성철스님은 외국에 가지도 않으신 것으로 알아요.

무명옷 입고, 검정고무신 신고,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산이라는 의식이 명확하신 분이었습니다.

외부의 여러 가지 유혹을 뿌리치시고 일생을 살기가 쉽지 않아요.

한국불교의 큰 공로자이시죠.  

그리고 총림의 청규를 늘 되새기셨어요.

초하루, 보름날에는 포살법회를 정기적으로 했어요.

아주 철저했지요.

그래서 해인사 선방에는 공부할 사람만 왔지요.

그러니 더 정진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았지요.

그게 다 성철스님의 지도 덕분이지요.

난 지금도 성철스님은 근세의 대선지식이라 생각합니다.  

 

토굴 공부에 대하여  

문) 암자나 토굴에서 공부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암자나 토굴 생활도 제법 해봤지요.

月出山 上見性庵에서 3년, 扶餘 金池庵에서 1년 정도 있었어요.

제 경우는 토굴에서 공부가 제법 되었어요.

그런데 토굴 수행을 하려면 먼저 대중 선방에서 참선하는 기틀을 완전히 잡아 고삐를 당기지 않아도 소가 저절로 가는 것처럼 공부에 익숙해진 후에 토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선원에서는 전 대중이 규칙적으로 수행함으로 게으름을 피울 수 없이 정진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도반들이 열심히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신심이 고취되기도 하고, 조실스님의 법문과 탁마를 통해 발심과 정진을 다잡을 수 있기도 하고요.  

토굴이나 암자 수행은 전심전력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지요.

대중 선원에서 규칙적인 생활에 구애받지 않고, 외경계에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 토굴 수행입니다.

그런 점에선 대중 선원에서 공부 기틀을 완전히 다진 수행자는 토굴에서 집중 수행을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과정이라고 나는 봅니다.

다만, 초심자가 바로 토굴로 가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문) 앞에서 스님께서도 참선을 하시다가 어떤 신이한 체험을 하셨다고 했는데, 참선을 하다가 그런 경계를 체험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  

참선을 좀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구나 그런 경계를 보게 되지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삿된 길로 빠지게 되므로 그런 것은 경계하고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가는 동안 갖가지 풍경을 볼 수가 있지만 거기에 마음이 홀려서 목적지를 잃어버린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견성성불로 가기 위해 참선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正覺과는 거리가 먼 말변지사(末邊之事)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만, 초심자의 경우 그렇게 체험한 경계가 신심을 북돋워주고 정진력을 배가시켜주기도 합니다.

실제 제 경우도 그렇고 적지 않은 스님들이 그런 경계를 체험하여 참선이 좋다는 확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든지 자기가 체험해보는 것이 제일 좋지요.

아무튼 참선 도중에 체험하는 어떤 경계도 무시하고 화두 관문이 타파되는 확철대오로 나아가야 합니다.  

 

禪과 敎의 관계  

문) 스님께서는 禪·敎·律 三學을 두루 겸수하신 종단에서 드문 이력을 가진 분으로 보여집니다.

스님의 입장에서 禪과 敎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교학을 먼저 공부한 뒤에 참선하는 것이 바른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경우 참선에 매료되어 출가하였으나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전에 법주사 강원에서 사교와 대교를 보았습니다.

경전이야말로 신심을 확고하게 하고, 간혹 바깥 경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흔들릴 때도 다시 초발심으로 돌아오게끔 하는 힘이 가득 깃들어 있는 문자사리(文字舍利)입니다.

경전을 보는 것과 보지 않은 것은 이정표를 보고 길을 가는 것과 이정표 없이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요.

확실하게 이정표를 보고 가면 방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경전에는 왜 수행해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각양각색의 수행 방법이 상세하게 설해져 있지요.

경전에 담긴 부처님 말씀의 요체는 결국 마음을 찾아 깨침을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라는 것이므로 경전을 먼저 공부해서 수행 의지를 확실하게 다진 수행자는 그만큼 방황을 덜하고 이탈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용맹정진의 힘  

문) 대중 선원에서 정진하실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좀 들려주시죠.  

해인사 선원에서 철야 용맹정진 때의 일인데, 대부분 삼사일 동안 잠 안자고 정진하다보면 졸음 때문에 갖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장군죽비를 내리치는 입승스님에게 “졸지 않았는데 왜 때리느냐”며 대드는 이도 있고, 화장실에 가서 조는 이도 있지요.

수마(睡魔)가 참으로 큰 장애입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잠 안 자고 용맹정진한 다음날 40리 길을 포행해도 끄떡도 하지 않는 수좌들의 기상이 훗날 크나큰 힘이 됩니다.

업으로 뭉쳐진 육신, 편안함만을 갈구하는 육신을 다잡아서 일주일 동안이나마 확실히 끌고 가는 동안 공부 자세가 확고해지고 자신감과 용기가 나지요.

그렇기에 수많은 선지식들이 처절한 고행을 통해 육신을 조복(調伏)받고 정진력을 길러 마침내 큰 깨달음을 성취하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 지금 선원에서 정진하는 후배 수좌들을 위해 한 말씀해주시죠.             

내가 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요. …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려 하여 “종단의 원로로서 어찌 하실 말씀이 없겠습니까?” 거듭 권하자) …

출가는 자진해서 합니다.

남이 하라 해서 하는 경우는 없지요.

출가 수행자는 어떤 경우라도 출가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결제, 해제를 구애 받지 말고 늘 화두를 놓지 말고 열심히 정진해야 합니다. 그게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이고 길입니다.

그 길을 열심히 가길 바랍니다.  

 

문) 종단 법계위원과 계단위원으로 위촉되어 계시면서 법주사 율주로 수계산림의 전계사로서 수계식 때 늘 하시는 말씀이 있으시면 좀 들려주시죠.  

일찍이 중앙 계단에 참여하여 한 20여 년 간 수계산림도 주관하고 그랬지요.

계를 설할 때마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戒는 하나의 윤리도덕에 입각한 그런 계가 아니라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 정진인 것이다.

戒行이 바로 바르게 성불로 이어지는 정진인 것이다.

열심히 정진하라 합니다.

계·정·혜 삼학이 하나여야 합니다.

계를 지키는 것이 본분입니다.

계도 마음을 깨치는 성불의 길이고 하나가 되는 길입니다.  

요새 비구니스님들 사이에서 비구니 팔경계와 관련하여 계를 수정해야 한다고 하는 분이 있다는데 그건 참 잘못 안거예요.

계는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절대적인 기준이에요.

물론 당시에도 더러 고치는 일이 있었죠.

그런데 고치더라도 원문은 그대로 두고 그 옆에다 수정하는 것을 추가해 왔어요.

그런데 요새 아예 고치자고 하는 말이 있는 모양인데 그건 잘못된 거예요.

그래선 안 됩니다.  

戒行이 바로 수행입니다.  

 

 

본래성불의 뜻  

문) 선종에서는 “우리는 본래 부처다(本來成佛)”고 합니다. 

스님께서도 역시 자주 말씀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이 뜻을 좀 풀어 주시죠.  

그건 누구나 다 알고 있잖아요.

우리가 출가해서 성불의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참선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잖아요.

목적이 생사해탈 즉 성불이라면,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간경, 염불, 주력, 위빠사나, 지계 이런 것이 모두 성불로 가는 길이죠.

다만, 참선이 가장 빨리 가는 殊勝한 길이라는 것을 역대 조사들이 검증하시고 말씀하셨던 것이죠.  

부처님께서나 역대 조사님들께서 한결 같이 하시는 말씀이 누구에게나 佛性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이죠.

누구에게나 부처님 성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성이 오염이 되고 三毒心에 가려서 탁해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둥근달이 구름에 가리워지면 보이지 않듯이 우리 불성도 삼독심에 오염이 되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름달 즉 불성 자체는 없는 것도 아니고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자체는 본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다만 번뇌망상이 구름처럼 가리워져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구름이 거둬지면 본래 있는 둥근달이 드러나듯이 번뇌망상을 걷어내면 본래 있는 불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本來成佛의 뜻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은 이처럼 있는 그대로가 본래 부처라는 것인데, 이것은 내가 뭘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본래 있는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이니 이것을 참선을 통해서 다시 발견하는 것, 다시 찾아 완성하는 것, 그게 見性이고 成佛입니다.

그러니 “본래 부처다”는 말은 이미 갖춰져 있는 평등하고 원만하고 차별이 없는 세계인 불성 자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본래 부처인 자리는 일체가 평등하여 어떤 차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여 협조하고 그래서 同體大悲心으로 하게 되는 것이죠.

그 안에서는 평화가 저절로 됩니다.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부처라는 것을 믿고 깨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죠.

결국 확인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문) 주지스님이나 포교사를 위해 좋은 말씀을 좀 해주시죠.   

출가 수행자의 본분은 수행입니다.

수행의 목표는 깨침이고, 그 외 다른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는 게 아니죠.

그 깨침으로 가는 길에 승가가 있고 그 승가 안에 소임이 있는 것입니다.

선방에 가서 정진하는 분은 바로 가는 깨침을 위해 화두를 일심으로 참구해야 하고, 그외 원장이나 종회의원, 부장, 국장, 주지 소임이란 것도 권익이나 특권, 또는 명예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자기가 수행해야 할 시간을 희생해서 머슴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원주나 머슴이 되어 공부하는 스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외호하면서 수행하고 복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스님을 위해 봉사하고 도와주는 외호대중의 소임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권리와 명예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포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는 성불해서 전법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하기 어려우니 수행하면서 포교를 해야지요.

우리 불자의 양대 목표가 수도와 포교 아닙니까?

그러니 수도하면서 포교하고 포교하면서 수도해야 하는 것이죠.

절에서 수행자들이 여법히 수도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간접적인 포교가 되는 것이고, 또 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도 해주어야 부처님 법이 좋을 줄 알겠죠.

그것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포교사가 법을 설하면서 자기 지식 자랑이나 이름을 알리려 하면 안되겠죠.

그것은 자기 이념과 포교에 대한 개념이 잘못 잡힌 것입니다.

나는 부처님의 심부름꾼으로 부처님 법을 모르고 알아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에게 법을 가르쳐 주어 그 법을 듣고서 세상 사람들이 신심 나게 하고 그 힘으로 더 당당하게 잘 살게 하도록 하는게 포교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문) 스님, 마지막으로 불자들에게 한 마디 일러 주십시오.  

종교를 절대시, 신비시하게 되면 많은 피해가 옵니다.

종교는 내가 바르게 잘 사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바른 개념을 정립하여야 합니다.

종교를 통해서 내가 행복해지고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인류 전체가 같이 잘 사는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나와 남을 위해서 대승보살행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도그마가 아니라 그때그때 지혜를 발휘해서 더 나은 삶으로 가야 합니다. 가령 경제난에 직면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고, 정치적으로 어렵다하면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어렵다 할 때 그 어려움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과 사상에 기초하여 극복할 지혜뿐 아니라 힘과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어떤 경우에라도 평상심을 견지할 수 있고 향상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불교에서 찾고 배워야 하지, 불교나 어떤 종교를 잘못 이해하면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고 관념적으로만 받아 들여 머리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이나 실천은 전혀 따라가지 않는 경우도 큰 병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종교를 배우고 이해하면 생활 속에 도움이 되고 나와 남이 모두 향상되는 그런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불자들 중에는 샤머니즘적이고 니힐리즘적(허무주의)인 경향이 많습니다. 이런 것은 경계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영원한 진리로 가장 현실에 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셨고 과학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아 그것을 바로 자기 생활에 원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불교를 많이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활 속에 활용할 수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의 가치, 종교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것이 됩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이 시간, 나 자신의 삶에 적합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가령 물은 모든 음식을 만들고, 아무 것을 만드는데도 다 이용되듯이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첫째, 스님들이 잘못 전도를 하고, 둘째 신도들이 샤머니즘적이고 니힐리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어선 안됩니다.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할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불자는 당당하고 신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놀 때는 실컷 놀고, 싸울 때는 싸우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꼭 참선만을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경 볼 사람은 경을 보고, 염불할 사람은 염불을 하고, 주력할 사람은 주력을 하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참선을 비롯한 모든 수행이 다 최고의 인격을 체득하는 것, 이게 바로 불교의 목적 아니에요.

그래서 항시 ‘나’라는 것, 내가 제일이다.

개인으로 제일이 아니라 불성을 가진 보편적인 인간이 제일이다.

나에게도 마음이 제일이다.

마음이 부처다는 것을 명심하고 매사에 성실히 당당하게 살아 나가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지혜가 능히 나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