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듣던 외국인 학생들이 묻습니다.
원효의 생애나 일화는 손에 꼽을 만치 적습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
그리고 그 절로 관음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원효 이야기가 실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월경대 빤 물을 먹으라니
원효도 관음을 친견하고 싶어했습니다.
작업이 잘 안되자 실망한 원효는 다시 길을 갔고, 다리 밑을 지나는데,
또 어느 여인이 개짐을 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짐이란 말이 좀 생소할 터인데,
여인들이 매달 걸리는 마법(?)을 옛적에는 매달 거친다는 뜻에서 ‘달거리’라고 했고,
그때 쓰는 천을 개짐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튼 그 쑥스러운 장면을 그냥 지나쳤으면 좋으련만,
스님은 또 짓궂게 여인에게 물 한 잔을 떠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인은 그런데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표주박으로 그 빨래하던 물을 떠다 스님에게 내밀었습니다.
스님은 아마도 화를 내면서,
그 물을 홱 내버리고,
위쪽 상류의 깨끗한 물을 떠다 마셨습니다.
제호란 넥타라고 번역하는,
신선들이 마시는 감로수를 말합니다.
낙산사에 도착해서 보니, 관음보살 상 앞에 신발이 놓여 있었는데, 얼마 전 본 바로 그 신발이었습니다.
스님은 자신이 만났던 여인이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효는 그 동굴에 들어가 살아있는 보살의 모습을 친견하고 싶어했지만,
그때마다 파도가 높게 들이쳐서 결국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한국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원효가,
누구보다도 먼저 관음보살을 친견했을 그 분이,
정작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와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프로이트와 조셉 캠벨의 통찰
그 전에 이렇게 핀잔을 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천의 얼굴을 한 영웅>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진실을 다양한 형식으로 드러내는데,
그런 점에서 할머니 무릎에서 듣는 이야기와 복잡 정교한 철학,
그리고 황당무계해 보이는 신화,
꾸민 픽션인 소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삼국유사>의 수많은 황당하고 비실제적인 이야기들,
일연 자신은 ‘빠뜨린 사실들(遺事)’이라고 하나,
상상과 사실이 뒤섞인 이 이야기들이 그 어느 철학이나 논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원효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 불교계 전체가 그를 시기하고 미워했고,
그런 나머지 이런 ‘덜떨어진 원효’ 이야기들을 만들어 유포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무엇보다 원효가 정통불교도 상에 걸맞지 않게,
술을 마시고 잡배들과 어울리며,
아내와 자식까지 얻은 파천황의 행태가 보태지면,
이런 해석은 설득력을 얻습니다.
원효의 이야기는 불교가 알리고자 한 근본적 지혜,
바로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부터 볼까요.
저번 강의에서 본 대로,
인생에는 더럽고 깨끗한 것이 섞여 있으며,
우리는 선인과 악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깨끗한 것만을 찾아,
이웃과 환경을 돌아보지 않게 될 것이며,
악을 박멸하고 선을 보존하기 위해 독선과 전쟁을 날로 일삼게 될 것입니다.
그 일상화된 비극,
역사의 고통은 우리의 무시이래의 분별(分別)로부터 연유된 것입니다.
영웅적 수용에 대하여
더러운 것을 마시고, 낮은 자리에 기꺼이 처하는 영웅적 자세 없이는 관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원효의 눈을 가로막는 파도는 바로 그 저항,
즉 운명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오랜 저항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조건은 수용하고,
불필요한 저항은 줄이는 것이 불도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그 영웅적 수용(the heroic acceptance)이 웰빙,
잘 사는 길의 요체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커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훨씬 너그러워집니다.
작은 일에 화를 내는 횟수가 줄어들고,
내 시선 밖에서 사물을 보는 눈이 자랍니다.
그때 여러분 또한 들에서 일하는 여인이 작업(?)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웃으로 친구로, 나아가 부처와 보살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저항과 희구의 파도가 잠잠해질 때,
관음보살은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니,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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