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2부49강/<금강경> 7장 “얻은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通達無我法者 2008. 8. 23. 17:17

 

 

무위법 안의 서로 다른 개성들

6장으로 설법은 다시 한 번 끝났다. 말했듯이 <금강경>은 <반야심경>과 달리, 이야기가 반복되고 변주된다. 새로운 것은 없다. 지겨운 사람은 그만 책을 덮어도 좋다. 아직 의혹이 남은 사람들, 또 혹은 좀 더 분명한 설명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7장이 이어진다.

진리는 어디 있는가
-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까? 또 여래가 우리에게 무슨 설법이란 것을 해 주었다 할까?” 수보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부처님뜻을 이해한 바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것은 없습니다. 나아가 여래께서 이것이다 싶게 설법해줄 만한 진리는 없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 多羅三 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 多羅三 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책들은 진리가 있는 곳을 그야말로 지시(指示), 가리켜 주는 것일 뿐, 그것이 곧 진리는 아니니, 한사코 끌어안고 악착하거나, 남과 나를 구분하는 표지로 삼지 말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 그리고 <금강경>이 일러주는 뗏목의 비유를 화들짝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 혜능의 설명을 들어보자.
“아뇩다라, ‘더없는’이란 형용어는 밖에서 주워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찬사는 마음이 무아, 즉 차별의 찌꺼기가 없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대병설약(對病設藥), 붓다의 설법은 중생들이 부닥친 문제를 향해 내려준 처방일 뿐이다. 그런 임의적이고 상황적 처방에 무슨 ‘이것이다’싶은 진리의 당체가 있겠는가.


“여래가 무상정법, 즉 ‘더없는 올바른 진리’를 말씀하시지만, 그렇다, 마음에는 본시 얻은 바가 없다! 그렇다고 얻을 것이 없다고는 못한다! 다만 중생들의 각자 경험과 소견이 다르기 때문에, 여래가 그 근기와 성향을 감안하여 종종의 방편으로 깨우치고 감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제 집착을 떠나게 했다. 그는 일체중생의 망녕된 생각이 생멸(生滅)하는 메카니즘을, 그것이 경계를 따라 어떻게 추동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앞 생각이 일어날 때, 나중 생각이 이를 알아채야 한다. 알아챌 때 그는 그 생각에 머물거나 붙잡히지 않는다. 그때, 견해 혹은 고집은 존재치 않는다. 하니, 이것이다 싶은 ‘진리’란게 어디 있어서 여래가 설할 수 있겠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아’란 마음에 망념이 없는 것을 말하고, ‘뇩다라’는 마음에 교만이 없는 것을, ‘삼’은 마음이 항상 내적 성채를 유지하는 것을, 그리고 ‘삼보리’는 마음에 아무런 흔적이 없이 공적(空寂)한 것을 가리킨다. 일념이 마음의 과정에서 돈제(頓除), 사라질 때, 그때 너는 불성을 본다.”
六祖: 阿 多羅, 非從外得. 但心無我所卽是也. 祇緣對病設藥, 隨宜爲說, 何有定法乎. 如來說 無上正法, 心本無得, 亦不言不得. 但爲衆生所見不同, 如來應彼根性, 種種方便開誘化導, 其離諸執著, 指示一切衆生妄心, 生滅不停, 逐境界動. 前念瞥起, 後念應覺, 覺旣不住, 見亦不存. 若爾豈有定法, 爲如來可說也. 阿者心無妄念, 多羅者心無驕慢, 三者心常在正定, 者心常在正慧, 三菩提者心常空寂. 一念凡心頓除卽見佛性也.

진정 법다운 일이란
- “왜냐, 여래가 말씀하시는 진리는 가질 수도 없고, 또 내보일 수도 없다. 진리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진리 아니라 할 수도 없다.”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진여(眞如) 혹은 대승(大乘)은 생각이나 말로 포획되지 않는, 생동하는 것이기에 법의 이름에 가둘 수 없다. 그래서 비법이다. 그렇지만 ‘법이 아니다’라는 말은 진리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그래서 ‘비법이라 해서도 안 된다.’


육조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사람들이 여래가 남긴 문자 장구에 집착할까 싶어, 그리고 무상(無相)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망녕되이 알음알이(知解)를 낼까 싶어, ‘불가취’라고 했다. 여래는 근기와 국량이 다른 종종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언설을 폈는데, 거기 무슨 ‘이것이다’ 싶은 진리의 당체가 있겠는가. 쯧, 공부하는 학인들이 여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여래가 설한 언설만 돌돌 외고 있다. 본심을 깨달아 대면하지 못하면 종내 성불은 없다. 그래서 ‘불가설’이라 한 것이다. 입으로만 욀 뿐, 마음으로 공부실행치 않으면 ‘비법’이고, 입으로도 외고 마음으로 공부실행하면 ‘무소득’을 알게 되는 바, 그것이 ‘비비법’이다.”


六祖: 恐人執著如來所說文字章句, 不悟無相之理, 妄生知解故, 言不可取. 如來爲化種種衆生, 應機隨量, 所有言說, 亦何有定乎. 學人不解如來深意, 但誦如來所說敎法, 不了本心, 終不成佛, 故言不可說也. 口誦心不行, 卽非法. 口誦心行, 了無所得, 卽非非法.


첫부분은 위에 적은 취지와 같다. 그러나 후반부는 좀 다르다. 혜능이 경전을 원문맥 너머에서 자유롭게 해석하는 사례를 여럿 본 바 있는데, 여기서도 그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혜능은 ‘비법’을 위에서처럼 ‘진리는 언설로 할 수 없다!’로 고상(?)하게 읽지 않고, 시장바닥의 언어처럼, 즉 ‘법답지 않다!’로 읽는다. 그는 경전만 외는 것으로 불법을 이루려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럼 ‘비비법’은? 그거야 ‘법답지 않은 것이 아닌,’ 즉 진정 법다운 일이지! “경전을 읽고 마음을 행하며, 그리고 결국 내 마음에 모든 것이 갖추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사는 것,” 그것 아니겠는가. 독자들은 어느 해석을 좋아하시는가, 어느 해석에 따라 살려 하시는가. 철학적으로 학구적인 무착인가, 아니면 가슴이 뜨끔하도록 침을 찌르는 혜능인가.

무위법 안의 개성들
- “왜냐, 수많은 성자와 현인들은 바로 그 ‘무위법’으로 하여 ‘차별’이 있게 되었다.”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而有差別.


이 구절은 까다롭다. ‘차별’은 두 가지 의미로 새길 수 있다. “성현들은 그들이 깨달은 무위법으로 하여 중생들과는 차별된다!” 그럴 경우, 무위법은 무아, 무상, 무념 등 자아의 분별에 추동되지 않는 완벽한 행동을 가리키게 될 것이다. 실제 <오가해>에 인용된 위역(魏譯)이 그 길을 따르고 있다.


혜능의 해석은 좀 다르다. 그는 ‘차별’을 성현들 사이의 ‘개성’과 ‘급수’로 읽고 있다. “삼승(三乘)은 근기가 달라 이해한 바가 다르며, 깨달음에도 깊고 옅음이 있기에, 그래서 ‘차별’이라 했다.” (三乘根性所解不同, 見有淺深故言差別.) 혜능의 해석에 따르면 본문은 이렇게 해석된다. “수많은 현자와 성현들은 무위법을 베이스로 하지만, 그들은 서로 차이가 있다.” 대체 어느 쪽 해석이 옳은가.


분명한 것은 혜능이 무위법을 성현에게 독점시키지 않고, 중생들과 공유시켰다는 점이다. “누구나 무위법을 통달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六祖: 佛說無爲法者, 卽是無住, 無住卽是無相, 無相卽是無起, 無起卽是無滅, 蕩然空寂, 照用齊收. 鑒覺無?, 乃眞是解脫佛性. 佛卽是覺, 覺卽是觀照, 觀照卽是智慧, 智慧卽是般若波羅蜜多. 혜능은 이 돈교의 희망을 분명히 적어두어, 중생의 불성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 말에는 이런 함축이 들어있다. “부처와 중생은 없다. 다만 마음의 각성과 유지, 그 정도의 차이만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붓다뉴스 http://news.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