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관심론(觀心論)-1. 그대는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19. 02:17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다(Ananda)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 데 있어서 제일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부처를 알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라한(Arhat)은 부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은 수행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인과의 법칙에 매여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업이다.

부처가 가르친 반대의 일만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여도 허물이 안 된다.

경에 일렀으되 "외도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불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부처가 그들의 머리카락을 깎아 줄 필요가 없다.

속인도 역시 부처인 것이다.

출가자라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면 그들은 머리를 깎은 광신자일 뿐이다.

"그렇지만 결혼한 속인은 그들의 성생활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나는 단지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남녀간의 단순한 성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성은 기본적으로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즐거움과 함께 끝난다.

만일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욕락의 육체 속에 머무른다 해도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서조차도 말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막힘 없는 영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는지 평안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그 무엇을 통해서도 알 수 없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행동할 때마다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이다.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죽임으로써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나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 두지 못한다.

인도에서는 스물 일곱 명의 조사들께서 오직 마음의 등불을 전하셨다.

내가 중국에 온 것도 단 한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대승의 이 즉각적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무슨 교리나 헌신, 혹은 고행을 가르치러온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마음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은 우리에게 움직임이 없는 움직임,

떠남 없는 떠남, 보지 않는 봄,

웃지 않는 웃음,

듣지 않는 들음,

앎이 없는 앎,

즐거움 없는 즐거움,

걸음 없는 걸음,

머무름 없는 머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경전에 이르기를 "언어를 넘어서라. 생각을 넘어서라."라고 했다.

나는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이 설법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