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관심론(觀心論)-5. 그대는 계속 잠잘 권리가 있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4:43

 

 

그것은 그대의 즐거움과 함께 끝난다.

그대의 명상이 성숙해질수록 그대는 점점 성에 대해서 관심을 잃어간다.

그대가 완전히 존재계와 일치를 이루는 날,

그대의 성욕은 아침 햇살에 말라 버리는 이슬방울처럼 사라질 것이다.

성욕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짓이다.

그때 그대는 모든 종류의 욕망에 탐닉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왜곡된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사디즘 마조히즘,

호모 섹스,

레즈비언,

수간 등등.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계속 발명해낸다.

그들의 종교가 성을 비난하기 때문에 그들은 성 에너지를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생물학을 초월하지 않는 한,

그대의 육체를 초월하지 않는 한,

마음을 넘어선 어떤 것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성은 그대 속에 남아 있다.

그대는 그것을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자연스런 상태로 놔두는 것이 더 좋다.

왜곡된 성은 나쁜 상태로 빠지기 때문이다 자연스런 성은 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왜곡된 성은 승화되기가 매우 힘들다.

나는 동성연애자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성불구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실 성불구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독신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불구자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사실 성 에너지는 그 자체로서 그대의 깨달음으로 변형된다.

성불구자는 성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최악의 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높이 올라갈 수 없다.

그에게는 태양을 가로지르는 독수리의 비상하는 에너지가 없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나 달마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달마는 성은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대의 본성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생겨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이 말은 깨달은 사람에게서 나온 매우 중요한 말이다.

그대에게 어떤 습관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대에게 어떤 해악도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대에게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다고 하자.

나는 깨달은 사람이 담배 때문에 어떤 식으로라도 그의 깨달음이 방해받는 것을 본적이 없다.

깨달음은 흡연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 습관들이 그대의 깨달음을 방해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달마는 여기서 굉장한 자비심과 이해심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거기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순수하다는 것을 알면,

그때는 모든 것이 그대에게 허용된다.

그때 그대는 무엇이 자신에게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 고토록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사소한 습관의 차이가 남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마호메트는 밤중에 식사를 하곤 했다.

사실 이슬람교도들은 라마단(Ramadan)에는 낮에는 금식을 하고 밤에만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자이나교도들은 밝을 때만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대가 밤에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이나교도들은 단식할 때에 물을 마신다.

하지만 그것도 낮에만 가능하다.

밤이 되면 물조차 먹을 수 없다.

그러니 자연히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살아왔던 상황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막의 종교이다.

사막에서는 낮의 기온이 매우 높다.

그래서 낮에는 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밤이되면 선선해지고 식사하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그리고 별들이 가득 찬 사막의 밤은 매우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다.

그러나 낮에는 활활 타오르기만 할뿐이다.

라마크리슈나는 생선을 즐겨 먹는다.

그래서 자이나교도들은 그가 도저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어떻게 깨달은 사람이 생선을 먹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대가 달마의 말을 이해한다면 라마크리슈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벵골에 사는 사람들의 오래된 관습이다.

그들은 쌀과 생선이 주식이었다.

그 외에는 먹을 만한 것이 특별히 없었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먹었다.

그가 깨달았을 때도 그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미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세상은 각자가 처한 상황들이 모두 다르다.

기후가 다르고 풍습도 다르다.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것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보드카를 마시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곳은 매우 춥다.

그대의 피를 얼어붙게 할 만큼 말이다.

그래서 몸을 녹여 줄 알코올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정말로 이해심이 많다.

그들은 다른 사람,

다른 환경,

다른 지리적 여건들을 이해한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이 깨달음과 같은 위대한 경험을 결코 방해할 수 없다.

"그대가 오욕락의 육체 속에 머무른다 해도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의식을 소멸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본래 소멸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한번 그대가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서조차도 말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막힘 없는 영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평안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그 무엇을 통해서도 알 수 없다.

그대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행동할 때마다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이다.

그대가 백정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사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일본에서 한 사람의 백정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임금의 식사를 위해서 짐승을 잡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왕조차도 그를 존경했다.

그 후 왕은 왕궁 뒤에서 짐승들도 도살하는 그를 보았을 때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그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당신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이제 당신은 옛 직업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더 많은 자비심을 갖고 짐승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더 큰 사랑과 은총으로 말입니다.

어쨌든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대신 맡길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나만큼 자비심을 갖고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이 일을 해야 한다면,

다시 내가 그 일을 하든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의 깨달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소멸될 수 없습니다.

나의 내면의 하늘은 다시는 구름에 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인간이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완전한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도 마십시오.

이것은 나의 직업입니다."

그는 그 후 20년을 깨달은 백정으로 살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는 가축을 도살했고 저녁이면 깨달음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자신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몇 명의 제자들까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달마의 말이 옳다.

그대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안 이상,

자신의 본성을 본 이상 그대는 그대가 백정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다.

제자가 물었다.
"그러나 백정은 짐승을 죽임으로써 업을 짓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이미 본성을 본 이상 그 어떤 것도 그대의 발목을 붙잡지 못한다.

그대의 자유는 이제 불멸의 것이다.

그대 자신도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는 어떤 일을 할 수 없다.

인도에서는 스물 일곱 명의 조사들께서 오직 마음의 등불을 전하셨다.

내가 중국에 온 것도 단 한가지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대승의 이 즉각적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무슨 교리나 헌신 혹은 고행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무심은 움직이지도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은 우리에게 움직임이 없는 움직임,

떠남 없는 떠남,

보지 않는 봄,

웃지 않는 웃음,

듣지 않는 들음,

앎이 없는 앎,

즐거움 없는 즐거움,

걸음 없는 걸음,

머무름 없는 머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경전에 이르기를 "언어를 넘어서라.

생각을 넘어서라."라고 했다.

나는 얼마든지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보는 이 설법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걸음 없는 걸음,

듣지 않는 들음,

말하지 않는 말…….

하지만 그대에게 작은 이해력만 있어도 이 말들은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대가 자발적으로 말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즉각적으로 말할 때,

그대는 말하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발적인 행동은 그에게 속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서 존재계 자체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당장 나는 말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달마의 어록에 내 전존재가 대응하도록 나를 열어 놓고 있다.

나는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알지 못한다.

나는 단지 그것을 듣는 대로 말한다.

그대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이 의자는 텅 비어 있다.

그대가 준비를 갖추어서 말을 할 때,

순간 순간 깨어 있음을 통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때,

그대는 마치 앵무새가 미리 학습된 대로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중 하나는 깨어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현재 속에서 나오는 것,

미리 준비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서 말하고 행동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절대적으로 그대의 행동과 말의 덫에서 빠져 나와 있다.

그대는 단지 한 사람의 '지켜보는 이'가 된다.

그대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대는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고 있는 자이다.

이 지켜봄, 이 관찰성은 종교적인 삶을 만들어내는 궁극의 비밀이다.

그것은 초월의 삶, 영적인 삶, 깨달음의 삶, 불성의 삶이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