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2. 아리따운 소녀의 미소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5:15

 

“아직도 세속적인 것에 미련을 갖고 있나?”


보리다라 향한 그녀의 감정은
깊은 산속 샘물처럼 콸콸흘러
가슴속 깊이 굽이치고 있다


아침 해가 막 솟아 올랐다. 눈부신 햇살이 총림고찰(叢林古刹)을 오색 찬란하게 물들인다. 거기에 더하여 신비로운 독경 소리가 울려퍼지니 천상사의 아침은 청신(淸新)하고도 유장(幽長)했다.

 

조약돌을 오밀조밀하게 깔아 놓은 오래된 길을 따라 두 젊은이가 걷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보리다라, 바로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이는 사매 막의다. 막의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평민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운명과 싸워나가는 총명과 의지를 두루 갖춘 여자였다. 절에 들어 온 것도 그 때문이었고 수련도 이미 어떤 경지를 이룬 상태였다. 그녀는 보리다라보다 입산이 훨씬 앞섰다. 그러나 해탈을 구하지 않고 무술만을 연마했다. 따라서 경전공부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무술만은 아직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보리다라가 천상산에 들어온 이래로 두 사람은 사형과 사매로 금새 가까워졌다. 늘 함께 기예를 연마하면서 그림자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보리다라는 은근히 막의의 기량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걸음만 재촉했다. 뒤따라오는 막의가 그저 대견스러웠다.

 

“꽥―!”


갑자기 숲 속에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쏜살같이 보리다라의 머리 위로 날아와 크고 뾰족한 부리로 탁 쪼고 괴성을 지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독수리의 괴성은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막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리다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듯 싶어 가슴 한 구석이 고동쳤다. 그녀는 보리다라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태연자약했다.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막의는 눈을 돌려 날아간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독수리는 부리에 커다란 벌레 한 마리를 물고 막 고목나무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보리다라의 옷깃에 떨어진 벌레를 발견한 독수리의 번개같은 먹이 잡기가 한바탕의 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녀는 웃으면서 보리다라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사형! 산길이 울퉁불퉁하고 주변엔 벌레도 많으니 신경 좀 쓰셔야겠어요….”보리다라는 엷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대화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갔다.

 

“사매! 내 한 가지 묻겠는데…, 아직도 무슨 세속적인 것에 미련을 갖고 있나?”대답 대신 막의는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결코 세속을 떠나 정토에 귀의할 생각이 없었다. 무예를 배우는 것도 세상에 나가서 나라와 백성에게 헌신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녀는 진작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리다라가 이 곳에 들어오자 마치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어떤 계급에 속하며 출생지가 어딘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착한 생김과 정중한 품성 그리고 다재다능한 능력은 그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마치 깊은 산 속에서 솟는 샘물처럼 콸콸 흘러들어 가슴 속 깊이 굽이치고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세속적인 생각을 확실하게 끊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막의와 함께 무공을 익히는 이외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불경을 탐구하는 데 바쳤다. 경전과 불법을 말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위대한 불조(佛祖)의 환생인 듯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자기의 마음을 보리다라에게 밝히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의치 않았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이상의 인연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속에 그의 그림자는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깊게 인각되었다.

 

막의는 자기 앞에 우뚝 선 사형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감정의 샘물이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오름을 느꼈다. 간절하고 뜨거운 물결에 마음을 맡길 수 있다면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사랑을 쏟아 붓고 싶었다. 그리고 둘이 손잡고 이곳 천상사를 떠나 그림같이 아름다운 시골의 전원으로 가서 자그마한 무릉도원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지(理智)의 냉각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그녀의 열정을 식혔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머리에 떠올렸다. 평민계급의 여자가 감히 헛된 꿈을 꾸다니? 그녀는 사랑 때문에 그에게 누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형! 시간이 꽤 흘렀네요…. 아침 수련을 시작해야지요.”


보리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 문을 지나 두 갈래 길이 나타나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섰다.

 

그때 행자승 하나가 헐떡이며 막의를 찾았다.

“발타(跋陀)대사께서 오시랍니다.”
“나를?…”
막의는 뜻밖의 부르심에 놀랐다.

“예, 지금 정사(精舍)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막의는 한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혹시 대사께서 나의 속마음을 알아채시고 절에서 나를 내보내려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일찍이 발타대사께서 하신 말씀이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무술공부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 너는 이미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느니라! 만약 선(禪)을 수행할 마음까지 먹은 게 아니라면 떠나고 싶을 때 자유로이 떠나도 좋으니라….’막의는 무거운 마음으로 정사 앞에 섰다. 대사를 향해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대사님! 부르셨습니까? 무슨 가르침을 내리시려는지요?”
“일어나거라, 일어나거라!”


발타대사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막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서 서재의 책상 서랍을 열고 보자기에 싼 꾸러미 하나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펼쳤다.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은 모두 번쩍번쩍하는 보석들이었다. 발타대사는 막의에게 물었다.

 

“이 보석들은 행자승들이 청소를 하다가 보리다라의 침대 밑에서 발견한 것이다!… 너와는 매우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아는데…, 혹시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고 있느냐?…”“저….”


막의는 대답할 말을 잊은 채 얼굴을 붉혔다. 그녀와 그는 사형·사매의 관계에서 조금도 벗어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매우 친하게 지낸다고 하시다니? ‘매우 친하게 지낸다’는 말은 마음 속으로 바라는 바이지만 겉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런 보석들을 일찍이 듣도 보지도 못했다. 하물며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더욱 모를 일이었다. 그걸 그녀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막의의 두 입술은 한동안 붙었다 떨어졌다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한마디 말도 쏟아내진 못했다. “너도 모른단 말이냐?”


발타대사는 되는대로 보석을 싼 다음 다시 한번 막의에게 다짐받듯 물었다. “그가 평소에 보석에 관한 일을 너에게 한 번도 말한 일이 없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 적은 전혀 없습니다!” 막의는 감히 말했다.

 

“심지어는 그의 출신성분이나 경력조차도 모릅니다. 물을 필요도 없었구요.”발타대사는 막의가 귀여운 듯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그는 부귀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막의는 이 말에 자기도 모르게 반발하듯 대꾸했다.

 

“부귀한 사람이라고요? 아닐 겁니다. 그는 부귀에 관해선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그래?…” 발타대사는 막의의 말에 수긍이 가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한동안 망설인 끝에 말했다.

 

“듣자 하니 남천축 향지국의 셋째 왕자가 궁을 떠났다는구나. 보아라! 이렇게 많은 진귀한 보석은 일반 민간에서는 극히 보기 어려운 것이다. 혹시 그가….”“그가 셋째 왕자라구요?”


막의는 깜짝 놀랐다. 순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정말 그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발타대사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행자승들이 한 이야기인데…, 얼마 전 조정에서 관원이 절에 온 일이 있었다는구나. 나도 혹시 착오가 있을까 염려스러워 향지국에 행자승을 파견해 조사해 오도록 했다. 확실히 셋째 왕자는 무술을 익히고 선수행을 하기 위해 궁을 떠났다는구나!”“아!”
막의는 놀라서 그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그제야 그녀는 마음 속에 짚이는 게 있었다. 보리다라 사형은 향지국의 왕자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의 몸으로 궁성 안에서 존경받고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산야의 총림에 묻혀 고생하며 수련에 매진하다니…, 실로 대단한 일이다. 이 왕자 사형에 대한 존경과 애모의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대사님! 저더러 가서 그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하시는 건가요?”
“아니다. 남이 말하고 싶지 않는 걸 캐묻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도 우리 불문(佛門)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일이니라.

 

 그저 자연의 순리에 맡기도록 하자. 하지만 지금 보리다라가 쓰고 있는 방은 너무 낡았으니 내 생각에는 선방(禪房)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보석은 우선 네가 갖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돌려주거라!…”막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석 보자기를 건네 받았다. 그녀는 대사께서 보리다라의 거처를 옮겨 주려는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사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소동이 벌어질까 염려스러워 미리 보안 조처를 하시려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발타대사에게 인사하고 몸을 돌려 정사를 나왔다.

 

절 안의 선방은 본당의 안쪽에 있다. 한 칸씩 단칸방으로 되어 있어 그윽하고 조용하다. 이 곳은 큰제자들의 거실로도 쓰이며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지금까지 보리다라가 쓰던 방은 요사채로 본당 밖에 위치한다. 이곳은 일반 스님들과 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거처다. 요사채에서 선방으로 옮겨 가는 것은 한 단계 승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수행자들이 자나깨나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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