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6. 속인(俗人)에게 이어진 법통(法統)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5:26

 

달마라는 이름은 큰 법보 통했다는 뜻

반야다라의 계속된 물음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보리다라
깊은 이치 깨치신 것 감축

보리다라는 반야다라와 두 형이 나누는 대화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반야다라는 그런 태도를 내심 기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셋째 왕자의 범상치 않은 기품에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있었다.

 

반야다라는 정색을 하고 셋째 왕자 보리다라에게 물었다.

“왕자님, 왕자님은 이 보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보리다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왕과 두 형을 한 번 쳐다본 후 조사를 향해 합장하며 고개 숙여 대답했다.

 

“조사님께 아룁니다. 세속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이 보물은 아주 귀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보물 가운데서 으뜸은 법보(法寶)라고 생각합니다. 이 보물의 빛깔을 보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빛깔 가운데 으뜸은 지혜의 빛이 아니겠습니까. 또 여기 이 보물은 밝음을 뽐내고 있습니다만 이것 역시 제일 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밝음 가운데 마음 밝은 것이 으뜸가는 밝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쟁반 위에 담긴 보물의 광명은 스스로 빛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빌려서야 겨우 그 가치를 발하니 광명이랄 수 없습니다. 또 이 보물은 스스로 보물이 되지 못하고 사람의 지혜를 빌려서 판단케 되니 보물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으뜸가는 보물은 사람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스스로 도(道)가 있으면 마음의 보배가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확신합니다.”반야다라는 깜짝 놀랐다. 호탕하게만 보이는 셋째 왕자의 법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이렇게까지 깊다니, 다만 감탄할 따름이었다. 과연 불조(佛祖)의 재목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 다시 한번 보리다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반야다라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그렇다면 셋째 왕자님께 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여러 사물 가운데서 어느 것이 상(相)이 없습니까?”

 

보리다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조사님께 아룁니다. 저의 짧은 견해로는 여러 사물 가운데서 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무상(無相)입니다.”

 

“여러 사물 가운데 무엇이 최고입니까?”
“여러 사물 가운데 인아(人我), 곧 남과 내가 최고입니다.”
“여러 사물 가운데 무엇이 가장 큽니까?”
“여러 사물 가운데 법성(法性)이 가장 큽니다.”


반야다라의 물음에 보리다라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국왕과 두 왕자는 생전 처음 듣는 문답이 신기하기만 했다. 다음은 어떤 물음이 터져 나올지 자못 긴장하며 반야다라를 주시했다.

 

반야다라는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론 보리다라의 공부 경지에 혀를 내둘렀다. 자기의 이상적인 계승자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드디어 반야다라가 입을 열었다.

“셋째 왕자께서 선(禪)의 여러 법에 대하여 깊은 이치를 깨치신 것을 감축합니다. 진주나 보석같이 지혜롭게 설명하고 마음의 요체를 확실히 드러내니 정말 대단합니다. 노승은 진실로 감복해 마지않습니다!”국왕은 대단히 기뻤다. 얼른 두 손 모아 공수(供手)하며 얼굴 가득히 웃음을 담고 말했다.

 

“하하…, 셋째 왕자가 함부로 늘어놓은 이야기를 가지고 조사께서 칭찬이 지나치십니다.”셋째 왕자도 옷소매를 가볍게 여미며 반야다라를 향해 공손하게 머리 숙여 말했다.

 

“조사님께서 어리석은 자를 이토록 평가하여 인도해 주시니 깊이 감사드립니다. 원컨대 조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반야다라는 즉시 합장하면서 향지국왕에게 말했다.

 

“셋째 왕자님께서 저를 스승으로 삼겠다고 하니, 노승이 건의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받아들여 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조사님께서 무슨 가르침을 내리실지 모르겠사오나 마땅히 귀담아 들어야 겠지요.”“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반야다라는 셋째 왕자님를 매우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노승이 셋째 왕자님의 이름을 새로 지어 드리고자 합니다.”
“예에?”


국왕은 잠시 망설였다.

“조사께서는 무슨 이름을 지어 주시려고 그러십니까?”
반야다라는 생각할 틈도 주지않고 바로 대답했다.

 

“노승의 생각으로는 보리다라의 ‘다라(多羅)’ 두 글자를 버리고 ‘달마(達摩)’라고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달마라구요?”
“예.”


반야다라는 차근차근 이름의 뜻을 설명했다.

“달마라는 이름은 바로 큰 법보에 통했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국왕은 왜 그렇게 이름을 고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리다라는 듣자마자 마음 속으로 희열을 느꼈다. 즉시 합장하고 큰절을 올렸다.

 

“조사님께서 법호까지 내려 주시다니…, 감사드립니다.”
아들이 좋아하자 국왕도 덩달아 좋아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때 이미 보리다라는 반야다라 존자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았다. 보리다라는 출가도 하기 전에 속인으로 법을 이어받은 최초의 인물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진법(眞法)이 비승(非僧)에게도 전해지는 선례가 되었다.

 

반야다라는 애시당초 향지국왕에게 보리다라를 거두어 자신의 뒤를 이을 28대조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힐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그렇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야다라는 속마음을 감춘 채 은쟁반의 보석들을 국왕에게 돌려주었다.

 

“노승은 천지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정처가 없습니다. 대왕께서 시주하신 이 보물은 잠시 궁 안에 맡겨 놓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필요할 때 다시 와서 가져가면 어떻겠습니까?”향지국왕은 긍정의 뜻을 표했다.

 

“이미 조사께서 이곳에 오셔서 진리의 비를 뿌려 주시고 잘못된 방향을 잡아 주셨으니, 이 보잘것 없는 보석들은 여기에 잠시 두었다가 필요하실 때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하십시오.”“노승의 뜻을 두루 받아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아미타불!”
반야다라는 말을 마치자 불자를 한 번 털고는 몸을 돌려 위풍을 풍기며 표표히 사라졌다.

 

세월은 화살같다고 했던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향지국의 궁성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노을이 찬란하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왕궁 안에선 갑자기 묵직한 종소리와 함께 떨리는 듯한 나팔 소리가 하늘을 향해 울려 퍼졌다. 모든 신료들은 황망스런 표정으로 옷깃을 여몄다. 숙환 중에 있던 향지국왕이 운명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온 나라에 알려졌다. 지금까지 국왕은 영명한 군왕으로 추앙받아 온 터였다. 백성들은 부음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사방에서 궁성으로 몰려들었다. 궁성 앞은 슬픔에 잠겼고 백성들의 눈물은 홍수를 이루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아 해와 달조차도 잠시 빛을 잃은 듯했다.

 

국왕의 시신은 왕궁 대전의 용탑 위에 안치되었다. 그곳엔 향불이 자욱히 피어오르고 촛불이 곡(哭)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왕후와 첫째, 둘째 왕자 그리고 문무백관은 슬픔을 못 이겨 관 앞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뿌렸다. 특히 큰 왕자와 둘째 왕자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통곡했다. 그러나 유독 셋째 왕자 보리달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고요히 관을 마주하고 가부좌를 튼 채 합장의 자세로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다. 그의 왕방울 같은 큰 눈은 굳게 감겨 있었고, 얼굴엔 큰 자비와 함께 보기 드문 고요함과 평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사방에 애통해 하는 소리가 넘쳤지만 그는 듣지도 의식도 하지 않는 듯 싶었다. 그의 부동 자세는 현묘의 경지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뭇사람에게 입정(入定)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연 이레. 보리달마는 곡기를 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만 한밤에 맑은 물을 조금 마실 뿐이었다. 셋째 왕자의 이런 모습은 모든 사람을 놀라움과 충격 속에 빠트렸다. 국상 중에도 불구하고 보리달마의 일은 하나의 기적인 것처럼 궁성 안팎에서 회자되었다.

 

이레째 되는 날 오후. 왕궁 대전에 목탁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리면서 ‘나무아미타불‘의 염불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풍채가 늠름한 반야다라 존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염불 소리는 흔히 듣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뱃속에서 솟아오른 맑고 은은한 우주의 소리 그 자체였다. 반야다라는 보리달마가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드디어 인연이 이르렀음을 알고 보리달마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거라! 일어나, 어서….”
보리달마는 몸을 일으켜 다시 합장하고 허리를 굽혀 말했다.

 

“제자는 조사님을 앙모한 지 실로 오래 되었사온데 예기치 않게 오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뵙게 되었으니 이제 저는 조사님의 문하에 들어가 출가하고 선(禪)을 구하여 세속의 인연을 끊기를 원하옵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내 일찍이 그대의 천부적인 자질을 알았거늘, 오늘 마침 불문에 귀의하고자 하는 것을 어찌 거두지 않을 수 있으리….”“감사합니다. 그러시면 조사님께서 제 머리를 삭발해 주시옵소서.”


반야다라는 보리달마가 한시라도 속히 탈속하여 보리(菩提)를 증험(證驗)하기를 바랐으므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오늘 당장 시행하지.”


왕자에서 스님으로, 왕궁에서 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일반인의 처지에선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명리(名利)에 냉담하고 초연한 셋째 왕자에겐 그런 것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마음 속으로 원하던 것이기에 버리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보리달마는 미련없이 떠났다. 스승 반야다라를 따라 한 조각 구름처럼 아무런 매임없이 소매를 떨치고 홀연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