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실려오는 종소리에 길을 찾다
我 아(我)여!
{說}指天指地獨立底人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며 홀로 서있는 사람이로다.
赤裸裸淨洒洒 沒可把
벌거벗은 듯, 깨끗이 물을 뿌린 듯하여 잡을 수 없도다.
<보충설명> 赤裸裸는 眞空의 상태이고, 淨洒洒는 현실에서 해탈한 모습입니다. 根塵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집착으로부터의 대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 경계는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說}古人 道 阿呵呵是甚麽 南北東西 唯是我 雖云南北東西 唯是我 爭 乃一切處 摸索不着 是可謂境上施爲渾大有 內外中間覓摠無
옛 사람이 말하길 “아하하! 이 무슨 물건인고? 동서남북에 오직 참된 나뿐이다.”라 하시니, 비록 ‘동서남북에 오직 나 뿐이다’라고 말했으나, 일체처에서 더듬어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는 것은 어찌하겠는가? 이 것은 모든 경계(현실) 위에 원만하고 크게 존재하나 내외중간을 찾으려해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보충설명> 주인공인 ‘나’가 없으면 시간과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는 찾아서 잡으려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我我 認得分明成兩箇 不動纖毫合本然 知音 自有松風和
아(我)라는 아(我)여! ‘나’를 인식하면 분명히 두 개체(나와 너)를 이룬다. (참된 나는) 터럭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본연(不二의 眞我)에 합하니, 원음의 소리(진리)를 알면 저절로 송풍(松風)이 화답해주리라.
{說}若道我有 眼中着屑 若道我無 肉上剜瘡 所以 道 有我直應還未達 若言無我更愚癡 一體上 兩般見 析虛空作兩片 兩頭俱不涉 方得契如如 踏得家田地 唱出無生曲 無生曲子 孰能和 蕭蕭松籟送淸音
만약 ‘나’가 있다고 인식하면 눈 속에 가루를 집어넣는 것이요, 만약 ‘나’가 없다고 한다면 살점 위에 종기를 붙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내가 있다고 하면 도리어 통달하지 못 할 것이요, 내가 없다고 해도 또 어리석은 바보니라.” 하였으니, 한 몸 위에 유무(有無)의 두 소견이 벌어짐이여. 허공을 잘라서 두 조각을 만드는 것과 같다. 두 개의 머리로는 함께 (진아에) 건너지 못함을 알아야 바야흐로 여여(如如)에 계합할 수 있으니, 고향 땅을 밟아야 無生曲을 창출하리라. 無生曲에 누가 능히 화답해 주겠는가? 소슬한 소나무 퉁소가 맑은 소리를 보내도다.
<보충설명> 경허스님의 법문 가운데도 위 글과 상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若道這箇是 頭上安頭
若道這箇不是 斷頭覓活
到此裏 却如何湊泊
禪家에서 ‘這箇’는 본분, 진리, 나의 본래면목 등을 의미합니다. 이 글은, 「만일 이 낱을 是(이 것)라고 말하면 머리 위에 머리 하나를 더 얹어두는 것이요, 만일 이 낱을 不是(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머리가 잘렸는데도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이 안에 이르러 도리어 어떻게 배를 대겠는가?」하는 내용입니다. ‘這箇’를 있다고 집착하더라도 진리와 멀어지고, 없다고 단정해도 병통이 생기는 것이니 낙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聞
문(聞)이여!
{說}本是一精明 分爲六和合 合處 如瞥地 見處 是眞聞
본래 이 하나의 정명이 나뉘어져 육화합(六根과 六塵의 화합)이 되었으니, 화합한 곳에서 문득 깨달으면 보는 곳이 진실로 듣는 당처로다.
切忌隨他去
절대 다른 소리(육근으로 듣는 소리)를 따라감을 꺼릴지어다.
<보충설명> 금강경에서는 내외의 경계가 모두 텅 비어있는 한 모습이기 때문에, 귀를 통해 듣는 모든 소리는 나로부터 혹은 진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리, 나쁜 소리의 변별이 없이 진리의 소리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듣는 진리의 소리를 李仁老의 詩와 西山大師의 詩를 통해 음미해 봅시다.
寒山寺(李仁老)
千回石徑白雲封 巖樹蒼蒼晩色濃
천 구비 산길은 흰 구름에 덮이고
창창한 나무 숲은 짙은 노을에 물들었네
知有蓮菴藏翠壁 好風吹落一聲鐘
蓮菴은 푸른 절벽에 감추어져 있어도
시원한 바람이 하나의 종소리를 실어오네.
자갈이 굴러다니는 산길을 돌고 돌아 한산사를 찾아가는데 구름과 절벽에 숨겨진 절이 보이지는 않고 날은 저물어 갑니다. 그러나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면 감춰진 절이 마음에 드러납니다. 이때의 종소리는 바로 텅 빈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진리의 소리, 원음의 소리인 것입니다.
西山大師의 茶詩
松風檜雨到來初 急引銅甁移竹露
솔바람 소리, 회나무에 스치는 빗소리가 들리면
銅甁의 끓는 물을 竹露茶에 옮겨 붓고
待得聲聞俱寂後 一甌春雪勝醍醐
바람소리 · 빗소리가 잠잠하고, 나도 함께 고요하면
한 잔의 春雪茶가 제호보다 낫구나.
소나무에 속삭이는 바람소리, 회나무에 스치는 빗소리는 물이 끓는 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소리는 根塵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고 정화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물 끓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소리를 듣는 서산대사 자신도 고요해지면 곧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객이 하나를 이루었을 때 차를 마시면 소리와 맛을 쫒게 되지 않고 자신을 관조하게 됩니다.
{說}滿耳非音 聞箇甚麽 廓然無我 聞底 是甚麽 了得如是 鶯歌與燕語 從敎鬧浩浩 若未如然 宮商幷角徵 化我常抽牽 所以 道 切忌隨他去
(밖에서 와서) 귀에 가득한 것은 참 소리가 아니거늘 들리는 대상은 무엇이며, 확연히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듣는 주체는 어떤 물건인가? 이와 같은 것을 깨달으면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지저귐을 시끄러운 대로 자연스럽게 놔둘 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궁상각치우가 나를 변화시켜서 항상 노예처럼 끌려 다니리니, 그런 까닭으로 말하기를 “절대로 다른 소리를 따라가지 말지어다”라고 하셨다.
<보충설명> 듣는 주체와 들리는 대상이 하나가 되어 진리의 소리인 圓音을 듣게 된다면, 시끄러운 앵무새나 제비의 소리가 모두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나의 소리입니다. 앵무와 제비의 소리가 밖에서 오는 소리로 들리지 않으면 곧 그 것이 해탈의 경계입니다.
聞聞
猿啼嶺上 鶴唳林間 斷雲風捲 水激長湍 最好晩秋霜午夜 一聲新雁 覺天寒
聞이라고 말하는 聞이여!
원숭이는 영마루에서 울고 학은 숲 속에서 울도다. 조각구름을 바람이 몰고 다니고 물이 긴 여울을 세차게 치도다. 가장 좋은 소리는, 늦가을 서리 내리는 밤에, 싱그러운 기러기의 일성(一聲)이 날씨가 춥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로다.
{說}鶴唳猿啼聲入耳 誰信圓通門大啓 反聞聞處 心路斷 八音 盈耳不 爲塵 不聞 曾不礙於聞 頭頭爲我話無生 夜靜秋空征鴈響 一聲聲送報天 寒 且道 是聞 不是聞 淡薄豈拘聲色外 虛閑寧墮有無中
학이 울고 원숭이 우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니 원통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듣는 당처(當處)를 돌이켜 듣고 마음의 길이 끊어지면(당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것 조차 고요해지면), 여덟 가지 좋은 소리가 귀에 꽉 차더라도 티끌(번뇌)이 되지 않는다. 듣지 않는 것이 일찍이 듣는 데에 걸리지 않으니,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 무생(無生)의 설법을 한다. 고요한 가을밤에 허공을 줄지어 나는 기러기의 소리여! 한 소리 울리어 날씨가 추워짐을 알려 주도다. 또한 일러라. 그 소리를 듣는가, 듣지 않는가? 담박(시비가 끊어짐)한데 어찌 소리와 색깔에 구애될 것이며, 텅 비고 한가로운데 어찌 유무(有無) 가운데에 떨어지리오.
<보충설명> 공자도 예순의 나이에 접어들면 귀가 순해진다(耳順)고 했습니다. 이 것은 듣기 좋은 소리든지 듣기 거북한 소리든지 시비에 걸리지 않고 모두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바깥의 모든 소리를 수용하게 되면 묘유의 살림살이도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공자는 일흔 살에 접어들면 어떠한 행동을 취하더라도 그 것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慾不踰矩)고 했습니다. 또, 陶淵明의 詩, ‘飮酒’ (24번째 강의에서 소개)에서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집을 지었지만 車馬의 소리가 시끄럽지 않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는 것 역시 聲色에 구애됨이 없는 담박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一
일(一)이여!
{說}天地之根 萬化之源 千途 共向於彼 萬像 皆宗於此
천지(天地)의 뿌리요,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다. 천 갈래 길이 모두 저(하나)에게 향하고, 만 가지 모습이 모두 이(하나)에서 宗을 삼는다.
相隨來也
서로 따라 오도다. (근본의 자리인 하나로부터 차별되어서)
{說}三界萬法 皆從斯起 兵隨印轉 影逐形生
삼계의 만법이 모두 이로부터 일어났으니, 군대는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그림자는 형체를 따라 나타난다.
<보충설명> 일(一)이란 것은 말을 붙일 수 없는 경지 즉, 삼라만상의 근원을 가자한 표현입니다. 이 하나(一)에서 벌어져 서로 서로 따라 일어나는 (相隨來) 천변만화의 현상을 禪句로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鳥語春香而 浩蕩之春 寓焉
眉梢眼角而 芳菲之情 傳焉
擧萬殊之一本 以見一以貫之無不貫
새들이 노래하고 꽃들이 향기를 뿜으니 풍성한 봄이 묻어 나오고,
눈 언저리에 웃음이 배어있으면 아름다운 情이 느껴지도다.
삼라만상의 차별은 하나를 뿌리 삼았으니, ‘一以貫之’에 꿰이지 않은 것이 없도다.
<보충설명> 一以貫之는 ‘吾道는 一以貫之’ 라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공자가 언급한 ‘하나(一)’ 역시 言說이 끊어진 진리를 마지못해 가자한 표현입니다. 증자는 공자의 이 말씀을 다른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 ‘忠恕’로써 ‘一以貫之’를 바꾸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세번째 강의 一物序에서 소개)
一一 破二成三 從此出 乾坤混沌未分前 以是一生參學畢
‘一’이라 하는 ‘一’이여! 둘로 쪼개고 셋을 이루는 것이 이 ‘一’로 부터 나왔도다. 하늘과 땅이 혼돈하여 나뉘기 이전의 바로 이 하나로써 일생의 참구를 마치는 것이로다.
{說}破二 以一也 成三 亦以一也 成之破之 皆從斯得 興來先天地 無形 本寂寥 能爲萬像主 亦爲諸佛毋 若人 了得此 無事不圓通
둘로 쪼개는 것도 하나로써 하고, 셋을 이루는 것도 또한 하나로써 하나니, 쪼개고 만드는 것이 모두 하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벌어져 오는 것도 천지보다 앞서고, 형상도 없이 본래 고요한 것으로서, 능히 만 가지 모습의 주인이 되고,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 하나를 환하게 깨닫는다면 일마다 원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時
시(時)여! (현재 그리고 당처에서 하나와 계합하는 느낌 즉, 시공을 초월한 현장감)
{說}遠劫一念 無礙 古今始終 該通 爲甚如此 動靜 常在靑山中
원겁(遠劫)과 일념(一念)이 걸림이 없고, 고금(古今)과 시종(始終)이 모두 통한다. 왜 그런 것인가?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항상 청산(靑山)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如魚飮水 冷暖自知
물고기가 물을 마시는 바로 그 때가, 차고 따뜻한 것을 스스로 아는 때인 것이다.
{說}怎生 是冷暖底滋味 明月堂前 時時九夏 太陽門下 日日三秋 此味 無人識 親嘗 始自知
어떤 것이 이 차고 따뜻한 맛을 아는 것인가? 명월당(공간) 앞에 달이 환하면 여름철이요, 태양 볕이 강하면 나날이 가을이로다. 이런 때, 이 맛을 아는 사람 없으니 친히 맛보아야 비로소 스스로 알리라.
時時 淸風明月 鎭相隨 桃紅李白薔薇紫 問着東君自不知
시(時)라는 시여! 청풍명월이 오래도록 서로 따른다. 복숭아꽃 붉고, 오얏꽃 희고, 장미가 자주인 것을 봄에게 물어도 봄은 스스로 알지 못하네.
{說}淸風明月 不得別會 淸風拂時 明月照 明月照時 淸風拂 桃李薔薇 東君造化底物事 東君 不知 淸風明月 人人受用底家事 人人 不會 不會 不知 人人 盡有一雙眉 箇箇面前 更無人 着語云自知 頌云不知 不知與 自知 相去多少 但知不知 是眞自知
청풍명월을 따로 따로 알려하지 말지니, 청풍이 불 때에 명월이 비추고 명월이 비출 때 청풍이 불도다. 복숭아와 오얏과 장미가 봄바람의 조화 속의 산물인데 봄이 알지 못하고, 청풍과 명월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집안 일인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니, 이해하지 못하고알지 못함이여! 사람마다 모두 한 쌍의 눈썹이 있고, 개개인의 면전에 다시 사람(자신의 얼굴)이 없도다. 착어에는 “스스로 안다 (冷暖自知)”라고 했고, 頌에는 “알지 못한다 (東君自不知)”라 했으니, “알지 못하는 것”과 “스스로 아는 것”은 서로 얼마의 차이가 나는가? 다만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이것이 진실로 스스로 아는 것이다.
{說}指天指地獨立底人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며 홀로 서있는 사람이로다.
赤裸裸淨洒洒 沒可把
벌거벗은 듯, 깨끗이 물을 뿌린 듯하여 잡을 수 없도다.
<보충설명> 赤裸裸는 眞空의 상태이고, 淨洒洒는 현실에서 해탈한 모습입니다. 根塵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집착으로부터의 대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 경계는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說}古人 道 阿呵呵是甚麽 南北東西 唯是我 雖云南北東西 唯是我 爭 乃一切處 摸索不着 是可謂境上施爲渾大有 內外中間覓摠無
옛 사람이 말하길 “아하하! 이 무슨 물건인고? 동서남북에 오직 참된 나뿐이다.”라 하시니, 비록 ‘동서남북에 오직 나 뿐이다’라고 말했으나, 일체처에서 더듬어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는 것은 어찌하겠는가? 이 것은 모든 경계(현실) 위에 원만하고 크게 존재하나 내외중간을 찾으려해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보충설명> 주인공인 ‘나’가 없으면 시간과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는 찾아서 잡으려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我我 認得分明成兩箇 不動纖毫合本然 知音 自有松風和
아(我)라는 아(我)여! ‘나’를 인식하면 분명히 두 개체(나와 너)를 이룬다. (참된 나는) 터럭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본연(不二의 眞我)에 합하니, 원음의 소리(진리)를 알면 저절로 송풍(松風)이 화답해주리라.
{說}若道我有 眼中着屑 若道我無 肉上剜瘡 所以 道 有我直應還未達 若言無我更愚癡 一體上 兩般見 析虛空作兩片 兩頭俱不涉 方得契如如 踏得家田地 唱出無生曲 無生曲子 孰能和 蕭蕭松籟送淸音
만약 ‘나’가 있다고 인식하면 눈 속에 가루를 집어넣는 것이요, 만약 ‘나’가 없다고 한다면 살점 위에 종기를 붙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내가 있다고 하면 도리어 통달하지 못 할 것이요, 내가 없다고 해도 또 어리석은 바보니라.” 하였으니, 한 몸 위에 유무(有無)의 두 소견이 벌어짐이여. 허공을 잘라서 두 조각을 만드는 것과 같다. 두 개의 머리로는 함께 (진아에) 건너지 못함을 알아야 바야흐로 여여(如如)에 계합할 수 있으니, 고향 땅을 밟아야 無生曲을 창출하리라. 無生曲에 누가 능히 화답해 주겠는가? 소슬한 소나무 퉁소가 맑은 소리를 보내도다.
<보충설명> 경허스님의 법문 가운데도 위 글과 상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若道這箇是 頭上安頭
若道這箇不是 斷頭覓活
到此裏 却如何湊泊
禪家에서 ‘這箇’는 본분, 진리, 나의 본래면목 등을 의미합니다. 이 글은, 「만일 이 낱을 是(이 것)라고 말하면 머리 위에 머리 하나를 더 얹어두는 것이요, 만일 이 낱을 不是(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머리가 잘렸는데도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이 안에 이르러 도리어 어떻게 배를 대겠는가?」하는 내용입니다. ‘這箇’를 있다고 집착하더라도 진리와 멀어지고, 없다고 단정해도 병통이 생기는 것이니 낙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聞
문(聞)이여!
{說}本是一精明 分爲六和合 合處 如瞥地 見處 是眞聞
본래 이 하나의 정명이 나뉘어져 육화합(六根과 六塵의 화합)이 되었으니, 화합한 곳에서 문득 깨달으면 보는 곳이 진실로 듣는 당처로다.
切忌隨他去
절대 다른 소리(육근으로 듣는 소리)를 따라감을 꺼릴지어다.
<보충설명> 금강경에서는 내외의 경계가 모두 텅 비어있는 한 모습이기 때문에, 귀를 통해 듣는 모든 소리는 나로부터 혹은 진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리, 나쁜 소리의 변별이 없이 진리의 소리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듣는 진리의 소리를 李仁老의 詩와 西山大師의 詩를 통해 음미해 봅시다.
寒山寺(李仁老)
千回石徑白雲封 巖樹蒼蒼晩色濃
천 구비 산길은 흰 구름에 덮이고
창창한 나무 숲은 짙은 노을에 물들었네
知有蓮菴藏翠壁 好風吹落一聲鐘
蓮菴은 푸른 절벽에 감추어져 있어도
시원한 바람이 하나의 종소리를 실어오네.
자갈이 굴러다니는 산길을 돌고 돌아 한산사를 찾아가는데 구름과 절벽에 숨겨진 절이 보이지는 않고 날은 저물어 갑니다. 그러나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면 감춰진 절이 마음에 드러납니다. 이때의 종소리는 바로 텅 빈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진리의 소리, 원음의 소리인 것입니다.
西山大師의 茶詩
松風檜雨到來初 急引銅甁移竹露
솔바람 소리, 회나무에 스치는 빗소리가 들리면
銅甁의 끓는 물을 竹露茶에 옮겨 붓고
待得聲聞俱寂後 一甌春雪勝醍醐
바람소리 · 빗소리가 잠잠하고, 나도 함께 고요하면
한 잔의 春雪茶가 제호보다 낫구나.
소나무에 속삭이는 바람소리, 회나무에 스치는 빗소리는 물이 끓는 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소리는 根塵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고 정화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물 끓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소리를 듣는 서산대사 자신도 고요해지면 곧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객이 하나를 이루었을 때 차를 마시면 소리와 맛을 쫒게 되지 않고 자신을 관조하게 됩니다.
{說}滿耳非音 聞箇甚麽 廓然無我 聞底 是甚麽 了得如是 鶯歌與燕語 從敎鬧浩浩 若未如然 宮商幷角徵 化我常抽牽 所以 道 切忌隨他去
(밖에서 와서) 귀에 가득한 것은 참 소리가 아니거늘 들리는 대상은 무엇이며, 확연히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듣는 주체는 어떤 물건인가? 이와 같은 것을 깨달으면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지저귐을 시끄러운 대로 자연스럽게 놔둘 것이나,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궁상각치우가 나를 변화시켜서 항상 노예처럼 끌려 다니리니, 그런 까닭으로 말하기를 “절대로 다른 소리를 따라가지 말지어다”라고 하셨다.
<보충설명> 듣는 주체와 들리는 대상이 하나가 되어 진리의 소리인 圓音을 듣게 된다면, 시끄러운 앵무새나 제비의 소리가 모두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나의 소리입니다. 앵무와 제비의 소리가 밖에서 오는 소리로 들리지 않으면 곧 그 것이 해탈의 경계입니다.
聞聞
猿啼嶺上 鶴唳林間 斷雲風捲 水激長湍 最好晩秋霜午夜 一聲新雁 覺天寒
聞이라고 말하는 聞이여!
원숭이는 영마루에서 울고 학은 숲 속에서 울도다. 조각구름을 바람이 몰고 다니고 물이 긴 여울을 세차게 치도다. 가장 좋은 소리는, 늦가을 서리 내리는 밤에, 싱그러운 기러기의 일성(一聲)이 날씨가 춥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로다.
{說}鶴唳猿啼聲入耳 誰信圓通門大啓 反聞聞處 心路斷 八音 盈耳不 爲塵 不聞 曾不礙於聞 頭頭爲我話無生 夜靜秋空征鴈響 一聲聲送報天 寒 且道 是聞 不是聞 淡薄豈拘聲色外 虛閑寧墮有無中
학이 울고 원숭이 우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니 원통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듣는 당처(當處)를 돌이켜 듣고 마음의 길이 끊어지면(당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것 조차 고요해지면), 여덟 가지 좋은 소리가 귀에 꽉 차더라도 티끌(번뇌)이 되지 않는다. 듣지 않는 것이 일찍이 듣는 데에 걸리지 않으니,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 무생(無生)의 설법을 한다. 고요한 가을밤에 허공을 줄지어 나는 기러기의 소리여! 한 소리 울리어 날씨가 추워짐을 알려 주도다. 또한 일러라. 그 소리를 듣는가, 듣지 않는가? 담박(시비가 끊어짐)한데 어찌 소리와 색깔에 구애될 것이며, 텅 비고 한가로운데 어찌 유무(有無) 가운데에 떨어지리오.
<보충설명> 공자도 예순의 나이에 접어들면 귀가 순해진다(耳順)고 했습니다. 이 것은 듣기 좋은 소리든지 듣기 거북한 소리든지 시비에 걸리지 않고 모두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바깥의 모든 소리를 수용하게 되면 묘유의 살림살이도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공자는 일흔 살에 접어들면 어떠한 행동을 취하더라도 그 것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慾不踰矩)고 했습니다. 또, 陶淵明의 詩, ‘飮酒’ (24번째 강의에서 소개)에서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집을 지었지만 車馬의 소리가 시끄럽지 않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는 것 역시 聲色에 구애됨이 없는 담박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一
일(一)이여!
{說}天地之根 萬化之源 千途 共向於彼 萬像 皆宗於此
천지(天地)의 뿌리요,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다. 천 갈래 길이 모두 저(하나)에게 향하고, 만 가지 모습이 모두 이(하나)에서 宗을 삼는다.
相隨來也
서로 따라 오도다. (근본의 자리인 하나로부터 차별되어서)
{說}三界萬法 皆從斯起 兵隨印轉 影逐形生
삼계의 만법이 모두 이로부터 일어났으니, 군대는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그림자는 형체를 따라 나타난다.
<보충설명> 일(一)이란 것은 말을 붙일 수 없는 경지 즉, 삼라만상의 근원을 가자한 표현입니다. 이 하나(一)에서 벌어져 서로 서로 따라 일어나는 (相隨來) 천변만화의 현상을 禪句로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鳥語春香而 浩蕩之春 寓焉
眉梢眼角而 芳菲之情 傳焉
擧萬殊之一本 以見一以貫之無不貫
새들이 노래하고 꽃들이 향기를 뿜으니 풍성한 봄이 묻어 나오고,
눈 언저리에 웃음이 배어있으면 아름다운 情이 느껴지도다.
삼라만상의 차별은 하나를 뿌리 삼았으니, ‘一以貫之’에 꿰이지 않은 것이 없도다.
<보충설명> 一以貫之는 ‘吾道는 一以貫之’ 라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공자가 언급한 ‘하나(一)’ 역시 言說이 끊어진 진리를 마지못해 가자한 표현입니다. 증자는 공자의 이 말씀을 다른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 ‘忠恕’로써 ‘一以貫之’를 바꾸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세번째 강의 一物序에서 소개)
一一 破二成三 從此出 乾坤混沌未分前 以是一生參學畢
‘一’이라 하는 ‘一’이여! 둘로 쪼개고 셋을 이루는 것이 이 ‘一’로 부터 나왔도다. 하늘과 땅이 혼돈하여 나뉘기 이전의 바로 이 하나로써 일생의 참구를 마치는 것이로다.
{說}破二 以一也 成三 亦以一也 成之破之 皆從斯得 興來先天地 無形 本寂寥 能爲萬像主 亦爲諸佛毋 若人 了得此 無事不圓通
둘로 쪼개는 것도 하나로써 하고, 셋을 이루는 것도 또한 하나로써 하나니, 쪼개고 만드는 것이 모두 하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벌어져 오는 것도 천지보다 앞서고, 형상도 없이 본래 고요한 것으로서, 능히 만 가지 모습의 주인이 되고,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 하나를 환하게 깨닫는다면 일마다 원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時
시(時)여! (현재 그리고 당처에서 하나와 계합하는 느낌 즉, 시공을 초월한 현장감)
{說}遠劫一念 無礙 古今始終 該通 爲甚如此 動靜 常在靑山中
원겁(遠劫)과 일념(一念)이 걸림이 없고, 고금(古今)과 시종(始終)이 모두 통한다. 왜 그런 것인가?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항상 청산(靑山)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如魚飮水 冷暖自知
물고기가 물을 마시는 바로 그 때가, 차고 따뜻한 것을 스스로 아는 때인 것이다.
{說}怎生 是冷暖底滋味 明月堂前 時時九夏 太陽門下 日日三秋 此味 無人識 親嘗 始自知
어떤 것이 이 차고 따뜻한 맛을 아는 것인가? 명월당(공간) 앞에 달이 환하면 여름철이요, 태양 볕이 강하면 나날이 가을이로다. 이런 때, 이 맛을 아는 사람 없으니 친히 맛보아야 비로소 스스로 알리라.
時時 淸風明月 鎭相隨 桃紅李白薔薇紫 問着東君自不知
시(時)라는 시여! 청풍명월이 오래도록 서로 따른다. 복숭아꽃 붉고, 오얏꽃 희고, 장미가 자주인 것을 봄에게 물어도 봄은 스스로 알지 못하네.
{說}淸風明月 不得別會 淸風拂時 明月照 明月照時 淸風拂 桃李薔薇 東君造化底物事 東君 不知 淸風明月 人人受用底家事 人人 不會 不會 不知 人人 盡有一雙眉 箇箇面前 更無人 着語云自知 頌云不知 不知與 自知 相去多少 但知不知 是眞自知
청풍명월을 따로 따로 알려하지 말지니, 청풍이 불 때에 명월이 비추고 명월이 비출 때 청풍이 불도다. 복숭아와 오얏과 장미가 봄바람의 조화 속의 산물인데 봄이 알지 못하고, 청풍과 명월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집안 일인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니, 이해하지 못하고알지 못함이여! 사람마다 모두 한 쌍의 눈썹이 있고, 개개인의 면전에 다시 사람(자신의 얼굴)이 없도다. 착어에는 “스스로 안다 (冷暖自知)”라고 했고, 頌에는 “알지 못한다 (東君自不知)”라 했으니, “알지 못하는 것”과 “스스로 아는 것”은 서로 얼마의 차이가 나는가? 다만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이것이 진실로 스스로 아는 것이다.
출처: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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