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달마의 불종자론(佛種子論)-4.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通達無我法者 2008. 10. 10. 19:24

 

 

내가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나는 명상 모임을 7일 동안 가질 예정이다. 그대는 잘 맞추어서 이곳에 왔다. 명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 그러니 내일 아침 8시에 이곳에서 나와 함께 명상을 하자. 그리고 만약 질문이 있다면 개인적인 면담을 하라. 그때 그대는 뭐든지 의문나는 점을 내게 물을 수 있다."

그가 말했다.
"내일 다시 오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내가 말했다.
"무슨 문제인가? 그대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는가?"

그가 말했다.
"나는 문제가 없는데 나와 함께 온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내 제자인데 이 근처에 친척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가게 내버려 두라. 그대는 여기서 명상을 하면 되지 않는가?"

그가 말했다.
"당신은 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돈을 만질 수 없습니다. 내 돈은 그가 갖고 다니면서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냅니다. 어디를 갈 때마다 나는 항상 그와 함께 다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그것은 그대의 돈인데 그가 항상 갖고 다닌다고? 그대는 돈을 만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지고, 이 불쌍한 친구는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단 말인가? 그는 그대 대신 돈을 만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저지른 업이 무엇인가? 자신의 돈을 만지는 것이 나쁘면 남의 돈을 만지는 것은 더 나쁘지 않은가?"

나는 계속 말했다.
"이 불쌍한 친구를 좀 생각해 주게나. 만약 그것이 그대의 돈이면 그대가 그것을 만져라. 장갑을 사서 끼고 돈을 만져라. 그러면 돈은 그대 손에 닿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가 성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장갑을 끼고서 모든 종류의 돈을 만진다 해도 그대는 그를 성자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매우 교활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돈을 만지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침묵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내부에서는 생각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동작을 통해서 말을 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그것은 통역해 주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의 의사표현이 전달되는 데는 완전히 통역자에게 달린 것이다.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통역자의 전달을 제지할 수가 없다. "그런 뜻이 아니다"란 말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통역이 어떻게 전달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메허 바바(Meher Baba)의 비서 중에 아디 이라니(Adi Irani)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거의 전생애를 메허 바바와 함께 살았다. 내가 아마드나가르에 갈 때마다 아디 이라니는 나를 보러오곤 했다. 그는 항상 메허 바바의 공책을 갖고 다녔고 메허 바바는 의사소통을 할 때에는 간단히 표시만 했다. 처음에 그는 작은 칠판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그는 칠판을 내다 버렸다. 사람들이 "요즘처럼 우주선이 달에 가는 시대에 이 무슨 난센스인가?"라고 말하며 비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허 바바는 아디 이라니를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손으로 몇 가지 동작을 했고, 그것을 받아 적는 아디 이라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디 이라니에게 물었다.
"너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진짜로 알고 받아 적는가?"

그가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적어도 당신한테는 말입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는 내가 적는 것에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내가 상상하는 대로 적을 뿐입니다."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아디 이라니는 메허 바바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알지 못했다. 메허 바바가 한번도 반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디 이라니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옳았다.

내가 물었다.
"너는 정말로 그의 동작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인가? 동작이란 여러 가지 뜻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배를 보여 주거나 목이 마를 때에는 손으로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할 수 있지만, 철학적인 말은 어떻게 손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나는 네가 그것들을 다 이해하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아디 이라니는 그때까지 거의 50권에 달하는 책을 썼다. 그리고 한 권이 보통 500페이지에 달했다. 그것은 적은 양이 아니다.

나는 아디 이라니에게 말했다.
"이것은 모두 너의 상상력이다. 너는 훌륭한 작가이다. 그 책들은 메허 바바의 것이 아니라 모두 너의 작품이다. 네가 그럴싸하게 내용을 썼기 때문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그의 말로 받아들였다."

사실 메허 바바는 전 세계에 알려질 만큼 유명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아디 이라니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디 이라니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아무도 그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을 하고 싶다면 그대의 입술과 혀로 말하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인가? 입으로 말할 수 있으면서도 손가락으로 말하는 것이 어떻게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대의 입술과 혀도 손가락처럼 그대의 몸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 손가락은 말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대는 자연스러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가?

상징이란 위험한 것이다. 일본의 산야신들이 이곳에 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곤란한 문제를 겪었다. 몸동작에 있어서 일본은 완전히 다른 상징 체계를 갖고 있다. 어떻게 그들이 다른 식으로 그것을 발전시켰는지 이상할 정도이다. 이 세상 모든 민족 심지어는 원시인들조차도 '예스'의 표시로서 그들의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인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의 '예스'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내게 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산야신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의아해서 물어 보았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왔는지 말이다.

그들의 몸동작은 매우 이상하게 발전되었다. 누군가 그것들을 조사해야 한다. 그렇게 다른 상징 체계를 가진 민족은 그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인 통역을 사용해야 했다. 계속해서 의사 전달에 오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개를 가로 저었을 때 나는 '아니오'라고 이해했고, 그들이 '아니오'라고 말했을 때는 나는 '예'로 알아들었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만약 그대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가 침묵 속에 있다고 해서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는 침묵 속에서 산책을 할 수도 있고 식사를 할 수도 있다. 침묵은 내면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평화이며 내적 고요이다. 사실 침묵 속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해도 그 침묵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침묵을 더 이상 마음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의 주제를 더욱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말은 자신의 존재에서 나오기 때문에 듣는 그대의 가슴속에 깊숙이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침묵은 말과 상대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침묵은 어떤 좋은 말을 듣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경험이다. 그대가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침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때 그대의 말은 너무나 아름답고 진실하다. 그것들은 순수한 가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가 말한 연꽃 낙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그의 침묵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래는 석가모니 부처의 다른 이름이다. 또한 그것은 진여(眞如)를 인식한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그의 침묵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삼매는 말과 침묵 사이의 균형이며 조화이다. 말과 침묵이 만나는 바로 그 중심이다. 그 중심은 둘 다를 초월한다. 그것은 더 이상 침묵도 아니며 말도 아니다. 그것은 노래와 함께 하는 침묵이며, 그 노래는 소리없는 노래이다. 그것은 음악이 있는 침묵이며, 그 음악은 어떤 악기로부터도 나온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은 그대 존재 자체이다.

고대 인도의 현자들은 이것을 '옴카르(omkar)'라고 불렀다. 그것은 옴(om) 소리인데 그대가 반복해서 소리내는 옴이 아니라, 그대가 단순히 듣는 옴 소리이다. 그대가 깊은 침묵에 휩싸일 때, 그때 옴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옴은 산스크리트어의 알파벳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것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소리를 표현한 알파벳이 아닌 단순한 상징으로만 쓰이는 유일한 알파벳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우파니샤드는 바로 이 옴과 함께 시작해서 옴과 함께 끝난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침묵을 표현할 때 그것은 단순히 옴이 아니라 샨티(shanit)를 세 번 반복하는 '옴 샨티 샨티 샨티'이다.

어떤 악기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가 바로 침묵이다. 그것은 또한 입으로도 말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그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언어를 초월하며 알파벳을 초월한다. 말을 초월하고 침묵마저 초월한다. 옴은 모든 존재가 생겨나게 된 본질이며 우주의 음악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할 때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 그대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그 침묵은 묶여 있다. 말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집착과도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집착 역시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 아니면 무심에 달려 있다. 만약 마음이 언어를 사용하면 그것은 거짓을 만들어낸다. 환상을 말이다. 만약 무심이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도 같은 경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을 만들어낸다. 그대가 무엇을 만들어 내든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든지 무심이 작용하는 것이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마음을 통해서 나온 것이면 그대는 중심을 놓친다. 마음의 간섭없이 존재계로 하여금 그대를 통해서 말하게 하면 언어는 진리의 순수한 표현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것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마음은 그대의 감옥이다. 무심은 그대의 자유이다. 마음은 그대의 무지이다. 무심은 그대의 깨달음이다. 마음에서 무심으로 옮겨가라. 이것이 전체의 길이며 궁극적인 종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