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두 번째의 능변(能變)이다. 이 식은 말라식(末那識)이라고 이름한다 / 말라식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전변하여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 말라식은 사량하는 것을 성품과 행상으로 삼는다(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이것은 제5송이다. 말라식은 제7식으로 의(意, manas)로 번역이 된다. 의식(意識)으로 이해되는 제6식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말라식으로 음역하여 자주 사용된다. 『성유식론』에서는 말라식의 성격을 ‘항심사량(恒審思量)’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항(恒)사량과 심(審)사량으로 구별된다.
항(恒)사량이란 ‘사량’의 항상성을 의미한다. 이점은 전5식과 제8식은 사량하지 않지만, 제6식과 제7식은 사량하는 기능을 가진다. 제6식의 경우는 언어로서 사량하지만, 항상 사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7식은 단절 없이 계속적으로 사량한다는 점에서 항사량이라고 한다. 이것이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心所)은 감정, 생각, 갈망 등으로 이것을 ‘나’라고 동일시하여 집착하고 ‘나의 것’으로 분별하고 그것의 상실을 염려한다.
심(審)사량이란 아뢰야식 자체를 자아로 사량하는 작용이다. 아뢰야식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제7식은 변화하는 강물을 변하지 않는 존재로 사량한다. 이는 마치 ‘모든 사물은 변화하지만, 변화하는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변화하지 않는 그것을 존재로서 판단하고, 스스로 그것을 자아라고 집착한다. 이점들은 범주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사물이 변한다’고 하는 판단과 그 문장에 대한 판단이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를 판단하고 사량하는 존재자를 가설하여 제7식은 그것을 자아라고 잘못된 인식을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항심사량은 인지왜곡의 한 형태이다.
위의 게송에서 능변(能變)이란 능히 변화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사량하고 자아라고 집착함으로써, 제7식은 자아와 구별되는 타자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서 자아와 타자가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중생과 그 세상을 능동적으로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때 제7식이 전변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이 바로 아뢰야식(依彼轉緣彼)이다. 따라서 아뢰야식과 말라식은 매우 밀접한 관계(俱有依)를 유지한다. 이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성유식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종자의(種子依)로서, 제7식의 사량은 반드시 아뢰야식의 종자에 의존하여 발생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연의(因緣依)라고 한다. 원인은 같은 계통의 종자이고, 조건은 그 씨앗에서 새싹이 돋게 하는 주변 환경을 말한다. 이때의 환경이란 물리적인 조건이기보다는 심리적인 환경이 크게 작용한다.
둘째는 증상의(增上依)이다. 양자는 서로 의존되어서 더욱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말라식이 아뢰야식 종자의 출현에 의지하여 활성화하듯이, 아뢰야식 종자의 출현은 다시 말라식에 의해서 새롭게 전변하여 흡습된다. 양자는 서로 의존되어서 역동성을 창조한다. 이점은 고통발생의 그 역동적인 구조를 탐색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해탈, 곧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가 있다.
셋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다. 순간 발생되어 순간 소멸하는 의미로서, 선후관계에서 유사성(等)과 연속성(無間)을 말한다. 유사성은 같은 종류의 경험을 상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레몬향기는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상기시키거나 아니면 슬픈 음악과도 결합될 수도 있다. 레몬 향기는 어떤 경험을 촉발시킨다. 그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함께 이루어진 간격이 없는 시간적인 경험다발을 말한다. 연속성이란 현재의 레몬향기와 과거의 경험사이에는 유사성에 근거한 어떤 심리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고통발생의 형태나 과정을 탐색하는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