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문제, 출가동기이자 수행 목적〈39〉무루의 조사선을 참구하라 |
선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불교의 실천수행 중 제일 으뜸이며, 생사윤회의 차안세계(此岸世界)로부터 자재해탈(自在解脫)의 피안세계로 이르게 하는 최상의 수행방법인 것이다. 결국 선의 목적은 생사문제의 해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생사라는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다고 한다면 선은 열반에 이르는 길을 체구연마(體軀鍊磨), 즉 직접 몸과 마음을 다해 수행함으로서 생사의 근본을 해결하여 해탈에 이르게 한다. 그렇지 않고 입과 눈과 귀로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결코 삼계에 생사윤회하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사의 문제가 출가의 동기가 되고 수행의 목적이 되기때문에 선승들에게 있어서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일은 목숨을 건 문제이고, 일생을 걸고 수행하는 가장 핵심적인 관문이라 하겠다.
대수법진(大隋法眞, 834~919) 선사는 <목선의(木禪艤)>에서 “이미 가사를 입었으니 선지식을 가까이 해서 생사대사를 해결해야지, 또 다시 6도윤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또한 “출가하여 도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라고 했다. 중봉명본(中峰明本)도 <산방야화(山房夜話)>에서 “모름지기 참선을 하는 목적은 생사의 문제를 투철하게 해결하는 데에 있으며, 또한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도 오직 생사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자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성인들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방법은 수천 수만 가지이지만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한 부분이라도 투철하게 깊숙이 들어가야지, 이것저것 겸수(兼修)해서는 안된다(參禪要了生死念佛修淨土亦要了生死聖人設敎雖千塗萬轍一皆以決了生死爲究竟然破生死根塵惟尙一門深入古人謂毫釐繫念三途業因瞥爾情生萬劫覇鎖兼修)”라고 했다.
이렇게 옛 선사들은 출가하여 수행하면서 도를 밝히지 못하는 고통이 지옥업보를 받는 고통보다 더하며, 다른 그 어떤 고통보다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고 했다. 또한 참선을 하는 목적도,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목적도, 성인들이 중생을 교화하는 목적도 모두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것을 위함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이것저것을 같이 수행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생사문제 하나만을 투철하게 깊숙이 파고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출가자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선승들에게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일은
목숨 건 문제이고, 일생을 걸고 수행하는
가장 핵심적인 관문이라 하겠다
달마대사의 <혈맥론(血脈論)>에 “만약 자기를 밝게 요달하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계정혜의 삼학을 겸비한 선지식을 찾아서 생사의 근본을 궁구하라. 견성을 못하면 가령 12부경을 통설할지라도 생사윤회를 면치 못한다. 삼계에 고를 받아서 벗어날 기약이 있을 수 없다(若自己不明了 須參善知識了却生死根本 若不見性 卽不名善知識 若不如此 縱說得十二部經 亦不免生死輪 三界受苦 無有出期)”고 하였으며, 감산덕청(山德淸: 1546~1623)도 저서 <몽유집(夢遊集)>에서 “미혹되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달으면 윤회가 사라진다. 달마가 서쪽에 이르러 문자를 세우지 않은 까닭은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볼 때 선에서는 문자를 세우고 12부경을 통설하는 것보다는 생사의 근본을 철저하게 규명하여 견성성불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봉명본(1263~1323)도 <산방야화>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생사대사를 해결해야 할 큰 문제로는 삼지 않고 선을 신속하게 머리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고작 방편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알음알이로 고금의 공안을 통하고서 관문을 뚫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사라는 가장 크고 견고한 관문은 뚫지 못한 것이다. 자기가 통과한 것은 고작 언설의 관문이라는 것을 모른다. 이것은 수행에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본분을 스스로 해치는 짓이다. 만약 진실하게 생사대사를 끊으려는 올바른 사람이라면 비록 달마대사가 세간에 출현해서 모든 불조의 핵심되는 도리를 가져다 8식(八識) 가운데 놓아준다 해도 뿌리까지라도 모두 토해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반드시 본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이론에 밝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이 지식적 알음알이에 그친다면 문자놀음에 불과할 뿐이다. 생사의 견고한 관문을 뚫는 것은 절대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다거나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철저한 자기 수행을 통한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쉽고 편하게 생사의 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선을 머리로 이해하고자 하나 결국 생사라는 가장 크고 중요한 관문을 뚫지 못한다면 불보살이 출현한다하더라도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된다.
야운(野雲)스님의 <자경서(自警序)>에는 “참으로 나고 죽는 큰일을 해결하기 위해 조사의 화두를 잘 참구해서 크게 깨치는 것으로써 목표를 삼고, 부디 스스로 가벼이 여겨 물러서지 말지어다(眞實爲生死大事 於祖師公案上 宜善參究 以大悟爲則 切莫自輕而退屈)”하면서 “나와 남 위하는 일 착하다 해도 생사에 윤회하는 원인이거니, 솔바람 칡덩굴 달빛 아래서 오랫동안 무루(無漏)의 조사선을 관할지어다(爲他爲己雖微善 皆是輪廻生死因 願入松風羅月下 長觀無漏祖師禪)”하였으며, 중봉명본은 마삼근(麻三斤).간시궐(乾屎).수미산(須彌山).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등등의 화두는 슬쩍 스치기만 해도 만 겁의 생사가 그 자리에서 끊어져버린다고 했다. 또한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도 <대혜보각선사법어(大慧普覺禪師法語)>에서 “조주스님께서 ‘없다(無)’고 한 이 한 글자는 바로 생사의 의심을 깨뜨리는 칼이다(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遮一字者 便是箇-破生死疑心底刀子也)”라고 했다.
이와 같이 이타행을 하는 것이나 자리행을 하는 것이나 모두 아직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이러한 것은 결국 생사에 윤회하는 원인이 될 뿐 참다운 출가목적인 생사대사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오로지 삼학을 겸비한 선지식을 찾거나, 화두를 참구하여 무루의 조사선을 오래도록 참구해야만 비로소 생사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70호/ 10월31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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