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초기불교산책·각묵스님

초기불교의 목적

通達無我法者 2010. 3. 18. 23:19

 

초기불교의 목적

금생과 내생 궁극적인 행복의 실현


이제 초기불교의 목적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이야말로 초기불교가 추구하는 근본목적이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으로 행복을 말씀하셨다.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봉사를 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한다고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불교용어로 말하면 이 둘은 바로 보시(布施, dana)와 지계(持戒, sila)다. 이것은 시.계.생천(施戒生天)으로 한역되어 우리에게도 익숙한 표현이다. 금생에 이웃에 봉사하고 승가에 보시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면, 금생에도 행복하고 내생에는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보시와 지계는 대승 육바라밀의 첫째와 둘째 바라밀이기도 하다. 특히 재가자들에게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강조하셨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요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한다.

철저하게 이웃 위해 봉사하고

도덕적 삶을 살아야 이루어져


그런데 행복은 이상향을 저 밖에 설정해 놓고 무작정 그것을 추구만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오히려 괴로움을 여읠 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큰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 것이라 함축해서 표현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과 행복의 문제는 불교 만대의 진리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양대 축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첫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진리(고성제)와 세 번째 진리인 소멸의 진리(멸성제)이다. 그러면 어떻게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가? 당연히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로 대표되며, 이 원인을 없앨 때 괴로움은 극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갈애의 소멸은 당연히 팔정도로 집약되는 수행을 통해서 성취된다. 이렇게 해서 갈애는 두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집성제)가 되고, 수행은 네 번째인 도닦음의 진리(도성제)가 된다. 이처럼 불교의 목적인 이고득락은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로 멋지게 정리된다.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붓다사사나(Buddha-sasana)나 삿투사사나(satthu-sasana)라 불린다. 이것은 ‘부처님의 명령’과 ‘스승의 명령’으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과 궁극적 행복의 실현이야말로 부처님의 명령이다. 그러나 아무리 존귀한 명령일지라도 그 명령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하지 못하면 결코 그것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필자를 위시한 한국의 불자들에게는 부족하지 않나 염려된다.

금생과 내생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이웃에 봉사해야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한다. 이것이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명령이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승이기도 하다. 궁극적 행복을 위해서는 사성제와 열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한다. 이것도 부처님의 지엄하신 명령이다. 애매모호한 명령이란 없듯이 애매모호한 불교란 애초에 없다. 우리 스스로의 무지가 스승의 명령을 애매모호하게 만들뿐이다.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불교신문 259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