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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 어떻게 하는가

通達無我法者 2010. 11. 7. 00:12

 

 

위빠사나 수행 어떻게 하는가

-좌선, 경행(행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1) 위빠사나는 어떤 수행인가?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이 순간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마음챙김=알아차림(sati. 念)을 하는 수행입니다.

이 말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마음이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을 되돌아보아 어떤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만나는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한 정보를 가지고,

자신만의 색안경으로 대상을 판단하고 분별하며 살아왔습니다.

여기에 한 물건을 놓고 100명이 바라보면 100개의 견해가 나옵니다.


우리는 비록 감각기관과 부딪치는 밖의 대상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이미 저장해놓은 '나'라는 고정관념으로 시비분별하여 판단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업을 짓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 수행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온갖 번뇌와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항상 괴로움의 원인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만의 느낌과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자기 견해만을 주장하면,

상대도 자기만의 느낌과 생각을 주장하고, 그래서 충돌이 있고,

그것에서 어떻게든 자기가 이기려는 욕망이 일어나 다시 업을 짓고 괴로움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바른 눈이 없으면

매 순간 고통을 재생산하는 일만 하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이 현재를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현재를 깨어서 보는, 알아차리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현재를 있는 그대로 깨어서 보는 수행자는

매 순간 자신의 관념과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어서,

대상을 시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그 자리에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알아차림의 힘들이 쌓이면,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진실한 법칙까지도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대한 법의 성품을 통찰하는 안목이 생기고,

이렇게 생긴 통찰지혜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집착을 놓게 해 줍니다.


그래서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의 노예에서 벗어나,

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로 모든 괴로움을 소멸한 최고의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위빠사나는 한 마디로

자신의 어리석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괴로움을 지혜로 밝게 비추어 보아,

다시 괴로움으로 돌아올 만한 행위를 하지 않고,

현재를 알아차림으로 수용하여, 그 자리에서 즉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수행입니다.

 

즉 번뇌를 만나면, 그것을 재료로 알아차림을 해서

번뇌를 밝은 지혜로 바꾸어 가는 수행입니다.



2) 현재 이 순간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들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공통의 재산 1호는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이제 이 공통의 재산을 이용하여 현재의 마음이 현재의 몸을 편안하게 주시하면

그때마다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마음이 현재의 몸을 대상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을 사실 그대로 알아차려보는 것입니다.

 

이때 마음이 잠시라도 현재의 몸을 주시하는 알아차림을 놓치면,

마음은 어느새 과거나 미래로 가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일으키고

좋거나 싫은 시나리오를 만들고, 망상 속에 빠져있게 됩니다.

 

이것은 깨어있지 못한 것이고 번뇌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사실 그대로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시작은

마음이 현재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고 의도를 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수행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몸에 마음을 붙여서 몸을 직접 느낄 때부터 수행입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마음은 천지사방으로 돌아다니는 일만 해왔기 때문에

몸에 마음을 붙인다는 것은 부단한 노력을 해야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좌선을 조금이라도 해보신 분은 분명 자기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 쉬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누가 자기 숨쉬는 것을 몰라서

그것을 알아차려야한다는 말인가 하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내가 숨을 쉰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숨을 쉬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먼저 숨을 쉰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내가 숨을 쉬고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숨 쉬는 것을 알아차린다고 착각한 것이고,

 

실제 숨을 쉬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호흡을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서

호흡을 직접 지켜 보는 것으로,

직접 호흡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알고 있는 과정입니다. 

 

즉 마음이 몸을 대상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보는 일을 하고 있는 마음의 행위(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숨 쉰다는 것을 아는 것과

숨 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은 직접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생각으로 아는 것은 알아차림을 놓친 망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것의 구별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알아차림이 되던 안 되던

그냥 좌선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생각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이 확연히 구별됩니다.

그때까지는 그냥 알아차림을 무조건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실제로 저희 선원에서 좌선을 할 때 알아차려가는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3) 좌선은 이렇게 해보세요.


마음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 몸의 자세는 움직이거나 멈추어있습니다.

좌선은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알아차림이며,

경행은 행위를 하느라 몸의 움직임이 있을 때 현재 몸의 움직임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처에서 좌선과 경행을 1:1로 합니다.

이것은 일상에서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어느 상황이라도

현재 자신의 몸을 알아차림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함입니다.

특히 좌선은 서있거나 누웠을 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 좌선 **


좌선을 시작 할 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리드를 하고 수행자는 이 리드에 따라 편하게 좌선을 시작합니다.

이 방법은 저희 선원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수심법을 다 아울러 수행하도록 하며, 초보 수행자들에게 좌선을 할 때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을 시작하고, 또 알아차림을 이어가게 해주는 방법입니다.

읽어보시고 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좌선을 시작해보십시오.


1. 바른 자세로 앉는다.

몸의 긴장을 다 풀어 몸에 긴장됨이 없이 편안하면서도 바른 자세로 앉으십시오.

턱을 약간만 아래로 당기고, 허리는 편안하게 펴십시오.

손은 무릎 위에 편하게 올려놓으십시오.

발은 반가부좌나 두 발을 나란히 바닥에 내려놓는 평좌를 하십시오.

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을 만큼 부담 없는 자신만의 편안한 자세를 잡으십시오.


2.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이제 현재의 마음상태를 알아차립니다.

지금 내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는가, 미워하는 것이 있는가,

졸리는가, 들떠있는가, 의심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리십시오.

어떤 마음이 있든지 그냥 “있구나”하고 알고 그 마음에 대해 시비하지 마십시오.

또한 어떤 마음이 잡히지 않더라도 마음을 보려고 현재를 한 번 느껴보았으면 된 것입니다.


3. 몸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이제 마음이 몸으로 가서 몸의 있는 느낌을 주시합니다.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의 느낌을 차례대로 마음이 직접 머물러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내려갑니다.

이와 같이 서로 접촉된 부분에 마음을 겨냥하면 대상을 아는 느낌이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 느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서 지켜보면 그 느낌들의 변화를 알 수 있으며,

이처럼 직접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면서 내려갑니다.


자, 먼저 눈꺼풀이 있는 것을 아십시오. 눈꺼풀이 있음을 아는 것이 느낌입니다.

이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십시오.

먼저 눈꺼풀이 서로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직접 느껴보십시오).

점차 서로 닿아있는 부분에서  따스함, 가벼움, 무거움, 떨림, 빛 등의 느낌이 느껴집니다.

그 중에서 강한 느낌 하나를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그 변화를 주시하십시오.

-사이(얼마동안 그 자리에서 지속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제 입술로 갑니다.

입술이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입술에 마음을 붙이는 것입니다. - 사이 -

이제 입술에 있는 따스함, 촉촉함, 떨림 등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 변화를 보십시오. -사이 -


다음은 손으로 갑니다.

손이 어딘가에 닿아있는 것을 아십시오. -사이-

손에 있는 따스함, 쑤심, 진동 등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중 한 느낌의 변화를 보십시오. -사이-


마지막으로 엉덩이로 갑니다.

엉덩이가 방석에 닿아있는 것을 아십시오. -사이 -

그리고 닿아있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무거움 단단함 떨림 등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지금 느끼는 그 느낌을 대상으로 그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사이-


4. 현재를 알아차린다.

자, 이제는 마음을 현재로 가져옵니다.

지금 이 순간을 그냥 편안하게 지켜보십시오.

현재 내 마음이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마음이 소리를 듣고 있거나 고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마음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아는 마음도 현재와 함께 흘러가고 있습니다.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도 계속 생멸하면서 흐르고 있습니다.

그냥 현재를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지속하십시오.  -사이 -


5. 호흡을 알아차린다.

또한 현재 여기에 앉아있는 자신의 몸의 느낌을 마음이 알고 있습니다.

앉아있는 몸을 전체적으로, 크게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가만히 몸 전체를 주시합니다. -사이 -


몸의 어디선가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호흡입니다. 호흡은 코, 가슴, 배, 몸의 일부에서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그 중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하나를 선택해서

그 자리에서 호흡에 의한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십시오.

 

호흡은 편안하고 자연스런 호흡을 해야 합니다.

복식 호흡이나 단전호흡으로 호흡을 일부러 만들지 마십시오. -사이-


처음에는 호흡의 움직임 중에서 ‘일어남 하나만을 제대로 알아차리십시오. -사이 -


어느 정도 집중이 되면 이제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십시오.

점차 집중이 더 잘되어지면 일어남, 꺼짐, 쉼까지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호흡의 일어남과 꺼지는 모양을 알아차리다가

점차 그 움직임 안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의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나 느낌을 일부러 찾으면 안 됩니다.

현재의 느끼고 있는 것을 알면 됩니다. 

느껴지는 만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사이-


6. 장애(손님)를 알아차린다.

그러나 호흡을 알아차리는 중에 마음은 어느새 망상이나 통증 졸림 싫증 의심에 빠집니다.

이런 손님(법, 장애)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을 없애려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서 호흡을 알아차리십시오.

 

이들은 없애려고 하면 더욱 커집니다.

그냥 지금 이런 대상이 있었네! 하고 알아차려주면

그들은 자기 할일을 다 한 것으로 더 이상 커지지 않고 물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장애라도 알아차림으로 대하면

수행자도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장애를 싫어해서 반응을 하면 그 장애에 걸려서 수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7. 좌선 중에 이따금씩 앉아있는 자세가 반듯한지 살펴보고,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 알아차려 몸의 긴장을 풀고,

알아차림을 놓쳤더라도 시비하지 말고, 다시 알아차림을 시작합니다.


또한 이따금씩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하고 현재를 알아차려 보십시오.

만일 알아차림을 놓치고 있었어도, 

그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주면, 지금 다시 알아차림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언제라도 지금 다시 알아차림을 시작하면 수행이 이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좌선 중에 나타나는 대상은 무엇이든지 다 알아차릴 대상인 법입니다.

호흡, 몸의 가려운 느낌, 통증, 졸림, 하기 싫음, 의심, 생각 등등 무엇이든 다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바라지 말고,

또한 없애려고 하지 말고,

나타나는 대로 모두 법으로 받아들여

알아차림으로 수용하십시오.


다시 한 번 좌선하는 과정을 정리하면,

1) 편안한 자세로 허리를 펴고, 몸의 긴장을 풀고, 바르게 앉습니다.

2) 현재의 마음상태를 있는 그대로 한 번 알아차립니다.

3) 마음을 몸에서 붙여서 눈, 입술, 손, 엉덩이의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4) 마음을 현재로 가져와 현재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5) 몸의 느낌에서 움직임이 가장 큰 곳,

예를 들면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에 마음을 기울여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먼저 들숨에 의한 배의 일어남 하나라도 잘 알아차리고

그것이 잘 이어지면 들숨에 의한 배의 일어남과 날숨에 의한 배의 꺼짐을 함께 알아차립니다.

6) 호흡을 알아차리는 중에도 일어나는 여러 가지 법(통증, 망상, 졸림, 싫증, 의심)에도

반응하지 않고 있으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줍니다. 

 

이대로 한 번 따라서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알아차려지는 만큼 자연스럽게 알아차리십시오.

알아차림을 잘하려고 하면 더 잘 안 됩니다.

마음에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마음이 편안해져서 알아차림을 잘 이어갈 수 있습니다.



4) 설명 드린 대로 좌선을 해보셨는지요?

 

알아차림은 우리의 의식을 맑게 하는 필터입니다. 

대상을 만날 때 알아차림과 함께 있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지만,

알아차림을 놓치고 대상을 만나면 마음은 이미 탐진치로 오염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대상에 대하여 번뇌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번뇌를 소멸하는 불교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으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아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그래서 생긴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일차적 목표입니다.

이 평온한 마음은 곧 선업으로 이어집니다.

매 순간의 마음은 즉시  신구의 3업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면 일단 그 순간에 번뇌가 없어서 행복하고,

또한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계속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선한 마음은 즉시 선한 물질과 정신을 만듭니다.

 

또한 이런 평온한 마음상태에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 열려  통찰지혜가 나옵니다.

즉, 몸과 마음이 지닌 진정한 성품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실체가 없다(무아)는 것을 통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이런 통찰지를 가져오는 최고의 선업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좌선을 한 시간 하였다면 한 시간 동안 가장 수승한 선업을 쌓으신 것입니다.

만일 이 시간에 좌선을 하지 않고 누구를 만났다면 상대에 빠져서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대하여 마음에 좋아 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번뇌를 걸러주는 알아차림이라는 필터가 없이

상대에 대하여 탐심이나 성냄을 일으킨 것으로 불선업이며

불선한 과보를 예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라도 좌선을 하였다면

그동안은 탐심이나 성냄이 전혀 없는 선한 마음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이미 최고의 선업을 행한 것입니다. 

즉 선한 과보가 올 씨앗을 심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마음을 몸에 붙여 잠간이라도 몸의 움직임이나 느낌을 알아차려보면

우리는 그 순간에 번뇌가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나기 때문에,

한 순간에 마음은 선심이거나 불선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을 하는 마음은 선심이므로

현재 마음이 선심이면 그 자리에는 불선심이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몸을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미운 사람,

보고 싶은 사람, 무엇을 갖고 싶다는 생각, 아만심 등이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즉, 알아차리는 마음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탐진치라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은 몸의 움직임이나 느낌을  대상으로 하여

현재를 아는 깨끗한 마음상태입니다.


이런 순간은 바로 탐진치가 전혀 없는 최고의 선한 마음이며,

그 마음에 의해 최고의 선업을 행하게 되고,

이 선업을 일으킨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그 마음의 업은 반드시 저장되어 선한 과보를 불러오는 원인이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선업의 힘이 모여서 때가 되면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값어치 있는 일은

보시와 계율을 지키는 것과 수행뿐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지금여기에서 깨어있는 수행,

즉 현재의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경행하는 방법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5) 경행(經行. 行禪)은 어떤 이익이 있나요?


우리는 하루에 많은 시간을 움직이면서 삽니다.

가고 서고 눕고 구부리고 돌고 허리를 펴고 등등으로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이 때에도 알아차림을 가지고 움직여야 수행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하면서 움직이면 몸과 마음이 가볍고 평온하며,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들은 일상에서 어디를 갈 때, 

마음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현재의 몸에 있지 않고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뒤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벌써 마음이 현재를 놓치고 미래로 달아나버립니다.

그리고 도착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망상을 하면서

들뜨거나 근심걱정을 하면서 걸어갑니다.

이것은 불선심의 상태입니다.

깨어있지 못하고 망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를 갈 때 걸어가는 자신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가면,

마음이 현재에 와 있는 것으로 마음이 들뜨지 않고 안정되어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고

고요한 마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면 일을 착오없이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평온한 마음상태는 저절로 가장 바르고 지혜로운 행위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움직일 때도 마음을 현재의 몸에 붙여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수행자가 선원에서 경행을 하면서 움직임에 대한 알아차림을 숙달하면

실제 일상생활 속에서 움직일 때도 마음이 몸에 붙어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는 좌선과 경행을 1:1의 비율로 수행하도록

시간표가 짜여져 있어 그대로 수행을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비밀이 경행에 있다고 할 만큼 경행은 중요합니다.


경행은 움직임의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므로 순간순간의 집중력을 길러줍니다.

경행으로 생긴 집중은 좌선으로 생긴 집중보다 훨씬 잘 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행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좌선과 경행을 같은 비율로 수행하게 했다고 합니다.

수행자들이 건강을 위한 특별한 다른 운동은 하지 않고,

오직 경행으로 몸의 근력을 키우고, 소화를 돕고, 혈액순환을 돕고 체력을 길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탁발이나 전법여행을 나갈 때도 알아차림을 가지고 경행을 하였답니다.

그만큼 경행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수행과정입니다.


선원에서 경행하는 법은, 먼저 왕복할 수 있는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고

바르게 서서 손은 마주 잡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현재 수행하려는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서 있는 자세를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죽 알아차려 내려가서, 마음이 발바닥으로 가면,

이제 한 발을 내밀면서 발에 마음을 기울여 발바닥의 닿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잘 이어지면 한 발 전체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잘 되면 그 다음 단계로 들고 놓음으로 좀 더 세밀하게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벽에 가까이 가서는 섬을 알아차리고,

또한 몸을 회전하면서는 돌고 있는 모습을 알아차립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한 순간도 마음을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서

마음이 현재를 알아차리는 일을 계속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6) 경행은 이렇게 해보세요.

 

** 경행 **


경행도 좌선과 마찬가지로 단계적으로 하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섬의 자세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면을 향하여 선다.

손은 앞으로 깍지를 끼거나,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는다.

혹은 뒤로 뒷짐 지듯이 잡는다.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보통 속도로 걸으며

앞으로 나갈 때는 반듯하게 일직선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섬을 알아차린 뒤에

다시 돌아서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앞을 향해 걸으면서 알아차린다.


섬의 자세에서는 먼저,

(1) 마음이 머리에서 발까지 몸의 느낌을 죽 느끼면서

서있는 몸의 전체적인 느낌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긴장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2) 이제 마음이 발에 오면 발바닥이 바닥에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2) 걸을 때

단계별로 나누어 한다.

이 경우에도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만 알아차린다.


(1) 한 발을 들어서 놓으면서 발바닥이 바닥에 "닿음"을 알아차린다.(1분절)

오른발 왼발이 닿을 때 닿는 것 하나만 마음이 직접 느끼면서 알아차린다.

이것이 잘 진행되면 그 다음은 좀 더 길게 한 발 전체를 알아차린다.

 

(2) "오른 발, 왼발"의 나아감을 알아차린다.(1분절)

먼저 움직임을 알고, 다음 느낌을 알아차린다.

 

(3) "들어서, 놓음"을 알아차린다.(2분절)

이 때에는 발을 들 때의 가벼움, 놓을 때의 무거움을 알아차린다.

 

(4)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알아차린다.(3분절)

시작과 중간과 끝의 전체를 알아차린다.

또한 발을 들 때의 화대, 움직일 때의 풍대,

내려놓을 때의 수대, 닿았을 때의 지대 등을 알 수 있다.

 

(5) "뒤꿈치 들고, 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고, 누름"을 알아차린다.(5분절 알기)

더 집중을 하고자 할 때는 발의 움직임 하나를 5분절로 나누어서 할 수 있다.

 

(6) 전면에서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린다.

갈 때 가려는 의도, 설 때 서려는 의도, 돌 때 돌려는 의도를 알아차린다.

 

(7) 집중이 잘 되어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차츰 발목, 무릎, 넓적다리, 허리의 움직임까지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경행을 여러 단계로 알아차리지만, 이것은 이론이고

실제로는 자신의 알아차리는 힘만큼 알아차립니다.

수행자가 한 번에 너무 많은 대상을 다 알려고 욕심을 내지 말아야합니다.

즉 마음에 과잉의 힘을 주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긴장하면 마음은 들떠서 몸에 붙어있지 못하고 자꾸 달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려지는 만큼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잘 하는 것입니다.


길을 빨리 걷거나 혹은 운동장에서 걷기 운동을 할 때에는

다리의 동선(풍대)을 주시하는 것이 알아차림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걸으면서 집중이 되면 전면에서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선원에서 경행을 할 때 시선은 좌우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2-3미터 전방의 바닥을 봅니다.

처음에는 약간 빨리 걷다가 차츰 알아차리기에 알맞게 속도를 유지합니다.

경행은 일정한 거리를 반복해서 왕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섬과 도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경행을 할 때 지나치게 천천히 걸으면 상기의 위험이 있을 수 있으며,

마음에 힘을 너무 주었기 때문에 좌선하려고 앉으면 잠이 올 수도 있습니다.

 

3) 돌아 설 때

이 때에도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1) 천천히 돌면서 발의 움직임을 모두 알아차린다.

(2) 혹은 어깨에 마음을 두고 어깨가 크게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을 알아차린다.


경행을 하면서 생긴 집중력은 좌선을 해서 생긴 집중력보다 강하여

집중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이익이 있습니다.

먼저 경행으로 어느정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다가

좌선에 들어가면 좌선에서도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잘 유지됩니다.

 

경행은 노력이 부족하여 게으르거나 졸음이 많은 수행자들에게

해태와 혼침을 극복하는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7)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수행법입니다.

 


위빠사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고행을 버리고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으실 때 사용하신 수행법입니다.

부처님께서 스승 없이 홀로 찾아내신 수행법으로,

붓다(아는 자. 覺者)라는 명호를 얻게 한 수행방법이 위빠사나입니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기 이전에 있는 모든 수행법은

마음의 일시적 안정을 얻는 사마타 수행뿐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출가를 하시고 선정수행을 하는 스승을 만나 선정수행을 하셔서

색계 4선정인 비상비비상처정까지 얻으셨지만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할 수 없음을 경험하시고 그곳을 떠나십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당시의 수행법인 고행을 6년간 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 해볼 수 있는 최고로 극심한 고행을 다 해보신 뒤에

고행도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를 줄 수 없는 수행법임을 아시고

다시 고행하는 수행방법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을 받으신 뒤 홀로 찾아내신 수행방법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방법을 통해서 연기와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신 뒤,

이 통찰지혜가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놓게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한 누진통을 얻으시고

무상정등정각(아뇩다라삼막삼보리)자  즉 일체를 아는 자,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이 수행법을 도성제 8정도로

그 당시의 수행자들에게 직접 지도하셨습니다. 

최초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중도 수행법을 설하자

꼰단냐 비구(교진여)가 깨달음을 얻고

이어서 수많은 비구들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 당시에 이미 수많은 성자(아라한)들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비록 부처님을 직접 만나는 인연은 없었지만,

부처님의 직접 말씀하신 빨리어 경전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알 수 있고,

또 번뇌를 소멸하는 4념처 수행법을 설하신 대념처경을 만나서

부처님의 수행법을 알 수 있고,

또 부처님의 수행법을 지도하실 수 있는

큰 스승들이 계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전통을 이어받은 상좌부 전통의 수행법이

우리나라에 남방불교/초기불교/테라와다불교 등의 이름으로 들어왔고,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장소도 전국적으로 여러 군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 다 공개되어 있고 열려있습니다.

 

누구라도 해탈 열반에 대한 믿음을 내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노력을 꾸준히 한다면,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해탈 열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그 길을 향해 묵묵히 가는 사람들입니다.



8) 위빠사나 수행은 어떤 경전에 근거한 수행인가요?

 

 

위빠사나 수행은 붓다께서 직접 설하신

빨리어 경전인 대념처경(마하사띠파타나 숫타)을 근거로 수행합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수많은 대승경전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에 시대적 요구에 의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에 대승사상을 첨가하여 만들어진 경전들입니다.

그래서 100%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초능력/신화적 요소의 삽입 역시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후대의 신격화로써 이해하면 됩니다.)


부처님의 원음인 대념처경 첫머리에

8정도 수행인 4념처에 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중생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아픔과 고뇌를 사라지게하고,

숭고한 길에 도달하게 하고

닙바나를 실현하게 하는 길,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

 

그는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

 

그는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

 

그는 담마에 대하여 담마를 관찰하며,

열심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상좌부 불교 경전(빨리어)으로 전해져 내려온 대념처경에 근거한 수행법입니다.

그동안 금강경을 비롯한 수많은 대승경전들은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초기 불교의 경전들은 접할 기회가 없어서 대념처경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 전해진 경전이며

디가니까야(장부경전)에 속해있습니다.

실제로 초기불교 경전들을 읽어보면

대승불교 경전에서 듣지 못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게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빨리어에서

바로 우리말로 번역된 초기 경전들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이런 초기 경전들을 읽을 수 있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9)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란 무엇인가요?


부처님께서 대념처경에 말씀하신 

네 가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이란

신수심법 4념처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해야하는 대상이

현재 자신의 몸(身)과 마음(心)인데

그것을 아는 것은 느낌(受)을 통해서입니다.

이렇게 느낌으로 알게 된 대상을 단지 알아차릴 대상인 법(法)이라고 받아들여

그 법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4념처에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vipassna(위빠사나)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몸과 마음을 벗어난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딪치는 밖의 대상인 6경에 마음을 두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현재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외출하기 위하여 대문 밖을 나갈 때 피부에 닿는 바람에 대하여

현재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시원하다고 좋아하거나 춥다고 싫어하면

사실 그대로 그런 정신적 현상이 있다고 아는 것이

이 순간에 수행자가 해야 할 알아차림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하면 피부에서 느끼는 느낌은

단지 지수화풍 4대의 물질적 현상이라고 지켜볼 수 있게 되고,

그동안 마음이 날씨에 대하여 좋다거나 싫다는 마음이 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현재의 상황을 사실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날씨에 대하여 번뇌를 일으키고 그 마음은 다음 순간의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날씨가 좋으면 더 좋은 날씨를 즐기고 싶어 놀러가고 싶고,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짜증을 내게 됩니다.

수행자는 이때라도 날씨에 반응한 자신의 상황을 다시 알아차리면

마음은 알아차림에 의해 다시 평온해집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어느 단계에서라도 하기만 하면 됩니다.

알아차림은 그 순간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

더 이상 대상에 휘둘리지 않게 합니다.

 

이런 알아차림의 힘이 모이면

부처님께서 대념처경에 말씀하신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내게 됩니다.



10) 위빠사나는 무슨 뜻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위빠사나는 무슨 뜻이며,

대념처경에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으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낸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위빠사나( vi + passana)라는 말은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 빨리어 입니다.

빨리어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언어입니다.

그 당시에 보통 사람들의 언어는 빨리어였고,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만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였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법을 만날 수 있도록

빨리어로 법문을 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빨리어로 법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불교 경전(부처님의 원음)들은 빨리어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부처님의 말씀을 중국 한자(漢字)를 통하지 않고

빨리어에서 직접 우리나라 언어로 번역하여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바른 불교, 부처님의 직설가르침, 부처님 원음의

제대로 된 불교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이 성숙되어있습니다. 


4념처  위빠사나 수행은 4념처라는 네 군데 알아차릴 대상을

사마타가 아닌 위빠사나로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vi 는 '분리하다' '여러 가지' 라는 뜻이 있는데

'여러 가지'에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뜻,

즉 삼법인을 의미하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passana는 통찰한다. 꿰뚫어 본다. 직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을 분리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네 가지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여러 가지 면(무상, 고, 무아의 측면)이 통찰된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로 생긴 지혜를

있는 그대로 직관하여 본 통찰지혜라고 합니다.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4념처)이란

지금 이 순간, 즉 현재의 몸과 마음인데,

이것은  느낌으로 알게 되고, 그 느낌을 법(담마, 마음의 대상)으로,

알아차릴 대상으로 받아들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직 현재의 몸과 마음이 대상이 되며,

그 이외에 다른 대상들은 일차적인 알아차릴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즉 이 순간의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이란 네 가지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분리해서

현재의 마음이 직접 알아차리는 마음의 행위입니다.

즉 알아차림을 하고 또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것이 4념처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몸과 마음이

실제로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그 실상을 바르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이해는 지금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라고 집착했던 잘못된 견해를 깨주는 것이며  

그 결과로 자신에 대한 잘못된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에 대한 욕망과 고뇌를 버리고 지내게 됩니다.

 

잘못된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자유와 해탈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와 수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인간을 모든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친 종교는 불교이며

그 수행법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가르친 위빠사나 수행법뿐입니다.



11)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깨어있는 알아차림입니다.

 


깨어있는 알아차림이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여 "할 때 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때는 움직임을,

말을 할 때는 말하고 있는 것을,

상대의 말을 들을 때는 상대의 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이나 의도가 올라오는지를,

음식을 먹을 때는 먹으면서 느끼는 것들을,  

몸의 움직임이 없을 때는 호흡을,

무엇인가를 생각을 할 때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플 때는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픈 것에 대하여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물을 보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을 ,

미운 사람을 볼 때 미운 마음이 올라와서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을,

그리고 좋아하거나 싫어서 가슴이 두근거리면

두근거리는 느낌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결국 알아차림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하나의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새로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에 마음을 겨냥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직관한다는 것은

현재의 대상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나 판단 분별없이,

아주 객관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이 화면을 주시하듯이

현재를 그냥 알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주자주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하고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알아차림은 수행자가 항상 지니고 다녀야할 필수품입니다.

그래서 선원에서는 어떻게 알아차림을 하며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지 배우고 직접 실천해보고 경험해 보는 곳입니다.

이런 실천 수행으로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일상에서 만나는 대상에 대하여 휘둘리지 않고

알아차릴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잠깐 동안이라도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 마음에 번뇌가 없고 평온한 상태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평온한 상태는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바탕이 되며,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성품을 직관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직관에 의한 통찰 지혜는 몸과 마음에 실재하는 성품인,

계속 변화하고 생멸하는 것으로 무상(無常)하고,

잠시도 편안함이 유지될 수 없도록 조건지어진 것으로 괴로움이며(),

그 무엇도 나의 것이라고 붙잡을 만한 실체는 없다는 무아(無我)라는

세 가지 특성을 알게합니다.


수행자가 말이나 글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직접 무상, 고, 무아를 인식하게 되면

자신(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에 대한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에 대한 갈애나 집착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지혜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와 집착이 줄어들면 마음에 걸릴 것이 없고,

또한 집착이 줄어든만큼 자유롭고 평온해집니다.


이처럼 알아차리는 힘은 그동안 쌓아놓은 업력으로

깊은 곳에 잠재된 탐진치가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릴 수 있게 하고,

현재에 새로운 불선업을 짓지 않게 해서

과거의 업장을 올라올 때마다 소멸해갑니다. 

그런 행위의 결과로 궁극에 가서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으로

8정도를 닦아가는 도성제 수행입니다.

 

알아차림은 알아차린 만큼 지혜를 물고 다닙니다.

알아차림을 한번 할 때마다 그 바탕에 지혜의 종자를 심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할 일은 알아차림 뿐입니다.

언젠가는 종자가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그는 정도(正道)를 가고 있는 것이며,

궁극에는 깨달음으로 열반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놓치면 괴로움을 만드는 길로 가는 것이며

몸과 마음은 평온이나 자유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이며.

이는 곧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12)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 이유


지금 양손을 합장하고 손바닥의 느낌을 한 번 알아차려보세요.

그냥 편안하게 마음을 손에 두고 손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느껴보세요.

아마도 따뜻한 열기나 부드러움, 딱딱함, 촉촉함,

떨림 등의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손에 두고 손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마음에는 어떤 근심걱정도 없었을 것입니다.

 

수행자가 마음을 현재의 몸과 마음에 붙여두고 있으면,

마음은 천지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못해 번뇌거리를 끌어들이지 못합니다.

즉 현재를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욕심 성냄 자존심 등이 일어날 틈이 없어

마음이 번뇌를 쉬고 조용해지며 평온해집니다.


그래서 수행의 시작은 마음을 몸에 붙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감각기관(6근 = 눈, 귀, 코, 입, 몸, 뜻 = 眼耳鼻舌身意)은

밖으로 나가서 감각대상(6경 = 형상,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과 만나면,

들어올 때는 어김없이 좋고, 싫고, 나에게 해롭고, 이롭고 라는 판단 분별에 의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고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에는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마음은 곧 정화되고 고요해져서 몸과 마음의 실재하는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알아차림이며,

이런 알아차림의 힘이 모이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의 통찰지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번뇌로부터 멀어지려면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항상 주의를 집중해서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마음이 고요해져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 전도몽상으로부터 떠나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로 구경에는 열반에 도달합니다.

 

이런 실천 수행법이 반야심경에서

"보리살타 의(依) 반야바라밀다

고(故),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으로 표현된것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이며,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바른 길이며,

열반을 얻을 때까지 지속해야하는 선한 마음의 작용(淨心所)입니다.

 

언제나 알아차림(sati. 사띠)이라는 티켓을 들고 다니면,

불사(不死)의 문인 열반(닙바나. 니르바나)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게 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놓치면

그 순간 몸과 마음은 번뇌로 물듭니다.

 

수행은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일으키는 번뇌를 알아차려서,

현재 지금 여기에서 번뇌가 없는 깨끗한 마음을

한 순간 한 순간 채워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최고의 선한 업이 됩니다.

이것이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3) 실제로 알아차림을 할 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할까요?

 


수행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의 대상(오온.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 없이, 청정하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차려야 하는데,

이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바른 마음가짐일 때 가능해집니다.


바른 마음가짐이란

수행자의 마음이 욕망이나 성냄으로 들떠 있지 않고,

안정되고 편안한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들떠있으면 좋은 현상을 바라거나

싫은 현상을 없애려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런 욕구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법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타난 현상을 법으로 수용하며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마음 작용에 의해

대상의 성품을 통찰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현재를 조용히 지켜볼 수 없게 하고,

또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아무 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편안하게,

단지 현재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마음만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마음가짐으로 수행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바라지 않고 살아본 적이 없었고,

마음은 항상 들떠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행조차도 빨리 좋은 성과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시작하므로

마음이 들떠서 망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망상이 많다거나 호흡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수행이 잘 되지 않는다고 다시 화를 내면서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수행은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낙담합니다.


누구나 처음 얼마간은 불가피 이런 들떠있는 과정들을 만나게 되고,

이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다시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는 훈련이 시작됩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이 수행자에게는

오히려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라도 알아차림을 하면

수행자로서 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즉 어떤 마음상태이든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림에 의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현재의 마음을 먼저 보아주고 시작해야하며,

수행 중에도 자주 현재 무슨 마음인지

자신의 마음상태를 보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놓치고 들뜬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바른 마음가짐을 만들고, 

이 마음으로 현재의 몸과 마음을

새로 알아차림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14) 일상의 알아차림이란 무엇인가?


수행은 선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보통 하루15시간 이상 활동을 하면서

하루 한두 시간 좌선과 경행으로 수행이 빠르게 발전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좌선과 경행을 할 수 없는 일상 생활에서도

알아차림을 해야 수행이 발전합니다.

 

다행스럽게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릴 대상이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므로

누구나 수행을 할 수 있는 도구는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려는 의도만 일으키면

일상 생활이 바로 수행하는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의 알아차림은 현재 일상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깨어서 알고(보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몸으로 어떤 행위를 할 때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면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알고,

차를 마실 때는 차를 마시는 것을 알고,

말을 할 때는 말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알면서 행위를 하지, 어떻게 모르고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을 현재에 두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행위를 하고 삽니다.

나중에 "왜 그때 그런 말과 행위를 했는지! "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합니다.

이것은 알아차림이 없이 한 행위로 온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차를 한 잔 마실 때도,

손에 찻잔을 들고 입에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있는데도,  

마음은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계획을 세운다면,

마음이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깨어있지 못하고

미래로 달려가서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때라도 이 상황을 다시 알아차려 마음을 현재로 가져옵니다.

그래서 찻 잔을 잡고 있는 손의 느낌을 알아차리거나,

입안에서 느껴지는 차의 맛을 알아차리거나,

아니면 이미 차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한 느낌을 알아차려야

마음이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날 때

일어나는 과정을 마음이 알아차릴 수 있고,

세수할 때 세수하는 과정의 움직임이나 느낌들을 알아차리며,

식사할 때 손의 움직임, 음식 맛의 변화,

음식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

빨리 먹으려는 마음 등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발걸음을 알아차리고,

그러다가 직장의 일이 떠오르면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발걸음을 알아차립니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자신이 말하려는 의도와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직원들의 못마땅한 언행에 싫어하는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의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당연히 말이나 행동의 실수가 적어지고,

항상 바르고 가장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없으면 

하루 종일 자신의 느낌과 생각이 시키는 대로 

탐심과 성냄을 일으키고,

즉시 그대로 언행으로 표현하고,

결국 번뇌의 원인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게 됩니다.

 

그 외에도 일상적으로 하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모든 행위(몸의 움직임)와 

접촉되는 수많은 대상에서 나타나는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도(行)의 마음(識) 등을 알아차리면

이것이 일상 생활을 수행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자가 현재를 알아차리려고 노력만하면,

하루 종일 업무와 수행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상에서 알아차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알아차린 결과로

즉시 언행이 바르게 되기를, 화가 안 나기를,

욕심내지 않기를, 즉시 번뇌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알아차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본다(안다. 느낀다)는데 의미를 두어야합니다.

이렇게 현재를 자주자주 보아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번뇌가 적어지는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이지,

한두 번의 알아차림으로 그 자리에서 즉시

자신의 행동이나 마음의 습관이 아주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은 그동안 자동적으로 욕심내고 성내고 살았던 마음의 습관을

관용과 자애로 바꾸어가는 과정인데,

처음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수행을 시작하면서

즉시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수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라는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한다면

이미 현재의 마음상태가 바라는 마음에 의해 들떠있어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의무는 "그 무엇도 바라는 것 없이"

현재를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뿐입니다.

수행의 좋은 결과는 조건들이 성숙되면 저절로 나타납니다.

바란다고 빨리 오는 것이 아니라 바라면 오히려 더 늦어집니다.

그냥 편안하게 현재를 알고, 알고....를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실제로 선원에서 좌선이나 경행으로 알아차림을 하여,

일상에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하게 되면

그는 매사에 탐진치를 덜 일으켜

자신의 삶이 평화롭고 안정되며 지혜롭게 변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주자주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고,

직접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생각으로만 알아차려야지 하고

실제 알아차리는 행위가 없다면

이는 망상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이때라도 현재 생각만 한 것을 알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하고

현재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면

다시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방법은 좌선이나 경행시간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15)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반야바라밀을 닦는 행입니다.

 

우리나라 불자라면 누구라도 항상 읽는 경전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반야심경)입니다. 

 

우리말 반야심경에

"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고 시작합니다.

  

반야심경 중반부에

"보리살타 의(依) 반야바라밀다

고(故),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依) 반야바라밀다

고(故), 득(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말 반야심경에서는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라고 나옵니다.

 

그럼 여기서 관자재 보살이 행한 "반야바라밀다"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는

 "반야바라밀다"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처음 불교에 입문하여 반야심경을 외울 때

여기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다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지만

그냥 지혜바라밀이라는 것밖에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배우면서

반야심경에 나오는 반야바라밀다는

현재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리는 동안 그에게는

어떤 욕망이나, 괴로움, 불만족이 일어나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알아차림(念. sati. 사띠)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마음에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순간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마음에 때가 끼지 않는 깨끗한 상태로,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이라는 괴로움이 없는 순간이 됩니다.


이것은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현재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에 다른 번뇌가 들어올 틈이 없고

그 결과로 저절로 계율을 지키게 됩니다.

 

계율을 지키면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

현재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생겨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인 무명과 갈애가 소멸되어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다는

4념처에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지혜 수행이라고 하며,

6바라밀 중에 반야바라밀은 통찰 지혜를 닦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또한 반야심경 시작 부분에도 "조견 오온 개공 도 일체 고액"이 나옵니다.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아 일체 고통과 액난을 건넜다”라는 말입니다. 

즉, 오온을 있는 그대로 비춰보았더니

오온에 실체가 없는,

연기되어진 공(空)인 것뿐임을 깨달아

모든 고통과 액난을 건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오직 오온에서만 반야지혜를 확인할 수 있고,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모든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항상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오온)입니다. 

 

이제 통찰지를 계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알아차릴 대상이 왜 몸과 마음이어야 하는지, 

또 마음을 왜 항상 현재의 자신의 몸에 정확하게 겨냥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 "조견 오온 개공 도 일체 고액"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매 순간 찰나마다 변하는

자신의 몸과 마음(오온)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뿐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에 '반야바라밀다'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반야바라밀다는 6 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중

지혜를 완성하는, 지혜바라밀인데,

바로 오온이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다'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할 때는 

삼세 제불이 의지해서 닦았다는 '반야바라밀다'를 닦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일체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를 얻어

길고 긴 생사의 윤회를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16) 위빠사나 수행은 최고의 선업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 경행(행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 즉,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움직일 때는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움직임이 없을 때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거나

몸의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는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마음을 집중하여,

어떤 마음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지 알아차리면서 행위를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은 깨어 있는 순간으로 가장 깨끗한 마음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를 하는 그 마음은

탐진치가 없는 관용, 자애, 지혜의 선한 마음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선심은 선업으로 이어지며,

지금 행한 선업은 미래에 선한 과보라는 결과를 만듭니다.


이런 선업의 힘들이 모이면

점차 불선한 일은 하지 않게 되어 계율을 지키게 되고,

세간에서 부딪치는 좋고 나쁜 일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합니다.

이 평온한 마음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그들의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법을 보는 통찰지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로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어

최고의 행복인 열반을 향해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선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잠깐이라도 알아차림을 놓친다면

이미 마음은 ‘나’라는 어리석음을 바탕에 깔고

대상과 부딪치고 쉽게 욕망과 성냄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즉시 불선업을 일으키고 불선 과보를 예약합니다.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항상 원하는 마음에서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얻은 것이 영원하지 못하여 사라질 때는 더 큰 괴로움이 됩니다.

때로는 얻자마자 다시 더 큰 것을 원하는 욕망이 일어나 괴롭습니다.

만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가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마음, 바라는 마음이 있는 한 항상 괴로움은 따라다닙니다.

 

이때  이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탐진치로 반응하여 또 다시 괴롭습니다.

즉, 알아차림의 부족으로 탐진치를 행하는 현재도 괴롭고,

그 과보가 익어서 나타나는 미래도 괴롭습니다.


수행자는 이때라도 알아차림을 놓쳤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려,

다시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불선업에서 최고의 선업으로 바꾼 것입니다.

 

마음챙김=알아차림으로 시작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린 순간 바라는 마음이 없이 아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고

알아차림을 한 결과로 오는 미래도 선업의 과보를 만나므로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마음은

그 순간에도 행복하고 미래도 행복한

최고의 선업을 심는 마음입니다.



17) 와선은 이렇게 해보세요.


** 누었을 때 알아차리기(臥禪) **


와선이란 수행자가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즉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과, 저녁에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누운 채로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잠들기 전에 알아차리는 것은

하루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중요한 순간이며,

이런 알아차림을 통해 숙면을 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잠을 자기 전에는

큰 욕망이 없기 때문에 집중을 하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누우면 몸과 마음이 최대한으로 이완되기 때문에

호흡이 잘 나타나서 호흡을 알아차리기가 쉬워집니다.


매일 이렇게 잠자리에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수련이 되면,

이 생에서 마지막 죽을 때, 즉 정신이 혼미해질 때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그 마음(사몰심)이 원인이 되어 새로 일어난 마음(재생연결식)이 맑아집니다.


새로운 생으로 나타나는 다음 생은 항상 사몰심을 원인으로 일어난

재생 연결식의 상태와 같은 파장의 몸과 마음을 만들어 새로운 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의 마음가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마음은 새로운 생의 밑그림을 만드는 마음이므로

밝게 깨끗하게 깨어있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 혼미하지 않는 힘을 키우는 것이

잠들기 전의 알아차림 수행입니다.

그래서 이생에서 위빠사나 수행은

다음 생에 대한 가장 훌륭한 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아침에 일어날 때 알아차리기

(1) 누운 자리에서 먼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2) 그리고 배의 일어남, 꺼짐의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누어있을 때에는 호흡이 제일 잘 보입니다.

잠이 깨자마자 마음을 보면 벌써 근심걱정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벌써 마음이 미래로 달아나 있는 것입니다.

이때 이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주고

바로 호흡을 잠깐이라도 알아차림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그날 하루가 편안합니다.

하루의 시작이 좋으면 이 좋은 파장이 다음 순간으로 연결되어

하루의 일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2) 저녁에 자기 전에 알아차리기

(1) 자리에 누운 상태로 먼저 현재의 마음을 한 번 알아차립니다.

(2) 그리고 바닥에 닿아있는 몸의 상태를 그대로 죽 알아차려 내려갑니다.

(3) 그리고 배의 일어남과 꺼짐의 호흡을 알아차리다가 잠듭니다.


누워서 먼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낮 동안에 가졌던 번뇌의 마음을 알아차려

잠자는 마음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꾸어주는 작업입니다.

이렇게 선한 마음으로 와선을 하면 금방 잠이 드는데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잠이 들면 숙면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알아차림에 의해 마음에 번뇌가 없는 맑은 상태에서

잠이 들기 때문에 악몽을 꾸거나 선잠을 자지 않게 됩니다.


만일 불면증으로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잠을 못자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일어나 앉아서 좌선을 합니다.

좌선을 하다가 졸음이 오면 그때 자연스럽게 잠을 자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은 잠이 오지 않으면,

지금 잠을 못자면 내일 힘들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고,

이 두려움이 자꾸 근심걱정을 일으키고,

점차 생각에 빠져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두려운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 주고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항상 현재의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주어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잠을 자는 동안에는 할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매 찰나의 변화가 알아차릴 대상인데,

잠을 자는 상태는 잠재의식(바왕가)의 흐름이 이어질 뿐,

6근과 6경의 촉에 의해 일어나는 오온의 작용이 없으므로 알아차릴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숙면 중에는 현재의 오온을 깨어서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숙면을 취하면서 그것을 깨어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수행자가 낮 동안의 알아차림이 잘 이어져 의식이 명료하게 깨어있어

밤에도 잠이 들지 않고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계속 알아차리는 경우는 있습니다.

실제로 수행센터에서 하루 종일 알아차림만 하는 집중 수행을 하면

밤에 누워있어도 졸음이 오지 않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 기상시간까지 누워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잠을 자지 않아도 아침에 몸이 가볍고 피로가 다 풀려있습니다.

밤새 알아차림을 이어갔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작용으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한 상태로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4개월간 주무시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하루 네 시간은 주무셨다고 합니다.

수행자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는 될 수 있으면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계속 이어가도록 노력을 해야 하지만,

밤에 잠을 자면서 잠 속에서도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18) 수행을 잘 하려고 하면 안 되나요?


네, 그렇습니다.

수행은 잘하려고 하기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쉬지 않고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수행을 잘하고 싶어 하지만

아직 알아차리는 힘이 부족하여 잘 안된다면,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서

잘 안 되는 것을 수용하는 마음으로 

아무 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자기의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른 마음가짐으로 알아차리다 보면,

점차 알아차리는 힘은 더 쌓여 갈 것이고,

나중에는 저절로 알아차림을 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떤 일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내가 무엇인가 되겠다는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수행도 탐진치를 소멸하는 깨달음과

열반이란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한다고 하면서도

그 안에는 내가 빨리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라는 마음을 바탕에 깔고 수행을 하면

수행이 목표를 향해 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조금 하고나서 얼마나 잘 되었는가 그것을 판단해보고

잘되었으면 내가 수행을 잘했다고 집착하고

안 되었으면 내가 수행을 못했다고 자책을 합니다.

또한 다른 수행자와 비교하면서

자신이 남보다 더 잘 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있으면

마음에 탐심이나 성냄의 번뇌가 생겨 수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미 마음이 미래의 결과에 가 있어 현재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마음이 들떠서 계속 망상만 할 뿐이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그냥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바른 마음가짐입니다.

 

수행이 잘 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자기 능력 이상을 바라는 것으로 탐심입니다.

적은 노력으로 큰 결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는 만큼 수행이 잘 안되면

성냄이 일어나고 수행을 포기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탐지치를 소멸하는 수행을 하면서

바로 탐심과 성냄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이런 탐심과 성냄도

그 순간에 알아차릴 대상인 법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수행이 안 되면

안 된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알아차리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을 했으면

망상을 했다고 다시 알아차리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알아차림이 잘 이어지면

잘 이어지고 있다고 있는 그대로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잘 되는 것이 나의 것이라고 좋아하고 붙잡는 순간

이미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 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수행을 하면

수행자의 마음이 안정되어 오히려 수행이 잘 됩니다.

 

이런 마음의 연습은 일상생활에서도

그냥 일을 할 뿐, 결과를 바라는 마음을 줄일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바라는 마음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괴로움도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잘하려고 하기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꾸준히 알아차리려는 마음을 내고,

자신이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알아차리는 것으로 수행자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 만큼의 결과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타날 준비를 하며 익어가고 있습니다.

조바심을 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수행자는 좋은 씨앗을

이 자리에서 자주자주 많이 심기만 할 뿐,

지금 좋은 열매가 내 앞에 떨어지길 바라지 않습니다.



19) 괴로움을 없애려고 수행을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수행을 하면 괴로움이 없어지기는 하지만

수행자가 괴로움을 없애려고 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괴로움은 법(法)입니다.

우선 일차적으로 괴로움이 있음을 확인하려고 수행해야 합니다.

괴로움을 알아차림으로 철처하게 확인하고,

충분히 괴로움을 직접 경험하여야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지혜가 생기고, 

그런 연후에 괴로움이 될만한 업을 짓지 않아서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보통은 수행을 하면 괴로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수행이란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확인하고,

앞으로 괴로움으로 되돌아 올만한 원인을

지금 이 순간에 심지 않는 지혜, 마음의 힘을 만드는 것이 수행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하면 삶에서 오는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오직 행복만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 알아차리면 괴롭지 않게 되고,

아플 때 알아차리면 아픔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알아차려도 통증과 망상은 계속되고,

일상생활에서도 계속 욕망과 성냄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이 바라는 것 없이, 없애려는 것 없이

현재를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려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잊고,

빨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대로 된 바른 알아차림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울 때 괴로움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말고,

그냥 괴로움이라는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괴로움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현재 느끼는 괴로움이 없어지거나 더 진행 되는 것은

여러 원인과 조건이라는 인(因)과 연(緣)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일 뿐,

수행자가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나타나는 대로 그것을 지켜볼 의무만 있습니다.


어떤 괴로움이든지 그것은 일어날만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것으로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가 사라질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연기(緣起)의 성품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잠시도 머물지 않고 생멸하며 변화하는 것에서 

제행의 무상(無常)한 성품을 확인하며,

실제로 어떤 변하지 않는 존재가 괴로움을 주거나

괴로움을 없어지도록 조정하지 못한다는

제법의 무아(無我)의 성품 등을

마음챙김=알아차림으로 직접 확인해야

그때부터 괴로움에서 벗어날 조건을 만드는 힘이 생깁니다.


12연기에서 보듯이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근본무명과

매순간 대상과 촉하면서 일어나는 갈애에 의해

괴로움의 수레바퀴가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이런 원리를 알아차림을 통하여 확인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확실한 방법을 실행으로 옮겨야

비로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진정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매순간 깨어있는 알아차림(正念)으로

몸과 마음을 위빠사나(분리해서 통찰함)해서

매순간 일어나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느낌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를 일으켜

점차 무명을 제거해야 합니다.

즉, 정념(正念)으로 시작하는 8정도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자가 괴로움을 알아차림으로 직면할 때만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일 괴로움을 없애려하고,

빨리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괴롭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그것을 그냥 알아차리십시오.

 

몸과 마음이 있는 한 괴로움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지금 느끼는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이라고 붙잡지 말고,

단지 법(알아차릴 대상)이라고 받아들여 수용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더 이상 괴로움의 원인을 심지 않고,

괴로움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고,

괴로움의 성품을 확인한 지혜로

괴로움조차도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확인합니다.

 

이렇게 해서 괴로움을 법으로 보고 붙잡지 않으면

이제 괴로움에 휘둘리지 않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 괴로움 또한 법이라고 느긋하게 받아들이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런 마음챙김=알아차림의 결과는 지금까지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알고 있는 가장 잘못된 견해를 제거해 주며,

'나'의 실상을 바르게 안 지혜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놓게 해줍니다. 

 

이렇게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근본 무명에서 벗어나 수행자는 괴로움 원인을

지금 여기에서 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현재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깨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원인으로 일어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는 시작은

현재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법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이 방법만이

진실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道)이라고 밝혀놓으셨습니다.

 

수행자는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길을 따라

한발 한발 걸어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확인해 나가는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고,

모든 번뇌를 소멸할 수 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바른 불자(佛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명상원 교재를 수정 재 정리 했습니다]

출처:http://cafe.daum.net/chob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