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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7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1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불교가 몸을 분석하는 종교인 것은

몸이 여러 가지 물질로 구성된 무더기들의 모임인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알아차릴 때만이 나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불교가 마음을 분석하는 종교인 것은

마음이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흐르고 있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갈애가 끊어져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불교가 몸과 마음을 분석하는 종교인 것은

몸과 마음으로 생긴 번뇌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답을 얻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분석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걷는 것, 또는 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걷는 사람들을 세우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걷는 것 자체 이외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정 또는 직장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순간 걷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해도 그런 앎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하고 삽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똑같은 존재, 하나의 똑같은 개인이 과거에 있었고,

지금 현존하고, 앞으로도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상에 대하여 어렴풋한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하나의 똑같은 인격이 있었고, 지금 현존하고, 앞으로도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분석해보면 존재라는 것은 전혀 없지만,

사람들의 앎은 존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의도와 몸의 움직임 이외의 인격 또는 개인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실 몸과 마음도 존재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느낌이 있어서 아는 것이지 그 자체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의도와 움직임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믿음을 유지합니다.

 

그들의 앎은 영원한 실체의 개념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가는 것 이외에, 의도 이외에 가는 것을 관리하고 보살피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앎은 명상주제인 깜마타나가 있어서 생긴 결과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빨리어로 깜마타나는 명상의 주제를 말합니다.

 

깜마타나는 이상의 계발을 위한 조건으로 수행의 주제를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깜마타나는 지혜의 계발을 촉진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앎은 그 이상의 계발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앎이 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아니면 깜마타나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없는 앎은 알아차림의 확립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의 앎은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앎과 매우 다릅니다.

걸으면서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걷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걸음이 생길 때마다 알아차립니다.

의도와 가는 것 자체를 매번 알아차립니다.

충분한 집중력을 유지하는 한, 각 의지작용의 기초를 이루는

의도를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그냥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도가 있어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걸어갈 때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뒤에서 자신을 민다고 느낍니다.

사실 이것은 의도가 몸을 움직인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에 오는 현상입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다가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알 때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마음인

의도에 의해서 몸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도와 그 의도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현상만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의도와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그것들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걷는 행위를 면밀하게 알아차렸기 때문에 비로소 안 것입니다.

의도와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그것을 서로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가는 것이나 걷는 것에는 가려는 의도라는 원인이 있으며,

가려는 의도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는 것이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 두 가지를 각각 구분해서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수행자들이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나 수행자가 처음부터 이 의도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계속해서 집중력이 생겨야 비로소 이러한 의도가 보입니다.

 

의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서 초보수행자가 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계속한다면 어느 땐가 쉽게

이러한 의도와 의도에 의해서 가는 움직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집중력이 있는 수행자들은 의도의 연속적인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몸의 연속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압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만 생각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백만 움직임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들 조그만 움직임들이 수행자에게 하나의 큰 움직임인 것 같아 보입니다.

 

걸을 때 알아차림이 있으면 어느 단계에서 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움직임들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들이지,

모두 같은 움직임이 아니라고 아셔야 되겠습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들은 간다는 행위에는 오직 의도와 가는 것만 있고,

그 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압니다.

수행자는 존재, 인격, 인간, 걷는 나, 가는 나를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가면서 오직 이들 두 가지, 의도와 가는 것만 알아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른 수행입니다. 의도와 움직임을 면밀하게 알아차리면,

이들 의도와 움직임이 아주 빨리 오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들 의도와 움직임은 매순간 일어나는 순간에 사라집니다.

진정한 집중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이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의 앎은 완벽하고 분명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의도와 가는 것 이외에 어떤 존재도 볼 수 없을 때,

수행자는 가는 것을 사람이 간다고 보지 않고, 단지 의도와 움직임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가거나 걷는 행위에 어떤 사람, 어떤 행위자를 보지 못합니다.

의도와 가는 것이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은 조금 전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우칠 것입니다.

 

매순간 새로운 어떤 것, 새로운 마음, 새로운 몸이 일어나고 앞의 것들은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한 순간 존재하던 의도와 가는 것이 다음 순간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은 순간 적으로 사라지고, 다음 순간 새로운 의도와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매순간 마다 그것들은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의도와 새로운 움직임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그래서 항상하다고 하는 진아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과 고와 무아만 있습니다.

 

수행자는 지금 있는 것이 과거에 있는 것과 같지 않고,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있을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매순간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것은 항상 움직이고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것을 알 때 수행자의 앎은 인격이나 개체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유신견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의도와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가는 행위에서

사람이나 어떤 존재를 볼 수가 없습니다.

행동과 마음의 상태를 면밀히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비로소 존재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의 앎은 영원한 실체, 영혼 자아에 대한 인식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때만이 비로소 무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가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는 수행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원인이 됩니다.

수행자는 매순간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계속할 것이고,

최종단계의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수행자는 집중력과 지혜를 더욱 향상시킬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의 수행자의 앎이

집중력과 지혜를 더욱 계발시키기 위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정한 수행의 주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때라야 비로소 깜마타나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수행자의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잡아가는 것, 서 있는 것, 앉는 것,

눕는 것, 오직 이것만을 알아차림의 확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의 앎은 알아차림의 확립을 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명상 주제를 실천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가 가는 행위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깊게, 명백하게, 정확히 알 때,

오직 가려는 의도, 가는 것 자체만 있을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때 수행자는 누가 가는가? 가는 것은 누구의 것인가?

왜 가는 것이 일어나는가? 에 관해서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 ‘누가 가는가?’ 라고 물으면,

정답은 ‘살아있는 존재도 사람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가는 행위에서

가려는 의도와 움직임을 일으키는 바람의 요소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가는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가는가에 대한 대답은 살아있는 존재도 사람도 모두 아니다입니다.

오직 가려는 의도,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 이에 따른 몸의 갖가지 부분의 움직임에 외에

가려는 아무런 존재도 없습니다.

 

과연 가는 것은 누구의 것인가요?

가는 것을 소유하거나 가는 것을 관장하는 사람이나 권능이 있을까요?

수행자는 그러한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어떤 살아있는 존재가 가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어떤 살아있는 존재가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는 것이 살아있는 존재에 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의도와 움직임만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거기에 사람은 없습니다.

가는 것의 소유자는 없으며, 가는 행위를 관장하는 어떤 사람의 권능도 없습니다.

 

왜 가는 것이 일어날까요?

마음의 작용으로 생기는 바람의 요소가 널리 퍼지기 때문에 가는 것이 일어납니다.

수행자가 가고 싶을 때 우선 가려는 의도가 있고,

가려는 마음이 가는데 필요한 몸의 부분들의 바람이 요소를 일으킵니다.

그러고 나서 바람의 요소가 몸의 부분을 움직이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왜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다음의 세 가지 요인 때문입니다.

첫째, 가는 것을 원하는 마음,

둘째, 마음에 의하여 일어나는 바람의 요소,

셋째,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 일어나는 몸의 갖가지 부분들의 움직임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는 것들은 어떤 특별한 권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조정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도와 의도에 의해서 일어나는 바람의 요소와

바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몸의 움직임만 있을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

이렇듯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자신이 일으키고 자신이 그 결과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초월적 존재나 어떤 특별한 힘을 가진 자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오직 자신의 의지와

그 의지에 의해서 나타나는 결과만 있다는 것이 중요한 진실입니다.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되는 이유는 이 진실을 알아서

스스로 새로운 좋은 원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