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초기불교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通達無我法者 2015. 8. 9. 15:27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보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1
“대상에 집중만 하면 사마타, 대상의 특성이 파악되면 위빳사나”

2014-10-27 (월) 19:25

빤딧짜스님 | gudaero505@hanmail.com


미얀마에서 테라와다 불교를 전하러 한국에 오신 빤딧짜 스님이, 최근 행했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의 내용을 미디어붓다에 연재한다. 이 특별한 수업에 참석했던 많은 한국의 불자들은 아직도 그 지혜의 바다에서 누렸던 기쁨을 잊지 못한다. 이 기쁨을 직접 강의는 아니더라도, 미디어붓다의 독자들에게 글로 풀어 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 부디 많은 이들이 이 지혜로운 길에 함께 하기를! 이 글의 게재를 허락해주신 빤딧짜 스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잊지 않고 항상 깨어 있음으로 완벽하게 하라
Appamādena Sampādetha

 

 

-차 례-

 

첫째 날 위빳사나의 기본적인 이해
둘째 날 부처님과 위빳사나
셋째 날 법과 위빳사나
넷째 날 승가와 위빳사나
다섯째 날 삼보의 공덕
여섯째 날 12연기와 위빳사나
일곱째 날 대념처경과 위빳사나
여덟째 날 칠각지와 위빳사나
아홉째 날 무아와 위빳사나
열 번째 날 위빳사나 지혜 계발 과정
열한 번째 날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3번)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싸
아라하또: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 받으실 만하며
삼마삼붓닷싸: 사성제 진리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땃사 바가와또: 그 존귀하신 부처님께
나모: 절합니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 받으실 만하며
사성제 진리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그 존귀하신 부처님께 절합니다.

고통 받는 중생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위험 처한 중생들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걱정 있는 중생들 모든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3번)

Dukkhappattā ca niddukkhā
Bhayappattā ca nibbhayā
Sokappattā ca nissokā
Hontu sabbepi pāṇino (3번)

둑캅빳따 짜 닛둑카
바얍빳따 짜 닙바야
소깝빳따 짜 닛소까
혼뚜 삽베삐 빠니노
사두 사두 사두

 

 

 

1. 위빳사나의 기본적인 이해

 

반갑습니다. 11일 간의 집중수행 첫 날인 오늘은 위빳사나 수행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위빳사나vipassanā란 무엇인가?

 

‘위빳사나’라는 단어는 ‘위’와 ‘빳사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위’는 ‘특별하게, 특별한’, ‘빳사나’는 ‘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 지혜를 ‘특별하게 보는 지혜’라고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영어로 말하면special view라고 할 수 있고, 번역하면 insight라는 말을 쓸 수가 있습니다. 아주 깊이 꿰뚫어 봄, 이것이 위빳사나의 의미입니다.

 

특별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을 세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겠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나, 독립적인 하나의 ‘나’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가 생기면 ‘무상하구나, 영원하지 않구나.’라고 바르게 알게 됩니다. 그 무상을 볼 수 있는 지혜를 위빳사나 지혜라고 합니다.
 
또한 일반 사람들은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고 그것을 행복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면 그 모든 것이 고통임을 압니다. ‘이 몸과 마음,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고 하는 오온이 진짜 고통스럽구나, 이 생이 고통스럽구나, 태어남이 고통스럽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이것을 또한 위빳사나 지혜, 특별한 봄이라고 합니다.
 
특별하게 본다는 것의 세 번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태어날 때의 ‘나’가 지금의 ‘나’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어서 다음 생까지, 이 몸이 죽어도 영혼은 다음 생까지 간다고 보는 것이 ‘아我’입니다. 세상의 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모두 이 ‘아我’입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무아無我’를 가르치십니다. 일반 사람들은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착각하여 나, 아我, 자아가 분명히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행하여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면 이것이 사견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위빳사나를 특별한 봄, 특별한 앎, 특별한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 ‘위빳사나’를 또 다른 측면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위’를 ‘여러 가지’로, ‘빳사나’는 ‘봄’, 그러므로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수행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꿰뚫어 보며 ‘아, 이 몸과 마음이 무상·고·무아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이 몸과 마음,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 즉 물질과 정신을 꿰뚫어 봄으로써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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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온 빤딧차 스님의 법문 장면.


 
 우리는 왜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되는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어서 몸과 마음의 힘을 엄청나게 쏟아 부으면서 노력합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노는 것, 자는 것, 먹는 것, 남자와 여자가 좋아하는 것…. 이것은 즐겁긴 하지만 완전한 행복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고통의 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행복이란 다시 고통으로 돌아가는 한계가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완벽한 행복, 완벽한 자유, 고통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행복.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최종적인 행복을 알려 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번뇌입니다. 망가지고, 뜨거워지고, 타는 것, 그것이 번뇌의 원래 의미입니다. 우리한테는 원죄가 없습니다. 번뇌가 있을 뿐이지요. 그 번뇌를 제거해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왜 우리가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지 바로 답이 나오지요. 위빳사나는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법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지혜를 키우는 일입니다. 지혜가 낮은 사람은 괴로울 수밖에 없고, 지혜가 높을수록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지혜, 바른 견해가 필요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사실을 바르게 알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은 어떻게 하는가? 바로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숨을 들이쉬고 있으면 들이쉬고 있음을 알고, 숨을 내쉴 때 내쉬는 것을 그대로 관찰하여 아는 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관찰’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면, 한국에서 지법(止法), 관법(觀法)이라고 하는데, 지법은 사마타이고, 관법은 관찰,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위빳사나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수행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대상 하나에 마음을 집중시킨다면 사마타입니다. 마음을 통제하여 다른 대상은 다 무시하고 대상 하나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모두 사마타입니다.
 
그러면 위빳사나는 어떤가. 위빳사나는 집중이 목적이 아니라 지혜가 목적입니다. 이렇게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사마타는 집중 위주이고 위빳사나는 지혜 위주입니다.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를 같은 대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똑같이 호흡을 관찰할 때 사마타 수행자는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호흡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아요. 그러나 위빳사나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여 그 특성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것, 움직이는 것, 닿는 것, 부드러운 것……. 이러한 사실들, 호흡의 변화 등을 파악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자가 호흡을 본다고 하면 그 호흡이 따뜻하거나 차가운 것, 센 것, 약한 것, 그리고 들이쉬는 것도 들이쉬고 싶은 마음 하나, 들이쉬는 호흡 하나, 내쉬고 싶은 마음 하나, 내쉬는 호흡 하나, 이렇게 하나하나 변하는 과정을 파악합니다. 물질과 정신의 특징, 본성을 파악하고 그 물질과 정신의 특징들이 매순간 앞뒤가 다르게 계속 변화하는 그런 사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사마타는 그런 것이 필요 없고 오로지 마음이 호흡에 있으면 됩니다. 이제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간화선을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에 집중만 하고 있으면 사마타, 대상의 특성, 사실이 파악되면 위빳사나입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에서 벗어나는 수행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면 할수록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계속>

 

 

“수행은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2
“수행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부처님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것”

2014-10-31 (금) 18:02

빤딧짜스님 | gudaero505@hanmail.com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은 네 가지입니다. 한국어로 말하면 사념처인 몸(신)·느낌(수)·마음(심)·법(법), 이것은 곧 몸과 마음이고 다른 말로 하면 색·수·상·행·식, 오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상이 다른 것이지 수행법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한 사람이 사마타식으로 했다가 위빳사나식으로 했다가 그렇게 수행 방법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한 시간 만에 바꿀 수도 있고 5분 만에도 바꿀 수 있어요. 5분 사이에도 사마타를 하다가 위빳사나로 바꿔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빳사나는 대상의 특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 몸과 마음의 특징, 본성을 파악해야 위빳사나입니다.
 
일단 처음에 우리가 시작할 때는 호흡을 보거나 배를 보라고 합니다. 아니면 자세를 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는 것을 관찰하는 거지요. 서 있으면 서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것을 관찰하고, 걷고 있으면 걷고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세를 관찰하고, 호흡을 관찰하고, 배를 관찰하고, 여러 가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마타는 호흡을 보자면 아침에 깰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호흡입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호흡, 대변 소변을 보면서도 호흡이지요. 그것이 사마타식입니다. 위빳사나는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을 봅니다. 지나가는 것은 벌써 지나갔습니다. 미래는 아직 안 왔어요. 지금 바로 이 순간, 1초 정도만 열심히 집중하면서 관찰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내 마음이 아는 것을 바로 뒤에서 내가 관찰하는 것, 그러므로 위빳사나는 관법, 관찰입니다. 관찰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내가 인식한 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진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수행은 잊지 않으려고,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행의 올바른 노력이라는 것이 몸의 겉모양, 자세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호흡을 관찰하면 호흡을 놓치지 않고, 배를 관찰하면 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이 어떤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바로 바로 놓치지 않고 바르게 알려고 하는 것, 마음이 무엇을 인식하면 바로 뒤에서 따라가며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순간순간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정진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정진, 바른 노력이란 잊지 않도록,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가? 내 마음이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바른 노력, 바른 정진입니다. 그렇게 놓치지 않도록, 잊지 않도록 노력하면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잊지 않음이 바른 사띠입니다. 한국에서는 알아차림, 마음 챙김, 마음 새김 등으로 번역합니다. 원래 부처님 말씀 그대로의 사띠는 주의, 조심, 조심스러움, 주의 깊음, 잊지 않음, 그런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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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딧짜 스님의 법문 모습. 사진=미디어붓다 DB

 

 

그래서 호흡을 볼 때에도 조심스럽게 주의 깊게 보고, 놓치지 않도록 봐야 합니다. 움켜쥐지 않으면서 봐야 하고, 깨어 있으면서 봐야 하지요. 그 깨어 있음을 한국말로는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바른 사띠가 생기면 대상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사띠라는 것이 잊지 않음, 즉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들이쉴 때 들이쉼이 마음속에 있고, 내쉴 때 내쉼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금 마음속에 화가 나면 마음이 화남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졸린다면 졸림을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대상을 가지는 것을 사띠라고 합니다. 사띠는 마음속의 대상을 분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수행을 어떻게 하는가? 바른 노력, 바른 사띠로 합니다. 바른 노력이 있어야 바른 사띠가 있습니다. 정정진, 정념. 그 다음이 바른 집중, 정정正定입니다.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가 있으면 바른 집중이 생깁니다. 바른 집중이란 마음이 그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딱 붙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호흡을 보면 호흡 외에 다른 것은 거의 모릅니다. 소리를 관찰하면 그 소리에 집중되는 것이지요.
 
사마타식으로 집중해도 집중이고 위빳사나식으로 집중해도 집중인데 그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마타식으로 집중될 때에는 오직 이 소리 자체에 마음이 딱 고정되어 있습니다. 위빳사나식으로 집중될 때는 그 소리의 강함, 약함, 하나 다음에 하나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른 집중이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바른 견해, 정견正見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른 생각, 정사유正思惟도 생깁니다. 바르게 노력하고 바르게 사띠를 가지니까 마음속에 대상이 분명해지고, 그 대상에서 마음이 딱 가만히 있어 주니까 흔들리지 않는 마음, 집중이 생기고, 그에 의해 꿰뚫어 보는 지혜가 따라옵니다. 그 대상은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질과 정신을 꿰뚫어 보니까 바른 견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일체 거짓 없이 사실 그대로를 꿰뚫어 보게 됩니다.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꿰뚫어 보는 지혜가 없을 때 사견을 가지게 됩니다. 사견을 가지는지 바른 견해를 가지는지는 바른 노력과 사띠, 집중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실을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이고 그러면 바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이 일어나면 욕심이 계속 죽어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성제, 고·집·멸·도입니다. 고성제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집성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멸성제에서 무엇을 하고 도성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성제를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고성제를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없앨까를 궁리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고통인 줄 알아야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라고 쉽게 말은 하지만 고통을 모르는데 어떻게 욕심을 버리겠습니까.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기 때문에 욕심 부리면서 그것을 계속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이란 것이 원인이 아니고 결과인데, 결과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원인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성제는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버려야 하는 것은 집성제이고 고성제는 알아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고성제를 버리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가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면 고통이 없어지는 줄 알아요.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있는 경우에는 이번 생이 끝나도 다음 생에서 그 고통을 다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그 사성제를 바르게 알기 위한 수행입니다. 고苦를 바르게 알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이 일어나서 집集, 즉 욕심과 애착, 집착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 욕심과 애착, 집착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멸滅, 그래서 멸성제는 도착해야 하는 곳입니다. 멸성제는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도착해야 하는 곳입니다. 도착이라는 것은 따로 무엇을 할 게 없습니다. 목적지이기 때문에 그냥 도착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고성제는 알아야 하는 것이고, 집성제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멸성제를 알아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멸성제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착해야 하는 곳, 즉 목적지입니다. 그리고 도성제는 실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수행 중에 있다면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 바른 생각, 바른 견해 등 팔정도 중 다섯 가지를 닦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른 말, 바른 행동을 하고 생계를 바르게 하면서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 바른 생각, 바른 견해로써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고를 아는 길입니다. 그래서 도성제를 수행 실천해야 고성제를 알고, 집성제를 버리면 멸성제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자가 사성제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 순간 이 몸과 마음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수행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위빳사나 지혜가 바로 일어나지 않겠지요.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기 위해서, 도道지혜, 과果지혜가 생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본부터 닦아 나가야 합니다. 많이 닦는 사람이 당연히 빨리 깨닫습니다. 그래서 많이 닦아야 하고 매 순간 닦아야 합니다.
 
수행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도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길을 알려주기만 할 뿐, 그 길을 가는 것은 오직 본인 자신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매 순간 닦고, 닦고, 또 닦으면서 자신의 번뇌를 제거하는 딱 그만큼 여러분의 행복지수가 올라가고 청정해집니다. 그 청정함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궁극에는 깨달음으로 가게 할 것입니다.<계속>

 

 

“릴렉스… 릴렉스… 릴렉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3
“위빳사나는 자연스럽게, 오직 깨어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것”

2014-11-07 (금) 17:53

빤딧짜스님 | gudaero505@hanmail.com


1) 좌선 방법

 

지금부터는 실천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편안하게 좌선 자세를 잡아보고, 자신이 가장 편한 자세로 앉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해 보십시오. 좌선을 할 때에 가부좌를 해도 되고, 자신이 편하다면 다른 어떤 자세로 앉아도 됩니다. 여러분이 편안하게 오래 앉을 수 있는 자세로 하시면 됩니다. 부처님께서 특별히 중요시한 것은 의학적인 부분과 일치합니다. 허리부터 목과 뇌까지 신경의 중요한 부분들을 반듯하게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팔 모양이나 위치 등이 중요한 게 아니고 허리부터 머리까지 반듯하게 되는가 안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눈을 감으면 집중이 빨리 되는데 몸이 힘들거나 졸음, 혹은 나태, 혼침이 오는 상태라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감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 준비가 되었으면 찬찬히 마음으로 따라해 보십시오.
 
첫 번째는 수행을 준비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부처님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부처님, 붓다, 깨달은 자, 사성제를 알아 깨친 자, 붓다, 붓다, 붓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신 아라한, 아라한, 아라한…. 탐·진·치·자만·질투·시기·나태·혼침·의심·사견 등 모든 더러운 번뇌에서 떠나신 분, 아라한, 아라한, 아라한…. 부처님의 마음이 얼마나 깨끗한가, 얼마나 지혜로운가, 얼마나 고귀한가, 얼마나 평화로운가. 붓다, 붓다, 아라한, 아라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범입니다. 나도 부처님처럼 번뇌가 없는 자, 번뇌에서 벗어난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새기고 기억합니다. 이렇게 수행의 준비 과정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두 번째, 자애를 베푸십시오.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또한 모든 중생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중생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중생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이렇게 자애를 베풂으로써 수행 도중에 생기는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고 인내력도 좋아집니다.
 
세 번째는 몸에 대한 부정관을 합니다. 내 몸에 무엇이 있는지를 떠올려 봅니다. 머리카락이 있지요. 머리카락이 더럽다, 샤워 안 하면 냄새 나고, 떨어지면 더럽다…. 머리카락 외에도 온 몸에 털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을 다 모아 놓고, 온 몸에 있는 털도 다 모아 놓고, 손톱 발톱도 다 떼어서 놓고 봅니다. 이빨 하나하나도 자세히 봅니다. 냄새도 느껴 보고, 색깔도 보고 모양도 봅니다. 몸에서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매우 더럽습니다. 몸에 붙어 있을 때는 괜찮은 것 같지만 분리해서 보면 더럽다는 것을 압니다.

몸 안을 봅니다. 뇌도 있고, 심장, 신장, 간, 피, 지방 덩어리, 근육, 대변, 소변…. 이 몸에 있는 것을 하나하나 떼어서 보면 진짜 더러운 것이지요.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눈에서 나오는 눈곱, 입에서, 귀에서, 코에서, 내 몸에서 매 순간 떨어져 나오는 것들이 간직하여 가질 만한 것인가.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 몸이 더러운 것이다…. 이렇게 몸에 대한 부정관을 많이 할수록 성욕이 점점 떨어지고, 욕심도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더러운 이 몸을 이용해서 아주 최상의 행복을 찾겠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네 번째는 죽음을 보는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든지 나에게 올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 거의 모두가 자신이 죽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고 살다가 어느 순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보다 나이가 위이거나 같은 또래이거나 혹은 아래인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어요.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무엇을 하였는가, 지금 이 순간 죽어도 괜찮을 만큼 충실하게 살았는가, 이 삶의 가치를 얻었는가…. 죽음은 언제 어디서든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앉아 있다가 일어서기 전에, 눈을 감고 있다가 뜨기 전에, 눈을 뜨고 있다가 감기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생각하면서 수행을 하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알게 되고, 죽기 전에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짜 급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는 사람을 깊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수행의 준비 과정으로 이렇게 부처님을 생각하고, 자애를 베풀고, 몸의 부정함을 보고, 죽음을 봅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로는 출가심입니다. 나는 출가자다, 오욕락五欲樂을 떠난 출가자다 하는 그 출가심을 지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출가심이 강한 사람은 수행 중 오욕락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지만, 출가심이 약한 자는 수행 중에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빙 도는 것이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등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므로 출가심을 키움으로써 내 수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한 출가심이 있어야 수행 도중에 오욕락을 별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수행 대상을 놓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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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몸으로 주의를 돌려 봅니다. 몸을 느껴 보세요.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를 스캔하듯이 관찰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몸에 쓸데없는 힘을 주고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편안하게 충분히 이완시켜 보십시오. 릴렉스, 릴렉스, 릴렉스…. 왼쪽 발바닥과 오른쪽 발바닥을 비교해 보세요. 만약 힘주고 있다면 그 힘을 빼십시오. 오른쪽 발목과 왼쪽 발목을 비교해 보세요. 힘주고 있나요? 힘을 빼십시오. 왼쪽 종아리에 오른쪽 종아리에, 힘주고 있다면 그 힘도 남김없이 버리십시오. 편안하게 허리부터 머리까지 반듯하게 세우고, 그것을 유지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근육들의 힘을 빼십시오. 왼쪽 무릎에 오른쪽 무릎에 당기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을 빼시고, 오른쪽 허벅지 왼쪽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다면 그 힘도 빼십시오. 배꼽에 힘주고 있다면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버립니다. 필요 없이 숨을 많이 참고 있다면 그것 또한 필요 없으니 편안하게 이완시키세요. 골반에, 허리에, 등의 왼쪽 부분 오른쪽 부분….

 

온몸에서 힘을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편안하게, 편안하게 하십시오. 왼쪽 어깨 오른쪽 어깨를 편안하게, 그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양쪽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편안하게 힘을 빼 보십시오.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도록 릴렉스, 릴렉스, 릴렉스…. 목의 오른쪽 왼쪽, 뒤통수, 머리 위…. 이마도 왼쪽 이마 오른쪽 이마, 양쪽을 비교하듯이 스캔해 보세요. 억지로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느껴 보세요. 왼쪽 눈썹 오른쪽 눈썹, 힘을 빼시고 편안하게. 오른쪽 볼 왼쪽 볼, 힘주고 있으면 힘을 빼세요, 편안하게. 인상 쓸 필요도 없지요. 입술도 딱 다물 필요 없이 미소 짓는 듯 편안하게….

 

내 마음이 어떤가, 그 마음의 느낌을 봅니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불편하다, 편하면 편하다, 그렇게 마음의 사실을 알려고 합니다. 몸의 사실 마음의 사실을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한가 편안한가, 속이 시원한가 갑갑한가. 갑갑하면 갑갑함, 갑갑함, 갑갑함…. 마음이 조급한가요, 아니면 차분한가요. 차분하다면 차분하다, 차분하다, 차분하다. 급하면 급하다, 급하다, 급하다…. 마음이 맑게 깨어 있나요, 아니면 무겁고 해태, 혼침이 있나요. 해태, 혼침이 있다면 그것을 보는 겁니다. ‘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마음이 약해지고, 또 느낌이 안 좋고 단단하구나.’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관찰해 보세요. 소리가 크게 들렸다가, 약해졌다가, 없어졌다가, 또 생겼다가…. 몸도 편안하게 마음도 편안하게 합니다.

 

또 호흡을 보고 싶은 사람은 코끝에 주의를 집중합니다.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것을 알면서 들이쉬고, 내쉴 때 내쉬는 것을 알면서 내쉽니다. 호흡을 일부러 할 필요 없고 자연스럽게, 원래 숨 쉬는 것 그대로를 알기만 하면 됩니다. 노력하는가, 안 하는가. 노력을 하면 잊지 않고, 노력을 안 하면 바로 잊어버립니다. 무슨 노력을 하는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노력입니다.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하고, 내쉴 때 내쉬는 것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마음이 달라붙어서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사띠가 있는가, 잊고 있는가. 잊고 있다면 잊고 있음을 알고,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생각, 생각, 생각…. 그 생각하는 마음을 관찰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 들숨 날숨, 들숨 날숨….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놓치지 않고 계속 합니다. 한 번씩 현재 본인의 마음 상태를 확인합니다. 마음이 괴로운지 편안한지를 느껴 봅니다. 마음이 괴롭다면 그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괴롭다, 괴롭다, 괴롭다…. 불편하다면 불편함, 불편함, 불편함…. 편안하다면 편안함, 편안함, 편안함…. 그리고 다시 들숨 날숨…. 일차적인 대상으로 들숨 날숨을 보되 내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면 그것을 관찰합니다.

 

눈감고 들숨 날숨을 관찰하고 있는데 눈 속에 어떤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봄, 봄, 그 봄을 관찰합니다. 보는 것이 없어지면 다시 들숨 날숨을 봅니다. 들숨 날숨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조금 있다 보니 호흡은 잊어버리고 소리를 듣고 있어요. 그러면 들음, 들음, 들음 하면서 들음을 관찰합니다. 소리가 없어졌다면 다시 들숨 날숨. 들숨 날숨을 관찰하고 있는데 냄새가 나요. 그러면 냄새, 냄새, 냄새. 향기, 향기, 향기…. 없어지면 다시 들숨 날숨. 들숨 날숨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몸에서 추위, 더위, 딱딱함, 부드러움, 가벼움, 움직임, 때림 그런 것이 느껴지면 마음이 거기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관찰합니다.

 

마음이 조용해지면 다시 들숨 날숨. 호흡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조금 있다 보니 다시 잊어버리고 있어요. 그러면 다시 생각하고 있네, 생각, 생각, 생각. 귀찮다면 귀찮음, 귀찮음, 귀찮음. 게을러지면 게으름, 게으름, 게으름…. 이렇게 이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관찰합니다. 바른 노력으로 관찰, 바른 사띠로 관찰해 봅니다. 오 분, 십 분….

 

다시 몸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를 파악합니다. 몸의 상태가 흐트러졌다면 다시 잡아주는 게 좋습니다. 잡아줄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잘 관찰해서 허리가 구부러졌으면 구부러진 것을 알고, 허리를 펴려는 마음을 먼저 알아차립니다. 그 다음에 허리를 편다, 펼 때 힘이 들어오는 것을 알면서 합니다. 그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모두 알아차리면서 하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내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 힘주는 한 순간 한 순간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머리가 숙여지면 머리를 조심해서 다시 제 자리로 올려줍니다. 올릴 때도 주의 깊게, 알면서 합니다. 알고, 알고, 알고…. 그것이 깨어 있음의 바른 의미입니다.

 

2) 행선 방법
 
행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수행과정에서 행선行禪이라는 것을 우리가 일부러 하게 되는데, 실은 움직일 때 관찰하는 모든 것이 행선입니다. 다음은 행선할 때의 방법입니다.
 
서 있을 때부터 관찰합니다. 서 있음, 서 있음, 서 있음……. 팔짱을 껴도 되고, 앞에 내려놓아도 되고, 뒷짐을 져도 됩니다. 손을 움직이면서 하면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잡고 있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편안한 대로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머리는 똑바로 하고 시선만 밑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여 밑을 보지 않도록 하십시오. 많은 수행자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경행을 하는데 그것은 안 좋은 자세입니다. 그렇게 하면 머리가 아플 수 있고, 목도 아프고, 또 다리의 움직임이 보이니까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머리를 될 수 있으면 반듯하게 하고 시선만 아래로 두도록 합니다.

 

서 있음을 볼 때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내 몸을 관찰합니다. ‘서있음.’이라고 하지만 명칭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내 몸의 상태를 스스로 아는 것이 수행입니다. 발가락을 알 수도 있고, 허리를 알 수도 있고, 다른 어디를 알 수도 있고,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알면 됩니다. 서 있을 때 힘이 들어가는 곳, 느낌이 일어나는 그 부분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서 있는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 그 힘을 보는 것입니다. 서있음, 서 있음, 서 있음….

 

그 다음으로 왼발로 걸을 때 왼발, 오른발로 걸을 때 오른발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걷습니다. 보폭을 넓게 하면 자세히 관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짧게, 그리고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걸을 때도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하면서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일치시킵니다. 왼발이 걸을 때 왼발의 걸음과 내 마음이 일치되게 하면서 걷습니다. 오른발이 걸을 때 오른발의 걸음걸음, 발뒤꿈치를 떼어서 앞으로 나아가고 바닥을 디딜 때까지, 그 걸음의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을 일치시키면서 걷는 거예요. 강제로 통제하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빳사나는 마음을 통제하여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오직 깨어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차를 마실 때에도 똑같습니다. 차의 향을 맡을 때, 찻잔을 앞으로 가져올 때, 잔을 조심스럽게 입에 대고, 마시고, 그 모든 과정을 그저 놓치지 않고 알아차립니다. 모든 것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합니다. 걸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그 걸음 속에 내 마음이 일치되도록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빨리 걸을 때는 오른발 왼발, 그 걸음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집중수행 기간에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속도를 늦춰서 해야 마음이 쉽게 밖으로 달아나지 않습니다. 너무 빨리 걸으면 집중이 어렵기 때문에, 수행을 할 때는 천천히 걸어야 앞뒤가 끊어지지 않게 연결시키면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너무 느린 것도 안 좋고, 너무 빠른 것도 안 좋고,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걸으면서 내 마음이 일치시키는 만큼 걸으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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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에서 시작해서 저쪽 끝까지 걷는 동안 내 마음이 딴 데로 가버렸는가, 아니면 걷는 내내 마음이 걸음과 확실하게 일치가 되었는가,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면 좋습니다. 또 끝에 가서도 바로 돌지 않고 서 있음, 서 있음, 서 있음…. 그렇게 서 있는 것을 관찰하면서 돕니다. 돌 때도 돈다, 돈다, 도는 것을 관찰하고, 돌고 나서 반대 방향을 향해 선 후 다시 서 있음, 서 있음, 서 있음을 관찰하고, 그 다음에 오른발 왼발의 움직임을 관찰합니다.

 

이렇게 왼발 오른발의 걸음을 관찰할 수 있고,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가는데 수행이 잘 된다면 이제는 한 걸음을 들음, 놓음으로 관찰해 보십시오. 발뒤꿈치가 올라갈 때, 앞부분을 뗄 때, 앞으로 나갈 때, 밑으로 내리면서 발을 디딜 때, 그때그때의 힘이 다 다릅니다. 열심히 관찰하면서 집중이 잘 되고 있으면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이 걸음에 일치하지 않고 계속 밖으로 달아난다면 행선이 매우 지루하고 한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 것입니다. 행선을 할 때에도 마음 편안하게 하고 힘을 빼야 합니다. 힘주고 있으면 몸이 때리는 것처럼 아플 수도 있고 몹시 힘이 듭니다.

 

바른 노력이라는 것은 적당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고 내가 너무 긴장하고 쓸데없이 애를 쓰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이때 명칭을 붙여서 하기도 합니다. 명칭 자체가 수행은 아니지만 명칭이 수행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수행 초보자는 힘이 없어서 딴 데로 마음이 자꾸 도망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풂 꺼짐이라든가 들숨 날숨, 볼 때 봄, 들을 때 들음, 이렇게 명칭을 붙여주면 마음이 대상으로 향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약해도 딴 데로 도망가지 않고 대상에 머물 수 있어서 쉽게 마음이 깨지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대상을 반복적 지속적으로 관찰하게 해줍니다. 복잡한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이 산만하고 망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명칭은 큰 도움이 됩니다. 어느 정도 수행을 해서 명칭이 없어도 마음이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명칭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명칭을 붙이거나 안 붙이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수행자가 알아서 하시면 되겠습니다.
 
모든 일은 반복할 때 스킬이 붙습니다. 수행에도 반복이 필요합니다. 바른 노력으로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수행 자체가 힘이 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수행하려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몸이 있으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수행을 해서 아픈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는 통증을 수행하면서 또렷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노력으로 꾸준히 수행을 반복하다 보면 차츰 기술이 붙어서 힘이 덜 들고 덜 아프게 될 것입니다.
 
바른 노력으로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하여 집중이 이어질 때 지혜가 생깁니다. 좌선이건 행선이건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좌선 중 자세를 자주 바꾸거나 수행 기간 중에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수행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집중력이 길러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좌선 끝나면 한 시간 행선, 좌선에서 모인 힘을 행선에서 이어받아서 가야 합니다. 또 행선의 힘을 좌선에서 이어받아서 가고 그런 식으로 반복합니다. 태도도 바르고 노력도 제대로 한다면, 많이 하면 할수록 깨끗해지고 청정해집니다. 이에 따라 지혜도 올라가게 되어 있어 있습니다.

 

수행은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번뇌가 자꾸 끼어들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초보자는 한 시간 닦는다 해도 한 시간에 오 분, 십 분밖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 분을 닦으면 꼭 그만큼, 십 분을 닦으면 바로 그만큼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자신이 제대로 수행한 힘을 계속 이어받아야 날이 갈수록 수행의 힘이 늘어나는데, 그런 힘을 이어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벌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수행자의 강한 의지입니다. 절대로 중간에 번뇌가 끼어들어 가지 않게 하겠다, 아침에 깨어서 밤에 잘 때까지 끊임없이 잊지 않고 깨어 있겠다, 사띠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하겠다…. 볼 때 보는 것, 들릴 때 듣는 것, 바로 이 순간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수행자들에게 지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은 시간으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신심과 노력, 사띠와 집중, 그리고 지혜의 힘이 수행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그 다섯 가지 힘을 얼마나 투자하느냐에 따라 수행의 하루하루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행선과 좌선을 번갈아서 하게 되는데,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행선을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초보자가 처음부터 좌선을 하면 거의 졸고 망상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행선은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좌선보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왼발 나가고 오른발 나가고 하는 것이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집중, 사띠, 대상을 기억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행선을 하여 집중력이 길러지면 좌선이 쉬워집니다. 그래서 초보자는 앉기 전에 먼저 행선을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행선으로 몸이 풀리고 순환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행선을 하는 과정에서 신심도 좋아지고 노력, 사띠, 집중도 좋아지고 지혜도 높아지게 됩니다. 그 힘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가서 조심해서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앉습니다. 그러면 그 행선의 수행력이 좌선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좌선이 쉽고 편하고 통증이 별로 없이 수행이 잘 됩니다. 또 이 좌선에서 길러진 차분함과 고요함을 가지고 다시 행선을 합니다. 그러면 그 연결이 잘 되면서 하루하루가 확실하게 달라집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본인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 순간을 번뇌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번뇌, 탐·진·치로 살아가던 사람도 매 순간 닦아나가면 탐·진·치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 순간의 사실만을 알게 되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도 바로 바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크게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화가 나도 화남, 화남, 화남 하고 계속 알아차리면 오래지 않아 곧 사라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일단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힘들다,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힘들다, 정법을 만나는 것이 힘들다, 신심이 있는 것이 힘들다, 출가하는 것이 힘들다.” 얻기 어려운 이 다섯 가지를 여러분은 지금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수행자들은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벙어리처럼, 눈이 있어도 맹인처럼, 건강해도 환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힘이 있다고 마음대로 움직이면 놓치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아프지 않아도 환자처럼 조심스럽게 해야 수행이 잘 된다는 뜻입니다. 작은 것 하나를 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주의 깊게 하라, 그렇게 할 때 수행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이 보인다고 다 보고 있으면 안 되지요. 항상 눈을 챙겨야 합니다. 눈이 잘 보여도 맹인처럼 살아라. 입이 있어도 벙어리처럼 살아라. 사띠 없이 보고 말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수행을 하셨습니다. 지혜를 계발하고 심리가 변화되어 인간이 성장하니까 부처가 되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몇 십 억 명 중에 나는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진 사람일지 스스로 가늠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열심히 수행하여 지혜를 계발하시고, 그 계발되는 지혜로 여러분들의 심리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심리로 여러분들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를 수행하시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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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를 아는 지혜가 위빠사나, 그 지혜를 완성하면 부처님”

2014-11-11 (화) 13:53

빤딧짜스님 | gudaero505@hanmail.com


2. 부처님과 위빳사나

 

오늘은 여러분께 ‘부처님과 위빳사나’라는 제목으로, 위빳사나 수행이 부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불자들이 삼보에 귀의를 하고자 하면 먼저 삼보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제대로 모르면 바른 법을 알 수가 없고, 정법을 알지 못하면 불법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승가에 대한 정의도 당연히 불분명할 수밖에 없고, 깨달음에 대한 정의도 매우 이상해지고 혼란스럽게 되고 맙니다. 
 
붓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지칭하실 때 ‘따타가따’라는 단어를 쓰셨지요. 따타가따를 한국에서는 여래如來라고 번역합니다. ‘따타’는 ‘같은, 똑같이’라는 뜻이고 ‘가따’는 ‘오신 분, 가신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나는 앞서 오셨던 부처님들과 똑같은 부처이고, 앞서 가신 부처님들과 똑같은 공덕을 갖춘 부처이다’라는 의미에서 ‘따타가따’라는 말을 쓰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의 원어인 붓다buddha를 풀이하면 ‘알았던 자, 이미 안 자’, 영어로 번역할 때는 enlightened one입니다. 또는 ‘깨어난 자, 이미 깬 자’라는 의미의 awakened one이라고 번역합니다. 이렇게 ‘알았던 자’, 또는 ‘깨어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부처님을 정의하면 어떤 혼란도 없는 확실한 정의가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아 아셨는가? ‘사성제’를 깨달아 아셔서 붓다입니다. 사성제가 부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불법,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사성제를 알아 깨치는 법(4가지 도 4가지 과 닙바나, 이 9가지)에 귀의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사성제를 깨달을 수 있는 그 법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과 깨달은 자들의 모임이 승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불·법·승 삼보의 개념이 확고해지면 그 어떤 혼란도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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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황금사원. 사진=타타가타 투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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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두 번째 정의인 ‘깨어난 자(Awakened one)’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어나셨다는 것은 무명, 어리석음이라는 어둠 속에서,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윤회라는 아주 길고 긴 밤에서 깨어나셨다는 뜻입니다. 그 무명, 어리석음이라는 어둠 속,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윤회라는 아주 길고 긴 밤에 폭 잠든 모든 범부들 중에서 최초로 깨어나신 분, 누가 와서 깨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신 분이 바로 붓다입니다. 어리석음, 무명의 반대가 지혜,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이 성취하신 지혜, 사성제, 진리, 그 깨달음이 바로 ‘깨어났다’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그 부처님의 깨달음, 사성제를 아는 지혜가 바로 위빳사나 지혜이고, 그 지혜가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 도 지혜 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께서 29세 때 큰 결심으로 출가하신 후 먼저 하신 수행은 사마타입니다. 태자께서 출가하자마자 유명한 두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알라라 깔라마, 우다까 라마뿟따라는 두 스승 밑에서 선정수행을 배우고 익혀 8선정까지 다 통과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그 스승 곁을 떠나 6년 가까이 고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행 또한 올바른 길이 아님을 깨닫고 마침내 중도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 중도가 다름 아닌 팔정도입니다. 부처님의 첫 번째 법문인 『초전법륜경』에서 중도가 팔정도이고 그 팔정도를 수행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부처님 당신도 팔정도를 수행하여 드디어 깨달음, 즉 사성제 진리를 성취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팔정도를 수행해야 부처님의 법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팔정도 수행이 바로 위빳사나입니다.

 

그러면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고행과 쾌락이라는 양 극단을 버리고 어떤 치우침에서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수행하면서 대상을 잊지 않고 깨어 있어 놓치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그것이 팔정도의 바른 노력입니다. 수행의 대상인 몸·느낌·마음·법의 사념처, 간단하게 말하면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잊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그러면서 알아차리게 되는 것을 움켜쥐지도 않고 잊지도 않으며, 조심스럽게, 주의 깊게 앞뒤로 연결시키면서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깨어 있는 것이 팔정도의 바른 사띠입니다. 몸·느낌·마음·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에만 오로지 집중하여 거기에 머무는 것, 이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이 바른 집중이 있으면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생깁니다. 재가불자들이 지키는 5계, 8계 혹은 10계나 출가자들이 지키는 계율이 바로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입니다. 계율이 깨끗해야 마음이 청정해지므로 부처님 가르침인 삼학 중에서도 계가 기본입니다. 계율은 지키지 않으면서 수행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건물을 지을 때 건물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건축물이 올라갈 수 없고, 올라간다 해도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계율을 안 지키면 집중이 안 되고, 집중이 없으면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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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계·정·혜인데 계율이 깨끗해야 정定, 즉 마음이 청정해지고, 청정한 마음이 있어야 지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집중이란 마음이 깨끗해져서 번뇌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힘이 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계율을 깨끗이 지키는 않는 사람들은 때 묻은 걸레에 다시 때가 묻어도 잘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잘 모릅니다. 계율이 청정할수록 마음 또한 청정해져서 마음의 힘이 차고, 마음의 힘이 차야 그 집중의 힘으로 지혜의 꽃이 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삼학, 즉 계·정·혜를 아시지요? 그 첫 번째 가르침이 계율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몸과 입을 챙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몸으로 좋은 행동을 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이렇게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 다음이 사마디, 즉 정定인데 이것은 마음의 청정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빤냐, 지혜입니다. ‘빤냐’를 한국에서는 반야라고 말하지요.

 

이제 ‘부처님과 위빳사나’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이해 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순간적인 사성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없으면 매 순간 우리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무상·고·무아를 제대로 알 수 없고, 그러니 계속 무언가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 욕심 즉 집성제集聖諦가 생기니 고가 계속되고…….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집성제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고성제가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수행자들은 ‘고집’하지 말고 도道, 도성제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의 중요성을 항상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비구 비구니는 스님답게 살아야 하고 수행자는 수행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로 살면서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을 해야 바른 견해, 바른 사유가 생기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도성제를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 수행으로 순간적인 멸성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매 순간마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 자체가 순간적인 멸성제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작은 멸성제가 많이 모여야 큰 멸성제에 이르고 해탈에 도달합니다. 작은 것 없이 큰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침에 깰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이 팔정도를 활성화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이 법의 바퀴가 멈추지 않도록 매 순간 팔정도라는 법, 해탈에 이르는 법의 바퀴를 굴려야 합니다. 순간적인 도성제와 순간적인 멸성제가 계속 모이고 모일 때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완벽한 자유, 완벽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8선정까지 이르렀지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선정을 버리고 다시 수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위빳사나 수행으로 무상·고·무아를 보면서 순간적인 번뇌를 죽이고 죽임으로써 마침내 깨끗하게 되어 결국 위없는 붓다가 되셨습니다. <계속>



“계율은 몸과 입으로, 수행은 마음으로 지킨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2-2
“팔정도 있는 가르침에 깨달음 있고, 팔정도가 없으면 깨달음 없다”

2014-11-17 (월) 12:21

빤딧짜스님 | gudaero505@hanmail.com


보살과 붓다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십바라밀을 열심히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보살행을 하신 시간과 양은 실로 엄청납니다. 우리가 붓다, 부처님이라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보살의 첫 번째 기준은 예언을 받았느냐, 다른 말로 수기를 받았느냐의 여부입니다. 예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보살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진정한 보살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보살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부처님과 만나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과거에 현존하는 부처님을 만나 수기, 즉 예언을 받아 보살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기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 여덟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 남자여야 합니다. 여자는 깨달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을 때는 남자의 몸일 때라는 뜻입니다. 셋째, 온갖 빠라미(바라밀) 공덕을 갖추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바로 그 생에 아라한이 될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넷째는 살아 계신 부처님을 만나야 하며, 다섯째는 출가자여야 합니다. 여섯째, 8선정과 신통력에 능숙해야 하고, 일곱 번째는 목숨을 걸 수 있는 정도의 큰 원력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정도의 열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여덟 번째 조건입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을 갖추었을 때 보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나를 보고 보살이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건 아라한이건, 누구든지 깨달으려면 십바라밀을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일반 아라한의 차이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십바라밀을 무수한 겁 동안 엄청난 정도로 실천해야 될 수 있는 데 비해 일반 아라한의 보살행은 수행의 양과 기간에서 훨씬 얕고 짧습니다. 즉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십바라밀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같은데 그 서원誓願과 투자의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전신인 수메다 은자는 마음만 먹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는 그 때 다음 세 가지 대원력을 세우고 십바라밀로 보살행을 실천합니다. ‘나 혼자만 깨달으면 무엇 하겠는가. 내가 깨닫고 여러 중생 또한 깨닫게 하리라, 내가 윤회라는 이쪽 강가에서 해탈이라는 저쪽 강가로 건너가고 수많은 중생들 또한 나처럼 윤회의 고통에서 해탈이라는 행복으로 건너갈 수 있게끔 하리라, 그리고 내가 이 번뇌,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고 수많은 중생들이 윤회, 고통, 번뇌라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이렇게 행하신 것은 보시바라밀에 속합니다.

 보살행을 할 때 계율, 즉 지계바라밀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율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 하지 마라. 저것 하지 마라.” 이런 것들만 계율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계율은 몸과 입을 챙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야 하는 것’도 계율입니다. 즉 몸으로 좋은 일 하고 입으로 좋은 말 하고, 몸으로 나쁜 일을 피하고, 입으로 나쁜 말을 피하는 것이 다 계율에 속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모든 말이 다 계율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계율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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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이 출가바라밀. 출가심 또한 바라밀, 보살행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29살 때 매우 아름다운 야소다라 부인과 갓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들 라훌라를 떠나 바로 출가할 수 있었던 힘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겁 동안 출가하여 수행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집을 떠나 일주일 또는 한 달 등을 수행처에 머무는 것도 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 깎지 않고 가사는 안 입었지만 세속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오욕락에서 떠난 것 자체가 출가입니다.

 

 그 다음은 지혜바라밀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는 것, 제가 이렇게 가르치는 것도 지혜바라밀입니다. 그 외에 노력바라밀, 인내바라밀, 진실바라밀, 결정바라밀, 그 다음이 자애바라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정바라밀, 이것을 십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자애로도 안 되고, 연민심으로도 안 되고, 수희심으로도 못하는 일이면 항상 평정심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 평정심을 지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연민심이 지나쳐 마음이 속상하면 성냄이 되고, 자애가 잘못되면 욕심이 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그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평정심이 필요합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민심은 선업이고 화는 불선업입니다. 욕심은 불선업이고 자애는 선업이지요.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인데 사람들이 그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해 늘 혼동을 하곤 합니다. ‘항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업대로 사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하고 평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되고 싶든 아니면 그냥 깨닫고 싶든 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바로 십바라밀이고, 이것을 우리가 매일 실천한다면 아주 좋을 것입니다. ‘바라밀’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고귀한 사람의 고귀한 일’인데 마음이 고귀한 사람을 ‘고귀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나의 이익보다 남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사람,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아주 기쁘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고귀한 사람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보살행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보살행을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그런 경우를 넌지시 비판하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거북이 보살행’이라는 건데, 거북이는 걸어갈 때 항상 발을 안쪽으로 숨기면서 간답니다. 그 모양이 꼭 ‘내 것, 내 것, 내 것…….’ 하면서 걷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거북이 보살행’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보살행 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속으로는 자기의 이익을 챙기고 있는 것을 풍자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살행 한다고 하면 우선 자신의 마음 자체가 고귀해야 합니다. 고귀한 마음이 되려면 이기적인 마음을 없애야 하고, 그러려면 바르게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할 수 있으려면 자비·자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자애는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지요.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이고, 그 사람이 배고픈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뿐 내가 이렇게 해줌으로써 나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지를 계산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인하여 주는 행동이 나타나는데, 그때 주는 것으로 끝날 뿐 내가 바라는 것이 전혀 없을 때 그것이 참된 보시바라밀입니다.

 

 지계바라밀도 같은 이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살생을 하면 지옥에 갈까 봐, 오래 못 살까 봐 무서워서 살생을 안 했다면 바라밀이 아닙니다. 살생해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살아 있는 중생을 죽이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살생을 피했을 때 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계를 지킬 수 있고, 성냄으로 계를 지킬 수 있고, 어리석음으로 계를 지킬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도 진정한 바라밀이 아닙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오직 계를 지키는 것이 옳아서 그것을 지켰으면 바라밀이 됩니다.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는 진정한 보살행이 불가능합니다. 수행함으로써 마음에 있는 일체의 상이 깨졌을 때라야 참된 보살행이 가능해집니다. 자기 마음 안에서 일체의 상이 남김없이 사라졌다면 모든 행이 다 보살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한국어 ‘수행’을 원어로 하면 ‘바와나’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자꾸자꾸 생기게 하는 것’, ‘좋은 마음을 반복적으로 모아 쌓는 것’ 등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계율은 몸과 입으로 지키고 바와나는 마음으로 지킵니다. ‘절 수행’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108배를 하는 동작 자체는 바와나가 아닙니다. 반복해서 절을 할 때 그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데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면서 절하고 있으면 그 마음이 바와나이지 절하는 동작 자체가 바와나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정도로 마음이 고귀해야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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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사성제, 팔정도 수행을 했을 때 비로소 깨달으셨듯이 여러분도 팔정도 수행을 해야 합니다.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에 깨달음이 있고,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 깨달음이 없다.”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열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아니라 오직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과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초기불교, 대승불교, 소승불교, 테라와다 불교 등등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그 중심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름이 아니라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에 깨달은 자가 있고,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 깨달은 자가 없다’는 부처님의 최후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의 성향에 따라 수행의 성격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지혜 위주로 바라밀을 행하셔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붓다가 되신 분입니다. 그 가장 빠른 시간이 무수한 겁 네 겁, 즉 4아승기에 다시 10만 대겁이라니 얼른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신심 위주로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혜보다는 신심이 강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으려면 지혜 위주의 수행자에 비해 두 배정도의 시간이 더 걸린다고 보면 됩니다. 또 노력 위주의 사람이 부처가 되려면 가장 긴 시간이 필요해서 무수한 겁 16번 정도를 거쳐야 부처가 됩니다.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본인이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성향에 따라 수행하는 데에는 차이가 나지만 ‘고귀한 사람의 고귀한 일’이라고 정의되는 바라밀을 실천해야 하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한 일반적인 사람을 범부라고 합니다. 범부는 아는 것이 적고, 자신이 아는 것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늘 스승을 찾아 여기저기 방황합니다. 흔들림 없는 확고한 앎은 수다원이 되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면 사견과 의심이라는 두 가지 번뇌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의심이 없다는 것은 올바른 법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의심이 사라지면 자신이 귀의하는 법(도와과 닙바나)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그 법을 처음 가르치신 위 없는 스승(불佛)에 대해서도 결코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법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 법을 깨달으신 다른 분들(승僧)에 대해서도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스승을 찾아 헤매 다니지 않습니다. 오로지 불법승 삼보만을 모십니다.

 

 끝으로 붓다, 부처님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에서 유행처럼 많이 하는 말인 ‘모두가 부처이다.’는 사람들을 격려한다는 면에서는 좋지만, 이 말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정의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모두가 부처라고 할 때는 다음에 설명할 네 가지 부처님 중 어느 부처님을 뜻하는지 알면 좋을 것입니다. 자신이 네 종류의 부처님 중 어느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삽방뉴따 붓다, 빠쩻까 붓다, 사와까 붓다, 숫따 붓다,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아라한’의 의미부터 확실히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라한의 개념에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부처님도 아라한입니다. 부처님이 최초의 아라한이긴 하지만 아라한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라한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를 알면 그런 혼란을 없앨 수 있습니다.

 

 

 

 아라한의 첫 번째 의미는 ‘적을 죽인 자’입니다. 이 때 적은 ‘번뇌’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과 다른 아라한과의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적’이 우리를 해치고 괴롭힐 수는 있지만, 그 적이 한평생을 쫓아다니며 계속 괴롭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가장 크게 괴롭히는 것이 죽이는 것이겠지만 그것도 한생으로 국한됩니다. 그런데 번뇌보다 무서운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번뇌는 한 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면서 끝없이 죽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번뇌라는 적을 완전히 죽인 자가 바로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의 두 번째 의미는 ‘숨기는 것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숨어서 할 때는 그것이 나쁜 짓이어서 다른 사람이 보면 부끄럽거나 당당하지 않기 때문에 몰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은 나쁜 짓을 하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마음 자체가 깨끗해서 몸과 입으로 지은 업, 그리고 마음으로 지은 업까지 깨끗해진 사람, 아니 아예 업 자체를 짓지 않는 사람, 그런 분들이 ‘아라한’입니다.

 

 세 번째 의미로는 ‘모든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가치를 완벽하게 갖춘 인간의 모범으로, 완벽하게 성장하여 인간 중에서도 최고로 위대한 분이 아라한입니다. 일체 조건 지어진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인데 아라한은 더 이상 업을 만들지 않는 분입니다. 모든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아라한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크게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아라한이 했던 바라밀행과 부처님의 그것에는 워낙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남을 돕는 일을 할 때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네 부류의 부처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삽방뉴따 붓다는 동 시대에 두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분은 한 시대에 두 사람이 필요 없을 만큼 아주 완벽하고 힘이 강한 붓다입니다.

 

 삽방뉴따 붓다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는 뜻인데 ‘모든 것을 안다’라는 말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 세 가지 능력, 세 가지 힘을 갖춘 사람을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알아야 하는 것을 다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는 본인만 아는 게 아니고 본인이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칠 때 그 가르치는 방법을 완벽하게 다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가르쳐야 하는 중생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앎이 삽방뉴따 붓다의 큰 실력, 능력입니다. 삽방뉴따 붓다의 특징은 완벽함, 일체지(一切智)입니다. 깨달아야 할 모든 것을 다 깨닫고, 가르치는 방법 즉 방편이 완벽하고, 가르칠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압니다.

 

 두 번째인 빳쩨까 붓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삽방뉴따 부처님이 안 계실 때 이 세상에 아라한이 있었다면, 그 아라한이 바로 빳쩨까 붓다인데 한국에서는 ‘벽지불’로 번역하지요. 삽방뉴따 붓다와 빳쩨까 붓다의 공통점은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그 둘의 차이점은 삽방뉴따 붓다에게는 방금 전에 말한 세 가지의 완벽하게 아는 힘이 있는데, 빳쩨까 붓다는 그런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빳쩨까 붓다가 여러 중생들을 가르쳐서 깨닫게 도와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번뇌라는 적을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점에서 아라한입니다.

 

 세 번째로 사와까 붓다는 ‘제자 붓다’입니다. 삽방뉴따 붓다, 빳쩨까 붓다, 사와까 붓다의 공통점은 ‘사성제를 안 자’라는 점에서 모두 같습니다. 즉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윤회라는 밤에서 깨어난 점에서는 모두 같다는 뜻입니다. 삽방뉴따 붓다는 삽방뉴따 지혜라는 세 가지 힘을 갖고 있는 부처님이고, 빳쩨까 붓다는 세상에 삽방뉴따 붓다께서 안 계실 때, 그 분들의 가르침이 다 사라졌을 때 따로따로 나오신 분으로, 스승 없이 깨달았으나 삽방뉴따 지혜의 힘이 없으며, 사와까 붓다는 삽방뉴따  지혜도 없고 스승 없이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스승이 있고, 그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서 깨달은 자입니다.

 

 네 번째가 숫따 붓다로 삼장법사가 바로 숫따 붓다입니다. 번뇌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사성제를 지식으로 아는 사람이지요. 삼장법사, 이장법사, 일장법사, 맨 밑에까지 말하면 사성제를 제대로 이론적으로 아는 사람도 붓다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네 가지 부처님의 개념과 정의를 바르게 알고 있으면 ‘모두가 부처이다’라고 할 때의 부처가 어떤 부처인지를 따져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부처이다’라는 말도 쉽게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해야 하는 일을 완벽하게 하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팔정도 수행을 하시면서 사성제를 깨달으셨듯이 여러분들도 이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 팔정도 수행을 하시어 부처님과 아라한, 모든 성인들이 성취한 생노병사, 삼세윤회, 모든 고통 벗어나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경전은 내비게이션”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3-1
“깨달은 사람은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사람은 업도 없다”

2014-11-19 (수) 10:10

빤딧짜스님 | gudaero505@hanmail.com


3. 법과 위빳사나

 

 선업(善業) 복을 지을 때가 가장 좋은 때이고, 선업 복을 짓는 날이 가장 좋은 날이며, 선업 복을 짓는 장소가 가장 좋은 장소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아주 좋은 때, 좋은 날, 좋은 장소에 와 계십니다.

 

 앞에서 ‘부처님과 위빳사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법과 위빳사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에 8선정을 얻으셨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었고, 그래서 다시 팔정도 수행을 하심으로써 사성제 진리를 성취하셨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부처님의 법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부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자(佛子)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믿는 법이 무엇이고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법(法)’을 빨리어로는 담마(dhamma)라고 합니다. ‘담마’라는 원어의 뜻을 풀어 보면 ‘법이 받쳐주다, 법이 데리고 가다’ 등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받쳐준다’는 것은 ‘떨어지지 않게 하다’라는 뜻이니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부처님이 실천하셨던 법은 부처님을 받쳐주고, 제가 법을 실천했다면 그 법이 저를 받쳐줍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실천한 법이 여러분을 받쳐주는 것입니다. 이때 어디로 떨어지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면,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 바른 법을 실천하면 인간 이하 즉 지옥이나 아귀, 축생, 아수라 등의 사악처 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수행을 열심히 해서 수다원이 됐다면 자신이 성취한 수다원도와 과의 법이 자기를 받쳐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법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받쳐준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또 자신이 쌓은 선업이 자신을 더 좋은 곳, 즉 천상세계나 범천으로 데리고 간다, 모시고 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법이란 그런 의미입니다. 법이란 법칙이에요. 만약 불선업(不善業)을 했다면 그 불선업이 여러분을 지옥으로 데려가고 축생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데리고 간다’는 말은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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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황금사원. 그 위용이 놀랍다. 사진=타타가타 투어 제공

 

  그러면 부처님의 법이란 무엇인가요. 부처님의 법에는 다음 열 가지, 즉 네 가지 도(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 네 가지 과(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닙바나(해탈), 그리고 경전(삼장법, 오부니까야, 팔만대장경 등으로 부르는)입니다. 이 열 가지 외에 다른 법은 없습니다. 경전에서 거듭 언급하는 부처님의 법인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닙바나, 이 아홉 가지를 출세간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성제를 깨달아 아시는 분을 붓다라고 믿고, 붓다의 법이 사성제라고 믿으면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하는 법은 바로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입니다. 도는 성취해야 하는 깨달음이고, 과는 그 깨달음에 저절로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과를 성취하기 위해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깨달으면 도 다음에 바로 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다원도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곧바로 수다원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럼 경전은 무엇인가? 위에서 열 가지 법이라고 했을 때는 경전이 포함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경전은 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법에 대한 설명서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네 가지 도를 약이라고 한다면 경전은 그 약에 대한 설명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약을 먹어야 병이 낫는 것과 같은 이치로 네 가지 도라는 약을 먹어야 번뇌라는 병에서 나을 수가 있는데 그 약은 안 먹고 도가 무엇인지, 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에 관한 설명서만 계속 먹고 있으면 병이 낫지 않겠지요? 따라서 경전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경전은 내비게이션과 같은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가 아니고 길도 아니며, 단지 길을 가리키는 지도 같은 것입니다. 내가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그 길을 스스로 직접 가야 합니다. 그러니 해탈이 목적지이고, 도는 길이며, 경전은 그 길을 가리키는 지도라고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수행은 하지 않고 경전만 계속 공부하고 있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열 가지 법을 엄밀하게 따져보면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 닙바나,  경전 이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닙바나, 해탈은 목적지입니다. 도를 깨치면 도의 결과를 얻는데 그 결과가 곧 과입니다. 그래서 과 선정에 들어간다고 하면 수다원은 수다원과 선정에 들어갈 수 있고, 사다함은 사다함과 선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 선정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기 들어가서 무얼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바로 해탈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해탈은 도와 과의 대상입니다. 해탈로 도 지혜도 알 수 있고 과 지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탈은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착해야 하는 곳입니다. 성취해야 하는 것은 도이지요. 도를 깨치면 도의 대상이 바로 해탈입니다. 도를 깨달으면 과가 따라오고 해탈, 닙바나에 도착한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의 법은 바로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라고 알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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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세기 때문에 번뇌를 뿌리까지 뽑아 없애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도는 딱 한 순간으로 완벽한 것이어서 두 번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다원만 되면 불·법·승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또 사견이 완전히 없어지고 바른 견해만 남습니다. 원인이 소멸되면 결과가 소멸되는 것, 물질과 정신의 소멸을 통해 자신이 분명히 해탈을 경험한 것입니다. 도 지혜 과 지혜를 봤고, 법을 직접 알았습니다. 스스로 분명하게 알아 깨우친 법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법을 보았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의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도라는 것, 도인이라는 것, 도를 깨쳤다는 것은 번뇌가 없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번뇌가 없습니다.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그래서 수다원도를 성취하면 사견과 의심이 사라져서 더 이상 사악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수다원도가 받쳐주기 때문에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수다원이고, 욕계에 최대한 많이 태어날 경우라도 일곱 번까지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일곱 생 동안 사람이나 신으로 태어나지 그보다 낮은 단계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나함 도를 성취하면 성냄이 없어집니다. ‘성냄’의 원래 의미는 매우 다양합니다. 짜증나다, 싫다, 밉다, 무섭다, 마음에 안 든다 등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성냄이나 진(瞋)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축소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나함이 되면 그런 성냄에 뿌리를 둔 마음이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아라한 도까지 성취하면 모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의 번뇌가 없습니다. 이것이 법에 대한 바른 정의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 이 법이고,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법도 바로 이 법입니다. 번뇌가 없는 사람은 업도 없습니다. 우리가 네 가지 도 중 어떤 법을 깨달았을 때 그 법이 나를 어떻게 받쳐주는지 그 의미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깨달은 도의 수준만큼 자신이 보호를 받는다고 알면 되겠습니다. <계속>



“12연기의 순방향이 윤회, 역방향이 팔정도”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3-2
“혜 키우면서 잠재적 번뇌까지 제거하려면 위빳사나 수행 필요”

2014-11-26 (수) 17:18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그런데 부처님의 그 많은 가르침을 다 배우는 것이 시간이나 능력 면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알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계·정·혜 삼학입니다. 경전, 율장, 논장을 삼장이라 하지요. 율장의 핵심은 계, 경전의 핵심이 정, 논장의 핵심은 혜입니다. 삼장법 즉 오부니까야가 너무 많다면 이 삼학만 확실히 알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부처님 법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주 논리적, 합리적입니다. 왜 계·정·혜를 가르치는가? 그것은 번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며, 그 번뇌의 상태에 맞게 계·정·혜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번뇌는 다음 세 가지, 즉 건너간 번뇌, 일어나는 번뇌, 잠재적 번뇌입니다. 그리고 윤회란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지요.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업이 아니라 업의 과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왜 과보를 받게 되는가? 전에 했던 업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왜 업이 있는가? 번뇌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라는 이 윤회를 끊으려면 번뇌를 소멸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의 굴레를 벗어나야 업이 소멸되고, 업이 소멸되면 과보의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내 마음속에 번뇌가 들어오면 그 번뇌의 마음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망가뜨리고 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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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투어 제공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고 하는데, 불교에는 그런 원죄라는 것이 없고 번뇌가 문제라고 하지요. 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의 문제가 풀리는데 그 문제인 번뇌의 유형에 위와 같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계·정·혜 세 가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번뇌의 형태에 맞게 대응할 수 있도록 세 가지 무기를 주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번뇌의 세 가지 형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는 건너간 번뇌입니다. 몸과 입으로 화가 나서 하는 행동과 말, 욕심 부리면서 하는 행동과 말, 어리석게 하는 행동과 말, 질투와 시기를 드러내는 행동과 말 등을 말합니다. 불이 나서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있는 형국이지요. 완전히 끝장 난 상태로 그때는 돌이키기가 힘들어진 상태입니다. 이미 파괴의 상태로 마음속에 있던 번뇌가 몸과 입으로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번뇌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상태를 말하는데, 몸과 입으로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탐, 진, 치, 자만, 질투, 시기, 의심, 들뜸, 후회, 사견 등 여러 가지 마음의 나쁜 성향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일어나는 번뇌’입니다.

 

 세 번째 번뇌는 아주 잔잔하게 밑에 깔려 있는, 잠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은 없는 것 같지만 조건이 생기면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아무런 마음 없이 집중해서 법문을 잘 듣고 있으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고, 법문이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바로 마음속에 번뇌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번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할 때 수행이 잘 되면 하도 평화롭고 행복해서 내가 혹시 해탈한 게 아닐까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가 와서 싫은 소리 한 마디만 해도 그 모든 게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가 깨달음이나 법에 대해서 확실하게 모르면 그렇게 착각할 수 있습니다. 집중 혹은 선정 상태에 들면 아무런 고통이 없고 아주 행복합니다. 지금 선정을 갖고 번뇌가 없다 해도 조건만 맞아떨어지면 선정이 깨지면서 즉시 번뇌가 나타납니다. 이런 것을 잠재 번뇌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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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 나면 불을 끄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119를 부릅니다. 그 119에 해당하는 것이 부처님의 계율입니다. 계율로 몸과 입을 빨리 막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계율은 파괴 상태의 번뇌를 막기 위해서 부처님이 주신 무기입니다. 계율을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뇌는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속의 문제는 계율로 막을 수 없습니다. 계율이 책임지는 것은 몸과 입에 국한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정학과 혜학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정(定), 즉 집중은 대상 하나에 마음을 딱 붙여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 대상에 딱 붙어 있는 동안에는 탐·진·치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학을 배워 익히는 이유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번뇌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일어나는 상황은 없어졌지만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혜학이 필요합니다. 이 혜학이 바로 위빳사나입니다. 지혜를 키우면서 잠재 상태의 번뇌까지 제거하려고 하면 위빳사나 수행이 필요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도를 성취했을 때 그 도로 잠재 상태의 번뇌까지 없앨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를 닦지 않으면 도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위빳사나를 계속 닦아서 알고자 하는 것이 무상·고·무아이고 이것을 알면 욕심이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욕심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욕심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면 그것을 가지려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욕심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면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탐·진·치가 가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무상·고·무아를 아는 지혜, 바른 견해 즉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관찰하여 그 사실을 그대로 아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리하여 ‘아, 이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 이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이 무상하구나, 고(苦)이구나. 무아구나’라는 지혜가 꽉 찰 때 비로소 이 몸과 마음에 대한 욕심이 떨어져 나갑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욕심을 버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 욕심을 부릴 일이 없습니다. 내 몸과 마음조차도 더러운데, 다른 사람의 몸을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데 굳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져오려고 할 리가 없습니다.

 

 고성제를 알아야 집성제를 버리고 멸성제에 도착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성제를 수행해야 한다, 사성제가 그런 의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사성제 수행, 그 중에서도 팔정도 수행입니다. 여러분이 대상을 잊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대상을 기억하고 있는 것, 잊지 않는 것이 바른 사띠이고, 그 대상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바른 집중이지요. 그러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팔정도 중에서 다섯 가지를 닦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계율이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입니다. 그래서 팔정도 수행입니다. 그 팔정도 수행을 함으로써 바른 생각과 바른 견해가 생기는데 그 바른 견해가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100% 힘이 찰 때 도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끊임없이 굴려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놓치면 바로 윤회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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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연기의 순방향이 윤회이고, 12연기의 역방향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무명으로 인해 행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윤회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IC가 어디겠습니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갈애가 안 일어납니다. 느낌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되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에 마지막 제자에게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에 깨달은 자가 있다.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 깨달은 자가 없다.”라고 하신 가르침, 그것이 불법의 핵심입니다.

 

 무상·고·무아를 알면 일체 사견이 사라집니다. 바른 견해와 사견이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어둠과 밝음이 같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두울 때 불을 켜면 그 순간 어둠이 사라집니다.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이 무상·고·무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아상이 깨지고,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됩니다. ‘무상(無常)’이란 항상 변한다, 앞뒤가 다르다,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늘 변하니 고정된 무엇, 어떤 하나가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무아(無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과 마음을 관찰하다가 집중이 되어서 지혜가 생기면 이 몸과 마음이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 딱히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세포가 매 순간 새로 생기고 사라진다는 것은 의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물질 또한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변화하며 사라져 간다는 것을 물리학계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체가 ‘무상·고·무아’라고 말이지요. 어떤 것을 보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것이 영원한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상을 알면 고도 알게 됩니다. 고(苦)는 고통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것, 즉 가치가 없는 것, 더러운 것, 핵심이 아닌 것, 심지어는 변하는 자체도 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른 견해가 일어나면 사견이 사라지고, 사견이 일어나면 바른 견해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관찰해야 이 몸과 마음의 ‘무상·고·무아’를 알게 되고, 바른 견해가 일어나고 사견이 사라집니다. 팔정도 수행을 하여 ‘무상·고·무아’를 알게 되면 굳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버리려고 애를 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순간 일체의 상이 깨져나가 사라집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무엇이고 어떻게 수행을 하는 것인지, 부처님의 법이 무엇인지 이제는 분명하게 이해하셨으리라 봅니다. <계속>

 

 

“업장소멸 방법은 팔정도의 실천 밖에 없어”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3-3
“사마타는 선정에서 범천으로, 위빳사나는 청정에서 해탈로”

2014-12-01 (월) 16:52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그렇다면 법과 위빳사나, 부처님의 법이란 무엇인가? 『법구경』에 보면 ‘법을 실행하여 지키는 자를 법이 보호한다.’라는 부처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열심히 선업공덕을 쌓으면서 원을 세우고 법을 실행하면 그 법이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이해하면 부처님이 우리를 돌봐준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준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완전히 열반하셨는데 이 세상의 우리를 지켜보고 돌봐준다고 말한다면 부처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신다면 부처님이 윤회한다는 의미이지요. 부처님을 크게 왜곡하는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예전 부처님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오셨고, 똑같이 가셨다는 것,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 ‘따타가따’라고 하셨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공덕은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무엇인지를 『열반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존자가 웁니다. 부처님의 열반을 앞둔 날 부처님의 그림자 같던 아난존자가 보이지 않자 부처님이 찾습니다. 그 때 아난존자는 문설주를 붙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난존자는 수다원이었기 때문에 탐·진·치가 남아 있었습니다. 수다원은 사견과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슬픔이나 성냄은 남아 있습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이 얼마 안 되어 곧 돌아가신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서 거기 가서 울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아난존자를 불러 말씀하십니다.

 

  “내가 늘 말하지 않았는가? 만났으면 헤어지게 되어 있다고, 살아 있으면서 헤어지거나, 죽어서 생이 갈라지면서 헤어지게 되어 있다고 항상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존자에게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면 스승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가고 나면 45년 내내 내가 가르쳤던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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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을 하시는 빤딧짜 스님. 사진=미디어붓다 DB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다.’ 법은 경전과 논장(아비담마)이고 위니아는 계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따로 후계자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분명하게 일러주셨지요,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라고. 여러분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알려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네 가지 경전이 있습니다. 첫째는 『초전법륜경』, 둘째가 『무아경』, 셋째는 『대념처경』이고 넷째는 『열반경』입니다. 그 네 경전을 확실하게 공부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최초 가르침인 『초전법륜경』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최초로 ‘내가 부처이다.’ 하고 세상에 나오실 때 당신이 깨달으신 법을 펼친 것이 『초전법륜경』입니다. 『무아경』은 부처님의 궁극적·최종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자아’입니다. ‘자아’가 있어야 신도 의미가 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신도 자아입니다. 영원한 자아라고 하면 되겠지요.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무아(無我)’입니다. 따라서 『무아경』을 우리가 확실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직접 그 법을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대념처경』입니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철학을 공부하고, 부처님의 법이 왜곡되지 않게 보호하려면 『열반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1년 전에 하셨던 가르침들을 다 묶어 놓은 『열반경』은 불교 지침서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올해로 2557년째(2013년 기준)인데 지금까지의 불교의 흐름을 보면 부처님께서 그 때 이미 미래를 다 내다보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열반 이후 불교가 어떻게 망가질지를 예상하시고는 그것을 막기 위해 해야 할 모든 지침을 일일이 밝혀 놓으셨습니다.

 

 이 네 가지 경전만 제대로 공부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고, 잘 따를 수 있고, 잘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법을 공부하여 바르게 이해해야 법을 실천할 수 있고 부처님도 따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모르고 사람을 따르게 되면 그 사람을 부처님 대신으로 삼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한다고 하면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불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고, 그 부처님의 법만 보고 살면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을 우러르며 사는 참된 삶입니다.

 

불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 공부와 실천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목적은 오직 바르게 실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잘못 잡으면 뱀보다 무서울 수 있습니다. 이 법이 자신을 물어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을 공부할 때는 아주 바르고 선한 마음으로, ‘이 공부를 바르게 하여 그것을 실천하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만 해야 합니다. 계율을 공부하면 그 배운 대로 계율을 실천해야 되고, 경전을 공부하면 그 경전에 나오는 대로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과 실천 두 가지가 부처님의 가르침, 불법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계·정·혜를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청정도’에는 몸과 입은 지계, 마음은 정과 혜라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업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계·정·혜라는 팔정도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행동, 말, 마음이 업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업 두 가지는 선업 아니면 불선업이지 그 중간은 없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이 아닌 모든 중생은 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업은 두 종류뿐입니다. 만약에 내가 하는 어떤 업이 선업도 아니고 불선업도 아니라면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폭 자는 마음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깨어 있으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약하건 강하건 어쨌든 선업 아니면 악업입니다. 업이 있으면 과보를 받게 되고 그래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윤회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가 계속 이어지는 끝없는 윤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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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선업과 불선업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선업은 행할 때 죄가 없고 남과 본인을 해치지 않으며, 그 결과는 행복이라는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불선업은 그 반대로 하고 있을 때 죄가 있고, 결과가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불선업입니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원인과 결과 등을 아는 게 지혜인데, 그 지혜의 정의가 교단마다 다른 이유는 그 정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고,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정의는 아주 확실합니다. 어떤 종단에 속해 있든, 어떤 가르침을 받았든 상관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진리는 법칙을 뜻합니다. 진리는 종교에 따라 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선악의 기준은 종교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생각, 의도와 말, 행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죄(번뇌)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합니다. 죄의 여부는 욕심, 성냄, 어리석음, 자만 등의 유무를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틀림없이 그 죄의 값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변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옳은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옳은 것입니다. 욕심과 성냄이 좋은지 안 좋은지, 질투 시기가 좋은지 안 좋은지는 종파와 상관없이 그 결론이 똑같습니다. 진리가 법칙이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마음가짐 자체가 죄이고, 그 마음으로 한 행동이 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질투 시기의 마음으로 말하면 그 말이 죄가 있는 말이 되고, 그것이 불선업이며 그 질투 시기자체가 이미 불선업입니다. 불선업이 있으면 불선업의 과보를 받게 되고 그 결과가 고통입니다. 그것은 종교, 국적, 믿음 등과 아무 상관이 없는 법칙입니다.

 

 우리는 번뇌를 가지고 매 순간 업을 짓는데 어떻게 해야 청정해질 수 있는가. 몸과 입이 청정하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켜야 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과 혜를 바르게 알고 닦아야 합니다. 사마타는 정이고, 위빳사나는 혜입니다. 사마타는 선정에서 범천으로, 위빳사나는 청정에서 해탈로, 바로 이것입니다. 사마타는 계·정·혜 중에서 정까지만 가능하고 혜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마타에서 멈추면 안 되고 해탈로 가기 위해서는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로 선정은 가능하지만 선정이 곧 해탈은 아닙니다. 그 선정을 얻었으면 그 힘을 바탕으로 계속 수행하여 무상·고·무아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선정의 힘으로 무상·고·무아를 보면 선정 없는 사람보다 더 미세하게 볼 수 있지만 선정 없어도 무상·고·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선정이 없어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서 선정이 필수는 아니지만 물론 필요합니다. 삼매를 정도에 따라 나누면 순간적인 삼매, 근접삼매, 본삼매가 있는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본삼매가 필수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삼매가 있으면 더욱 좋지만, 본삼매가 없어도 깨달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아예 삼매가 없으면 무상·고·무아를 볼 수 없습니다. 삼매 없이 보는 무상·고·무아는 개념적인 것입니다. 개념적인 무상으로는 해탈로 갈 수 없습니다. 진짜 무상을 안다는 것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질과 정신의 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상을 보려면 마음의 힘이 필요하고 그 마음의 힘이 삼매입니다. 그런데 선정의 상태, 본삼매의 상태는 아주 몰입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물질 정신의 사실, 실제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 본삼매를 놓으면 근접삼매입니다. 근접삼매 경계를 넘어가면 본삼매, 본삼매가 꺼지면 바로 근접삼매이지요. 존재하고 있는 물질과 정신적인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의 무상·고·무아를 알고 깨닫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그래서 ‘사마타는 선정에서 범천으로, 위빳사나는 청정에서 해탈로’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계속>

 

 

“1초라도 무시하지 마십시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3-4
“들숨날숨만 알면 사마타, 궁극적인 실제의 특징을 알면 위빳사나”

2014-12-10 (수) 09:23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그렇다면 사성제의 도성제를 우리가 어떻게 실천 수행해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팔정도,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사띠, 그리고 바른 집중 이렇게 여덟 가지입니다.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 계·정·혜밖에 없고, 팔정도밖에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면서 바른 노력으로 바른 사띠, 즉 잊지 않고 깨어 있으며 그럼으로써 바른 집중력을 키우고, 바른 집중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을 키우는 것이 바로 팔정도 수행입니다. 그 바른 견해의 기본 단계가 업의 단계이고, 중간 단계가 무상·고·무아를 아는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이 깨달음의 도 단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바른 견해라는 것의 제일 처음 단계가 업과 과보, 12연기, 윤회이고 그 위의 단계가 무상·고·무아를 아는 위빳사나 지혜,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성취한 것이 도와 과 지혜입니다. 다른 법이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법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그 팔정도를 새벽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실천수행하고 있는 이 순간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1초라도 무시하지 마십시오. 잊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내가 수행하고 있다고 기억할 때마다 잊지 않고 1초라도 무시하지 않는 정신으로 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복 받은 삶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가장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의 정법을 알아 믿게 되고, 몸과 마음으로 실행할 수 있는 사람보다 복이 많은 사람은 없습니다. 수행의 기본적인 이론과 실제를 확실히 알고 있지 않으면 수행할 때마다 헤매게 되고 애매모호해져서 자신의 수행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수행의 기본을 분명하게 알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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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 투어 제공

 

 그러면 법의 핵심인 팔정도를 좀 더 깊이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팔정도를 셋으로 분류하면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지혜, 바른 말과 바른 행위와 바른 생계가 계율, 그리고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와 바른 집중이 정, 이것이 곧 계·정·혜 삼학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서 팔정도의 첫 번째 묶음인 계(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부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바른 말이란 거짓말, 이간질, 욕설, 쓸데없는 말 등 네 가지를 피하고 그 네 가지의 반대에 해당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 대신 진실을 말해야 하고, 서로를 갈라지게 하는 말 대신 화합하여 잘 지내게 하는 말을 해야 하고, 욕설이나 거친 말이 아니라 자비로운 말을 해야 되고, 쓸데없는 말 대신에 쓸모 있고 남에게 이익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바른 행동이란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을 피하는 것인데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살생을 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살려주고 오래오래 살게 도와주는 것, 도둑질을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호해 주고 보태주는 것, 삿된 음행 안 하고 상대방을 보호하고 위해 주는 것 등이 이에 속합니다.


 바른 생계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방금 전에 말했던 나쁜 행동과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바른 생계입니다. 이 안에는 앞에서 말한 나쁜 행위 세 가지와 나쁜 말 네 가지를 피하는 것이 다 포함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악으로 단정하여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행위를 한 사람의 마음, 의도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살생이라도 그 의도에 따라 죗값이 다를 수는 있지만 살생은 어떤 경우에도 불선업입니다. 여러 사람을 살려주기 위해서 살생하건, 나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살생하건 살생은 살생입니다. 불선업은 불선업의 죄를 받아야 되고 선업의 경우에는 선업의 공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이며 그 둘은 함께 하지 않습니다. 기름은 기름이고 물은 물이며 그 둘은 섞이지 않습니다. 선업은 선업이고 불선업은 불선업입니다. 이 둘의 중간은 없습니다.

 

 계율을 왜 지켜야 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계율이라는 것이 건물의 기초하고 똑같습니다. 기초가 약하면 건물이 높이 올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계율이 약하면 정과 혜가 올라가지 못합니다. 다른 노력을 많이 한다 해도 기초인 계율이 약하기 때문에 그 노력들이 흔들려서 높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몸과 입이 청정하지 않은 사람이 마음이 청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율이 더러우면 마음 또한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정합니다. 안정적인 마음을 갖출 수가 없기 때문에 정이 깊어질 수 없고 그러면 혜가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이렇게 계·정·혜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 나는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니 수행을 할 수 없겠다.’ 하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율과 지혜는 연관이 되어 있어서 사람이 지혜로운 만큼 계율이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계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아예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니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의 내 지혜와 집중이 약한 상태에서는 계율을 깨끗하게 지킬 수 없지만 지혜와 집중을 높이는 만큼 계율을 높일 수 있고, 계율을 높이는 만큼 집중과 지혜도 따라서 높일 수 있습니다. 계·정·혜가 이렇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수행을 많이, 열심히 할수록 지계가 분명해지고, 그만큼 더 깨끗하게 살고 싶어지고, 마음이 착해지고, 그렇게 차츰 좋아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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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정도의 두 번째 묶음은 정(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입니다. 바른 노력은 다음 네 가지를 말합니다. 즉 했던 불선업을 다시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하지 않은 불선업을 아예 안 하도록 노력하는 것, 하지 못한 선업을 열심히 찾아서 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이미 한 선업을 반복해서 더 많이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른 노력은 수행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필수적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불선업을 했으면 ‘이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그대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선업을 저지르고 싶어질 때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막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수행 중에는 수행 대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그렇게 하면 바른 노력 네 가지가 다 포함됩니다. 수행의 대상만 매 순간 관찰하고 있으면 했던 나쁜 짓도 다시 할 생각이 없어지고, 하지 않은 불선업을 할 생각조차 나지 않겠지요. 생각이 났다 해도 금방 그것을 알기 때문에 곧바로 사라져서 거기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 중에 수행 대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기만 해도 이 네 가지가 다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평소 내가 하지 못한 선업 즉 도 지혜 과 지혜도 수행 중에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머리로 열심히 생각하면서 선업을 짓지만 수행 중에는 따로 머리 쓸 일 없이 대상만 놓치지 않으면 네 가지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할 것이 바른 사띠입니다. 사실 바른 사띠는 바른 노력이 있으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사띠란 불·법·승 삼보와 선업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업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선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일만 생각하고 좋은 일만 하려고 하는 것, 생각날 때마다 좋은 행동, 좋은 말,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바른 사띠입니다. 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자, 항상 좋은 생각 하고 좋은 말 하고 좋은 행동 하고, 내가 원하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그것에 필요한 것을 계속 만들어 가는 것, 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선업을 잊지 않음이 바른 사띠입니다. 수행 중에도 수행의 대상을 잊지 않는 것이 사띠입니다. 호흡을 관찰할 때 호흡을 잊지 않으면 그것이 사띠가 있는 것이고,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사람이 배가 부르고 꺼질 때 그것을 잊지 않으면 그것이 사띠입니다. 또 부풂 꺼짐을 잊어버리고 딴 생각하더라도 ‘생각하고 있네.’ 하면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것이 또한 사띠입니다. 생각하다가 화가 났으면 ‘화내고 있네.’ 하고 화내고 있는 것을 잊지 않음이 사띠입니다. 이렇게 몸·느낌·마음·법 중 내 몸의 뭔가 하나를 한 순간에 하나라도 확실하게 알면 수행자가 수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른 사띠입니다. 그것이 바로 법입니다. 불법승과 선업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선업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노력이고 바른 사띠이고 바른 생각이고 바른 견해이기 때문에 선업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정정, 바른 삼매이고 그 중 제일 높은 것이 8선정입니다. 8선정뿐만 아니라 근접삼매도 삼매이고 순간적인 삼매도 삼매입니다. 숨을 쉴 때 두 가지로 알 수 있지요. 개념적으로 알면 사마타, 궁극적인 실제를 알면 위빳사나입니다. 예를 들어 숨을 쉴 때 대상을 개념적으로 잡고 ‘지금 들이쉬고 있네, 내쉬고 있네.’ 하며 들숨 날숨만 알고 있으면 사마타, 호흡에서 따뜻함, 차가움 등 궁극적인 실제의 특징을 알고 있으면 위빳사나입니다. 어떻게 하든 마음이 대상에 한 번 집중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수·화·풍 사대 중에 따뜻함이라는 화대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집중했기 때문에 그 화대의 사실을 따뜻함, 차가움으로 알게 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그렇게 알 수 있게끔 마음이 가만히 대상에 있는 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계율이 밑에서 받쳐주고 집중이 마음을 가만히 있게 해주면 그 순간 수행자가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확실한 앎이 생기는 것이고 그 확실한 앎이 바른 견해입니다.

 

 팔정도의 세 번째 묶음은 혜(바른 견혜, 바른 사유)입니다.

 

 노력이 없으면 사띠가 없고, 사띠가 없으면 집중이 불가능합니다. 그 노력, 사띠, 집중이 다 마음속의 대상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주는 일을 합니다. 반복하자면 사띠는 마음속에 있는 대상을 분명하게 만들고, 마음이 대상에 딱 붙어 집중할 수 있도록 대상을 계속 기억하며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띠가 대상을 주의 깊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고요하면서 차분하게 대상에 온전히 붙어있을 수 있고 이것이 집중입니다. 그러면 ‘아, 따뜻하구나. 차갑구나. 딱딱하구나. 움직이고 있구나.’ 하면서 대상의 특성을 파악하여 알게 되고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생기지 않으면 그 자리에 바로 사견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지혜와 생각은 100%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가 그렇게 계속 관찰함으로써 물질이면 물질의 사실 그대로를 압니다. 그래서 물질을 단지 물질만으로 알 뿐 그것을 나, 너, 남자, 여자, 예쁘다, 어떻다, 저렇다 이런 식으로 착각하지 않게 됩니다. 위빳사나가 그런 것입니다. 바른 견해가 일어나면 바른 생각이 일어나고, 사견이 일어나면 나쁜 생각이 일어납니다. 나쁜 생각이 바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가지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생각하고, 욕심 부리고, 싫어하고 좋아하고 그런 것인데 이것들이 다 사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견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무지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가 없으면 사견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사견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잘못 행동하고, 잘못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계율이 깨끗할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팔정도가 모두 서로서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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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수행하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지극히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수행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을 확실하게 알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도 똑같이 알 수 있게 됩니다. 내 몸과 그 사람 몸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물질과 정신만 이해하면 이 우주 세계를 다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우주에 물질과 정신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몸과 마음이라는 간단한 기계를 통해서 아주 복잡한 기계인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수행은 이렇게 크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하면서 생기는 지혜들이 정견, 그 지혜를 따라 일어나는 올바른 생각들이 바른 생각, 정사유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이 팔정도이고, 이 팔정도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머리에 못이 박힐 정도로 확실하게, 결코 잊혀지지 않도록 공부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법에 의심이 생기지 않고 수행도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이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의심 때문입니다. 조금 하다가 의심이 일어나면 남들에게 물어보고, 책도 읽어 보고 또 조금 하다가 이것저것 다른 것을 해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면 수행이 제대로 되질 않습니다. 수행에 대한 이론이 확실하면 자신이 실천하는 수행에 대해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론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 이론 그대로 실천해 보니까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있고, 그 체험이 쌓이는 만큼 자신감도 증가합니다. 그런 만큼 신심도 좋아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신심이 생기는 것과 다른 교단에서 말하는 믿음은 전혀 다릅니다. 다른 교단의 믿음은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인 데 반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가 실천하고 확인하여 아는 만큼 믿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믿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행을 통해 내 몸과 마음을 내가 아는 만큼 믿는 것, 내가 확실하게 알아서 더 이상 의심이 없는 것, 그래서 수행은 계속 체험하면서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신심이 좋아지면 노력이 좋아지고, 신심의 힘 따라 노력의 힘이 생깁니다. 신심을 키우려면 지식과 지혜, 체험이 필요합니다. 즉 내 지식의 힘, 지혜의 힘, 체험의 힘이 신심의 힘이고 그 신심이 노력의 힘입니다. 믿는 만큼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수행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심 있는 만큼 노력하고, 노력하는 만큼 사띠가 강해지고, 사띠가 강한 만큼 집중이 강해지고, 집중이 강한 만큼 지혜가 높아지고……. 이렇게 모든 게 다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생기는 신심으로 수행을 하고, 거기서 체험을 얻으니 신심이 깊어지면서 더 노력하게 되고, 그 노력에 맞게 사띠가 되고, 사띠에 맞게 집중, 지혜가 되면서 수행이 계속 흘러갑니다.

 

 수행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과거·미래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수행하면서 집중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나 미래를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 중 집중이 안 된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생각이 많은 것이고 그 생각이 과거나 미래에 있기 때문에 집중이 안 되고 수행이 안 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길게 지속되느냐 짧게 끝나느냐는 그 사람의 신심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노력이 부족하여 계속 길게 수행 대상을 놓치고 있는 사람은 신심부터 다시 키워야 합니다. 신심이 없으면 법문을 많이 들어야 하고, 수행에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마타 수행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렇게 신심과 노력을 키운 후에 수행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수행이 잘 안 될 때는 수행할 수 있는 자세를 잡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많이 생각하고, 자애를 많이 베풀고, 몸에 대해 부정관을 많이 하고, 죽음에 대한 수행을 많이 하면서 수행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수행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제대로 수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팔정도를 계속 수행함으로써 무상·고·무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냥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하다가 그 관찰로 집중과 지혜가 높아지면 이 몸과 마음이 무상한 것, 고통스러운 것, 무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무상·고·무아를 알고, 고성제를 알고, 집성제가 떨어지고, 멸성제에 도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 길을 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관찰한다.’ 지금 여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 현재, 그리고 다른 여기저기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지혜에서 진리를 얻는 것인데 진리는 가짜 속에 없고 실제, 사실 속에 있습니다. 지금 현재 있는 대상을 봐야 실제를 안다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실제 속에서 우리가 진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의 기준이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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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이 안 되는 세 번째 이유는 게으름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수행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적당한 노력인데 적당한 힘을 한 순간도 내려놓지 않고 끊임없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노력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람바 위리야’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하는 노력으로 ‘아, 내가 수행해야지, 어느 수행처에 가서 일주일 수행해야지.’ 하고 신심을 내서 하는 노력을 가리킵니다. 이 첫 번째 노력은 어지간한 사람은 다 합니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노력인 ‘닉까마 위리야’란 모든 어려움을 떨치면서 견딜 수 있는 힘, 그런 노력을 말합니다. 수행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일도 하다 보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면서 참아내는 힘, 꺾이지 않고 견디는 힘이 닉까마 위리야입니다. 세 번째는 ‘빠락까마 위리야’로 하나 끝나고 그 다음에 하나, 그것 끝나고 다시 그 다음에 또 하나…, 이렇게 끊임없이 끈기를 가지고 계속 하는 힘을 말합니다. 수행 중에는 어려움을 떨쳐버리고 견디는 끈기와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하는 중에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리고, 그 다음에 쉬고 그러면 수행은 희망이 없습니다. 수행으로 모았던 힘을 계속 이어받아 새벽에 잠에서 깰 때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앞뒤 연결이 끊어지지 않아야 수행이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수행은 그 누구도, 부처님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계속 끊어지지 않게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 아주 중요한 것이 빠락까마 위리야입니다.

 

 수행이 안 되는 네 번째 이유는 과도한 욕심입니다. 노력이 너무 강한 사람은 몸에 열이 올라오니 힘을 너무 심하게 쓰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아, 놓쳤어. 또 놓쳤어. 방금 전에 내가 관찰했나, 안 했나?’ 계속 이러고 있으면 수행이 깨집니다. 예전에 태엽 감아서 쓰던 시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세게 태엽을 감으면 끊어져 시계가 못 쓰게 되고 맙니다. 노력도 같은 이치입니다. 지나친 노력은 들뜸을 일으킵니다. 들뜸은 마음이 대상에 딱 붙어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놓친 것입니다. 이 들뜸과 망상은 조금 다릅니다. 망상은 마음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들뜸은 지금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맞는데 그것이 너무 강해서 수행이 망가지는 경우입니다. 열심히 수행하려는 의도는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나쁜 것입니다. 일상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조용히 일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정신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연히 힘을 빼며 요란스레 일하는 사람과 수행에서 지나치게 노력하는 사람이 똑같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바빠 보이지만 사실 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조용하게 티 안 내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바빠 보이지 않지만 실은 일을 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 너무 노력이 강한 사람은 쓸데없는 힘을 쓰기 때문에 괜히 분주해보이기만 할 뿐 수행에 진도가 안 나갑니다. 마음이 대상과 떨어진 상태로 계속 움직이고 있어서 집중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 기분이 가라앉고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아, 내가 깨달을 수 없나 보다. 나는 수행 체질이 아닌가 보다.’하며 좌절하게 됩니다. 수행하다 마음이 약해지면 그 약해지는 마음을 계속 관찰해야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억지로 힘주려 하지 말고 포기하려 하는 그 마음을 관찰 대상으로 삼아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행이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수행을 방해합니다. 다른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이 수행을 잘 하는 것입니다. ‘아, 내 마음이 이렇게 되고 있구나.’ 하고 알면 신·수·심·법 중에 심과 법을 많이 보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행이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으면서 집중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데 집중이 안 된다 싶으면 ‘내가 체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과 만났다, 사람으로 태어났다, 지금 이 법을 이해하고 있다.’ 하면서 꾸준히 수행하면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체질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조금 부족해서 그렇게 되고 있음을 알고 계속 수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 팔정도 수행을 열심히 하여 모든 고통 벗어난 닙바나를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3번).
붓다 사사남-부처님의 가르침이, 찌람-오래오래, 띳타뚜-머무소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승가 = 번뇌를 고문하는 자”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4-1
“성인의 가치는 ‘대단함’이 아니라 ‘얼마나 청정한가’를 보는 것”

2014-12-17 (수) 15:38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4. 승가와 위빳사나

 

한국에서 승가라고 하는 단어의 원어는 ‘상가’인데, 이 말의 뜻을 풀이하면  ‘번뇌를 고문하는 자’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깨달은 자를 분류하면 수다원도 수다원과, 사다함도 사다함 과, 아나함도 아나함과, 아라한도 아라한과 이렇게여덟 분(사람은 여럿일 수 있지만 여덟 부류의 성인)을 가리킵니다. 수계를 받았든 안받았든 상관없이 깨달은 자는 모두 승가라고 합니다. 즉 부처님의 법인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를 깨달은 자가 승가입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물질과 정신이라는 과정이끊기고, 원인과 결과가 끊기는 그 상태가 해탈, 닙바나입니다. 그닙바나를 알 수 있는 것이 도와 과입니다. 도를 처음 아는 것, 즉 해탈을 처음 보는 것이 도이고, 그 도의 똑같은 마음이 반복되는 것을 과라고 말합니다.수다원도를 깨달은 사람이 선정에 들어갈 때 수다원의 도 선정이라는 걸 반복할 수 없습니다. 도는 딱 한 번뿐인데 만약 반복한다면 그것은 수다원의 과 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 과 선정에 들어 있으면 한 시간 내내 해탈을 보고 있는 것이고, 두 시간 과 선정에 들면 두 시간 동안 해탈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다함의 도를 깨달을 때도는 한 번이고, 다시 사다함이 선정에 들어간다면 사다함의 과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나함, 아라한도 마찬가지이고, 과 선정에 들어갈 때가 해탈을 알고 있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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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신통지가 있으면 승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데와닷다는 신통지가 있었지만 지옥으로 갔습니다. 즉 신통지는 깨달음의 기준으로 볼 수 없습니다.부처님이 신통지를 당신의 가르침이라고 하신 적이 없고, 신통지를 법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나의 출세간법은 아홉 가지다.’라는 말을 부처님이 여러 번 하셨는데, 세상을 초월하는 법이 출세간법입니다. 즉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닙바나(해탈) 이 아홉 가지를 깨우친 사람을 승가라고 말하는 것이지, 신통지 있는 사람을 승가라고 할 수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라문교나 기타 다른 교단에서도 신통지를 가진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런사람들과 부처님의 제자, 승가를 혼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비구는 신통지가 있어도 보여주면 안 된다.”라는 계율을 남기셨습니다.일반적인 신통지와 부처님 가르침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 신통지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대단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불법의 가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단한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치자면 기네스북을 보면 됩니다.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우리가 그들을 부처님으로 모실 수는 없습니다. 성인의 가치는 ‘대단함’이 아니라 ‘얼마나 청정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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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원이 되면 사견, 의심이 없어져 많이 깨끗해지고, 사다함이 되면 더 깨끗해지고, 아나함이 되면성냄이 없어져 마음이 더 깨끗해지며,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없어지니, 그런 청정함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수행처에서 번뇌를 대할 때와 집에서 번뇌를 대할 때를 비교해보십시오. 집에서는 번뇌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번뇌에 끌려 다니면서 살게 됩니다. 수행처에 오면 번뇌가 여러 가지를 시키지만그것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러면 그 번뇌가 제풀에 지쳐버려 소멸되어 버립니다. 번뇌를 강제로 죽이는 것이 아니고, 제거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오로지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시키는 것을 어떤 것도 따르지 않으니까 번뇌가 지쳐서 차츰 잘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번뇌가 왜 지칩니까? 수행자가 번뇌를 고문하기 때문에, 괴롭히기 때문에 지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하는 일이 매 순간 번뇌를 괴롭히는 일, 번뇌를 고문하는 일이고 그렇게 수행하는 수행자가 승가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를 깨달은 자가 승가이고,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를 깨닫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 승가입니다.


삶 자체가 번뇌인데, 번뇌를 고문하는 자가 승가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도록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스님들이탁발해서 먹는데 자신이 따뜻한 것을 먹고 싶어도 보시자가 찬음식을 주면 그것을 먹어야 합니다. 반대로 찬 음식을 먹고 싶은데 뜨거운 음식을 주면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2500년 전의 스타일 그대로인 가사를 입는데 때로 다른 모양의 옷을 입어보고 싶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번뇌를 고문하는 것입니다.잠자는 것도 그렇습니다. 스님들은 거의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4시 정도에 일어납니다. 많이 자고 싶어도 잠을 줄여야하는데 이것 또한 번뇌를 고문하는 것이지요. 스님들의 비구 계율을 읽어 보면 엄청나게 지켜야 할 것이 많은데 그 계율의 뿌리는 모두 번뇌를 고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계율에 따르자면 정오 이후부터 다음 날 새벽 동 틀 때까지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것도 번뇌를 괴롭히는 것, 번뇌를 고문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번뇌를 이깁니다. 그래야 승가입니다. <계속>



“깨달은 자가 승가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4-2
“신도들의 은혜 갚으려면 계·정·혜를 실천하고 바르게 전달하라”

2014-12-26 (금) 15:29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비구’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돌아다니면서 밥을 얻어먹는 자’입니다. 탁발은 오직 주는 것만 받아먹는 것입니다. 그럼 거지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 거지는 계율을 지키지 않고 남이 주는 것을 받아먹고 그저 놀기만 합니다. 그러니 비구가 남의 것을 받아먹고 놀고만 있으면 거지하고 똑같습니다. 비구는 받아먹고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과 거지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또 거지가 음식을 받아먹고 자애를 베풀면서 여러 사람을 지혜롭게 가르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구는 받아먹지만 그것보다 훨씬더 많은 것으로 되돌려 주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나에게 보시하는 사람한테 공덕을돌리려고, 제대로 살려고, 똑바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비구의 관심사여야 하고,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수행할 때도 항상 내가 하는 공덕을 나를 받쳐주는 신도들에게회향하고, 그 신도들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위험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자애를 베풀고, 또 신도들로 하여금 착한 마음으로 선업을 지을 수 있게 가르치고, 죽어서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이나 신 또는 범천으로 태어나도록, 할 수 있으면 해탈까지 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살기 때문에 거지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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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비구’의 또 다른 의미는 ‘윤회에서 위험을 보기 때문에 출가하는 자’입니다. 출가할 때 ‘이 생‧노‧병‧사의 윤회가 참으로 위험하구나, 고통이구나.’라고 알고 출가해야 제대로 된 비구입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몸에 있는 순간적인 윤회를 알아야 더 넓은 의미의 윤회도 알 수 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에 매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이 윤회를 알아야 전생, 금생, 후생이라는 윤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함으로써 윤회의 무서움을 알고,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부처님께 와서 비구가 되기를 청할 때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 ‘존귀하신 부처님, 윤회의 굴레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자가 되기를 청하오니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출가자로 만들어 주십시오.’였습니다.


  승가의 가치는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에 있습니다. 그 네 가지 도를 깨치고 해탈을 본 사람이 승가입니다. 승가에 대한 정의가 이렇게 확실해야 출가해서 내가 어떤 승가가 될 것인지도 확실해질수 있습니다. 그 승가가 번뇌를 고문하는 방식이 바로 부처님의 법이고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실행하는 것 자체가 번뇌를 고문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법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 출가자로서의 의무이고, 팔정도 수행을 하면서 항상 기쁘게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스님들의 마음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착한 신도들을 위해 출가자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다 비슷합니다. 그래서 신도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정작 해야 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계속 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구로서 신도한테 은혜를 갚고 싶다면빨리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깨닫고 깨달아서 그것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으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고,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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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 신도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여도 그것이 신도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신도들이 부부싸움 없이 잘 살도록 가르쳐도 그것이 그들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신도들의 아들딸을 내가 지켜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도들한테 지혜를 주면 그것은 모든 것을 보장합니다. 참된 지혜가 있으면 그 사람은 돈이 있건 없건 행복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세력이 있거나 없거나 행복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지위가 높든 낮든 행복합니다. 반면에 지혜가 없으면 어떤 것을 갖고 있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된다고 다 행복하겠습니까? 대통령은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자기 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의 대통령을 보면 기가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어느 나라 대통령도 다 같습니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항상 비교하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으로 살게되어 있습니다. 오직 지혜만이 그런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줍니다. 따라서 출가자로서 신도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으면 계·정·혜를 본인이 실천하고 계·정·혜를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은혜를 갚는 최고의 길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계·정·혜에 관심을 갖게 하고, 바르게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몸소 실천할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비구 비구니의 의무이고, 그렇게 살 때라야 비로소 승가다운 승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승가의 의미를 정리하자면, 깨달은 자들의 모임이 승가입니다. 승가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 깎고 부처님의 계율에 맞게 수계 받고 비구 비구니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머리를 깎았든 안 깎았든, 가사를 입었든 안 입었든, 수계를 받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재가자도 깨달으면 이 또한 승가입니다. 그런 경우가 궁극적인 의미의 승가입니다. 즉 깨달은 자가 승가입니다.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승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승가의 바른의미와 해야 할 일을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 팔정도 수행을 열심히 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를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계속>



“부처님의 공덕은 맹신 대상이 아니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5-1
“부처님 공덕은 올바르고 완벽하고 확실하고 견줄 곳이 없어”

2014-12-31 (수) 15:12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5. 삼보의 공덕

 

 지금까지 삼보와 위빳사나의 정확한 개념, 그리고 서로의 관련성에 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승가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삼보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도 이해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불·법·승의 공덕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부처님, 즉 불보의 공덕은 아홉 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은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첫 번째 공덕이 ‘아라한’입니다. 모든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음에 하나도 때가 묻어 있지 않은 분, 그래서 모든 이로부터 온갖 공양과 예경을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이들은 착하고 도덕성이 좋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종교나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아라한이란 바로 이런 분입니다.

 

 두 번째 공덕은 ‘삼마삼붓도’입니다. 사성제 진리를 비롯한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법칙과 같은 것이어서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것입니다. 그런 진리를 확실하고 완벽하게, 누구한테 배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여 깨달은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세계적으로 매우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가 발견한 이론으로 인류가 크게 발전한 면이 분명히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핵무기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핵은 여전히 인류의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론은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완벽한 진리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처님이 찾아낸 진리는 이와 달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바르게 실천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습니다.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정신을 잃었던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좌절하여 인생을 포기하려다가 내면적으로 크게 변화하여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런 변화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예외 없이 고통에서 행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런 완벽한 진리를 스스로 깨우치신 분이 삼마삼붓도의 의미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알고 계속 마음속으로 반복하면 ‘붓다눗사띠’라는 사마타 수행이 됩니다. ‘부처님이 이런 분이다.’라는 부처님의 공덕을 대상으로 하여 아라한, 아라한, 아라한……, 삼마삼붓도, 삼마삼붓도, 삼마삼붓도……, 하고 반복하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많이 하는 것이 ‘나모석가모니불’인데 그 의미를 알고 하면 수행의 공덕이 훨씬 커집니다. ‘나모’는 ‘절합니다.’라는 뜻으로, 인도에 가면 인사말이 지금도 ‘나마스떼’입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라는 의미의 인사말이지요. 한국의 ‘석가’는 ‘샤카’라는 부처님의 민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도의 소수 민족인 석가족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모니’ 즉 ‘무니’는 출가자 또는 ‘붓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나모석가모니불’이란 ‘석가족에서 출가하신 부처님께 절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깨달으신 분임을 알고 절을 하면 그 절의 가치가 더욱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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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세 번째 부처님 공덕은 지혜와 수행이 완벽하신 분이어서 ‘윗자짜라나삼빤노’입니다. 부처님의 지혜 여덟 가지 중 핵심적인 것 세 가지를 보자면 첫째와 둘째가 신통력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날 저녁 무렵 명상을 하시면서 전생을 보는 신통지를 얻으셨습니다. 업과 과보를 모두 아시고 전생과 후생을 빠짐없이 보는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이 죽음과 다시 태어남(재생)을 아는 지혜인 천안통으로 어떤 중생이 어디에서 죽어서 다음 생에 어디에서 무엇으로 태어나는지, 그리고 태어날 때 무슨 업의 과보로 태어나는지를 다 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세 번째는 일체 오욕락에 대한 욕심과 생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고, 어떤 어리석음도 남지 않고 사라지는 아라한의 도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 실천수행하신 대상은 다음 15가지입니다. 즉 지식, 지혜, 신심, 노력, 알아차림, 선업을 못하거나 불선업을 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선업을 못한 것이나 불선업을 한 것에 대한 두려움, 음식 절제, 깨어 있음, 지계, 육근 청정, 네 가지 선정 등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하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지행일치의 최고 경지에 이른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것을 스스로 빠짐없이 그대로 실천하신 공덕을 갖추신 분입니다.

 

 네 번째 부처님의 공덕은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 아름답게 오셨다가 닙바나로 아름답게 가신 분이어서 ‘수가또’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2557년째인데(2013년 기준) 아직도 사람들이 부처님을 늘 존경하고 그리워하며 그 마음을 불상에 새겨 모십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중생들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알고 그것에 지극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불자를 세 부류로 나눠 보면 부모님이 불자라서 저절로 불자가 된 소위 ‘전통 불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심 불자’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부처님에 대해 잘 모르고 무조건 부처님이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과는 달리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하게 알면서 믿고 따르는 ‘지혜 불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법을 바르게 전하고 지킬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인도네시아는 불교 국가였고 사람들의 신심이 매우 깊어서 지금도 그 나라에 남아있는 불탑들의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사람들도 아주 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신심에 견줄 만한 지혜가 부족하여 불교를 계속 지키지 못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이슬람 신도가 많은 이슬람 국가가 되었습니다. 지혜 불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수가또의 또 다른 의미로는, ‘좋은 말만 하신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아주 다양하지만 내용으로 분류하면 대략 여섯 가지 정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중에서 네 가지 말을 피하고 두 가지 말만 하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섯 가지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는 진실하고 올바르면서 이익이 있고 듣는 사람도 좋아하는 말로 이것이 최고의 말입니다. 이 좋은 말을 들으면 마음이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고, 또 그 말대로 실천해서 돈이 생기거나 건강해지거나 다음 생까지 이익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하신 말입니다. 두 번째 말은 진실하고 올바르며 이익이 있는데 듣는 사람은 싫어하는 말입니다. 우선 귀에는 거슬리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이익이 있는 말이 이에 해당합니다. 듣는 이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해야 하는 경우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서 그 말을 하셨습니다. 다음은 경전에 전해지는 일화입니다.


 뽓틸라라는 삼장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삼장법사라는 자만심이 대단하여 어디 다닐 때는 항상 제자들 500명과 동행하며 유세를 떨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오자 부처님이 갑자기 “뚯사 뽓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말로 하면 ‘쓸데없는 놈 뽓틸라!’라는 뜻입니다. 여러 사부대중 앞에서 거의 욕설에 가까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강한 말을 듣지 않고서는 그가 수행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마음을 바꾸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들의 스승인 본인은 정작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가르치기만 할 뿐 자신은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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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아무리 경전을 많이 알고 강의를 잘한다 해도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뚯사.”

 

 이 말을 듣고 너무 부끄러워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수행을 한 뒤에 그는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당장 듣기 거북하고 힘들어도 듣는 이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경우에는 부처님께서 그렇게 강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이익이 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하지 않으신 나머지 네 가지 말은 이렇습니다. 즉 진실하지만 말을 해도 이익이 없고 듣는 사람이 좋아하는 말, 진실하지만 이익이 없고 듣는 사람이 싫어하는 말, 진실하지 않고 이익이 없으며 듣기에는 좋은 말, 진실하지 않고 이익도 없으며 듣는 사람도 싫어하는 말입니다. 그 중 마지막 것이 가장 나쁜 말입니다. 사실도 아니고 누구에게도 이득이 없으면서 듣는 사람도 싫어하는 말이니 전혀 할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한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의 부처님 공덕 네 가지를 모두 이어서 하면 아라한,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입니다. 부처님께 절을 할 때 이 공덕을 마음에 새기면서 하면 그 절은 의미를 모르고 그냥 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높아집니다. 지혜가 있는 공덕과 지혜가 없는 공덕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부처님의 다섯 번째 공덕은 부처님께서 세상을 확실하게 잘 아시는 분이어서 ‘로까위두’입니다. 부처님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빠짐없이 밝혀 놓으셨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친구는 어떻게 사귀는지, 사람이 망가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등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 사회 전반에 대한 이야기, 가족 이야기, 공부 관련 이야기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최종적인 목적인 해탈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를 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절대 아닙니다.


‘로까위두’라고 할 때 ‘로까’는 ‘세상, 세계’라는 뜻으로 삿따 로까, 오까사 로까, 상카라 로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삿따 로까’는 중생계를 말합니다. 지옥생, 축생, 귀신생, 아수라생, 인간생, 천신생, 범천생 등이 그에 속합니다. 그 중생의 세계를 부처님이 다 아십니다. ‘오까사 로까’는 공간계를 가리킵니다. 그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상인 이 지구뿐만 아니라 31천 모든 우주를 부처님께서 아셨습니다. ‘상카라 로까’는 인과계를 뜻합니다. 원인과 결과 또는 상대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중생계, 공간계,  인과계의 모든 것을 아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공덕을 ‘로까위두’라고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공덕은 인류를 교화하는 데 최고이신 분이어서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라티’입니다. 인류사에서 사람을 교화한 훌륭한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을 아라한이 되도록 이끈 분으로 부처님을 따라올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일곱 번째 공덕은 삿타데와마눗사남입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인간, 신, 범천 등 모든 이의 최고 스승이라는 의미입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 살아 계실 때 범천이나 신들이 인간 세계에 왔다가 부처님과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실천하여 세간의 이익, 출세간의 이익을 많이 얻었습니다.

 

 여덟 번째 공덕은 붓도입니다. ‘붓도’는 ‘사성제를 아시고 남들도 사성제를 알고 깨달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 부처님의 공덕은 바가와입니다. ‘바가와’는 ‘위대하신 부처님, 거룩하신 부처님, 모든 공덕을 갖추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는 따타가따, 바가와, 붓도를 많이 씁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지칭할 때 ‘따타가따’를 많이 쓰셨고, 여러 사람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의 호칭은 주로 ‘바가와’와 ‘붓다’였습니다.

 

 부처님의 공덕 9가지를 모두 불러보겠습니다.
 
 아라한,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뿌리사담마사라티, 삿타데와마눗사남, 붓도, 바가와. <계속>





“승가 = 선업의 씨앗 심는 최고 논밭”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5-2
“머리 깎고 가사 입고 수계 받았다고 해서 모두 승가인 것은 아냐”

2015-01-09 (금) 17:37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불·법·승 삼보의 공덕을 말할 때 삼보의 3, 부처님의 공덕 9가지, 법의 공덕 6가지, 승가의 공덕 9가지를 합쳐서 3, 9, 6, 9로 많이 표현합니다. 이어서 법보의 여섯 가지 공덕을 알아보겠습니다.


 법보의 공덕 첫 번째는 ‘스왁카또’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닙바나와 경전 이렇게 열 가지라고 앞에서 설명했었지요. 네 가지 도란 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를 이르며, 네 가지 과란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를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경전은 엄밀히 말하면 법 자체라기보다는 법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 고귀한 열 가지 법은 듣기만 해도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져 고요해지고, 이 법이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면 행복해지며,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봐야 나를 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보의 공덕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외모에 너무 애착 집착했던 왁깔리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는 부처님 법문을 들은 후 아름다운 부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 출가하였는데, 수행은 하지 않고 만날 부처님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법문만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거들어가기 전에 부처님이 갑자기 왁깔리를 부르시고는 “여기서 안거하지 마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안거가 3개월 정도인데 부처님 곁을 떠나라고 명하셨으니 안거 끝날 때까지 그 스님이 부처님을 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왁깔리에게 수행을 해야 한다고 여러 번 일러 주셨지만 따르지 않자 피와 내장, 심장이나 폐, 뼈, 고름, 대변 소변 등 더러운 것이 꽉 차 있는 이 몸만 보고 있으면 무엇 하겠느냐고 야단을 치신 것입니다. 그렇게 왁깔리를 내치시면서 그 스님에게 해 주신 법문이 바로 ‘법을 봐야 나를 본다.’입니다. 부처님을 좋아하지 않고 불자가 아닌 사람도 부처님의 법을 직접 실천해 보면 부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불자라고 말하면서도 법을 실천 수행하지 않으면 결코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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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여래투어 제공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미움과 증오를 부추기는 것이 전혀 없이 오직 지혜와 선한 마음을 강조하고 그런 것을 가르칩니다. 좋은 가르침인지 아닌지는 가르침대로 실천했을 때의 결과를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과 그것을 실천한 결과가 같으면 좋은 가르침이고, 가르침과 결과가 각각이면 좋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법인 계·정·혜를 닦으면 우리가 갖고 있는 번뇌가 사라지고, 번뇌가 사라지면 지혜로워지면서 행복해진다는 것을 우리가 수행해 보면 지금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수행해 보면 수행 안 할 때와 수행할 때가 얼마나 다릅니까. 각자가 얻는 이익의 크고 작음에 차이가 나는 것은 수행의 정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공부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를 수 있는데, 많이 알면 알수록 불법의 첫 번째 공덕인 스왁카또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 쓰는 대로, 말 하는 대로, 몸을 쓰는 대로 그 결과가 온다는 것, 즉 자신의 힘을 좋게 쓰면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고, 그 힘들을 완전히 소멸시키면 그 힘이 행사를 못하기 때문에 다시 업보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도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입니다.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도 뚜렷한 길이 있습니다. 그 도와 과를 얻게 되면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분명히 밝혀 놓았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변하는 것을 수행을 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어도 지혜를 계발한 만큼 심리변화가 오고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을 본인이 수행함으로써 검증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자신이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 법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이것이 또한 스왁카또의 의미입니다.


 법보의 두 번째 공덕은 ‘산딧티꼬’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누구든지 법을 따라 바르게 실천하면 그것이 진리임을 스스로 분명히 확인하여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듣고 거기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실천하고 검증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다음 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하는 만큼 바로바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공덕은 ‘아깔리꼬’입니다. 네 가지 도를 깨달으면 시차를 두지 않고 곧바로 이어서 네 가지 과를 얻을 수 있는 공덕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이 수다원의 도를 깨치면 수다원의 도가 원인입니다. 도 다음에 바로 과 마음이 와서 도와 과 사이에 시차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다함도 다음에 바로 사다함과가 따라옵니다. 이것이 아깔리꼬의 의미입니다.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해탈이 법인데 그 법이 아깔리꼬예요.


 네 번째 공덕은 ‘에히빳시꼬’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보름날의 달처럼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와서 보시오.’라고 충분히 초대할 만한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좋은 가르침이고, 본인이 하는 만큼 바로 그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고, 도와 과는 시차가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법은 ‘와서 보세요!’라고 초청할 만한 것입니다. 아주 좋고 확실하기 때문에 누구한테든지 추천해줄 만한 것이니 와서 보세요,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와서 해보세요, 해보면 당신이 알 것입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다섯 번째 공덕은 ‘오빠나이꼬’입니다. 부처님의 법 네 단계 중 첫 단계인 수다원 도만 깨달아도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머리카락과 옷에 붙은 불을 끄는 것보다도 먼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 수행입니다. 휴대폰을 늘 들고 다니는 것처럼 항상 부처님의 법을 아주 가까이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법이 내 마음속에 한 번만 나타나도 사악처에 떨어지는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니 이 법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늘 몸 가까이 소지하고 다니는 것은 귀하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렇고 사물도 마찬가지인데, 내 가까이에 두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고 나한테 유익하고 나에게 무언가가 좋기 때문에 가까이하는 것이고 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법도 가까이 둬야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부처님의 법을 계속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이 아주 큰 공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 순간 수다원의 도를 깨우치면 그 어떤 다른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머리카락에 불이 났을 때 불을 끄는 게 가장 시급하고 가슴을 창에 찔렸을 때 그 창을 빼는 것이 가장 시급한데, 그것보다도 더 시급하게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법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므로 다른 어떤 일보다 최우선으로, 제일 빨리 해야 하는 것이 이 수행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공덕은 ‘빠짯당 웨디땁보 윈뉴히’입니다. 즉 부처님의 이 고귀한 법은 사성제를 깨달으신 지혜로운 성인들이 각자 알아서 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깨달은 것을 남들과 같이 누려야 하는 게 아니고, 내가 깨달았다면 그것은 오직 내가 누리는 나의 해탈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해탈을 사리불과 같이 나눠서 누릴 필요가 없고,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과 선정에 들어가서 해탈을 알고 누리고, 사리불도 사리불의 과 선정에 들어가서 해탈을 알고 누리고, 목련 존자도 목련 존자의 과 선정에서 자기 해탈을 알고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아라한 등 모든 성인이 각각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범부들은 법을 모르고 해탈도 모르기 때문에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법, 도와 과, 해탈이 진짜 법이고 그 법을 깨달은 자들만이 각각 자기의 법을 자기가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하면 완전한 해탈이고, 열반하기 전에도 자기의 해탈을 다른 사람하고 나누는 게 아니고, 자기 해탈을 자기가 각각 알고 누리는 것이 바로 빠짯당 웨디땁보 윈뉴히입니다.


 올바른 불자로서 불법을 바르게 실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삼보의 정의를 바로 알아야 하고, 위빳사나 수행 방법을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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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승가의 공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공덕은 존귀하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법을 그대로 따르는 제자인 승가의 성인 여덟 분은 특별히 수행이 뛰어나셔서 ‘숩빠띠빤노’입니다. 승가가 승가다우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수행으로 계·정·혜를 바르게 실천 수행하고 자애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승가의 행복입니다.


 삼보의 공덕은 무턱대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으며 그 공덕을 제대로 알고 있을 때 불·법·승 삼보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우러납니다. 부처님을 맹목적으로 믿을 때와 부처님의 공덕 아홉 가지를 바로 알았을 때의 존경심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승가의 공덕도 이와 같이 바로 알고 있으면 승가를 향한 공경의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승가에서도 더욱 승가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머리 깎고 가사 입고 수계 받았다고 모두 승가인 것은 아닙니다. 출가자로서 아홉 가지 공덕을 갖추고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계·정·혜를 닦고 있지 않다면 승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수행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커집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못하면서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승가의 두 번째 공덕은 존귀하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법을 그대로 따르는 제자인 승가의 성인 여덟 분은 닙바나를 성취하기 위해 오로지 수행 실천만을 올바르게 행하기 때문에 ‘우줍빠띠빤노’입니다. 계·정·혜를 열심히 닦으며 수행하는 것은 몸과 입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계율을 잘 지킴으로써 몸과 입을 청정하게 하고 수행을 끊임없이 함으로써 마음을 청정하게 닦아갑니다.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사띠도 좋아집니다. 사띠가 있는 사람의 삶은 지혜롭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사띠를 놓치지 않도록 잊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청정해질수록 이기적인 마음도 엷어져서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소중하게 여기게 되어 여러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커집니다. 그래서 자애로운 마음과 연민을 베푸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이 깊어질수록 업과 과보를 이해하는 마음도 커지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파악하는 힘이 커져서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점점 더 노력하게 됩니다.


 정직하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속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속임’이란 ‘나쁜 짓을 하면서 안 하는 척, 안 좋은 점이 있으면서 없는 척, 잘못이 있으면서 없는 척, 나쁜 점이 있으면서 없는 척, 악하면서 착한 척, 거짓말하면서 정직한 척, 못났으면서 잘난 척……’ 등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허풍, 못된 꾀’가 없다는 것인데 ‘계율을 안 지키면서 잘 지키는 척, 선정이 없는데 있는 척, 지혜가 없으면서 있는 척, 수행을 잘 못하면서 잘하는 척, 공덕이 없으면서 있는 척……’ 등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자신에게 안 좋은 점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번뇌가 있으면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그러한 점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고쳐 나가고자 성심껏 노력하는 삶을 삽니다. 이 정직함은 깨달은 자의 요소 중 하나에 속합니다.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갖춰야 할 요소는 건강, 정직, 노력, 신심, 지혜 등입니다. 깨달으신 분 즉 성인들은 정직한 분들입니다.


 세 번째 공덕은 존귀하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법을 그대로 따르는 제자인 승가의 성인 여덟 분은 입고 있던 옷과 머리카락에 불이 나도 그 불을 끄는 것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을 더 우선으로 실천하는 분들이어서 ‘냐얍빠띠빤노’입니다. 수다원이 된 사람은 사다함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사다함이 되면 다시 아나함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아나함이 되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또 노력합니다. 바르게 알고 깨닫기 위해서 승가는 끊임없이 계속 수행합니다. 오직 더 알기 위해서, 더 깨끗해지기 위해서, 더 지혜를 얻기 위해서 사는 것이 승가의 삶입니다.


 남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청정한지 아닌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수행이 바르고 깊을수록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깨달음을 성취하신 성인들을 귀하게 여겨 공경할 수 있게 됩니다.


 네 번째 공덕은 존귀하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법을 받아 그대로 따르는 제자인 승가의 성인 여덟 분은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실천수행을 하기 때문에 ‘사미찝빠띠빤노’입니다. 출가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는 것은 승가가 계율을 지키고 집중력을 키우고 지혜를 위해 수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승가답지 못한 삶을 산다면 그런 존경을 받을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을 성취하신 성인들은 사람들이 합장하거나 절하거나 존경을 보여줄 때 그 존경을 충분히 받을 만합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를 바르게 가르치고 수행하며 자애를 베풀다 돌아가신 스님들을 쉽게 잊지 못하고 오래오래 기억하며 그 은혜를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스님의 법문을 들음으로써 계·정·혜 삼학이 팔정도이고, 팔정도가 사성제이고, 12연기이고, 업과 과보이고……, 사성제 수행이 곧 사념처수행이라는 것 등 그 가르침들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두 같은 것의 다른 표현임을 알게 되니, 그 바른 앎이 바른 수행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바르게 수행하신 스님들을 신자들이 존경하고 따르며 기억합니다.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깨달음을 향해 바른 길을 가는 스님도 이렇게 존경을 받을 만하니, 깨달은 승가의 공덕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는 다시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깨달으신 여덟 분의 성인을 말할 때는 출가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 모두를 가리킵니다. 재가자라도 깨달은 경우에는 승가에 속합니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 승가의 공덕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와 과의 네 쌍인 승가 여덟 분은 받은 것을 몇 배로 하여 복으로 되돌려 줄 수 있으므로 먼 곳에서 가져온 귀한 재물 공양을 아낌없이 보시해도 충분히 받을 만하여 ‘아후네요’입니다.


 여섯 번째 공덕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와 과의 네 쌍인 승가 여덟 분은 세상에 부처님이 나오셔야 만날 수 있는 성인들이기에 온 세상이 반기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귀한 손님을 위해 챙겨 두었던 귀한 재물 공양을 보시해도 충분히 받을 만하여 ‘빠후네요’입니다.


 일곱 번째 공덕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와 과의 네 쌍인 승가 여덟 분은 다음 생을 위해 보시해도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귀한 모든 재물을 공양 보시해도 충분히 받을 만하여 ‘닥키네요’입니다.


 여덟 번째 공덕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와 과의 네 쌍인 승가 여덟 분은 온 세상이 공경하며 마음을 다해 합장하여 올리는 절을 받을 만하여 ‘앙잘리까라니요’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와 과의 네 쌍인 승가 여덟 분은 인간, 천신, 범천들이 선업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최고의 논밭이 되어주기 때문에 ‘아눗따람 뿐냣켓땀 로까사’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듯이 우리가 선업을 쌓을 수 있는 대상은 아주 다양할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씨앗을 심으면 농사가 잘 되어 큰 수확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승가에 선업을 쌓으면 그 공덕이 가장 큽니다. 선업 공덕을 짓기 위해서는 승가라는 논밭이 최고이다, 즉 승가를 통해 수행을 배워 익히고 보시를 하고 지계를 지킬 때 그 공덕이 가장 크다는 뜻입니다. 승가의 공덕 아홉 가지를 알고 삼보에 절을 하면 그 절의 가치가 높아지고 수행하는 기본자세가 길러지며 신심이 깊어집니다. 이것은 절의 의미를 모르고 그냥 불상에 절을 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승가의 공덕을 알고 승가에 보시하면 그 공덕으로 바른 수행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바르게 아는 것이 지혜인데 이 지혜의 정도에 따라 같은 행동이라도 공덕의 무게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불·법·승 삼보의 공덕을 모두 공부하였습니다. 삼보의 공덕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바로 알고 마음에 새기며 부처님의 가르침, 팔정도 수행을 열심히 하여 모든 고통 벗어난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a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3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느낌은 있지만 욕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6-1
“눈물로 인생을 끝내고 또 눈물로 시작하고, 그것이 윤회이고 12연기”

2015-01-14 (수) 15:58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6. 12연기와 위빳사나

 

 오늘은 12연기와 위빳사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할 때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업과 12연기가 같고, 사성제와 팔정도, 사념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부처님의 법에 대한 공부가 잘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경전의 내용이 각기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내용이 사성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공부할 12연기 또한 그와 같은데 이 12연기를 위빳사나와 어떻게 연결 지어 이해할 것인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다음 12연기법 도표를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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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도표를 보시면 12연기가 1-2-3-4로 나뉘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과거, 이것은 과거에 했던 선악이라는 원인, 즉 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이어지는 2-과보, 이것은 과거에 행한 것에 의한 결과가 지금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선도 악도 아닌 단지 과보일 뿐입니다. 1번이 선악인 업이고 2번이 그에 따른 과보입니다. 다시 3번이 선악 업이고 4번은 과보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보-선악-과보로 되어 있습니다. 또 1번이 과거의 원인이고 2번은 현재의 과보이며, 3번이 현재의 원인이고 4번이 미래의 과보입니다. 이 12연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크게는 전생, 금생, 후생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지금의 이 순간순간도 윤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큰 의미에서의 윤회입니다. 그래서 1번인 과거의 업은 전생에 했던 원인을 의미합니다. 전생에서 행했던 선과 악이라는 원인, 그것에 의해서 이번 생에 만들어지는 것이 2번인 현재의 과보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지금 이 순간 다시 선악의 업을 짓고 있는 상태가 3번이고 이것은 다음 생의 원인이 됩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3번에 해당됩니다. 그 3번에서 우리가 짓고 있는 선과 악의 행이 원인이 되어 미래인 다음 생, 그리고 다음다음 생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먼저 표에서 오른쪽 상단의 네 번째 선을 보겠습니다. 1번은 과거 안에 있는 두 가지로, 무명으로 인하여 행, 즉 업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전생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전생에 했던 선업도 밑바탕에는 무명, 어리석음을 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업이라고 하더라도 잠재 상태의 번뇌는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일어나는 상태로의 번뇌’는 아니지만 번뇌의 세 가지 단계를 가지로 말하자면 ‘잠재 상태의 번뇌’이고, 그 번뇌인 무명으로 인하여 행, 즉 업을 지었고 그 선업을 원인으로 하여 이번 생에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으로 인해서 식이 생긴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식에는 89가지의 마음이 있는데, 재생연결식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마음은 19가지가 있습니다. 즉 태어나는 순간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이 19가지 중에 하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논장을 공부해 보면 이 식을 그냥 마음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사악처에 태어나는 마음이 한 가지이고, 사람과 신으로 태어날 수 있는 마음이 8가지예요. 그 다음에 사람 중에도 조금 모자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마음이 한 가지, 이렇게 하면 태어나는 마음이 10가지가 됩니다. 또 색계 범천으로 태어나는 마음이 5가지, 무색계 범천으로 태어나는 마음 4가지, 그래서 19개의 마음이 이 식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식을 모든 마음이라고 하면 맞지 않습니다. 모든 마음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재생연결식 역할을 하는 세간 과보의 마음만 의미합니다.

 

 그 다음은 식으로 인해서 명색이 생긴다고 풀면 됩니다. 어떤 생애든지 재생연결식이 생기고 그 재생연결식으로 인해서 명색이라는 물질과 정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이 명색으로 인하여 육입(六入)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육입으로 인하여 촉이 생기고, 다음은 촉으로 인하여 느낌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원인 결과의 의미를 이어서 풀어 보면, 전생에 행했던 선악의 행이 원인이 되어 식, 즉 중생이 태어나는데,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의 명색이 생기고, 사람이라도 남자라면 남자의 명색, 여자라면 여자의 명색이 생기며, 만약에 지옥에 태어나면 지옥생의 명색이 생깁니다. 그 명색으로 인해서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는 육입이 생기고, 그 육입으로 인해서 대상과 접촉하게 되니, 그로 인하여 온갖 느낌이 일어납니다. 육입이 대상에 접촉하자마자 느낌(feelings)이 생겨납니다. 보면 그 보는 것에 느낌이 있어서 보면서 즐겁게 느낄 수 있고 괴롭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소리면 안 좋다고 느끼고 아름답게 여겨지면 좋다고 느낍니다. 느낌까지는 과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그대로 받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업에 따라 현재의 과보가 생기기 때문에 이 과보는 아라한은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도 넘어서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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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35세가 되어서야 붓다가 되었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붓다가 아니었고, 따라서 선이건 악이건 업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붓다가 되어 모든 번뇌가 사라져 다시 업을 짓지는 않았지만 깨닫기 전에 지은 업의 과보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난 식 자체도 과보이고, 그 식으로 인해서 명색, 즉 이 몸과 마음을 갖고, 명색으로 인해서 육입이 생기고, 그 육입으로 인해서 촉하고, 그 촉으로 인해서 느낌이 생기는 것은 부처님도 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좋은 것을 볼 수도 있고 안 좋은 것을 볼 수도 있고, 좋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나쁜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과보의 힘이 원인이 되어 붓다가 되신 이후의 45년 생 동안에도 예전 업의 결과인 과보는 그대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어느 때는 부처님도 말에게 먹이는 사료를 3개월이나 드신 적이 있습니다. 심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을 때, 말이나 소를 방목하여 키우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근처에서 부처님과 제자 승가가 안거에 들었습니다. 그 장사하는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서 말에게 주는 먹이를 줄이면서 자기들이 나눠먹는 중에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그것을 조금씩 보시한 것입니다.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거친 그것을 아난 존자가 잘게 부수어서 죽처럼 끓여 부처님께 올렸고, 3개월 내내 부처님이 그 음식을 드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어느 때는 왕실에서 보시하는 음식이 부처님께 올 때도 있었는데 그 음식과 마소의 사료로 만든 음식 맛이 똑같을 수 없고 그것은 부처님도 똑같이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과보라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같지 않습니다. 부처님, 아라한과 범부가 여기에서 갈라집니다.

 

아라한과 부처님께서는 느낌은 있지만 그 느낌에서 욕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아라한과 부처님께서는 느낌이 좋건 나쁘건 그것에서 갈애를 만들지 않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좋은 느낌이면 그것을 계속 갖고 싶은 갈애를 일으키고, 안 좋은 느낌이 있으면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인 성냄을 일으킵니다. 좋은 느낌을 계속 원하고 안 좋은 느낌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일어나는, 이 둘이 모두 갈애입니다. 그 갈애로 인해서 집착이 생깁니다. 집착은 ‘아, 그렇게 안 되면 안 돼…….’ 하는 느낌이 아주 강해지는 것으로 갈애가 강해져서 집착이 됩니다. 예를 들어 갈애는 소리가 매우 시끄러울 때 ‘아, 이 소리가 없으면 좋겠다.’ 하는 정도라면, ‘이 소리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강력한 마음이 생기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소리를 없애려고 귀를 막든가 그 소리의 근원지를 없애버리든가 하는 것이 집착입니다. 또 소리가 좋아서 계속 듣고 싶어 하면 갈애인데, ‘이 소리를 꼭 들어야 돼, 안 들으면 안 돼.’ 하고 강력하게 마음이 작동하면 집착으로 넘어간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이 집착이니 갈애로 인해 집착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집착하기 때문에 또 업을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계속 생각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되게 하려고 강하게 원함으로써 또 다른 업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성 업으로 인하여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생이라는 것이 영어로 말하면 life이니 3번에서 4번으로 넘어가서 업에 따라 또 태어난다는 말이 됩니다. 신이나 범천은 태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생겨납니다.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들은 뱃속이건 알이건 습한 곳에서건 태어나서 생기는 것이니 그 생겨남이 신과는 다르지요.

 

 그 다음은 태어남으로 인하여 늙어 죽는다는 말인데 그냥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걱정 근심, 눈물 흐름, 몸의 고통, 마음의 괴로움, 속이 타는 것 등으로 계속 불에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 없는 사람이 되려면 아나함 정도는 돼야 가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물로 시작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계속 눈물을 흘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눈물로 마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눈물로 마친 인생이 또 다음 생으로 이어지면서 눈물로 시작하고, 눈물로 인생을 끝내고 또 눈물로 시작하고……, 그것이 윤회이고 12연기의 내용입니다. 그 12개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무명이 1번이라면 행이 2, 식이 3, 명색은 4, 육입이 5, 접촉이 6, 느낌이 7, 갈애가 8, 집착은 9, 생성 업이 10, 태어남이 11, 그 다음에 늙음부터 죽음까지를 하나로 붙여서 마지막 12번이 되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음으로 바로 가야 되는데 늙음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고통을 다 합쳐서 하나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12가지 조건이기 때문에 이것을 12조건, 즉 12연기라고 하는 것이지요. <계속>



 

 

“오직 봄, 봄을 관찰하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6-2
“느낌에서 지혜로 가면 위빳사나,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윤회”

2015-01-21 (수) 15:08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그러면 여기에서 12연기를 조금 더 확대해서 이해해 보겠습니다. 12연기를 윤회라고 볼 때 그 연기의 가장 근본적인 뿌리가 무엇인지를 볼까요? 12연기를 표로 그린 앞 그림의 가운데에 있는 무명, 갈애가 가장 큰 뿌리입니다. 이 무명, 갈애라는 아주 큰 뿌리로 인해서 12연기가 이렇게 계속 돌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두 가지 뿌리에 덧붙여, 윤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굴레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세 가지가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입니다. 이 12연기를 보면 뿌리는 두 가지, 굴레가 세 가지예요. 번뇌의 굴레로 업의 굴레가 생기고, 업의 굴레로 과보의 굴레가 생깁니다.

 

 굴레 세 가지를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그림의 1번을 보면, 맨 바깥 라인에 세 가지 번뇌의 굴레가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화살표를 거꾸로 타고 내려오면 무명이고 끝까지 내려가면 갈애와 취착, 업의 굴레에서 따라 내려오면 행, 12연기의 구조 그 선의 끝에까지 가면 생성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집착, 갈애에서 시작해서 그 화살이 무명을 통과하며 가니까 무명, 갈애, 집착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 세 가지가 번뇌의 굴레입니다. 그러니 무명도 번뇌이고, 갈애, 집착도 번뇌인 것이지요. 그 번뇌의 굴레를 통해서 업의 굴레가 생깁니다. 그림을 보면 옆에 행이 보이지요? 행의 밑으로 내려가면 생성업, 그것은 행과 똑같습니다. 업이 행이고 행이 업이어서 이 두 가지가 업의 굴레입니다. 생성업에서 올라가니까 행, 행을 통해서 바깥으로 화살표가 가니까 두 가지 업의 굴레가 됩니다. 순서대로 보면 세 가지 번뇌의 굴레로 인해서 두 가지 업의 굴레가 생긴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업이 생긴다는 것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번뇌가 없으면 업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은 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아라한은 번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명, 어리석음도 없고 갈애, 집착도 없습니다. 갈애, 집착, 무명이 없으니 업이 안 생기고, 업이 없으니 과보도 생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이 윤회가 끝났다는 것은 곧 과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뇌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업을 짓게 되고, 업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과보가 무엇인가요? 느낌, 접촉, 육입, 명색, 식 이런 것들이 과보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있고 업이 있다면 틀림없이 식, 태어나야 합니다. 19가지 재생연결식 중에 어떤 식을 갖고 태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식으로 인해서 명색, 명색으로 인해서 육입, 그 육입으로 인해서 촉, 다시 촉으로 인해서 수, 바로 여기까지가 과보의 굴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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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그러면 1번과 2번만 봐도 세 가지 굴레에 의한 윤회가 분명한데 3번과 4번이 왜 또 필요한가. 1번 안에 세 가지 번뇌의 굴레와 두 가지 업의 굴레가 있습니다. 그 번뇌의 굴레로 인해서 업을 짓고, 그 업에 따른 것이 과보의 굴레입니다. 두 번째가 과보의 굴레인데 현재의 삶은 그 과보의 굴레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 번째를 다시 말하는가. 지금 우리가 태어난 것은 과보의 굴레이지만, 태어난 이후 우리는 다시 선 혹은 악의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3번과 1번은 업이라는 면에서 일치합니다. 다만 1번은 과거의 업이고 3번은 현재의 업이라는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저는 번뇌를 가진 채 강의를 하면서 선업을 짓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들 또한 번뇌를 가진 상태에서 강의를 들으며 선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선업이긴 하지만 어쨌든 업을 짓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생성업입니다. 이 생성업에 따라 미래의 우리가 또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합니다. 그러면 4번과 2번이 똑같지요. 2번은 과거 업에 의한 현재의 과보이고, 4번은 현재의 업에 의한 미래의 과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1번이 과거 번뇌의 굴레이고 업의 굴레, 3번이 현재 번뇌의 굴레이며 업의 굴레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 세 가지를 우리가 빙빙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이란 한 사람을 예로 들자면 이번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 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몸과 마음을 명색이라고 합니다. 육입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말하고 접촉은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여러 가지 대상을 촉하는 것을 말하고, 그 촉할 때마다 생기는 느낌, 즉 형상의 느낌, 소리의 느낌, 냄새나 향기의 느낌, 맛의 느낌, 몸의 감촉의 느낌, 마음에 여러 가지로 일어나는 느낌에 따라서 갈애로 넘어갑니다.

 

갈애로 넘어가면 그것에 의해 다시 집착으로 넘어가고 그것이 번뇌의 굴레입니다. 갈애와 집착이 번뇌의 굴레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서 ‘아, 보는 것이 좋다.’ 하면 느낌(受)에서 갈애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더 강해지면 집착이 되는데 그게 바로 번뇌의 굴레인 것입니다. 번뇌의 굴레에서 생성업이 생깁니다. 즉 좋은 것을 또 보려고 하는 의도, ‛또 보고 싶다.’ 하는 말, 또 보려고 하는 행동, 그런 모든 것이 몸으로 지은 업, 입으로 지은 업, 마음으로 지은 업이 되어 우리는 세 가지 업을 짓게 됩니다. ‘보는 것이 싫다, 느낌이 안 좋다’ 이렇게 보기를 싫어하여 피하고자 하는 것도 갈애입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과 ‘그 보기 싫은 형상을 어떻게 없애야 될까?’ 하는 말, 행동, 생각 모두가 번뇌에 따른 업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잠재적 상태의 번뇌든 일어나는 번뇌 또는 이미 일어나서 파괴한 번뇌든 모두 번뇌인 것은 분명한데 이것은 아라한이 되어야만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번뇌가 있는 한 계속 다음 생을 받아야만 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탄생과 죽음은 똑같은 것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윤회를 12연기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12연기와 위빳사나의 관련성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볼 때 오직 볼 뿐임을 깨닫게 하고자 위빳사나를 가르치셨습니다. 위빳사나는 육입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입니다. 보고 있을 때 봄, 봄, 봄을 관찰해야 하는데 관찰하지 않으면 느낌(受)에서 갈애로 바뀝니다. 그런데 놓치지 않고 그 느낌을 관찰하는 사람은 수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지혜로 넘어갑니다. 위빳사나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느낌에서 지혜로 가면 위빳사나이고,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빙빙 도는 윤회입니다. 그래서 도표에 보면 화살표들이 밖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느낌과 갈애 사이에서 빠져나가면 지혜이고 빠져나가지 못하면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다시 한 바퀴 돌고, 그 다음에도 빠져나가지 못하면 또 돌고, 그렇게 계속 빙빙 돕니다. 윤회는 돌고 도는 것이어서 뒤로 갈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길을 계속 빙빙 돌고 싶지 않으면 갈애가 아닌 지혜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위빳사나라는 말입니다.

 

느낌의 순간 거기에서 무상을 보든가, 무아를 보든가, 고를 보든가 하면 갈애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상을 아는 사람은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무상을 알고, 그 상태에서 대상을 보니 어떤 욕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욕심이 생길 리 없고 오히려 무서움이 일어납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깁니다. 탐이 아니고 불탐, 무탐입니다. 고(苦)를 보고 있으면서 고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대상이 고라는 것을 아는 순간 바로 욕심이 떨어져 나갑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무상·고·무아를 아는 순간 갈애, 집착이 떨어져 나갑니다.

 

나(我)라고 착각하면 틀림없이 집착이 생깁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항상 나, 내 것을 고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가 없는데 ‘내 것’이 어디 있느냐 이런 말입니다. 따라서 무아를 아는 순간 욕심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상·고·무아를 제대로 아는 것은 곧 욕심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 그 순간 그것을 놓아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좋은 것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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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볼 때마다 오직 볼 뿐, 그렇게 계속 관찰만 합니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들음, 들음, 들음을 관찰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소리를 들을 때 좋다, 좋지 않다 하는 느낌 자체는 어쩔 수 없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부처님도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일지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좋다고 느끼지는 않는 것이지요. 다만 거기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좋다, 안 좋다’는 이미 선과 악 중 하나로 넘어선 것입니다.

 

여기에서 느낌(受)은 ‘좋다, 아니다’가 아니라 성품 그대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맛을 예로 들면 단맛, 쓴맛 등은 맛의 성품입니다. 고추를 생각해 볼까요. 아주 매운 고추가 있는데 매운 고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그 고추가 매운 것이 아니고,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매운 것도 아니며 그 고추 자체의 맛이 매운 것, 이것이 수受의 의미입니다. 이때 매운 것을 좋아하는 것도 욕심이고 싫어하는 것도 욕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없지만 원래의 맛은 그대로 아십니다.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가 주는 느낌은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이 받아들이십니다. 매우 시끄러운 소리가 있으면 부처님께도 안 좋은 느낌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 시끄러운 소리로 인한 느낌 자체는 당연히 좋은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괴로운 느낌인데, 부처님께서는 그 소리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 갖고 있는 그대로의 맛을 부처님도 아시지만 그 맛에 따라 좋아함 또는 싫어함이 생기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맛이 안 좋다면 싫어함이 생길 수 있고, 맛이 좋으면 계속 원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하는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관찰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느낌에서 바로 갈애로 넘어가는데,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날 때는 우리도 아라한과 부처님처럼 맛, 즉 느낌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아는 데서 그냥 끝냅니다. 즉 마음에서 반응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제대로 알기는 하지만 그 맛에 대해 탐심이 안 생기고 성냄도 안 생깁니다. 그렇다고 어리석게 먹는 것도 아닙니다. 맛을 모르고 먹는다면 그건 어리석음 속에서 먹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는 확실하게 알면서 먹기 때문에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관찰력이 매우 빨라지면서 하나하나 계속 변하는 것만 알기 때문에 거의 맛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맛을 모르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압니다. 그것을 두고 갈애가 아니라 지혜로 간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계속>



“느낌에서 지혜로 넘어서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6-3
“위빳사나는 12연기의 역방향…순간적인 윤회가 끊기는 것이 위빳사나”

2015-01-23 (금) 15:47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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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12연기에서 위빳사나를 보면 식에서 명색, 명색에서 육입, 육입에서 접촉, 접촉에서 느낌, 바로 이 단계에서 갈애로 넘어가는데 그것을 위빳사나로 막으면 느낌(受)이 소멸함으로 인해서 갈애가 소멸됩니다. 윤회가 거기서 끊겨버리는 것입니다. 갈애의 소멸로 집착이 소멸되고, 집착이 소멸되니 생성업이 소멸하고, 생성업이 소멸되니 태어나지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으니 늙고 병들어 죽는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윤회가 끝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경험을 말씀하실 때마다 위빳사나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사성제와도 똑같습니다. 느낌에서 고성제를 봅니다. 왜냐하면 도성제를 하고 있기 때문인데 위빳사나가 도성제입니다. 도성제를 실천하기 때문에 고성제를 알고, 고성제를 아니까 집성제를 버리고, 집성제를 버리니까 멸성제에 도착합니다. 사성제든, 12연기든, 팔정도든, 사념처든 딱 한 가지를 확실하게 제대로 볼 수 있으면 수행자들의 공부가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팔정도, 사성제, 12연기, 사념처를 따로따로 보고 있다면 아직 더 열심히,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걷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 때도 항상 느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느낌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논장을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는데, 마음이라는 것은 단독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면 동시에 마음부수 몇 개도 같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일어나는 마음이 하나라면 마음부수는 아무리 적어도 7가지가 그 마음과 함께 일어납니다. 마음에는 89가지가 있는데 이 마음들은 동시에 두 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번에 마음이 하나밖에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그 마음이 사라져야 그 다음에 또 하나의 마음이 생기는데 그 마음과 마음 사이에 틈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불을 끄면 어둡지요. 다시 불을 켜면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밝아집니다. 그 밝음과 어둠 사이에 빈틈없는 것이 앞의 마음과 뒤에 따라오는 마음 사이에 빈틈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하나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처음 그대로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을 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류가 중단 없이 계속 흐르고 있어서 불이 꺼지지 않으니 전류가 선처럼 이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발전소에서 계속 전기를 보내주고 있어서 불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밝음이 있기 때문에 전기가 계속 있는 걸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기가 계속 들어오면서 중간에 불이 계속 켜지고, 또 켜지고, 꺼졌다가 켜지기를 반복하는데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꺼지는 순간의 어둠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리는 속도가 그만큼 느리다는 말이지요. 전기의 속도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힘이 워낙 느려서 전기의 끊어짐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음도 이와 같아 빈틈없이 하나가 죽는 것과 동시에 하나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컵 안에 있는 물을 다 부어버리면 컵에 아무것도 없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고 컵에 공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컵 속에 공기가 들어오는 것과 안에 있는 물이 나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 것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사이에 있는 틈을 알아차릴 수가 없을 뿐입니다. 모든 마음과 함께하는 마음부수는 7개가 있고 그 7개 마음부수 안에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식하는 마음이 있을 때마다 느낌이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다고 하여 엄연한 사실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는 항상 느낌이 있는데 느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를 뿐 사실은 그 느낌에 우리가 계속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반응하기 때문에 마음이 매우 지칩니다. 느낌이 항상 있고, 느낌에 따라 우리는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끊임없이 반응을 합니다. 날씨가 더우면 “아, 덥다.” 하고 말은 안 할 수도 있지만 몸으로 덥다고 부채질하고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기도 하고, 몸은 가만히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짜증을 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거의 항상 우리 마음은 보고 반응하고, 듣고 반응하고, 냄새 맡고 반응하고, 생각하고 반응합니다. 사람들이 “아, 생각만 해도 머리 아파.”라고 하지요. 정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우리가 마음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 반응이 바로 느낌에서 갈애, 갈애에서 집착, 집착에서 업으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인데 이 생각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응하고 입으로도 반응하고 마음으로도 반응하니, 그 업의 무게가 얼마가 클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업으로 인해서 또 태어나는데 화를 낸 업으로 태어나면 사악처가 확실합니다. 그래서 다음의 식이 지옥생의 식이나 축생의 식이나 귀신의 식이나 아수라의 식입니다. 그 업으로 인해서 태어난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겠지요. 그러니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일이 많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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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빳사나는 12연기의 역방향입니다. 12연기의 순방향으로 가면 인해서, 인해서, 인해서로 계속 도는 것인데 12연기의 역방향으로 가면 소멸해서, 소멸해서, 소멸해서 순간에 끊겨 버립니다. 그래서 이 위빳사나를 이야기할 때는 전생, 금생, 후생 그런 의미가 아니라 순간적인 윤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순간적인 윤회가 끊기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순간적인 윤회를 끊는다는 것이 형상을 보고 그 형상을 보는 순간 무상을 알고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그 형상으로 인해서 다시 생기는 것이 없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면서 꿈을 꾸는데 이때 애착, 집착을 다 가지고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확실하게 보고, 확실하게 관찰하여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났다면 그것으로 인해서는 꿈을 꾸는 것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위빳사나의 힘이 애착, 집착, 갈애를 끊어 없애는 것입니다.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에 대해 위빳사나 지혜가 있었다면 그 순간적인 소리에 대해 내 마음에서 화가 나거나 밤에 자면서 그것에 대해 꿈을 꾸는 일은 없습니다. 어릴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데 집착했던 것이 바로 바로 꿈에 나타납니다. 지금도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으면 계속 꿈을 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꿈을 제대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그 꿈의 뿌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무서움 속에서 잠이 들면 무서운 꿈을 꾸고, 걱정이 있으면 그 걱정 때문에 꿈속에서도 내가 갖고 있는 걱정에 대해 계속 꿈을 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좋은 것에도 집착하고 싫어하는 것에도 집착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마음속에서 지워버릴 텐데 우리는 항상 그 미운 존재를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안 좋아하는 것도 집착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너무나 미워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어도 오지 마라. 다음 생에서 나를 만났을 때 아는 척도 하지 마라.” 하지만 바로 그런 마음 때문에 다음 생에서 또 만납니다. 그러니 “죽어도 오지 마라.”라는 말은 “다음 생에 보자.” 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진짜 싫으면 마음속에서 완전히 놔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완전히 놓을 수 있으면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겠지만, 인연이 끝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마다 확실하게 맺어진다고 생각하십시오. 미움으로 확실하게 맺어지는데 그것은 안 좋게 맺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연이 끝이다.’라는 것이 내가 성냄으로 쥐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어서 성냄으로 움켜 쥔 인연으로 다시 태어나면 부모와 아들딸로 태어나도 원수 같은 관계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갈애와 집착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요! 이 집착에서 우리가 가지는 것이 업인데, 입으로 안 하고 몸으로 안 해도 마음으로 생기는 업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생기는 업도 아주 무섭습니다.

 

위빳사나는 우리가 매 순간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수행이 매우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 순간을 제대로 챙기면 지혜가 생기고 제대로 못 챙기면 바로 갈애와 집착에 빠져서 업이 생기고, 그 업 때문에 또 윤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윤회가 무서워서 출가하는 자가 수행을 제대로 못하면 다시 윤회하게 되어있고, 수행하는 것의 의미를 바로 알고 관찰하면 느낌에서 지혜라는 바른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IC를 놓쳐 한 번 더 돌 때는 어느 정도 돈만 더 내면 되지만, 윤회를 한 번 더 하는 것은 한 번 죽어서 다시 와야 하는 것이니 한 생을 희생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윤회가 얼마나 무서운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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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장 소멸이라는 것은 그냥 상상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도가 일어나야 업장 소멸이 됩니다. 우리가 나무를 없애버리려고 할 때 그 뿌리를 뽑아 없애버리지 않고 나무의 가지만 자르면 때가 되었을 때 언제든지 다시 싹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윤회도 뿌리를 잘라야 끝이 납니다. 그 뿌리를 자를 수 있는 힘이 도인데 그 도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수에서 갈애가 아니라 지혜로 갈 수 있도록 닦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닦고, 닦고, 닦아서 청정해지면 어느 순간 그 수에서 위빳사나 지혜가 익어서 힘이 찬 도지혜가 생겨 업장이 소멸됩니다. 수다원의 도라면 다시 태어났을 때 사악처로 가는 업장이 완전히 소멸되고, 사다함은 다시 태어나긴 하는데 욕계에 두 번은 오지 않습니다. 수다원 때부터 사악처가 없어지기 때문에 욕계에 사람과 신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사다함은 사람으로 태어나도 딱 한 번, 신으로 태어나도 딱 한 번이지 두 번째에는 욕계에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색계나 무색계로 갈 수 있겠지요. 범천으로 태어날 수는 있지만 욕계에는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나함은 욕계로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에 여러분이 수행하다가 아나함이 되고 아라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면 윤회는 끊지 못해 다시 태어납니다. 그런데 아나함은 인간이나 신이 아니라 범천으로 태어납니다. 사다함만 돼도 욕계에서 태어나는 업장이 한 번밖에 안 남고, 욕계에 태어날 수 있는 나머지 모든 업장이 소멸되며, 아나함이 되면 욕계에 태어날 업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욕계·색계·무색계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의 모든 업장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라한과 부처님입니다.

 

무상·고·무아를 아는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제 아실 것입니다. 무상·고·무아를 모르면 틀림없이 갈애가 되고, 집착이 되고, 업이 생기고, 그래서 빙빙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상·고·무아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고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여 느낌에서 지혜로 넘어서서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a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계속>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보는 것”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7-1
“청정함을 위한 하나뿐인 길, 걱정·근심·눈물 넘어설 유일한 길”

2015-02-05 (목) 10:58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7. 대념처경과 위빳사나

 

오늘은 대념처경과 위빳사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대념처경은 수행에 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께 제가 항상 기본적으로 추천하는 네 가지 경전이 초전법륜경, 무아경, 열반경 그리고 이 대념처경입니다.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공부해야만 하는 경전이지요. 초전법륜경에는 부처님의 이름과 철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가르침들이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내가 부처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들 중에서도 ‘육사외도’라고 불리는 여섯 명이 가장 유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신이 진정한 붓다임을 증명하기 위해 펼치신 가르침이 바로 초전법륜경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부처님만이 홀로 깨달으신 특별한 법을 이 초전법륜경에서 다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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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그 다음으로 공부해야 할 경전이 무아경입니다. 초전법륜경을 통해서 하루에 한 명씩 5비구가 모두 수다원이 되었는데 그때 걸린 시간이 닷새입니다. 지금 달력으로 하면 양력 7월 보름이고 인도 달력으로는 그때가 4월 보름이었는데, 그 때 초전법륜경을 시작하여 닷새째 되던 날 다섯 명의 비구가 모두 수다원이 된 후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무아경입니다. 그 무아경을 듣고 나서 5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무아경은 중요한 경전이기 때문에 꼭 공부해야 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아주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세 번째로 추천하는 것이 대념처경으로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볼 것이고, 네 번째가 열반경입니다. 열반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서에 해당되는 아주 중요한 경전입니다. 이 네 가지 경전을 제대로 공부하면 부처님 가르침의 아주 큰 틀은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대념처경이 어떤 경전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대념처경은 부처님이 꾸루라는 나라의 깜마사다마라는 곳에서 가르치신 것으로, 구체적 수행 방법과 함께 이 수행을 하면 어떤 결과가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가르치는 이것이 중생들의 청정함을 위한 하나뿐인 길, 걱정 근심, 눈물 흘림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며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즉 이것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중생들이 청정하지 못한 이유는 탐·진·치 등 번뇌 때문인데, 이 수행법은 그 번뇌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사념처수행을 하면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해지고,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고,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고, 지혜를 갖추게 되며, 마침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념처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아래에서 살펴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다름 아닌 팔정도 수행과 같습니다. 즉 몸에서 몸을 몸으로 보고, 느낌에서 느낌을 느낌으로 보고, 마음에서 마음을 마음으로 보고, 법을 법이라고 보는 것,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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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몸에 있는 것을 사실 그대로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 지금 더우면 더운 것이 몸이지요. 더우면 더위를 보고, 추우면 추위를 보고, 딱딱하면 딱딱함을 보고, 차가우면 차가움을 보고, 부드러우면 부드러움을 보고, 움직이면 움직임을 보고, 당기면 당김을 봅니다. 또 숨을 들이쉬면서 배가 부풀면 부푸는 것을 보고 꺼질 때 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대념처경에 보니까 부풂 꺼짐이라는 말은 없던데요?”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배도 몸이고 그 배의 부풂을 보는 것도 몸의 움직임 중 하나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느낌에서 느낌을 느낌으로 본다고 할 경우 ‘느낌’이란 좋은 느낌, 안 좋은 느낌, 중간 느낌이 그것인데 몸의 고통스러움과 쾌감, 마음의 즐거움과 괴로움, 몸과 마음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 느낌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괴로우면 그냥 괴로운 대로 괴로움을 알고 느끼기만 할 뿐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느낌을 느낌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행복하면 행복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고 오직 행복한 느낌 그대로를 알기만 할 뿐 ‘내가 행복하다, 이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뭔가를 하겠다.’라고 애쓰지 않는 거예요. 행복할 때 행복함을 보고 괴로울 때 괴로움을 보는데 그것을 한 번 보고 마는 게 아니라 반복해서 보는 것, 다시 반복하고 반복해서 보아야 그 봄이 깊어지면서 무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을 보는 것도 같은 방법입니다. 화나는 마음이 있으면 화나는 마음이라고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할 뿐 ‘화내지 마.’나 ‘화내면 안 돼.’가 아닙니다. 화 없는 마음이면 화 없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내는 마음과 화 없는 마음을 확실하게 구분하여 알기 위해서는 그 두 마음을 정확하게 비교하며 관찰해보면 됩니다. 화가 나 있을 때 그 마음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화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화나지 않는 그 마음과 앞에서 화났던 마음이 서로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비교 대조해 보면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로 법에서 법을 법이라고 반복해서 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즉 몸‧느낌‧마음‧법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 이것을 ‘나의(욕심)’ 몸‧느낌‧마음‧법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몸‧느낌‧마음‧법을 ‘나(자만)’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몸‧느낌‧마음‧법을 나의 ‘자아(사견)’라고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봄’의 바른 의미입니다. 이때 아주 중요한 수행의 요소가 노력, 지혜, 사띠입니다.<계속>



“사념처와 팔정도는 같은 것의 다른 표현”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7-2
“초전법륜경에는 법, 진리를, 대념처경에는 그 법의 실천법을 설해”

2015-02-10 (화) 10:38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그러면 대념처경과 팔정도는 어떻게 서로 관련이 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팔정도인데 왜 다시 사념처를 하나뿐인 길이라고 했는가. 그 두 가지를 잘 살펴보면 사실은 같은 것인데 표현을 다르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팔정도를 가르치실 때는 구체적인 대상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팔정도, 즉 깨달음을 위한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말씀하셨는데 사념처에서는 팔정도에 덧붙여서 몸·느낌·마음·법이라는 수행의 구체적인 대상을 함께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팔정도에서는 여덟 가지 길이 있다고 했는데 왜 사념처는 세 가지만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력과 사띠가 있으면 틀림없이 집중이 생깁니다. 사띠가 있어 대상을 놓치지 않으면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물게 되면서 집중이 됩니다. 그리고 집중이 있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니 노력과 사띠가 있으면 당연히 집중도 일어나고, 올바른 집중이 있으면 지혜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관련성을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사냥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따라가며 화살을 쐈는데 화살을 맞은 사슴이 단번에 죽지 않으면 피를 흘리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면 사냥꾼은 땅에 흘린 핏자국을 보면서 계속 사슴을 쫓아갑니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지나 피가 마르면 그 다음에는 사슴의 발자국을 살피며 계속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위가 나타났는데, 바로 앞까지 있던 발자국이 바위 앞에서 사라졌고, 바위 뒤에 계속 이어졌다면 틀림없이 사슴은 바위 위로 넘어갔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인 이것을 보며 원인인 저것을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가 있으면 그 앞에 반드시 집중이 있습니다. 집중 없이는 지혜가 생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중이 있다면 노력과 사띠가 앞에 원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사념처에 팔정도가 있다고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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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같은 방식으로 더 살펴보면, 바른 견해가 있으면 바른 사유가 되는 것이고 바른 사유 뒤에는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가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바른 견해가 있는 사람이면 바른 사유가 되고, 사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나쁜 생각 즉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 바른 지혜가 있다면 당연히 바른 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사념처를 깊이 이해하면 거기에 팔정도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견해를 말씀하셨으면 팔정도의 나머지들도 더불어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팔정도와 사념처를 전혀 다른 별개의 경전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고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사념처 자체만으로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즉 몸·느낌·마음·법에 사띠를 가져야 비로소 수행을 할 수가 있는데 이 사띠는 팔정도 중 하나인 정념입니다. 또한 사띠를 가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이 노력 또한 팔정도 중 하나인 정정진입니다. 이렇게 경전을 이해하는 힘이 생기면 팔정도, 사념처, 사성제, 12연기가 결국은 다 같은 것인데 표현만 다르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저의 은사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일화입니다. 우리 은사 스님 집안 쪽에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나라(미얀마)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글들은 모두 ‘나모따사’로 시작합니다.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할 때의 ‘나모따사’이지요. 그때 그 큰스님의 법문이 아주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악지방에 있던 한 스님이 큰스님의 명성을 듣고 경전을 공부하기위해 큰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안거철이 다 끝났는데도 이 ‘나모따사’가 안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아, 내가 많은 경전을 공부하러 왔는데 한 경전의 맨 위에 있는 나모따사만 3개월 내내 하고 계시니 내 공부가 언제 끝나겠나?’ 하면서 큰스님 밑에서 경전 공부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머물던 절로 돌아가 버렸지요. 절로 돌아가서 경전을 다시 보니 이상하게도 모든 경전의 내용을 자신이 다 알고 있고 이해가 아주 잘 되더랍니다. 큰스님이 나모따사 하나만 법문하시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 나모따사 한 줄로 모든 경전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게 가르치신 것이지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이 스님이 다시 큰스님한테 돌아와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참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서로 다른 경전의 핵심이 같음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면 공부가 제대로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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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 말하자면, 팔정도는 수행 방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여덟 가지 수행 과제를 말했다면 대념처경은 수행의 대상과 수행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음으로써 수행자가 바르게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가르침이라고 보면 됩니다. 초전법륜경에 보면 팔정도만 나오고 팔정도를 가지고 어떻게 수행하는지 그 방법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대념처경에서는 그 방법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법,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대념처경에는 그 법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설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초전법륜경에서는 ‘도성제란 무엇인가?’가 나오고 대념처경에는 ‘이 도성제를 어떻게 실행할까?’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따라서 대념처경은 팔정도의 실천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계속>

 

 

“마음 관찰은 예리하게, 확실하게, 빠르게”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7-3
“사념처 수행이 부처님의 말씀이란 확신으로 열심히 수행하길”

2015-02-23 (월) 13:08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대념처경의 큰 틀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인데, 몸에서 부처님이 첫 번째로 가르치는 것이 호흡입니다. 두 번째는 행주좌와(行住坐臥) 네 가지 자세이고, 세 번째가 그 네 가지 큰 자세 외의 모든 작은 동작들, 즉 앞으로 가는 것, 뒤로 가는 것, 가사 입는 것, 발우 드는 것, 대소변 보는 것 등을 아주 자세히 언급하고 다시 덧붙이시기를, 몸의 어떤 부분이든지 일어나는 그대로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배의 부풂 꺼짐을 관찰하는 수행은 여기에 포함됩니다. 첫째는 호흡, 둘째는 행주좌와, 셋째는 작은 동작들, 모든 작은 동작들에도 확실한 앎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고 네 번째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몸의 32가지 부분을 더러움으로 관찰하는 것이지요.
 
이런 수행이 왜 필요한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생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욕망들 중에서 유독 강한 세 가지가 식욕, 수면욕, 성욕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만으로 사는 세상을 축생이라고 말합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로 이 세 가지로 삽니다. 사람들이 동물을 붙잡아서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을 제외하면 별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도 거의 이 세 가지로 사는 사람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사실은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이 많이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욕구가 강한 삶일수록 동물과 비슷하고, 세 가지에 대한 탐욕이 약할수록 인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축생과 성인의 사이에 있는 범부는 동물 반, 성인 반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밑바닥에서 당기는 힘인 이 세 가지 즉 식욕, 수면욕, 성욕은 대단히 강합니다. 지구도 지구의 중심에서 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물건을 위로 던져도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 힘, 중력 때문입니다. 로켓이나 미사일을 발사할 때 그것이 우주까지 가려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날 때까지는 계속 무언가가 터지면서 힘을 보태줘야 합니다. 그 힘이 모자라면 발사된 로켓이나 미사일은 지구 표면으로 도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미사일 안에 장착된 것이 한 번 터지고, 두 번 터지고, 세 번 터지면서 그 힘이 충분할 때 마침내 우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지 않게 되어 우주의 목표지점에 머물면서 편하게 돌 수가 있게 됩니다. 범부가 성인으로 되는 것이 이와 같은 이치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범부가 성인이 못 되는 이유는 ‘밑에서 당기는 힘’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어서 그 ‘세 가지 욕심’을 줄이고 줄여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적당히 먹어야 되고, 자는 것도 많이 줄여야 되고, 성적으로도 많이 조심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날수록 성인에 가까워지고 완전히 벗어났을 때 아라한이 됩니다.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성욕을 완전히 버리면 이때부터가 아나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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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아나함이 되면 성에 대한 욕심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래서 아나함들이 아라한이 안 된 상태에서 죽은 뒤 다시 태어나면 범천으로 태어나는데 범천 세상에는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그곳은 얼마나 조용할지 생각해 보세요. 남자 여자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몹시 복잡하고 시끄럽지요. 남성 여성이 없으니 성차별문제도 있을 리 없고 서로에게 상처 줄 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범천 세상이 중생 중에는 제일 행복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윤회는 합니다.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사막을 여행하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죽게 생겼답니다. 그래서 죽은 자기 아들을 말린 고기를 먹으면서 걷습니다. 이런 경우는 순전히 죽지 않기 위해서 먹는 것이지요. 이 삼세윤회의 고통이라는 사막에서 힘들게 걸으면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인육을 먹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식사한다면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부처님께서 예를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기 위해서 더러움을 계속 관하다 보면 어쩔 수 없어서 먹는 거지, 욕심을 부리며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은 별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시체를 보면서 시체가 변해가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는 수행 방법도 있습니다. 화장하거나 매장하지 않고 그냥 버려둔 시체의 변화를 보면서 하는 수행입니다. 이틀 사흘 지나면서 시체에서 물이 나오고, 얼굴과 몸의 색깔이 변하고, 시체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하는 이런 모습들을 빠짐없이 관찰합니다. 새가 와서 쪼아 먹고, 개가 와서 뜯어먹고, 계속 부풀다가 터지면서 안에 있던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오고, 살들이 다 없어져 뼈만 남고, 뼈들이 흩어지고…….

 

이것은 사마타 수행 방법입니다. 그런데 시체 명상으로는 초선정밖에 안 됩니다. 다른 대상과는 달리 시체가 대상인 경우에는 수행자가 의식적으로 위딱까(생각)를 일으키지 않으면 대상인 시체에 대한 관찰을 계속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시체처럼 더러운 대상은 자발적으로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선정과 그 위의 선정을 가지려면 위딱까를 놓으면서 가야 하는데, 시체를 계속 관찰하려면 위딱까를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시체를 보면서는 초선정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초선정과 2선정의 차이는 위딱까, 즉 일으키는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따집니다. 초선정에서는 호흡을 계속 보면서 그것을 알고 호흡이 꺼지면 다시 보고 알고……, 그런 식으로 하는데 위딱까가 계속 일을 해야 합니다. 초선정에서 2선정으로 넘어갈 때까지는 이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계속 집중된 상태에서 수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애를 쓰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낍니다. 반복적으로 노력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완전한 집중이 안 되고 약간의 들뜸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를 넘어서기 위해 마음에 힘을 조금 더 주면 다음에는 집중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대상을 계속 살필 수가 있게 되는데 이때 위딱까라는 요소 하나가 없어집니다. 일으키는 생각, 지속적인 고찰, 희열, 행복, 집중 이 5가지가 초선정의 구성요소인데, 2선정으로 가면 일으키는 생각이 없어지고, 지속적인 고찰, 희열, 행복, 집중 4가지만 남아 있게 됩니다.
 
반복하자면 시체를 보는 사람은 초선정까지는 잘 가지만, 초선정에서 2선정으로 가기 위해 마음이 일으키는 생각(위딱까)을 놓으려고 하면, 시체라는 대상에 대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일으킨 생각을 내려놓고 계속 살펴야 2선정으로 들어가는데 시체를 보려고 하는 마음(위딱까)이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시체를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으로는 2선정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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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에서는 14가지를 가르칩니다. 즉 호흡, 네 가지 큰 자세, 나머지 작은 동작들, 그리고 먹는 것에 대한 더러움, 사대, 9가지 시체에 대한 관찰(시체가 가루로 변해 사라지기까지의 9가지 과정), 이렇게 14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정리할 때는 이렇지만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이런 것을 하나씩하나씩 순서대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옷장에 보면 양말들이 따로 있고, 속옷들이 따로 있고, 셔츠들이 따로 정리되어 있지만 입을 때는 양말도 신고 속옷 겉옷 다 입는 것과 똑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수행 방법을 자연스럽게 섞어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책에서 읽은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만약 호흡을 관찰하겠다고 결정하면 호흡 외에 다른 것은 다 무시합니다. 굳이 하려고만 하면 그렇게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호흡만 보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만약 출가를 하여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수행만 할 수 있다면 몰라도 일반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수행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루에 호흡 관찰만 한 시간 한다, 그러면 23시간은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사념처를 이론적으로 분류해 놓기는 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그것들을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상을 바꾸면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체를 관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을 가지고 하는 수행은 아니지요. 그런 것은 한 번 제대로 수행하면서 내면에 기억해 놓으면 될 것입니다. 자기가 누워 있을 때 마음으로 자기 몸을 시체로 만들어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집중이 깊어지면 자기 몸이 진짜 시체처럼 느껴져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도 시체의 아홉 가지 부분 모두를 순서대로 할 필요는 없고 보이는 것만 자연스럽게 관찰하면 됩니다.
 
느낌 관찰도 아주 간단합니다. 행복함(즐거움), 괴로움(고통), 중간 느낌 이 세 가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 관찰은 마음을 반복해서 관찰하는 것인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마음에는 16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마음에서 마음을 반복해서 관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신 다음 곧바로  “욕심나는 마음을 욕심나는 마음이라고 알고, 욕심 없는 마음을 욕심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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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수행입니다. ‘욕심 부리지 마라.’가 아니라 욕심 부리고 있음을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할 때 욕심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을 관찰합니다. 이때 욕심나는 마음을 알면 ‘아, 욕심, 욕심, 욕심…….’ 하고 마음을 관찰할 때 아주 예리하고 빠르게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 속에 빠지게 됩니다. 물질을 관찰할 때는 어느 정도 느리게 해도 되는데 마음을 관찰할 때는 아주 예리하게, 확실하게, 빠르게 관찰하면 마음이 빨리 사라집니다. 물론 일어난 마음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법 자체가 그렇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도를 없애버리려고 하지 말고 일어난 마음을 그냥 확실하게 알려고, 빠르게 알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욕심 있는 마음에서 욕심 없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 보입니다. 욕심 있는 마음을 관찰할 때는 앞에 있는 것이 욕심 있는 마음이고, 이어서 관찰하는 마음이 있지요. 이때 욕심 있는 마음의 힘이 세고 관찰하는 힘이 약하면 욕심 있는 마음이 다시 약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관찰하는 마음이 더 세면 욕심 있는 마음은 없어지고, 그러면 욕심 없는 마음을 알게 됩니다.
 
성냄 있는 마음을 성냄 있는 마음이라고 알면서 보고 있으면, 성냄이 사라져 성냄 없는 마음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 있는 마음으로 보고, 그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지면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봅니다.
 
수행자들이 집중되는 마음으로 수행할 줄 모르고 집중되는 마음에서 욕심을 부려서 오히려 수행이 망가지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집중되는 마음을 다시 관찰하면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중되는 마음을 관찰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니 그 집중이 사라지고 맙니다. 스스로 집중을 먹어치우는 셈이지요. 망상 부리는 마음, 집중이 되지 않고 들뜬 마음으로는 수행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붕 뜨고 들뜨면 그 들뜨는 마음을 그대로 관찰해야 되는데 들뜬 마음을 꽉 붙잡아 억누르면서 코를 본다, 배를 본다 하니까 수행이 마냥 어렵고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들뜰 때는 ‘아, 마음이 계속 흔들흔들 하는구나.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움직이고 있구나.’라고 알고 그 움직이고 있는 마음을 다시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집중되지 않는 마음을 집중되지 않는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법을 관찰하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그 첫째는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수행 중에 계속 욕심 부리는 생각들이 올라오는 것도 5장애 중에 하나입니다. 싫어하는 것, 미워하는 것도 5장애에 속하고 나태 혼침, 의심, 들뜸과 후회도 5장애입니다. 그 장애들을 보는 것 자체가 법 관찰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수행을 가로막고 있으면 마음속으로 팔정도가, 선업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태 혼침이나 들뜸 후회, 의심이나 욕심 또는 성냄이 있으면 수행이 안 되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관찰을 하는 것이 수행인데 관찰은 하지 않고 그 장애에 이끌려 다니면 수행이 막히고 망가집니다. 그러나 그 5장애를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 그대로 관찰하면 그것은 수행입니다. 졸음이 올 때 졸음을 보는 것이 법입니다. 졸기 전에 먼저 해태 혼침이 있는데 이것을 아는 것도 법이에요. 오온, 곧 색·수·상·행·식을 알면 그것도 법입니다. ‘안眼,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즉 십이처를 보는 것도 법입니다. 수행이 좋아져서 다시 노력을 보게 되고, 사띠를 보게 되고, 지혜를 보게 되고, 수행 도중에 그런 것들을 다시 보게 되는 것도 법입니다. 사성제 즉 고집멸도를 보는 것도 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념처를 이런 순서로 가르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사념처는 수행하는 구체적인 실천법이고 팔정도는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 즉 법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사념처 수행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으로 열심히 수행하여 모든 고통 벗어나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칠각지, 깨달음의 요소”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8-1
“육문을 조심하고, 몸·입·마음 단속하고 사념처를 수행하는 것”

2015-03-01 (일) 18:24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8.칠각지와 위빳사나

 

 오늘은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 즉 칠각지(七覺支)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 때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부처님,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요소 일곱 가지(칠각지)를 수행해야 하고, 그 칠각지를 위해 사념처 수행을 해야 한다.”

 

 부처님이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념처 수행을 잘 하려면 육문(六門)을 잘 챙겨야 하고, 육문을 잘 챙기기 위해서는 세 가지 좋은 습을 키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 가지 좋은 습이란 몸으로 하는 좋은 습 세 가지, 입으로 하는 좋은 습 네 가지, 마음으로 하는 좋은 습 세 가지를 말합니다. 몸으로 하는 좋은 습 세 가지는 살생을 피하는 것, 도둑질을 피하는 것, 삿된 음행을 피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좋은 습 네 가지는 거짓말을 피하고, 이간질을 피하고, 욕설을 피하고, 쓸데없는 말을 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마음으로 하는 좋은 습 세 가지는 탐욕의 마음을 버리고, 성냄의 마음을 버리고, 사견을 피하는 것입니다.

 

 육문을 잘 챙긴다는 것은 눈·귀·코·혀·몸·마음을 항상 챙겨야 한다는 의미인데 예를 들어 대상을 보면서 욕심 부리지 않고, 성내지 않도록 하는 것, 소리 들을 때 그것을 좋아하여 욕심 부리고 싫어하여 성내는 마음을 피하는 것 등등입니다. 눈이 잘 보여도 맹인처럼 행동하고, 귀가 잘 들려도 귀머거리처럼 행동하라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귀를 막고 살 수는 없지만 들을 때 항상 마음을 챙기면서 조심스럽게 듣고, 이와 같이 형상·냄새·맛·몸의 감촉·마음 등을 잘 챙겨야 사념처 수행이 잘 되어 몸·느낌·마음·법을 바르게 관찰하게 되고, 그렇게 하면 올바른 칠각지 수행이 되고, 결국에는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다. 즉 육문을 조심하고, 몸으로 나쁜 짓 안 하고, 입으로 나쁜 말 안 하고, 마음으로 나쁜 생각 안 하면서 사념처를 실천 수행하는 것 자체가 칠각지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칠각지는 깨달음의 요소를 말하는 것으로 그 깨달음의 정도가 100% 완전해졌을 때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로 말하면 위빳사나 지혜의 상태가 1도, 2도, 3도, 4도에서 99도까지가 위빳사나의 상태이고 거기에 1도를 마저 채워 100도가 되면 깨달은 것이 됩니다. 이렇게 깨달음으로 가는 데에 필요한 일곱 가지 요소를 칠각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칠각지라는 것이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많이 닦고 닦아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칠각지가 계속 반복해서 많이 쌓아가야 되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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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칠각지를 자세히 풀이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깨달음의 요소 일곱 가지 중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사띠입니다. 이것은 매 순간 사념처를 잊지 않고 주의 깊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법을 고찰하는 것, 법을 살펴 숙지하는 것으로 이것은 법을 깊이 살펴 안다는 것이니 곧 지혜를 가리킵니다. 지혜에는 ‘확실하게 앎.’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수행자들이 호흡을 관찰하면서 지대, 화대, 풍대를 본다면 그것이 지대, 화대, 풍대를 제대로 아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나는 마음, 즉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데 그 대상을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마음을 망가뜨리려고 하고 있고, 마음이 망가지고 있는 것을 안다면 화나는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화의 특징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칠각지에서 법을 아는 지혜란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 진리 등의 의미라기보다는 물질과 정신, 오온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를 아는 지혜를 뜻합니다.

 

 칠각지 세 번째 요소는 위리야(노력)이고 네 번째는 삐띠(희열, 기쁨)입니다. 삐띠를 영어로는 ‘like’로 번역합니다. 이때의 ‘좋아하다’는 욕심으로 좋아하여 좇아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욕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대상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만약 어떤 사람을 욕심으로 좋아하면 마음이 그 대상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집에 있어도 그 사람이 생각나고, 어디를 가든 그 사람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는 식으로 마음에 그 대상을 풀로 붙여 놓은 것처럼 끈적거리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삐띠는 욕심이 아닙니다. 희열, 기쁨은 순간순간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좋은 느낌으로 집착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단지 그것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칠각지의 다섯 번째 요소는 고요함입니다. 이것은 ‘시원하게 조용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을 틀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시원하면서 고요해지는 그런 느낌입니다.

 

 칠각지의 여섯 번째는 집중이고 마지막 일곱 번째가 평정(우뻭카)입니다. 우뻭카가 그냥 대상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고 중립적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 기쁘게 하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8-2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라, 고요해져야 집중이 가능한 것이니”

2015-03-19 (목) 15:21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사띠를 맨 앞에 두고 가르치셨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띠를 제외한 여섯 가지 요소는 다시 세 가지씩 둘로 나뉘어서 그 둘이 서로 짝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두 갈래의 세 가지 요소들이 완벽하게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수행이 제대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그에 반해 사띠는 아무리 많아도 넘치는 것이 없고 사띠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만큼 사띠가 중요하기 때문에 칠각지의 맨 앞에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 도중에 항상 사띠가 끊어지지 않도록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사띠가 있어야 나머지 여섯 가지 요소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 요소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사띠입니다. 사띠가 없는 것은 어떤 옷을 입을 때 끈 하나를 풀어 버리면 옷이 지탱되지 않고 그대로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나사 하나를 빼버리면 모든 부속품들이 흩어져 버려 못 쓰게 되는 기계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띠는 수행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띠가 없으면 수행자가 자신의 노력 정도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쓸데없이 애만 많이 쓰고 있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게으름에 빠져 졸고 있어도 그것 또한 기억하지 못합니다. 수행 중에 사실을 아는 것은 지혜가 하는 일이지만 수행 대상을 기억하는 것, 자신의 현재 수행 상태를 기억하는 것은 사띠가 하는 일입니다. 수행 중에 노력이 지나친데도 계속 밀고 나가다가 결국은 머릿속이 멍해지고 가슴이 탁탁 막히면서 답답해지고, 배꼽 주위에 힘이 꽉 주어지면서 숨이 차오른다면 사띠가 없어서 노력이 넘친 상태입니다. 사띠는 관찰의 대상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마음을 붕 뜨지 않게 해주는 것으로 집중과는 다릅니다. 집중은 마음을 가만히 단단하게 대상에 놓아두는 것이고, 사띠는 마음이 대상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과 대상이 딱 붙어 있게 하는 것이 사띠가 하는 일이고, 마음이 대상에 붙어 있는 상태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은 집중입니다. 아주 미묘합니다. 사띠가 없으면 대상과 마음이 잘 계합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호흡을 관찰 대상으로 했을 때 사띠가 없으면 마음이 호흡을 알긴 알지만 그것을 아는 마음과 호흡이 딱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호흡의 사실을 정확하고 깊게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대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 사띠가 하는 일입니다. 강한 사띠가 있어서 마음속에서 대상이 분명해질 때 그 대상에 있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묶어 하나로 계합하는 것이 사마디, 집중입니다. 사띠와 사마디는 연결이 되어 있지만 하는 일이 서로 다릅니다. 사마디는 마음을 가만히 단단하게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띠와 사마디가 있어야 지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호흡이 수행 대상이라면 호흡 속이나 배의 움직임에 대한 사실, 경행이라면 걸어가면서 오른발 걸음 왼발 걸음을 알고, 그 걸음 속에 있는 물질의 특성과 정신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법을 고찰하고 숙지하는 것, 즉 담마위짜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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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타타가타여래투어 제공

그 다음인 위리아, 즉 노력도 지혜와 관련됩니다. 칠각지에 신심은 포함되지 않지만 신심이 있어야 노력이 이루어지는데 신심은 지혜가 없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지혜가 있어야 신심이 생긴다고 말하는 이유는 알지 못하는 것에 믿음이 생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믿을 수 있고,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지혜가 있어야 노력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수행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어야 수행을 할 수가 있고, 수행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 수행을 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수행에 대해 아는 것이 담마위짜야이고, 수행 도중에 알게 되는 것도 담마위짜야입니다. 수행 중에 일어나는 지혜가 다시 신심과 노력을 일으키는 힘이 됩니다. 노력이 있어야 사띠가 좋아지고, 노력이 있어야 지혜도 좋아집니다. 그만큼 수행에서 노력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힘차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삐띠, 희열입니다. 그래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수행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수행을 소중히 여기면서 기쁘게 하면 노력이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몸의 세포들, 혹은 바이러스하고 비슷해서 하나가 있어야 둘이 되고, 둘이 있어야 넷으로 늘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삐띠가 없다면 억지로라도 삐띠를 일으켜야 그것을 바탕으로 더 큰 삐띠가 생기고, 그래야 그것이 차츰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가 생기면 확산되어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노력도 이와 같아서 앞의 노력이 있어야 그 다음 노력이 올 수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노력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수행에도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기쁘게 수행을 시작하고 수행할 때마다 기쁘게, 기쁘게 하십시오. 기쁘게 해야 노력이 좋아집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호흡 관찰을 예로 들자면, 숨을 들이쉬는 것에 사띠를 가지면서 노력하여 들숨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순간 ‘잘 되는구나.’ 할 때 기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기쁜 마음이 다음의 호흡을 관찰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하나 다음에 하나, 그런 노력으로 마음의 힘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냥 멍하게 있을 때와는 달리 사띠를 가지면서 노력해서 마음을 대상에 딱 올려놓으니까 그 순간 마음이 깨어나는 특별한 느낌, 거기에 수행의 맛,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좋은 마음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을 때와 수행할 때의 마음 수준은 확실히 다릅니다. 대상 하나에서 제대로 노력해서 알아차리는 순간 그 마음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것에 대하여 생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기쁨 하나가 생기면 그 다음에 다시 생기는 것은 쉬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있으면 다시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과 노력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이 고요함으로 이 고요함은 삐띠가 있어야 생깁니다. 우리가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으면 고요할 수가 없지요. 화가 나고 열도 나고 속도 타고 몸도 안 좋아지고 마음도 안 좋아지면 고요함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안 좋고 불편하고 수행이 바라는 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있으면 욕심이나 들뜸이 생기면서 고요함이 오지 않습니다. 수행 도중에 안 좋은 생각이나 욕심 즉 ‘이것 하고 싶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있으면 고요함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요함은 그런 욕구가 사라지고 삐띠, 기쁨이 있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고요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뻐야 되고, 기쁘면 만족감도 올라갑니다. 그 만족감이 올라와야 고요함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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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고요함도 깨달음의 요소인데 고요함이 있어야 집중이 옵니다. 고요하지 않은 마음은 항상 흔들려서 불안정합니다. 불안정하고 고요함이 없을 때 수행자들이 많이 막힙니다. 고요함이 집중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것과 내가 강제로 힘을 주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억지로 집중하려고 지나치게 애를 쓰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집니다. 집중은 강제로 되는 일이 아니고, 고요함에 뒤따라 자연스럽게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뭔가 걱정거리가 있으면 마음이 들뜨게 되어 있습니다. 걱정 근심은 들뜨는 마음이고 너무 노력을 강제로 할 때는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렇게 힘이 드는 마음으로 집중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거나 가슴이 조이는 느낌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인위적으로 숨을 멈추기도 합니다. 숨을 쉬면 마음이 흔들리는 걸 본인이 알기 때문인데 그것은 집중에 대한 욕심입니다. 수행하면서 집중이 잘 되었던 때를 계속 그리워하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욕심 때문에 앉기만 하면 그 상태로 가려고 밀어붙이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상기가 되거나 숨이 차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배꼽 주변이 꽉 조이는 등의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몸의 기운이 순환이 잘 안 되면서 통증이 엄청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그런 현상을 일어나는 즉시 깨닫지 못하고 한참 진행된 이후에야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사띠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중에 대하여 욕심 부리는 마음은 가슴에 깊이 박힌 돌멩이와 같아서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도 안 좋은 꿈을 많이 꿉니다. 자신은 미처 모르고 있기가 쉽지만 그것은 화나는 마음입니다. 나를 압박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생기는 현상입니다. 고요해야 집중이 온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이론입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지도하는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이완되어야 고요함이 오고, 고요함이 있어야 집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고요함이 없는데도 집중에 자꾸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면 수행은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자동차도 엔진을 시원하고 고요하게 하는 쿨링 시스템이 있습니다. 수행은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건으로 뭔가를 만들거나 하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하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수행을 하면 이상하게 배가 고픈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렇다 보니 자꾸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수행이 잘 되어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그 에너지가 절약됩니다. 그래서 수행이 아주 잘 되면 그 다음부터는 조금만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게 됩니다. 쿨링시스템이 좋아져서 엔진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으니 엔진 과열이 되지 않고 차가 잘 굴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계속>


집중에 욕심 부리지 말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8-3
“수행이 안 된다고 자존심 상하는 건 자만심으로 수행하기 때문”

2015-03-26 (목) 19:14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고요함 뒤에 집중, 사마디가 되고 그 다음에 우뻭카가 됩니다. 사마디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뻭카 상태로 되어간다는 것을 선정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초선정, 2선정, 3선정까지는 희열, 행복, 4선정은 행복과 집중, 5선정으로 가면 중간 느낌과 집중으로 바뀝니다. 초선정부터 4선정까지 있던 희열이나 행복은 사라지고 5선정에서는 우뻭카, 평정의 느낌, 즉 차분해지면서 중간 느낌과 집중만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사마디가 있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입니다. 차분한 마음이 더 차분해지는 것의 원인이 됩니다. 즉 사마디가 있어야 사마디가 있다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이 말이 사실입니다. 사마디가 없으면 사마디가 없고, 앞에 사마디가 있어야 뒤에 사마디가 따라온다, 그런 의미입니다.

 

집중도 마찬가지여서 집중되는 마음을 다시 관찰하면 더 깊은 집중이 옵니다. 그러므로 집중을 키우는 법은 바로 집중되고 있는 그 집중의 마음 상태를 다시 관찰하는 것입니다. 집중이 빨리 안 오는 이유는 집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처음에 앉을 때는 마음이 딴 생각들을 많이 하지만 조금 있으면 조용해집니다. 그 조용한 마음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점점 더 조용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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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우석

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시끄럽습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많으면 그 생각이 머리로 가고 그것들이 머리에서 감정을 일으킵니다. 생각이 많을수록 감정이 복잡해지고, 감정이 복잡해지면 고요함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집중을 관찰할 때는 머리로 보지 말고 가슴으로 보아야 합니다. 수행하면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10분에 한 번 정도씩 관찰하는 마음을 다시 관찰하라고 하지요. “보는 마음을 또 보세요.” 하는 말이 그 말인데, 보고 있는 마음을 다시 보면 고요함이 느껴집니다.

그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볼 줄 알면 그 가라앉음이 집중입니다. 그 집중을 보면 다시 더 집중이 됩니다. 수행하다 10분에 한 번 정도씩 다시 ‘지금 수행하고 있는 몸과 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수행의 기술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수행을 체크하여 수행하고 있는 현재의 마음과 몸이 불편한지 편안한지, 좋은지 안 좋은지를 보면서 수행의 상태를 바로잡는 것도 수행입니다. 조금 집중되는 상태를 바로잡아 주게 되면 더 집중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 중에 가라앉은 마음이 있으면 가라앉는 마음을 아는 것도 수행입니다. 수행자들이 호흡 관찰을 한다면서 무조건 호흡만 잡고 있는 것도 욕심일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시로 자신의 수행 상태와 수행하고 있는 마음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행하면서 자꾸 사띠를 놓치고 집중이 잘 안 되면 그것 자체를 차분하게 관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계속 궁리를 하고,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에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자만심으로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마음의 균형이 깨져 버려 더더욱 수행이 망가지는 위험을 초래합니다.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마음을 체크하면서 지금 내 수행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 방법을 보면 ‘바라는 마음도 없고 원하는 마음도 없고, 조급한 마음도 없고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고 성급한 마음도 없고, 단지 현재의 현상에 마음만 있도록 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수행 중 자신의 수행 상태와 마음을 점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무언가를 바라면서 수행하고 있다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수행은 단지 현재에 있는 것을 관찰해야 하는데, 현재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뭔가를 계속 바라면서 합니다. 그것은 이미 마음이 현재의 대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수행이 잘 되질 않겠지요. 원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데 원하는 마음이 아주 많습니다. 수행 중에 이거 원하고 저거 원하니 이미 수행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마음은 또 얼마나 조급한지! 그러므로 수행 중에 수시로 그 마음을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찬찬히 마음을 살펴보면 어떤 때는 걱정하고 있고, 또 어떤 때는 두려워하거나 조급해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함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들을 모두 놓아버려야 고요함이 오고 집중이 됩니다.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은 집중이 문제가 아니고, 집중에 대한 욕심이 문제입니다. 수행에서 집중은 필수입니다. 당연히 집중이 필요한데 문제는 집중에 계속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수행자가 ‘아, 내가 집중에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라고 알면 문제가 아닌데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계속 거기에 빠져 있습니다. 수행은 지금 이 순간을 오직 관찰만 해야 하는데 관찰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집중이 될까?’ 하고 계속 머리만 쓰고 있으니 머리에 열이 나서 뜨거워집니다. 사마디가 있어야 편안해지면서 우뻭카가 오고, 그러면 욕심에도 쉽게 빠지지 않게 됩니다. 또 쉽게 성도 내지 않게 되어 마음이 단단해지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이 되어 계속 그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들이 칠각지의 의미입니다. <계속>


 

 

“사띠로 수행의 균형을 이루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8-4
“초보자는 집중에서 멈춰 깨지고, 경험자는 욕심 때문에 발전 못해”

2015-04-08 (수) 14:21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칠각지에서 사띠를 빼면 여섯 가지가 남습니다. 그것을 다시 세 가지씩 묶어 둘로 나누면 한 쪽이 노력 그룹이고 다른 한 쪽이 집중 그룹으로 짝을 이룹니다. 담마위짜야(지혜), 위리아(노력), 삐띠(희열, 기쁨)가 노력 쪽이고, 빳삿디(고요함), 사마디(집중), 우뻭카(평정)가 집중 쪽입니다.
 
수행이 잘 되려면 그 요소들이 균형을 유지해야 하고 두 그룹도 서로 정확히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띠는 균형을 이룰 필요 없이 무조건 많아야 하고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것도 사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띠가 없으면 깨달음의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균형이 깨졌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이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혜가 많아지면 노력도 좋아지는데 노력이 지나치면 집중이 약해집니다. 지혜는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하지만, 아는 것을 머리로 숙지하면서 계속 돌아보는 것도 지혜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리로 생각하는 지혜가 지나치면 수행에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저렇게 해야 하는 거야.’ 또는 ‘아, 법문할 때 그렇게 들었으니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아냐, 저렇게 해야 맞는 거야…….’ 이러다 보면 고요함이 깨지면서 집중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머리로 많이 그리는 지혜는 욕심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심 때문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신심과 욕심은 아주 가깝습니다. 수행이 잘 되면 신심이 좋아지는데 신심이 좋아지면 머리로 여러 가지 상태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 봐야지, 내가 포교해야지, 내가 절을 지어서 사람을 어떻게 수행시켜야지…….’ 이렇게 계속 앉아서 머리를 씁니다. 그러면 수행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심으로 시작했던 것이지만 그 신심이 생각을 일으키면 그 때부터는 신심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올바른 신심은 단순하게 불·법·승을 좋아하고 믿으면서 그 힘으로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지혜로도 생각이 많아지고, 신심으로도 생각이 많아지지만 그 둘의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지혜로 생각이 많아지면 신심이 떨어지고, 신심으로 생각이 많아지면 지혜가 떨어집니다. 아주 미묘한 관계입니다. 내가 신심이 일어나면서 생각이 점점 많아지면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면서 마음이 들뜨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가 떨어지고 잠에 빠지는 쪽으로 바뀝니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후회만 남습니다. 신심으로 시작한 것이 후회로 끝나 버리는 경우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계속 지혜가 일어나면서 끊임없이 따지고 분석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다 아는 것 같아서 수행의 필요성도 못 느끼게 되니, 수행은 조금만 하고 내내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 점점 자신이 모든 걸 다 깨달은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지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신심조차 망가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특히 머리 좋은 사람이 많이 조심해야 하는데, 머리 좋은 사람은 수행을 조금 해도 이해하는 것은 많을 수 있습니다. 실천력은 조금 있는데 이해력이 많아서 그 이해력으로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 그냥 일주일 만에 수다원 되더라. 나한테 와.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 줄 테니까.” 하고 다니는데 이런 사람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머리가 비상하게 좋고 말을 잘 하는 데다가 경전까지 알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더 무섭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없는 것이 신심입니다. 신심이 떨어지면 지혜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기 중에도 대단한 사기이지요. 본인이 직접 수행을 해야 깨닫는 것이지 수행을 과외 수업시켜 남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깨달음이 일주일에도 될 수 있고, 한 시간 안에도 될 수 있지만 실천수행이 없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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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우석

이렇게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에는 각 요소들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띠입니다. 수행 중에 신심이 오면 그러함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이 잘 되니 신심이 좋아지고 불·법·승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는 것은 좋은데 이것이 균형을 잃으면서 갑자기 ‘아, 아버지 어머니는 이 좋은 것을 모르고 가셨구나.’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아, 우리 동생도 수행시켜야지, 남편도 알면 좋을 텐데, 내 아들딸도 수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이 계속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면 그 마음을 빨리 관찰해야 합니다. 신심이 지나치면 그 다음은 욕심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 다음은 성냄으로 치솟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애들에게 수행하라고 하는데 왜 안 하나? 왜 이렇게 말귀가 어두워?’ 그렇게 되면 갑갑해지면서 수행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신심이 넘쳐도 안 되고 지혜가 넘쳐도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심이 넘치면서 진정한 지혜가 없다 보니 지금 내가 제대로 하는 건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가족들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아이고, 말만 하면 수행, 수행 하면서 하는 짓을 보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또 지혜만 높아져도 문제이니 이런 사람은 실천과 수행이 나란히 병행해야 되는데 실천은 조금만 하고 생각은 아주 많이 합니다. 법문을 듣고 책을 읽어 아는 게 많다 보니 ‘수행하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고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 뿐, 그 상상이 이론적으로 틀리지 않더라도 자신의 심리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아, 경전에서 말하는 이것이 실천하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고 이해는 하지만 자신의 심리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수행으로 체험한 사람과의 큰 차이점입니다. 실제로 체험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심리에 변화가 옵니다. 그래야 사람이 성장합니다.

 

그런데 수행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지식과 지혜가 좋아서 말 잘하고 강의도 잘하지만, 인간적인 성장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일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염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조심해야 하고, 자신의 수행 중에 그런 상태가 오는 것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혜와 노력, 희열이 한 편이고, 고요함과 집중, 평정이 다른 한 편입니다. 지혜가 커지면 노력도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수행에 의한 올바른 지혜가 아니라 계속 머리로 하는 이해에 의한 지혜일 경우에는 노력하는 만큼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만큼 집중이 안 온다면 틀림없이 머리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실천하는 것보다 머리를 많이 쓰고 있으면 집중이 안 오고, 제대로 수행하여 노력하고 있다면 집중이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 잘 되고 있으면 차츰 몸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만약 계속 몸과 마음이 불편하다면 자신의 수행 상태나 마음 상태를 점검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집중이 안 온다면 알게 모르게 신심이 넘치거나, 지혜가 넘치거나, 노력이 넘치는 등의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에는 삐띠가 수행을 도와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삐띠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좋은 사람은 지혜로 생각하면서 바르게 이해해도 삐띠가 올 수 있고 틀리게 이해해도 삐띠가 올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만심과 함께 하는 삐띠도 있으니 삐띠를 100%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욕심의 삐띠도 있어서 좋아하며 먹을 때도 삐띠가 있고 영화 볼 때, 노래 부를 때, 남자 여자가 좋아할 때도 삐띠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삐띠가 있다고 하여 그것을 다 좋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자만과 욕심으로 되는 삐띠도 있어서 ‘내가 잘한다, 내가 잘한다.’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수행이 잘 된다면 자만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삐띠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노력이 집중으로 가는 노력이 아니고 많이 생각하는 노력입니다. 그러면 욕심을 부리는 쪽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에도 희열이 조금 있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욕심과 관계 있는 희열입니다.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타고난 체질 자체가 욕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거나, 수행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어서 수행과 관련된 생각이 많지 않은 사람으로, 그런 경우에는 빨리 집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중이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집중이 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아주 고요하고 평온하다가 조금 있으면 잠에 빠져 버립니다. 집중이 되면 대상이 미세해지는데 마음이 이 미세한 대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중이 너무 강해지면 마음이 무거워졌다가 그 다음에는 작동을 안 합니다. 관찰하는 것을 멈춰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강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띠입니다. ‘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구나.’ 하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면서 노력을 강화시켜 확실한 관찰력으로 그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숨을 들이쉬면서 들이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희미해지면 들숨, 날숨 하고 명칭을 붙이면서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고, 명칭을 안 붙여도 마음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강하게 사띠하면서 조심스럽고도 확실하게 알면 노력과 지혜와 희열이 다시 올라오게 됩니다. 적절히 노력해서 대상을 확실하게만 관찰해 주면 지혜로 현재의 대상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사띠는 수행의 매 순간 항상 챙겨야 하는 수행의 필수요건입니다. 수행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노력과 지혜, 희열 쪽에 문제가 많습니다. 노력이 넘치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면서 우뻬카를 올려 줍니다. 초심자의 경우 집중이 넘쳐 몽롱해지고 관찰이 무뎌지면 노력 쪽에 좀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현재 자신의 수행 상태가 어떤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사띠는 항상 필요하며 사띠의 힘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수행 초보자는 집중에서 멈추면서 수행이 깨지고, 수행 경험자는 욕심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수행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걸 아시고 사띠를 연결시켜서 깨달음의 요소 여섯 가지가 균형을 이루도록 할 때 수행이 고르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칠각지 내용을 바르게 알아 마음에 새기고, 열심히 팔정도 수행을 하여 모든 고통 벗어난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위빳사나 지혜엔 아(我)가 붙지 못한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9
“지혜로 생각이 많아지면 신심이, 신심으로 생각이 많아지면 지혜가 떨어져”

2015-04-16 (목) 17:55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9. 무아와 위빳사나

 

오늘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담고 있는 무아경, 그리고 무아경을 위빳사나 수행과 연계하여 좀 더 깊이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무아(無我)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 교단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법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삼학, 즉 계·정·혜로 축약하여 볼 경우 계율은 어느 교단에서든 나름대로 다 있습니다. 몸과 마음, 입으로 어떤 것을 하면 안 되고 또 어떤 것은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은 여느 종단에도 다 있는데, 그 계율이 완벽한 지혜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는 교단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계율은 기본이고 정(定) 즉 집중에 대한 가르침도 매우 중요하고, 지혜는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지혜의 한가운데에 바로 ‘무아’가 있습니다. 다른 모든 가르침에서 ‘아(我)’를 가르치는 것과는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무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무아의 여러 측면을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주인공인 나(자아)’가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된다고 착각하여 내가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서고 싶으면 서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내 뜻대로 된다고 보는 자아입니다.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내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인데, 그런 걸 모르고 내 뜻대로 되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관찰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다시 뒤에서 다른 어떤 놈이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수·상·행·식 중에서 식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 앎인 식에 ‘나’를 갖다 붙여서 아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그것이 ‘나’라고 착각합니다.
 
두 번째 ‘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나’가 있다고 착각하는 ‘나’입니다. 무상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무아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는 ‘나’가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아상은 수·상·행·식 중에서 ‘상’과 관련이 많습니다. 상은 기억하는 것이지요. 어제를 기억하고 작년을 기억하고,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이라는 물질과 정신은 계속 변하여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상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내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을 하는 사람’ 즉 무언가를 하는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내가 보는 것, 생각하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것, 수행하는 것조차도 내가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 등 일체를 내가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강한 ‘나’입니다. 아는 것도 내가 아는 거고, 모르는 것도 내가 모르는 것이며 모든 행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은 수·상·행·식 중에서 행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수행할 때도 ‘내가 노력하고 있다.’, ‘내가 게으르다.’, ‘아, 내게 신심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것에 ‘나’를 붙여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집중이 깊어지고 지혜가 높아지면 그렇지 않음을 보기 시작합니다. 신심은 신심일 뿐이고, 이 신심 또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행, 모든 일을 하면서 계속 ‘내가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상입니다. 수행하고 있는데 집중이 깊어져서 지혜가 좋아지면 법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 스님, 제가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데 뒤에서 한 놈이 이렇게 보고 있어요.” 이러면 수행 열심히 하고 있는 ‘놈’은 행, 뒤에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놈’은 식일 뿐 그게 ‘나’는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행이 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색·수·상·행·식을 구별하여 볼 때 법을 본다고 말합니다. 수행이 깊어져서 법을 많이 보게 되면 ‘무아’를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있어서 계속 일어나서 사라짐을 알고 있으면 거기에 아(我)가 붙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어난 것이 즉시 사라지는 것을 계속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그때그때 가지게 되는 느낌을 아(我)라고 보는 것입니다. 행복할 때 행복한 나, 괴로울 때 괴로워하는 나, 고통스러울 때 고통스러워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 자아라고 할 때에는 이 네 가지의 나(我)를 이해하고 있어야 무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단지 색·수·상·행·식인 오온일 뿐인데 이 오온에 강하게 집착함으로써 그것을 자아, 나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몸이 있고 영혼이 있으며 이 몸은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이 몸이 죽어도 영혼은 계속 다른 몸을 받아서 산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 영혼 쪽에 특히 아(我)가 매우 강합니다. 혼이라는 것이 정신이고 그것은 색·수·상·행·식 중에서 색을 제외한 수·상·행·식이지요. 수(受)는 느낌이어서 행복한 느낌, 괴로운 느낌 등을 말하는데 그 느낌에 ‘아’를 붙여서 행복한 사람, 행복한 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수행으로 깊이 관찰하면 사실은 그와 같이 행복이라는 느낌만 있을 뿐 행복한 자는 없고 괴로움의 느낌은 있어도 괴로운 자는 따로 없음을 압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이라는 느낌일 뿐인데 괴로운 자가 있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원인에 따른 결과일 뿐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견입니다. 색·수·상·행·식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집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없어서 모를 뿐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그 오온이 뚜렷하게 하나 다음에 하나,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하나가 생기고……, 오직 그럴 뿐, 오직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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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우석

느낌(受)도 아주 뚜렷하게 하나 다음에 하나예요. 한 느낌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다른 느낌 하나, 그 하나하나가 계속 변해가기 때문에 무상하고 그것에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생겨난 모든 것은 곧바로 사라지는 것인데 관찰하는 힘이 약해서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것에 나라는 생각을 붙이고 집착하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느낌은 그냥 느낌일  뿐이고, 행위는 의도에 의해 일어난 행위일 뿐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으려면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야 가능합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은 수에서 항상 ‘나’를 동시에 만듭니다. ‘아, 행복하다.’ 그러면 ‘내가 행복하다.’, ‘아, 괴롭다.’ 하면 ‘내가 괴롭다.’ 이렇게 됩니다. 수에 대해 아가 생긴 것, 수에 대한 아상, 이것은 아주 미묘한 것이어서 수행을 안 하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하면 수라는 느낌에 ‘나’라는 생각을 붙여 놓고 있던 것이 계속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수는 수일 뿐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됩니다. 행복함은 있는데 ‘행복한 나’가 따로 없고 괴로움이 있는데 ‘괴로운 나’는 따로 없음을 보기 시작하면 신·수·심·법 중에서 법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수·심·법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법을 보게 되면 오온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오온이 해체되어 보이게 됩니다. 하나하나가 다 따로따로 보입니다. 행복함이 있고, 행복함을 인식함이 있고, 그 행복함을 다시 보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면 행복함이 수(느낌)이고, 그것을 보는 것이 식(의식)이고, 또 행복함을 다시 보고 있다면 그것은 상(기억, 인식)입니다. 그런데 이 상과 식은 아주 미묘합니다. 행과 수는 그 변화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가 아니라는 것을 비교적 빨리 알 수 있습니다. 느낌이 따로 있고 그것을 느끼는 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쉽게 분리가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기에서 아상을 놓기는 쉽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식과 상은 아주 미묘한 것이어서 여기에서는 아가 빨리 떨어져 나가질 않습니다. 이것은 수행을 깊이 해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상과 식은 뿌리가 워낙 깊어서 수행자들이 많이 조심해야 하는 두 친구입니다. 이 두 친구를 제대로 깊이 알아야 무아에 대한 지혜가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뿌리 깊은 아견이 다 떨어져 나가야 무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물질에서 무아를 아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수행이 되면 물질은 모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집중이 얼마만큼 되면 몸을 느끼지 못합니다. 몸은 수행 중에 쉽게 해체됩니다. 그러나 정신 쪽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아주 미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은 죽어 사라지지만 영혼은 남아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에서는 무상을 쉽게 봅니다. 그러나 혼은 무상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를 제대로 알려면 형성되고 있는 네 가지 법을 꿰뚫어 보아야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아’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혼(魂)의 개념과 그것에 대한 일종의 해체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혼이라고 하는 아상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아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위에서 알아본 네 가지 자아와, 다음에서 설명할 네 가지로 형성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인공인 나, 계속 살고 있는 나, 모든 것을 하는 나, 모든 것을 느끼는 나, 이렇게 네 가지의 아견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공부했습니다.
 
물질과 정신을 자아로 착각하게 하는, 형성되는 네 가지 ‘나’를 알아보겠습니다. 이 아상의 첫 번째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줄지어서 가는 것을 보면 개미가 한 마리씩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까만 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한 마리 한 마리 다 떨어져 있잖아요. 모든 물질과 정신이 이렇게 하나 다음에 하나로 각각인 것이 사실인데, 우리의 지혜가 낮아서 그것을 낱낱이 보지 못합니다. 전기를 예로 든다면 지금 우리는 전구가 계속 밝게 켜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전류가 끊어짐 없이 선으로 이어져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계속 전기가 나오면서 아주 미세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불이 켜지고 꺼지고, 다시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지만 그 간격이 워낙 미세해서 어둠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계속 밝다고 알고 있다가 완전히 전기가 끊어져 불이 꺼졌을 때라야 어둠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눈이 보는 속도가 만약에 그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면 밝음과 어둠이 번갈아 바뀌는 것을 그대로 알 수 있을 것인데 인간의 눈은 빛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 우리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알면서 그것을 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앎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도 계속 일어나 사라집니다. 물질도 과정이고 정신도 과정이어서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엄청난 속도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그것을 따라갈 수 있는 지혜는 없어서 사실을 사실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그렇게 생겼다가 사라지고, 마음도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한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것을 낱낱이 못 보는 데서 문제가 생기고 그것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그 지혜의 힘으로 몸과 마음이 해체되어 보이기 시작하고, 따라서 ‘몸과 마음으로 형성된 나’가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각각으로 보게 되어 ‘나’가 해체되면서 차츰 우리가 무상·고·무아를 깨닫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아상을 해체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수행을 해 보면 이 몸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물질이고, 정신도 여러 가지 정신이 섞여 있으면서 상호작용하고 있는 하나의 과정임을 보기 시작합니다. 물질은 지·수·화·풍을 비롯하여 18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기 전에는 몸을 하나라고 착각하지만 계속 관찰해서 실체를 보게 되면 그것들이 낱낱이 해체되는 18가지 물질일 뿐임을 보게 됩니다. 마음도 이와 같이 하나라고 착각하고 있던 것인데 수행을 통해 관찰하는 힘이 예리해지면 마음뿐만 아니라 마음부수도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아, 하나가 아니구나. 이것을 나라고 한다면 저것은 누구인가? 만약 저것을 나라고 하면 그럼 이것이 누구인가?’ 하면서 실체를 보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무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해체해서 보지 못하고 하나라고 보는 데서 아견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 즉 식과 관련이 깊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마음부수를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마음부수가 같은 대상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난다면 화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부수입니다. 마음은 이 ‘화’라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뿐입니다. 즉 화는 마음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화라는 대상을 두고 수·상·행·식이 모두 각자 자기의 일을 할 뿐 따로 ‘나’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존재가 없습니다. 그렇게 똑같은 대상에서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동시에 다른 일을 하면서 ‘아’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음은 항상 다른 대상을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대상에 대해 인식하는 마음이 하나이고, 또 다른 대상에서 인식하는 마음이 또 다른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이 다를 때마다 그것을 아는 마음도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소리를 느끼는 마음과 형상을 보는 마음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대상이 다르면 그것을 아는 마음도 다르다는 것은 직접 수행을 해서 체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 있던 마음이 가만히 있다가 소리가 생기면 그것을 듣고, 어떤 이미지가 있으면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볼 때 마음 하나가 생기고, 소리가 날 때 그것을 듣는 마음 하나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즉 대상이 다르면 마음도 다른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으로 어떤 것을 형성하고 그것을 실체라고 착각하는 것인데, 우리가 제대로 관찰할 줄 알게 되면 대상으로 형성한 그것이 사실은 계속 해체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 대상을 우리가 확실하게 구별하면 대상에 따라 마음이 각각 달라진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대상이 어떤 실체처럼 보이던 것이 대상이 해체되면 그것을 인식하던 마음도 해체되고, 그러면 식에 대한 아가 많이 깨집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여기는 마음, 식이 해체되어 버립니다. 마음도 하나 다음에 다른 하나일 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에 따라 마음이 생기고 다시 생기고 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 세 번째 아상 해체법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대상이 달라지더라도 거기에서 수·상·행·식이 같이 일하는데 그것을 ‘아’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한 대상에서 수는 느끼는 일을 하고, 행은 여러 가지 일을 해내고, 상은 기억하는 일을 합니다. 하는 일이 각자 다르니 역시 하나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의사는 치료를 하고, 변호사는 법원 일을 하고, 경찰은 경찰의 일을 하고 교사는 교사의 일, 스님은 스님의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일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각 일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마음부수가 하는 일이 다르고, 마음부수들도 각자 하는 일이 다릅니다. 사띠의 일과 상(기억)의 일이 완전히 별개로서 섞이지 않고, 사띠와 지혜도 별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자신이 관찰하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의심이 나라면 신심은 누구인가, 또는 지혜가 나라면 어리석음은 누구인가, 욕심이 나라면 무탐은 또 누구인가 묻고 들어가면, 결국은 아라고 할 것이 없고 무아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수·심·법 중에서 법 관찰이 깊어질 때 마음부수들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볼 수 있습니다. 마음부수 52가지를 일어난 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부수들이 하는 일이 서로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아가 무너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핵심인 무아법을 공부할 때 이렇게 네 가지 형성과 네 가지 아를 알면 무아를 이론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면이 있어서 수행 체험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네 가지 형성과 네 가지 아를 개념적으로 알려고 해서는 이해가 불가능하고, 내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하여 이 네 가지 형성법과 네 가지 아를 정확하게 알았을 때라야 무아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 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네 가지 ‘나(아)’란 주인공인 나, 영원한 나, 모든 것을 하는 나, 모든 것을 느끼는 나이고, 앞뒤로 연결되는 형성, 여러 가지 물질과 정신이 합쳐지는 형성, 대상으로 조직되는 형성, 일로 만들어지는 형성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과 바른 지혜로 끊임없이 관찰했을 때 그 형성된 것들이 해체됨을 볼 수 있고, 착각으로 만들어진 ‘나’가 사실은 무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네 가지 아를 버릴 수 있는 사람, 네 가지로 형성된 것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의 지혜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팔정도 수행을 열심히 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를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물질과 정신 구별해 아는 과정 거쳐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
“경전은 부처님께서 수행을 실천하면서 체험한 것을 확실하게 기록한 것”

2015-04-24 (금) 18:02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10. 위빳사나 지혜 계발 과정

 

우리는 위빳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하지만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지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사념처 즉 우리의 몸·느낌·마음·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 방법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그대로입니다. 대상을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인식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그것을 관찰 대상으로 하여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인식이 다 있을 수 있지만 한 순간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동시에 두 가지를 인식하지 않습니다. 호흡 관찰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따뜻함이나 차가움을 안다면 지·수·화·풍 중에서 물질의 화대의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쉴 때 공기가 콧속 어딘가를 가볍게 때리듯이 들어가고, 내쉴 때도 마찬가지로 때리는 듯한 느낌으로 나갈 때 공기의 흐름, 공기의 움직임을 알았다면 그것은 호흡의 특성 중 풍대를 아는 것입니다. 또 호흡에서 딱딱함을 느낄 수 있고 부드러움도 느낄 수 있고 무거움을 느낄 수 있고 가벼움도 느낄 수 있으면 그것은 지대입니다. 호흡에서 수대는 알기가 쉽지 않지만 나머지 지·화·풍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지대·화대·풍대를 골고루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되는 대로만 알면 됩니다. 

  

호흡은 사념처로 말하면 몸(身) 즉 물질에 해당됩니다. 호흡하는 중에 와 닿는 감촉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이 물질이고, 감각기관에 와 닿는 감촉도 물질입니다. 몸에 대상이 닿는 것을 아는 신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와 공기가 있고, 코에 공기가 닿는 부분에서 그 닿음을 인식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 인식하는 마음을 신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감각기관에 와 닿는 물질이 있고,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이 있고, 그것을 인식하려는 마음, 대상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대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사띠이고, 사띠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노력과 사띠가 있어서 집중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을 계속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사념처로 팔정도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집에 있어도 호흡을 하는데 굳이 수행처에 와서 들숨 날숨을 애써서 관찰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생각 없이 호흡을 하는 것과 호흡에 집중하여 그것을 관찰하는 것은 다릅니다. 집에서 일상생활을 다 하면서 호흡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수행의 경험으로 알 것입니다. 사실은 단 몇 분 동안 잊지 않고 호흡을 챙기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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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우석

그렇다면 호흡의 들숨 날숨 과정을 놓치지 않고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른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호흡만 관찰하다 보면 물질적 대상인 호흡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 오직 이 두 가지밖에 다른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 위빳사나 지혜의 첫 단계입니다. 대상이 있으면 우리 마음이 그 대상으로 기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소리가 나면 마음이 소리 쪽으로 가는 것 같은 느낌, 마음에 힘이 있을 때는 소리가 마음속으로 들어오거나 혹은 당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나마)의 의미입니다. 마음과 마음부수 두 가지를 합쳐서 나마,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물질(루빠)은 계속 변하는 것이 특징이어서 더우면 변하고 추워도 변하고 조건 따라 계속 빠르게 분명히 변합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로 금방 춥다가 더워지고, 좋은 느낌이었다가도 곧바로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끊임없이 변하고 바뀝니다.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이 물질과 정신입니다. 또 뭔가를 알아차리는 인식 과정을 정신이라고 하고, 그런 인식 과정이 없는 것은 물질이라고 합니다.

 

‘나마루빠 냐나’라고 하는 위빳사나 지혜의 첫 단계는 간단히 말하면 물질과 정신을 나눠서 완벽하게 아는 지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호흡을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서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오로지 호흡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 깨어나는 마음이 있습니다. 미세하긴 하지만 뭔가를 약하게 인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면 그런 미세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관찰하면서 잠드는 사람은 아침에 자고 있던 마음에서 깨어나는 순간 어떤 구멍에서 뭔가가 빠져나오는 것같이 깨어나는 마음의 과정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이 물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머리가 조금 맑구나, 어질어질하구나.’라고 알기도 하고, 옆에서 나는 소리나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 하나하나를 인식하기도 합니다. ‘지금 몇 시인가? 일어나야지.’ 이런 생각들, 정신적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면을 보는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정신을 볼 때 매 순간을 보기 때문에 급할 때 급한 마음, 화날 때 화나는 마음, 욕심날 때 욕심나는 마음, 질투 시기하면 질투 시기하는 마음 등 여러 가지를 그때그때 일어나는 대로 끊임없이 보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에 89가지가 있고, 깨닫지 못한 사람, 선정 없는 사람, 범부에게는 거의 45가지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 사라지고 있습니다. 깨달은 자가 아니면 89가지 마음을 다 볼 수는 없고 일반적으로 45가지 정도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즉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 상태의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지금 마음이 행복하면 행복한 것을 보고, 기쁘면 기쁜 것을 보고, 신심이 떨어지면 신심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치면 지치는 것을 보고, 지루하면 지루한 것을 보고, 신나면 신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일어나는 대로 그 마음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45가지 마음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반복해서 관찰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수행 중에 한 번 관찰하고 두 번 세 번 관찰해 나가면, 관찰하는 대상들을 모두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물질에는 28가지가 있습니다. 지·수·화·풍을 비롯하여 28가지가 있는데 그 중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18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18가지 물질을 거듭 관찰하다 보면 차차 익숙해집니다. 볼 때마다 봄, 봄, 봄을 관찰하면 보는 형상을 잡을 수 있는 눈의 감성물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어느 때는 마음이 형상으로 가고 어느 때는 마음이 눈의 감성물질로 가고, 또 어느 때는 안식으로 마음이 갑니다. 그러므로 관찰한다는 것도 한 가지가 아니라 그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일 수 있는데 수행할 때마다 그때그때 다릅니다. 어쨌든 보는 것을 관찰하면 틀림없이 눈의 감성물질·형상·안식 그 세 가지를 관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들음을 관찰하면 귀의 감성물질·소리·이식, 냄새를 관찰하면 코의 감성물질·냄새·비식, 맛을 관찰하면 맛과 혀의 감성물질·설식, 몸을 관찰하면 몸의 감촉·몸의 감성물질·신식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사람들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그들을 차차 구별할 수 있게 되듯이 18가지 물질과 45가지 마음, 그리고 마음부수 52가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탐·진·치·자만·질투·시기 등 안 좋은 것, 무탐·무진·무치·신심·노력·지혜·사띠·연민·자애 등 좋은 것들이 다 마음부수입니다. 그런 마음부수들도 그때그때 수행 중에 보게 됩니다. 기쁠 때 기쁨을 보면 희열이 있고, 급한 마음을 보면서 어떻게 되고 싶다는 열의도 보게 되고, 이렇게 하나하나를 반복해서 보면 마음부수 52가지를 계속 보게 됩니다. 그 마음부수의 명칭은 모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이나 마음부수를 못 보는 것은 아닙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를 깨달았다면 누구나 이렇게 물질 정신을 구별해서 아는 지혜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런 과정 없이 깨달은 사람은 없습니다. 물질 정신을 확실히 다르게 아는 상태, 그런 과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수행 중의 그런 상태를 수행자마다 다르게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앉아 있는데 또 다른 제가 있어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물질과 정신을 나누어서 보고 있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몸이 나다.’라는 생각이 이미 굳어져 있고, 또 ‘무언가를 아는 것이 나다. 내가 안다.’라는 생각이 이미 습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정신 쪽과 대상인 물질을 각각의 사람, 즉 두 사람 이미지로 떠올리면서 한 사람인 내가 다른 한 사람인 나를 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만 사실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보는 지혜가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물질과 정신은 다른 것이어서 그 둘이 섞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지로 보는 습이 있어서 뭐든지 이미지로 봅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 스님이 북치는 것을 어딘가에서 봤다면 이 모습이 기억에 남게 되어 스님의 이미지와 북소리를 함께 머릿속에 저장해 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그 북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면 스님과 북치는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는 것입니다. 즉 소리만 들어도 이미지를 같이 떠올리게 되는 것이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직접 가보니 머릿속에 있던 스님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북을 치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습과 사실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가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고 하지만 ‘몸은 이런 거고 마음은 이렇다.’라고 이미 갖고 있는 상이 있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이 생각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신 쪽도 나라는 한 몸을 가지고, 물질 쪽도 나라는 한 몸을 가지면서 부풂 꺼짐이 일어나고 있는 몸이 하나이고,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쪽도 또 다른 하나로 두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경우가 거의 물질 정신이 분리되는 느낌을 받을 때 하는 말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직접 실천하여 체험한 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는 서로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를 보며 부풂 꺼짐을 관찰할 때 “벽에 진흙 반죽을 바르는 것처럼, 아주 말랑말랑한 뭔가를 하나씩하나씩 던져서 벽에 딱딱 붙이는 느낌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던졌다’는 것이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진흙이 던져지는 것처럼 이미지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가서 붙는 자리, 벽 같은 자리는 물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풂 꺼짐 관찰이 되게 어려웠는데 지금은 물건이 벽에 가서 딱딱 붙는 것처럼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호흡을 관찰하면서 물질과 정신을 각각으로 인식하는 지혜 과정은 똑같은데 사람마다 표현은 다양합니다. 수행 중의 체험을 말로 옮길 때 아주 완벽하게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경전이라는 것이 부처님께서 수행을 실천하면서 체험한 것을 확실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만 수행 과정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나름대로 말합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많은 스님이 자기들의 체험을 자기 나름대로 써서 많은 책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대로 깨달은 사람, 아라한이라면 모르겠지만 진실로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느 정도 아는 것을 가지고 계속 책을 쓰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오염시켰습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좋았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가능한 한 부처님의 경전을 바탕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거나 책을 쓸 때에도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경전의 어느 부분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를 반드시 따져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경전의 바탕이 없이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개개인의 체험이라는 것은 아주 미묘합니다. 그런 것들을 각자 자기 마음대로 말해 버리면 오해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은 단순한 것”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2
“한 가지 문제를 풀면 나머지는 저절로…그래서 수행은 만병통치”

2015-05-07 (목) 18:29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물질과 정신을 확실하게 구분해서 아는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면 심리에 변화가 옵니다. 수행의 모든 단계에 그런 변화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제대로 한 수행이 아닙니다. 바르게 하는 수행이라면 수행의 지혜 계발만큼 그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매 순간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계속 관찰해 보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확신이 생깁니다. 자신의 분명한 체험이 있기 때문에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진짜 이 물질과 정신 두 가지밖에 없구나.” 하고 말로 표현할 수도 있고, 그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해도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속에서 확실해집니다. 소금을 먹어보고 짠 것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짜다고 말 안 해도 짠 것은 짠 것입니다. 물질과 정신 두 가지만 있다고 마음속에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말로 하건 안 하건 그 사실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 확신이 자기 안에 신심을 일으킵니다.

 

그렇다면 수행자에게 심리 변화가 어떻게 오는가. 먼저 우월감과 열등감이 많이 떨어져 나갑니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보는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즉 모든 것을 항상 비교합니다. 사람끼리 만나면 그 사람이 나보다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아니면 수준이 비슷한 사람인지 항상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나보다 잘 아는 것 같고 잘하는 것 같고 뭘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그러면 자기 마음이 조금 숙여집니다. 이것이열등감입니다. 반면에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한 것 같다면 그 사람한테 내가 뻐기는 마음, 무시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우월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 마음이 있는 한 항상 괴로운데 그런 마음은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히 사라집니다. 아나함까지도 자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자만이라는 번뇌 하나로도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체험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하면서 겪는 갈등과 고통은 가족 간에도 있습니다. 형제남매 간에도 있고, 친구끼리도 있고, 수행자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보는 지혜’가 확실해지면 비교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져 남을 높게 보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만나나 거지를 만나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똑같습니다. 나도 물질 정신, 너도 물질 정신, 거지도 물질 정신, 왕도 물질 정신, 개도 물질 정신……. 그래서 아주 동등한 느낌이 듭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높게 보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편해져서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것도 편하고, 가리는 것도 별로 없어지고, 하나가 되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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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명확

 

지혜가 계발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심리에 변화가 옵니다. 그만큼 사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지나치게 예민하고, 마음이 편협하고, 항상 내 마음대로 생각해서 따져보고 비교하고, 겉으로는 티 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가슴 아파하고, 다른 사람이 눈치 못 채기를 바라면서 끙끙 앓는 이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각자의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동안에 남모르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물질 정신밖에 없다는 것만 마음속에 꽉 차 있으면 얼마나 세상이 편해지는지요. 비록 깨달은 성인은 아닐지라도 그런 사람은 그만큼 인간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가 항상 있지는 않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예전의 그 불편했던 마음들이 다시 슬그머니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아, 그때 내가 수행하고 있을 때 내 마음이 편했었는데 지금은 불편하네. 다시 수행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신심이 생깁니다. ‘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안 하니까 되지 않는구나.’하고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승에 대한 신심이 생깁니다. ‘아, 부처님과 아라한은 이렇게 평온한 마음, 청정한 마음을 항상 갖고 계셨구나.’ 그렇게 이해하고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생기고 승가, 깨달은 자에 대해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끔씩은 ‘내가 지금 수행한다면서 만날 뭐하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깨면 깬다, 걸어가면 걸어간다, 먹으면 먹는다……,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만병통치약이라는 지혜를 키우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계발되고 심리가 변화하면서 인간이 성장하면 한 문제만 풀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지혜의 범위는 엄청나게 넓습니다. 그래서 그 변화의 범위도 상상할 수 없을 만치 크고 깊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한 가지 문제를 풀기 위해 수행처에 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보면 그것만이 아니고 다른 모든 문제까지 풀리게 됩니다. 회사의 동료들이나 친구들, 부모자식 간의 문제가 사실 뿌리는 하나입니다. 번뇌이지요. 그 번뇌만 해결되면 다 해결되는 겁니다. 그러니 수행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특별히 다른 데에 신경 쓸 필요 없고, 내가 해야 하는 일 즉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는 대로 관찰만 확실하게 하고 있으면 거기에서 생기는 힘의 정도에 따라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가 힘을 하나 정도 키울 수 있으면 그에 딱 맞는 만큼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백의 힘을 모을 수 있으면 그 백에 맞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마음이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하나가 변하는 것이고, 내 마음이 변하니까 모든 것이 변하는 것처럼, 이 세상 자체가 다 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나 하나조차도 내 뜻대로 안 되는데 세상을 바꾼다는 게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남을 변화시키려고, 세상을 바꾸려고 할 게 아니라 일단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 것처럼 보이고, 내가 변하면 남을 변화시킬 수도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은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서 남이 변화되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문제를 만들고 고통을 불러옵니다. 그런 바보짓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괴로울 수밖에 없고, 당연히 괴로움을 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그런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지혜가 계발되면 심리가 변화되고, 그러면 인간이 성장됩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때 생기는 문제는 내가 한 단계 수준을 높였을 때라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싸울 때는 끼리끼리, 비슷한 수준일 때 싸우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 수준이 높아지면 나머지 사람들은 높아진 사람 밑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않고, 그러면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 나를 많이 괴롭혔던 문제도 내 마음이 커지면 그 내용이 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예전과 똑같은 내용, 똑같은 사람, 똑같은 상황인데도 내 마음이 변화되고 성장하면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수행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도 그렇게 달라지는데 성인, 깨달은 분들은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런 경우를 연꽃에 흔히 비유합니다. 진흙탕 속에 살면서도 진흙을 묻히지 않고 피어나는 연꽃을 보십시오. 깨달으신 분들, 부처님과 아라한이 그런 분들입니다. 아주 더러운 세상에 살고 계셨으면서도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수행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은 단순한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내가 해야 하는 일만 확실하게 하면 이것이 나의 지혜를 계발하고, 내 심리 변화를 가져오고, 나를 더 성장시킵니다. 자기 내면은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내가 봐도 내 마음은 어린 아이 같고 깨끗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변화시키고 싶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헤맵니다. 그 어린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수행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기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수행에 임해야 사띠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사띠를 잘 챙기지 않으면 수행을 계속 이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쓰레기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리지만 루비나 다이아몬드는 잘 챙깁니다.

 

수행 중에 자신이 계속 사띠를 놓치고 있다면 ‘아, 사띠를 내가 자꾸 잃어버리는 것이 내가 사띠를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구나.’ 하고 알아야합니다. 사띠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서는 수행에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수행 중에 사띠가 일어나면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그것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들숨을 지금 알고 있을 때 아주 기뻐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주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사띠도 이와 같이 아주 주의 깊게, 소중하게, 조심스럽게 챙기고 있으면 쉽게 날아가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면서 관찰하고 있으면 지혜가 계발되어 갑니다.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만 챙기면…"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3
“인과 외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어”

2015-05-18 (월) 13:36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이 물질과 정신을 아는 지혜가 계속 지속되면 그 다음 단계에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물질과 정신 두 가지만 구별해서 알아차립니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깊이 집중하여 관찰하다 보면 뭔가를 알기 전에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걷고 있으면서 그 걸음걸음을 관찰해 보면 걷기 전에 걷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새소리가 들려오면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이 거의 동시에 생겨납니다. 그 소리를 들으려는 마음이 기다리고 있다가 소리가 다가오면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날 때 바로 듣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소리 때문에 듣는 마음이 생기는구나.’ 이렇게 압니다.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조금 불편해집니다. 그러면 몸을 살짝 움직여 자세를 바꿉니다. 불편하기 때문에 움직이고 싶고, 움직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어딘가가 가려우면, 그 가려움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싫은 마음 때문에 가려운 것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러면 손이 움직이면서 가려운 곳을 긁습니다.

 

그렇게 어떤 결과가 있으면 그 앞에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뭔가가 앞섭니다. 단독적으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이것이 있고, 저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생겨납니다. 걸어갈 때도 걸으려고 하는 의도 다음에 걷게 됩니다. 눈 깜박 하는 것조차도 깜박 하려고 했다가 깜박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과정 하나하나를 다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계속 관찰해 나가다 보면 깜박거리고 싶은 마음, 깜박 하려고 하는 마음, 눈을 깜박 하는 움직임을 세밀히 다 알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이렇게 원인을 챙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경행할 때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벽 쪽으로 다 가서 끝에 도달하면 서야겠다는 마음이 먼저 일어나고, 벽에 부딪히기 전에 걸음을 멈춥니다. 서 있는데 돌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돌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계속 서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돌고 싶다, 걷고 싶다 하는 마음이 생기면 몸이 삭 돌아섭니다. ‘아, 가려고 하니까 가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물질에 시키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선명해집니다. 원인을 챙긴다는 게 그런 의미입니다.

 

‘이래서 이렇구나, 저래서 저렇구나.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는 거구나…….’ 이것이 인과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단순한 것을 알지만 다음에는 복잡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 그거야 당연한 거지. 아무것도 아니네. 그렇게 어렵지 않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일어나고 싶은 마음 따라 일어나는 것, 걷고 싶은 마음 따라 걷는 것, 목이 좀 불편했다가 침을 삼키는 것…….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다 보면 흔히 대단하다고 여기는 12연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12연기를 이해하는 지혜로 업과 과보를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과정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이 처음에는 억울하다고 생각되던 것도 그 원인을 알게 되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업과 과보, 12연기가 바로 이 ‘원인과 결과를 보는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심들이 많이 사라집니다. 정말로 선업 불선업이 있을까, 선업의 과보 불선업의 과보가 있을까, 전생이나 다음 생이 있을까……, 이런 의심이 다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의 첫째 지혜가 생기면 사견이 많이 사라지고, 두 번째 지혜만 있어도 의심이 많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 두 번째 지혜가 있으면 작은 수다원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수행 도중에 원인 결과를 아는 지혜가 있을 때는 사견과 의심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물질과 정신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질과 정신만 있을 뿐임을 깨닫게 되면 너·나·남자·여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등 일체 상이 다 착각임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 정신 두 가지만 있을 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깨달음 때문에 사견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위빳사나의 아주 기본적인 지혜만 있어도 사견이 많이 사라집니다.

 

단지 들숨 날숨과 그 들숨 날숨을 아는 마음에 온전하게 집중할 때 ‘나’라는 것을 잊게 되고,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이런 생각도 모두 사라져버립니다. 거리에 가면 좋은 집들이 많고 좋은 차들도 많습니다. 그런 것에 ‘이건 내 차, 이건 내 집…….’이라고 말해 보세요.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사람 정신이 나갔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짓이 바로 그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물질과 정신을 보면서 ‘이게 나이다, 내 몸이다, 내 마음이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은 직접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고『금강경』을 평생 읽어 보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읽어도 아상은 절대로 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정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는 지혜가 있는 순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곧바로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노력이 줄어들어 사띠가 약해지면 사마디가 약해지고, 그러면 지혜도 약해집니다. 그러면 바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아, 내가 지금 앉아 있다. 몇 시 됐나? 15분 지났구나.’ 이렇게 됩니다. 관찰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상이 사라진 그 상태를 얼마나 유지시킬 수 있는가가 여러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의 유무를 말해 줍니다. 그 상태에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이렇게 되면 위빳사나의 두 번째 지혜가 일어납니다. ‘빳짜야 빠릭가하 냐나’ 즉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래서 이렇구나. 저래서 저렇구나. 이것 때문에 이렇구나.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구나.’ 이렇게 되는 마음이 생기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 인과 외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견이 사라지고 의심도 사라지고 또 창조자에 대한 생각이 다 없어집니다. 창조자가 있나 없나 하는 의심이 사라지고, 오직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깊은 신심이 일어납니다. 이 두 가지 지혜는 아주 기초적인 것이어서 위빳사나의 기본에 해당됩니다. 학교로 치면 아직까지 유치원, 어린이집이에요. 그런데 이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지, 그 지혜를 가지고 죽으면 그 사람은 두 번째 생까지는 사악처로 안 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쭐라소따빤나’, 작은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깨버리면서 가는 마음을 내가 어느 정도 유지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지혜 계발, 심리 변화, 인간 성장의 길이 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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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명확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며 팔정도수행을 합니다. 중단 없이 계속 노력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신심입니다. 신심이 생기려면 불·법·승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즉 신심을 위해서 지식이나 지혜, 이해나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법문을 많이 들어야 되고, 경전 공부를 많이 해야 되고, 직접 수행하여 체험도 많이 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신심이 있으면 노력이 좋아집니다. 바른 노력이 좋아지면, 바른 사띠, 대상을 놓치지 않고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 대상에 붙으면서 집중이 됩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가 수행자들이 해야 하는 일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가 있으면 그 다음 것들은 저절로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집중과 지혜입니다. 노력과 사띠에 신경을 써야 되는데 집중과 지혜에만 신경이 쏠리니 계속 생각 속에 빠지게 됩니다. ‘아, 그날은 정말 집중이 잘 되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지? 그 집중이 어떻게 해야 다시 생길 수 있을까?’ 이렇게 계속 머리로 생각을 굴립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 노력과 사띠인데 그것은 하지 않고 계속 머리만 굴리니 집중이 될 리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수행자가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만 챙기면 바른 집중이 되게끔 되어 있고, 집중이 되면 지혜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집중이 되어 꿰뚫어 보는 것만 되면 물질과 정신을 꿰뚫어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항상 노력과 사띠에 관심을 두고 그것에만 힘을 쏟으십시오. 자신이 지금 올바른 노력을 하고 있는지, 그 노력이 약한지 강한지, 어떤 마음 상태로 수행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피면서 치우치지 않는 적당한 노력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이런 식으로 아침에 깰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아주 적당한 양의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그 노력의 힘으로 대상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놓치지 않고 기억하게 됩니다. 기억하기만 하면 대상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대상을 놓치지 않으면 집중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집중 뒤를 따릅니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이것저것 관찰했다가 다음에 힘이 좀 붙으면 대상이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강제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그것이 다른 데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위빳사나는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즉 이 대상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합니다. 숨을 들이쉴 때 들숨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어떤 대상을 관심 있게 보고 있으면 마음이 쉽게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않습니다. 그때 마음이 대상에서 달아나지 않도록 통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관심 있게, 주의 깊게, 조심스럽게, 잊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그냥 지켜보는 것, 그렇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마타도 관심 있게 보면 좋은데 관심 있게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른 데로 나가려고 하면 무조건 막는 것이 사마타입니다. 대상을 놓치면 무조건 제자리로 다시 끌고 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마타는 독재형이고 위빳사나는 민주형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위빳사나의 경우 대상에 관심을 두면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데 마음이 딴 데로 나가면 그것을 통제하지 않고 함께 따라 나가 줍니다. 호흡을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딴 데로 가고 있습니다. 호흡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무조건 호흡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딴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관찰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그 자체를 봅니다. 초보자일 경우 ‘생각, 생각…….’ 하고 있으면 조금 있다가 그 생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호흡을 보면 됩니다. 그런데 조금 수행의 기술이 익으면 생각을 아는 순간 생각이 멈춥니다. 멈춘다고 끝났다, 하고 바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그 멈춘 자리에서 가만히 있습니다. 그 곳이 마음의 자리, 마음의 토대입니다. 그것은 물질입니다. 그 물질을 아는 것이 신·수·심·법 중 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음 토대,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하는 것을 아는 순간 생각이 없어지면서 순간적으로 텅 비어 있는 자리 같은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마음을 가만히 대어 놓고 있으면 마음 토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쉽지는 않고 초보자는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수행을 얼마만큼 하여 집중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한 마음을 보고 있는데 그 마음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면 사라져 없는 그 자리에 관찰하는 마음을 놓고 가만히 있어 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어떤 생각이 하나 일어납니다. 그것을 아는 순간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어떤 구멍에서 머리가 쏙 나왔다가 도로 쏙 들어가는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토대를 느끼는 방법입니다. 생각 하나 나올 때 딱 보면 없어지고, 또 보면 없어지고……. 그렇게 되고 있으면 신·수·심·법 중에 심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는 수행은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마음을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초보자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하네.’ 하고 알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수행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때 수행의 기술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어, 생각하네.’ 하고 아는 순간 생각이 사라진 그 자리에 마음을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정신 즉 마음이나 마음부수를 관찰할 때와 물질을 관찰할 때가 조금 다릅니다. 물질은 확실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찰이 쉽습니다. 분명한 물질적 대상에 대한 느낌 역시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마음과 마음부수를 관찰할 때는 항상 ‘내가 관찰하고 있는 건가? 관찰 대상을 놓친 게 아닌가?’ 이렇게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헷갈리는 그 마음을 봐야 합니다. 다른 생각은 없고 그 의심하는 마음, 헷갈리는 마음이 가만히 있으면 그 헷갈리는 마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생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내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뭔가를 생각하고 있으면 이미 사띠가 사라진 것입니다. 사띠가 있으면 생각이 없습니다. 꿰뚫어보는 지혜가 있으면 생각이 없고, 생각이 있으면 꿰뚫어 보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보고 있는데 마음이 없어졌고 생각하는 마음도 멈춰 버렸습니다. 멈춰 버린 자리를 오로지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볼 때 ‘내가 호흡을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배를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 내가 관찰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고 있다면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 자체가 또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다시 조용해집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아, 이것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 그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을 다시 봅니다. 그럼 또 다시 조용해집니다. 그 자리가 바로 마음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볼 줄 알면 마음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생각이 있으면 꿰뚫어 보는 것이 없는 것이고, 꿰뚫어 보고 있으면 생각이 없는 것인데, 생각은 머리로 하고 수행은 마음으로 합니다. 그래서 hand education, head education, heart education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hand education은 솜씨, 스킬, 기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head education은 머리 교육입니다.

 

 

 

“수행은 머리 아닌 가슴으로”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4
“마음이 커질수록 행복해지고, 마음이 작고 약할수록 괴로운 법”

2015-06-03 (수) 10:37

빤딧짜스님 | ashinpandicca@han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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