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사상학 입문(唯識思想學 入門)
5.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耶識)과 삼상(三相)
위에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 7식(七識)을 살펴보았다.
이 일곱 가지 식(識)은 우리 인간의 정신활동에 온갖 심부름을 다 하는 심식이다.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며,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등 전오식(前五識)은 오근(五根)을 통하여 부지런히 출입하면서 객관계를 접촉하고 또 선과 악을 대하며, 고와 낙을 맛보며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전오식만으로는 결정적인 판단과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의식이 가담하여 선악과 고락을 구별해 준다. 그리고 내면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사를 생각하고 추리하며 예측하고 판단하며 온갖 인간의 행동을 주관하는 것이 의식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선악의 행동을 하고자 결정을 내릴 때 우리 인간의 움직임은 시작되고 또 결말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정화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다음 말나식은 본래 인간이 천부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불성과 진여성인 본성에 대한 착각을 야기하며 무지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형성하는 최초의 정신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타의 심식도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되며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선성과 악성으로 갈라지는 분별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을 유루심(有漏心)이라 하며 유루심이 잠재하고 있는 한 선업과 악업을 조성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심식에는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心所)가 있으며 심소는 51종(五十一心所)이나 있어 인간정신의 활동은 다 여기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성질을 가진 전칠식(前七識)과 식에서 발생되는 심소의 활동은 모두 업력이 되는 것인데, 그 업력은 과연 어디에 보존되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무엇에 의하여 유지되며 수명도 무엇에 의하여 좌우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자들이 추구하고 탐구함에 의하여 비로소 아라야식(alayavijnana)이라는 정신체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아라야식이 앞에서 말한 정신(七識)과 육체(五根)을 유지시켜 주고 또 이들 정신과 육체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도 보존하여 다음의 결과를 받도록 해 주는 주체가 된다.
이 아라야식은 인도의 무착보살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다.
이미 보존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체를 부처님은 이미 가르쳐 주셨지만 범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고 무착보살이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제 무착보살을 비롯한 여타의 선각자들이 저술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
등 여러 유식학 계통의 논서들에 의하여 아라야식의 내용을 하나하나 해설하기로 한다.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여러 번역자에 따라 아라야(阿梨耶. 阿蔾耶), 아라야(我羅耶) 등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 그 뜻은 번역자들에 의하여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중국의 현장법사(玄奘法師 600~664)가 번역한 것으로 이른바 신역(新譯)이다.
그러나 그 밖의 칭명은 대부분 현장법사 이전에 번역한 구역(舊譯)에 속한다.
그 뜻은 종파(宗派)에 따라 많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지론종(地論宗) 계통에서는 아라야식을 청정식(淸淨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상종(法相宗)과 섭론종(攝論宗) 계통에서는 망식(妄識)으로 보았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데 대체로 법상종의 의견을 따라 설명해 온 것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느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식학 이해에 도움이 되고 또 우리의 현실에 맞는 이론이라면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삼상(三相)
아라야식을 설명하고자 할 때 먼저 그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첫째는 자상(自相),
둘째는 과상(果相),
셋째는 인상(因相)이다.
이들을 합쳐 아라야식의 삼상(三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세 가지 모습이라는 말로서 이들 삼대 모습(三大相)을 잘 이해하면 아라야식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심상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자상(自相)은 아라야식의 자성(自性)을 말하며 다른 말로는 아라야식의 성능(性能)을 뜻한다. 이 자상은 여타의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을 제외하고 따로 내용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삼상(三相)의 뜻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상은
아라야식의 자체에 대한 자성(自性)과 성능(性能)을 말하며,
과상은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결과와 모습을 뜻한다.
인상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만물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내용을 말한다.
이제 이들 삼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자상(自相)
아라야식의 자상은 이 식의 총체(總體)를 의미한다.
유식론에 의하면 자상은 총체이고 과상과 인상은 별체(別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자상은 중생들의 선업과 악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의 뜻도 가지고 있고, 또 중생들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업인(業因)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의 뜻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아라야식 자상은 과상과 인상의 내용을 가지고 자체(自體)를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상과 인상을 떠나서 따로 자상을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아라야식의 자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alaya)는 본래 인도말인 범어(梵語)로서 장(藏)이라고 한역(漢譯)하였다.
장(藏)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업력들을 감싼다는 뜻에서 포장(包藏)이라는 뜻도 있고,
또 업력들을 포함시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에서 함장(含藏)이라는 뜻도 있으며,
그리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섭지(攝持)라
하며 동시에 무엇이나 잘 포섭한다는 뜻에서 포섭(包攝)이라는 뜻도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에는 다양한 뜻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정신의 체성이라는 뜻을 부가하여 아라야식(alaya-vijnana)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아라야식의 자체를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분류한 것은 앞에서 설명해 온 7식(七識)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과의 관계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다.
이들 삼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① 능장(能藏)
능장이라 함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능히 포섭하여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업력이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등 7식이 선행과 악행 그리고 선행도 아니고 악행도 아닌 그 중간의 무기행(無記行) 등 온갖 행동을 곧 업(業)이라 한다.
그리고 이 업에는 반드시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이 있다는 뜻에서 힘력(力)자를 부가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이 업력은 또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종자(씨앗)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뜻을 따서 호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업력을 종자라고 별명을 붙여 부를 때가 많은데 특히 아라야식과 관계되는 업력들을 종자라고 보통 부른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전7식이 행동하여 조성한 업력,
즉 종자를 능히 포장하여 보존한다는 뜻에서 능장(能藏)이라 한다.
이러한 능장의 뜻은 중생들이 행동으로 조성하는 모든 업력을 하나도 밖으로 유실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이는 자업자득의 법칙에 의하여 자기가 지은 업력에 대하여 자신이 받도록 해 주는 정신적인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전7식이 조성한 종자와의 관계에서 능장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모든 종자는 소장(所藏)의 입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능동적으로 종자를 포섭하여 유지시키는 입장이 되고 또 이때의 종자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아라야식에 의하여 포섭되어지고 포장되어지는 입장이 되므로 이를 소장(所藏)이라 한다.
여기에 능장과 소장의 상대적인 뜻이 있다.
② 소장(所藏)
소장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는 달리 아라야식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종자를 포섭함을 뜻한다.
그리고 반대로 전7식이 조성한 선악업(善惡業)의 종자는 오히려 능동적인 입장에서 아라야식에 보존되고자 해서 포섭되므로 이들 종자를 능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칠식의 모든 정신과 육체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라야식에 들어가서 스스로 보존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큰 창고가 화물이 들어와 쌓아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듯이 종자를 맞이하므로 이때의 아라야식을 소장(所藏)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능장과 소장은 서로 불가분리한 이치에 의하여 이름한 것이다.
③ 집장(執藏)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것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에서 말나식을 설명할 때, 말나식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망각하고 아라야식의 견분(見分) 등 아라야식을 집착하는 번뇌를 항상 야기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아라야식은 항상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며, 또 집착을 당하는 입장의 뜻을 집장(執藏)이라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집장은 그 행위에 입각해서 능집(能執) 또는 소집(所執)이라고 하는데 능집은 말나식이 능히 아라야식을 집착함을 말하고 소집은 반대로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진 뜻을 따서 명칭을 정했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수동적으로 소집의 입장에 있는 집장(執藏)의 뜻이 있다.
이 집장의 뜻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 소장의 뜻도 중요하지만 아라야식이 윤회의 주체로서 범부심(凡夫心)이라는 대명사를 붙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뜻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집장의 뜻이 아라야식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의 뜻도 범부의 성질과 인과의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집장의 뜻을 제거하는데 많은 수행과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인 능장, 소장, 집장의 뜻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을 망식(妄識)으로써 윤회하도록 만드는데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말나식과의 관계로서 말나식이 집착함을 내지 않았다면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의 고해(苦海)에 윤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과 말나식과의 집장의(執藏義)는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왜 집착심을 야기하게 되었는가?
이는 매우 부사의한 경지이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어떤 물건을 내놓듯이 보여 줄 수는 없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대 학자들은 이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또 그 실상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한 비유를 여기에 소개하여 집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본래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지니고 있었다.
아공이란 본래의 자아는 아집의 번뇌가 없는 공한 진리의 위에 정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공한 진리는 곧 진리의 실성(實性)을 뜻하며 그 진리의 실성은 아무런 집착될 여지가 없는 중도적 존재이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 하면서도 항상 있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실성은 항상 무아(無我)의 진리이며 나라고 집착(我執)할 수 없는 공(空)한 이치가 곧 아공의 진리이다.
안에서도 공(內空)하고 밖에서도 공(外空)하며 안과 밖이 동시에 공(內外空)란 진리를 항상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라야식의 실성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공한 진리에 의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부사의한 신통력을 항상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원경지의 진리를 착각하여 고정된 자아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말나식의 아집이다.
다음 아공과 더불어 아라야식의 자체의 법체도 공한 것이다. 아라야식의 자체는 여러 가지 인연의 화합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한 이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삼라만상도 공한 진리 위에 개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법공(法空)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등의 집착할 까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아집과 더불어 인연의 취집(因緣聚集)의 법을 망각하여 집착(法執)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이 공한 이치를 설명하고 증명해 주기 위하여 사물의 바탕은 일미진(一微塵)이라는 비유를 많이 든다.
즉 미진은 무형(無形)의 존재이면서 유형(有形)의 사물을 형성하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미진은 극소의 존재이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개체로 형성되기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진이 하나하나가 인연이 되어 모이면 크고 작은 유형의 사물로 나타나게 된다.
또 그 사물이 인연이 다 되어 없어지면 다시 미진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미진과 사물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미진을 떠난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며 무와 유가 공존한 것이 현재의 사물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중생들은 그 본질을 망각하고 형상이 있는 겉 모습만을 보고 마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사량하고 분별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물은 모든 분별과 이원(二元)적인 것을 떠나 초월적인 존재지만 내심(內心)의 망념(妄念)이 싹터 그 실성의 진리를 망각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겉모습만을 보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큰 거울 속의 광명에 황홀하고 또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착각하여 자기 모습의 그림자가 진실한 자기인 줄로 알고 그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본래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 광명을 갖고 우주의 진리가 그 경지(鏡智)에 비치도록 하는 실성(實性)을 지니고 있었는데,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본성인 말나식이 대원경지에 비친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그 황홀경에 착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야기하여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망각함은 물론 아집과 법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집을 없애려면 자아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찰하여 대원경지를 나타내는 실성, 즉 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또 법집을 없애려면 모든 내외의 법체에 대한 실성을 관찰하여야 하며 사물을 관찰할 때도 일미진(一微塵)의 본성까지 관찰하여야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있고 또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본성은 어떠한 그림자나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보는 습성이 있으며 그러한 관찰은 말나식이 아라야식의 본성을 망각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어지고 집착되어지는 것 등의 집장의(執藏義)가 생기게 되었다.
즉 능히 집착하는 능집자(能執者)와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는 소집자(所執者) 등 상대적인 세계가 전개된 것이다. 이와 같이 능분별자(能分別者)와 소분별자(所分別者) 그리고 능집자와 소집자의 관계는 말나식과 아라야식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심성의 근본이 되는 내면세계에서 극히 미량이나마 능소의 분별심이 시작되니까 지말식(枝末識)인 제6의식을 비롯한 육식(六識)에는 추동(麤動)의 파도처럼 분별심이 야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게 되며 결국 끝없는 무명(無明)과 전도심(顚倒心) 위에 꿈속의 생활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무명이 근본이 되어 온갖 번뇌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번뇌들은 진리를 잘못 인식하고 판단하는 거짓 마음의 현상들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로운 마음의 인식을 실체없는 몽식(夢識)의 작용에 많이 비유한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 활동하는 의식은 꿈속의 사물과 현상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고 또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꿈속들의 사물들은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환상이 없어지게 되어 꿈속의 환상에 지나지 않고 또 그것은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객관계의 사물을 보는 것과 마음 속의 정신계를 관찰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는 것도 다 몽중의식(夢中意識)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그 실성을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유식사상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고 올바른 진리관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내세운다. 즉 오직 일심(一心)뿐이며 일심 외에는 어떠한 경계(境界)나 상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모든 것은 마음속의 존재라는 인식과 하나의 경지에서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 곧 유식관(唯識觀)이며 여기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전개된다.
또한 여기에 유가사상(瑜伽思想)이 도입된다.
유가(yoga)는 인도의 선정을 뜻하는데 이러한 유가의 선정으로 망심을 정화하고 집착을 제거하며 여러 갈래로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으로 통일될 때 말나식과 같은 집착심이 없어지고 또 집착된 아라야식의 집장의 뜻도 없어지는 경지가 나타나게 된다. 아무튼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실체가 없는 헛것이며 고정된 경계가 없는 바와 같이 번뇌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임시이며 영원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말나식의 망심은 견고하여 쉽게 정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으로 인하여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게 되었는데, 그 집장의 탈을 해탈하려면 어느 시기에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에 집장의 뜻이 있는 기간과 없는 경지 등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이고,
둘째는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이며,
셋째는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분류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집착(執藏)하여 실체의 나라고 애착하는(我愛), 번뇌가 지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는 동안을 뜻한다.
술기(述記)에 의하면 집장의 뜻은 곧 번뇌장(煩惱障)의 뜻으로서 항상 아집을 나타내는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하였다. 아라야식에 이러한 아애(我愛)와 집장(執藏)의 번뇌가 활동하는 현행(現行)의 뜻이 있는 기간은 항상 이기주의적 중생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마음과 육체적 행위는 선과 악으로 분명히 나타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에 의한 선업과 악업이 분명히 조성되며 선업과 악업은 또 분명히 산과와 악과를 초래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리하여 선악의 세계에 윤회하게 되고 또 때로는 선과를 받고 악과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이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아애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보통 범부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등은 물론 초지보살인 극희지보살(極喜地菩薩)로부터 제7지 원행지보살(第七地遠行地菩薩)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말나식에 의한 아애와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아주 추악한 범부로부터 이미 성위(聖位)에 오른 제7지보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기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상(我執相)의 내용도 대소의 차이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초지보살 이전의 범부중생들에게는 말나식의 아집이 강하여 아라야식의 집장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초지보살 이상 제7지 보살까지는 말나식의 아집상이 미세하며 극소의 작용만을 야기하다가 결국 보살의 수행력으로 말미암아 제7지 보살 이상은 결국 말나식의 아집이 단절되게 되며 동시에 제8아라야식에게도 집장의(執藏)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 경지에 오른 성인들의 제8식을 아라야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이라는 명사는 아애집장현행위의 기간인 제7원행지보살수행위까지만을 사용하고 그 이상의 성위(聖位)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②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위에서 제8식(第八識)에게 아라야(阿賴耶)라는 명칭이 사용하게 되는 기간을 제7지 보살까지만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제8지인 부동지보살(不動地菩薩)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法雲地菩薩)에 이르기까지의 제8식에는 순수한 무루심(無漏心)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말나식의 아집 현상은 없어도 선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 생멸심은 아직도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범부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까지의 제8식을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제8지 보살 이상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의 보살들은 추악한 업력으로 악도에 윤회하고 있는 범부중생들에 비하면 벌써 윤회는 해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악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선업에 의하여 선과를 받는 인과응보의 업과(業果)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업에 의한 과보를 박게 되느냐’라고 할 때 다름아닌 제8식이 주체가 되어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은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제8식이 선과 악의 업력에 의해서 다른 과보를 받는다는 이숙(異熟)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숙이라는 말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뜻으로서 제8식이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으므로 거기에는 이숙이라는 뜻이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제8식이 중심이 되어 범부들은 물론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 비록 무루업(無漏業)이라 할지라도 그 업력에 의하여 업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과보를 받으므로 선악업과위하고 한다.
③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
이는 제8식이 유루세계(有漏世界)인 범부로부터 완전한 무루세계(無漏世界)인 불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집지(執持)하며 불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범부들이 조성한 선업과 악업도 능히 포장하여 유지시켜주고 또 보살들의 선업과 청정무구한 무루업(無漏業)도 추호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해 주며 동시에 모든 번뇌를 해탈한 부처님의 무루업까지도, 계속 단절되지 않게 보존하여 주는 심식이 제8식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을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부른다.
아다나(Adana)라는 말은 모든 정신계와 또 육체까지도 잘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집지(執持)라고 번역한다. 그러므로 아다나식은 위에서 말한 아애집장현행위와 선악업과위 등의 뜻보다 넓은 뜻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제8식에는 그 내용에 따라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이숙식(異熟識) 그리고 아다나식(阿陀那識) 등 여러 별명들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광범위한 작용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 아라야식(阿賴耶識)의 과상(果相)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을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들 삼장 가운데 집장이, 아라야식이 망식(妄識)으로 있는 한 아라야식의 뜻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라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번역하듯이 전7식의 행위를 비롯하여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능장과 소장의 뜻도 집장의 뜻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상(果相)의 내용도 모든 업력을 보존하는 능장의 뜻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상은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초래되는 과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보는 업력을 보존한 장식 내의 종자로부터 업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인과응보는 서로 부합하고 화합하여야 성립될 수 있다. 이는 업인을 보존하는 능장과 그 업인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果相)의 내용은 서로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인 과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살펴본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은 아라야식 자체에서 야기되는 내용인 것이고, 이제 고찰하고자 하는 과상은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중생의 과보를 받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대한 설명은 그 작용에 따라 별명을 붙여 다양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제8지 보살 이상의 성인들이 수행력에 의하여 말나식의 아집을 끊어버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상에 속하는 집장의(執藏義)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자상의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게 상속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과상(果相)은 아라야식의 업력에 의하여 받은 결과로서 한 세상만 살고 죽을 때에는 과상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과상은 자상보다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상을 유식학에서는 일취생(一趣生)의 과체(果體)라고 한다. 일취생이란 삼계육도 가운데 한 중생계에서 태어나서 그곳의 중생의 탈을 쓴 과보를 받고 살다가 사망할 때 까지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과상은 아라야식이 자체 내에 보존한 업력에 끌려 어느 세상에서 과보를 받고 사망할 때까지의 과체를 뜻한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아라야식(靈魂)이 과보를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때 아라야식의 삼상(三相) 중 과상(果相)을 필수적인 내용으로 설명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과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제8식은
선업종자(善業種子)와 악업종자(惡業種子)에 의하여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에 초생(招生)
하게 되며 이는
태(胎) 란(卵) 습(濕) 화(化)
등 사생(四生)의 총보(總報)로서 이를 이숙과(異熟果)라고 한다.
이는 과상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풀이해 보기로 한다.
제8아라야식은 그 성질이 본래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다.
무부(無覆)는 아라야식 자체에서는 번뇌가 없다는 말이다.
부(覆)는 번뇌라는 말과 그 뜻이 통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어둡게 덮어버리고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부장(覆藏)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 수동적인 소집장(所執藏)의 뜻만 있고 그 자체가 능히 번뇌를 야기하여 진여(眞如)를 집착하는 능집(能執)의 작용은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제6의식 등 육식이 악업을 조성한 종자를 능히 보존할지언정 아라야식 자체가 악업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뜻에서 아라야식을 무부성(無覆性)이라 한다.
그리고 무기성(無記性)이라는 말은
아라야식이 선성(善性)에 속하지도 않고,
악성(惡性)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선성에도 기록(記)되지 않고 또 악성에도 기록되지 않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무기성(無記性)이어야 선보와 악보를 받을 종자를 공정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식논사에 의하면 아라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 때문에 무기성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아라야식이 선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거나 악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이는 미래의 과보를 받을 주체로서 그 자격이 상실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이미 선성이라면
악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또 아라야식이 이미 악성이라면 역
시 선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바탕이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그 자체에 번뇌가 없는 무부성(無覆性)이어야 하고 또 선성과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무기성(無記性)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으로서 당당히 업력을 보존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문헌과 같이 아라야식은 선업종자와 악업종자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가 그 선업과 악업의 세력에 의하여 삼계와 육도의 세계에 출생하여 과보를 받게 된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를 뜻하며 이를 다시 육도라고 한다.
육도는
지 옥(地 獄), 아 귀(餓 鬼), 축 생(畜 生),
아수라(阿修羅),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
등의 세계를 말한다.
이들 세계의 내용도 확실히 알아야 아라야식을 중심한 윤회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세계설은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업력에 따라 삼계 육도에 두루두루 다니며 윤회하게 되는데 그 과보를 받는 출생의 형태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생(四生)이라고 한다.
사생은 중생이 태어나는 네 가지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말한다.
태생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모친의 태중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난생은 닭과 같이 모든 중생들이 알(卵)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이며,
습생은 곤충과 같은 생명체가 습기에 의하여 출생하는 것을 말한다.
끝으로 화생은 지옥중생과 천국의 천인들과 같이 부모나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독으
로 몸을 나투어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중도적 입장에서 악업의 세력이 강하면 악도에 출생하고 선업의 세력이 강하면 선도에 태어나는 등 삼계육도의 여러 세계에 사생의 여러 모습으로 출생하게 되는데, 최초에 태어나는 총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이때의 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총보의 뜻은 아라야식이 총체가 되어 출생할 때 출생하는 태아의 전체 과보를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태아로 태어날 때, 이목구비 등 여러 신체적조건과 정신적인 작용 등을 구비하고 발생하는 가장 근원적인 총체를 총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이 총보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신작용과 육체의 별체가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총보를 성립시키는 아라야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하고
총보에서 다시 여러 가지 업력(異熟習氣)의 도움으로 정신과 육체가 점차 구비되어지며 성장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숙생은 총체에서 별체가 발생하여 태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며 이 가운데 출생의 근본이 되는 이숙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8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별명을 붙인다.
이숙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면 이숙은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몸과 다른 몸을 내생에 변화시켜 과보를 받는다는 뜻에서 이숙식이라고 부른다.
이숙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시간적으로 찰나찰나 몸과 마음이 변천한다는 뜻(異時而熟)과
둘째, 공간적으로도 찰나찰나 마음이 변한다는 뜻(變異而熟)이 있고
셋째, 과보의 종류를 달리 바꾼다는 뜻(異類而熟)도 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이숙의 뜻 가운데 윤회하면서 과보를 받는다는 뜻은 세 번째의 이숙설이 가장 적합한 학설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이고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이숙은 우리 인간이 현재 살고 있으면서 정신과 육체가 선과 악으로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뜻 가운데 동시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망하여 내생에 다른 몸으로 출생하는 것에서 이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숙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다.
이와 같이 모든 이숙의 뜻은 아라야식을 제외시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없으면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고 종자를 보존할 수 없으며 또 윤회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이 이숙식이 되고 또 과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성유식론장중추요(成唯識論掌中樞要)]에 의하면
“진이숙(眞異熟)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업과(業果)요,
둘째는 부단(不斷)이며
셋째는 변삼계(遍三界)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업과(業果)
이는 위에서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에 대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라야식이 중심하여 전생의 업력에 따라 과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성질이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기 때문에 선업과 악업을 함께 보존하여 선보도 받을 수 있고 악보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② 부단(不斷)
부단은 아라야식의 체성이 계속 유지되며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간단없이 계속 삼계육도에 윤회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 변삼계(遍三界)
변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를 두루두루 윤회하면서 업력에 따라 새로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심식(心識)은 오직 아라야식 뿐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그 체성이 단절됨이 없어 계속 상속하고 동시에 어떤 업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업보를 받을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세 가지 뜻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또 진이숙(眞異熟)인 이숙식(異熟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밖의 심식들은 어찌하여 진이숙이라 할 수 없고 또 이숙식이라고 할 수 없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7말나식은 그 체성에 염성(染性)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고 한다.
그 염성은 곧 번뇌를 야기하며 번뇌는 다름 아닌 말나식의 성품이 악성(不善性)이며 또한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라는 것을 뜻한다.
윤회의 주체는 그 바탕에 선악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해야 하는데 말나식에 번뇌의 성질이 있다는 것은 그 자격이 없다는 엄격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업력에 의한 과보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두 가지 자격은 가지고 있다.
즉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7말나식은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항상 부단(不斷)하며 상속(相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계에 어디에나 두루두루 단절됨이 없이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이 두 가지를 구비하고 있으나 다만 업과의 뜻이 없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이숙식이 될 수 없다.
둘째,
제6의식의 경우를 보면 이 의식은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으나 부단의 뜻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6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거나,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등의 선정에 들면 그 염오(染汚)의 체성이 단절된다고 한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졸도하거나 의식을 상실했을 때의 극민절(極悶絶)과 수면(睡眠)이 깊이 들었을 때의 극수면(極睡眠) 등 이러한 경우에는 의식이 단절된다.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이 단절되는 것을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오위무심이 있기 때문에 제6의식은 윤회의 주체가 못되며 동시에 진이숙(眞異熟)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선과 악과 무기 등에 공정하게 통하고 또 삼계, 육도에도 두루 단절되지 않고 윤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안식(眼識) 등 전오식은 업과의 뜻은 있어도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이 없다.
그러므로 말나식과 의식과 함께 진이숙(眞異熟)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른 심식들은 업과와 변삼계와 부단의 뜻에서 하나 내지 둘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진이숙의 자격이 없고, 오직 아라야식만이 모두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진이숙의 자격이 있다고 한다
(3)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인상(因相)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성질을 살폈다.
아라야식은 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중생의 몸을 받고 또 그 몸과 정신을 부단히 변화시키고 또 유지시킬 수 있는 체성(體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또 아라야식은 진이숙(眞異熟)으로서 과보를 받는 총체라는 뜻에서 과보식(果報識)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과보식은 과체(果體)로 최초에 과보를 능히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중생이 삼계와 육도 내에서 업력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을 때, 과보를 아라야식이 최초로 받으며 그리고 능히 변화시켜 무형(無形)의 업력과 더불어 유형(有形)의 과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최초의 생명체이며 근원이다.
여기에 의지하여 칠식(七識)과 육근(六根)이 생기며 출생 후도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생활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인간의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식(根本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것을 아라야식의 별명인 아다나식(阿陀那識)에서도 알 수 있다.
아다나식을 집지식(執持識)이라고 번역하며, 집지(執持)의 뜻은 모든 선업과 악업을 비롯하여 정신과 육체도 함께 잘 붙들어 유지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중생의 과보를 받는데 매우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이숙식(異熟識)으로 과보를 받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식이 과보체(果報體)를 출생하는 내용을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학설은 이른바 인간의 태아(胎兒)가 출생하는 것과 그 내용이 같으므로 불교적 태아설과 함께 설명해 보고자 한다.
가) 인능변(因能變)과 태아(胎兒)
인능변(因能變)은
업인(業因)이 능히 변천한다는 뜻으로서 과보에 대한 원인의 변화를 설명하는 학설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이 불교의 교리는 반드시 원인을 밝혀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능변은 모든 중생이 과보를 받을 때, 그 업인이 어떻게 변화하여 과보가 발생하는가를 소상히 알려주는 학설이다. 물론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출생하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적어도 사생(四生)의 내용을 다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나 모든 교리가 그렇듯이 여기서도 우리 인간을 대표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능변과 과능변도 인간의 태아와 관계시킴으로써 더욱 현실성이 있고, 또 이해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태아로 출생하기 전에 어떠한 영혼이 어머니 태중에 태어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과거 소승불교에서 가장 많이 취급해 왔고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위에서 말한 인능변과 과능변의 총체가 되는 아라야식을 말할 때 많이 나타난다.
소승불교에서는 그 문제를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등 사유(四有)의 사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유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중유(中有)는
전생에 지은 모든 업력을 지니고 사망해서 다시 출생하기까지의 중간 생명을 뜻한다.
② 생유(生有)는
중유 기간의 영혼(阿賴耶識)이 출생의 인연을 만나 이승에 출생하는 순간을 말한다.
③ 본유(本有)는
중유가 출생하여 이승에서 살다가 사망하기까지의 생명체를 뜻한다.
④ 사유(死有)는
이승에서 살다가 인연이 다 되어 사망하는 순간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는 중생이 윤회하는 과정을 사유(四有)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 사유 가운데 중유와 생유가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아라야식의 인능변과 과능변과의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설명의 편의상 비록 소승불교의 교설이지만 요약하여 인용해 보기로 한다.
소승불교의 중유설은 매우 인격화된 논리를 갖고 있다.
즉 중생이 사망하면 49일을 전후하여 거의 내세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동안의 생활을 5,6세의 아동만큼이나 큰 존재로서 냄새를 맡고 식사를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매우 검은 빛을 발휘하며 업력이 같은 무리들끼리 산다.
선업을 많이 지은 중생들은 그 몸에서 매우 흰 빛을 발휘하며 역시 선업을 가진 중유들끼리 산다.
중유는 부단히 출생처를 찾아 우주 공간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므로 중유의 별명을 구유(求有)라고도 한다.
구유라는 말은 공간에 있으면서 출생처를 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유를 건달바라고도 하는데, 이를 번역하면 심향(尋香)이라 하며 심향은 냄새를 먹고 사는 중유의 생활을 나타낸 말로서 냄새를 찾아다닌다는 뜻이 있다.
이와 같이 공간에 있는 중유는 이승의 출생처를 찾아다니다가 만나면 다시 생과 사를 되풀이하게 된다. 자신의 업력과 인연이 맞는 부모와 세계를 발견하면 곧 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유는 천안(天眼)과 같이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멀어도 다 볼 수 있는데 다만 업력에 적합한 것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은 업력과 합당한 부모와 환경을 발견하면 급속도로 그 세상에 알맞은 업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인간계의 부모를 발견했다면 욕계의 부모는 음욕(淫慾)이 많은 중생들이 많으니까 그 중유도 곧 부모에 대한 애정을 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가 될 중유는 부친에게 애정을 품고,
남자가 될 중유는 모친에게 애정을 품게 된다.
이는 욕계의 이성(異性)이 서로 상대를 사랑하는 업력과 부합하는 업력의 발로이다.
그리하여 중유는 이승의 모친에게 있는 태중(胎中)이 곧 궁전과 같다고 착각하고 태내에 점점 접근하여 결국 탁태(託胎)하고 만다.
이와 같은 중유가 태어나는 과정은
소승불교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과
대승불교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에서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확실히 내세우지 못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아라야식(阿賴耶識)을 내세워 태중에 태어나는 최초의 생명체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 이론이 곧 아라야식을 중심한 총보(總報)와 별보(別報)의 설명이다. 그리고 대승유식학에서의 소승불교의 중유 대신에 아라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하여 모태(母胎)에 태어나는 최초의 생명체로 확정짓게 된다.
나) 아라야식(阿賴耶識)에 대한 8가지 증명
이와 같이 윤회의 주체로 확정짓게 된 이유를 유가사지론에서는 여덟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①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전생에 지은 업력을 무엇이 보존하였다가 금생에 태어나게 하는가?
아라야식이 존재함으로써
전생에 업력을 보존할 뿐 아니라
금생에도 출생할 수 있고
또 안식(眼識) 등 여러 심식(心識)도 활동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육식(六識)도 활동할 수 있고
또 선악의 업력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②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이 세상의 최초의 생명체가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정신체(心識)도 생기(生起)하지 못할 것이다.
③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안식 등과 함께 활동하는 의식과 의식의 기억력이 명료하게 나타날 수 없고
또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④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유루종자(有漏種子)와 무루종자(無漏種子)를 간단없이 지속시킬 수 없다.
그리고 또 육식신(六識身) 체성 등은 단절이 많은데
무엇으로 인과응보의 업력설을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⑤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중생 각자가 행동하는 아업(我業)과 인식의 대상인 경업(境業)과
중생이 의지하는 의업(義業)과 중생이 살고 있는 기업(器業) 등
사종업(四種業)을 설명할 수 없다.
⑥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인간의 사려(思慮)가 자유롭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선정(禪定)의 유무(有無)를 구별하기 힘들게 된다.
⑦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멸진정(滅盡定)과 같은 깊은 선정에 들 수 없고
또 멸진정에 들면 심식(心識)과 육체가 서로 분리될 것이며
현재의 수명도 단절되는 모순을 따르게 될 것이다.
⑧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인간이 사망할 때 상체(上體)가 마비되거나
하체(下體)가 냉촉(冷觸)되면서 점점 시체화하는 절차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의식도 점차 마멸되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단절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팔종의 증거를 들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깊이 생각하여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라야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우리 생활을 설명할 때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많다.
특히 그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날 때 최초의 생명체가 생기할 수 있는 것은 곧 아라야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사망할 때 최후까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도 아라야식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진리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인간의 주체를 여덟 가지 증거를 들어 규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소승불교에서도
세의식(細意識)과 일미온(一味蘊), 그리고
보특가라(補特伽羅)와 궁생사온(窮生死蘊), 또는
근본식(根本識) 등
여러 심식사상(心識思想)을 내세워 윤회의 주체를 규명하려고 노력하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라야식 사상만큼 그 이론과 사상이 구족하지 못하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서 아라야식이 가장 진리적인 이론을 구비하고 있는 심식으로서 인간으로 태어날 때도 가장 최초의 생명체가 되고 있음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어머니 태중에 최초의 생명체로 안착한 것은 아라야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식(識)은 모태에 태어나면 정지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착 즉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정혈(精血)과 아라야식과 화합할 때 최초의 태아가 출생하게 되는데, 그 후 즉시 인간의 모습을 꾸미는데 활동을 개시한다.
이때의 부모는 연(緣)이 되고 아라야식은 업력과 함께 인(因)이 되며 인과 연이 함하여 결과(果報)가 생기는 것인데, 그 태아는 곧 과보이다.
인과법에 있어서 인과 연의 도움이 없으면 과를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아라야식에는 연이 있어야 하고 그 연은 바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전생의 인(因)과 부모의 연(緣)이 합하여 태아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러나 탄생한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계속 태아의 내용은 업력과 연에 의하여 완숙되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아라야식이 핵심이 되어 그 내용을 완숙하게 되도록 하는데 그것이 곧 인능변(因能變)의 조화이다.
인능변은 아라야식이 모태에 안착하자마자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동시에 아라야식에 보존된 전생의 업력이 부모의 연이 가해짐으로써 능히 변화를 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업인이 변화를 야기한다는 말은 곧 인간의 형체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업인이 연을 만나 인간의 과체(人體)를 형성시킨다는 뜻이다.
그 인(因)의 내용은
등류습기(等流習氣)와 이숙습기(異熟習氣)
등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제 두 습기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 등류습기(等流習氣)
등류습기(等流習氣)의 뜻은,
등(等)은 상사(相似) 즉 서로 같다는 뜻이고
유(流)는 유류(類流) 즉 종류와 무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습기(習氣)는 전7식(前七識) 등이 활동하여 익히고 습관들인 기운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습기는 다음의 결과를 가져올 업력과 같으며 종자(種子)라는 별명도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등류습기는 전생에 모든 정신(七轉識)과 육체 등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을 뜻하는데, 그 중에서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받게 하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받도록 하는 업력을 뜻한다. 즉 동등한 종류(等類)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력(習氣)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받게 하고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를 받게 하는 것으로서, 이를 친인연종자(親因緣種子)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인(因)과 연(緣)이 친한 것만이 인과응보가 될 수 있는 업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유식론(成唯識論)]에는 등류습기가 인연이 되는 것은 과보가 인(因)과 유사하다(等流習氣爲因緣故 果似因)라고 하였다.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는 ‘등류의 뜻은 인연이 생하므로 인연의 법은 반드시 그 성질이 동등하다(等類義 爲因緣生 因緣之法 必同性故)’라고 하였다.
즉 인성(因性)과 과성(果性)이 동등한 인과를 성립시킬 수 있는 업력을 등류습기라고 한다.
이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자업자득의 철저한 인과법칙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업인설이다.
다시 말하면 전생의 악업은 금생에 악보를 받도록 하고 또 전생의 선업은 금생에 선보를 받도록 하는 것이 등류습기의 업력이다.
등류습기는 때로는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도 한다. 이 명언종자는 우리의 마음이 인식의 대상을 의식할 때 언어와 명사를 연상하면서 행동한 업력종자를 뜻한다. 명언은 표의명언(表義名言)과 현경명언(顯境名言)으로 나누어진다.
ⓐ 표의명언은
어떤 사물의 뜻과 의리(義理)를 평가하고 표현하는 것을 뜻하고, 또 평가하고 표현할 때 명사(名詞)와 구문(句文)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이는 곧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나 행동할 때 그 뜻을 생각하고 평가하며 또 언어 문자로 말하거나 그 뜻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내용의 행위가 우리 생활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업력의 이름을 명언종자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제6의식이 이미 명사와 문구가 붙어있는 대상을 반연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 현경명언은
마음(心識)이 인식의 대상을 마음속에 능히 비추어 그 대상의 명사와 문구를 환하게 생각하여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대상의 모습을 마음 위에 올려놓는 것을 상분(相分)이라 하는데, 이 상분의 모습을 견분(見分)이 분별하고 요별할 적에 그 대상의 명사와 명구(名句)를 생각하면서 하게 되므로 그 행동 속에 명사와 명구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업력의 이름도 명언종자라고 지은 것이다.
이들 두 가지를 분명히 나누어 말할 것 같으면
표의명언은 반연되어지는 인식의 대상(所緣境)의 이름과 명구의 수동적 뜻을 생각하면서 표현하는 행동의 업력을 말한다.
그러나 현경명언은 칠전식(七轉識)이 능동적으로 인식의 대상을 반연하여 그 명언과 구문을 분별하는(能緣識) 것에서 조성되는 종자를 뜻한다. 이와 같이
표의는 수동적인 소연(所緣)이고,
현경은 능동적인 능연(能緣)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등류습기에는 명언종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심식(心識)의 활동(能緣識)과 인식의 대상(所緣境)을 보다 넓게 그리고 심오하게 업사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등류습기는 업인으로서 반드시 같은 성질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 이숙습기(異熟習氣)
이숙습기(異熟習氣)는 위에서 살펴본 등류습기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이숙습기라는 업력은 반드시 인(因)과 과(果)가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異性)을 초감(超感)하기 때문이다. 이숙(異熟)이란 말은 이미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찰나찰나 변천하고 변화시킨다는 뜻으로서 인과에 있어서도 인(因)과 과(果)가 반드시 동일하게 성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因)의 성질과 다른 과(果)가 서로 다르게 성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숙습기의 조성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六識)이 한다.
이들 육식이 활동하는 행위는 선업과 악업, 그리고 무기업 등 세 가지 성질의 업력으로 조성되는데, 이들 업력들은 제8아라야식에 보존될 때 기존의 업력에게 그 성질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흔히 증상연(增上緣)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내에는 이미 선업과 악업 등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위에 육식이 찰나찰나 선악의 행위를 통하여 선악의 업력을 조성하게 된다. 이들 업력이 아라야식에 훈습(薰習)될 때 기존의 업력에게 새로운 업력의 영향을 끼쳐 기존 업력으로 하여금 본래의 성질을 변질케 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이미 나쁜 짓을 하여 악업의 업력을 보존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착하게 변하여 선행을 많이 하면 그 선업이 기존의 악업에 영향을 주어 다음의 결과를 악업과는 다른 선과를 초래할 수 있는 인과의 도리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이숙의 진리는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없으면 고정적인 인과사상으로 정립되어 나쁜 사람은 항상 나쁘고 좋은 사람은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융통성 없는 인과사상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선업을 많이 닦아도 이미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선인이 될 수 없게 되고 또 아무리 악업을 지어도 이미 선업을 좀 지어놓은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는 인과법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상을 일인주의(一因主義)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과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육식의 활동여하에 따라 변하며 또 아라야식의 내용도 찰나찰나 변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박토에 씨앗을 심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후 좋은 거름을 주어서 잘 가꾸면 그 씨앗은 박토에 그대로 있다가 나는 것보다 훨씬 잘 클 것이다. 또 씨앗은 나쁘지만 그 토질이 좋은 데다 거름을 잘 해주면 그 씨앗은 토질과 거름의 영향으로 매우 잘 커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여 기존의 선업과 선과를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과거에 악업을 지었다고 생각되면 더욱 선업을 지어 그 악업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 없애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因)이란 한 번 지어 조성해 놓으면 하나의 세력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을 공능(功能)이라고 하며 공능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인력(引力)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업력을 인이라 하고 인을 또 종자(種子)라고 비유하여 부른다. 이러한 종자의 힘에 의하여 열매를 맺듯이 업력은 삼계의 세계에 두루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을 이숙습기라 한다.
이숙습기는 친생자과(親生自果)하는 등류습기와는 달리 친생이과(親生異果)하는 법칙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법칙에 의하여 아라야식은 내생의 총과보를 받을 수 있는 진이숙(眞異熟)이 되고 또 이러한 진이숙은 후천적으로 지은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때의 업력을 이숙습기라 한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지은 육식의 업력이 먼저의 진이숙을 변화시키는 증상연(增上緣)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업력에 의하여 몸을 바꾸어 윤회할 수 있고 또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현세의 몸도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인간의 내용으로 변천할 수 있다.
참으로 이숙습기는 오묘한 진리가 담겨있는 가장 현실적인 업력설의 하나이다.
이상으로 등류습기와 이숙습기, 두 습기설을 살펴보았다.
이 두 습기설은 두 가지 업력설로서 앞으로 과보를 받는 결과에 대하여 가장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업력이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因能變)이라 한다.
인능변은 또 위에서 살펴본 등류습기와 이숙습기 등 두 가지 습기, 즉 두 가지 업력의 변화를 내용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업력이 다음의 과보를 받기 위해서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이러한 업력은 또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인업(引業)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과보를 끌고 다니는 인력(引力)을 말하여 인업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인업에 의하여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과보를 이숙과(異熟果)라 한다.
이숙과는 또 진이숙과 이숙생으로 구별하여 설명된다.
진이숙은 곧 아라야식이 최초에 과보를 받을 때 이름한 것이고 동시에 이 진이숙을 끌고 온 업력의 이름을 인업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 진이숙에서 발생되는 업과를 이숙생(異熟生)이라 하며 이숙생은 아라야식으로부터 발생되는 전칠식(前七識)을 뜻한다.
그리고 칠식과 더불어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등 육근(六根)도 이숙생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이숙으로부터 몸과 정신작용이 동시에 변화하여 결과로 나타나며 인간의 모습과 내용을 구비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할을 하는 업력을 만업(滿業)이라 한다. 만업은 구석구석 빈틈없이 하나의 과보를 원만하게 구족되도록 해주는 업력이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스승이 윤곽(眞異熟)을 그려 놓으면 제자가 그 자세한 내용까지도 채워 그려 넣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인능변은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를 내용으로 한 업력의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그 업력이 세분화하여 과보의 총체를 끌고 오는 업력을 인업(引業)이라 하고 그 총체 위에 하나하나 인간의 형체를 구비해 주는 업력을 만업(滿業)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업에 의하여 끌려온 과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만업에 의하여 하나하나의 정신계와 이목구비 그리고 오장육부가 형성되는 것을 별보(別報)라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능히 받도록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무루업(無漏業)을 제외한 선업은 가히 사랑스러운 과보(可愛果)를 받고 또 악업의 종자는 가히 사랑스럽지 못한 과보(比可愛果)를 반드시 가져오게 하는 초감(招感)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을 이숙습기(異熟習氣)라 한다.
이는 삼계의 윤회를 가능케 하는 업력으로서 업종자(業種子) 또는 유지습기(有支習氣)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유지습기란 삼계에 윤회하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선악업은 정발업(正發業)과 수발업(隨發業)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은 전육식 가운데서 제6의식의 활동에서 조성되는 업력을 정발업이라 하고
또 의식을 제외한 안식 등 전오식이 활동하여 조성된 업력을 수발업이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심식의 활동 내용에 의하여 명명된 이름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의식은 결정적인 활동을 하지만 오식(五識)은 대부분 의식에게 수종(隨從)하여 활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업(發業)이라는 뜻은 곧 모든 심식의 행동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이 발생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다름 아닌 업력을 즉시 발생시키고 선악업을 조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식의 활동에는 서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정발업과 수발업 등 여러 업력의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업력들이 모여 아라야식에 보존되었다가 과보를 가져올 때 능변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 인능변은
아라야식이 이승의 부모의 연(緣)을 만났을 때 선악업과 함께 과보를 발생하기 시작하여 그 과보를 완성할 때까지 능히 변화하는 업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업력의 세력이 변화없이 과보를 받을 수 없다.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능변(果能變)도 인능변의 태아가 생겨나는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이 형성될 때까지의 변화과정을 뜻한다. 이는 업력과 더불어 과보의 변화와 과보의 완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因)과 과(果)는 불가분리하며 항상 동시에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능변 없는 과능변이 있을 수 없고,
과능변 없는 인능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근원을 따진다면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는 바와 같이 인능변이 과보에 대한 근원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생의 업력이 아라야식에 실려와서 부모의 연을 만나 그 연의 도움으로 인간의 과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 과능변은
곧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말하기를
“과능변은 두 가지 습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果能變 謂前二種習氣故)”라고 한 바와 같이 업력의 결과이다.
여기서 두 가지 습기란 말할 것도 없이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를 뜻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업력(習氣)에 의하여 과보의 완성이 가능하다.
이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면
인능변은 종자인 업력에 의하여 태아(果報)가 모태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變現)을 말한다.
그러나 과능변은
종자, 즉 업력에 의하여 생겨난(因生) 현재의 과보(現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인능변은 내적인 원인론(原因論)인데 반하여 과능변은 외적인 결과로서 인간의 형체를 구성해 나아가는 외부의 변화(變現)를 뜻한다.
이러한 과능변의 내용을 능변과 소변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능변(能變)은
소변(所變)에 반대되는 어구로서 능히 창조적인 입장인 능조자(能造者)를 뜻하며,
소변은
창조되어지는 피조물(被造物)의 입장을 뜻한다.
이는 불교가 어떤 특정적인 유일신(唯一神)을 부정하고 인과의 법칙을 내세워 업력을 창조자 대신으로 내세운 표본이 되는 것이다. 본래 능조자격인 원인과 피조물격인 결과도 없는 것이 진리(眞如)의 세계이다. 그러나 윤회하고 있는 중생계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이 있는 것이며 그 논리가 곧 여기서 말하는 인능변과 과능변의 내용이다.
이러한 능소(能所)의 관계는 자기의 업력(自業)이 자신을 창조(自得)한다는 자업자득의 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이다.
마) 이숙습기(異熟習氣)의 과보(果報)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의 진리는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심오한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인능변은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라는 업력이 연을 만나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과능변이라고 한다.
인능변 가운데 등류습기의 능변(能變)은 선인은 선과를 가져오게 하고, 악인은 악과를 가져오게 하는 등 업인(業因)과 과보(果報)가 그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등류과(等類果)라고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등류인(等類因)에 의하여 등류과가 초래된 것이며
또 동류인(同類因)에 의하여 동류과(同類果)가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평상시에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인과법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등류습기의 내용보다 더욱 복잡하고 또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인과법칙이 있으니 그것은 곧 이숙습기의 논리이다.
이는 글자 그대로 업인과는 달리 이질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력을 뜻한다.
예를 들면 지옥의 중생이 극락 세계에 태어날 수 있고, 또 인간이 사왕천(四王天)과 제석천(帝釋天) 등 여러 천국에 태어날 수 있는 윤회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은 곧 이숙습기의 원리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숙이라는 뜻은, 변천한다는 뜻과 변화한다는 뜻과 교환한다는 뜻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는 인과의 부사의한 도리를 설명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유식학의 인과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숙의 내용을 중국의 규기법사(窺基法師)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종류의 변화과정 등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 세 가지 내용을 좀 더 넓혀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 시간을 달리하여 변천하는 것(異時而熟)
시간을 달리한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는 시시각각 변천한다는 뜻이다.
먼저 원인의 변천을 살펴보면 중생 각자가 업력을 아라야식 속에 훈습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그 업력을 곧 종자라고도 표현한다.
이 종자는 아라야식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변천 또는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천하면서 다음의 결과를 맺을 때까지 생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는 서로 인과 연이 되어 먼저의 종자는 다음 시각의 새로운 종자로 변천하면서 항상 생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종자가 종자를 출생시킨다는 말은 동일한 종자가 다음의 새 종자로 발생한다는 뜻으로서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내용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력이고 또 항상 새로운 생명력으로서 여러 가지 생활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체인 아라야식은 인간의 의식과 육체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은 새로운 연을 만나면 즉시 우리 인간의 정신인 칠전식(七轉識)의 활동과 육체의 새로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이를 전문적인 언어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
즉 아라야식 내의 종자는 원인이 되고
인간 내부와 주위의 환경은 연이 되는 것이며
현재의 행동과 인간의 주변에 나타난 새로운 상태가 곧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이 종자(種子)가 현행(現行)을 발생시킨다는 말은 인간이 현재의 생활에서 보고 듣고 익힌 여러 가지 지식과 습관을 곧 아라야식 내에 다음의 지식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원인이 됨과 동시에 이것이 다음의 행동과 지식 그리고 습관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지식과 습관이 업력이 되어 현재의 행동과 지식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현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현행이라는 말은 현재의 정신 행위, 육체적 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와 모습을 뜻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과거에 각자가 익히고 배웠던 습관과 지식으로서 자신의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의 발생이며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과 습관의 발생은 현재의 생활을 뜻하는데 현재의 정신과 육체의 행위는 종자에 의한 결과로서 이 결과인 행위는 다시 원인을 조성하는 내용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정신 생활과 육체 행위는 아라야식의 업력 즉 종자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으로서 실현되는 정신과 육체의 행위는 결과임과 동시에 업력을 조성하여 다시 자신의 아라야식 내에 업력인 종자를 보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라고 한다.
즉 현재의 행동은 아라야식 내에 종자를 훈습(薰習)한다는 말이다.
훈습한다는 말은 조성(造成)한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며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조성해서 아라야식에 보존시킨다는 뜻이 된다.
이상과 같이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전생과 금생, 또는 금생과 내생 등과 연결시켜 삼세인과(三世因果)를 논술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소승적인 인과설이다.
그러나 대승적인 인과응보 사상은 곧 현재의 생활 숙에서 인과가 시시각각으로 성립되고 또 전개되며 찰나찰나에 업력을 조성하고 동시에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듣고 보았던 것은 곧 아라야식 내의 종자가 되며 그것은 또 다음 찰나의 지식과 습관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야말로 찰나에 인과가 성립되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의 사상이며 또한 찰나인과사상(刹那因果思想)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을 고정시켜 운명에 얽매이게 하는 신(神)의 창조설과 또는 고대의 이교도들의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인과론과 업보사상을 타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르쳐 주는 사상인 것이다. 찰나에 변천과 변화가 없는 인과사상은 인간의 발전을 저해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승유식학(大乘唯識學)에서는 고대 인도의 운명론적인 인과사상을 타파하고 현재의 불행과 빈곤과 고통의 상태를 찰나에 자신의 정신과 육체적인 행위와 현행에 의하여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개조와 아울러 행복과 부귀와 안락한 상태의 환경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에 이숙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것(變異而熟)
이는 위에서 살펴본 이시이숙(異時而熟)의 논리와는 조금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물론 넓은 안목으로 보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내용에지만 그러나 학문적으로 구별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려면 따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이이숙(變異而熟)이라는 말은 정신과 육체 또는 모든 사물이 내용면에서 끊임없이 변천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시시각각으로 겉모습만 변천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을 비롯한 모든 내용도 변천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령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부모로부터 태어나면서 변천해 왔고 현재도 찰나찰나 그 내용은 변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의 인과법칙이 없으면 인간의 내용은 발전할 수 없고 개선될 수 없으며 또 새로운 인간으로 교육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중심한 모든 심식은 시시각각으로 변천하여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조해 나갈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심식들에 의존한 육체의 내용과 외모도 심식의 선과 악의 여하에 따라 발전하고 또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밖의 자연계도 인간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며 인간의 선악 여하에 따라 자연계도 선으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종류를 달리하여 이루어지는 것(異類而熟)
종류 즉 과보를 달리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과 내용이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 성립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생의 과보와 금생의 과보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결과가 나타난 것을 뜻한다. 가령 윤회과정에서 인간이 사망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났다고 하면 금생의 인간의 몸과 내생의 극락세계의 몸과 서로 다른 종류의 몸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하나의 변천이기 때문에 이숙의 의미가 있다.
아라야식을 중심하여 삼계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생과사를 되풀이하면서 다른 몸을 받게 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이류이숙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이 이숙이라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숙의 진리도 업력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중생의 세계는 업력과 관련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업력의 내용을 자상하게 알 필요가 있다.
업력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일한 인과 과가 연결되도록 하는 등류습기라는 업력도 있지만 항상 다른 종류로 변천시켜 과보를 받도록 하는 이숙습기도 있다는 것이 인과사상의 핵심이 되어 왔다.
이 이숙습기는 다른 과보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적극 힘을 발휘하는 업력으로서,
이는 주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전6식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다.
이들 심식에 의하여 조성된 선악의 종자가 아라야식에 훈습될 때,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이숙무기종자(異熟無記種子)를 도와서 다른 성질의 결과를 초래케 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의 이숙습기를 증상연종자(增上緣種子)라고도 한다.
이는 이미 보존된 종자 즉 업력에 대하여 어떤 과보나 결과를 발생하도록 연(緣)이 되어주고 힘을 증가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이숙무기종자라는 말은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가 인간의 정신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업력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무기(無記)종자로서 다른 힘을 빌려서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 종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육식(前六識)이 찰나찰나 활동하면서 조성한 업력이 아라야식에 훈습되면서 이미 보존되어 있는 이숙무기종자에 힘이 되어 주고 업력을 증가시켜 주는 증상연종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에 이숙무기종자는 새로 증가해 오는 증상연종자 즉 이숙습기의 선성 또는 악성의 여부에 따라 선의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고 또 악의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이때에 조성된 육식(六識)의 업력은 기존의 업력을 도와서 다른 결과의 과보를 맺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 업력의 이름도 이숙습기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안식 등 육식의 업력을 이숙습기라 하고 이 이숙습기는 또 다른 업력을 도와서 이숙과(異熟果)를 가져오도록 하는데 그것은 전6식의 업력은 분명히 선, 악, 무기 등 삼성(三性)에 통하고 또 선악의 훈습력(薰習力)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숙습기로서 증상연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이를 분별훈습종자(分別薰習種子)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7말나식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므로 유부(有覆)는 무명 등 번뇌의 뜻으로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뜻이 있으나 그 성질이 무기성(無記性)이므로 강력한 이숙인(異熟因)이 될 수 없고 동시에 자신의 결과(自果)도 가져오도록 하는 역할을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숙습기로서 이숙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은 전6식의 업력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리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찰나찰나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재 마음이 착해서 착한 행동을 했을 때의 업력이 아라야식 내에 들어가 먼저 잘못을 저질러 조성된 종자에 증가하여 악의 내용을 약화시켜 악의 종자로 하여금 선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의 행위에 의한 업력을 후자의 행위에 의한 업력이 증상연이 되어 그 내용을 변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마치 나쁜 종자가 좋은 비료 등을 만나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숙습기의 논리에 의하여 이숙과(異熟果)라는 말이 있게 된다.
즉 전자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선과 악을 되풀이하면서 사는 것이 중생인데, 특히 인간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업력에 따라 선인(善人)이 될 수도 있고 악인(惡人)이 될 수도 있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이숙습기와 이숙과의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현실에 적용시키고 동시에 윤회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승에서 저승에 태어날 때 이승의 몸과는 달리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날 수 있는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곧 이숙인(異熟因)과 이숙과(異熟果)의 논리이다.
바) 과능변(果能變)과 태아(胎兒)
위에서 이숙(異熟)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다.
그 가운데 다른 종류의 과보를 받게 되는 이류이숙의 뜻도 있었다.
이 이류이숙의 뜻은 이숙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말인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전생에서 금생의 몸을 받고 금생에서 내생의 몸을 받는 등 이승에서 저승의 다른 몸을 되풀이하면서 받는 것을 뜻한다.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이승의 부모를 만나 어머니의 태내(胎內)에서 태어나는 순간 저승의 몸과 다른 몸을 받아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인능변과 과능변이 이루어진다.
인능변(因能變)은 업인(業因)이 인간의 모습을 능히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의 과보를 형성하는 과정을 과능변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업력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몸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과능변이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아라야식을 비롯한 말나식과 의식 등이 차례로 형성되는데 이때의 이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여 인간의 마음을 형성한다는 뜻이다.
다음의 정신계가 말나식인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 한다.
그리고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을 제삼능변식(第三能變識)이라 한다.
이와 같이 어머니 태안에 태어난 태아는 아라야식을 중심하여 차례로 변천하며 모든 정신계를 형성하고 그 심식(心識) 하나하나는 또 사분(四分)의 내용으로 변화하여 인식의 활동을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계의 심식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의 뜻이 있는데 분별과 요별의 뜻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사분설(四分說)이라 한다.
사분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을 말한다.
이들 사분은 각식(各識)의 내용으로서 인식의 대상(六境)을 마음 안에서 인식하는 내용을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상분(相分)은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인식대상이 마음 안에 비치는 영상(影像)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마음이 그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영상을 오관(五根)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끌여들여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상분은 마음 안에서 인식의 대상이 되며 이러한 상분을 인식하는 또다른 인식작용이 있는데 이를 견분(見分)이라 한다.
이 견분은
견조(見照)한다는 뜻으로 상분에 해당하는 대상물을 좋다(樂), 나쁘다(苦),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捨)고 하는 식별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서 상분은 객관계(客觀界)가 되고 견분은 주관계(主觀界)가 된다.
이와 같이 한 식(一識) 안에 객관과 주관이 나누어져 모든 진리를 인식하는 것을 이른바 분별심 또는 요별심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음 안에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곧 상대적인 마음의 형상으로서 진리롭게 관찰할 수 있는 합일(合一)의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견분은 상분에 대해서 선이다, 악이다, 그리고 선도 악도 아니다라는 세 가지 성질로 인식을 하는데 여기에는 또다시 그 견분의 인식이 틀림없는지를 거듭 확인하는 자증분(自證分)이라는 심분(心分)이 있다.
심분이라는 말은
마음의 분한 또는 역할이라는 뜻으로서 심식 내에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말이다.
이 자증분은 식(識 )의 역할에서 가장 중체가 되며 상분과 견분은 이 자증분 위에서 활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자증분은 항상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또 활동한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동시에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 세 가지 심분(心分)의 내용을 달팽이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달팽이는 전체의 몸이 있는데 그 머리 위에 두 뿔이 밖으로 튀어나와 이것이 밖을 내다보는 눈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달팽이에 심분을 비유해 보면 자증분은 달팽이의 몸과 머리에 해당하며 상분과 견분은 달팽이 머리 위에 나타난 두 뿔과 뿔 위에 있는 두 눈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심식 하나하나에는 상분과 견분 그리고 자증분의 역할이 있다.
그리고 그밖에 심분(心分)은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증자증분은 앞의 자증분의 활동을 뒤에서 재증명해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와 같이 팔식은 각기 사분(四分)의 작용이 있는데 이들 사분의 작용은 과능변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즉 과능변이란 전생의 업력을 지닌 아라야식이 부모를 만나 과보를 받을 때 그 과보의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그 과보는 다름 아닌 어머니 태 안의 태아를 말한다.
그러므로 총과보(總果報)를 받은 아라야식이 처음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심식이라는 뜻에서 이를 초능변식이라고 한다.
이 아라야식에 의하면 제이능변식인 말나식이 나타나고 또 제삼능변식인 의식 등 육식이 변화하여 정신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팔식(八識)이 차례로 변화하여 인간의 정신계를 형성함과 동시에 그 팔식 하나하나에는 그 식이 발생하는 찰나에 위에서 말한 사분의 작용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태 안에 태어난 태아의 정신계는 태어난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인간적인 정신활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태아이므로 지상에 태어난 아이들 만큼 밖의 세상을 내다보지 못하지만, 그 태아는 모태의 세계가 전 우주와도 같은 견해를 갖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공간으로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 태아는 그것을 모르고 넓은 공간 못지않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태아는 인간의 생활이 어머니 태 안에서 시작되며 비록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태아라 할지라도 팔식의 정신계는 원만히 구족하고 있다.
그리하여 춥다 덥다 하는 것을 식별하는 능력을 구비하게 된다.
신라의 유식학자인 원측법사(圓測法師)는 그가 저술한 [해심밀경소]에서 어머니가 뜨거운 물을 마시면 태 안에 있는 태아는 뜨거워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느낀다고 하였고 또 어머니가 매우 찬물을 마시면 그 태아는 추워서 덜덜 떠는 고통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태아도 지상의 인간과 같이 모든 감각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튼 유식학적으로 보는 인생은 아라야식의 탁태(託胎)로부터 시작되며 탁태한 그 태아는 즉시에 팔식을 구족하고 동시에 사분작용을 야기하여 태내의 모든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이 인간의 과보를 받는 절차이며 과능변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과능변의 뜻에는 위에서 설명한 심식의 구성과 사분작용의 활동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형성과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육체가 형성되는 태내오위(胎內五位)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 갈라람(Kalala)
육체의 형성과정을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의하여 살펴보면 부모의 탐애(貪愛)로 말미암아 몇 방울의 정혈(靜血)이 모태 안에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마치 우유가 결집된 상태와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전생의 업력을 지닌 아라야식이 포함됨과 동시에 전생의 모든 것은 끝나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하였다.
이를 갈라람이라고 하는데 갈라람(Kalala)이라는 말은 곧 응활(凝滑)이라는 뜻이 있으며 응활은 응고된 물방울이라는 뜻이다. 이 갈라람은 최초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화합하여 출생한 최초의 사람이다.
정신과 육체가 화합한 갈라람이 태 안에 생겨남과 동시에 정신계가 형성되고 또 육체의 본질이 형성된다. 이들의 형성내용을 분류하여 보면 정신적인 변화와 형성은 이숙식 또는 능변식이라 하고, 육체를 포함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보는 이숙과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신과 육체가 갈라람이 중심하여 점차 구비하게 된다.
그 육체의 본질은
견고한 성질(堅性), 액체의 성질(煖性),
따뜻한 성질(溫性), 생동하는 성질(動性)
등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 등 사대(四大)라고 부른다.
이러한 성질로 구성된 육체의 본질은 처음으로 갈라람이라는 인간의 형체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인간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상태이기는 하나 그 내용은 완전한 인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에 대한 조심성이 따르게 되며 또한 임신부로서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태아가 이러한 갈라람의 위치에 있는 기간은 태내에 태어나면서부터 일주일 간을 말한다.
② 액부담(額部曇)
이 갈라람에서 더욱 발전한 인간의 형태를 액부담(額部曇)이라 하며 이 액부담(Arbuda)은 액체적인 육체가 점차 응고되어 그 위에 엷은 피부(薄皮)가 생겨나는 위치를 뜻한다.
마치 끓인 우유 위에 막이 생기는 것과 같이 살결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 액부담은 태아가 태어난지 제2주(第二週)의 기간을 말한다.
③ 폐시(閉尸)
다음은 폐시(閉尸)의 기간으로서 이 폐시(Pesi)의 기간은 태아가 태어난지 제3주(第三週)에해당한다.
이 기간은 태아의 살결이 제법 견고해지고 혈육이 잘 형성되는 육체가 마련된다.
그러기 때문에 폐시(Pesi)라는 범어를 혈육(血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④ 건남위(鍵南位)
다음 태아의 기간은 건남위(鍵南位)에 들어가게 되며 건남위(Ghana)의 태아는 근육이 견고해진 아이를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건남을 견육(堅肉)이라 번역하며 이는 제사주(第四週)의 태아에 해당하는 것이다.
⑤ 발라사(鉢羅奢)
다음으로 건남위의 태아가 더욱 성장하여 사지(四肢)와 오장(五臟)과 육부(六腑)가 완성되는 기간으로 이를 발라사(鉢羅奢)라고 한다.
발라사(Prasakha)는 지절(支節)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곧 인간의 형체가 완전히 구비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발라사의 기간은 위에서 말한 사위(四位)의 태아 기간보다도 훨씬 긴 기간이므로 어머니의 태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직전까지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태아가 태어나면서 지상에 출생하기 이전의 변화는 쉴새없이 진행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모두 과능변의 형태이며 동시에 이숙과의 내용을 뜻한다. 요컨대 이러한 태아관(胎兒觀)은 모두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과거의 업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모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 등 육체적 차별이 있게 되고 부모와 주거지 등 환경의 차별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전생에 지은 업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승의 과보의 차별이 있게 될 뿐이지 인간의 근본 자성까지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중생은 어느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처음에는 약간의 차별이 있는 과보를 받지만 일단 과보를 받은 중생들은 평등한 입장에서 삶을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전생의 업력은 선업 또는 악업(因是善惡)이지만 금생의 과보를 받고나면 그 과보의 내용은 선성에 치우치지 않고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무기성(果是無記)이라고 한다.
이 말은 전생의 악업에 의하여 금생의 악보를 받고, 또 전생의 선업에 의하여 금생의 선보를 받는 인과가 있으나 그 과보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이라는 것이다.
무기라는 말은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 입장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승에 출생한 태아는 귀천과 빈부의 환경을 접하기는 하지만 그 태아들의 자성(自性)은 평등한 것이다.
즉 누구나 꼭 같은 입장에서 이 세상의 삶을 출발하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진리에 의하여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또 부자도 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부잣집 아이라 할지라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태아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본성이 곧 불성(佛性)이고 지혜의 체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성을 바탕으로 한 아라야식이 인간의 과보를 받게 되면 이를 진이숙(眞異熟)이라 하고, 아라야식으로부터 육식 등 여타의 정신과 육체가 형성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태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4) 공업(共業)과 사회(社會)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을 알아보았다.
아라야식이 인간의 모든 내용을 형성할 수 있는 진체의 업력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총보(總報)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아라야식으로부터 모든 정신에 해당하는 일곱 가지 마음(七轉識)과 여러 정신작용(五一沈)이 형성되고, 또 육체의 부분이 하나하나 형성되는데 이들을 모두 별보(別報)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뿌리에서 가지와 줄기가 자라나듯이 아라야식이라는 근본식(根本識)에서 지말식(枝末識)과 육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원만히 형성되면 인간으로서 정신적인 행위와 육체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삼계와 육도 가운데 인간계(人道)의 과보를 받고 인간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여러 중생의 종류 가운데 인간계에 태어나서 살도록 하는 업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습을 구비하고 인간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둘 것은 업력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 자신의 몸과 마음만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세계도 창조하게 한다.
자신이 사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이 사는 세상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생하면서 태어남을 말한다. 이를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공업은 그 사회를 공동으로 유지시키는 업력을 말하는데 가령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국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휘하여 한국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뿐 아니라 한국 내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공업을 발생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 등 자연계까지도 원만하게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세계에 사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이 악화된다면 그 사회는 물론 자연계도 악화되어 고통스러운 세계로 변하며 심지어는 자연계가 파괴되는 결과까지도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업은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을 뜻하는데 그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무질서해지면 공동사회도 필연적으로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생태계는 뭇 생명체가 발생하는 공업력으로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의 행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행위는 자신에게만 한하는 업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개인에 한하는 업력은 불공업(不共業)으로서 불공업은 자신의 생명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나타나는 공업은 이와 다르다.
공업은 공동사회를 형성해가는 사회적인 힘이다.
그 힘을 표현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업력은 다음의 결과를 반드시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업력은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오는 불공업이 있는가 하면 공동사회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공업이 있다.
이러한 업력은 이 세상에 출생할 때부터 발휘하게 되는데 업력의 사상을 알고보면 그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조심성이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혼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남과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공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개인질서와 더불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인과법은 중생의 질서를 잡아주는데 있다.
이 질서를 유지하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불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유식학에서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믿음(信)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덕성(佛德)을 신앙하고,
둘째는
인간의 청정자성(佛性)과 자연에 포함된 진여성(眞如性)에 해당하는 실성(實性)을 신앙하며,
셋째는
모든 인과는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공능함을 발휘하는 공능(功能)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의 신앙은 인과법칙을 신앙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인과법을 확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신앙하지 않게 되면 행동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거칠면 자신의 불행은 물론 사회에도 불행을 가져다주는 인과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행동은 원인이 되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행해지는 개인과 사회는 결과가 된다.
동시에 모든 삼라만상도 자체의 공능과 진여의 세력이 있음을 신앙하는 것이다.
① 마음의 행위
이상과 같이 인과는 곧 개인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칙이 되는 것이며 그 인과를 조성하고 창조하는 원동력은 마음이다.
마음은 모든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내용은 각양각색이어서 한편으로는 보살심(菩薩心)을 발휘하여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마음인 아집(我執)과 모든 것을 혼자만 가지려는 욕심(我所)이 앞서는 마음이 있다.
아집과 소유욕이 강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제6의식에서 보통 나타나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심층심리에서 충동질하는 제7말나식에 원인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말나식으로부터 보살심을 방해하고 여러 진리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장애하는 무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명은 모든 것이 평등한 진리이며 주관과 객관계가 통일된 본성을 망각하고 나타나는 무지를 뜻한다. 본래 본성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 통할 수 있고 모든 진리와 연결되는 바탕으로서 이기심이 아니라 자비심의 바탕이기도 하다.
이를 무아성(無我性)이라 하며 무아성은 곧 자타(自他)가 없으며 모든 생명체를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불심이다.
이러한 무아를 진아(眞我)라 하며 진아는 나 가운데 가장 참된 나를 가리킨다.
우리는 나라고 할 때 육체만을 나라고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서 나타나는 아집을 앞세우는 나를 말할 때가 많다.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내가 제일이라는 아만(我慢)과 나만을 사랑하는 아애(我愛)를 앞세운 나를 가리키는 때가 많다.
이는 완전히 본래 지니고 있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아치(我痴)의 소산으로서 이를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또 불성 및 진여성에 해당하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심리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아치라고 한다. 동시에 본심에서 반대의 마음으로 돌아서 무지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해서 이를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전도심은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하며 행동하도록 충동질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행위에 따라 육체의 행위도 결정되기 때문에 마음의 수행이 선행하지 않는 한 육체의 행위도 정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마음을 고치도록 하고 그 마음을 고치는데는 염불과 참선을 닦아야 한다는 등 부단한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불과 참선만이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무명과 아집과 아애와 아만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문제는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그 마음의 병은 자신만이 고칠 수 있을 뿐이며 어떤 성자도 고쳐줄 수 없다고 한다.
스스로 무명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수행하여 그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5)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위에서 공업과 불공업의 내용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업력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각자가 찰나찰나 행동을 통하여 조성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업력은 즉각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고 또 미래에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는데 이들 업력이 어디에 보존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
눈(眼識). 귀(耳識). 코(鼻識). 혀(舌識).
몸(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으로 여러 가지 행동을 하며 생활하는데 그 행위로 말마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어디에 보존되었다가 다음에 과보를 받도록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내세운다.
이 아라야식은 인간의 몸(五根)과 인간의 행동으로 조성되는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과 그밖에 인간이 사는 사회까지도 잘 포섭하고 섭지(攝持)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전생의 업종자(業種子)와 자신의 몸(五根)과 그리고 자신이 살게되는 세계(器世間)을 능히 유지시키고 변화시키며, 또 이 세상에 출생한 후에도 자신의 업력을 보존하고 몸과 마음을 유지시켜 주며 동시에 이 세상이 건전하게 유지해 가도록 하는 것은 모두 아라야식이 한다.
출생할 때 몸과 종자와 세간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과능변(果能變)이라고 하며 이를 아라야식의 과상(果相)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생 전이나 출생 후에도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몸과 업력과 세간을 유지시키는 모든 원인을 제공하는 것을 아라야식의 인상(因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부른다.
일체종자식이라는 말은
일체의 사물과 정신계가 성립되는 업력을 제공하고 전달하는 심식(心識)이라는 뜻이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이 종자식은 일체의 선업과 악업인 유루업(有漏業)과 동시에 수행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청정한 업력인 무루업(無漏業)을 모두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종자식은 칠전식(七轉識)이 훈습한 종자를 잘 보존하고 섭지하였다가 인연을 만나게 되면 곧 그 종자로 하여금 그 중생이 사는 현재 생활에 나타나게 하고, 그 중생이 사는 현상계(現象界)도 변현(變現)하게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변현이라는 말은 업력의 주인공이 사는 세계를 스스로의 업력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는 자신이 창조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전생의 업력으로 자신과 사회를 창조하여 나타났고, 또 현재 사는 자신과 사회도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에 의하여 창조되어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모든 주체는 여러 심식 가운데서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이상과 같은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라야연기(賴耶緣起)라고 한다. 즉 모든 정신계와 물질계는 오직 아라야식으로 말미암아 연기(緣起)되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연기라는 말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과 종자는 이에 부합하는 연을 만나서 결과 즉 과보를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연을 만나야 결과를 발생하게 된다.
만약 업력이 연을 만나지 못하면 항상 그대로 아라야식에 보존되게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연은 결과에 대한 역할이 업력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 인(因)과 연(緣)은 과(果)를 가져오게 하는데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반반씩 힘을 가하여 과보가 초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종자가 있다면 그 종자는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발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의 종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업력이고 또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은 연이 된다.
이상과 같이 항상 인과 연이 부합되어야 하는데 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동등하게 역할을 한다. 인만 있어도 안 되고 연만 있어도 안 되며 인과 연과 과가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 못지않게 연도 중요한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 한 사람의 마음과 육체를 청정하게 하는데 그 사회의 환경이 많은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 환경은 그 사람에게 모두 연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인식의 대상인 객관계와 자연계를 연으로 하여 성장할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가 모두 연이 되어 준다.
그리하여 환경은 그 사람이 성장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 속에 있는 아라야식의 종자가 좋게 싹이 트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정교육과 사화교육 등 모든 교육도 연이 되는데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연을 만나 자신의 아라야식에 있는 종자가 잘 자라는 것은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도리는 무궁무진한 진리이며 심오한 경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를 창조라고 한다.
악인(惡因)이 선연(善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선과(善果)를 맺을 수도 있고 반대로 선인(善因)이 악연(惡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악과(惡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는 모두 연기의 도리이며, 동시에 창조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는 아라야식 내에 있는 종자를 여의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모든 것의 총인(總因)이라 하며 동시에 아라야식에 모든 원인이 있다는 뜻으로 인상(因相)이란 별명을 붙이는 것이다.
2)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업력(業力)보존
아라야식은 모든 법을 발생시킬 수 있는 원인을 보존하고 또 원인이 되어 주기 때문에 인상(因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모든 종자를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도 유실하지 않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종자식이라는 별명은 앞으로 과보를 가져올 종자를 보존할 수 있는 심식은 오직 아라야식뿐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종자와 아라야식과 불가분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종자의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종자론이라고 한다.
종자론은
종자와 업력사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으로서, 여기에는 열 가지 설명이 있다.
그 열 가지 항목을 들면
① 출체문(出體門)
② 일이분별문(一異分別門)
③ 가실분별문(假實分別門)
④ 이제분별문(二諦分別門)
⑤ 사분분별문(四分分別門)
⑥ 삼성분별문(三性分別門)
⑦ 신훈본유분별문(新熏本有分別門)
⑧ 구의다소문(具義多少門)
⑨ 쌍변생인이인문(雙辯生引二因門)
⑩ 내외종사연분별문(內外種四緣分別門)
등을 말한다.
이들 열 가지 내용은 종자의 사상을 잘 설명해 주고 또 여러 가지 인연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학설이다. 이들 내용을 모르면 업력과 종자로 말미암아 과보를 초래하는 인과사상을 모를 만큼 매우 중요한 사상이므로 여기에 요약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인과(因果)의 동일성(出體門)
인과의 동일성은 업인의 체성이 뚜렷하여 동일성의 업과를 분명하게 가져오도록 하는 인과사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정의는 ‘모든 종자는 제8아라야식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친히 자과(自果)를 출생시키는 공능(功能)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뜻을 보면 종자는 오직 아라야식에만 보존되는 것이며, 소승부파(小乘剖破)인 경량부(經量部)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 등에 함께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업력은 몸에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야식에만 보존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칠전식에 의하여 조성된 종자는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선인은 선과만을 초래하고 악인은 악과만을 초래하는 등 존자의 세력(功能)이 뚜렷하게 있음을 말한다.
이것을 친히 자과를 초인(招引)하는 공능의 차별이라고 한다.
공능의 차별이라는 말은 업력의 차별이 분명히 있다는 말로서 선업과 악업이 선과와 악과를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함을 뜻한다.
이렇게 인(因)과 과(果)의 성질이 분명하여 여타의 인과와 차별이 있게 하는 종자는 등류인(等類因)과 인연(因緣)과 명언종자(名言種子) 등이다.
이들 업인은 동일한 성질의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숙인(異熟因)과 증상연(增上緣) 등의 업인과 연(緣)은 동일한 과보를 초래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된다. 왜냐하면 이숙인은 선인이 악과를 초래하며 또 악인은 선과를 초래케 하는 등 인(因)과 과(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가령 선인이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뒤에 안과 밖으로 악연(惡緣)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때의 선인은 동일한 성질의 선보를 초래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증상연이 그러한 역할을 많이 한다. 증상연이란 업인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선인에다 선연이 되어 더욱 선과를 가져오도록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선인에 악연이 되어 악과를 가져오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증상연은 광범위한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선인에 악연이 되어 중성적인 악과를 가져오게 하고, 또 악인에 선연이 되어 중성적인 악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이 증상연은 다른 연의 뜻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예를 들면 친인연(親因緣)은 악인과 선인에 대하여 동일한 성질의 연을 가하여 동일한 과보를 받도록 한다. 이와 같이 연의 뜻도 다양하기 때문에 인과의 사상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인과의 도리는 이숙인과 이숙과와 같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자는 변화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하는 출체문은 업인과 결과가 동일한 인과응보를 초래하는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인이 선이면 과보도 선이고, 인이 악이면 과보도 악과이다 라는 인과법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인과 악인은 동일한 과보를 받게 하였으면 그 과보는 비록 선과와 악과의 상태로 나타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보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임을 강조하고 있다.
무기성은 선성(善性)도 아니고, 악성(惡性)도 아닌 성질을 뜻한다. 이들 내용을 전문적으로 표현한 것을 요약하여 보면 업인은 선악이지만, 과보는 무기성(因果善惡, 果是無記)이다 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과보는 표면상으로는 선과 악의 차별이 있지만 그 과보의 내용인 정신의 바탕은 평등하다는 말이다. 정신의 바탕이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각(自覺)의 본성이 있다는 말이며, 자각의 본성이 있는 까닭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면 새로운 경지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근면하게 생활하면 무엇이든지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음을 뜻한다.
(2) 아라야식과 종자와의 밀접한 관계[一異分別門]
종자는 아라야식(Alayavijnana)을 비롯하여 모든 심식과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종자는 인이 되고 식의 현행(現行)은 과가 된다.
여기서 현행이란 말은 현재의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식의 현행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로부터 발생한 결과로서 이를 과라고 한다.
동시에 식의 현행은 또 결과이면서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에 업이 되며, 이 업은 미래의 결과를 가져올 세력을 구비한 채 하나의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에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가리켜
종자는 식의 현행을 발생하고 (種子生現行), 식의 현행(活動)은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내에 훈습하고 보존하게 된다(現行熏種子)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와 심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서 이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리는 아라야식과 종자와의 사이에 더욱 두텁게 나타난다.
아라야식은 본체가 되고 종자는 작용이 되며, 종자는 원인이 되고 아라야식 내에서 의식을 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는 현행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와 아라야식 그리고 종자와 모든 심식의 현행 등의 관계가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불가분리하다.
그런데 이들 종자는 아라야식 안에 있으면서 아라야식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인이 되고, 아라야식의 활동은 결과가 되는 진리가 있다. 아무리 만물의 근본이 되고 또 만물을 창조하는 아라야식이라고 할지라도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도 그 체성은 영원한 진리의 성(性)에 해당하지만 그 위에서 활동하는 범부의 마음은 인과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유루심에 속하기 때문에 무루심이 나타날 때까지는 인과법에 얽매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아라야식 안에 있는 무루종자(無漏種子)는 청정한 수행으로 조성되는 무루종자의 훈습(薰習)으로 말미암아 현행할 때까지는 고요히 보존되어 있게 된다. 무루종자를 훈습한다는 말은 청정한 수행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청정한 업력을 조성하게 된다는 뜻이다.
청정한 업력을 조성하게 되면 이미 보존하고 있는 불성 또는 진여성에 해당하는 무루종자에게 조연(助緣)이 되어서 그 무루종자로 하여금 결과로 나타나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무루종자가 마음에 나타나 마음을 지혜롭게 하고 또 보리심이 무성하게 하여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실현하게 된다.
이것도 역시 이숙(異熟)의 의미가 실현된 경지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아라야식 내에 있는 무루종자는 무루의 조연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루의 부정한 마음에 오염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게 된다.
동시에 유루종자만이 유루심인 아라야식과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면서 찰나찰나 지속하고 있으며 또한 윤회중생을 어디론가 정처없이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무루종자를 부활시켜 깨달음과 안락 그리고 지혜의 생활로 환원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종자의 가실을 밝힘[假實分別門]
유식학에서 업력에 해당하는 종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임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쟁이 많았다.
종자가 임시인 것이며 동시에 가(假)라고 주장한 학파는 공종(空宗)이다.
이들 공종을 대표하는 청변(淸辯)이라는 학자는 업력인 종자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모든 사물은 생겨났다가(生), 잠시 동안 머물러 있게 되고(住), 그리고 변천하여(異), 없어지는 것(滅)과 같기 때문이다.
즉 종자도 생, 주, 이, 멸의 과정을 밟는 것이기 때문에 임시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의 병(甁)은 본질이 있다.
그 본질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등 사대(四大)의 원소(色素)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 같이 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대(四大)의 인(因)에 의하여 만들어진 병은 결과(果)가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본질인 색소와 만들어진 병은 서로 불가분리(不可不二)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병은 무정(無情)이며 동시에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임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법(萬法)의 원인인 종자(種子)도 가법(假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주장한 공종의 논리에 대하여 유식종(唯識宗)에서는
그 논리를 달리하여 일체의 만법은 종자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만법에는 진여성(眞如性)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자와 진여는 불가분리(不一不二)한 관계 속에 만법이 존재하므로 그 종자는 가법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식종의 주장을 더 말해 보면, 만약 종자가 가법이라면 진여도 가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진여가 가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진리라고 내세우는 불성(佛性)과 진승의제(眞勝義諦)와 열반과 성불 등도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을 창조하는 종자는 실유성(實有性)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식종과 공종의 견해 차이가 있어 왔는데, 유식종에서는 종자의 실재(實在)를
주장하며 진여와도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식종은 종자가 실재하는 것이며, 그 종자에 대하여 정신계와 물질계가 연기(緣起)되어지며 또 창조되어진다고 하였다.
(4) 종자(種子)의 진속(眞俗)관계[二諦分別門]
종자는 만물의 원인이 되며 창조의 근원이 됨을 밝히는 것이다.
즉 세상을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진제는 진리적 성(性)을 의미하고 속제는 현상계의 속성(俗性)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두 진제와 속제는 이론상 둘로 표현할 뿐이지 실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眞)은 단독적으로 진일 수 없고, 속(俗)은 단독으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즉 진은 속에 의한 진이고, 속은 진에 의한 속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진제가 성립하면 속제도 성립하고, 속제가 성립하면 진제도 성립한다.
이는 곧 진과 속이 둘이 아님을 말한 것이며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 속에 진리가 운영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들 내용을 예로 표현하면, 마치 손수건으로 토끼를 엮어 만든 것을 토끼라고 하는, 실물의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손수건을 토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손수건은 본질인 진제에 비유하고 토끼의 모습은 속제에 해당하는 현상계에 비유한 것이다. 토끼와 손수건이 둘이 아니듯이 진제와 속제도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만법과 진여가 불가불리(不卽不離)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비유인 것이다.
동시에 종자도 만법과 진여와도 불가불리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5) 마음의 인식작용과 업력(業力)의 보존[四分分別門]
아라야식에는 사분의 작용이 있다.
물론 그밖에 모든 심식에도 사분작용이 있다.
사분이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을 말한다.
이들 사분은 식(識)의 내용과 활동을 분류한 것으로서
상 분은 외부의 현상을 식의 안에서 꼭 같은 모습으로 현상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견 분은 그 상분에 영상으로 나타난 모습을 상대하여 인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자 증 분은 견분의 역할이 틀림없는지에 대하여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뒤에서 증명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 등 심식에는 네 가지 작용이 있는데 이러한 작용 가운데 종자는 어떤 작용에 의지하고 또 보존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는 법상종(法相宗)에서는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이론에 따르고 있다. 호법의 이론에 따르면 종자는 사분(四分) 가운데 자증분에 포섭(包攝)된다고 하였다.
선업종자와 악업종자 등 온갖 종자는 식의 중심인 자증분에 보존되었다가 다시 의식(意識) 등 여러 심식을 통하여 온갖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만물이 생각 속에 떠오르게 되며 또한 육체적인 행동까지도 야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종자는 아라야식의 자체(自體)에 해당하는 자증분에 의존하였다가 연(緣)을 만나면 즉시 상분에 나타나게 되며 의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마음의 현상은 상분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나타나는 모든 삼라만상은 상분에 포섭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분은 객관계의 현상을 나타내주는 의식 속의 객관계이며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의 삼라만상도 상분을 통하여 의식 속에 나타나며 의식 속에 나타난 모든 영상을 견분이 견조(見照)하여 선악을 구별하고 고락을 감지하게 도니다.
그러므로 아라야식 가운데의 모든 종자는 현상계의 사실로 나타난다고 볼 때 그 소재처(所在處)는 상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상분은 식체(識體) 안에서 견분의 반연처이면서 또한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루종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루종자는 어디에 보존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말한 종자는 선악의 행위에 의하여 조성된 유루종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청정하지 못한 유루종자가 유루식(有漏識)의 주체인 아라야식에 보존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청정무구한 행위에 의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어디에 보존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유루식과 무루종자의 성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무루종자는 염오(染汚)된 아라야식에 의존하지 않고 아라야식의 체성(體性)에 의존하여 보존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의 현상(現相)은 유루식이지만 본래 지니고 있는 체성은 곧 진여성이며 또한 불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유식종에서는 유식성이라고 부르는데 이 유식성은 곧 진여성으로서 식의 실성(實性)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부정한 마음에 해당하는 유루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히 본성(本性)이 되는 실성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유식의 실성과 무루종자는 그 성질이 같고 또 잘 융화가 되기 때문에 모든 무루종자는 유식성에 의존하며 보존하게 된다.
무루종자가 유식성에 보존되었다가 만약 청정한 수행으로 무루(無漏)의 마음이 나타나면 청정한 견분인 정견(淨見)을 나타나게 하고 또 청정한 상분을 나타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만약 무루위(無漏位)에 오르면 염오성(染汚性)이 퇴치되고 식의성(識性)인 무루성이 청정한 사분에 해당하는 정분을 야기하게 된다.
이때의 무루종자는 무루견분(無漏見分)과 무루상분(無漏相分)을 야기시키는 힘이 되며 무루의 견분은 또 무루의 상분을 상대로 관조(觀照)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유루종자는 유루(有漏)의 아라야식의 자증분에 보존되어 있다가 상분을 통하여 정신계의 현상을 나타내며 식의 성에 보존되어 있다가 수행자의 무루심을 통하여 무루의 견분과 무루의 상분으로 나타나게 된다.
(6) 선악종자와 무루종자의 보존[三性分別門]
아라야식 안에는 선(善)의 업력과 악(惡)의 업력 그리고 무기(無記)의 업력이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업력(業力)인 종자가 아라야식 안에 보존되어 있는데, 무루의 종자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매우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선의 종자와 악의 종자 그리고 무기의 종자 등 이른바 삼성종자(三性種子)는 그 성질이 변하여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이숙종자(異熟種子)이다.
그러므로 이들 세 가지 성질을 가진 종자들은 아라야식의 별명인 이숙식에 능히 보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숙식은 무기성(無記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숙무기성(異熟無記性)인 이숙식에는 선, 악, 무기 등 삼성종자가 보존되어 있다가 앞으로 연을 만나게 되면 그 결과로 나타나며 또한 과보를 받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을
섭용귀체문(攝用歸體門)과
성용별론문(性用別論門) 등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섭용귀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라야식은 체(體)이고 종자는 용(用)이다.
유루종자는 유루식인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서로 다르지 않으므로 피차의 성질과 종류(性類)가 함께 유루에 속한다. 유루라는 말은 번뇌가 있고 선과 악의 종자에 의하여 선악의 과보를 받는 등 변화무쌍한 염오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청정치 못한 부정의 성질을 유루라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과 종자는 꼭같이 유루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으며 동시에 종자는 용(用)으로 포섭되어 삼체(體)인 아라야식에 귀의(歸依)하여 무기성에 섭장(攝藏)하게 된다.
둘째,
성용별론문은 종자인 작용(用)과 제8아라야식인 체(體)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 내용을 말하면 능히 활동하면서 종자를 훈습하는 칠전식(七轉識)과 종자로부터 출생하는 현재의 행위(現行)가 선악 등 삼성(三性)에 서로 통하므로 종자도 동일하게 선과 악과 무기성에 통한다.
그러나 무루종자의 체성은 오직 선(唯善)뿐이다.
이 선은 곧 절대선(絶對善)을 뜻하며 절대선을 수행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선과 악이 상대되는 상대선(相對善)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같은 선이라 할지라도
상대선은 유루선이라 하고
절대선은 무루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절대선에 의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그 성질이 독특하여 유루성이 있는 아라야식의 상분에 보존되지 않고 무루성인 아라야식의 성(性)에 보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루종자는 무엇이든지 정화할 수 있는 능대치(能對治)의 성질을 갖고 있으나 아라야식의 인과성(因果性)은 오직 무기성이며 동시에 정화되어야 할 소대치(所對治)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루종자는 일반적인 선악업종자와는 달리 아라야식의 이숙무기성에 보존되지 않고 아라야식의 청정무구한 진여성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서 모든 업종자가 비록 아라야식에 보존된다고 하도라도 무루종자와 유루종자와의 보존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일리있는 학설이며 동시에 진리에 맞는 논리인 것이다.
(7) 선천적인 업력과 후천적인 업력[新熏本有分別]
위에서 업력의 보존관계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들 업력과 종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여 그 업력의 지배하에 중생이 윤회하고 또 과보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중생 각자가 이승에 출생하면서 후천적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업력이 조성되어 있는 것에 의하여 중생들이 업보를 받고있다고 한다면 이는 숙명론 또는 운명론에 떨어지는 인과사상이 될 것이다. 반대로 이승에 출생하여 비로소 업력을 조성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 업력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면 전생에서 금생에 출생하기 전까지의 업력을 어디서 구하느냐가 문제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많은 논쟁을 벌여왔는데 고래로부터 있어왔던 학설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가) 호월(護月)논사의 본유설(本有說)
먼저 인도의 학자인 호월논사(護月論師)는 업력이란 새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며 본유설(本有說)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은 아라야식에 본래부터 보존되어 있는 것이며 그 업력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업력은 새로 조성된 것이 아니며 설사 새로운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미 보존된 종자에 조력하여 현실의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증상(增上)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행동은 과거의 업인을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조연(助緣)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호월논사는 만약 종자가 새로 생긴다면 동일한 종자가 많이 생기게 되며, 인(因)은 많이 생기는데 과보는 하나(多因一果)밖에 되지 앟는 비진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인과법이 문란해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래의 종자(本有種子)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이 없는 과보(無因果報)를 초래하게 되고 또 보살도적인 수행을 하여도 청정한 지혜인 무루지(無漏智)의 발생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무루지와 불성과 같은 진리의 성품이 보래부터 보존되어 있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월논사의 업력사상은 업력이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운명론에 빠질 우려가 많다.
나) 난타(難陀)논사의 신훈설(新熏說)
다음으로 난타논사(難陀論師)의 신훈설(新熏說)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신훈설은 글자 그대로 업력과 종자는 본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 출생하여 새롭게 훈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종자란 옛적부터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것이므로 행동이 있는 한 종자도 새로 훈습되며 조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자는 태초부터 찰나찰나 조성되는 것이며 또 무루의 종자도 역시 수행과 포교 그리고 보살도에 의하여 찰나찰나 훈습되고 조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훈설은 너무나 현실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없지 않다.
다) 호법(護法)논사의 합성설(合成說)
다음은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신구합성설(新舊合成說)을 살쳐보기로 한다.
호법논사는 앞에서 말한 종자의 본유설(種子本有說)과 신훈설(新熏說)을 종합하여, 종자는 본래 보유한 것도 있고 새로 훈습하여 조성되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만약 본래 보존되어 있는 종자와 새로 훈습되는 종자가 없다면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정신계인 칠전식과 아라야식과의 인과관계가 없어지게 되므로 이는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자가 새로 훈습되어 조성되고 본래 보유하고 있는 종자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도 유루심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유루종자가 무루종자를 발생하는 모순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호법논사는 무루종자를 비롯한 여러 선악업종자가 이미 보존되어 있다가 금생에 나타날 수도 있고, 또 찰나찰나의 행동에 의하여 훈습되는 종자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호법논사의 업력사상은 중국과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으며 이를 옛적부터 정설로 믿어 왔다.
말하자면 업력은 전생에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금생의 연을 만나 과보를 받고 또 아직도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업력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업력은 이승에 출생하자마자 다시 의식활동을 통하여 새롭게 조성해 나가며 자신을 찰나찰나 개선해 가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종자의 보존상태를 알아보았다.
종자는 아라야식에 선천적으로 이미 보존된 것도 있고 후천적으로 새로 조성되는 것도 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로 되어 왔다. 그리하여 중생들은 전생에 지은 업력을 아라야식에 보존하여 이승의 과보를 받게 되었고 또 아직도 남아있는 유루종자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루종자는 친인연(親因緣)과 증상연(增上緣) 등 여러 인연을 만날 때까지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인 진여성(眞如性)에 보존하게 된다. 무루종자는 수행하는 불자들에게 내적인 친인연이 되어 무루의 실천으로 나타나게 하고 심지어는 성불(成佛)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유루종자는 중생들로 하여금 현생에서도 악한 과보(惡報)와 고통을 받게 하고 그리고 일시적인 선보(善報)와 안락한 생활만을 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중생은 본래 지니고 있는 여러 종자의 힘에 의하여 선악의 행동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 행동은 또 새로운 종자를 훈습하고 조성하는 인과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본래 보존된 것도 있고 또 찰나찰나 새롭게 조성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업력사상에 의하여 인간의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도 있지만, 그 성질이 새롭게 개선되고 발전하는 가능성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종자의 성질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3) 종자(種子)의 성질과 육의(六義)
종자는 곧 업력의 뜻이며 업력은 인간의 행위를 비롯하여 중생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다는 것을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조성된 종자는 미래의 과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데
그 종자의 내용에는 여섯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여섯 가지 의미는
첫 째, 종자는 찰나찰나 생멸을 반복할 수 있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둘 째, 종자는 미래의 결과를 발생하면서 그 결과와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셋 째, 종자는 항상 지속적이면서 발전적이어야 한다.
넷 째, 종자는 선악의 성질이 분명하여야 한다.
다섯째, 종자는 여러 인연을 기다렸다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
여섯째, 종자는 자신의 성질과 꼭 같은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종자는 여섯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종자육의(種子六義)라고 한다.
이들 종자육의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찰나 생명의 성질[刹那生滅義]
종자는 찰나에 생멸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윤회의 법과 그리고 유위(有爲)의 법은 찰나에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찰나생멸(刹那生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종자는 무상하게 변화하는 사바세계와 중생의 선과 악 또는 고통과 안락 그리고 생과 사 등의 현상계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찰나찰나 생과 멸을 되풀이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생멸의 법을 창조하는 만법의 종자는 그 자체도 생멸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식학의 주장이다. 만약 생멸이 불가능한 종자라면 찰나에 생멸하는 만법을 발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찰나에 생멸하는 종자만이 만법을 연기(緣起)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진여법(眞如法)과 무위법(無爲法) 등 상주하는 불생불멸의 진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주불변의 무위법은 무루종자만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동시의 인과[果俱有義]
인과가 동시에 존재하여야 한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과구유(果俱有)라고 한다.
아라야식 내의 종자는 인간의 정신계와 육체의 행동을 능동적으로 발생하는 능생(能生)의 원인이다.
능생의 원인에 의하여 발생되는 결과도 동시에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현재의 행동과 현상을 발생하는 종자임과 동시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행동과 현상은 바로 결과가 되며, 이 결과는 또 다시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안에 보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종자에 대해서 결과가 되며, 동시에 업력이며 종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과 동시의 연기법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과구유라 한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만약 앞에 훈습된 종자가 시간의 간격이 있게 되면, 그 종자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비진리적인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는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리고 전후가 없는 현재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3) 동일한 성질의 유지[恒隨轉義]
종자는 반드시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 보존되어야 한다.
이를 항수전(恒隨轉)이라고 한다.
항수전은 앞과 뒤의 변화가 없이 항상 그 성질을 유지시켜 가면서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지속성이 없다면 인과의 도리에서 벗어나 원인없는 결과(無因有果)를 초래하는 인과의 무질서를 가져올 우려가 있게 된다.
그리고 원인은 있어도 결과가 없는 유인무과(有因無果)의 잘못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자는 제8아라야식 안에서 영원히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지속성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그 종자를 잘 보존하는 지종(持種)의 뜻을 살려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여러 식 가운데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고 하며 다른 식들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가령 제7말나식은 최고의 수행위인 금강심위(金剛心位)에 오르면 염오식(染汚識)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전5식(前五識)은 항속(恒續)의 의미가 없어지며, 제6의식은 오위무심(五位無心)의 경우에 단절되는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말식(枝末識)은 종자를 지속시키지 못하는 흠이 있게 된다.
오직 아라야식만이 종자를 보존할 수 있고, 또 그 종자는 선의 내용과 악의 내용 등 자체의 성질을 변함없이 지속시키는 이른바 일류상속(一流相續)의 성질을 갖도록 하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4) 성질의 분명성[性決定義]
종자는 아라야식 가운데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잡란(雜亂)치 않고 일정해야 한다.
이를 성결정(性決定)이라고 하며 종자는 성질이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전7식이 활동하고 현행(現行)하는 내용이 선행(善行)이라면, 이 선행의 업력이 아라야식 안에 보존될 때도 선성(善性)의 종자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동의 성질과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훈습되어지는 종자도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삼성(三性)의 성질 가운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던 간에 그 성질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어야 함을 뜻한다.
(5) 조연의 기대[待衆緣義]
종자는 위에서 말한
찰나멸(刹那滅), 과구유(果俱有), 항수전(恒隨轉), 성결정(性決定)
등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종자에 대한 조연(助緣)이 없으면 결과를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자든지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으면서 연(緣)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유식학에서는 대중연(待衆緣)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因)은 연(緣)을 만나야 과보를 발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 연은 바로 만날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만나기도 하여 그 연이 도래할 때까지의 그 인의 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과 연이 화합하여야 과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를 발생하는 데는 인만이 단독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도 과에 대해서 인 못지 않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관찰할 때 인(因)과 연(緣)은 과(果)에 대해서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연의 내용을 보면 안으로는 여러 심식을 비롯하여 경각심(警覺心) 등 작의(作意)의 정신작용(心所)과 심식의 의지처인 근(所依根)과 그리고 인식의 대상이며 객관세계에 해당하는 육경(六境) 등이 모두 연에 해당한다.
이들 연은 아라야식 내에서 종자들끼리 서로 연이 되어 생동하고 있는데, 이들 인을 상대로 하여 결과를 발생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연은 인에게 조력하여 과보를 받도록 하는 역할을 하며, 그리고 연은 인과 과와의 관계를 매우 밀접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타종교에서 오직 하나만의 원인(原因)이 다른 연의 도움없이 즉흥적으로 결과를 발생한다는 이론을 배격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발생적인 창조설을 부인하고 유일신(唯一神)적인 창조설에 해당하는 일원론(一元論 )을 배격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6) 종자와 과보의 동질성[引自果義]
종자에는 각각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여러 성질의 종자가 있다.
이러한 종자의 성질에 따라 결과의 성질도 동일하게 정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말하여 인자과(因自果)라고 한다.
인자과라는 말은 선의 종자는 선의 과보를 받도록 하고 악의 종자는 악의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성격의 결과를 초인(招引)함을 인자과라 한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은 여러 가지 성질의 종자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현상계의 모습과 개체를 조성하고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종자는 만유(萬有)의 제법을 창조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일한 원인이 만물을 창조한다는 외도(外道)들의 삿된 사상을 배격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불교 이외의 종교와 사상을 외도라고 하는데, 이 외도들은 우주 안에는 유일신이 삼라만상을 창조하였다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 하나의 원리(一因)가 다양한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배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안에 있는 삼라만상이 유일신에 의하여 창조되었거나, 또는 유일한 원리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일인(一因)이 많은 결과(一因多果)를 창조하게 되는 비진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인다과설을 배격하고 다인다과설(多因多果說)을 주장하는 것이 곧 불교의 인과설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종자의 성질은 다양한 것이며 동시에 다양한 결과를 발생시키고 또 창조하는 원동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종자는 반드시 위에서 설명한 여섯 가지 의미(種子六義)를 구비하고 있다고 한다.
4) 만법(萬法)은 유식(唯識)
위에서 종자에 대한 여섯 가지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종자에는 내종(內種)이 있고 또 외종(外種)이 있다고 한다.
내종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종자로서 위에서 설명한 육의(六義)를 구비하고 있는 종자를 말하고 외종은 자연계에 생성하고 있는 곡식(穀麥) 등을 말한다.
이들 외종은 아라야식에서 발생한 공종자(共種子)를 의미하기 때문에 종자의 육의(種子六義)를 구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계(八識界)를 떠나 밖에 있는 종자라고 하더라도 아라야식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계의 외종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공종자에 의하여 변현(變現)되고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인간의 정신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종자란 말은 자기 혼자만의 이용물이 아니고 여러 중생과 더불어 공동으로 이용하는 사물과 환경을 발생하는 종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진실한 종자(實種子)가 아니다.
그러므로 공종자는 우선 가명으로 종자라고 할 뿐이며 실제의 종자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종자는 결과에 대하여 북돋아 주는 증상연은 되어도 직접 결과를 발생시키는 친인연의 역할은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종자의 육의가 구비한 종자만큼 직접적인 역할을 못하고 간접적인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단변(單變)과 중변(重變)이라는 말이 있게 된다.
단변은 친히 변현시키는 친소변(親所變)의 상분(相分)에 해당하며 이 상분은 또 제8아라야식의 상분으로서 이를 내종(內種)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상분은 내종에 해당한다.
이러한 아라야식의 내종은 직접적인 아라야식의 상분을 변현하기 때문에 이를 단변(單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이 단변에서 다시 변현하여 외부의 현상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이를 중변(重變)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는 외부의 현상계를 변현시키는 종자라는 뜻에서 외종(外種)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에는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이 있고 또 밖으로 결과를 발생할 때도 이중적인 변화를 얘기하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여 단변 또는 중변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 종자도 자신의 수용물을 발생하는 것을 불공종자(不共種子)라 하고 동시에 여러 중생들이 함께 수용하는 사물과 자연계를 발생하는 종자를 공종자(共種子)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을 달리 분류하여 내종과 외종으로 분류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종자에 대한 논리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진리를 설명하고 또 확인시키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5) 생명체와 물체를 이끄는 업인(業因)
내종(內種)과 외종(外種) 그리고 단변(單變)과 중변(重變)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생인(生因)과 인인(引因)도 단변과 중변의 내용과 흡사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생인과 인인은 또 다른 독특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생인에 대해서 말해 보면 글자 그대로 결과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 생인으로부터 발생하는 결과(果)는 여러 가지 과보 가운데 가장 근본을 이루는 과보로서 이를 근과(近果)와 정과(正果)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무성논사(無性論師)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비유하여 생인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생인은 십이연기 가운데 식(識)을 발생하는 업인이 되는 것이며 이 식을 근과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금생에 출생하는 식이 전생의 생인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또 가장 가까운 인연관계를 맺고 있는 결과라는 뜻에서 말한 것 같다.
세친논사(世親論師)는 이를 정보(正報)라고 하였으며 식물에 비유하면 곡맥(穀麥) 등이 종자에서 직접 발생하기 시작한 그 자체를 생인이라고 하였고 동시에 이는 내종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아무튼 이 생인이라는 것은 종자 자체가 발생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내종이라 하고 같은 결과이지만 종자와 근접한 것을 근과 또는 정보라고 한다.
다음 인인은 앞에서 말한 근과와 정보라는 것과는 달리 원과(遠果) 또는 잔과(殘果)를 발생하는 업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인을 외종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이 출생할 때 최초로 태어나는 생명체를 정보라 하고 그 위에 이목구비 등 여러 형상이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발생시키는 종자의 이름도 별명이 있게 되는데, 정보를 발생한 종자를 생인이라 한다면 별보를 발생시키는 종자의 힘을 인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인에 의하여 발생되는 별보를 원과 또는 잔과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곡맥(穀麥) 등이 발아하여 그로부터 성장하는 줄기, 가지, 잎, 꽃 등은 모두 인인에서 발생하여 성장하며 이들을 말하여 원과, 잔과 또는 별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인을 외종이라고도 부른다. 그 뜻은 내부의 과보보다 외부의 과보를 발생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인인은 더욱 확대 해석되어 외부의 세계에 나타나 있는 모든 사물까지도 유지시켜 주는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것은 세친의 주장으로서 가령 외부에 있는 수목이 수명이 다하여 고목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고목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으면서 점점 썩어질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식목이 다 없어질 때까지 무엇이 유지시켜 주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체는 유루의 업력에 의하여 존재하고 유지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친논사는 수명이 다한 고목도 인인에 의하여 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초목들은 생인과 인인에 의하여 생존하며 고목과 같은 것은 인인에 의하여 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시체와 다른 잔재가 일시에 없어지지 않고 점차 부패되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은 인인의 힘에 의하여 그 몸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종자론(種子論)에서 일체의 삼라만상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에 의하여 창조되어지고 또 유지된다는 말을 더욱 보충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만을 중심하여 설명하면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은 물론 수명이 다한 시체와 고목 등 목석도 종자의 인력(引力)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1) 불공종자(不共種子)와 공종자(共種子)
종자는 내종(內種)과 외종(外種)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생인(生因)과 인인(引因)으로도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 종자를 불공종자와 공종자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내종과 외종 등의 역할과 흠사한 점이 없지 않으나 좀더 자세하고 광범위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과보와 공동의 과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불공종자(不共種子)의 내용을 보면 불공종자는 글자 그대로 공동의 업력이 아닌 개인적인 업력으로서 자신만이 과보를 받고 또 자신만이 수용하고 이용하는 과보를 받게 하는 종자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신계는 말 할 것도 없고 적어도 몸의 과보를 받게 하는 종자를 불공종자라고 한다.
다음 공종자(共種子)는 공동사회와 공유물을 창조하는 종자를 뜻한다.
중생이 어디에 출생하든지 그곳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게 된다. 다른 생명체와 같이 살 때는 공동으로 생활하는 사회가 있고 또 공동으로 활용하는 사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공동의 사회와 공동의 물체 그리고 공동의 자연계는 무엇이 창조하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는 각자의 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이다. 중생 각자의 몸은 업력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여지는데 공동의 사회와 자연계 등 공유물의 연기(緣起)설은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공동의 사회와 공동의 사물은 공동의 업종자(業種子)에 의하여 유지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진리에 입각하여 종자설도 확대 해석하게 된다. 왜냐하면 종자란 마음을 중심한 행동에 의하여 창조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하여 유지되는 업력과 종자는 스스로 몸을 포함한 공동의 사회까지도 유지시킬 수 있어야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종자를 논할 때 종자는 모습이 있는 과보와 결과를 창조한다고 해서 모습과 직결시켜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공상종자(共相種子)와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 등이 그것이다.
즉 상(相)은 모습을 뜻하며 그 모습은 만유의 모습을 유지시키는데 바탕이 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종자에게 모습의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들 종자에 대한 자세한 분류를 보면
불공상(不共相)은 불공중공(不共中共)과 불공중불공(不共中不共)
등으로 분류하여 세계와 사물을 창조하는 원리로 설명한다.
이러한 분류들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과 동물이 의지하고 사는 사회와 사물의 성질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설명하고자 한 종자의 이론인 것이다.
이제 종자의 각 분류대로 설명해 보기로 한다.
(2) 불공중불공종자(不共中不共種子)
이 불공중불공종자는 종자의 성질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고 미세한 위치에 있다. 이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공동의 것이 아닌 중에서 또한 공동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자기 혼자만의 소유물을 창조하는 종자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의 것이라고 하면 인간의 정신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 육체가 포함될 수 있으나 외부의 육체는 남에게 고용될 수 있으므로 포함시키지 않고 육체 가운데서도 육체의 본질인 승의근(勝義根)에 해당하는 것까지는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승의근은 육체의 본질이며, 무형(無形)의 육체이기 때문에 남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정신계와 같이 오직 자신만이 소유하며 사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공중불공종자는 인간의 정신계와 육체의 본질인 승의근까지를 발생하고 또한 창조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3) 불공중공종자(不共中共種子)
이 불공중공종자는 위에서 살펴본 불공중불공종자보다는 약간의 외형을 형성하는 업력을 뜻한다. 이를 인간에 비유한다면 우리 자신의 신체를 의미한다.
육체는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만이 이용하고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남에게 고용될 수도 있는 몸이기 때문에 공유물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공동의 것이 아니면서도 공동의 것이기 때문에 이 몸을 창조하는 종자의 성질도 불공중공종자(不共中共種子)라 이름 붙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즉 인도의 유식하자인 안혜논사(安慧論師)는 피부에 해당하는 부진근(扶塵根)은 물론 승의근까지도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변현(變現) 또는 창조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호법논사(護法論師)는 사람의 피부 등으로 이루어진 객관계의 육체는 고용인이 노비(奴婢)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변현되거나 창조되지만, 지. 수. 화. 풍(地 . 水. 火. 風) 등 사대(四大)로 창조된 육체의 성질인 승의근만은 고용주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또 사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불공중불공종자의 창조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른바, 외부의 육체에 해당하는 피부 등 부진근만이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되고 승의근은 불공중불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4) 공중불공종자(共中不共種子)
이 공중불공종자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제외하고 그밖에 대지위에 있는 가옥과 전답 등을 발생하고 형성하는 업력을 뜻한다.
이 말은 모든 생명체와 공동으로 소유하는 자연 가운데서도 개인의 소유가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넓은 자연이라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누구에게나 소유할 수 있는 몫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공중불공종자라는 종자설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이다.
(5) 공중공종자(共中共種子)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은 후천적으로 개인소유도 있지만 영원히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의 소유가 많다. 산과 들과 바다 그리고 공기와 물 등 산하대지는 영원히 공동의 소유물인 것이다.
이러한 공동의 소유물을 유지하는 업력사상이 곧 공중공종자(共中共種子)사상이다.
이는 산하대지가 한 중생의 업력에 의하여 모두 유지된다는 뜻이 아니라 일부분을 유지시키는 몫을 가지고 나왔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가히 셀 수 없는 뭇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의 업력에 의하여 지구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상에 사는 중생들의 업력이 악하면 지구의 자연상태도 악화되어 그 생명체들이 살기에 불편하도록 환경이 조성된다. 반대로 지구상의 생명체가 업력을 선하게 발생하면 지구의 자연상태는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가 살기 좋도록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축소하여 보면 우리 주변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으로 종자의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그 가운데 종자가 각자의 몸과 마음을 변현하고 또 창조하는 핵심 세력이 된다는 것은 인과응보사상에서 많이 말하는 내용이지만, 인간외의 객관 세계까지도 종자에 의하여 유지되고 건설된다는 학설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론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상을 포함하여 만법(萬法)은 유식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종자가 이 세계에 보탬이 되고 세계를 유지시키는 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그 이치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 칸에 수백 개의 전등이 있다고 하자 그 방에 새로운 전등을 하나 더 켰다고 해서 별로 그 밝음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그 방에 한 전등이 꺼졌다고 해서 별로 그 밝음의 차이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도 공업(共業)을 발휘하면서 이 세상에 한 사람이 태어나거나 아니면 사망할 때, 그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그렇게 알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를 생각하면서 공업설(共業說)을 이해한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6) 훈습을 받는 마음과 훈습을 하는 마음 [所熏과 能熏]
위에서 여러 가지 종자설을 살펴보았다.
종자는 미래의 결과를 가져올 원인으로서 매우 다양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자가 아라야식 내에 보존되어 있다가 인연을 만나면 즉각 현실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유루와 무루, 선과 악 등 종자가 아라야식 안에 안주(安住)하고 있다가 수시로 외부와 내부의 연의 도움(助緣)을 받아 현실 생활 위에 다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결과는 과거에 익혔던 지식과 습관 등을 말하며 이는 곧 새롭게 전개되는 정신의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곧 훈습에 의하여 조성된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또 훈습(薰習)의 논리가 전개된다.
훈습의 논리는 아라야식과 그밖의 칠전식(七轉識)과의 관계를 논리화한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식(眼識)은 색경(色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이식(耳識)은 성경(聲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등 모든 식(諸八識)은 제각기 인식의 대상을 상대로 하여 활동하는 것을 훈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心)을 팔식(八識)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유식학은 팔식의 활동이 서로 마찰하지 않고 충분히 활동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면을 설명하고자 훈습설을 전개하고 있다.
유식학의 훈습설에 의하면 팔식의 활동은 훈습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훈습은 종자와 업을 조성하는 산모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팔식의 내외의 활동이 곧 종자를 조성하는 훈습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여 훈습에 대한 내용을 현실성 있게 해석하게 된다.
즉 우리 인간이 정신을 통하여 지식을 익히고 배우며 개발하는 것을 생활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을 살펴서 훈(熏)은 개발(開發) 또는 유치(由致)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발은 전에 없었던 지식과 사상, 정신 그리고 육체적인 기술과 습관성 등을 새롭게 개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개발된 내용들은 하나도 유실하지 않고 미래의 지식과 사상 그리고 기술로 나타날 수 있는 종자로서 아라야식에 보존시키게 된다.
이러한 종자를 신훈종자(新熏種子)라 한다.
동시에 이 개발은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지식과 사상 및 기술과 같은 원인종자(原因種子)를 돕는 조연(助緣)이 되어 현실의 정신생활 속에 발생하도록 한다는 뜻도 있다.
다음 유치(由致)의 뜻도 이미 보존되어 있는 아라야식 내의 종자를 밖으로 유치하여 현실생활에 현행(現行)의 상태로 표현되도록 하는 역할을 말한다.
이와 같이 개발과 유치의 뜻은 현재의 정신생활과 밀착된 뜻을 지니고 있다.
다음 습(習)에 대한 뜻을 살펴보기로 한다.
습의 내용에는 생(生), 근(近), 삭(數)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부언하면, 습은 익힌다는 뜻으로서 종자를 아라야식 내에 새롭게 조성하되 시시각각 자주 익힌다는 뜻에서 삭(數)이라 하며 전체의 뜻을 종합하여 자주 훈습함을 말한다.
그리고 근(近)은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로 하여금 시간적으로 즉시 훈습한다는 뜻이다. 끝으로 생(生)은 아라야식 내에 있는 종자를 결과로 발생케 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수, 근, 생의 뜻을 종합하여 보면 종자를 자주(數) 훈습하고 동시에 그 종자로 하여금 바로(近) 발생(生)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훈습의 뜻에는 매우 현실성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자의 훈습에는 밖으로부터 훈습되어지는 종자가 있는가 하면 안에서 밖으로 발생하는 훈습의 뜻도 있는 것이다.
즉 밖에서 안으로 훈습되어지는 것은 곧 아라야식을 말하고 그 종자를 능동적으로 훈습하는 심식은 칠전식이다.
그렇다면 종자의 훈습을 받는 아라야식은 어떠한 내용으로 훈습을 받게 되며 동시에 훈습을 하는 칠전식은 어떠한 내용이 있어 훈습을 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심식의 활동을 말하여 소훈식(所熏識) 또 능훈식(能熏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종자의 훈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식을 소훈식이라 하고
이와 반대로 능동적으로 종자를 훈습하는 식을 능훈식이라 한다.
이와 같이 종자의 훈습 내용을 분류하여 소훈식 또는 능훈식으로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들 별명들을 팔식에 관계시켜 보면 아라야식은 소훈식이 되고 그밖에 말나식 등 칠전식은 능훈식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훈식과 능훈식은 무조건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소훈사의(所勳四義)와 능훈사의(能熏四義)로서 설명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훈습을 받는 마음 [所熏識]
소훈식(所熏識)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훈습을 받는다는 뜻이 있다.
이는 칠전식이 훈습하는 종자를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훈습을 받는 입장을 뜻한다. 이와 같이 종자와 업력의 훈습을 받는 심식에는 반드시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에는 다른 식에 구비할 수 없는 네 가지 조건(四義)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네 가지 조건 즉 사의(四義)는
첫째, 견주성(堅住性) 둘째, 무기성(無記性)
셋째, 가훈성(可熏性) 넷째, 화합성(和合性)
등을 말한다.
아라야식에는 이와 같은 네 가지 뜻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칠전식의 훈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훈처(所熏處)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종자가 육의(六義)를 구비하였기 때문에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들 네 가지 뜻은 다음과 같다.
가) 견주성(堅住性)
견주성의 뜻은 윤회하기 시작한 태초(太初)부터 번뇌망상이 해탈되는 구경위(究竟位)에 이르기까지 성질이 변하지 않고 일류상속(一類相續)한다는 뜻이다.
일류상속은 일류(一類)는 곧 견(堅)을 뜻하며, 상속(相續)은 주(住)를 뜻한다.
이 말은 훈습을 받는 곳(所熏處)은 그 성질이 견고하며 지속적으로 안주(安住)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어야 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훈습된 종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안보(安保)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훈습처인 아라야식이 수시로 변질한다면 그 곳에 훈습되어 포장(包藏)된 종자는 안주하지 못하게 되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이는 보살수행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견도(見道)의 수행위에 오를 때 유루종자는 점점 없어지고 칠전식의 번뇌도 정화되어 무루식으로 변질하게 된다. 그러나 오직 종자의 훈습처인 아라야식만은 최후까지 윤회의 주체로서 지속하며 또 성불(成佛)할 때 까지 유루업을 지속시켜 준다.
그러므로 아라야식만이 종자의 훈습처가 되고 또 윤회의 주체로서 자격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교설은 소승불교의 경량부 등이 업력은 몸과 마음애 같이 훈습(色心互熏)하게 된다는 이론을 배척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나) 무기성(無記性)
아라야식과 같은 소훈처는 반드시 모든 종자를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성질을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성질은 무기성(無記性)이어야 한다. 무기성은 선성과 악성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성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기성인 아라야식은 선업과 악업 등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훈습되어 오는 종자들을 모두 공정하게 받아들이는 장소에 적합한 것이다. 이는 다른 심식들이 선과 악에 치우치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특성인 것이다.
만약 훈습을 받아 저장하는 장소(所熏處)가 이미 선성이거나 악성이었다면 선악업을 공정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장소가 되고 만다.
예를 들면 어떤 장소에 독한 향기가 이미 배어 있다면 그 장소에는 다른 향기가 안착할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배격되고 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의 훈습처는 오직 무기성이어야 하며 그 무기성을 지닌 심식은 오직 아라야식뿐이라고 한다.
여기에 모든 종자는 자재하게 훈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 가훈성(可熏性)
가훈성(可熏性)은 어떤 종자든지 훈습 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견밀성(堅密性)과 대조하여 하는 말이다.
견밀성이란 무엇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견고하고 밀착된 성질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견밀은 마치 암석과 같은 것에 물을 부어도 잘 젖지 않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훈습을 받는 장소는 견밀성이 아닌 가훈성으로서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라) 화합성(和合性)
화합성(和合性)은
소훈식인 아라야식이 능훈식인 칠전식과 어떠한 경우라도 마찰없이 화합하는 것을 뜻한다.
아라야식과 칠전식은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 이탈하거나 마찰없이 중도적으로 부즉불리(不卽不離)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다른 쪽의 훈습과 시간이 다른 전후의 간격이 있는 훈습은 받지 않는다.
만약 훈습을 받는 장소(所熏處)가 안식 내지 말나식 등 칠전식과 화합하지 못하게 되면 정신의 문란과 인과의 질서가 파괴되며, 또 다른 사람의 업과(業果)를 받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소훈처인 아라야식은 다른 지말식들과 항상 화합하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른 식들의 훈습을 받는 장소로서의 아라야식은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2) 훈습을 하는 마음 [能熏處]
능훈식(能熏識)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능히 훈습을 하는 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팔식 가운데서 아라야식을 제외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등 칠전식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면서 선업과 악업 등 온갖 업력을 아라야식을 상대로 능히 훈습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전식(轉識)이라는 말은 심식의 성질이 선 또는 악 등으로 시시각각 전변(轉變)하고 변화하며 또 여러 작용을 전생(轉生)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게 여러 가지 성질로 활동하는 마음을 전식이라 한다.
이러한 칠전식을 능동적으로 훈습하는 심식들이라고 해서 능훈식(能熏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 능훈식들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뜻을 구비하여야 능히 훈습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 네 가지 뜻은 곧
유생멸의(有生滅義), 유승용의(有勝用義),
유증감의(有增減義), 능소화합의(能所和合義)
등을 말한다.
이들 네 가지 뜻을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한다.
가) 유생멸의(有生滅義)
번뇌가 있는 유루적인 모든 것을 생멸이 있는 법(生滅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능훈식도 무상하게 항상 전변하는 생멸의 성질을 갖고 있어야 선악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생과 멸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생멸심(生滅沈)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원리가 없으면 선악의 업력을 능히 훈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위법(無爲法)은 생멸이 없는 진리의 세계이므로 여기서는 제외된다.
나) 유승용의(有勝用義)
능훈식(能熏識) 습기(習氣) 또는 업력을 훈습하고 증장(增長)시키는데 수승한 작용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선업과 악업을 능히 훈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칠전식은 선행과 악행 그리고 지혜를 장애하는 유부성(有覆性)을 강하게 나타내는 승용(勝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능히 선악업을 훈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라야식과 색법(色法) 등은 그렇지 못하다.
다) 유증감의(有增減義)
능훈식은 반드시 증감(增減)의 뜻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과 멸, 선과 악이 되풀이되는 유루식은 수행에 의하여 정화될 수 있고, 무루위에 오르면 필연적으로 염오의 성질이 감소되고 반대로 청정한 무루법은 증장되는 진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량심이 가장 많은 말나식의 성질도 제8지(第八地)의 보살위에 오르면 자연히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칠전식에는 증감의 뜻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능훈식에 증감의 뜻이 없다면 아무리 수행하여도 그 마음이 정화되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중생들은 영원히 선악업만 짓게 되고 또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게 되는 비진리가 따르게 된다.
이와 같이 능훈식에는 증감의 뜻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번뇌의 마음이 정화되어 무루의 보살위와 불과위(佛果位)에 오를 수 있게 되는 인과의 도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증감은 유루식에 한하고 무루식에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만약 무루법에 증감이 있다면 부처님도 청정하지 못한 유루식으로 다시 타락해야 하고 또 생사에 윤회해야 하는 비진리가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증감은 번뇌가 많을 수도 있고 감소 할 수도 있는 유루식에 한정되며 청정무구한 무루식에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루진여(無漏眞如)의 세계는 부증(不增)하고 불감(不減)하기 때문이다.
라) 능소화합의(能所和合義)
능소화합의(能所和合義)는
칠전식인 능훈식(能熏識)과 아라야식인 소훈식(所熏識)이 서로 화합하여야 함을 말한다.
능훈식의 기능이 아무리 다양하고 활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업력과 종자를 훈습할 때 소훈처(所熏處)인 아라야식과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능훈식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훈처인 아라야식과 마찰하여 종자를 훈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훈식이 새로운 행동으로 인하여 새로운 종자를 소훈처에 훈습할 때 소훈식과 추호도 마찰없이 화합하여 원만하게 훈습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서로 화합하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닌, 또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부즉(不卽)과 불리(不離)의 관계를 유지하여야만이 새로운 종자를 능동적으로 훈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능훈식인 칠전식은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네 가지 뜻(四義)을 가졌기 때문에 활발하게 활동하여 능동적으로 종자를 훈습할 수 있다.
그리고 소훈식도 역시 네 가지 뜻을 구비하여야만이 모든 종자의 훈습을 받고 또 안보하며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7) 청정심과 무루훈습(無漏薰習)
위에서 여러 면으로 종자의 훈습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대부분 유루훈습(有漏薰習)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유루훈습과는 내용이 다른 무루훈습(無漏薰習)에 대한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진리로운 본성(眞如性)을 지니고 있었지만, 언젠가 홀연히 무명(無明)을 야기하여 진리를 망각하고 또 번뇌를 야기하면서 고통을 받는 업인(業因)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명이 마음속에 나타나는 시기는 가히 알 수 없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도 그것을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고 하였다.
무시무명의 뜻을 직역한다면 ‘시작이 없는 무명’이라는 뜻인데,
그러나 이를 의역한다면 ‘무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튼 마음속에서 무명이 나타나는 것을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 하며 이로부터 그 마음을 생멸심(生滅心)이라 한다. 이러한 경지를 유식학에서는 제7말나식이 무아의 진여성을 망각하여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하기 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범부들은 언젠가 진리에 대한 무명을 야기하여 여타의 번뇌를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번뇌들을 누(漏)라고 한다.
누를 다른 말로 말하면 누설(漏泄)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의 비유적인 명사로서 내심(內心)에서 탐진치(貪瞋痴) 등 근본번뇌가 약동하여 주야로 눈, 귀, 코, 입, 몸, 의지 등 육근문(六根門)을 통하여 번뇌를 누설시키기 때문이다.
번뇌를 누설한다는 말은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누(漏)는 유주(留住)의 뜻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번뇌가 누설하여 그 업력으로 말미암아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그리고 무색계(無色界) 등 삼계(三界)의 윤회세계에 머무르게 하고 거주하게 하며 또한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사론(俱舍論)]에서도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부터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생사에 유전(流轉)케 하는 것을 누(漏)라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인(惡因)을 조성하여 고과(苦果)를 받도록 하는 것이 번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인과업보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고 이를 우리 생활주변의 인식론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마음의 번뇌는 모든 인식의 대상(諸境界)에 대하여 애착심을 머물게 하는 유주(留住)의 뜻이 있다.
그리고 또 계속 육근(六根)을 통하여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三惡道)에 누락(漏落)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누락의 뜻도 있다.
이상과 같이 누(漏)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며 이러한 누(漏)가 마음속에 있으면 이를 유루심(有漏心)이라 하고, 또 유루심으로부터 발생하는 향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과 종자를 흔히 유루업(有漏業) 또는 유루종자(有漏種子)라 한다. 이 유루종자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이와 같은 유루종자에 의하여 생사고와 윤회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自覺)이 당연히 있게 된다.
이러한 자각심이 싹트는 것을 발심(發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발심에 의하여 불심(佛心)이 나타나게 된다. 윤회의 고통과 현재의 정신적인 고통을 면하려면 불심을 통한 선행을 해야 하며 더욱 나아가서 진리로운 행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선행은 선업을 조성하고 진리로운 행동은 무루업(無漏業)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악행과 상대되는 선행이기 때문에 선보(善報)는 받을 수 있어도 영원히 윤회의 고통을 해탈시킬 수 있는 업력을 조성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무루업은 반드시 윤회의 고통에서 해탈시킬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佛子)들은 일거수 일투족의 행동을 진리롭게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정화가 없으면 누(漏)가 정화될 수 없고 누가 정화되지 않으면 항상 유루심에 입각한 행동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마음이 정화되면 자동적으로 청정한 무루심이 나타나며 무루심에 의하여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곧 무루종자가 조성되고 또 훈습된다는 것이다.
그 훈습처는 제8아라야식의 자체분(自體分)에 의부(依附)하여 있게 된다.
왜냐하면 무루종자는 유루종자와 달리 청정하고 진리로운 업력에 속하기 때문에 표면으로 유루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의 대상(所緣)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루종자는 견분의 인연처이며 소연경인 상분(相分)에 포섭(攝)되지 않고 아라야식의 자체분에 의지하여 있게 된다고 한다.
처음 발심하면 비록 무루심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더욱 정진함을 계속하면 무루종자가 강하게 되며 결국 유루심의 영역을 정화하게 된다. 따라서 유루종자도 추방되며 불성 또는 진여성도 점차 나타나고 구경에는 완전한 성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무루심이 나타나고 무루종자가 조성되려면 먼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생공무루(生空無漏)와
법공무루(法空無漏),
그리고 생공과 법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공무루(二空無漏)
가 성취되어야 한다.
이들 공관(空觀)은 진리에 합당항 사상을 발생시키며 동시에 진리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 공관을 통하여 무루종자가 조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공사상을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인간은 여러 인연으로 집합된 존재이므로 그 내용에는 공(空)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공관을 가져야 한다. 즉 나는 오온(五蘊)이 임시로 화합(假和合)된 것임을 관하여 애착과 집착을 떨쳐버리고 수련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을 생공관(生空觀)이라 하고, 또 아공관(我空觀)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 인간은 안으로는 자신의 자성을 관찰하고 밖으로 삼라만상을 관찰하되 그 자성(自性)과 삼라만상의 체성이 공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법공관(法空觀)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자체와 사물의 자체까지도 공의 이치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임을 중도적으로 관찰하여 그에 대한 고정관념인 애착과 집착을 떨쳐버리게 하는 수행이 곧 법공관인 것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나(我)’라는 생각과 ‘나의 것(我所)’이란 생각이 동시에 없어지게 되는데 이를 이공관(二空觀)이라 한다.
이러한 공관을 통하여 자신의 머음속에 묻혀있는 온갖 지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지혜들을 방해하고 장애를 부렸던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정화하게 된다.
즉 번뇌장은 마음의 편안함과 안정을 유지하는 열반(涅槃)을 파괴하는 것이며,
소지장은 인간의 본성에서 항상 발휘되는 지혜광명을 장애하고 무지(無知)케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지혜력에 의하여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유식학에서 말하는 사지(四智)와 불성(佛性)이 나타나며 이 불성을 흔히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고도 한다.
사지는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등을 말하며 아마라식은
청정식(淸淨識), 또는 무구식(無垢識)
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아마라(阿摩羅)는 무구(無垢) 또는 청정하다는 뜻으로 청정한 진여심 그리고 불성을 하나의 식(識)으로 명칭하게 된 것이다.
아라야식을 비롯한 팔식의 유루식은 아공과 법공 등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곧 마음의 정화가 되며 아마라식과 사지(四智)와 같은 무루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 무루식의 활동에 따라 무루종자를 훈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루식이 나타나는 데는 일조 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비워가면서 부단히 정진하여 무루종자를 하나하나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마치 한 푼 두 푼 은행에 저축하여 결국 많은 돈을 모으듯이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다.
그리하여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범부들의 깨달음은 매우 미미하여 오히려 불각(不覺)이라 이름하였고 이승(二乘)과 처음 발심한 보살들의 깨달음을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초지(初地)로부터 구지(九地)에 이르기까지의 법신보살(法身菩薩)들이 마음을 점차 깨달아가는 것을 수분각(隨分覺)이라 하였으며,
십지보살(十地菩薩)이 원만히 수행하여 최초에 무명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고 완전한 심성으로 안주(安住)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도 무루종자를 훈습하며 깨달아가는 단계를 삼현(三賢)과 십지(十地)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는 초발심부터 시작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의 수행단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을 피하고 다만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등의 무루행(無漏行)만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1) 견도(見道)의 수행
견도(見道)는 여러 설법을 자주 듣고,
깊고 견고한 대심(大心)을 발휘하여 진리로운 무루종자를 훈습해 가는 경지를 말한다.
견도의 보살은 초지보살이며
환희지보살(歡喜地菩薩)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속한 보살은 삼공(三空)의 지혜를 나눈다.
첫째로
보살은 생공(生空)의 진여(眞如)를 관하여 생공 다음에 얻어지는 지혜(後得智)를 갖게 된다.
즉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온갖 망상을 텅 비워버리는 곳에서 온갖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보살은 법공의 진여를 관하고 수행을 계속한 공덕으로 법공의 후덕지를 증득한다.
셋째로 생공과 법공이 함께 성취되는 구공(俱空)의 진여를 증득하여 관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여 구공의 후득지를 갖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후득지는 생공관과 법공관 등 진리관을 갖고 수행을 열심히 하면, 그 뒤에는 반드시 마음속의 지혜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견도의 경지는 공관을 갖고 모든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는 수행을 쌓아 처음으로 진리다운 진리를 조견(照見)한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는 능히 집착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집착되어질 대상도 없는 절대의 경지에서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가 열리게 되는데, 이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진리를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상대적인 분별을 떠나 평등하게 관찰하여 합일의 경지에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진지(眞智)가 나타나서 마음을 동요시켜 장애를 야기하는 번뇌장(煩惱障)을 소멸하고, 또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지혜를 방해하는 소지장(所智障)도 소멸하게 된다.
이제 말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은 번뇌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로서 사실상 수행은 이 두 근본번뇌(根本煩惱)를 퇴치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번뇌장은 아집을 발생시키고, 소지장은 법집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공관을 통하여 번뇌장을 퇴치하고 인간의 본심인 평화로운 열반을 중득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한편 법공관을 통하여 소지장을 퇴치하고 역시 인간의 본성인 모든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보리(菩提)를 증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열반은 마음의 평화와 안락을 뜻하고 보리는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지혜를 뜻한다.
(2) 수도(修道)의 수행
수도(隨道)는 일명 수습위(修習位)라고도 한다.
이러한 수도위(隨道位)는 위에서 살펴본 견도의 수행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용맹정진하는 보살의 수행을 말한다.
보살의 수행은 대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십바라밀은
①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남에게 물질과 진리를 베풀어주는 수행
②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남을 도와 윤리적 실천을 이행하는 수행
③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진리탐구와 중생구제에 어떠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를 능히 참아내는 수행
④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보살은 역시 진리를 탐구하고 중생을 구제할 때 방탕과 나태한 생각을 가지면 안 되고
전장에서 적군과 싸우는 것과 같은 무퇴의 정진으로 책임완수를 하는 수행
⑤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선정은 마음을 평등하게 하며 동요의 정신을 버리고 항상 안주케 하는 수행
⑥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모든 사물을 진리롭게 관찰하고 불교적인 인연법과 연기법을 올바로 관찰하는 수행
⑦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보살은 무상관(無相觀)을 갖고 진리로운 방편으로 수행을 완수하는 수행
⑧ 원바라밀(願波羅蜜)
보살은 부단히 보리를 구하는 발원(求菩提願)과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발원(利樂他願)
등을 하며 쉼없이 정진하는 수행
⑨ 역바라밀(力波羅蜜)
지혜와 힘을 축적한 열 가지 힘(十力) 등을 발휘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
⑩ 지바라밀(智波羅蜜)
일체의 법을 반연하고 진여를 반연하여 진리롭게 수행정진하는 수행
등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십바라밀을 수행하되 자기 이익만을 추루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정화하고 사회를 정화하는 보살도를 계속 정진함으로써 무루심이 나타나고 또한 무루종자가 축적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오묘한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묘관찰지(妙觀察智)와 또 모든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할 수 있는 평등성지(平等性智)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수도위의 기간은 초지보살로부터 제십지보살까지의 수행을 말한다.
이와 같이 점차 수행하여 무루종자를 훈습해 가면 결국 불타의 경지인 구경위(究竟位)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3) 무학도(無學道)의 수행
무학도(無學道)는 일명 구경위라 칭하기도 한다. 십지를 수행하여 무루종자를 계속 추적해 온 나머지 불과(佛果)에 이른 것이다.
번뇌를 끊고 진리를 증득한 이른바 단혹증리(斷 惑證理)의 수행이 완수된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마침내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안식 등 전오식(前五識)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화되고
제6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며,
제7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전환되고,
제8아라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하는 등
모두 지혜로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사상의 목적은 유루식을 전환하여 무루지(無漏智)를 획득하는데 있다고 해서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사상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위에서 말한 사지를 증득하면, 그때는 무루의 정신작용(心所)만이 상응한다고 한다.
그 무루의 상응심소(相應心所)는 21종으로서 변행의 오심소(遍行五心所)와 별경의 오심소(別境五心所)와 선의 십일심소(善十一心所) 등을 말한다. 이들 심소의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피하기로 한다.
아무튼 사지에 무루의 21심소가 원만히 이루어지면 여기에는 오직 무루종자만이 훈습하게 되며, 결국 무루세계를 수용하고 동시에 중생에게도 회향하는 진리의 세계가 전개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루종자의 훈습은 일시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마음 안에 무루심과 무루종자의 세력을 점차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구경에는 완전한 무루세계를 완성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