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禪定入門의 방법

通達無我法者 2007. 1. 15. 08:48
**************************禪定入門의   방법

                                                                       *한산  

-이 글을 올려 주신 한산 님은 현일자 님의 옛 도반 스님이시다.-




定慧入門에는
發心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에 공덕을 닦을 수 있어야
바야흐로 道에 들어 갈 수 있다.

顯敎와 密敎를 막론하고
다 4무량심으로 무게를 둔다.

진실로 大願과 大行이 없이는
마침내 사이길에 빠져 들 것이다.

修定의 도구는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한가지로 묶어서
마음을 한 곳 반연처에 모아서
점차 단련하고 순숙해지면
마침내 止境을 얻을 것이다.
(*止境: 경계가 끊어지는 경지)

우리의 육근은
밖에 있는 육진에
항상 헛되이 이끌려서
우리의 진실한 성품을 잃어 버린다.

그러므로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려면
바로 이 육근을 도구로 해서
본성을 회복 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매번 하나의 根塵이
천차만별의 차별법을 만들기 때문에
분석해서 다 없애긴 어려운 것이다.

부처는 한 생각속에
8만4천 가지의 번뇌가 있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각각 성품, 습관, 기호 등
그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적합한 방법을
선택해서 수행해야 한다.

수행자는 자신의 근기에 계합하는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수행자 스스로 선택해서는 안되며
눈밝은 스승의 간택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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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眼色法門:
안색법문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a.물체와 연관된 법문:

눈에 인식 되는
모든 물체를 통해
선정을 닦는 것이다.

이 방법은 눈에 보이는 범위안에 하나의 물체
[불상이나 다른 약간의 빛을 발하는 것]를 놓고
정좌 수련할 때 이 물체를 주시하듯 바라 본다.

빛의 색깔은
각 개인의 생리와 심리에 맞도록 하는데
예컨대 신경이 과민한 사람은 녹색광선,
쇠약한 사람은 홍색광선,
성격이 급한 사람은 약한 청색이 좋다.

단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개인의 실제적 상태에 맞게 취해야 하며
한번 결정했으면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


b.빛과 연관된 법문

이 방법은 정좌수련을 시작할 때
보이는곳에 촛불 혹은 향, 또는 해, 달, 별의 빛
또는 최면사들이 사용하는 수정구의 빛 등을
눈의 정면에서 약간 비키도록 놓는 것이다.

이 밖에 허공이나 거울을 본다든가
불이나 물을 보는 것도
모두 이 방법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할 점은
거울 속의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신경 분열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가벼히 실험하지 말아야 한다.

이 방법들은 불교나, 도교, 또는
외도들의 방식도 같이 채용하는 것이다.

단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방법은
다만 초학자를 쉽게 수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이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魔境의 외도에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을 정지 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방법에 사로잡혀 마음을 혼란 시킨다면
자연히 마음의 止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련하는 과정에는 항상
여러가지 경계가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광색을 수련하는데
환상이 나타나거나
안신통의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만약에 뛰어난
스승의 지도가 없으면
대단히 위험에 빠지는
魔道에 떨어질 수도 있다.

상근기의 사람은
광색의 경계 속에서도
활연히 大悟 할 수도 있지만
일반 사람은 기대할 것이 아니다.

예컨대 석가가 새벽 별을 보고
도를 깨달은 것과 같고,

이 밖에 홀연히
어떤 물체를 보고
본성을 통견한 예도 있다.



2.耳聲法門도
 안팎의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a. 내적인 소리를 듣는 법문:

이것은 자기의 체내에서 내는 소리 즉
염불, 주력, 독경 등을 듣는 것이다.


염불의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으니

1.큰 소리로 염하는것,
2.작은 소리로 염하는것[금강념],
3.마음의 소리로 염하는것[유가념]이 있다.


염불 할 때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염불 혹은
주력의 소리에 마음이 집중되지만
점차 一念 一聲에 마음이 집중되어
드디어 마음이 고요해 진다.


b. 외적인 소리를 듣는 방법:

이 법문은 어떤 소리 이든지
물체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방법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이 흐르는 소리나 폭포 소리를
또는 바람이 불어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를
또는 범패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방법은
가장 쉽게
定을 얻을 수 있다.

능엄경에 있는 25분의 보살들의 圓通법문 중에
관세음보살의 耳根圓通 法門이 가장 훌륭하다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소리를 듣는 법문으로서 入道하는 法門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이 참으로 가르침의 근본이니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 비워진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엿듣는 일에 비유하였다.”라고 말한 것 이다.

마음이 소리에 완전히 집중하면
마음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능히 졸리지 않으며
마음이 본성을 산란하게 하지 않으므로
자연히 이런 경지를 지속지켜 나갈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定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항상 이렇게 하도록 수행하면
어느 날엔가 홀연히 寂定에 들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고요함이 극치에 도달한 경계이다.

經에는 이것을
淨潔이라고 한다.

정결의 경지에 들어 갔을 때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이를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움직임이
하나의 현상이라면
정결도 하나의 현상임을 깨달아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현상에서 벗어나서
움직임과 고요함에 집착함도,
또한 떠나려는 것도 없는
中道의 實相을 깨달아
이를 고이 지켜야 한다.

이 때가 定의 경지에서 지혜를 보는
觀慧의 경지로 들어 가는 시기이다.

지혜로 살펴 보고
本性을 엿듣는 것은
움직임이나 고요함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어지는 것도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나지도 죽지도 않는
無生無滅한 본체이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점수의 단계이다.

禪宗의 祖師들은 많은 이가
점진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실상의 소식을 듣는 순간에
頓悟하여 해탈 했기 때문에
禪門으로 입도한 사람들은
모두 관세음보살의 소리듣는 법문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여 말해 왔다.

이를태면 '향엄' 스님은 대나무 소리에 悟道하고,
'원오' 스님은 닭이 울며 날개치는 소리에 悟道하고
'백장' 휘하의 한 스님은 종소리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현상은
궁극적으로 不生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적지않다.

소리를 떠나 조금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자연히 고요한 定에 들 수 있다.

단 이 고요함도
움직임과 고요함의
한 현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점을 알지 못하고
고요함이 곧 本體의 自性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外道의 견해이다.

반대로 이 단계를 뛰어 넘었으면
이미 입문의 단계를 지났다고 할 수 있다.



3. ***鼻息法門(비식법문)


이 방법은
호흡하는 기를 통해서
定을 얻는 방법이다.

호흡이 능히 점점 미세해지면서
마침내 정지되는 것을 息이라 한다.

氣脈 수련, 기공의 단련 및 數息의 방법이
모두 鼻息에 의한 수련 방법에 속한다.

중국의 천태종과 밀종은
이 방법을 중요시 한다.

이 방법의
최고의 법칙은
心息相依하는 것이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나
마음이 산란한 사람은
이 방법을 써서
호흡에 의해서 마음을 절재하면
비교적 쉽게 효과를 볼 수 있다.

定을 얻은 후에
숨을 세밀히 이를 관찰하면  
마음과 호흡이 원래
서로 의지함을 알수 있다.

인간의 생각은
氣息에 따라 생겨나는 것으로
기식의 작용이 생각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다.

氣息이 안정되고
생각이 고요할 때가 되면
太虛와 같이 크게 고요하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본성에 가까운 작용일 뿐
도의 본체를 논하는 실상은 아니다.

道家는 先天一氣가
흩어지면 氣가되고
모이면 형체가 된다고 하고,

일반적으로 外道는
氣가 性命의 근본이라고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만약 밖의 어떤 경계를 인정하고
안으로 자기의 본성을 잃어 버리면
體性의 作用이 되는 도리를 알지 못해서
바로 外道와 正法으로 갈라지는 단서가 된다.

만약 능히 자성을 먼저 깨닫고
차례로 공부하고 수행하므로서
점점 心息相依가 자재한 경계에 도달하여
마음과 물질이 하나되는 근원을 체험하게 되면
모든 법문이 공부하는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 ***身觸法門


이 법문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가 있다.

이것은
六根을 전제로 한 법문이다.

좁은 의미로서의 신촉법문은
신체중의 어느 일부분,
예컨대 양미간, 두정상, 배꼽 및
족심, 미려, 회음 중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 공부할 때
혹은 관상의 방법을 쓰거나
기맥을 수련하는 것 등은
모두 이 法門에 속한다.

신촉 법문은 수습하는 사람이
쉽게 신체상의 반응, 촉각, 서늘하거나,
뜨거움, 부드러움, 매끄러움, 막힘 등의
신체적인 반응과 감각을 알게 해 준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현상에 집착하게 만든다.

예컨제 기맥의 현상으로
도력의 깊고 얕음을 결정하게 하고
마침내 현상에 집착하는 경계에 빠진다.

이것이 곧 금강경에서 말하는
我, 人, 衆生, 壽者相 등이다.

密宗과 道家의 수련법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이것을 法執이라 한다.

이 법집은
가장 떨쳐 버리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수행인에게서
가장 어려운 것은
身見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황벽선사도 항상 이일을 탄식하여
'身見이 가장 잊기 어렵다.' 라고 하였다.

원각경에도
'망령되게 四大를
자기의 몸이라고 여기고
六塵에 인연한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이라고 여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참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아야
이로서 修眞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도 말하길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데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거니와

禪宗의 高德들은
절대로 氣脈의 문제를 말하지 않아서
학인들이 相에 집착하지 않게 한 것은
대단히 고명한 학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6. ***義識法門

이 법문은
모든 법문을 포괄한다.

앞에서 말한 법문들은
모두 五根, 五境, 五識에 의해
관계가 이루어 진다.

그런데 그 五識의 주체는
바로 의식이며
心王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문은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觀心, 止觀, 參禪 등은
모두 의식 법문에 속한다.

觀心法門을 시작할 때
나타나는 마음은
自性의 眞心이 아니다.

바로 生滅心인 것이다.

대상을 의식하는
妄心에 불과한 것이다.

정좌하여 마음을 볼 때
이 점을 안으로 관찰하여
자기의 의식 속에서
생멸하는 망심을 찿아서
이 마음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종적을 주의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 없이
생멸하는 마음을 내관하면
어느 땐가 생멸하는
마음의 흐름이 홀연히 끊어진다.

이때는 앞 생각은
이미 끊어졌으니 상관할 수 없으며,
뒷 생각은 아직 생기지 않았으니
생기지 않은 것 또한 상관할 수 없다.

이러한 경지를
본체가 공적한 상태를 알았다는
止의 상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이를 사마타라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止의 경지는
궁극적인 本源의 경지는 아니다.

단지
空한 靜止의
경지일 뿐이다.

본체의 관점에서 보면
있음은 空이 일으킨 것이요,
空은 有에서 세워진 것이다.

생멸은 眞如의 표현된 작용이고,
진여는 바로
생멸의 본체임을 볼 수가 있다.

결국은 중도를 보고
그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혜를 관하는 경지를
불교에서는 비파사나라고 한다.

이와같이 止와 觀을
계속해서 수행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닦아 나가서
최후에 원만한 보리를 증득하게 하는 것이다.

천태학, 밀종, 황교,
보살도, 중론, 중관, 정견, 등은
모두 이 止觀을 修習하는 범주에 속한다.

참선 법문은 초기의 禪종에서는
어떤 법문도 학인에게 주어진 것이 없었다.

言語到斷, 心行處滅의 禪宗에선
어떤 법문도 주어 질 수 없는 것이다.

후대의 참선 수행인들이
화두를 참구 한다고 하였던가?

후기의 선종에서 흔히
意定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방법을 써서
참선을 하였는데
이러한 방법들은
오히려 意識을 쓰는 법문이 아닐 수 없다.

선종의 의식 쓰는 법문 또한
의정을 쓰임으로 하는 것이니
마음의 도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정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관하는 慧學도 아니고,
천태의 止觀과도 흡사 하지만
百法 命門論에서 말하는 義도 아니다.

意와 定은 서로 연결되어서
第 八 아라야식에 깊이 들어가서
기질과 더불어 함께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마음은
본래 서로 결합되어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마치 가슴 속에 무언가가
가로 놓여 있는 것 같아서
뽑아 낼라고 해도 뽑혀지지 않다가
어느 땐가 적당한 기회와 환경이 되면
홀연히 돈파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광이 홀로 빛나
감각 대상에서 떨어져 있고

무릇 모습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말한 것이다.




                   *옴마니반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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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慧影像(정혜영상)


소승의 불교학은
계로부터 입문하는데
능히 계를 지킬수 있어야
定을 얻을 수 있고
정이 있어야 慧를 얻을수 있다.

대승의 불교학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으로부터
나아가서 선정에 이르고
최후에 반야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불법에서 말한 止나 觀은
모두가 定慧를 얻기위해 하는
수행의 첫 걸음이다.

육근을 쓰는 것에서 부터
팔만사천의 법문이 파생하는 것이다.

모든 법문은
意念을 정지하기 위해
시작된 가르침이다.

생각이 끝나는 상태에
도달한 것이 곧 定이며,
定의 정도는 수행한 功力의
深淺에 따라 다르다고 할 것이다.


定을 닦는 방법은
어떤 사람은
유위법에서
무위법으로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空에서 시작해서
妙有를 일으키기도 한다.

법문은 비록 한없이 많지만
목적은 오직 定을 얻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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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定의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무릇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을
止의 경계라 하는데
이것이 定에 들어가는 기초이다.

무엇을 定이라 하는가?

定은
산란하지도 혼침하지도 않으며
성성하면서 적적하고
적적하면서 성성한 것이다.

마음은 고요하여 없는 것 같으나
실상은 결코 무생물과 같이
마음이 없는 것 같지도 않은 상태이다.

마음에 의지하지도,
육체에 의지하지도,
의지하지 않는 곳에도
의지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육체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경지가 禪定이다.

定의 수행을 하는 단계에서는
대개 산란하지 않으면 혼침하거나,
산란하다가 혼침하기를 계속한다.

사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1.산란


마음이 조잡한 것이 산란이며
비교적 약간 산란한 것을 도거라 한다.

정을 닦는 사람이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망상이 생겨서 머릿속 가득히
사상, 연상, 기억, 반연 등이 가득 차서
마음을 한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을 산란이라 한다.

마음이 그다지 산란하지 않아서
어는 한 곳에 집중된 것 같으면서
여전히 조금은 산란한 상태를 掉擧라 한다.

수행인들은 대개가
이 掉擧(도거)의 상태에
머물러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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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掉擧(도거): 구사론 등의 唯識學에서 말하는 것으로
                 번뇌가 아직 미세하게 일어나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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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 하면 자기 자신은
약간의 산란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이미 定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처음수행을 시작한 사람이
만약 망념이 그치지 않고
또 마음이 어지럽고
기가 요동치는 상태라서
안정이 안된다면,

먼저 운동을 한다든가 절을 해서
육체를  조절화고 기식을 유순하게 해서
다시 자리에 앉아 定을 닦아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망념이 날뛰는 것을 좇아가지 말고
단지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오랫동안 수행하면 자연히 집중될 것이다.

그런데 망념이 막 정지 되려는 때에
자기가 이제 止의 경계에 들어가려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데
이것이 또한 망념이다.

이 망념이 그치면
다른 망념이 생기고
이런식으로 계속되어
止의 경계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定을 닦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止와 定을 닦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入定에 집착하지 않아야
점차 지의 경계에 들어간다.

禪定을 닦을 때
망념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지만
이것은 본래 자기에게 허다히 많은 망상을
그때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니
고민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망념이 너무많고
산란이 심해서 고요해지지 않는다면
數息의 방법을 이용하거나
혹은 觀相의 방법을 쓰는 것도 좋다.

觀相법은 臍下 단전이나
足心에 흑색의 광점이 있다고
觀相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이밖에 아미타불을
소리내어 염송하는데  
佛字를 念할 때

이 佛字가 밑으로 깊이 끌어 내려져
마치 心身이 모두 끝없이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듯 생각하는 방법도 있다.




       2.혼침


거칠은 혼침은 잠이 오는것이고,
미세한 혼침이라야 혼침이라 할수 있다.

몸이 피곤하면 잠이 오지만
정신이 피곤해도 수면의 욕망이 생긴다.

잠이 올 때는 억지로 정을 닦지 말고
잠을 푹 잔후 다시 시도 해야 한다.

만약 좌선 한 채로 잠자는 습관이 들면
영원히 성공할 수 없다.

혼침은 마음이 적적한 상태와 비슷 하지만
어느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또한 어떤 망상도 별로 없는 듯 하다.

다만 혼미할 뿐 심지어는
몸도 마음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혼침의 현상이 처음 생길 때는
어떤 때는 마치 꿈속에 있는 듯
일종의 환상이 있을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환상은
모두 이 혼침의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의식이 분명치 않고
잠재의식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禪定을 닦는 사람은
혼침에 빠져들기 아주 쉬운데
만약 그것이 혼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禪定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쫑가파 대사도 말하기를

"만약 혼침을 定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은 후에 축생도에 떨어질 것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바가 있다.

혼침을 극복하는 방법도 관상을 쓰되
배꼽 가운데 하나의 홍색광점이 있고
이 광점이 점차 위로 올라와
정수리에서 흩어 진다고 관상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전신에 힘을 모아 소리를 지르것나,
코를 쥐고 호흡을 참았다가 참기 힘들 때
코로 숨을 세게 내쉬는 것도 좋다.

혹은 찬물로 목욕을 하던지
운동을 하는 것도 좋다.

기공을 수련하는 사람은
혼침에 잘 빠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혼침을
완공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완공은 나무나 돌 처럼
생각이 전혀 없는 백치 상태이다.

산란과 혼침이 없어지면
홀연히 마음이
어느 하나에 집중되어
흔들리지 않게 되는데
이 때에는 반드시
輕安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輕安의 현상은
어떤 사람은 머리끝에서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족심에서 부터 일어나기도 한다.

정수리로부터
輕安 현상이 시작되는 사람은
정수리가 시원해지는 느낌 후에
전신이 시원한 느낌이 퍼지고
마음은 고요해지고 비어져 있으며
몸도 또한 가볍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 때에는 몸이 마치
곧게 뻗은 소나무처럼
곧고 바르게 된다.

마음과 인식 대상이
모두 분명해지고
어떤 動靜이나
혼침, 산란의 현상도 없게 된다.

이러한 輕安의 경계에 도달하면
자연히 무량한 기쁨이 생기는데
단 깊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이 상태는 쉽게 사라진다.

足心부터 경안이 시작하는 사람은
먼저 뜨겁거나 혹은 찬 느낌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마치 하늘을 꿰뚫을 듯이
점차 정수리로 상승한다.

족심에서 시작된 경안 현상은
정수리에서 시작된 경안 현상 보다
지키기도 쉽고 잘 사라지지도 않는다.


瑜伽에서도 말하기를

"고요히 관찰하니
만물이 모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경계는 경안 속에서
체득되어 나온 것이다.  

경안의 경계에 도달한 후에
고요한 곳에 홀로 거처하면서
더욱 수행에 노력을 하여야 한다.

만약 번잡한 곳에서
이곳 저곳 신경을 쓰면
수행을 지속할 수 없고
경안도 점차 소멸 된다.

만약 계속 노력해서 수행해 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경안 현상이 담박해 진다.

사실상 이 현상은
경안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랫 동안 경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처음 처럼 강력히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이 경안에서
쉬지않고 수행을 더하면
定力이 더욱 견고하게 된다.

이 때에는
그지 없이 맑고 밝은 느낌을 얻고
전신의 기맥도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는데

신체가 따뜻해지고 안락해지는 등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느낌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안으로
妙樂을 접촉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세속적 욕망을 끊을 수 있다.


몸안에 氣機가
최초로 발동 했을 때
生氣가 활발해져서
체내에서 陽氣가
전신을 두루 흐르게 된다.

만약 이 때에 마음이 어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을 잊게 된다면
성욕이 왕성하게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각별히 조심하고
근신해야 한다.

이 위험한 과정을 극복하고
다시 수행에 매진해 나가다 보면
頂相이 발생하게 되고
또한 煖의 경지를 지나서
더욱 進一步 하게 된다.

이 때에는 氣息이
근원으로 돌아 가고
주관과 객관이 고요한
경계에 들어 가게 된다.

이 경계는 三昧界가
설명을 금하는 범위 이기에
언어와 문자로 설명하기 어렵다.

定을 닦는 사람이
이정도의 경지에 도달하면
氣住脈住의 현상을 체험할 수가 있다.

소강절의 詩中에

"天根과 月窟이 항상 왕래하니
三十六宮이 다 봄이다." 라는
구절이 이것이다.

듣기는 매우 쉬운 것 같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참으로
이 경지에 도달하고
다시 계속해서
定에 머물러 있으면
다섯가지 신통이 생긴다.

가장 어려운 것은 眼通인데
일단 眼通이 발생하면
나머지 네가지도 계속 발생한다.

단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가지 신통이 발생하기도 한다.

안통이 생겼을 때 눈을 뜨든 감든
시방허공과, 산하대지, 등
미세한 먼지속 까지를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볼수가 있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사물도
마음만 일으키면 즉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신통에 미혹된다면
바로 魔道에 빠진다.

어떤 사람은 마음대로
氣息이나 심장의 활동을
정지할 수도 있는데
이런데 마음을 일으킨다면
正道를 닦아 나가기 어렵다.
 

佛法의 중심은
止觀을 통한
定慧의 修學에 있다.

定을 기초삼아
定을 얻은 후에는
그를 얻었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한다.

生과 滅이 소멸되어
寂滅이 사라지고 나서
열반의 寂淨한 法界가
현전 한다는 것이다.

이때에는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경계는
모두 소멸된다.

왜냐 하면
이러한 얻을 수 있는 경계는
모두 心所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두가 生滅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엄경에 이르기를
지금 비록 九次第의 禪定을 얻어도
漏盡을 얻지 못하면
漏盡 아라한을 이루지 못해서
生滅變化하는 현상을 집착하여
진실한 것이라 오인한다.

만약 능히 靜相을 버리고
적멸 속에 머물 수가 있다면
性空의 경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소승이 목표로 하는
아라한의 果位로서
我執을 버리고
人空에 도달한 경계이다.

여기에 대승은
소승의 功積마저 벗어나
일체의 假有와 實幻의 生滅去來가
모두 無生에서 緣起하여
妙有의 用을 이룬다는 것을 觀해야 한다.

최후에는
어떤 경계에도
머물지 않아야 한다.

비록 말은 이렇게 하지만
定이 없으면 기초가 없으므로
단지 그 이치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古德이 말하기를

"一尺을 증득 하는 것이
一寸을 행하는 것만 못하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통렬히 자신을 반성해서
실천 수행을
최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수행이란
결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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