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청화큰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3. 25. 13:20

 

청화큰스님 법문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감로맛 



우리 중생들의 맛 가운데 가장 기묘한 맛이 바로 감로맛입니다. 그러나 욕계 중생들의 그렁저렁 한 삶으로는 감로맛을 맛보지 못하고 평생을 허무하게 보내버립니다. 그런 감로맛의 근원은 어디가 있는가? 감로 맛의 근원은 감로왕여래라. 바로 부처님한테 감로맛의 근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믿을 때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 법은 굉장히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법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맛볼 수 있는 맛 가운데 가장 고상하고, 가장 마음이 서늘하고, 또 더 나아가서는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맛이 바로 감로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법을 믿을 때는 감로맛까지 가야 부처님 법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보통 상식으로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이 무던히 좋은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우리가 영원의 차원에서, 인생과 우주의 본질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이 그렇게 완벽하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른바 존재론적으로 인간 존재는 대체로 무엇인가? 자기 존재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인생을 가치 있게 살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선 실존적으로 '인간 존재는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것을 알고 살아야 할 것인데 보통은 그렇지 못하고 남들 따라서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가장 궁극적으로 밝힌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발버둥치고 바르게, 행복스럽게 살고자 해도 인간 존재인 나라는 존재가 지금 어떠한 상황인가? 우주의 진리 가운데서 인간은 어떠한 위상에 있는가? 이런 것을 알지 못할 때는 가치 있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지혜와 더불어서

 


지금 불교를 믿고 있는 분들 가운데서 믿기는 믿는데 별로 얻음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저번에 어느 보살님 한 분이 산에 가서 백일기도를 모시고 왔다는데 아무런 얻음이 없었다고 호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고 물어 보니까 그냥 덮어놓고 염불만 하고 절만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과 마음에 공부가 다 스며들어서 그것도 훌륭한 공덕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방편을 떠난 참다운 공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공부는 꼭 밝은 지혜(智慧)와 아울러 나아가야 참다운 불법(佛法)의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불자님들은 각기 인연(因緣) 따라서 가지가지 공부하는 방법을 쓰고 계시겠지요. 그 자체만도 기한 공부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철학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자기 존재 파악을 하고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과거 전생(前生)에 지어 내려온 번뇌(煩惱), 금생에 태어나서 지은 번뇌, 그런 번뇌에 가려서 공부가 잘 못 나아갑니다.


과거에 조사(祖師) 스님들 말씀에도 '부달성공(不達性空)하면 좌선무익(坐禪無益)'이라. 이것은 우리 마음, 즉 일체성품, 일체존재, 일체현상이 다 비었다는 공의 도리를 모르면 참선(參禪)을 해도 별로 크게 얻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불자님들 꼭 이런 말씀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인간 존재나 일체 두두물물의 존재를 상식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이 보는 대로 자타 시비(是非)가 있고, 선악 구분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서 과학적으로 볼 때는, 과학도 전 근대적으로 볼 때는 분명히 상식적인 범주를 못 넘어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 몸뚱이도 내가 생각한 대로 있고, 모든 존재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미시적인 우리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취급하는 현대 물리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우리 중생이 보는 이대로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현대 과학적으로 볼 때는 '나'라는 주관도 또 그것에 대립되는 객관도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대로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처님 가르침에서 볼 때는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제법(諸法)이 공()입니다. 이 간단한 말 가운데 현대 과학도 미치지 못하고, 서구 철학이나, 어떤 가르침도 미치지 못하는 심심미묘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제법이 공'이라. 제법(諸法)은 모든 만법(萬法)을 말합니다.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제법이 공이라는 소식을 모르면 불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 현대 과학인 이른바 상대성 원리에서 오는 참다운 과학도 모르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일체 존재는 상대적으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지 실존적 실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믿어 왔기 때문에 별로 얻음이 없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일 동안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별로 얻음이 없다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보다 기본적, 본질적으로 공부하신 것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공부를 했다는 말이 됩니다.


상식만으로 볼 때는 틀림없이 자기 몸뚱이가 있고, 또 다른 사람 몸뚱이도 있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물질 세계뿐인 것입니다. 시간, 공간 그러한 범위 내에 들어 있는 그런데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상식적인 우리 중생들의 견해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한에는 항상 상대 유한적인 세계에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한테 좋게 하면 좋은 것이고, 내 단체나 내 종단에 좋게 하면 반가워서 좋고, 자기한테나 자기 소속 단체한테 누가 조금 언짢게 하면 원수같이 미워지게 됩니다. 이런 상식적인 범주 내에서는 우리 인간의 번뇌(煩惱)를 영원히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과거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우리 중생들이 보고 있는 모든 현상이라 하는 것은 허망한 그림자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떠한 위대한 철인치고 그렇게 말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그렇게 무수한 동서 철인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증명한 것을 지금 우리는 진리의 핵심인 부처님 법문 속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상식을 못 떠나고 불교를 믿고 있다고들 합니다.


인도의 성웅 '간디'같은 분도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챤은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간디의 말은 우리가 지금 되새겨서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불교의 상황을 볼 때에 많은 지성인들이 '나는 부처님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불교인은 싫어한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도 우리가 뼈아프게 반성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우리 불교인들이 상()을 떠나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상을 떠나서 행동과 말을 하지 않으면 자기한테나 자기 단체에 대해서나 모슨 이익이 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다시 없이 바쁘고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서울서 여기 태안사(泰安寺)까지 오실 때 교통이 막혀 14시간 걸려서 오셨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한편 감사하고 한편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과연 그렇게 오셔가지고서 무엇을 얼마나 얻어가지고 가실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저같은 사람은 자신이 없습니다. 무엇을 드려야 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도덕이 바로 서는 길

 


불자님들은 물론 어느 누구나 우리 사회의 도덕의 타락과 윤리의 퇴폐에 관해서 한탄하지 않는 분은 아니 계실 것입니다. 한 나라가 건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꼭 윤리 도덕이 굳건히 확립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윤리 도덕은 그냥 상식적인 그런 범위에서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기를 누가 싫어합니까? 남한테 베풀면 좋다는 것을 누가 모를 것입니까. 자기 단체만 생각하는 집단이기가 나쁘다는 것을 누가 모를 것입니까. 그러나 사회는 어제나 오늘이나 이 모양입니다. 공자가 태어난 춘추전국시대나 오늘날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몸뚱이를 좀더 편리하게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밖에는 우리 도덕관념은 별로 발전됨이 없이 도리어 퇴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우리 사회가 살아남을 것인가? 이렇게 하고도 우리 인간이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것인가? 참다운 도덕이 서기 위해서는 먼저 확실한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훌륭한 철학이나 종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철학이나 종교가 서면 그때 도덕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탁한 탁수를 맑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류를 다스려야 하지 그냥 하류에서 물이 내려오면 맑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중국 황하도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 하는 것입니다. 저 산서성 그런 지방의 황토층에서 흘러내려 온 흐린 물 때문에 황하를 제 아무리 하류에서 맑게 해 보아도 맑게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백년하청이라. 항시 물은 탁하단 말입니다.


그와같이 우리 중생도 본질적으로 바른 가치관(價値觀)을 확립해야지 그렇지 않고서 무엇 무엇 하여라, 삼강오륜이 좋다, 제 아무리 복지 국가를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인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달라져서 철학관이, 가치관이 바로 선 후에야 비로소 도덕적으로 바로 설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부처님 가르침이 닦기 쉽다고 해 놓고서 철학을 꼬집어 내고 그러니까 굉장히 어렵게 생각이 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철학이 별 것입니까? 석가모니도 예수도 공자도 어떠한 성인도 모두가 우주의 진리라는 근본 철학에 입각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역시 우주의 진리에 바탕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마음 돌이켜서 성자의 말에 바로 겸허하니 귀만 기울이면 사실 철학은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인연법은 우주의 도리

 


'나'라는 존재가 금생에 부모님 연() 따라서 태어난 것도, 그래서 몇 십년동안 사는 것도, 살다가 죽어서 가는 것도,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철학 그러면 어렵지만 인연법(因緣法)이라 그러면 쉽지 않습니까? 가장 고도한, 가장 확실한 철학이 인연법입니다.


따라서 불자님들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상식적으로 불교를 믿다가는 불교의 어려운 말로 자구불료(自求不了)라, 자기도 제대로 구제를 못한단 말입니다. 스스로 자()자, 구할 구()자, 아니 불()자, 마칠 료()자, 자기 하나도 구제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 사람이 소리소리 질러 봐도 남을 구제 못 시키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가 번뇌에 칭칭 구속되어 있는데 어떻게 남을 제도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불교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바꿔서 말씀드리면 인연법으로 연기법으로 부처님 법을 해석하지 않고서는 자기도 구제를 못합니다. 아울러 자기 집안의 아들이나 딸이나 자기 남편이나 자기 아내한테도 영향을 못줍니다.


인연법은 대체 어떠한 것인데 그와 같이 자기도 구제하고 남도 구제한다는 말인가?


인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원자 하나도 모두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 영국에 있는 눈에 안 보이는 원자나 또는 한국에 있는 분자 하나 모두가 다 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宇宙)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유기체(有機體)입니다. 어느 것도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인연법의 도리입니다.


어째서 우주의 만법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가 하면은 본래로 하나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든 존재의 모양이 나왔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나, 너라는 존재나, 어떠한 미세한 존재나, 우주에 있는 두두물물이 본래는 하나의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내고 있는 것이니까, 하나의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본래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천지가 나와 더불어서 같은 뿌리요, 만물여아동체(萬物與我同體)라, 만물이 모두가 나와 더불어서 같은 몸입니다. 이것이 연기법으로 보는 가치관입니다.


불자님들, 지금은 꼭 부처님 가르침을 본질적으로 믿으셔야 자기 구제(救濟)가 되고 자기 복리(福利)가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 세계의 탁류에 휩싸여서 얽히고 설킨 그런 상식(常識), 상식이라 하는 것은 비록 공통되는 점도 있다 하더라도 이 사람 의견 다르고 저 사람 의견 다르고 하지 않습니까.

상대적인 범위에서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얽히고 설킨 이른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기 주의 주장을 내세워서 이렇게 혼란 무궤도한 사회에 있어서는 힘을 못 냅니다. 저 사람의 주의나 나의 주의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든 것을 다 알고서 포섭할 수 있는 철학적인 지혜가 지금은 필요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른바 96종 외도(外道)라, 아흔 여섯가지의 외도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가지가지의 외도를 다 포섭했습니다. 지금같이 공산주의 비슷한 것도 있었고 사회주의도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같이 복잡다단한 현대를 바로 살기 위해서는, 현대를 바로 산다는 거창한 이야기를 않더라도 한 집안의 가장이 된다, 한 집안의 현모양처가 된다, 이런 차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지금 바른 철학이 없이는 못살아 갑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 이것이 만능의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과거 전생에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고 그런 과보로 해서 잠시간 지금 같은 몸을 받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는 것도 역시 시간과 공간에 항시 제약이 됩니다.


이 무제한적인 것을 우리 중생은 모르는 것입니다. 천상도 분명히 존재하고 지옥도 분명히 존재하건만 중생은 어두워서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서 못 봅니다.


우리가 못 본다 하더라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원자가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 않습니까. 바람이 안보이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인간 존재라 하는 것은 지금 인본주의자(人本主義者)가 내세울 정도로 그와같이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 업장 따라서 잠시간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 인간 존재입니다.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해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 몸뚱이도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잠시간 합해 있습니다.



모은 허물(죄악)은 자기 몸에서 나온다.



모든 허물이 자기 몸에서부터 나옵니다. 자기 몸뚱이만 소중하고, 그 다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몸이 소중하고, 여기서부터 인간의 죄악이 싹터 나옵니다.


자기 몸뚱이를 초월하는 그런 지혜가 있을 때는 인간의 고뇌는 발생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선 모든 죄악의 원인이 되어 있는,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되어 있는 자기 몸뚱이가 무엇인가?


이 몸뚱이를 인연법으로 볼 때는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원소들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결합되어서 이와 같은 현상을 냈단 말입니다. 이 현상을 보고 내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앞서 어렵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존재론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 몸이 그와같이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역시 자기 몸이 소중한 분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범부는 모양만 보이는 것이지 모양의 본질인 저쪽 세계, 참다운 실상(實相)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실상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볼 견(見), 성품 성(), 인생과 우주 만유의 본성인 불성(佛性)을 체험하는 것을 가리켜서 견성이라고 합니다. 견성이 되어야 몸뚱이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견성을 미처 못한 사람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돌아서면 내나야 자기 몸이 더 소중합니다. 자기 아들 몸이 더 소중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아직 속물입니다. 속물 근성을 미처 못 떠나서 사회운동을 한다, 무엇을 한다, 물론 해야 되겠지만, 그런 운동이 온전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운동을 하던지간에 먼저 선행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자기 스스로가 먼저 속물을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떠나려고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떠나려고 몸부림치고, 남을 비판하는 그런 안목으로 우선 자기를 비판해서 속물을 떠나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감로수(甘露水)같습니다. 감로수같이 정말로 진진하고 불멸의 행복(幸福)과 자비(慈悲)와 지혜(智慧)와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그런 맛입니다. 그런 맛에 정말로 우리가 가까워지면 그때는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행복에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 몸도 마음도 행복에 충만하는 그 자리가 그렇게 어려운 자리는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우주의 주인공이다.

 


이 자리에 와서 계실지 모릅니다만 몇 일 전에 양 여사가 찾아와서 만났습니다. 그는 30년 동안 물만 먹고 지냈다고 합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할 때는 그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씀이 되겠지요. 그러나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30년 동안 물만 먹고 살 것인가? 우리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몇 칼로리의 단백질을 먹어야 하고, 무슨 무슨 영양을 갖추어 먹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 인간의 본성인 우리 마음을 믿는 정도가 너무나 얄팍합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눈에 안 보인다고 그래서 우리 몸과 더불어서 소멸되어 버리는 그러한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은 바로 우리 주인공(主人公)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우주의 실상(實相)입니다.


내 마음이나, 그대 마음이나, 또는 다른 동물의 마음이나, 식물 마음이나, 공기 마음이나, 흙 마음이나, 모두가 다 그 본질은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은 만유를 생성 섭리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겨자씨, 가벼워서 몇 그램도 못 되는 겨자씨 하나가 낙낙장송의 잣나무가 되는 것을 보십시오. 잣나무 씨를 제 아무리 우리가 분석을 해서 보아도 그 겨자씨 가운데는 유전 정보는 들어 있어도 낙낙장송 그 자체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게 들어있지 않지만 그와같은 여건이 성숙하면 낙낙장송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도 부모님에 의지해서 나올 때는 그 때는 일점 혈육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식(識), 업식(業識)인데 그것이 여건이 닿아서 차근차근 영양을 섭취하면 이렇게 50Kg, 40Kg 몸이 되지 않습니까.


시초에는 다 마음뿐입니다. 지금 하늘에 있는 금성, 토성, 목성 하지만 이런 것도 역시 현대 물리학도 증명을 합니다만은 과거에는 텅텅 비었던 것인데, 태양계가 이루어지고 지구도 이루어지고, 텅텅 빈 자리에서 이른바 무()의 자리에서, 공()자리에서 만유(萬有)의 유()가 나왔단 말입니다.


이와같이 무라는 것은 다만 무가 아니라 신비 부사의(不思議)한 만유를 갖춘 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법으로 인연만 닿으면 그때는 사람이고 하늘에 있는 달이고 별이고 다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은 꼭 영양을 얼마를 먹고, 단백질을 얼마만큼 섭취하고, 야채를 얼만큼 먹고, 그렇게 해서만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그런 생리학이나 의학에 어두워서 그 쪽 소식을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단언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은 없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부처님 법을 믿기 때문에 음식이라 하는 것은 적게 먹을수록 우리 몸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 윤회(輪廻)하는 세계가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아닙니까. 욕계, 색계, 무색계 가운데서 욕계에 한해서만 음식을 먹고 살아갑니다.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먹지 않고서 그냥 마음 그대로 영생(永生)하는 것입니다. 같은 욕계 내에서도 사대왕천(四大王天)이나 도리천(?利天)같은 천상은 냄새만 맡는 것이지 이것저것 물질을 먹고살지 않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물만 먹고 살았다는 그 분을 만나 보니까 그야말로 수정같이 맑았습니다. 판단하는 것도 그렇게 맑은 판단을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아무런 관념이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그렇게 맑은 사람들은 음식욕, 이성욕, 잠욕, 그런 것은 사실 없는 것입니다. 그분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은 매서운 결단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100% 믿고 매서운 결단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이상의 자기 몸뚱이에 국한된 이상의 힘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 몸은 지금 몇 kg이고, 나는 지금 힘을 내면 완력은 얼마나 강하고, 내가 지금 몇 kg을 들고, 이런 정도로 우리 능력이 국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는 별로 힘이 없는 사람도 하찮은 기압술로 해서 초인적인 힘을 내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만 본다 하더라도 본래 우리에게 잠재해 있는 힘은 무시무시한 힘입니다. 나아가서는 무한의 힘입니다.



무한의 진여불성과 하나 되기 위해서

 


무한의 힘, 무한의 자비, 무한의 지혜, 바로 그 자리가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만유의 근본 성품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공부는 모두가 우리 중생이 진여불성을 투철히 인식하고, 그 다음에는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우리 불자입니다.


그러나 과거 전생에도 업장(業障)을 많이 짓고, 금생에도 업장을 많이 지어 놓아서 단박에 본래 생명 자리인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론적으로 우리가 먼저 인식을 해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을 먼저 확립을 시키십시오. 나와 남이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니고, 천지가 하나의 생명 자리입니다. 하나의 생명 자리에서 연기 인연법으로 잠시간 만유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갈 곳은 우리 본래 생명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든 가치가 다 수렴이 됩니다.


불교 운동도 어떤 명목을 가지고 하던 '나나, 너나, 모두가 다 구분이 없이 진여불성 자리로 다 더불어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대 전제를 세우고 불교운동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자기 아들과도 둘이 아닌데 자기 아들을 자기 소유같이 함부로 할 수가 있습니까? 또 부모와 내가 둘이 아닌데 부모를 함부로 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 아내와 남편도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 아내나 남편한테도 존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어느 분들은 남자가 되어 놓으면 자기 아내한테는 '해라'를 당당하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자기 아내는 남편에게 공대해서 '하시오'를 하는데도 남편은 아내한테 반말을 한단 말입니다. 그럴만한 권리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래가 하나의 부처인데 누구한테나 자기 아내한테나 남편한테나 또는 거지한테나 누구나 다 부처님같이 대해야 그래야 불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시고 성자가 보신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 아님이 없는 것인데, 똑같은 진여불성에서 왔기 때문에 현상적인 것도 이 허망한 모양을 떠나서 다 똑같은 부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대하던 간에 우리 재산을 빼앗은 그 사람에 대해서나 또는 금생에 인연이 잘못 닿아서 우리 어버이를 죽인 그 사람한테나 똑같이 부처님같이 대해야 합니다.


비판할 때는 비판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 근본 마음은 그래야 화해가 되고 해방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고서 현상적으로 나한테 좋게 대하고 내 단체한테 좋게 대하면 좋아하고, 나한테나 내 단체한테 해롭게 대하면 싫어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여러분께서는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저번에 코무덤에 가서 뙤약볕에 한 세시간 가까이 까까머리로 있어서 제 머리가 데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귀중한 스님들께서 여기 햇볕에 앉으셔서 참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말씀을 더하겠습니다.


부처님 법을 절대로 가볍게 생각을 마십시오. 제가 승려이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어떠한 문제든 교육, 정치, 경제, 어떠한 분야에 있어서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해결을 못합니다. 한계에 이르러 있는 기독교나 또는 이슬람교나 그런 것도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면 해결을 못합니다. 그러기에 몇 백파가 되어 가지고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주의, 무슨 사상도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하나도 용해를 못시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돼야 모두가 다 하나의 자리를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누누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른 가르침은 천갈래 만갈래 다 갈림길이 생기는 것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갈림길이 없이 모두가 다 하나로 합해진단 말입니다. 본래도 하나인데 우리 중생이 잘 못 보아서 갈라서 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본래 하나인 도리가 확실히 감이 안잡힌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거짓말 하지 않고, 중생을 속이지 않고, 바른대로 여실히 말하시는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모든 중생을 부처님같이

 


나나 너나 모든 존재가 본래 둘이 아니다. 이렇게 믿고 모든 중생을 부처님같이 대해야만 불교의 믿음입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의 도리,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연기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의 도리에서 왔기 때문에 - 본래는 하나라 하더라도 사람이 되고 다른 짐승이 되고 했으면 그때는 구분이 있지 않겠는가? - 구분이 있게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이 구분이 있게 보는 것이지 성자는 하나의 생명체,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도리 연기법으로 고찰한다면 본래 물질이 없습니다. 본래 공한 자리에서 잠시간 그림자같은 상을 낸 것이 내 몸이고, 네 몸이고, 달 또는 해라고 하는 것이지 본래 고유한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본래 모습 그대로 부처한테서 왔기 때문에 사람이 되고 개가 되고 새가 되고 소가 되고 했다 하더라도 바로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산도 부처고 물도 부처고 다 부처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면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바른 견해인 연기법으로 고찰할 때는 산도 부처님이고 물도 부처님입니다. 그러기에 소동파같은 분도 산은 바로 부처님의 청정법신의 몸이요, 또 물의 흘러가는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그런 광대무변한 법문이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바로 행복스러운 길입니다. 한 걸음 가면 한 걸음 간 만치 우리 업장이 녹아지고 동시에 우리 마음도 감로수같은 그런 맛이 차근차근 우리한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믿으셔야 합니다. 본래가 우리 눈으로 보는 물건은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 차원에서 있다고 보고, 보석으로 보이는 것이지, 본래의 차원, 연기법의 그런 우주의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시고서 그런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화두(話頭)가 있고, 염불(念佛)이 있고, 주문(呪文)이 있습니다. 어느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부처님 팔만 사천법문 모두가 본래로 하나의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있습니다.



무아, 무소유

 


하나의 자리이기 때문에 본래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무아(無我)입니다. 본래 내가 아니거든 내 소유가 어디에 있는가? 내 공장도, 내 집도 모두가 이것은 다만 잠시간 관리하는 것이지 본래 내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남을 착취하는 그런 사회는 우리가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 연기법으로 보나 어느 면으로 보나 본래 내가 아니거든 내 소유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 이 명제만 해결된다면 다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다 해결이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을 바른 가치관과 철학으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 한 줌의 눈을 넣으면 금새 녹아버리듯이 미워하는 사람도 단체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갈등이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해결하기 참 쉬운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 단체를 내세우고 자기 소유를 내세우고 이렇게 되면 항시 서로 다투고 싸우고 갈등하고 반목하고 그렇게 됩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살아 갈 때는 현실에 적응해서 여러 가지로 판단도 필요하겠습니다만 가장 기본적인 판단의 기준은 우주 만유가 본래로 하나의 생명체라는 곳에 두어야 합니다. 본래로 하나인 그 자리는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 영생불멸한 생명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본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입니다.


기독교의 본질도 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주는 하나님뿐인 것입니다. 우주는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다만 이름만 다를 뿐인데 우리 중생이 잘 못 다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상대 유한적인 그런 속물로 보기 때문에 바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는 현상적인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나요 남이요, 또는 좋다 궂다 밉다 사랑한다 하지만 진실로 우리 마음을 열어서 본질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몸, 하나의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수행을 하여야 합니다.


성자의 생활은 언제나 한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어느 성자가 자기 몸은 아끼고 남을 함부로 하는 성자가 있었습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 성자의 가르침은 바로 감로수같이 가장 맛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을 영생불멸로 이끄는 최상의 맛입니다.


영생불멸한 생명자리인 진여불성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언제나 우리 몸도 마음도 환희에 넘쳐서 몸에 거북한 것도 그냥 다 풀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핵() 위에 이루어진 하나의 거죽에 불과해 놓아서 우리 마음으로 성자의 길을 온전히 따르면 신비로운 힘으로 해서 우리 몸에 웬만큼 거북한 것은 다 풀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호흡법을 공부하든 또는 다른 공부를 하든, 최근 유행하는 기공을 공부하든 다 바른 가치관으로 하여야 공부가 빨리 됩니다. 무슨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


정치를 하거나 사회운동을 하던지 꼭 제가 말씀드린 가치관, 석가모니가 말한 것이고, 예수가 말한 것이고, 공자가 말한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모두 다 하나의 몸,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철학으로 모든 것을 연역해서 생각하셔서 꼭 금생에 본래 태어난 그 자리, 내 생명의 본래 자리를 가까이 하다가 종당에는 하나가 되어버리는 이것이 우리 생명 가치의 가장 소중한 목적입니다.


이렇게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환희광불(歡喜光佛)! 부처님의 염원은 다 행복으로 모든 지혜로 또는 능력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자비도 충만하고 행복도 충만하고 지혜도 충만한 자리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 바탕이고 우리 생명의 본질이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여러분들이 하시는 공부,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으로 정진을 하셔서 꼭 금생에 본래 면목을 성취하셔서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