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수행한담-청화큰스님(성륜사 조실)

通達無我法者 2007. 3. 25. 13:05

 

 

현대불교 115호



수행한담-청화스님(성륜사 조실)



“삼매로 습기 녹여야 무량공덕 나옵니다”

‘나’라는 관념 때문에 相이 생기고 삶이 무거워 지니 매일 업장 녹이다보면 치우침 없이 다 포함된 자리 이룹니다.

재가불자도 한 달에 여섯 날은 출가한 셈치고 오계 수행하세요. 몸도 정신도 맑아 환희심 얻습니다.

“나도 과연 성불할 수 있을까”

선근 깊지 못하면 자꾸 후퇴합니다. 성자와 나의 근본성품 같으니 ‘얼마만큼 닦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론 없는 실천은 맹종…‘안심법문’ 따르세요”

번뇌의 뿌리 뽑히면 중도실상 생명 체험

  


양력 

· 1923년 生

· 1946년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

· 40여년을 토굴수행 장좌불와 정진

· 곡성 태안사 조실 역임

· 95년부터 美 팜스프링 금강선원 주석

  


내가 3년결사를 발원하고 미국에 건너와 이렇게 1년여 살고 있자니 많은 사람들이 물어요. 어떻게 미국에 오게됐냐는 겁니다. 달마스님께서는 공부가 다 성취된 뒤에 동토지방을 제도할 원력으로 동쪽으로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이도 많고 미숙한 채로 미국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아직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했다는 판단이 서고, 미국의 각국 불교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도 안되어 있는 것도 같아서 융합적인 차원에서 누군가가 조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또한 미국은 선진국으로 세계의 석학들이 많이 모이고 문화교류가 활발한 곳이기 때문에 불교의 진면목을 세계에 알리는데 효과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곳 미국도 그렇고 어느 사회나 개인에게 있어서 발생하기 쉬운 갈등과 분열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들은 모두가 실체가 아닙니다. 자기 몸뚱이나 관념 심지어 대상물 모두가 실제가 아닙니다. <반야심경>이 가르치는 대로 ‘오온개공(五溫皆空)’입니다. 오온에는 인간이라든가 모든 것이 다 들어가는데, 오온은 본래로 실존이 아니요 가상인 것이고 허망상인 것이기 때문에 공()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생이 인식하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요, 잘못 보는 것으로서 실재가 아닙니다. 진리는 반야바라밀인 중도실상(中道實相)입니다. 그래서 중도실상의 생명관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대화도 하고 행동해야 분열 갈등이 없어집니다. 또 모든 일을 진리의 조명 아래서 올바르게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도실상은 어디에도 안 치우치고 모두가 다 포함된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듯이 허망 무상한 상만 있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텅 비어서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모두를 다 초월한 자리이며, 모든 성자들이 체험하는 참다운 생명자리입니다. 일체 가상을 떠나서 인생과 우주의 본래 생명의 실상자리가 바로 중도실상 자리입니다.


중도실상 자리를 아직 체험하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사실상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도저히 자기 분상에서 납득이 안되니까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수희찬탄(隨喜讚嘆)하는 마음으로  바로 수용하는 마음이 되면 납득하게 됩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은 가장 정직하고 총명하고 바로 깨달은 분인데 그 분들이 옳다고 했으니 그대로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전폭적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염불이나 주력이나 화두나 자신의 근기에 맞추어 다른 생각을 않고서 지속적으로 공부하십시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하루하루 한 만큼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중도실상의 경계가 점차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철학을 좋아했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동 서양 철학서적을 이것저것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넘보면서 물론 불교서적을 만났지요. 경전도 보고 불교입문서도 보면서 나름대로 불교의 윤곽이랄까요, 겉을 잡았었습니다. 그 후 우리 집안의 6촌 동생이 절에 있으면서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그 즉시 “아, 그러느냐?” 하면서 따라 나섰습니다.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수양도 좀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워낙 위대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그냥 미련 없이 그대로 출가했습니다. 바로 은사이신 금타스님이셨습니다. 그 어른은 실로 모든 점에서 자기 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으셔서 진정 진리의 불덩이 같이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른의 법문에서 제가 기독교나 현대과학에 있어서 막혔던 문제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다 풀리니까요. 오랜 동안의 회의가 풀리니까 젊은 사람으로서는 환희용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수행이 철저하셔서 ‘스님의 방법을 취하면 꼭 성불할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서게 되니 다른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40여년을 은사스님처럼 수행했습니다. 세상에서 얘기하는 일종식하고 장좌불와(長座不臥)의 방식이었지요. 젊어서는 고집을 부리고 장좌불와한다고 했고 근 30년을 토굴생활도 했습니다. 사실상 그렇게 철저한 셈은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원칙을 그렇게 세우고 살았습니다.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면 그렇게 편해요. 그리고 토굴생활을 하다 보니까 혼자 여러 끼니 해 먹기도 귀찮스럽고 하루 한 끼니만 먹으면 몸이 굉장히 가볍습니다. 몸이 가볍다는 것은 그만치 피순환이 잘된다는 것이고 또 피순환이 왕성하니까 병균이 못 침범하겠지요. 사실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끼니 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승가생활에서 아침에 배고플 때는 죽을 먹어도 무방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일종식이지요. 저도 역시 원칙은 지켰으나 어디에 초청되면 애써 대접하는데 안  먹으면 미안스러우니까 더러 먹기도 했습니다.


또 젊어서는 어거지로 상을 내서 잠도 안자고 앉아서 버텼지요. 그러나 지금은 몸뚱이도 쇠약해지고, 이제는 앉으나 서나 공부에 망상도 별로 나올 때가 아니고 해서 될수록 안 눕는 쪽으로 원칙은 세워놓고 고집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피로하면 눕기도 하는 편이기 때문에 장좌불와는 아니지요.


이런 수행이 나에게는 다분히 유익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에 힘을 얻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조금도 몸에 부담이 없고 마음이 절로 고요해지고, 가만히 있으면 있는 만큼 더 맑아지니 말입니다. 혼침도 미처 참지 못하고 망상만 피우고 그럴 때는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니까 지장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철두철미하게 다 바르게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는 나같이 토굴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사람 근기에 따라서 수행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기본적인 출가 수행자의 청규가 오후에는 먹지 말아야 하고, 병자가 아닌 한에는 한 번 일어나면 취침시간까지 앉아서 공부할 것이지 자리에 눕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재가불자들도 적어도 한 달에 여섯 날은 오후불식하라고 권합니다. ‘6재일’이라 해서 한 달 가운데 스스로 정해서 여섯 날은 출가한 셈 치고 생활규범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 날만은 내외간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고기도 안 먹고 허튼 말도 않고 하루 한 끼만 먹고 오로지 부처님 공부만 하라는 것입니다. 하루 한끼만 먹게 되면 사람들이 ‘컨디션’이라고 하는 몸 분위기가 대단히 좋아집니다. 가벼워지는 것이지요. 적게 먹으면 먹는 양에 비해서 체내 흡수가 많아지게 되고 피도 맑아집니다. 많이 먹으면 배설을 많이 하니까 흡수하는 비율은 적어집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은 음식을 안 먹었습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였으니 광명은 불생불멸의 생명이기 때문에 먹을 필요가 없지요. 부처님 말씀에 보면 최초의 인간은 식식(識食)이라, 마음으로 음식을 삼았다는 뜻입니다. 환희심나는 행복(法喜禪悅)을 음식으로 하고, 법()을 음식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법에 대해서 환희심으로 충만하다면 그때는 안 먹어도 마음이 충만하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막히고 남 미워할 때는 필요 없이 자꾸 먹게 되지 않습니까.


은사이신 금타스님은 번뇌를 녹여서 성자가 될 때 중도실상의 생명을 체험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른의 가르침을 잡고 선방에도 몇철 다녔습니다만, 워낙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신 터라 달리 스승을 찾을 생각을 내지 않고 토굴생활을 했습니다. 40대에는 모범적인 선방을 만들어 사람을 길러 보려고 토굴에서 나와봤지만 그것이 잘 안됩니다. 안되는 것은 내 역량 부족도 있고 인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였겠지요. 그래서 다시 토굴로 들어가고 또 나와보고 그러다가 60살 넘어서 온전히 나왔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면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생명자체를 중도실상의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금타스님께서 쓰신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중생의 육안은 번뇌에 때묻은 오염된 육안이기 때문에 금진의 세계를 알려고 할 때는 중생의 욕계번뇌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천안통이 나온다”


욕계번뇌의 뿌리를 뽑으면 천안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직 나도 번뇌의 뿌리가 뽑히려면 천리만리입니다. 평생동안 노력해야지요.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발이 하늘로 뜬다는 말씀이 경론에 있습니다. 전혀 무게를 못 느낀다고  합니다. 실로 무게가 있지 않은 것인데 ‘나’라는 관념, 번뇌 때문에 상()을 내고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관념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는 먼저 길목을 알아야 합니다. 실천에 앞서서 이론이 있어야지 이론 없이 실천만 있으면 맹종이 되는 것이고 빗나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꼭 이론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밝혀 놓으시고 무수한 성자가 탄탄대로를 닦아놓으신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길목도 연구하지 않고서 동서를 헤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게 되어있는 길 환한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억지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상대적인 의심을 해서는 마음만 피곤할 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꿈같다고 했으면 분명히 꿈같다고 보려고 하고 그림자를 그림자로 여겨서 집착을 뿌리치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뿐하고 공부가 잘 풀리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이대로 있다고 인정하고 공부하는 것과 이 몸뚱이가 본래 비었다고 여기며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 정통선을 익혀야만 참다운 선정의 힘을 얻을 수가 있고 도력도 나오는 것입니다. 정통선으로 해서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까지 못나간다면 우리 자성이 갖추고 있는 무량 공덕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우리 자성 가운데는 삼명육통(三明六通)등 무량 공덕이 갖춰져 있는데, 삼매로써 습기를 녹여야 무량공덕이 나옵니다. 불교가 다시 옛날 도인들처럼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서 자기 스스로 불을 내어 자기 몸을 태우는 정도의 도력이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현대 물질사회에 젖은 사람들이 따르게 될 것이고, 제도하기도 쉽습니다.


부처님 육성과도 같은 <아함경>을 보면 여러 군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불교란 결국 기도를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우리 마음이 일념이 되고 업장이 녹아서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불교나 기독교나 바른 깨달음, 바른 계시를 받으려면 꼭 그래야만 합니다.


어느 누구나 성자가 되려면 깊은 삼매에 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이 없이 성자가 되려고 하니까 무리가 생기고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도 과연 성불할 수 있을까’하고 스스로 한계를 의식하며 자신 없어 합니다.

잘못된 생각이지요. 누구나가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고, 위대한 공덕이 있는 성자와 내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불법입니다. 달마조사와 내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겉에 형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성품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지요. 다만 우리가 닦고 안 닦고, 또는 얼마만큼 닦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선근이 깊지 못하면 자꾸만 후퇴합니다. 닦다가도 조금만 피로하면 ‘편히 살 것인데 괜시리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른 스님들은 편하게 승려생활을 잘하는데 무슨 필요로 그렇게 까다롭고 옹색하게 하느냐고 해요. 삼매정진을 무시한다면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제자들 가운데서는 내가 잘 돌봐주고 인자하다고 하면서도 너무 계행이 철저해서 시봉하고 싶어도 스스로 포기하고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해요.

그리고 ‘무애행(無碍行)’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걸림 없네 하면서 짓는 파계는 무애행이 아닙니다. 수행의 적일 뿐입니다. 진정한 무애행은 법기에 끄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계행을 지키고도 걸림이 없는 것, 그것이 무애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