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1.참선(參禪)의 바른 길 - 6)간절한 구도심(求道心)

通達無我法者 2007. 4. 4. 08:29

청화큰스님 법어집/정통선의 향훈 

 


                         간절한 구도심(求道心)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전생에 요법(樂法) 바라문이라, 법을 아주 간

절히 구하는 바라문이셨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불(無佛)시대였습니

다.

   우리는 지금 행복을 느낍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후세에 나와 부처님 법

가운데서 공부를 하니까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과 같은 그런

법이 없다고 하면 그야말로 이와 같이 혼돈무궤도(混沌無軌道)한 때는 참

으로 곤혹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별것이 다 있지 않습니까, 마인드콘트룰(Mind control)이 있고, 무엇

이 있고 해서 굉장히 복잡합니다. 불교 가운데도 여러 가지 행법(行法)이

많이 있습니다.

   저번 불교 종교지를 보니까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한 종파인 창가학회

(創價學會)의 교도 수가, 벌써 한국에서 가입되어 있는 것만 50만이 넘는다

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조직이 강해서 앞으로 더욱 더 교세가 강해지겠지

요.

   이런 혼돈 가운데서 바로 못 잡으면 우리가 공부도 바로 안되고 또 부처

님의 소중한 불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역시 무불시대,

부처님 법이 안 나온 때보다는 훨썩 행복합니다.

   그런데 요법(樂法) 바라문은 이제 부처님 법이 없는 무불시대에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나 요법 바라문이 원래 선근(善根)에 따라서 간절히 도()

를 구하고 싶었단 말입니다. 진리를 구하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오신 분들은 다 과거숙세(宿世) 무수생(無數生)의 선근 때문

에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한 분들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요법 바라문

도 역시, 부처님 법도 없고 참다운 도()가 없어서 10년 이상이나 스승을

찾아 해맸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법을 일러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리고 어느 때나 정도(正道)에는 마구니()가 따릅니다. 깨달아버리면

마구니 역시 정도입니다마는, 깨닫기 전에는 역시 마구니가 따릅니다. 마구

니가 이제 바라문으로, 바라문도 역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마

구니가 바라문 모양으로 변화해 가지고 요법 바라문 앞에 가서

   '그대가 참말로 진리를 구하는가' 하니까

   '그렇다' 고 한단 말입니다.

   '그대가 정말로 그대의 신명(身命)을 바치고서 진리를 구하는가?'

   '그렇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바라문으로 변한 마구니가,

   '그러면은 내가 진리의 한 귀절을 던질테니, 그대가 과연 그대의 피부를

벗겨서 종이를 삼고, 그대의 뼈를 분질러서 붓을 삼고, 그대의 피를 뽑아 먹

을 삼아서 내가 읊는 진리의 게송(偈頌)을, 진리의 귀절을 적을 수가 있는

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법 바라문이

   '그야 쉽다' 고 말하자마자, 자기 피부를 벗겨서 햇볕에 말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조금도 주저할 수 없는 간절한 구도정신이 있었겠지요.

   경()에서 그 대목을 보면, 요법 바라문이 그와 같이 자기 피부를 벗겨서

말리고, 무슨 말이 나오면 곧 적으려고 뼈를 분지르려 하니까, 마즉소멸(

卽消滅)이라, 마구니는 간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구니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틈이 있어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구니가

틈을 엿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틈이 없으면 마구니는 모양을 못 나투

는 것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그때에 저 공중에서 부처님의 낭낭한 음

성이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찬란한 오색구름 가운데서 부처님의 낭낭한 음

성이 무상대법(無上大法)을 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법' 바라문은

그 무상대법을 듣고서 대각(大覺)을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무량중생을 제도한다' 는 서원(誓願)을 가

지고 가행도(加行道)를 지나서 무간도(無間道)를 통과하고, 한사코 해탈도

(解脫道)에 나아가서 승진도(勝進道)라, 그렇게 해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산승(山僧)의 법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