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1장 수증의 제문제] 제1절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 9.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6:36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9.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기독교 신학(神學)도 역시 중세기에는 이른바 번쇄철학(煩鎖哲學)이라, 번쇄하게 흘러 갔습니다. 사실 깨달음이란 것은 이렇게 복잡할 것도 아닌 것이고, 문자나 또는 우리의 지혜 이른바, 분별시비하는 알음알이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인데 한 체계를 세울려고 하면 아주 무미건조하고 난해하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도 역시 수법행(隨法行)이라 하여 하나의 고정적인 법에 따라서 하는 방식도 있고 또는 수신행(隨信行)이라 하여 믿음 따라서 하는 수행 방법도 있습니다. 믿음 따라서 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참 간단 명료합니다.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고 또는 이론적인 체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믿음 따라서 하는 것이 별로 신()이 안 갑니다.

   

우리 인간성 자체가 심리학(心理學)적으로 지() 정() 의() 3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너무 지적(知的)으로 치우치면 정적(情的)인 면이 소외를 받는 것이고 또 정적인 면에 치우치면 지적인 면이 그만치 미흡을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서 정혜균등(定慧均等)으로 공부를 해나가도록 합시다.


저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달마 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순선시대(純禪時代)에 역점을 두고서 자료도 추렸습니다. 순선시대에 의빙(依憑)하여 공부하는 것이, 현대적인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 있어서, 보다 올바른 판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삼매의 이름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달마 스님으로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의 순선시대에 일관되게 말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달마 스님의 이입사행(二入四行)외에 다른 법문은 지금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가사, 관심론(觀心論)같은 것도 그 전에는 달마 관심론이라고 배웠습니다만 근래에 돈황(敦煌 Tunhuang)문서가 발굴된 뒤부터는 신수(神秀) 대사의 저작이라는 고증(考證)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증 자체가 다시 또 번복될는지 모르니까 아주 확정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하여튼 무슨 사건이든 몇 십년만 지나도 바꿔지기도 하는데 하물며, 벌써 천년 세월이 경과할 때는 여러 가지로 오류도 많이 생기고 와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스님의 법문을 말할 때는 중요한 것으로 누구나가 이입사행을 꼭 들고 있습니다.

   

또는 4조 도신(道信 580-651)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 있습니다. 아주 고구정녕(苦口정녕)하니, “어떻게 참선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세밀히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여기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고 또는 5조 홍인(弘忍 602-675)스님의 수심요론(修心要論)에도 마찬가지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조 스님도 돈오돈수만 말씀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는 그렇지 않습니다. 6조 스님 단경의 부촉품(付囑品)에, 부촉품은 어떤 경전이나 후인들한테 부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포괄된 대의를 싣는 것인데, 여기에도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있습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간단하게 말하면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똑같은 뜻입니다. 일상삼매는 혜()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6조 스님의 단경 법문을 보겠습니다.



一相三昧와 一行三昧

師復曰 汝等 若欲成就種智 須達一相三昧一行三昧 若於一切處而不住相 於彼相中 不生憎愛 亦無取捨 不念利益成壤等事 安閑恬靜 虛融澹泊 此名一相三昧 若於一切處 行住坐臥 純一直心 不動道場 眞成淨土 此名一行三昧 若人具二三昧 如地有種 含藏長養 成熟其實 一相一行 亦復如是 我今說法 猶如時雨 普潤大地 汝等佛性 譬諸種子 遇玆첩洽 悉得發生 承吾旨者 決獲菩提 依吾行者 定證妙果 聽吾偈曰 心地含諸種 普雨悉皆萌 頓悟花情已 菩提果自性

-壇經 第十付囑流通-


   

육조단경의 제 10 부촉품인 부촉유통분에, 6조께서 다시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종지(種智)를 성취할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달()할지니라” 종지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말합니다. 부처님 지혜는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가 있는데, 근본지는 견성할 때에 일체존재의 진여불성 자리를 깨닫는 것이고, 후득지란 근본지를 성취한 뒤에 종종 차별의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종지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체종지입니다. “그대들이 만약 모든 종종의 반야 지혜를 얻을려고 하면 마땅히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달()할지니라” 고 6조 스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결론장에다가 부촉하신 뜻을 이 한 구절로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일체처에 처하더라도 상에 머물지 않고, 현상적인 여러 가지 상황, 상중(相中)에 있다 하더라도,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신심명(信心銘)에도 있는 법문 아닙니까마는 원체 법이란 평등하고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는 것인데, 괜히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번뇌가 생기고 오염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취하고 버리지 말 것이며, 이익이 있다든가 이익이 없다든가 또는 성취가 된다든가 허물어진다든가 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고 안온한 것과, 허융담박(虛融澹泊)이라, 조금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주 깨끗하게 밝아지는 경계가 일상삼매라” 고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에 대해서 상()을 물론 내지 않아야 하겠지마는 현실적인 생활에서 상을 또 안 낼 수가 없겠지요. 설사 우리가 상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좋다 궂다든가 취사(取捨)라든가 또는 성취한다든가 실패한다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을 두지 말고서 항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제법이 공한 자리, 반야 지혜를 여의지 않고서 담박하고 안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일상삼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상삼매는 한 말로 말씀드리면 천지 우주가 오직 조금도 차이 없는 하나의 진리 자리가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일상삼매가 못됩니다. 모든 존재를 진여불성 하나의 자리로, 만법을 귀일(歸一)을 시켜버려야 이른바 일상삼매가 됩니다.


“또한 만약 일체처에, 다니나 머무르나 또는 앉으나 누우나 간에 순일직심(純一直心)이 부동도량(不動道場)이면 진실로 정토(淨土)를 이루니라,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말한다.”

순일직심은 일상삼매를 확신하는 순수한 하나의 곧은 마음이요, 도량이라 할 때는 근본적인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일한 직심이 근본적인 체를, 도량을 여의지 않으면 진실로 정토를 이루니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를 닦아서, 행주좌와에서 본체를 안 여읠 때는 현실 그대로 정토를 성취한다는 말이요 이것이 바로 일행삼매라는 말입니다.


“만약 사람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갖추는 것은 마치 땅에다 종자를 뿌리면 대지가 종자를 머금어서 오랫동안 잘 기르고 익혀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일상삼매나 일행삼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불종자(佛種子)를 마음밭에다 심어 놓고 오랫동안 가꾸고 거두어서 상도 안 내고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인 일상삼매의 자리를 안 여읜다면, 종자가 땅에 떨어져서 잘 관리하면 열매를 맺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우리 마음 자리에다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두고서 오랫동안 닦아나갈 때는 일체종지를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설법하는 것은 마치 때에 알맞게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대들의 불성도 비유하면 종자가 비를 만나 충분히 습기나 윤택을 받고 모두 다 싹이 나오듯이 내가 말한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뜻을 받드는 자는 결정코 진여보리(眞如菩提)를 성취하고, 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자는 진실로 부처님의 묘한 과보를 성취한다” 그리고,

“나의 게송을 들으라,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하니, 마음밭에 모든 종자를 머금어서, 보우실개맹(普雨悉皆萌)이라. 두루 비에 적셔 빠짐없이 싹을 낸다. 돈오화정이(頓悟花情已)하니, 문득 이런 뜻을 깨달아서 들뜬 범부의 망정이 이미 다하면, 보리과자성(菩提果自成)이라, 보리 열매가 저절로 성취가 된다”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간략하나마 문헌적으로 돈오점수와 관계된 것에 관해서 인용을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것이 정곡을 찌른 합당한 결어(結語)가 못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 재량하시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