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견도(見道)
見 道
根本佛敎에는 四善根의 最上位인 世第一法의 無間에 無漏의 慧를 得하여 聖諦를 現觀함을 말함.
-解深密經, 智度論, 唯識論, 俱舍論等-
견도(見道)에 대해서는 해심밀경 또는 지도론, 유식론, 구사론 등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지도론은 용수(龍樹 Nagarjuna B.C. 2-3世紀) 보살 소조(所造)인 대지도론으로 대론(大論)이라고 하지요. 유식론, 구사론은 세친(世親 Vasubandhu 4-5世紀頃)보살이 지으셨는데 이런 데서 견도에 대한 말씀이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사선근(四善根)의 최상위를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합니다. 4선근에 대해서는 점차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만, 4선근은 우리 범부가 견도할 때까지 가는 과정을 구분해서 사가행(四加行) 또는 4선근이라 합니다. 이것도 역시 공부인들은 꼭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4선근의 최상위는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제일 높다는 법이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합니다.
세제일법의 무간(無間)에, 세제일법과 견도자리 곧, 깨달은 자리하고 사이가 없는 그런 순간 찰나의 자리에 무루(無漏)의 혜(慧)를 득하여, 때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성체(聖諦)를 현관(現觀)함을 말합니다. 성체는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성체는 바로 여래, 도(道), 또는 열반, 다 같은 뜻이 됩니다. 현관이란 그냥 이치로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진여 불성 곧 생명의 실상을 현전에서 보고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이치로 느껴서, 물리(物理)를 알아서 “아 그렇구나” 하고 의심없이 아는 것은 해오(解悟)라고 하는 것이고, 성체를 현전에서 분명히 깨닫는 것은 현관(現觀)이라 합니다.
곧 4선근의 가장 윗자리인 세제일법에서 그 찰나에 때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성체를 현전에 깨닫는 것이 견도라고 근본불교에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見道…大乘에서는 見道를 菩薩初地로 하고 此地를 得함을 菩薩이 正性離生에 入한다고 한다. 能히 無漏智를 得하여 法界에 達하고 如來家에 生하며 一切萬法이 一味平等한 心性임을 得함. 密敎에서는 三妄執을 여의고 無漏의 淨菩提心이 生하여 出世의 功德을 成就함을 말한다.
-大乘義章-
대승(大乘)에서는 견도(見道)를 화엄경의 십지(十地)에서 나온 보살 초지(初地)로 하고, 이 초지를 얻음을 보살이 정성리생(正性離生)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정성(正性)은 곧 우주의 본성으로 정성이나 성성(聖性)이나 같이 쓰입니다. 리생(離生)이란 이생(異生)인 범부를 떠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를 가리켜서 이생(異生)이라 합니다. 범부는 바로 못보기 때문에 달리 본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분이 볼 때는 여법(如法)히 달리 보지 않기 때문에 여설(如說)이라, 진리 그대로 말하고 모두가 하나의 진리, 평등무차별인데 우리 중생은 그렇게 못보기 때문에 이생이라 합니다.
따라서, 견성하는 것이 바로 정성(正性) 곧 성인 성품을 얻음과 동시에 우리 범부의 이생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범부성(凡夫性)이 남아 있으면 참다운 견성이 못되겠지요.
이 자리는 능히 무루지(無漏智)를, 번뇌에 때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법계(法界)에 달(達)하고, 법계라 하면 한계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 우주가 조금도 무차별인 세계입니다. 이런 법계에 달하고 여래가(如來家)에 생하며, 삼세제불의 경계에 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래(如來)라고 할 때에 우리 환경과 이른바 기세간(器世間)과 여래와 구분하여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불법(佛法)에서는 환경도 바로 생명자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환경도 바로 부처님 자체입니다. 불법은 모두를 다 부처님 생명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일체가 부처님 생명 아님이 없는 불법(佛法)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래가에 생한다고 할 때는 환경 따로 있고 세계 따로 있고 부처님 따로 있는데, 부처님들 세계에 가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인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다 부처뿐이기에 그 부처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래가에 생하여 일체 만법이 일미평등한, 오직 한 맛의 평등한 심성(心性)임을 득(得)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견도(見道)입니다.
밀교(密敎)에서는 견도를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삼망집(三妄執)을 여의고 무루의 정보리심(淨菩提心)이 생하여 출세(出世)의 공덕을 성취함” 이라고 했습니다. 내나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에 따르는 집착을 여의고 때묻지 않은 청정한 보리심을 생하여 출세의 공덕 즉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三界)를 떠난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훑어본다 하더라도 견성하고 견도하고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경에 있는 견성자리와 해심밀경, 지도론 또는 유식론, 구사론에 나와있는 견도라는 자리에서 얻는 성공덕이 차이가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선(禪) 따로 있고 교(敎) 따로 있다고 봐서는 안됩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불법입니다. 다만, 본체를 보다 더 역설하기 위해서, 행주좌와에 본체를 안 여의기 위해서 선(禪)이 있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이 아직은 미혹되어 있기 때문에 상(相)도 해설하고 점차(漸次)도 말하는 데서 일반적인 경(經)의 의의가 있다 하더라도 견도를 말하지 않고 견성을 말하지 않으면은 불법이 안됩니다.
또는 화엄경을 설하고 또는 법화경을 설하고 또는 지도론을 설하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견성을 잘 몰랐겠습니까? 견성과 견도는, 우리가 문자(文字)에 집착하지 않는 한에서는, 조사법이 더 높고 불법은 아래라는 허튼 분별을 않는 경우에서는 똑같습니다.
아, 제 말씀이 너무나 딱딱해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육서(六瑞)라, 여섯 가지로 상서로운 조짐을 보인 것입니다. 지동서(地動瑞)라, 천지가 육종(六種)으로 진동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부처님 경전 가운데 나온 이런 신비로운 말씀을 많이 하니까 더러는 별로 안 좋게 듣는 분도 계십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 불성(佛性) 가운데는 분명히 무량공덕(無量功德)이 갖춰 있는 것인데, 제 스스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나 제가 지금까지 얻은 것은 별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한탄하는 의미와 또는 한사코 꼭 부처님의 무량공덕과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다 얻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불법의 위신력을 말할 뿐입니다.
아무튼 지동서라, 천지 우주가 6종으로 진동한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그냥 상징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사실로 저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화서(雨華瑞)라, 천상의 모든 천인들이 무량대법을 찬탄하는 의미에서 꽃비를 내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삼계(三界)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욕계가 있듯이 색계도 분명히 존재하고 무색계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더러는 불교를 믿는 분 또는 출가사문들 가운데서도 “색계나 무색계나 그런 것은 다 방편으로 내놓은 것이요, 모두가 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분명히 마음속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차원에서도 몽환포영(夢幻泡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본체(本體)는 공(空)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꿈 같이 그림자 같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몸더러 꿈이요 허깨비같이 허망한 것이라고 할 때는 상당히 거부반응을 느낍니다. 그러나 산이나 내나 금이나 다이아몬드나 그런 것이 꿈이요 허깨비라고 말할 때는 자기 존재처럼 거부 반응을 별로 느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대상도 자기 주관도 모두가 다 본래에서 볼 때는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상적인 가상(假相)이 없지는 않습니다. 연(緣)에 따르면 상(相)이 나오는 것이고, 가상이 나타나 있다 하더라도 상(相) 그대로 공중무상(空中無相)이라 상이 실상이 아니라 가상인 것입니다.
아무튼, 부처님께서 대법을 설하실 때는 분명히 천중들이 만다라화(曼陀羅華 mandarava)ㆍ마하만다라화(摩詞曼陀羅華)ㆍ만수사화(曼殊沙華manjusaka)ㆍ마하만수사화(摩詞曼殊沙華)라, 이것이 사종천화(四種天華)라 하여 법화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 찬란한 하늘 꽃을 뿌린다는 말입니다.
또 심희서(心喜瑞)라, 대중이 그런 상서를 보고 모두 환희 용약한다는 것 입니다. 부처님 지혜는 그냥 부처님만 알거나 또는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사람만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까지도 보고 알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주위 환경을 변하게 하는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회상(會上)에 모인 중생들이 천지가 6종으로 진동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장엄스런 것을 훤히 볼 때에 환희심이 안 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심희서(心喜瑞)입니다.
다음 방광서(放光瑞)라, 삼천대천 세계 곧 우주 전체가 비추는 광명을 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실 때의 여섯 가지 상서 가운데 몇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럴 때에는 일반 대중들이 싫증을 내겠습니까, 또는 지루했겠습니까.
이렇게 딱딱한 원리의 말만 하면 참 따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강사(講師)도 아니고 강원 문전도 안 가본 사람인데 이렇게 부처님 경론을 말할 때는 굉장히 주제넘기도 하지요. 제가 한문, 원문을 풀이하는데 더러 오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를 볼 때에 그 뜻이 그 뜻이니까 그런대로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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